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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는 날씨 촛불을 켜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테이블 램프의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아늑한 공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오늘 찾아 갈 덴마크 화가 Anna Ancher(1859-1935)의 작품이 안성맞춤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실제로 '휘게 (hygge)'라고 불리는 가정적인 아늑함에 전념하는 덴마크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19세기 덴마크 문서에 처음 등장했고 노르웨이에서 유래되어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특힌 "위안"과 "기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비공식적이거나 시간을 강조하지요. 보통 편안한 환경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거나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순간은 만드는 것이 Hygge의 핵심입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소소한 기쁨을 축하하거나 깊은 주제를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지요. 이 개념은 덴마크를 넘어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여러 문화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 간의 따뜻한 관계와 삶의 소소한 기쁨을 중시하는 문화적 개념으로 말입니다. 

 

 

 

 

 

1870년경 점점 더 많은 스칸디나비아(덴마크, 핀란드,노르웨이, 스웨덴)의 화가들이 다각적인 예술 현장이 있는 현대 대도시인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레옹 보나드 (Leon Bonnat), 줄리앙 아카데미 (Academie Julian )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 Academie Colarossi)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장 레옹 제롬 Jean-Leon Gerome 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Leon Bonnat(1833-1922) 는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초상화 화가이자 교수입니다. 그는 스페인에서 Federici Madrazo에게 사사받고, 파리에서는 Leon Cogniet에게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스페인 바로크 예술의 영향을 받은 종교화였으며, 1875년부터 시작된 초상화 연작이 그의 후반기 작업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약 200개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들은 사진처럼 정확한 드래프트와 조화로운  색조로 유명합니다. 그는 Victor Hugo, Hippolyte Taine, Louis Pasteur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을 주제로 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888년, Bonnat 은 Ecole des Beaus-Arts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05년에 이 학교의 수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Thomas Eakins, Gustave Caillebotte, Henri de Roulouse-Lautred 와 같은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의 학습자들에게 표현의 자유와 실행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스페인 방식의 화법을 소개하여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자연주의적 접근과 세부 묘사에 대한 과감함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 특히 그 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Academie Julian은 1867년에 로돌프 쥴리안 ( Rodolphe Julian)에 의해 파리에서 설립된 사립 미술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예술 교육을 위한 중요한 대안 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여성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곳 학생들이 에콜 데 보즈 아츠(  Ecole des Beaux-Arts)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며, 가장 인기 있는 예술 전시회인 파리 살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 예술학교는 남녀 구분 없이 학생들을 모집하였고, 1880년부터는 여성도 살아 있는 남성 모델을 그릴 수 있는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은 당시에 많은 여성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네(Monet), 마티스(Matisse)와 같은 여러 저명한 예술가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예술적 기교뿐만 아니라 그들으 삶을 위한 독특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며,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듣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여름이 오고 파리의 사립학교 수업이 중단되자 예술가들은 도시를 떠났습니다. 브르타뉴 해안은 특히 그림 그리기로 유명했지요. 1880년대에 퐁텐블로 숲 옆의 그레쉬르루앙(Grez sur loing)에는 스웨덴 예술가들의 화가마을이 있었습니다. '이케아'에 영감을 준 스웨덴의 화가 '칼 라르손(Carl Larsson)'이 머물렀던 마을로도 유명하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Ztr2MapXwIs

 

 

 

 

머지 않아 예술가들은 화가 마을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칸디나비아로 가져갔습니다. 가장 유명한 북부의 화가마을은 덴마크의 스카겐에 있습니다. 많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화가들이 매년 여름 그곳으로 돌아와 오래된 친구들과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멋진 북극광 속에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죠.

 

 

 


 

 

 

Anna Ancher: Sunlight in the Blue Room( 할머니 방에 있는 딸 헬가 앙케르), 1891/wikipedia

 

 

 

 

조용히 문을 열고 당신의 푸른 방을 들어섭니다. 새로운 빛이 아른거리는 푸른 방입니다. 창문을 통해 떨어진 빛이 벽에 아른거리는 햇살의 아련함을 보여줍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푸른 방안의 햇살은 화가 아나 (Anna)의 딸 헬가 앙케르양이 할머니의 푸른 방에서 코바늘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생활, 일상적인 주제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방안에 출렁이는 빛의 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한 줄거리나 갈등 대신 창을 통해 아련하게 흐르는 빛, 푸른색 음영과 아늑한 평온함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그림은 여성 화가 아나 앙케르(Anna Ancher, 1859-1935)의 가장 매혹적인 걸작 중 하나입니다.

 

 

 

 

 

Anna Ancher는 실내 조명과 색상의 여주인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의 감성과 재능 있는 색채는 충만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캔버스에서 그녀는 햇빛의 대비와 화분에 심은 식물의 실루엣과 벽과 바닥의 가로로 깃들인 빛을 푸른 방으로 빌려옵니다.  그녀의 색 구성표는 벽과 덮개의 대비되는 파란색과 커튼의 노란색을 기반으로 하며 창가에 앉아 있느 소녀의 파란색 작업복과 금발 머리에서 복제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Anna Ancher with Helga in the Gardenby Michael Ancher, 1985/ Google Arts & Culture

 

 

 

 

남편 마이클 앙커는 아내인 안나 앙커와 딸 헬가를 정원 배경 속에 묘사하여 친밀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구성은 두 인물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표정과 제스처를 통해 그들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아마도 다채로운 꽃과 푸르름으로 가득한 정원은 장면의 따뜻함을 한층 부각시키며 관람자를 그들의 평화로운 세계로 초대합니다. 

 

 

 


 

 

 

 

그녀가 여성이 전무하던 덴마크 미술화단으로 불려 나온 것은 1870년대 후반부터 여름이 되면 덴마크 최북단 스카겐 마을로 모인 스칸디나비아 예술가 그룹 때문이었습니다. 스카겐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 지역 환경 및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서 프랑스 바르비종( Barbizon)미술 운동파와 같이 덴마크 여름 미술 캠프 목적지였습니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화풍으로,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하여 풍경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바르비종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색채와 빛의 효과를 중시했습니다. 인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운동의 화가들은 도시의 인공적이고 복잡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연을 탐험하며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연 명소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술 경향과는 다는 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장 프랑수아 밀레, 테오도르 루소, 그리고 카미유 코로 등이 있습니다. 이들 화가는 각각의 개인적인 스타일로 자연을 그리면서, 풍경 화가로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습니다. 특히 밀레는 농민들의 일상 생활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담아냈습니다. 

 

 

 

화가들은 왕립 덴마크 미술 아카데미와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엄격한 전통에서 벗어나 훌훌 벗고 스카겐의 브뢴둠스 호텔에서 모여 친교를 나누며 파리에서 배운 최신 트렌드를 토론하고 워크숍을 벌였습니다.  그 미술 운동 틈 사이에 그곳 호텔의 어린 딸 아나(Anna)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덤으로 인심 좋게 끼워준 어린 '아나(Anna)'가 처음 그 모임에 초대될 때에는 그곳에 모였던 기라성 같은 화가들은, 그녀가 21세기에 그들 모두를 능가하고 추월하는 빛나는 이름이 될 것임을 예감하는 사람은 , '결코 '없었습니다. 

 

 

 

 

햇살의 아롱거림이 파리의 인상파 기분이 나눈 스카겐에서 건배를 , 여름철이면 스카겐에 온 화가들이 브뢰눔스 호텔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녀도 엉겹결에 그 모임을 계기로  미술에 입문하게 됩니다. 

 

 

코펜하겐 빌헬름 퀸(Vilhelm Kyhn )미술대학에서 3년 동안 회화를 배웠으며, 프랑스 파리로 가 마리 크뢰위에르 (Marie Kroyer )와 함께 피에르 퓌뷔 드 샤반느 (Pierre Puvis de Chavannes )의 화실에서 회화를 배웠습니다. 덴마크로 돌아와 1880년에는 스카겐에서 활동하던 지도자격 화가인 미카엘 앙케르 (Michael Ancher,1849-1927 ) 와 결혼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1883년에는 딸인 헬가 앙케르 (Helga Ancher, 1883-1964)를 낳습니다.

 

 

 

 

 

 

 

 

Anna Ancher, self portrait, 1877-78/wikimedia commons

 

 

 

 

안나 앙케(Anna Ancher, 1859-1935)는 스카겐에서 태어난 유일한 화가입니다. 그녀는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의 예술가 마을 ( Art Colony)인 스카겐 화가들의 유일한 멤버로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Ancher 는 방문 예술가의 작품과 토론을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여성으로서 앙케(Ancher)는 코펜하겐의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875년부터 Ancher는 덴마크의 풍경화가인 빌헬름 킨 Vilhelm Kyhn(1819-1903)이 운영하는 코펜하겐의 사립 미술학교에 3년 동안 드로잉을 공부하는 동안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자연광에서 다양한 색상의 상호 작용을 관찰하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파리의 유명화가인 피에르 샤반느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로부터 드로잉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칼 매드슨 ( Karl Madsen)과 미래의 남편인 마이클 앙케(Michael Ancher)를 포함하여 스카겐을 방문한 화가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가족의 지원과 마이클과 안나의 직업적 성공에 따른 완화된 재정 덕분에  앙케 는 1883년 부부의 딸 Helga가 태어난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 그룹에서  덴마크에서 온 안나 앙케와 마이클 앙케 , 페데르 세브린 크로이어, 마리 크로이어, 홀거 드라크만, 칼 매드슨, 로리츠 턱센, 그리고 스웨덴에서 온 오스카 비요르크와 요한 크라우텐, 크리스티안 크로그와 아일리프 페테르센이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도 집단으로 안나 앙케의 아버지가 주인인 브뢴둠 호텔에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Skagen/ EnjoyNordjylland

 

 

 

 

 

Skagen은 덴마크 최북단의 도시입니다. 덴마크 정상에 위치한 스카겐(Skagen)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많은 빛과 끝없는 전망이 있는 그림 같은 장소이지요.  "좁은 곶"을 의미하는 스카겐은 바다가 둘러쌓여 있어 지형의 모양이 바뀌는 곳입니다. 이 환경에는 자연에 마법 같은 특성이 있으며, 스카겐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찬란한 태양과 바다의 빛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소입니다. 

 

 

스카겐 항구는 덴마크의 주요 어항이며 관광 산업이 번성하여 매년 200만명이 방문하는 장소입니다.  이 이름은 원래 반도에 적용되었지만 지금은 마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곳은 중세시대에 청어산업으로 유명한 어촌 마을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다 경치 ( seascape), 어부 ( Fisherman), 저녁 놀 (Twilight) 덕분에 19세기 말에는 현재 스카겐 화가( Skagen Paingters)로 알려진 인상파 화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Skagen map/ViaMichelin

 

 

https://www.youtube.com/watch?v=S_yISfM6mJ8

 

 

 

 

 


 

 

여류화가인 안나 앙케(Anna Ancher)는 아버지가 주인인 브뢴둠 호텔이었던 스카겐에서 자랐습니다. 1849년에 화가인 미카엘 앙케(Michael Ancher 1827-1880)와 결혼하면서, 부부는 '스카겐 화가들 Skagen Painters'의 커뮤니티 중심에 자리 잡은 스카겐 건물인 '앙케 하우스 (Anchers Hus)에 정착하게 됩니다. 부부가 유명한 스카켄의 인상파 화가인 셈이지요.

 

 

 

 

안나 앙케의 작품 중에 많은 부분이 집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부부는 1913년에 스튜디오 별관을 추가하여 평생동안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꾸몄습니다.  앙케는 현재 덴마크에서 중요한 화가로 유명하며 덴마크 지폐에도 함께 등장하고 있고요. 

 

 

 

 

 

 

Anchers Hus in Skagen/wikipedia

 

 

 

그녀 사후인 1967년에는 아나 앙케르-미카엘 앙케르 부부가 거주하던 저택은 기념 미술관 앙케르 하우스 (The Ancher house) 로 개조되었습니다. 이 미술관에는 아나와 남편 미카엘 앙케, 페더 새버린 크뢰이어 (Peder Severin Kroyer) 를 위사한 덴마크, 스웨덴, 북구의 '스카겐 미술 그룹 화가 (Skagen Painters)들 작품이 집안 이곳 저곳에 많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Anchers Hus interior

 

 

 

https://www.youtube.com/watch?v=4QwvMNpO07A

 

 

 

Anchers Hus, Skagens Kunstmuseer/Flickr

 

 

 

 

 

 


 

 

 

Hip,Hip, Hurrah!, 1888/ Peder Severin Kroyer, Gothenburg Museum of Art/wikipedia

 

 

 

 

 

매년 여름이면 화가들이 스카겐에 모여  결의를 다지던 파티 모습입니다. Anna와 그의 딸 헬가는 어디에 있을까요?  '달빛의 화가' 페더 새버린 크뢰이어( Peder Severin Kroyer )가 그린 작품속에 5살짜리 꼬맹이를 찾아보세요. 그녀가 속했던 스카겐 화가 그룹은 1870년대 후반부터 덴마크 유틀란트 (Jutland)반도 최북단 어촌 마을 스카겐 에서 매년 여름이면 모여 현지 어부들과 함께 축하 행사를 하며 그림을 함 께 그리던 화가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지 브뢴둠 여관 에서 매년 여름이면 모였는데, 그 호텔 주인 딸이 아나 크리스티네 앙케르 입니다.  운명적으로 그림붓을 들게 된 그녀는 스카겐 미술 그룹에 유일한 여성 참가자였습니다. 그녀의 딸 헬가 역시 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사촌인 마르타 묄러( Martha Moller)의 뒷모습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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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Ancher 는 프랑스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상을 거부하고 대신 "현실"을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이 노력은 예술과 문학은 스칸디나비아 운동인 ,현대의 돌파구(Modern Breakthrough)의 일부였습니다. 이 운동 (덴마크어: Det Moderne Gennembrud)은 19세기 말에 낭만주의를 대체한 스칸디나비아의 자연주의와 토론 문학의 강력한 운동의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특히 Ancher 는 1885년과 1888년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살펴 본 인상파 작품의 영향을 보여주면서 캔버스에 빛의 덧없는 효과를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와 장 밥 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 Jean- Baptiste-Simeon Chardin)을 연상시키는 소규모 인테리어 장면을 주로 그렸다.

 

Johannes Vermeer(1632--1675)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로, 주로 중산층의 일상 생활을 그린 실내 장면으로 유명한 예술가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와 바로크 양식에 속하는 그의 작품은 미세한 디테일과 빛의 마스터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Vermeer는 메끄럽고 정밀한 방식으로 빛을 사용하여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일상적인 주제를 그리고 있으며, 미적 균형과 공간적 질서가 특징입니다. 또한 , 그가 사용한 비싼 색소, 특히 울트라 마린 등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색감을 부여했습니다. 생전에 성공적인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작품 역시 거의 알려지지 못했고요. 그러나 19세기에 재발견되었고, 이후 그의 스타일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대표작으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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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20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혔졌던 화가입니다. 그러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 당시 시대상황,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장르화에 주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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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Baptiste-Simeon Chardin(1699-1779)은 정물화와 가족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친밀한 사실주의와 고요한 분위기, 그리고 빛의 사용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단순한 물건들로 구성되며, 동일한 작품의 여러 버전이 존재합니다. 그의 경력은 18세기 프랑스 미술에서 중요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Louis XV에게도 소개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프랑스 및 유럽 전역의 부유한 수집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Chardin의 말년은 여러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1767년에 자살하고, 대중의 미술 취향이 변화함에 따라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시력도 점점 악화되었고요. 그는 파스텔을 사용한 작품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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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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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겐의 돌아온 Ancher의 눈은 바느질과 뜨개질을 하는 가족, 교회의 여성, 조용하고 고요한 내부 장면에 초점을 맞춰가기 시작합니다. 

