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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질 때까지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 해가 져서야 아쉽게 집으로 돌아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노먼 퍼시벌 록웰(Norman Perceval Rockwell, 1894년 2월 3일 - 1978년 11월 8일 )입니다.

 

 

그는 1894년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록웰에게 어릴 적부터 책을 읽어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 록웰은 자신의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아버지를 자주 그리곤 했습니다. 노먼 록웰은 14살 때부터 뉴욕에 있는 여러 미술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아직 학생때였던 16살에 그는 생애 최초로 4장의 크리스카스 카드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해요. 이후 18살에 본격적으로 'Boys' Life'라는 책의 삽화를 그리며 전업 화가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 작가들은 전쟁의 비탄과 비극을 작품에 담았지만 록웰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주로 그립니다. 젊은 시절 파리로 가서 20세기 현대미술운동에 참여하려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이후로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친근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 시민의 대부분이 구독했 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의 표지 그림을 40년 넘게 그렸고요. 한평생 잡지 일러스트를 그리며 살았다는 얘기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XBhpSOMhZmo

 

 

 

1950년대를 지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했졌습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끊임없이 아메리칸드림과 같은 현대 생활의 풍요로움을 다루었고요. 이 흐름 속에  록웰이 주목한  것은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뻥튀기처럼 부를 쌓아 올렸지만, 내면은 허위와 도덕적 해이로 얼룩졌던 시대였습니다. 

 

 

<The Gossips>,1948/Arthive

 

 

 

이른바 입소문이나 가십을 삽화로 묘사한 그의 재능은 말그대로 천재적입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 표정은 놀라움, 당연함, 의구심 등으로 다양하고요. 생생한 표정들로 뜨끔 하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들 모습 같아서 말입니다.  작가는 세상의 뜬소문은 그 소문을 낸 당사자에게 되돌아오고 결국 그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가십'에 나타난 왼쪽 첫 번째 여인과 오른쪽 맨 끝의 여인이 같은 인물인 것도 이를 대변하지요. 상대의 손가락이 결국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돌아온 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이해했을 것 같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님께서 "험담만 하지 않아도 성인 된다."는 말씀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피카소도 훌륭하지만
나도 훌륭하다는말을
누가 한 번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Girl with a Black Eye>,1953/Reddit

 

 

아이 표정이 너무 익살스럽지 않나요. 뭘 하다 멍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터프하지만 건강한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야단을 맞아야 하는 분위기인데 긴장했다기보다 자신의 그럴 수밖에 없는 행동을 당당히 어필할 것 같은 개구쟁이 모습입니다.

 

 

 

 

이 시기에는 광고성 그림과 책의 삽화를 담당하는 소위 "일러스트레이터"는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내고 구입할 만한 작품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대부분은 불행히도 쓰레기가 되어 소각된 작품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지만요.

 

 

노먼 록웰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예술가로  취급하지 않았던 비평가들에게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권, 인종차별 등 조금 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심각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그리고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그림 등을 통해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요.

 

 

  당시에 저평가되었지만, 록웰의 작품을 보고 자란 세대가 문화의 중심이 되자 상황은 반전됩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감독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노먼 록웰의 그림으로 집을 전시장으로 만든 것은 물론, 구입할 때 서로 의논해서 순서를 정할 정도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록웰의 그림들이 이들에겐 영감의 원천인 것이지요.  두 거장은 경제적 자유가 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록웰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002년  기사 하나가 떴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일러스트레이터'노먼 록웰의 도난당한 그림 한 점이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물실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소장자인 스필버그는 '장물'인 줄 알지 못하고 구입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필 버그가 구입한 록웰의 작품은 <러시아 교실>이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러시아 (당시 소련) 학생들의 수업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973년 6월 25일 미 미주리주의 클레이튼 미술관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난 1989년 합법적인 경로로 이 작품을 구입한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 FBI에 수사를 의뢰한 지난주까지 이것이 도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FBI는 전했습니다.  미술품 감정사들과 FBI의 조사 결과 진품으로 판명된 이 작품의 초기 감정가는 약 70만 달러(약 6억 6000만 원)입니다. 공산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흉상이 놓인 교실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이 유화 작품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스필버그 감독의 소유로 남아 있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포함한 40개가 넘는 책, 그리고 달력, 카탈로그, 포스터, 도장, 카드, 잡지 등 많은 작품들이 손상되어 버리거나 없어져버렸지만 록웰은 평생 동안 4000개가 넘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Freedom from want, 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Freedom of worship, Freedom from fear,1943/TIME

 

 

 

 

노먼 록웰의 그림이 더 빛나는 이유는, 그의 붓끝에 담긴 문제 제기에 있습니다.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국회 연설을 듣고, 사회적 문제에 눈을 뜬 록웰은 '네 개의 자유'에 대한 그림을 그려 이슈를 만듭니다.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 집권 당시 1941년 1월 6일 발표한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시한 네 가지의 자유를 말합니다.이다.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의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표현의 자유와 신앙의 지유는 종교, 언론 및 출판의 집회 및 청원의 권리를 규정하는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에 나타나 있습니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2차 세계 대전 기간과 그 이후에 사상적 측면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네 가지 자유 연설의 내용은 대서양헌장과 국제 연합 헌장에 반영되었고요.