 

 

 

 

 

 

 

Young girl in front of a lighted lamp,1887 /Google Arts&Culture

 

 

 

 

 

안방의 따뜻한 조명을 배경으로 한 젊은 소녀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소녀는 램프의 아련한 불빛 앞에 서 있으며, 그녀의 표정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합니다. 따뜻한 색조와 섬세한 브러시 스트로크는 소녀의 내면 세계를 더욱 강조합니다. 조명의 사용은 그림에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하고, 소녀의 모습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작품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 성장과  성찰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소녀는 가정의 안전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램프는 지식이나 깨달음을 상징하며, 그녀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전망을 암시합니다.  Ancher 는 이 그림을 통해 여성의 일상적인 삶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보다 깊이 있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A Blind Woman in Her Room, 1885/ CutlerMiles Art Gallery

 

 

 

 

 

 

 

 

Anna Ancher  가 그녀의 실내에서 재현하는 가장 빈번한 여성 인물은 거의 항상 일종의 바느질 작업이나 주의를 요하는 다른 종류의 내향적인 활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맹인 여성의 사진인데, 그 사진에서는 주의가 영구적인 내향성으로 전환되어 독서나 바느질과 같은 어떤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태로 전환됩니다. 여성들은 남은 감각을 주변 세계로 향하게 할 수 있지만 맹인은 더 이상 세상이나 자신이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Anna Ancher 는 1880년대 초 맹인 여성 Ane Chrestense Nielsdatter 를 여러 번 그리고 그렸습니다. 

 

 

 

 

1882년의 그림에서 Anna Ancher는 어두운 배경에 앉아 눈을 감고 손을 접은 Ane의 옆 모습을 묘사하여 창백한 얼굴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빛은 그림 외부의 광원에서 전면에서 모델을 비춥니다. 1885년 그림에서 맹인 여성은 뒷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고 오른쪽 창으로 햇빛이 들어 옵니다. 맹인 여성은 눈을 감고 한 팔은 탁자 위에 , 다른 한 팔은 무릎에 얹고 있고요. Anna Ancher 는 여러 그림에 구성을 실험했으며 Ane 이 그림의 전면에 있는 의자에 놓여 있고 그녀가 3/4옆모습으로 보이는 Blue Ane의 또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햇빛을 볼 수 없지만 창문으로 들어오 몸에 닿는 빛의 따뜻함을 감지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맹인 여성의 경우 Anna Ancher 의 다른 많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 내향적 상태가 신체적 상태로 변형되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시각적 인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요. 1900년경 부터 화가가 내향적인 인물을 묘사한 여러 그림이 있으며, 이러한 모티프는 시각적 프로세스 작업에 큰 초점을 맞추는 동안 엄청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에 생겨났습니다. 

 


 

 

 

 

The maid in the Kitchen, 1886/Cutler Miles Art Gallery

 

 

 

 

 

 

 

주방에서 알하는 하녀를 묘사하고 있으며, 주방의 따뜻한 색조와 자연광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앤커는 이러한 평범한 장면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집안일을 수행하는 하녀의 모습 속에서 그 당시 덴마크 사회의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  작품에는 강렬한 색감과 빛의 효과가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앤커가 자연을 바라보고 색을 관찰하는 데 힘쓴 결과입니다. 그녀는 주방의 세세한 디테일과 조명 효과를 통해, 관람객이 실제 주방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Little girl with flower, 1885, Skagens Kunstmuseer/ Wikimedia Commons

 

 

 

 

 

 

 

그녀의 특징인 빛과 색상, 단순성 및 풍경을 잘 표현한 예술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 작은 소녀가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녀의 인상주의적 기법이 돋보입니다. 이 작품은 빛의 사용과 색상의 조화를 통해 단순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소녀는 고유한 정서를 표현하며,꽃은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쥐어져 있습니다. Ancher 는 감정과  고요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작업으로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Sewing Fisherman's Wife, 1890/ Obelisk Art History

 

 

 

 

어부의 아내가 바느질을 합니다. 재봉질을 막 끝내고 마무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은 고단하겠지만 빛의 눈부심이 있어서 일까요? 여인의 일상이 종교적 경건함으로 다가옵니다. 

 

 

 

바느질하는 어부의 아내, 여전히 평화로운 방안의 빛의 눈부심, 아나 앙케르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고향 스카겐의 특별한 주제들인 어부 가족, 어촌의 호밀밭 수확기 등 , 화려한 여름빛과 색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 그녀의 작업들은 놀라운 현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편을 포함한 대부분의 남성 동료를 망라하여 시대를 초월한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A Young Girl Plaiting her Hair, 1901, Statems Museum for Kunst/wikipedia

 

 

 

 이 작품은 한 젊은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땋고 있는 모습을 그림 것입니다. 소녀의 얼굴에는 집중과 순수함이 깃들어 있으며, 그녀의 행동은 일상적인 생활의 한 장면을 나타냅니다. Ancher 는 이러한 작은 순간들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Anna Ancher 는 색상과 빛을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따뜻한 색조와 부드러운 빛을 사용하여 소녀의 피부와 머리 색상을 강조합니다. 배경의 부드러운 푸른색 조화는  소녀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화면은 관람객에게 감정적으로 깊은 연결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ancher 의 작품은 그녀가 단순한 풍경화가가 아닌,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깊이 있는 화가임을 잘 보여줍니다. 

 

 

 

 


 

 

 

interior with The Painter's Daughter Helga Sewing, 1890/ Wikimdeia Commons

 

 

 

 

 

이 작품은 그녀의 딸인 헬가 앵커(Helga Ancher)를 주제로 하여, 따뜻한 실내에서 소박하게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색채의 사용과 부드러운 빛의 표현이 인상적이며, 앵커의 특유의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이 그림은 헬가 앵커가 그려진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 그녀의 가족과 일상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Michael Ancher: Self Prtrait with Anna and Helga, 1990/wikipedia

 

 

 

브뢰눔스 호텔의 고객이었다가, Anna의 남편이자 Helga 의 아버지인 남편 미카엘 안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스물한 살이던 1880년에 그녀는 스카겐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멤버 중 한 명이던 미카엘 앙케와 결혼했습니다.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스카겐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부모님이나, 남편으로 만난 미카엘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미술 세계에 빠져 들었습니다. 모든 스카겐 그룹 동인들은 너도나도 스카겐의 어촌의 영웅적인 어부들모습이나 풍속을 풍성하게 그렸지만, 아나는 달랐습니다. 주로 친구와 가족의 초상화나 실내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미술학교 주변에 여자는 얼씬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변혁의 시기여서 사설 학교부터 여성이 입학하기 시작해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Anna Ancher를 코펜하겐에 있는 미술 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 있는  피에르 드 샤반느( Pierre Puvis de Chavannes)의 아틀리에에서 선진 미술 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이란 집안에서 나서지 말아야 한다던 시대적 통념과 관습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나 안케르( Anna Ancher, 1859-1935) 를 코펜하겐에 있는 빌헬름 킨 Vilhelm kyhn College  미술 학교로 보내 3년 동안 드로잉을 공부하도록 밀어주었고, 스카겐의 여름 캠프에 온 동료와 결혼할 피에르  뷔비스 드 샤반느 (Pierre Puvis de Chavannes)의 파리의 화가 아틀리에로 보내 그곳에서 미술 수업을 하도록 적극 후원했습니다.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the Innkeeper Erik Brondum, 1888, 파스텔, 앙케르 하우스 미술관 소장/Alamy

 

 

 

푸른 방에 햇살이 부서집니다. 부서져 날리는 빛을 파스텔로 그렸습니더, 화가는 이 푸른 방에서 아버지 에리크 브뢰눔 (Erik Brondum) 의 초상화를 딱 한 작품 그렸습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1890년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A Funeral, 1891/ Obelisk Art History

 

 

 

 

리얼리즘 기반의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고인의 장례식이라는 엄숙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조용한 그러나 고인을 보내는 마음은 안타깝고 따뜻한 마음 한 자락이 창으로 들어 온 빛을 통해 벽면은 복숭아 빛으로 물들입니다.

 

 

작품의 구성은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대각선 구성이 관람객의 시선을 인물 그룹으로 안내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장례식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관객이 이 장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작품은 제한된 팔레트를 사용하여 회색, 갈색 , 검정색의 음영이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더욱 깊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인물들의 의복과 모자에는 작은 색상의 터치가 포함되어 있어 이미지에 생명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앵커는 "나이프 페인팅" 기법을 사용하여 장면의 차갑고도 고요한 느낌을 강조합니다. 안나 앵커는 관람객들이 인물들과 직접적인 눈맞춤을 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작품 속 공간을 자유롭게 탐험하고 독립적인 심리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장면에 무관심하게  배어들어 주어진 감정과 분위기에 몰입할 수 있게합니다. 

 

 


 

 

A Young Girl Plucking a Swan, 1900/ Wikimedia Commons

 

 

 

 

 

 

주로 오일 페인팅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지역적 주제와 장르화 스타일을 반영하며, 자연광의 사용과 색채의 대담한 선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스카겐이라는 어촌 지역에서 자란 세밀한 자연 색채와 주제를 통합한 작품으로 주목받습니다. 그녀는 자연광을 관찰하는 데 탁월하고, 배경과 주제를 단순화하며 그림의 그림자와 반사된 빛의 통합에도 실험적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녀의 작품에도 드러나며,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작품은 젊은 소녀가 백조의  털을 뽑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모티프이기도 하며, 앤커는 자신의 경력 전반에 걸쳐 이러한 주베를 탐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녀는 집중한 표정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유화와 파스텔을 사용하여 풍부한 질감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작품에서 피사체의 느낌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그녀의 회화는 개성 있는 색감과 디테일의 조화로 관람객의 눈길을 끌며,자연광과 그림자 효과를 잘 활용하여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은 19세기 덴마크의 농촌 생활과 여성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녀의 그림 <Grief>(1902) 에서 우리는 그녀가 상징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Grief, 1902, Skagens Museum/Google Art&Culture

 

 

 

 

이 그림은 슬픔에 잠긴 여성들의 초상을 담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나체의 여인이 등장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두 인물들은 앉아 있고 머리를 숙인 채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자세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와 표정은 깊은 슬픔과 비통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나 앵커( Anna Ancher, 1859-1935)의 빛과 색채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높아진 사실감과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Grief"는 덴마크 사실주의 회화에서 엔커의 기여를 대표하는 중요한 예로 간주되는 작품입니다.  예술사에서 슬픔을 표현한 가장 강력하고 감정적으로 울리는 작품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용된 색상과 빛의 조화는 이 작품의 감정적 효과를 더욱 강조하며, 관람객이 슬픔의 본질을 느끼게 합니다. "Grief"는 단순한 초상을 넘어 감정의 복잡함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앤커의 "Grief"는 그 깊은 의미와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예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전시회와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Harvest Time, 1901/wikipedia

 

 

 

 

 

 

 

 

Harvesters,1905/wikipedia

 

 

 

 

 

 마치 금발이 나부끼듯 호밀밭 사이로 빛이 부서지며 출렁입니다. 빛이 부서지고 서로 간섭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요. 이 그림을 보면 안나 앙케르가 왜 스카겐의 선배들을 능가하는 북유럽 인상파 최고의 화가로 찬사를 받는 지 알 것 같습니다. 

 

 

 

 

 

그녀만의 독보적인 색감과 컬러링을 창조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한 화가였습니다. 실내에서나 실외에서나 오로지 자연광에서 찾는 다양한 색상과 미술의 상호 작용을 관찰하는 선구자였다고 할까요? 인물이던 ,실내던 ,자연이든, 그녀는 위대한 컬러리스트였습니다.

 

 

 

그녀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덴마크 북부 스카겐의 빛과 캐릭터, 그리고 성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 주변의 고향의 빛과 색상에 대한 특별한 탐구 능력 덕분에 그녀의 예술은 과장 없이 빛나 보입니다. 

 

 

 


 

Portrait of Ane Hedvig Brondum , 1893/Alamy

 

 

 

 

67세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파란 벽은 어머니의 방이고 딸의 놀이터입니다. 

푸른 방에서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파리로 그녀를 보내 미술 공부를 하게 밀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파리로 가 아틀리에에서 샤반느와 함께 미술 수업을 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샤반느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적인 프레스코를 보고 큰 영향을 받아 파리로 돌아와 격조 높은 화풍으로 파리의 팡테옹의 벽화를 그리던 그 시절이기도 했으니까요.

 

 

 

 

 

 

 

푸른 방에 있는 화가의 어머니 아네 브뢰넘 The Artist's Mother Ane Hedvig Brondum in the Blue Room, 1909, 코펜하겐 National Gallery of Denmark/ Artvee

 

 

푸른 방의 창가에서 책을 읽는 화가의 어머니 The Artist's Mother reading by the window in the Blue room. ,1912, Private Collection/ Reproduction Gallery

 

 

 

 

 

 

86세의 어머니가 책을 읽고 계십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조금씩 닳고 허물어져가는 여성의 인생 기록이 되었습니다. 

 

 

화가 아나 앙케르가 유난히 자주 그렸던 그림은 어머니 아네 헤드 브뢰넘 (Ane Hedvig Brondum )의 초상이었습니다. 아나의 특별한 우원자였던 어머니는 호텔이 있던 자신의 '푸른 방'에서 자주 포즈를 잡아 모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푸른 방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책과 편지를 읽는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머니는 1890년 남편이 사망한 후 26년을 더 70세 까지 아들과 함께 브뢰덤 호텔을 운영했습니다. 어쩌면 엄마를 따라 갔던 그녀의 초상은 조금씩 조금씩 인생과 세월에 허무어져가는 한 여성이 인생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Mrs Ane Brondum in the blue room , 1913/Obelisk Art History

 

 

 

 

 

어머니는 90세인 191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초상은 긴 생애에 걸쳐 그렸습니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시들어가는 인생 역정을 보여 줍니다. 파란 방, 푸른 방의 색상이 조금씩 변해가듯이, 인생 또한 마찬가지, 그녀의 화폭 속에는 누구보다 어머니 모습, 때마다 자주 그린 탓에 캔버스 속 어머니의 초상에는 푸른 방에서 여생을 다해 가는 어머니의 시간과 생애 모습이 마치 '조금씩 닳아가는 고무지우개처럼' 고스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단아한 모습만큼이나 산호색 빛깔이 어머니의 그동안 노고를 껴안안 주는 듯 보입니다. 

 

 

 

 

 

 

Efter Dagens Moje . Sostrene Brondum Hviler sig Anna Ancher, 1917, Skagen Art Museum/Creazilla

 

 

 

 

 

 

어머니 사후에. 여인의 삶을 회상하며 그린 것 같습니다. 푸른 방에서 어머니와 이모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고 잠깐 쉬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거친 붓질이 눈길을 끕니다. 

 

 

 

고단한 날, 여전히 푸른 방, 호텔에서 피곤한 하루를 보낸 후 어머니와 이모 , 연민이 느껴지는 늙은 두 자매가 호텔에서 쉬며 일하며 졸며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아나는 인생에서 총 413 점의 유화를 그렸는데 두 명을 모티브로 한 유화는 딱 두점 뿐입니다. 삼시 세끼 손님들 챙기느라 바빴을 , 빨래와 청소로 녹초가 되었을 그녀들의 삶이 피부로 와 닿는 작품입니다. 이렇게 엄마인 여관 안 주인 아네와 화가 아나 앵커(Anna Ancher), 그리고 손녀 딸 헬가 앙케르( Helga Ancher)까지 여인 삼대가 살아낸 특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궁전 문화청의 지원으로 다른 한 점과 함께 경매를 통해 당시 가격 DKK 75,000덴마크 크로네에 낙찰받아 스카겐 미술관에서 인수하였습니다. 

 

 

 


 

 

 

 

Interior with Clematis, 1913/Wikimedia Commons

 

 

 

 

 

그녀의 독특한 스타일과 색채 감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클레마티스 꽃이 있는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 일상 속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자연광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여 생동감 있는 색감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특히 색상과 조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줍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클레마티스는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색채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특히 클레마티스의 생동감 있는 색상이 돋보입니다. Ancher 는 생생한 생상 패턴을 통해 관람객의 시선을 끌고,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실내 공간에 화려함과 조화를 부여하였습니다. 

 


 

집안으로 '휘게 (hygge)'라고 불리는 가정적 아늑함을 원하시나요.  Anna Ancher 작은 소품을 테이블 램프아래 놓아 두시면  따뜻한 빛으로 아늑함을 연출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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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가 위치한 유틀란트 반도 끝에 스카겐(Skagen)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Skagen은 덴마크의 최북단 도시로, 북부 Jutland 반도의 Skagen Odde 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Frederikshavn 지방 자치단체에 속하며, 매년 약 200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활발한 관광 산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Skagen의 낮은 노란색 집들과 빨간 지붕이 돋보이는 경치가 매력적입니다. 또한, 철새 관찰가들에게 인기가 있어, 외부에서 오는 많은 조류 관찰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합니다. 이 지역의 생태계는 바다에 둘러싸여 었어 다양한 조류 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Skagen 은 중세 시대에 어촌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 화가들의 모여서 이 곳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스카겐파( Skagen School)라고 불리는 화가들의 모임이 탄생했는데, 이들의 작품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비고 요한센(Viggo Johansen, 1851-1935)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Happy Christmas, 1891, wikipedia

 

 

 

 

 

덴마크의 풍경화가와 인물화가로 잘 알려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이 함께 캐럴을 부르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의 따뜻한 가족 전통을 잘 나타내는 그림이고요.   그림은 어두운 방안에 위치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촛불로 장식된 나무가 방 안에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화가는 작가의 가족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의 따뜻함을 표현하였고, 방 안의 유일한 빛은 크리스마스트리의 많은 양초로부터 나옵니다. 이는 소비주의보다 전통적이고 가정적인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작품은 집안의 아늑한 분위기를 잘 전달하며, 가족과의 소중한 순간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크리스마스가 가족 중심의 축제로 자리 잡아가는 시기와 맞물려, 요한센은 사람들이 선물의 수혜를 넘어 가족과의 교류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이 회화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축제를 생생하게 드러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빛을 중시하는 리얼리즘 양식을  채택하며, 가족과 친구들을 주제로  한 따뜻하면서도 어두운 실내 이미지를 주로 그렸습니다. 특히, 그의 작업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색채 사용에서도 드러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가족들은 특별한 만찬과 함께 노래와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표준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된 홀리와 상록수는 당시의 전통을 반영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전통적인 장식보다는 호화로운 선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며, 요한센의 이 그림은 그러한 시대의 소중한 기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크리스마스 장면을 넘어, 가족과 전통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MSvsP3VIME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이 미술 사조의 창시자이자 개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빛과 색채의 변화를 중요시하는 방식으로 자연 풍경과 순간적인 인상을 캔버스에 담아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1874년 첫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그때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가 비평가로부터 조롱받으면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모네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포착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자연의 색과 형태를 순간적으로 담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 결과물은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스타일은 특히 색채의 질감을 중점을 두고 자연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수련 ' 연작입니다. 

 

Bridge over a Pond of Water Lili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by Claude Mone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ww.youtube.com/watch?v=jBT5dybMKyw

 

 

 

Copenhagen/위키원

 

 

 

요한센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열일곱 살이던 1868년, 코펜하겐이 있는 왕립 덴마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학교에서는 주로 인물화를 공부했다고 하는데, 1872년부터 그는 스카겐 근처의 혼백이라는 곳에서 주로 풍경화와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The Dead Child,1881/ MutualArt

 

 

 

 

 

 

마치 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은데, 아이의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았습니다. 붉은 입술도 그대로이고 손을 대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것  같은 아이의 두 눈이 굳게 감겼습니다. 제목을 보니 죽은 아이입니다. 

 

 

 

 

 


 

 

Kitchen interior,1884/Flickr

 

 

 

 

이 작품은 그의 아내가 꽃을 정리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Skagen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비교적 따뜻하고 어두운 조명을 특징으로 하는 실내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Viggo Johansen (1851-1935)는 Skagen화가 그룹의 일원으로 , 주로 덴마크의 북부 어촌 마을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현실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선보였으며, 주변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요한센의 예술적 특성을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낮은 조명을 사용하여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이로 인해 관람자는 그림 속 정서와 상황에 쉽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인물의 자세와 표정을 통해 일상 속 소소한 순간을 중시하고 표현하려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91pGu-PGk

 

 

Aerial view of the Skagen Odde peninsula in the far north of Jutland, from the southwest of Skagen/wikipedia

 

 

Skagen /Pin Page

 

 

 

Skagen 화파는 덴마크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 화가로서의 활동을 한 집단입니다. 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여러 화가들로 구성된 예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 그룹은 덴마크 북부의 스카겐 지역에서 여름마다 모여 작품을 교류하고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Skagen 화파는 주로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빛과 색을 탐구하며, 특히 스카겐의 특유의 자연환경과 빛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 인상파 화풍으로, 그들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생생한 색상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특징입니다. 

Skagen 화파는 덴마크 현대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그린 점에서 차별화되었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덴마크 예술계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 스카겐 지역의 풍경과 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Children Painting Spring Flowers, 1894/Wikimedia Commons

 

 

 

 

 

탁자 위에 꽃이 담긴 화병이 놓여 있고 그 둘레에 모여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이는 조금씩 다르게 보이지만 꽃을 그리는 자세는 모두 신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정면으로 보이는 소녀의 눈에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붓으로 섬세하게 칠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다 보니 아이들이 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섬세한 붓 터치와 풍부한 색 팔레트를 사용하여 실제적인 꽃의 섬세함과 어린이들의 즐거움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스카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8년 소더비에서 경매에 출품된 뒤 이곳에 소장되었습니다. 또한, 1895년 찰롯텐보르크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이 당시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P5lPPBvWEg

 

 

 

 

 

 

 

요한센은  1875년, 아카데미를 그만둡니다. 졸업을 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에게 자격증이 꼭 필요한가 싶지만 통과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합기는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 중 마카엘 앙케가 있는데, 이 친구가 그 해 여름을 스카겐에서 보내자고 권유합니다. 그리고 그 역시 요한센처럼 아카데미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미카엘 앙케르 Michael Ancher, Skagens Museum/wikipedia

 

 

 

Michael Ancher(1849-1927)는 덴마크의 사실주의 화가로, 그는 주로 스켄의 어부들과 북해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발트해의 Bornholm 섬에 있는 Rutsker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상인으로서의 힘든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그는 중등 교육을 완전히 이수하지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71년 왕립 덴마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1875년에 졸업하지 않고 중퇴했습니다.  

Ancher의 예술적 경향은 사실주의와 고전적인 구성 요소의 조화를 이루며, 특히 "해양"과 "어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유명합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Lifeboat is Carried Through The Dunes"(1883)과 "The Crew Are Saved"(1894)등이 있습니다. 또한 , 그의 집과 스튜디오는 오늘날 Ankers Hus라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개인적인 유물들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A Stroll on the beach by Michael Ancher, 1896/ Wikimedia Commons

 

 

 

 

 

스카겐에 위치한 아나 앙케르- 미카엘 앙케르 부부의 저택/위키백과

 

 

 

 

아나와 미카엘 엥케르(1997-1999, 3차 )/위키백과

 

 

 

 

The Royal Library, Denmark, Anna Ancher, 1933/wikipedia

 

 

Anna Ancher(1859-1935)는 덴마크의 화가로, 스카겐 화가들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색채와 빛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상생활에서의 간단한 주제를 즐게 그렸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브론돔 호텔을 운영했습니다. 그녀는 코펜하겐에 있는 빌헬름 키른 미술학교에서 3년 동안 그림을 공부한 후, 파리에서 피에르 뽈 비비앙의 아틀리에도 수학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그녀가 독특한 화풍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카겐 화가들의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녀의 작품은 자연광과 색채의 상호작용을 중시했습니다. 그녀의 가정과 단순한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종종 여성, 어부, 어린이 등의 일반 시민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파란 방의 햇빛"은 빛의 표현에 대한 그녀의 탐구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여자의 기도 Evening Prayer)을 포함한 여러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예술은 덴마크의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여러 차례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2004년 발행된 덴마크 천 크로네 지폐의 전면에 남편과 함께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그녀와 남편이 거주했던 집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덴마크에서 가장 위대한 시각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여성 화가로서의 입지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Sunlight the Blue Room, 1891/wikipedia

 

 

 

 

 

 

 


 

 

 

 

 

Evening Talk, 1886/wikipedia

 

 

 

 

비고 요한슨은 덴마크의 스카겐 화파의 일원으로, 이 그룹에서 동료 예술가들과의 친목을 중요시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러한 저녁의 온기를 담아내며, 화가의 기술이 돋보이는 회화입니다.  요한센은 또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회화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도 즐겼습니다.  이 그림은 따뜻한 조명 아랫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냅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피아노가 있고 , 이는 요한센이 음악을 사랑했음을 암시합니다. 테이블 위에는 식사가 놓여 있으며, 작품 곳곳에 반사된 빛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자세도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센을 대칭적 구성을 사용하여 관람객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입니다. 특히 크고 작은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져, 그림 속 캐릭터들이 실제로 대화하는 듯한 친근함을 자아냅니다. 이러한 세심한 조명과 색채 사용은 스카겐 화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ZpYcNvbXc

 

 

 

 

 

 

 

 

My Friends, 1887, Phildelphia Museum of Art/Superstock

 

 

 

 

New Year's Eve with Friends/Vinde Vie wind of Life

 

 

 

 

 

이 작품은 친구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예술가들의 우정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작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해당 미술관의 제259 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느긋하게 이야기 판이 이어졌습니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실내는 어둡다기보다는 아늑합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편안해 보입니다. 오른쪽 어둠 속에도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요한센의 집에 모인 화가, 비평가 그리고 친구들의 나지막한 이야기가 방안의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요한슨이 당시의 예술적 환경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포착하고, 그들과의 연대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특히, 그는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친분을 통해 예술 공동체의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색상과 명암의 사용이 돋보입니다. 요한슨은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의 감정과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 이는 작품의 깊이를 더욱 더해줍니다. 

 

 

 

 

 

 

 

 

An evening with visiting friends (Meine freunde abends beimir0, 1897, Bavarian State Paintings Collections /wikimedia commons

 

 

 

 

 

 

 


 

Christian Bindslevis III, 1889/wikipedia

 

 

 

 

 

 

인물화입니다. 그의 동료 화가 Christian Bindslev의 병든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드러진 조명 효과와 함께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어, 관찰자가 인물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요한슨의 작품은 또한 그가 파리에서 받은 영향을 반영하여, 색상의 사용에서 변화가 뚜렷합니다.

 

 

 

 

 

요한슨은 자신의 작품에서 조명을 독창적으로 사용하여 화사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검은색의 사용을 줄이고, 대신 부드러운 색조의 채택을 통해 생명력 있는 효과를 실현했습니다. 이 기법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널리 적용되었으나, "Christian Brindslev is III"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이 작품은 덴마크에서 큰 사랑을 받으며, 요한슨을 당대의 주요 화가로 자리 잡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한슨의 작품은 단순한 인물화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사회적 맥락까지 담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1875년부터 요한센은 스카겐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다소 거칠고 황량한 풍경 그리고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그곳 주민들이 요한센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미래의 아내가 되는 여인을 만납니다. 상대는 그가 그림 지도를 하던 안나 앙케의 사촌인 마르타였습니다. 

 

 

 

1880년,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에 요한센은 마르타와  스카겐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마르타가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나 싶습니다. 둘 사이에는 여러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엘렌이라는 딸이 나중에 화가가 되지요. 1885년부터 요한센은 자신의 작품을 파리에서  전시하기 시작합니다. 

 

 

 

 

 

Martha Moller, 1890/wikimedia commons

 

 

 

 

 

요한센의 아내 마르타 묄러의 초상화입니다. 참 단아한 얼굴입니다. 요한센이 아카데미에서 초상화를 중점적으로로 배웠다는 것을 떠 올리면 이 작품 속 그녀의 얼굴이 생생한 이유가 이해됩니다. 요한센은 호텔에 있는 피아노로 모차르트를 , 교회에 있는 오르간으로는 글루크를 연주했다고 하니까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던 남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꽤 많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보면 천생연분인 모양입니다.

 

 

 

초상화 속에서 마르타의 모습은 부드러운 조명과 따뜻한 색조로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슨은 조명을 강조하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마르타의 피부와 의상의 질감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 특히 클로드 모네의 색 사용에서 영감을 받아 가벼운 색조로 재해석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슨의 작품은 그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특히 가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를 전달하며, 그의 독특한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마르타 뫼러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모델로 등장하며, 가정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Bornene vaskes,1888/BoldBrush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입니다. 화면이 장난기 어린아이들의 에너지로 꽉 차있습니다. 자녀를 목욕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뜻한 난롯불 곁에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부지런한 엄마의 손놀림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습니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생활과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특히 가족과 일상적인 활동을 주제로 한 작품 중 하나로, 가정생활의 따뜻함과 더불어 부모와 자녀 간의 애정을 잘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사회에서 아동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인상파적 요소는 부드러운 붓터치와 자연광의 사용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색상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며, 특히 그의 인물화에서는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이 잘 포착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관계를 나타내는 섬세한 손길이 인상적입니다.

 

 

 

단순한 가족의 모습을 넘어서, 어머니와 자녀 간의 깊은 유대감을 상징합니다 그림 속 아이의 순수함과 어머니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합니다.

 

 

 

 


 

 

 

 

By the Piano, 1891/Pinterest

 

 

 

 

 

작가의 아내와 아이들이 피아노 곁에서 함께하는 따뜻한 가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는 이 그림은 요한슨의 서정적인 화풍과 밝은 상징성을 잘 보여줍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색채와 가족의 내밀한 순간을 그리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하는 일상적인 행복을 담고 있으며,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관람객에게 친밀감을 줍니다.

 

 

 

 

그는 주로 조명 효과와 색상의 배합을 통해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가 사용한 짙은 톤과 함께 부드러운 광선이 가정의 따뜻함을 비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슨이 그린 여러 가정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의 다른 유명한 작품처럼, 이 그림은 그가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을 어떻게 세심하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은 인상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가치와 덴마크 화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작품은 강한 인간미와 정서를 전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순간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단순한 정경을 넘어서, 가족의 따뜻한 유대와 음악의 힘을 전달하는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덴마크 화단에서 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습니다. 

 

 

 

 

Mother must Read, the Artist's Wife and Child, 1893/Meister Drucke

 

 

 

 

 

 

자기와 놀아 주어야 할 엄마가 책만 보고 있어서 짜증이 난 걸까요? 엄마가 책을 읽는데 아이가 엄마 무릎에 몸을 기댔습니다. 왼쪽에서 들어온 빛이 약간은 난감한 엄마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지만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엄마가 이제 책을 덮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차례입니다. 파리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요한센은 파리의 화가들, 특히 모네의 색을 사용법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같은 스카겐에서 활동했던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작품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센은 자신의 작품에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어두운 색을 많이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변화가 찾아옵니다.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ian Krohg, 1852-1880)는 덴마크의 저명한 화가이자 소설가로, 상징과 주제를 통합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언론과 교육에서도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는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고, 기초적인 화법과 예술 이론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학습 경험은 그가 이후 다채로운 스타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주로 사실적인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풍경화와 정물화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이 작품은 감정적인 깊이와 함께 복잡한 심리적 상황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는 소설가로서도 활동했으며, 그의 문학 작품은 종종 인간 본성과 사회 문제를 탐구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관점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문학적 시도는 예술과 글쓰기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Sick Girl by Christian Krohg/wikimedia commons

 

 

 

 

 

 


 

 

The Artist's Family, 1895/wikipedia

 

 

 

 

 

 

 

 

My wife and Daughters, 1896/Hungarinan National Gallery

 

 

 

 

 

그의 가족을 주제로 한 감동적인 내부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스카겐 화파의 일원인 요한슨이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를 드러내며, 그의 사적인 공간과 가족생활을 드러내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마르타와 여섯 자녀를 자주 작품의 주제로 삼았으며, 가족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냈습니다.

 

 

 

 

그의 화풍은 부드러운 색감과 섬세한 조명 효과로 유명하며, 이는 특히 그의 내부 장면에 잘 나타납니다.  가정의 일상적인 순간을 조명하고요. 작품 속에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족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애와 따뜻함을 전달하며, 당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줍니다. 요한슨은 가족의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여성의 헌신과 기여를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요한슨의 작품은 단순히 가족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 가족과 가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관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주위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랑과 보살핌의 상징인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요. 이와 같은 여성의 힘은 그가 회화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 주제 중 하나입니다. 