 

 

네 가지 자유는 세계 인권 선언에도 반영됩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세계 모든 곳에서 모든 이들이 어느 곳에서나 원하는 방식대로 신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 세계 어는 곳에서나 모든 국가들이 거주민들을 위해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 주도록 하는 경제적 약속을 의미합니다. 세계적인 측면에서 세계 어는 곳에서나 어떠한 국가도 이웃 국가에 물리적인 공격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처음에 미국 정부 소속의 전쟁 정보 사무소(Office of War information)는 네 가지 자유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제공하겠다는 노먼 록웰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미국의 유명 잡지 <더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에 게재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전쟁자금으로 1억 3천만 달러의 후원금이 모집되었고요. 1994년 미국 우편 공사에 의해 우표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노먼 록웰 박물관에 보관도 되어 있고요.

 

 

<우리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Problem We All Live With)>,1964/BYU Magazine

 

 

 

 

 

이후 록웰은 '브라운 판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영감을 받아 또 다른 그림을 남겼는데,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 백악관에도 전시되었던 <우리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 <Problem we all live with(1964)>다.  

 

[브라운 판결]

1950-6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였다.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는 집에서 가까운 백인 초등학교에 입학 불가 판정을 받게 된다. 1마일 거리의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녀야 하자,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유색인종 권리 향상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승리를 얻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판결은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1964년 흑인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민권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다. 

 

깨끗하게 흰 원피스와 곱게 정돈된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경찰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책과 자, 연필 등을 보니 학교에 가고 있는 듯합니다. 소녀의 뒤로는 던져진 토마토가 보이고요. 이는 1960년 루이지애나에 살던 6세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스가 백인들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보완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는 역사적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 소녀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된 소녀라고 합니다. 인종차별주의가 팽배했던 역사적 현장을 탁월한 구도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1963년부터 이후 10년간   미국 잡지 <룩(Look)>의 삽화를 담당했던 록웰은 흑인은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당시 편집 방침에 맞서 브리지스의 등교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표지에 올립니다. 이때부터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민의 권리, 인종차별, 빈곤, 그리고 우주 탐험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며 소시민 곁으로 가까이 오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Jc1YL2DBY

 

 

 

 

 

<집을 떠나며(Breaking Home Ties)>,1954 /위키피디아

 

 

 

<집을 떠나며>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부자 지간'의 시선이 서로 반대방향인 것을 알 수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이미 넋을 빼앗긴 듯 보인다.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의 손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타지로 향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어떻게 ,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한 모습 같기도 하다. 주머니에 튀어나온 아들 마음 같은 차표와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시무룩한 표정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은 어딜 가나 엄마표 마음은 동일한 듯하다. 아랑 곳 없는 아들의 상기된 얼굴이 쉬이 설렘을 가라앉히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Girl at The Mirror>1954/ amazon.com

 

보기만 해도 귀여운 꼬마 숙녀가 거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름 심각한 표정이네. 갖고 놀 던 인형마저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 채 말이다. 무르팍에 올려진 잡지를 보며 어른 흉내를 내고 있나 보다. 머리까지 곱게 땋아 올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예쁜 이 녀석 천천히 어른 되거라. 떨어진 립스틱 쥐 잡아먹은 것처럼 빨갛게 칠하지 말고 , 그냥 그 모습이 그대로 오래 간직하고 있으렴.

 

 

 

 

 

박물관은 998개의 원본 그림과 그림을 포함하여 로크웰의 작품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컬렉션으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Stockbridge에 살았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5월에서 10월까지 일반에게 공개되며 원본 미술 자료, 도서관, 가구 및 개인 용품을 갖추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또한 작업 사진, 편지, 개인 달력, 팬 메일 및 비즈니스 문서를 포함하여 10만 개 이상의 항목으로 구성된 Norman Rockwell Archives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스톡 브리지의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올드 코너 하우스에서 처음 24년을 보냈던 이 박물관은 1993년 Houstationic River Valley가 내려다 보이는 36 에이커 규모의 부지로 이전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Robert A.M. Stem 이 박물관 갤러리 건물을 디자인했습니다. 

 

 

박물관의 위대한 매력 중 하나는 그 위치입니다. 로크웰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미지 중 상당수는 주변 지역 사회와 주민들로부터 수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의 원작을 둘러싸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즐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록웰이 헌정된 진실성으로 그렸던 사람들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현지인들이 알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을 무작정 미화한 화가가 아니라, 권위에 도전하는 신랄한 코드를 그림 곳곳에 숨긴 재기 발랄한 작가입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 , 중산층의 일상생활을 친근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미디어나 통신매체의 발달로 가십거리가 홍수시대를 이루고 있는 세상을 자기답게 풍자해 낸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1977년 '가장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미국의 인물'로 선정된 록웰은 '대통령의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1978년 84세로 스톨 브리지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S-3HZ2JBWk

노먼 록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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