 

 


 

 

 

 

Dragor seen from the West, 1895/ BoldBrush

 

 

 

 


 

 

An Artist's Gathering, 1903, National Museum/wikimedia Commons

 

 

 

 

 

 

" An Artist's Gathering 예술가의 모임"은 비고 요한슨의 작품으로, 파리에서 돌아온 후 요한센의 작품은 한층 밝아졌습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창작 과정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적 교류와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당시의 예술 문화와 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비고 요한슨( Viggo Johansen, 1851-1935)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의 요소를 접목하여 고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예술가 모임"도 이러한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모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 예술가 간의 상호작용과 영감을 통한 창조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는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요한슨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해 작품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작품은 예술 공동체의 소중함과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Lamb's Head on a Plate, 1880, oil on canvas/Alamy

 

 

 

 

 

<Lamb's Head on a Plate>는 188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 덴마크 회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물화의 한 예로, 요리된 양의 머리가 담긴 접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제는 일상생활의 요소들을 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관객에게 감정적이고 시각적인 경험을 제공합니다.

 

 

 

 

상당히 사실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합니다. 작품은 조명의 효과와 명암의 대비를 통해 생동감을 주며, 관람자는 양의 머리와 주변의 색감과 질감들에서 배운 기술과 후에 영향을 받은 인상파의 색채 사용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요한슨은 1880년대에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색조와 조명 처리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가 그린 정물화는 다시 한번 일상적인 물체들을 예술의 주제로 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또한 19세기말 덴마크 사회의 식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정물화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먹거리를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생명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요한슨의 작품들은 집안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통해 관객이 잊고 있던 감정이나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Boats in Skagen on Sonderstrand Beach, 1910/wikipeidia

 

 

 

 

 

 

 

먼바다에서 달려온 바닷물이 뭍에 가까워지자 몸을 뒤집고 하얗게 부서졌습니다. 주인이 떠난  배 두 척은 땅에 몸을 기대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고 모래 언덕 위로 사라지는 바람에 몸을 맡겼습니다. 이따금 물결이 자신을 흔들기도 하지만 배는 조용히 노란 햇빛에 조금씩 물들고 있습니다. 

 

 

 


 

Double Portrait of Ingvar and Sven dressed in sailor's suits by the grand Piano, 1913/Reddit

 

 

 

 

이 이중 초상화는 두 명의 어린 소년, 잉바르와 스벤이 선원 복장을 하고 그랜드 피아노 옆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장 선택은 20세기 초 어린 시절의 순순함과 장난스러움을 암시하며, 요한센의 빛과 색을 다루는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완성되자마자 이 작품은 1913년 샬로텐보르크에서 열린 전시회에 포함되어 그 당시 미술 공동체 내에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잉바르와 스벤의 가족, 특히 부서장 비고 아아게센(Viggo Aagesen)이 소유했던 것으로 문서화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8년 경매에서 DKK 40,000에 판매되면서 예술 시장에서의 지속적 가치와 인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작품에서 두 소년은 조용한 표정을 지으며 그랜드 피아노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피아노의 반사 표면에 드리운 빛의 상호작용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센의 기법은 종종 균형 잡힌 구도를 포함하며 주제의 사려 깊은 배열로 작품의 전체적인 조화를 기여합니다. 

 


 

 

 

 

 

 

 

Kitchen in Skagen with two Figures/ Bold Brush

 

 

 

비고 요한슨( Viggo Johansen, 1851-1935)의 작업은 주로 가족과 친구들이 등장하는 실내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숨은 작업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주방의 소녀와 같은 가족의 일상적인 순간들을 포착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요한센은  존경받는 화가이자 당대 유명 화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890년대 가장 유명한 덴마크 화가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받았고요. 그리고 1906년, 그는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끝내 자격증을 받지 못한 왕립 덴마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1920년까지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여든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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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같은 용모에 곱슬머리와 보조개, 지휘봉을 들면 신들린듯한 놀림,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리는지휘자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의 구세주' 로 , 두다(Duda)'라는 별명답계 21세기 휘청거리는 클래식 음악계의 혜성처럼 등장한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그의 카리스마와 스태미나, 곡 해석력은 널리 인정받아 왔지요. 서둘러 그를 만나러 갑니다. 

 

 

 

뉴욕필하모닉 지휘하는 슈퍼스타 구스타보 두다멜 /NYCultureBeat

 

 

 

 

 

 

음악은 마법 같은 것으로 음악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살사든 클래식이든 음악엔 경계가 없다. 
음악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아이인 나에겐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과 음악을 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수타브 두다멜(Gustavo Dudamel)-

 

 

 

 

 

 

 

 

 

Mambo, Gustavo Dudamel/ 사락-예스24

 

 

 

 

 

 

2008년 12월에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을 이끌고 첫 내한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에 참가해 자신에게 지휘를 가르쳐 주었던 한국인 지휘자 곽승을 만났습니다. 앙코르 때는 자기가 입고 있던 베네수엘라 국기 문양의 점퍼도 선물하는 등 훈훈한 사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XNKcIx4Gks

 

 

 

 

지휘자 곽승/나무위키

 

 

 

 

 

 

곽승 (1941- )지휘자는 고등 학생 시절인 1957년 12월에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최연소 트럼펫 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 메네스 음대에서 수석 졸업 후, 지휘법을 배워 1970년대  링컨센터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와 조프리 발레 오케스트라에서 홀동하였습니다. 

곽승은 부산시립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며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의 경력 내내 엄격하고도 균형 잡힌 연주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특히 1983년부터 1997년까지 텍사스의 오스틴 심포니를 이끌며 이 악단을 최고 수준의 교향악단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후 그는 KBS교향악단에서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여러 국내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1997년 부산시립교향악단과 함께 미국 내 여러 도시에서 순회 공연을 하여 한국의 교향악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2008년부터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젊은 음악인의 양성을 위해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교육적 기여는 세계적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UaKSl8OPBA

 

 

 

 

 

 

 

 

베네수엘라/위키백과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1,26,1981- ) 은 베네주엘라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입니다. 살사밴드 멤버인 아버지와 합창단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다멜은 클래식이 아닌 살사의 영향 아래서 자랐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Jose Antonio Abreu, 1939-2018 )는 마약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구제활동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엘 시스테마 (El Sistema)' 운동입니다. 무상 음악교육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 ' 운동은 빈곤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하여 정서를 함양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이것을 아예 국가적 사업으로 확대시켰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e Antonio Abreu (1939-2018)/wikipedia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Jose Antonio Abreu, 1939-2018)는 베네수엘라의 저명한 지휘자이자 음악 교육자로, 현대 클래식 음악 교육의 혁신적 접근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루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베네수엘라의 발레라(Valera)출신으로,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카라카스의 국립 음악원에서 작곡과 오르간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경제학을 공부하여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5년 그는 '엘 시스테마'라 불리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창립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무료로 클래식 음악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브레우는 음악이 단순한 예술 형태가 아니라 사회적 통합과 발전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통해 매년 수많은 학생들이 음악적으로 성장하고, 일부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110,000명 이상의 아동을 음악 교육에 참여시키며, 음악을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 그의 노력은 유네스코의 국제 음악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공예 및 예술상, 2009년 폴라 음악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국제적인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음악 교육과 사회적 균형을 위한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프로그램은 클래식 음악 교육의 모델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바르키시메토 Panoramic view of Baquisimeto/wikipedia

 

 

 

바르키시메토 Barquisimeto at night/wikipedia

 

 

 

바르키시메토 Barquisimeto, Venezuela/wikipedia

 

 

 

 

'엘 시스테마 El Sistema'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세계적 지휘자가 바로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입니다.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1981년 1월 26일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Barquisimeto)에서 태어났습니다. 트롬본 연주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눈뜬 두다멜은 장난감 인형을 모아서 오케스트라처럼 펼쳐 놓고 그 앞에서 손을 저으며 지휘하는 흉내를 내는 등 어린 시절부터 지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11살 때 오케스트라 수업에 교사가 나타나지 않자 두다멜은 바이올린을 놔두고 첫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교실은 웃음바다였다가 진지한 연주장으로 변모했고, 뒤늦게 도착한 교사는 뒤에서 두다멜의 지휘를 지켜봤습니다. 연주 후 교사는 두다멜을 부지휘자로 임명합니다. 

 

 

 

 

 

 

출처: 제천 국제음악영화제

 

 

 

 

두다멜은 열 살 무렵,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운영하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El Sistema'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바르키시메토 청소년 관현악단'과 '베네수엘라 국립 어린이 관현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국립 어린이 관현악단 단원으로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 펠릭스와 비발디의 < 두 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특히 그의 협주곡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발디는 음악가인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15세에 신학교에 들어가 23살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건강문제로 인해 미사를 집전할 수 없어 음악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1703년부터 1740년까지 베네치아의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에서 근무하며, 그곳의 학생들에게 많은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현대 협주곡 형식의 기초를 확립한 것입니다. 특히 독주 협주곡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500곡 이상의 협주곡을 작곡했고요. 비발디의 협주곡은 대조적인 느린 악장과 빠른 악장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태를 갖추며, 다양한 독주악기의 기법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사계'로 , 각 계절을 음악으로 표현한 협주곡입니다. 이 작품은 각각의 계절을 나타내는 소네트가 첨부되어 있어 음악적 몰입을 더합니다. 또한 그는 52편의 오페라와 다수의 기악곡 및 성가도 작곡하여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히 J.S. 바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v4YrZbf0NA

 

 

 

 

 

베네수엘라,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기네스북 경신/데일리 한국-한국아이닷컴(2024,12,3,13:45)

 

 

 

위 사진은  베네수엘라에서 세계 최대 오케스트라 8573명이 모여 '슬라브 행진곡' 연주로 기네스북 기록을 경신한 장면입니다. 

 

 

 

당시 12-77세 연주자들 1만 2000명이 수도 카라카스에서 한자리에서 모여 차이콥스키(1840-1893)의 '슬라브 행진곡'을 연주했는데, 260명 심사관들은 이중 8573명이 유효하게 참여했다고 판정했습니다. 이는 종전 기네스 기록이던 2019년 러시아에서의 8097명 동시 연주보다 많은 인원입니다. 

 

 

 

이번 기록 경신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출신 음악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엘시스테마'는 '시스템'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 빈곤층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음악을 가르쳐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베네수엘라 음악교육 시스템입니다. 1975년 11명으로 시작해 40만명 이상의 아이들이 혜택을 본 엘 시스테마는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 빈곤과 폭력 등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기적의 오케스트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기록 경신은 엘시스테마 뿐아니라 베네수엘라 전체의 큰 성취
-에두아르도 멘데스(엘시스테마 음악감독)-

 

 

시사 IN

 

 

 

 

 

휴고 차베스( Hugo Chavez)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엘 시스테마'를 지원하던 강력한 후원자였습니다. 악기 등 제반 구입비로 연간 1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는 등 열열한 지지자였습니다. 그 결과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탄생할 수 있었고 2013년 두다멜은 20여 명의 국가 원수들이 참석한 차베스의 장례식 동안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Rdm7OWtHlw

 

 

 

 

 

표트르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부모는 우크라이나계를 포함한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재능을 어린 시절부터 발휘했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아 언어와 역사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장 과정은 정서적 갈등과 내적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조기 사망은 그의 정신적 상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고, 결혼 후에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고난은 그의 음악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나중에 법률학교에 다니던 중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1860년대부터 활발히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특히 오페라와 발레 음악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뛰어난 감정선과 서정성을 가진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는 데 뛰어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고요.  그의 음악은 종종 고독, 애정, 그리고 심리적 갈등에 대한 탐구로 해석됩니다. 교향곡,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비창 교향곡>이 있습니다. 

 

 

 

 

 

40대 지휘자 두다멜/한국경제

 

 

 

 

 

 구스타보 두다멜( Gustavo Dudamel)은 '하신토 라라 음악원(Jacinto Lara Conservatory)'에서 작곡과 악기 연주 수업을 들었습니다. 1955년부터 로돌포 사글림베니(Rodolfo Saglimbeni, 1962- )와 ' 엘 시스테마'의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Jose Antonio Abreu, 1939-2018)로부터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 엘 시스테마' 강사로 활동하던 우리나라의 지휘자 곽승에게도 잠시였지만 지휘를 배웠습니다. 

 

 

 

 

 

 

Dudamel conducts the Simon Bolivar Youth Orchestra/EUROARTS

 

 

 

 

 

https://www.youtube.com/watch?v=KzsYkbvaLR8

 

 

 

 

이어 두다멜은 '바르키시메토 실내 관현악단'과 '라라 주 청소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 등을 거쳐 1999년 젊은 나이로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Simon Bolivar Youth Orchestra Of Venezuela)'의 음악 감독이 되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킨 베네수엘라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입니다. 

 

 

Portrait of Simon Bolivar

 

 

 

 

라틴 아메리카 독립연도/위키백과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는 남미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며, 여러 남미 국가의 독립을 이끈 군인 및 정치가입니다. 그는  스페인령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태어났고, 현재의 콜롬비아, 베네스엘라, 에콰도르, 페루, 파나마, 볼리비아 국가의 독립을 달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엘 리버타도르"또는 " 아메리카의 해방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볼리바르는 부유한 스페인계 혈통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주의 사상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 매우 특권적이었지만 고립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젊은 시절 유학 중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을 접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키웠습니다. 마드리드에서 계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요.

볼리바르는 1810년 베네수엘라의 독립 전쟁에서 밀리샤 장교로 군사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당파 세력과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여러 차례 유럽과 카리브해를 오가며 군사 및 정치적 지원을 구했습니다. 1817년 , 그는 제 3공화국을 세우고, 콜롬비아를 해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볼리바는 1819년까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현재의 여러 국가의 독립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유산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는 영웅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볼리바르 공화국)등이 있습니다. 

 

 

 

 

 

Dudamel Reunites with Simon Bolivar Symphony Orchestra/The New York Times

 

 

 

2000년 ,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최초의 유럽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는데, 베를린 필하모닉홀에서 데뷔했고 독일 각지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두다멜은 시몬 볼리바르 관현악단 음악 감독 취임 직후, 라틴아메리카와 유럽 등지에 악단을 이끌고 공연을 다니면서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1955-  )이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 등 지휘자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사이먼 래틀 Simon Rattle, Licensed by Google , Christian Marquardt/Getty Images

 

 

 

 

사이먼 래틀(Simon Ratle, 1955- )은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 Royal Academy of Music)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음악적인 기초를 다졌습니다. 1974년부터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고, 첫 직장으로 본머스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리틀은 1980년에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이 오케스트라를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현대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특히 감정적인 해석이 돋보입니다. 

2002년부터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하였고, 2010년에 임기가 연장되어 2018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현재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 중이며, 2023년부터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직을 맡게 될 예정입니다. 

래틀은 그의 뛰어난 음악적 기여로 여러 가지 상과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1987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CBE)과 1994년 기사 작위 ( Knight Bachelor) 서임이 있었고, 2014년에는 메리트 훈장(OM)을 수여받았습니다. 

 

 

 

 

 

 

 

 

 

타계한 '지휘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연합뉴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고, 볼로냐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지휘자입니다.  

그는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밀라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빈 국립음악예술대학교에서 지휘를 배웠습니다. 그는 1958년에 첫 공연을 시작으로, 1963년에 미트로폴로스 콩쿠르 우승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히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1968년부터 1986년까지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오페라와 현대 작품을 성공적으로 공연하였습니다. 또한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대화를 중시하는 민주적 접근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카라얀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아바도는 고전파부터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녹음하고 공연하며, 뛰어난 음악적 해석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의 녹음 작업 중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은 특히 유명합니다. 그는 음악과 교육적 기여를 통해 젊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지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HSkCrksWII

 

 

 

 

 

Bamberg/Britannica

 

 

 

 

 

 

2001년 , 샤를 뒤투아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했으며, 2003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베를린에서 사이먼 래틀의 보조지휘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마젤/빌라 지휘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2004년 독일 밤베르크 교향악단이 주최하는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Bamberger Symphoiker Gustav Mahler '에서 우승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 대회는 지휘 경력을 시작하는 젊은 지휘자들을 돕기 위한 아이디어로 창설되었습니다. 1등 상에는 30,000 유로 상금과 여러 오케스트라와의 계약이 포함됩니다.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 Gustav Mahier Conducting Competition)는 중요하고 권위 있는 국제 지휘 경연으로, 구스타프 말러라는 뮤명한 작곡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유명한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입니다. 이 콩쿠르는 전세계의 젊은 지휘자들이 그들의 기술과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히, 신인 지휘자들에게 상당한 명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콩쿠르는 참가자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말러의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함으로써 심사위원과 청중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또한 이러한 경연은 젊은 지휘자들이 더 큰 무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콩쿠르는 여러 라운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기 라운드에서는 주어진 작품을 원치 않는 청중에게 공연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이후 결선에서 상위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를 실제로 지휘하는 기회를 가지며 최종 수상자를 가리게 됩니다. 콩쿠르에서의 성과는 지휘자에게 향후 여러 기회를 제공하며, 많은 수상자들이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을 받습니다. 

 

 

 

 

Berliner Philharmoniker,Dudamel, Concert on 6.13.2024-6.15.2024/Berliner Philharmoniker

 

 

 

 

 

 

또한  '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도 높아졌고, 관련 다큐멘터리도 꽤 여러 편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본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프란스 브뤼헨을 대신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 카라카스에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습니다.

 

 

 

 

프란스 부뤼헨(1934-20140 은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음악가이자 지휘자입니다. 바로크 음악과 고전 음악 분야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낸 인물입니다. 그는 1934년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했고, 리코더 및 플루트를 전공하였으며, 헤이그 왕립 음악원에서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브뤼헨은 암스테르담의 섬유 공장 소유주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자녀 중 막내입니다. 그는 암스트레담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며, 리코더와 플루트를 공부하여 초기 음악 연주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음악 경력은 1955년에 헤이그 왕립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72년에는 아방가르드 리코더 앙상블인 'Sour Cream'을 공동 창립했고, 1981년에는 '18세기 오케스트라'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는 이 오케스트라의 사실상의 수석 지휘자였으며, 여러 고전 음악 작품을 현대의 연주 관행에 맞추어 연주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브뤼헨의 지휘 경력은 네덜란드 라디오 카메로케스트의 지휘자로도 이어졌으며, 그는 이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콘서트를 2013년에 지휘 하였습니다. 부뤼헨은 고전 음악의 전통을 중시하며 소리와 리듬의 유연성, 정서적 효과를 강조한 연주 스타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Viva Maestro/ Roco Films

 

 

 

https://www.youtube.com/watch?v=DBlgfvQ4syk

 

 

 

 

또한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은 두다멜의 초청을 받고 카라카스를 방문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어린 단원들의 자긍심을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이 교향악단은 두다멜의 성장과 함께 빠르게 유명해졌고,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호평받았습니다.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in Concert, at the Royal Festival Hall,London/Alamy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유명한 관현악단으로, 1932년에 토머스 비첨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악단은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도 활동을 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32년 10월 7일에 창단식과 기념 공연을 런던 퀸즈 홀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영국 각지의 뛰어난 연주자들을 초빙하여 단원으로 영입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지만 1939년 전쟁의 여파로 운영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 이로 인해 악기와 악보의 일부가 손실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클래식 음악 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도 활동합니다. 이들은 재즈와 팝 아티스트들과의 협연을 통해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쌓고 있으며, 영화 음악에 대한 녹음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을 녹음하며 광범위한 디스코그래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여러 유명 지휘자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이 중에는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과 에이드리언 볼트 등이 있습니다. 또한 1983년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말러의 교향곡 전집 녹음 등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현재는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상임 지휘자로 재직 중이며, 야닉 네제세갱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LUCERNE Festival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관현악단으로 1936년에 창단되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이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한 뒤 결성한 '팔레스타인 관현악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후 여러 유명 지휘자들과 함께 공연을 해왔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창립 초기부터 텔아비브를 본거지로 하였으나, 이후 예루살렘으로 수도가 옮겨진 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주로 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말러, 드보르자크 등의 유명한 레퍼토리를 연주합니다. 특히 유태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작품도 종종 공연에 포함시키며,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망명한 유대인 음악인들이 설립한 단체로서, 단원들 사이의 결속력과 유대감이 강합니다. 반유태주의로 인해 오랫동안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일부 연주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주요 공연장에서 활동하며, 많은 유명 음반사와 함께 녹음을 진행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의 음악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은 두다멜에게 본격적인 세계 무대로 진출하게 된 의미 있는 한 해였습니다. 국제 지휘자 아카데미의 일환으로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다시 지휘했고,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의 연주는 평단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25살의 두다멜은 2006년 11월 오페라 돈 조반니와 함께 밀라노 라 스칼라 La Scala in Milan에서 데뷔했습니다. 

 


 

 

 

 

 

 

구스타보 두다멜 가족/ www.gettyinages.com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C4JBD8BuCzo

 

 

 

 

Maria Valverde & Martin Dudamel/ Depositphotos

 

 

 

 

 

첫 번째 부인 (2006-2015)Eloisa Maturen(Venezuelan Journalist & actress)& Gustavo Dudamel/Getty Images

 

 

 

 

 

어릴 때 소꿉친구로 결혼 전 오랫동안 사귄 것으로 알려진 엘로이사 마투렌 ( Eloisa Maturen)는 기자, 발레리나, 안무가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영화 '리즈 인 셉템버 Liz in September'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두다멜과 엘로이사는 2006년 결혼해 세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2015년 3월). 

 

 

 

 

 

 

두 번째 부인 Maria Valverde(Spainsh acetress) & Gustavo Dudamel

 

 

2017년 2월 스페인 출신 배우 마리아 발베르데( Maria Valverde)와 재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2016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두 번째 결혼 후 그는 2018년부터 스페인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부부는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구스타보 두다멜( Gustavo Dudamel)은 건강이 좋지 않은 네메 예르비를 대신해 2008년 8월에는 스웨덴의 예테보리 심포니와 함께 BBC 프롬스 축제에 데뷔하였고, 2007년에 이 교향악단 수석 지휘자가 되면서 해외 관현악단에서 첫 공식 직책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클래식의 전당 '카네기홀로 가는 길'/ NYCultureBeat

 

 

 

 

 

2007년 9월 10일 루체른 페스티벌 Lucerne Festival 에서 처음으로 두다멜은 비엔나 필하모닉 Vienna Philharmonic을 지휘했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26살이었습니다.  같은 해 시몬 볼리바르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두다멜이 카네기홀에 출연해 주목받았고요. 당시 뉴욕 타임스는 '26세의 베네수엘라인 두다멜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연주자 중 한 명입니다.' 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4ef_PU7WGQ

 

 

 

 

구스타브 두다멜 예테보리교향악단 수석지휘자(2007-2012) /나무위키

 

 

 

 

Orquesta Sinfonica de Gotemburgo/wikipedia

 

 

스웨덴 예테보리 심포니(Goteborgs Symfoniker)는 스웨덴 예테보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명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입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1905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스웨덴의 주요 클래식 음악 기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에테보리 심포니는 1905년, 예테보리 오케스트라 협회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이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지역 응원과 지원을 받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음악 감독인 하인리히 하메르부터 시작하여, 많은 유능한 음악 감독들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해 왔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윌헬름 스텐하르머는 1907년부터 1922년까지 활동하며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테보리 심포니는 스웨덴과 북유럽의 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특히 장기적인 음악 감독인 네메 예르비와의 협업으로 유명합니다. 그 결과, 이 오케스트라는 시벨리우스, 스텐하르머 등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보통 예테보리 콘서트홀 에서 공연을 진행하며,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매년 여름, 슬로트스쿨렌 공원에서 야외 공연을 개최하여 많은 관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현재, 예테보리 심포니는 109명의 정규직 음악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웨덴의 국가 오케스트라로서 다양한 전통과 현대의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합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세계 유수의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여러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Current BBC Proms logo,used from the 2022 Proms Season/wikipedia

 

 

 

Outside the Royal Albert Hall durinf the BBC Proms Season of 2008/wikipedia

 

 

A Promenade Concert in the Royal Albert Hall, 2022/wikipedia

 

 

 

 

 

BBC Proms는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 (Royal Albert Hall)에서 매년 여름에 열리는 일련의 클래식 음악 콘서트입니다. 이 축제는 1895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영국 문화와 클래식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BBC Proms 는 로버트 뉴먼 ( Robert Newman)이 1895년에 설립하였으며, 당시에는 퀸스 홀( Queen's Hall)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현재는 주로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리며 , BBC 의 주최와 방송 하에 진행됩니다. 이 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민주적인 음악 축제"로 불리며, 널리 대중화된 클래식 음악 공연을 통해 더 많은 관객들이 클래식 음악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습니다. 

BBC Proms 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프로 (Prom)"이라는 용어입니다.  이는 "프로나드 콘서트 promemade concert"에서 유래된 것으로, 관객들이 관람하는 동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합니다. 특히, 세미자유형 좌석인 '프로밍'이 인기를 끌며, 저렴한 가격에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2024년 BBC Prom는 오케스트라 공연, 실내 음악, 그리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러 음악가와 작곡가, 그리고 다양한 세대의 음악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공연됩니다. 특히, 여름 시즌 동안 매일 개최되는 특성 덕분에 매우 다양한 레퍼토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매년 9월 둘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마지막 밤의 프로미스 Last Night of the Proms'는 특별한 행사로, 일반적으로 경쾌하고 유쾌한 곡들이 포함되며, 영국의 애국적인 곡들이 연주됩니다. 이 밤은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연 중 하나로, 많은 관객들이 참석하여 축제를 마무리 짓습니다. 

BBC Proms 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다양한 연령층과 문화권의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문화 행사입니다. 이 축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페스트피엘 메클렌부르크-보르포메른( Festipiele Mecklenburg-Vorpommern), 비스바덴 쿠르하우스( Wiesbaden Kurhaus), 알데부르크( Aldeburgh), 에든버러 음악제에 출연하였습니다.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2025/Edinburgh Festivals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매년 열리는 공연 예술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주로 8월부터 9월까지 3주간 개최되며,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초청되어 오페라, 연극, 음악 , 댄스 등의 다양한 공연을 선보입니다.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이 주가 되는 행사로, 많은 관객들이 이 특별한 경험을 즐기기 위해 모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gYusWh8R0

 

 

 

 

2008-09 시즌은 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1 쾰른, 에센, 룩셈부르크, 뮌헨, 비엔나,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샌 세바스탄, 바야돌리드에서의 공연을 가졌습니다.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과는 두 번째 독일 연주 여행을 성공리에 마쳤고,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콘서트무대에도 올랐습니다. 그리고 헬싱키, 잘츠부르쿠, 루체른,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바덴바덴 등의 무대에 서는 유럽 투어도 가졌습니다.

 

 

 

 

 

 

 

엘 시스테마 주인공 두다멜, LA필 이끌고 내한/스포츠 Q

 

 

 

2008년 11월 ,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미국 투어에서 뉴욕의 카네기 홀,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 필라델피아의 키멜 센터, LA의 디즈니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2009년 , 구스타보 두다멜은 에사 페카 살로넨( Esa Pekka Salonen)의 후임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올랐습니다. 28살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역사상 최연소 상임 지휘자에 오른 두다멜은 2009년 10월 8일 월트 디즈니홀에서 취임 콘서트를 열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9년 10월, LA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28세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그의 첫 콘서트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연주했습니다. 곱슬머리의 젊고 신선한 지휘자와 묘하게 거칠고 독특한 교향곡이 빚어내는 조화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날 이후 구스타보에게 사로잡힌 청중들이 많지요. '두다마니아' 같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팬층을 거느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4GQ5Ho7MWw

 

 

 

 

 

 

 

 

 

Walt Disney Concert Hall/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2NBBbnQ8b0c

 

 

 

 

 

 

16,525 Walt Disney Concert Hall/Getty Images

 

 

 

 

 

https://www.youtube.com/watch?v=x_gi7MIQkqo

 

 

 

 

 


 

 

Hollywood Bowl 2024: Tchaikovsky Spectacular with Fireworks/ ONX Wines & Vineyards

 

 

 

 

 

 

 

 

 

 

https://www.youtube.com/watch?v=mbYSRedPvF4

 

 

 

 

 

미국 서부의 자존심 LA필하모닉은 미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두다멜의 역동적인 리더십 아래, 로스앤젤레스는 물론, 전 세계를 무대로 예술성과 비전을 제시하며 가장 흥미로운 오케스트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LA필하모니닉은 1919년 윌리엄 A. 클라크 2세가 창단했으며, 월터 헨리 로스웰이 첫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1927년까지 활동한 이래 , 주빈 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에사 페카 살로넨 등의 세계적인 지휘자가 이 악단을 거쳐 갔습니다.

 

 

 

주빈 메타(Zubin Mehta, 1936- )는 인도의 저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입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고, 아버지인 메흘리 메차 (Mehli Nehta)로부터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18세에 비엔나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그의 지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 리버풀 국제 지휘 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요.

그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며 캐나다에서의 경력을 쌓은 뒤, 1962년부터 1978년까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재직하며, 이 오케스트라와의 관계에서 최장기 재임 기록을 세웠습니다. 

주빈 메타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2019년까지 40년 이상 재직하며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국제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케네디 센터 명예상과 일본예술 협외의 프레미움 임페리알 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메타는 음악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뭄바이에 메흘리 메타 음악 재단을 설립하여 200명 이상의 어린이에게 클래식 음악 교육을 제공합니다. 또한 텔아비브에 있는 부흐만-메타 음악학교와 협력하여 이스라엘 내 젊은 음악 인재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 1914-2005)는 이탈리아 출신의 두각을 나타낸 지휘자로, 그의 경력은 20세기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줄리니는 16세에 이탈리아 최고 음악학교인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서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 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음악 경력은 계속 발전하였고, 1944년 해방 후에는 유명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줄리니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런던 필하모니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주로 베르디, 모차르트, 브람스, 말러 등의 작곡가의 작품에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지휘 스타일은 감정적 깊이와 섬세한 표현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마리아 칼라스와의 협연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음악 두 분야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예술적 비전과 높은 기준을 지키기 위해 오페라 공연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전적이고 세련된"지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에사 페카 살로넨( Esa -Pekka Salonen ,1958-)은 핀란드 출신의 저명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입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났으며, 헬싱키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살로넨은 1983년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을 지휘하며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이후 스웨덴 라디오 교향악단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살로넨은 현대 음악의 수호자로 손꼽히며, 그의 지휘 스타일은 동시대 레퍼토리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LA필 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던 기간 동안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이어갔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습니다. 

살로넨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우아한 혁신'을 이끌어내며,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풍부한 색채감과 에너지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며, 기품과 힘을 동시에 갖춘 이상적인 음악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Wcb7zoLTSus

 

 

 

 

 

 

2008년 그라모폰은 세계 오케스트라 20을 발표하면서 LA필하모닉을 8위에 올렸고, 미국 오케스트라로는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에 이어 제3위에 자리하였습니다. LA필하모닉은 2009년 구스타보 두다멜을 맞아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으며, 월트 디즈니 홀과 할리우드 볼에서 매해 30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열어 클래식뿐 아니라 , 재즈, 세계 음악, 대중음악까지 폭넓은 음악으로 청중들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Chicago Symphony Orchestra/wikipedia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로, 189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소화할 수 있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150회 이상의 공연을 개최합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시카고의 음악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어 온 중요한 기관입니다. 테오도어 토마스 ( Tjeodore Thomas)에 의해 설립된 이 오케스트라는 시간과 함께 많은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매년 계절마다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며, 여러 장르의 음악과 더불어 현대 작곡가의 작품도 포함하여 많은 청중과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빈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와의 협업을 통해 세계적인 음악가와의 끊임없는 소통을 지향합니다. 현재 클라우스 메켈라( Klaus Makela)를 음악 감독으로 두고 있으며, 그는 2027년부터 정식 음악 감독으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Cleveland Orchestra Christmas Concerts , Cleveland Arts Events/wikipedi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본부를 둔 유명한 오케스트라입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을 제공하며, 클래식 음악의 연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다루고 있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191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초기는 기초가 되는 음악 교육과 지역 음악 커뮤니티의 지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후 빠른 시간 안에 미국 내에서 가장 저명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지역 사외화 함께 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고, 음악적 재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음악 교육의 중요성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음악 공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팬들과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2년 초, 두다멜은 말러의 9개 교향곡을 전곡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완주합니다. 그때 나이 31세. 세계의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말러 사이클에 도전했지만 그렇게 젊은 지휘자가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곡을 연주한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그 긴 교향곡들을 거의 전곡 암보하여 지휘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10대 때부터 이 곡을 100회 이상 지휘했어요. 
연주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비전을 발견했던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돼요. 
이 작품에는 '거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내가 거인 같다고 느껴지는 에너지가 담겨 있어요.
-구스타보 두다멜-

 

 

 

 

 

 

 

그의 말러와의 인연은 10세 시절로 올라갑니다. 크리스마스 때 한 친구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라며 CD를 선물했는데 열어보니 말러의 5번 심포니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레코드점의 실수였나봅니다. 열살 소년에겐 너무 길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반복해 들으면서 사랑에 빠졌고, 때마침 집에서 발견한 말러 1번으 트롬본 파트 악보를 보고 독학으로 트럼본을 연주했을 정도로 말러 광이 되었습니다. (두다멜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가 트럼본 연주자)

 

 

 

이후 두다멜은 틈난 나면 9개의 교향곡을 하나씩 다시 연주하며 보완하고 재해석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연주한 심포니가 1번이고, 음반으로 나온 것은 1번, 5번, 7번, 8번, 9번 입니다. 

 

 

 

말러 교황곡은 실황으로 들어야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수많은 타악기가 등장하는 거대 오케스트라 편성에 엄청난 굉음이 터지는가 하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가 깔리기도 하고, 먼 효과음을 위해 무대 뒤에서 연주되는 등 음반으로는 그 폭넓고 섬세한 다이내믹이 살아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말러를 지휘하려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엘 시스테마'창립자)-

 

 

 

 

https://www.youtube.com/watch?v=7mW_h6yCZM0

서울시립교향악단, 말러 교향굑 제1번 1악장(Mahler, Symphony No.1, 1st mov

 

 

 

 

LA필하모닉은 콘서트장 안에서의 공연뿐만 아니라 학교, 교회, 다양한 커뮤니티의 문화 센 테에서의 공연들을 통하여 로스앤젤레스 도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특히 베네수엘라 ' 엘 시스테마'에 영향을 받은 'LA 유스 오케스트라'를 통하여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600명이 넘는 소외계층의 청소년들에게 악기를 무상을 대여해 주고, 음악 교습 및 장학금 등을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전 세계에 음악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LA 필하모닉의 공연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실황 방송되고 있고, 도이치그라모폰과의 협력을 통해 다양한 음반들이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현재 두다멜은 LA필하모닉과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초청을 받아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비엔나 필하모닉과 함께 유럽과 아시아 투어를 가졌습니다.

 

 

 

 

 

바렌보임, 얀손스, 래틀 등이 총출동한 '2014년 루체른 페스티벌'의 마지막 3일 콘서트는 두다멜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에 돌아갔으며, 이러한 왕성한 활동으로 LA필하모닉은 그의 임기를 2018-19 시즌까지 확정했습니다. 두다멜은 겸손하고 유연한 자세로 단원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소통하는 열린 지휘자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권위 중심의 과거의 지휘자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미래가 기대되는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루체른 페스티벌 (Lucerne Festival)은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리는 국제 클래식 음악축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과 다양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제공합니다. 이 축제는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특징으로 하며, 매년 다수의 해외 오케스트라와 유명 솔리스트들이 참여합니다. 

Lucerne Festival 은 193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주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축제는 매년 여름, 루체른 문화 및 회의 센터(KKL)에서 100개 이상의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규모 축제로 발전하였습니다. 2000년에는 이름이 루체른 국제 음악 축제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축제는 매년 여름, 일반적으로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진행됩니다.  여름 축제는 약 30개의 심포니 콘서트를 포함하며,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솔리스트들이 참여합니다. 또한 특별 게스트 아티스트들이 "아르티스트 에투알"및 "작곡가인 레지던스"자격으로 초청됩니다. 

루체른 축제는 매년 당시 사회적 이슈나 주제를 반영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 예를 들어, 2021년 여름 축제의 주제는 "미친 crazy"이었습니다. 또한, "미래의 음악 Music for Future"캠페인을 통해 젊은 관객과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데 힘 쓰고 있습니다.

루체른 아카데미는 2003년 피에르 불레즈와 미하엘 해플리거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 음악 작품에 대한 마스터 클래스와 연주를 진행하여 현대 음악의 창작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 2021년에는 루체른 축제 현대 오케스트라(LFCO)가 설립되어 현대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KsAr2QDoY

 

 

 

 

2006년, 두다멜은 도이치 그라모폰사와 전속 계약하여 베네수엘라 국립 청소년 교향악단과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교향곡 7번>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말러 교향곡과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음반으로 발매하는 작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_twvWsgDCU

 

 

 

 

 

 

두다멜은 2007년 그라모폰 특별 공로상, 2009년 글렌 굴드상, 2011년 그라모폰지 선정 올해의 아티스트상, 2012년 그래미상 최우수 오케스트라 연주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BYwZQLsL74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두다멜은 어디를 가나 모서리가 접힌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의 고백록( Confessions)과 낡은 니체의 소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Also sprach Zarathustra)를 늘 갖고 다닌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자라던 청년시절부터의 습관인 거지요. 

 

 

 

 

뉴욕필하모닉 지휘하는 슈퍼스타 구스타보 두다멜/NYCulture Beat

 

 

 

 

음악은 내 인생과 베네수엘라에서 위험에 빠져있던 수천명의 삶을 구제해주었다.
음식처럼, 의료보험처럼, 교육처럼
음악은 모든 시민에게 권리가 되어야 한다.
-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Gustavo Dudamel /NYCultureBeat

 

 

 

 

지난해 2022년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약간 개선된 후 그는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빈민층 청소년 음악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 El Sistema'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두다멜도 30여 년 전 이 엘 시스테마 센터에서 첫 음악 레슨을 받았던 이유입니다. 그의 음악 여정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음악을 필요로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말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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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회화사에서 오랫동안 불모지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한스 홀바인, 안토니 반 다이크 등의 외국 출신의 화가를 제외하고, 눈여겨볼 화가는 없었습니다. 영국 화가에 의한, 영국 독자적인 양식을 가진 회화가 태어난 것은 18세기, 유럽 대륙에서는 로코코 미술이 전성기일 때였습니다. 호가스는 그러한 18세기의 영국 화단을 대표하는 국민적 화가입니다.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1497-1543)은 독일의 유명한 화가이자 초상화가로, 주로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화가인 아버지 아래에서 성장하며 예술적 감각을 키웠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아수크스부르크파의 사실적인 화풍을 익혔습니다. 그의 경력 초기에는 바젤에서 활동하며 많은 초상화와 삽화를 제작하였고,나중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모델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특징지어지며, 인물의 성격과 감적을 잘 포착합니다. 홀바인의 대표작 으로 < 대사들>, <헨리 8세의 초상>, <로트르담의 에라스무스>, 그리고 <죽음의 무도> 가 있습니다. 특히 <헨리 8세의 초상>은 그의 능력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려졌습니다. 또한 <에라스푸스의 초상>은 그의 세밀한 묘사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1599-1641)는 초상화가로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1632년부터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그의 생애 동안 200점이 넘는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내적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부드러운 구도와 화려한 색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종교, 신화, 우의적 주제를 다루는 데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반 다이크는 대가 루벤스에게 배우고 그의 조수로 활동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와 같은 대가들의 영향을 받았고요. 이러한 경험은 그가 영국 회화에 미친 영향력을 더욱 강하게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특히 영국 미술계에서 중대한 역할를 하며, 많은 초상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 찰스 1세의 초상>,<찰스 1세의 사냥> 등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막장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가장 큰 희열과 쾌감을 주는 소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는 당시 사회와 사람들을 비판하는 풍자를 그려낸 작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돈 많은 귀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많이 그렸지요. 부패한 귀족들의 세계와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하는 꼴사나운 부르주아 출세주의자, 탐욕스런 성직자, 게으른 군인, 가난한 하류계층을 포함한 모든 사회계급의 관습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의 그림들은 한 그림에서 끝나지 않고, 연작물로 그려진 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지금의 드라마처럼 어떤 스토리가 이어진 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그의 연작 중 하나인 <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살펴봅니다.  이 연작에서 그는 돈 많은 귀족들의 삶을 풍자하고 나섭니다. 지금의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그 당시 귀족들의 삶을 작품을 통해 알아봅니다. 

 

 

 

 

 

I- The Heir, 1732, oil on canvas/wikipedia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1732) 은 총 8가지 그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연작의 첫번째가 바로 위 그림 <상속자 The Heir> 입니다. 그림 중앙에서 거만하게 서 있는 주인공의 이름은  '톰 레이크'입니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산을 상속받아 갑자기 돈방석에 앉은  졸부입니다. 덕분에 레이크(Rake)는 부유한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매춘과 도박에 많은 재산을 탕진하며 난봉꾼으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합니다.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1732)에는 레이크가의 변해가는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맨 좌측에  난봉꾼 레이크의 약혼녀, '사라 영'이 보입니다 . 그런데 그녀가 울고 있네요. 레이크가 돈 몇 푼을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사라에게 돈을 줄 테니 약혼을 깨자고 하는 상황인가 봅니다.  이렇게 염치없는 약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곁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같은 주제의 판화 본 도 있습니다. 유화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듯 싶습니다. 

 

 

 

 

The Heir, 1735, engraving/wikipedia

 

 

 

 

II- The Levee, 1732/wikipedia

 

 

 

연작 두 번째, < Surrounded by artists and professors>. 제목 그대로 예술가들이 레이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의 주위엔 자세를 취하고 있는 펜싱 선수와 ,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디가드를 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반가운 인물도 등장합니다. '음악의 어머니'로 익숙한 음악가, 헨델입니다. 비록 피아노 치는 뒷모습으로 나왔지만, 또 그마저도 후대 사람들의 추측으로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쌓여있던 재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레이크에게 상류층이 즐기는 스포츠나 예술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시종일관 거만하게 서있는 레이크의 모습이 생동감 있습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독일 출신의 작곡가로, 바로크 시대 음악의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1685년 3월 5일 프로이센 마그데부르크 공국 할레에서 태어났습니다. 1759년 4월 14일 잉글랜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고요. 헨델은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후, 함부르크,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특히 런던에서의 성공은 그의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는 영국 왕립 음악원의 음악 감독으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는 런던에서 첫 공연을 하였으며, 이는 그의 경력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헨델은 오페라, 오라토리오, 기악 작품 등 다양한 장르에서 46곡의  오페라와 23곡의 오라토리오를 포함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풍부한 리듬과 멜로디, 극적인 요소가 결합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III - The Orgy, 1732, Oil on Canvas/wikipedia

 

 

 

 

연작 세 번째., <Scene in a Tarven> 입니다. 술집에서 여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레이크의 모습입니다. 그의  풀린 눈빛과 널브러져 있는 다리를 좀 보세요 . 그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그를 마신 건지 반쯤 걷어 내려진 양말이 만취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거나하게 취한 레이크의 주변에  약혼녀인 사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니, 두 여인이 레이크의 시계를 훔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동공 풀린 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꿈에도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있습니다.  이 점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매독을 감추기 위해 찍었던 점이라고 전해집니다.   레이크는 이 때부터 본격적인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매독은 성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성병으로, 매독균( Treponema pallidum)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입니다. 이 질병은 감염 후 여러 단계로 진행되며, 각 단계에서 다양한 증상과 합병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감염된 산모가 아기에게 태어날 때도 감염될 수 있습니다. 매독균은 손상된 피부나 점막을 통해 침투하여 감염을 일으킵니다. 

1기 매독: 성 접촉 시 감염된 후 약 3주 후에 통증이 없는 궤양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2기 매독: 1기 매독이 회복된 후 약 4주에서 10주 사이에 발생합니다. 불그스름한 발진, 림프절 비대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잠복 매독: 증상이 없는 상태이며, 과거의 감염력이 있으나 감염에 대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감염 후 2년 이내)
3기 매독: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몇 년 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경계와 심혈관계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감염성이 없으며, 다양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페니실린 주사로 쉽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치료 후에는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며, 감염이 완치되면 전염성은 사라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6EVj6Ls_K0

 

 

 

 

 

 

 

 

 

 

 

 

IV- The Arrest, 1732, oil on canvas/wikipedia

 

 

 

 

네 번째 연작, < The Arrest for theft> 입니다.  레이크에게 웨일즈의 집행관들이 찾아와 채무불이행으로 체포하려 합니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그에게, 처음으로 돈 때문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전까지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레이크 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니 불쌍한 약혼녀, 사라입니다. 사라는 그를 체포하려는 집행관들을 막고 대신 돈을 지불하려고 합니다. 모자가 들어 있는 가방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지런히 길거리에서 모자를 팔고 있었나 봅니다.  돈을  마구 써대는 것도 모자라 체포될 위기에 처한 약혼자의 모습과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V- The Marriage, 1732, oil on canvas/wikipedia

 

 

 

 

 

다섯 번째,<Marrige> 입니다. 드디어 사라와 결실을 맺는 구나! 했더니  아닙니다. 레이크는 어떤 늙은 여인과 결혼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도 젊은 시녀에게로 눈이 돌아가는 레이크를 보아 추측하건대, 그가 결혼한 이유는 여인이 쌓아둔 재산 때문임이 틀림없습니다. 반지를 끼워주면서도 신부를 쳐다보지 않네요. 

 

 

 

 

 

그럼 일편단심 사라는 어디로 갔을까요? 시녀의 뒤를 보면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짐작대로, 이들은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아마도 레이크의 결혼을 막기 위해 찾아온 듯한 그들을 누군가 막아서고 있습니다. 난봉을 부리는 약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지켜왔던 사라, 돈 때문에 다른 이와 결혼하는 약혼자를 보며 아마 그녀의 속은  숯 검댕이가 되었겠죠. 

 

 

 

 

 

VI- The Gaming House, 1732, oil on canvas/wikipedia

 

 

 

 

 

여섯 번째 연작, < The gaming house> 입니다. 여전히 도박을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이크입니다. 그는 가발을 벗어던진 채 하늘에 대고 신의 가호를 빌고 있습니다. 아마 이미 많은 돈을 잃은 뒤 도박에서 이겨 돈을 얻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작의 막바지로 갈수록 레이크의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도박장의 어둡과 자욱한 모습이 왠지 그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듯합니다. 

 

 

 

 

 

 

 

 

VII- The Prison, 1732, oil on canvas/wikipedia

 

 

 

일곱 번째, < The Prison> 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수감된 레이크입니다. 당시 영국에는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들만 가는 프리트( Fleet) 감옥이 따로 있었습니다. 

 

프리트(Fleet)감옥은 영국 런던에 위치했던 역사적인 감옥으로, 주로 채무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운영된 이 감옥은 과거 금융 문제로 인한 부채로 인해 사람들을 법적으로 수감했던 장소로 유명합니다. 프리트 감옥은 원래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요새에 세워진 건물로, 나중에 채무자와 범죄자를 수감하는 용도로 변모했습니다. 감옥 내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수감자들은 불안정한 생활 환경 속에서 고통 받았습니다. 감옥은 성격상 임시적이거나 영구적인 수감자 모두를 위한 장소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생계 문제로 인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감옥의 운영은 채무자를 수감한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19세기 중반에는 매독과 같은 여러 감염병의 확산과 같은 문제로 인해 감옥의 운영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되면서 여러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프리트 감옥은 19세기 말 경에 폐쇄됩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에 따라 '채무자 감옥'의 역할과 필요성이 변화함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습니다. 이후 채무자 수감에 대한 대체 수단들이 마련되면서 이 감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프리트 감옥의 자리는 역사적 기념물로 남아 있으며,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WG8cvs5ubQ

 

 

 

 

 

일곱 번째 작품에서 그의 주위에 현재 아내인 늙은 여자와 맥주를 들고 있는 '비어 보이'가 등장합니다. 레이크의 왼편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레이크가 감옥안에서조차 빚을 지고 음식을 먹은 듯합니다. 바닥으로 떨어지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그는 매우 당황한 기색입니다. 레이크의 눈은  튀어나왔고, 손과 몸은 두려움으로 떨리는 듯합니다. 불쌍한 사라, 그녀는 감옥에 수감된 전 약혼자의 모습을 보고 실신해있습니다.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를 진정 사랑했을 순진하고 착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지금같으면 상상도 못할 캐릭터입니다. 미련없이 떠났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레이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VIII- The Madhouse, 1732, oil on canvas/wikipedia

 

 

 

 

연작의 마지막, 여덟번째 그림<  The Madhouse> 입니다. 레이크는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습니다. 옷을 벗은 채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고요. 첫 그림에서 자신만만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라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눈물을 닦으며 그를 위로하는 그녀, 그러나 레이크는 사라를 등지고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 사랑했던 이의 말로를 지켜보는 사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참고로 이 그림에서는 정신병원에 찾아온 귀부인들이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호가스 연작의 큰 특징입니다. 지금의 드라마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호가스의 다음 그림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드라마 다음 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은 넷플릭스로 몰아보는 경향이 많지만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IsPQAZ0wmq0

 

 

 

 

 

 

 


 

 

 

 

https://www.youtube.com/watch?v=iwdCKxz9s7w

 

 

 

 

 

 

 

 

 

 

London/wikipedia

 

 

 

 

 

윌리엄 호가스(Wiliam Hogarth, 1697-1764)는 1697년 런던에 가난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은세공장의 제자, 판화가로서  밑바닥 생활도 했고요. 당시의 세태를 통렬하게 풍자한 연작 회화가 알려지기 시작화면서  서민들에게 인기를 얻어 , 풍자화의 아버지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rZt5Bb9y3c

 

 

 

 

 

 

 

The Sleeping Congregation, 1728, oil on canvas/Minneapolis Institute of Art Collection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의 < The Sleeping Congregation>(1728)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적 비판의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고요. 이 작품은 주일 설교 도중 잠에 빠진 신도들을 묘사하여, 당시 교회의 경직된 모습을 꼬집고 있습니다. 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찰과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화가는 예배 중에 졸고 있는 신도들의 모습을 통해 종교적 의무와 헌신의 결여를 드러내고, 교회의 위선을 풍자하고 자 합니다. 

 

 

 

 

 

 

이 작품은 호가스가 자주 사용하는 스토리 텔링 기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탈진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짐짓 근엄한 표정의 동료조차  제단 앞에 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놓고 졸고 있는 남녀 한쌍도 보이고요. 이러한 장면을 통해 호가스는 종교의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호가스는 종교의 권위자와 신도들 간의 관계를 통해, 신앙심이 결여된 사회를 비판합니다. 인물들은 무관심과 나태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자신의 신앙을 깊게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 영국 사회의 종교적 형식주의를 직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before Seduction and after, 1730-31/Flickr

 

 

 

before Seduction and after, 1730-31/Alamy

 

 

 

 

 

 

 

 

순결이라는 주제를 각각 <이전> 과 <이후>라는 제목으로 누가봐도 그 상황을 알 수 있는 그림을 1730-31년 사이에 연작으로 그렸습니다. 여 주인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강아지가 달려들다가 깨진 유리 조각만큼이나 처박힌 모습입니다. 

남녀 사이의 심리 변화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감정과 상황에 처해있는 모습을 통해 인간 관계의 복잡성을 전달합니다

 

 

 

 

 

 

 

 

작품  속 'before' 의 모습은 남자가  여성을 유혹하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여인은 여전히 저항의 기미를 보이며,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과 제스처는 각자의 심리 상태를 뚜렷하게 드러내며, 특히 여인의 얼굴은 긴장감과 소심함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뒤이어 나타나는 'after'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의복이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통해 이미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는 애처럽게 매달리며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고, 남자는 다소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 심리적 상황의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에 묘사된 여러 요소들은 당시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과 여성의 위치를 상징하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 호가스는 남녀 간의 관계를 단순한 유혹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힘의 역학과 개인의 갈등을 묘사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18세기 사회의 복잡한 성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탐구하는 중요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호가스의 <난봉꾼의 행각 A Harlot's Progress> 은 18세기 런던 사회를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매춘부의 비극적인 삶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당시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A Harlot's Progress, Plate 1. Moll Hackabout arrives in London at the Bell Inn, Cheapside/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2mKHAwmFvJs

 

 

 

 

 

 

 

 

 

 

 

plate 2. Moll is now a kept woman, the mistress of a wealthy merchant/wikipedia

 

 

plate3. Moll has gone from kept woman to common prostitute/wikipedia

 

 

 

 

 

plate4. Moll beats hemp in Bridewell Prison

 

 

 

plate5. Moll dying of syphilis

 

 

 

 

 

 

plate6. Moll's wake

 

 

 

 

 

<난봉꾼의 행각>은 호가스의 첫 번째 시리즈로, 매춘부의 삶과 그로인한 사회적 비극을 표현합니다 . 이 작품은 런던의 하층 사회에서 여성의 상황을 심도 있게 다루면서 부당한 대우와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매춘부가 처음에 가지고 있던 순수함이 차츰 퇴색해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호가스는 이 작품을 일련의 판화로 제작하여, 각 판화는 매춘부의 삶의 특정 순간을 포착합니다. 총 다섯 개의 판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판화는 매춘부의 등장, 타락, 그리고 최종적인 파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판화에서는 주인공이 처음으로 매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간 단계에서는 주인공이 친구와 연인에게 배신 당하며 점점 심각한 상황에 빠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마지막으로, 고통과 절망에 시달리면서 인생의 끝을 향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호가스는 이 작품을 통해 매춘부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만들고 방관하는 사회 전체를 비판합니다. 그가 그린 매춘부의 이미지는 당대 사람들에게 도덕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부각시킵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매춘부의 타락이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dd8h0

 

A Harlot's Progress - video Dailymotion

Follow the life of a beautiful, troubled prostitute in this drama. William Hogarth, played by Toby Jones ("Harry Potter", "Captain America"), recalls the life and death of an alluring and mysterious woman he once knew.

www.dailymotion.com

 

 

 

 

 

 

 

 

 

 


 

 

 

 

The paintings of Four Times of the Day(clockwise from top left: Morning, Noon, Night, and Evening, 1736/ wikipedia

 

 

 

 

 

<Four Times of the Day >는 윌리엄 호가스( Wiliam Hogarth, 1697-1764)가 1736년에 완성한 네 점의 유화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은 런던의 일상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고위층과 서민층 간의 상호작용을 그립니다. 각 장면은 하루의 시간을 표현하며, 특정 사건이나 인물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도시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Four Times of the Day>시리즈는 아침, 정오, 저녁, 밤의  네 가지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각각의 장면은 런던의 다양한 위치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활동을 담고 있습니다. 아침은 신사숙녀들이 교회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정오에는 두 문화가 도로를 가로막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저녁 장면은 염색공의 가족이 사들인 물건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며, 밤 장면은 불량한 활동이 벌어지는 모습입니다. 

 

 

 

 

 

호가스는 고전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이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특히 고대 로마의 풍자작품과 조지안 시대의 사회를 반영한 작품들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각 장면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호가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사회적 계층과 관념을 재현하고 있으며, 특히 아침 장면에서는 한 신사가 교회로 향하는 모습을 통해 겉으로는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습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호가스가 1736년 만든 원래의 그림을 기반으로 하여 나중에 인쇄되었습니다.  또한, 호가스의 가장 큰 성공작인 < A Harlot's Progress> 와 <  A Rake's Progress> 이후에 발표된 최초의 인쇄 세트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연대기적 서사를 형성하지 않으며, 각 장면의 인물들은 독립적입니다. 

 

 

 

 

 

호가스는 각 장면을 통해 유머와 사회적 비판을 혼합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는 세밀한 인물 표현과 공간 배치를 통해 복잡한 인간 관계와 사회적 상징성을 드러냈습니다. 호가스의 예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당시 런던 사회의 다면적인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엿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The Shrimp Girl, 1740-1745, oil painting,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사회 풍자를 묘사한 작품들과 다르게 <새우 파는 소녀> 작품은 호가스의 생기 있고 자유로운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소녀의 머리 위에 새우가 담긴 바구니가 있습니다. 거리에서 이 소녀를 보고 화실에서 빠르게 작업을 시작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니엘 그레이엄의 네 자녀를 그린 단체 초상화로, 그 중 막내인 토마스는 이미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는데, 이는 이 그림이  그려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The Graham Children, 1742, oil on canvas,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The Graham Children>는 총 4명의 아이들이 묘사된 그룹 초상화로, 중앙의 금색 유아용 카트에 앉아 있는 토마스와 그의 세 형제, 자매들인 헨리에타, 리처드, 안나 마리아가 함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이들의 생동감을 잘 포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리처드는 오르골을 조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안나 마리아는 춤을 추고 있고요. 이러한 각각의 행동은  아이들의 순수한 즐거움과 함께 세상의 덧없을 시사합니다.

 

 

 

 

이 그림에는  여러 상징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마스가 잡고 있는 부분적으로 먹은 과자와 그 곁에 있는 장례용 꽃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암시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시계 위의 날개 달린 천사와 낫, 모래시계는 토마스의 사망과 관련하여 시간을 나타냅니다 .  호거스는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어린 시절의 덧없음과 함께 순수함이 사라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Study of Thomas Graham, Black and Red chalk on grey paper, British Museum, Londoa/wikipedia

 

 

 

 

 

호거스는 이 작품에서 대담한 색상과 섬세한 세부 묘사를 사용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실제 크기로 그려져 있으며, 그의 화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선'이 그림 전체에서 드러납니다. 테마적으로 두 가지 시점이 조화롭게 엮여 있어,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Serpentine lines on the Graham Children, 1742/wikipedia

 

 

 

 

 

The Cat and its prey

 

 

 

 

Orpheus on the bird-organ

 

 

 

Time with scythe and hourglass

 

 

 

 

 

The fruit basket

 

 

 

The flightless bird on the baby cart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서의 아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이들은 더 이상 단순한 재산으로 여겨지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받기 시작했습니다. 호거스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작품을 통해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단순한 가족의 일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표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Taste in Hight Life,1742, oil on Canvas/wikimedia commons

 

 

 

 

 

 

 

< Taste in High Life>는 1742년에 제작된 유화 작품으로, 당시 상류층의 패션과 그들의 표면적인 취향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호가스가 질 낮은 사회적 요인을 고발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여러 작품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당시 유행하던 과장된 의상으로 차려입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18세기 고급사회의 가벼운 생활 방식과 허영심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취향 Taste in High Life>(1742)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패션 트렌드의 변화를 풍자하며 당시의 고급 스러운 의복을 착용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작품의 중앙에는 큰 후프 스커트를 입은 노파와 화려한 복장을 한 남성이 서로의 사소한 것에 감탄하며 어린이 페이지 보이와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의 주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페이지 보이는 18세기 영국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 주인이 있는 가정의 하인이나 시종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종종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서 일을 하며, 주인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페이지 보이는 일반적으로 젊은 소년이 맡는 역할이며, 복장이 화려합니다. 그들은 귀족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주로 서빙,서신 및 전달, 개인 시종 등의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는 당시의 복식과 예절을 반영합니다. 

 

 

 

 

호가스는 이 작품을 메리 에드워즈의 주문에 의해 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상류층의 우습고 과도한 패션을 조롱하고 싶어 했습니다. 호가스는 특정 주제의 주문 그림에 대해 열정이 낮았지만, 이 작품은 풍자적인 메시지를 통해 고급 사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조롱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캐리커쳐와 함께 형상화된 상징적 요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해, 작품 속의 원숭이는 비천한 모방의 상징으로, 당시 사람들의 허영심과 패션의 유혹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 배경 그림 속 화재는 유행의 덧없음을 상징하며, 의상과 액세서리의 과도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호가스의 < 최고의 취향 Taste in High Life> 는 18세기 사회 풍습을 조명하는 동시에 그것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작품입니다. 호가스는 미술을 통해 대중의 신념과 가치를 반영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제시함으로써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그림은 또한 사회적 계급과 그들 간의 역할을 탐구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국은 빅토리아시대 전에는 회화쪽은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화가 호가스는 풍자화라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로 유럽 전역에 인기있는 작가였습니다. 호가스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에서는 기품 있고 우아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없는 귀족들은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신흥 부르조아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당시의 풍습을 리얼하게 묘사한 아래 그림은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기 책과도 같이 풍자와 해학으로 당시의 영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략결혼 Marriage A-la- Mode, 1 January 1743,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여섯 점의 회화로 구성된 '정략 결혼 Marriage A-la- Mode' 시리즈는  18세기 말, 영국 사회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던 화가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의 대표작입니다.  그는 당시에 흔했던 정략결혼의 폐해를 연극의 한 장면처럼 펼쳐보였습니다 . '혼인 계약'이 그 첫 장면입니다. 

 

 

 

 

양가의 가장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거래가 한창입니다.  풍채 좋은 백작이 정복왕 윌리엄으로부터 시작된 뿌리깊은 가문의 족보를 호기롭게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풍으로 못 쓰게 된 그의 오른발은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었음을 증명합니다. 맞은편에 앉아 혼인계약서를 손에 쥔 상인은 딸을 백작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는 대가로 테이블 가득 금화를 쏟아놓았습니다. 부유한 상인과 몰락한 귀족은 자식들을 매개로 서로가 간절히 원하던 것, 즉 돈과 권력을 맞바꿨습니다. 

 

 

 

 

 

정작 결혼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예비신랑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불안한 듯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신붓감은 오히려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변호사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 사이에 걸려 있는 그림 속의 섬뜩한 메두사가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다섯 점의 회화는 탐욕으로 시작된 이 결혼이 결국은 불륜과 패행을 거쳐 치정살인과 패가망신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 시리즈는 판화로도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호가스는 냉정한 비판의식으로 사회의 이면을 들춰낸 최초의 풍자화가로 꼽힙니다. 

 

 

 

 

1.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이 <계약>입니다.

 

대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는 한 귀족의 저택에서 신랑의 아버지는 한 손으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으로 시작되는 (대단한 집안임을 자랑)족보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신부 아버지(신흥 부르조아)가 지불한 결혼 지참금인 금화와 지폐가 보이고요.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남자는 귀족으로부터 돈을 받아갈 빚쟁이입니다.

 

 

 

 

 

정략결혼의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는 나란히 앉아 있지만, 신부는 손수건에 반지를 끼워 돌리며 지루해 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있고요. 신부와 신부에게 말을 거는 변호사는 그녀의 애인입니다. 왼쪽 벽에 걸린  카라바조의 <메두사> 작품이 두 남녀의 불길한 미래를 미리 예언하는 것만 같습니다. 자식들의 결합을 통해 한쪽은 명예를, 한 쪽은 돈을 얻고자 하는 당시 귀족과 부르조아의 풍습을 재미있게 그렸습니다. 

 

 

 

 

 

 

 

 

 

 

Later engraving of the painting, mirrored and with a clearer reproduction of many figures, 1745/wikipedia

 

 

 

 

 

 

A 1734 marriage contract/wikipedia

 

 

 

 

 

 

Marriage A -la- Mode: 2. The Tete a Tete, 1743,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2. 두 번째 작품 < 아침>

 

신혼이 시작된 멋진 실내 장식으로 꾸며진 집안의 <아침>의 모습입니다. 잘 차려입은 신랑은 밤새 축제를 즐기다가 이제 들어왔는지 파김치가 되어 있습니다. 귀여운 개가 간밤 신랑의 행선지를 알려주는 듯 합니다. 신랑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신부는 모닝티를 마셨지만 아직 졸린 듯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아마 신부도 밤새 논 듯 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 악기와 악보, 집사는 지불해야 할 돈과 장부를 끼고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_E0B00kXE

 

 

 

 

 

 

 

 

 

 

Marriage A-la-Mode: The Inspection,1743,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3. 검진 (The Visit to the Quack Doctor).

 

제목  그대로 성병 검사와 치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의사 앞의 신랑은 목의 반점이 보이는 걸로 보아 이미 심각한 성병에 걸린 듯 합니다.  울고 있는 듯한 어린 여자의 입술 근처에도 포진이 생겼네요. 짐작컨데, 당시에 이런 풍속도 유행하였는데, 결혼한 귀족들이 하층민 출신의 여자를 몇 명씩 거느렸다고 합니다.  벽과 의사의 책상위에 놓인 해골이 이들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 하네요. 

 

 

 

 

 

 

 

 

Marriage A-la-Mode: 4. The Toilette, 1743,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4. <부인의 침실>

 

남편이 저러는데 질 수 있나요? 신부 역시 좀 더 고급지게 놀고 있습니다.  백작부인의 지위로 올라 간 그녀. 화가들의 걸작이 걸려 있는 부인의 침실에서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고, 악사는 연주하고 있습니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은 머리 손질을 받으며 신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당시 귀족의 사치스런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사, 즉 1편의 그 변호사는 손에 오페라인지 연극표를 한 장 들고 부인을 꼬시고 있네요. 이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코레지오의 <제우스와 이오>, <헤롯과 딸들> 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Jupiter and Io by Correggio,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wikipedia

 

 

코레지오( Correggio, 1490-1534)의 <제우스와 이오Jupiter and Io>는 르네상스 시대의 에로틱한 미술작품으로, 제우스의 욕망과 변신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제우스와 이오의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우스와 이오>는 제우스의 불륜을 주제로 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상류층, 특히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곤치가의 의뢰로 제작된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제우스는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인 이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오는 제우스의 접근을 피하며 도망치고, 이를 관찰한 제우스는 어둠의 장막을 내리며 이오를 잡으려 합니다. 궁극적으로 제우스는 이오를 구름으로 변신시켜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만, 이오의 처지는 한층 더 복잡해집니다. 

코레지오는 <제우스와 이오>에서 제우스를 구름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구름으로 변한 제우스는 이오를 껴안고 이승며, 그림 속 남자의 얼굴은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오의 수줍은 모습과 황홀감은 그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며,  화가의 독창적인 기법이 돋보입니다.  구름과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표현해 그 당시 다른 화가들이 시도하지 않은 방식입니다. 코레지오는 이 작품을 통해 신화의 내용을 새로운 방법으로 전달하였으며, 이오의 입술과 제우스의 얼굴, 그리고 구름을 형상화한 손들이 충실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detail/wikipedia

 

 

 

 

Marriage A-la-Mode:5. The Bagnio, 1743,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5. 그 남자의 죽음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흥청망청 살아 가던 이들의 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날이 다가옵니다. 가면극을 보러 간 부인과 애인이 연극 진행 중에 은밀하게 방에서 즐기는 순간, 남편이 들이 닥친겁니다. 두 남자의 격투 끝에 남편은 칼에 맞고 죽습니다. 애인은 왼쪽 창문을 통해 도망가고 있네요. 

 

 

 

 

 

 

 

 

Marriage-A-la-Mode: 6. The Lady's Death,1743, No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6. 그 여자의 죽음 : 이 들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편의 사후, 여자는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옛날의 화려한 집안은 다소 몰락한 듯합니다. 여자의 남편을 죽인 애인이 결국 잡혀 교수형이 처해지자 여자는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합니다. (바닥에 약병이 보인다). 어린 딸이 유모에게서 엄마를 찾으며 볼을 비비고 있으나, 벌어진 입,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보니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점에서도 아버지는 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고 있습니다. 검은 옷의 의사가 제 몸 치장에 바빠 부인을 돌보지 못한 하인의 멱살을 잡고 있고요. 이와중에 몰골이 앙상한 개 한마리가 주인이 먹다만 돼지머리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는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부모들의 욕심 때문에 희생된 젊은 부부는 원치 않던 결혼 생활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작가는 이 연작을 통해서 당시에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정략 결혼의 폐해를 그림으로 보여줌으로써 귀족들의 악습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호가스는 이 밖에도 <탕아의 편력>, <선거운동> 등의 연작을 통하여 마치 한편의 연극같은 풍속화로 사회에 만년했던 부정부패에 대한 고발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FJ9tHJA2Sw

 

 

 

 

 

 

 

 

 

 

 

 

 


 

 

https://www.youtube.com/watch?v=bIe3nvBo8g0

 

 

 

 

 

 

 

 

 

 

 

Painter and his pug, 1745, Self-Portrait with his pug, oil on Canvas, Tate Britain , London/wikipedia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초상화입니다. 화가는 셰익스피어, 밀턴, 스위프트의 책더미 위에 놓여 있습니다. 화가의 팔레트에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선'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고요.

 

 

 

윌리엄 호거스( William Hogarth, 1697-1764)가 1745년 제작한 <화가와 그의 퍼그 Painter and his pug>라는 작품은 작가가 사랑하는 퍼그 트럼프와 함께한 자기 초상화입니다. 처음에는 호거스가 정장 차림으로 그려질 예정이었으나, 작품은 더 캐주월한 표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작가의 작품에 개인적이고 친밀한 터치를 반영합니다. 트럼프의 포함은 아티스트와 그의 애완 동물 간의 유대감을 상징하며, 이 퍼그는 작품 내내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합니다. 

 

 

 

 

 

이 초상화에서 호거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퍼그는 팔레트와 책 등 주변의 예술 재료에 무관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요.  개의 무관심은 화가의 창의적 환경의 생동감과 강하게 대비됩니다.  이는 예술과 작가, 그리고 그들의 주제 간의 관계에 대한 논평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역동성은 퍼그 뒤에 있는 천이 바같쪽으로 펼쳐짐으로써 그려진 세계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그림의 깊이를 증대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1745년은 호거스에게 중요한 시기로, 그는 예술적 노력과 사회적 논평을 결합했습니다. 트럼프와의 친밀한 존재는 호거스의 예술적 정체성이 깊이 엮어 있음을 보여주며, 퍼그는 그를 상징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더 넓은 사회적 주제들과 대비되는 충성심과 동반자 관계에 대한 아티스트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트럼프는 호거스의 삶에서 단순한 동반자를 넘어, 여러 작품에 등장하여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부분으로 이바지했습니다. 퍼그의 형태와 태도는 호거스 예술의 반복적인 모티프가 되어, 그의 사회적 논평의 진지한 요소와 경쾌하고 즐거운 순간의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The Idle 'Prentice Executed at Tyburn-Plate11 of 12 of the series, showing the final reward of idleness,1750/wikipedia

 

 

 

 

 

 

윌리엄 호거스(Wiliam Hogart, 1697-1764)의 < The Idle 'Prentice Executed at Tyburn'>은 1750년에 제작된 12부작 시리즈 중 11번째 판화로, 게으름이 초래하는 최후의 보상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호거스의 <Industry and Idleness> 시리즈의 일환으로, 일에 대한 성실함과 게으름의 결과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Hogarth 는 이 작품을 통해 게으름의 재앙과 유혹적인 생활의 결과로서 비극적인 결말을 그립니다. < The Idle 'Prentice Executed at Tyburn> 에서는 한 게으른 견습생이 처형을 기다리며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판화는 관리되고 있는 대중의 시선을 보이기 위해 장면을 확장하여 많은 인파가 모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게으른 견습생과 그의 관을 실은 마차가 있으며, 그는 성경을 읽으며 마지막으로 회개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배경에는 처형장과 그를 기다리는 인파가 보이며, 여기에 속박되어 있는 방식의 강렬한 사회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마차에는 여성들이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판화는 게으름의 결과로서의 죽음을 강조하며, 특히 'Idle'이라는 인물의 겉모습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통해 깊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판화의 전체적인 구성과 등장 인물들은 호거스의 독창적인 시각을 통해 강렬한 도덕적 경고를 제시합니다. 

 

 

 

 

The Idle'Prentice Executed at Tyburn은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사회에 대한 비판과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호거스는 이 시리즈를 통해 일의 중요성과 게으름의 위험성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Hogarth's Servants, 1750-55, Tate Britain,London/wikipedia

 

 

 

 

당시의 이런 식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Hogarth's Servants>는 윌리엄 호거스가 1750년에서 1755년 사이에 제작한 유화로, 호거스의 여섯 명의 하인들의 얼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62*75cm 크기로 ,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고요. 

 

 

 

<Hogarth's Servants> 는 세 명의 남성과 세 명의 여성 얼굴이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각 인물의 나이는 다양하며, 여성 인물들은 젊은 모습이고 남성들은 소년에서 노인까지의 폭넓은 연령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호거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다양함은 인물들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며, 그는 자신의 하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그림은 하인들의 평범한 옷차림과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호거스가 하인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린 것으로, 특정 주문 없이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기 위해 작업실에 걸어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 이 작업은 그가 한때 진행한 "인물 및 캐리커쳐" 시리즈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작품의 특징적인 구성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여섯 인물들의 생동감을 강조합니다. 

 

 

 

호거스 (Hogarth)의 작품은 조명, 색채 및 인물의 표정에 있어 뛰어난 세련미를 발휘합니다. 인물들은 각각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고요.  이는 관람객이 이들의 개인성에 쉽게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상단 왼편의 조명이 비춰지며, 그림은 스케치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호거스는 인물의 생리적 차이를 탐구하고 있고요.  이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인물의 특성을 분석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Hogarth's Servants>는 호거스의 사망 후 그의 아내에 의해 상속되었고, 1789년 마리 루이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전시되었고, 과거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마지막으로 1960년에 테이트 갤러리로 옮겨졌습니다. 

 

 

 

 

 

 

 


 

 

 

 

 

The Analysis of Beauty, plate1, 1753/ The Met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  < The Analysis of Beauty> (1753)입니다.  이 판화는  1753년에 발표되어, 호가스의 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 The Analysis of Beauty , Plate 1> 은 호가스의 미적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오프닝 판화입니다. 중앙 무대는 고전 조각의 유명한 작품들이 가득한 안뜰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미에 대한 분석을 참고하여 현대적인 개체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메디치 비너스 조각상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다양한 고전 및 현대의 조각들이 그림을 채우고 있습니다. 

 

 

 

 

호가스의 판화는 그의 미적 이론의 중심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다수의 조각들 및 현대적인 물체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조화는 호가스의 이론인 '아름다움의 선'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며, 이는 곡선의 형태가 시각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생동감과 움직임을 연상시킬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각 조각과 물체는 고유의 의미와 메시지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호가스는 "Beauty"라는 개념을 단순한 미적 기준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요소들과 연결짓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이론을 여섯 가지 원칙으로 나눠 설명하며, 이 원칙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아름다움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원칙들에는 적합성, 다양성, 규칙성, 단순성, 복잡성, 그리고 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Analysis of Beauty >판화는 호가스의 미적 이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작품으로, 1753년 발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 독립적으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에서의 호가스의 영향력과 재능을 대변하며, 그가 영국의 풍자적 미술 전통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Satire of False Perspective, 1754, engraving on paper/wikipedia

 

 

 

 

 

<Satire on False Perspective >는 1754년  윌리엄 호가스 가 제작한 판화로, 그의 친구 조슈아 커비( Joshur Kirby)의 선형 원근법에 관한 소책자의 프론티스피스(Frontispiece)로서 의도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된 목적은 원근법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작품의 캡션은 " 원근법에 대한 지식 없이 디자인을 만드는 자는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여러 가지 고의적인 혼란과 잘못된 원근법 효과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각 요소는 개별적으로 일관되지만, 전체 장면은 불가능한 물체의 예로 분류될 수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경의 남자가 뒷사람의 낚싯줄 뒤로 지나가는 모습이나, 두 개의 건물에 고정된 간판이 깊이를 나타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람객에게 원근법 이해의 필요성을 유머러스하게 설득하려는 의도로 설계되었습니다. 

 

 

 

 

작품에는 여러 원근법적인 오류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경의 남자: 그의 낚싯줄이 뒤에 있는 남자의 낚싯줄 뒤로 지나갑니다. 

간판: 간판이 뒤 개의 건물에 모여 있으며, 두 건물은 깊이에서 일치를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교회가 강에 일직선으로 보이며, 두 끝이 동시에 보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원근법적인 오류가 상세히 나열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관객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시각적 규칙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미술 작품이 아닌, 원근법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촉진하기 위한 호가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호가스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원근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하며, 그의 독특한 풍자적 시각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의 예술 교육의 흐름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Beer Street and Gin Lane, 1759 versions/wikipedia

 

 

 

 

 

 

 

윌리엄 호가스( Wiliam Hogarth, 1697-1764)의 < Beer Street and Gin Lane>는 1751년에 제작된 두 개의 판화로, 진 소비의 악영향과 맥주의 장점을 대조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런던에서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진에 대한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음료인 맥주를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호가스는 사회 비판적 요소를 작품에 담아 대중의 계몽을 목표로 했습니다. < Beer Street and Gin Lane> 는 그가 1751년에 발표한 연작으로, 사회에서의 진 소비가 초래한 문제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작품은 당시 영국에서 진의 소비가 극단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그려졌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Beer Street> 는 밝고 행복한 분위기를 강조하여, 맥주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웃고 있는 표정을 지으며,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맥주를 통한 즐거움과 산업의 번영이 함께 나타나며, 맥주가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통해 긍정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반면 < Gin Lane> 은 어둡고 암울한 장면으로, 진에 중독된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에는 진을 사기 위해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 진에 취해 싸움을 벌이는 장면 등 사회적 타락과 파괴를 나타내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아이를 떨어뜨리는 여인의 모습은 진의 폐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으로,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비극적인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 두 작품은 1751년에 발효된 진법 (Gin Act)을 지지하기 위해 발표되었으며, 이러한 법안은 진의 과도한 소비와 관련된 범죄 및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호가스는 < Beer Street> 를 먼저 보여준 후 < Gin Lane> 을 통해 독자에게 더 큰 충격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은 단순한 대조를 넘어,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반영하는 중요한 사회 풍자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진 법( Gin Act)은 영국에서 18세기 중반, 특히 1751년에 제정된 법률로, 진의 생산과 유통을 규제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법안은 당시 London's gin craze, 즉 진의 과도한 소비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진의 소비는 18세기 초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689년에 프랑스 와인과 브랜디의 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촉발되었습니다. 정부는 진의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 감면을 제공했지만, 이에 따라 대량의 저가 진이 생산되고 소비되었습니다.


진의 급증하는 소비는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범죄율도 상승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진 소비와 관련하여 빈곤, 범죄, 부모의 방임과 깉은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751년에 제정된 진 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의 소비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도입했습니다. 법안의 주요 목표는 저가의 진 생산을 제한하고 판매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 진의 유통서에 더 놓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소비를 억제하려 했습니다. 

 

 

 

 

 

 


 

 

 

 

 

 

 

150 센티가 조금 넘는 단신의 런던 토박이 화가는 당대의 도덕관이 무너지는 사회상을 관찰하여 신분과 계급, 조직에 관계없이 신랄한 풍자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의 사회적 혁명이었고, 수천 개의 동판화로 찍혀 나가면서 화가가 후원자의 도움없이도 독립적으로 활동 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직접 미술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이어서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설립에도 참여합니다. 

 

 

 

 

이렇듯,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한 호가스의 그림들은 이후 다비드, 고야, 도미에 등으로 이어져 영국 회화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다른 국가에 영향을 주는 길을 열었습니다. 또한  화가로 하여금 사회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켜 함으로써 사실상 시사 일러스트레이션의 길을 열었다는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4.11.22 - [지식&교양] - 51-46.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93)

 

51-46.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93)

오늘날 언론이나 예술의 정치적인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지만, 여전히 권력과 부에 의해 눈치를 봐야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왕정 시대였던 19세기의 한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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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3 - [지식&교양] - 51-32.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79)

 

51-32.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79)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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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언론이나 예술의 정치적인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지만, 여전히 권력과 부에 의해 눈치를 봐야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왕정 시대였던 19세기의 한 프랑스 화가는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풍자로 서민의 애환을 담아냈습니다. 독특한 화법과 메시지로 '풍자화의 대가'로 불리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와 동시대를 함께  했던 화가이자 판화가입니다.  두 화가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실주의' 화가로도 불립니다. 사실주의는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를 토대로 한 이상화된 이미지 대신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사실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변화하던 사회적 환경에서 나타났습니다. 19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사회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실주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주의 미술의 주된 특징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사실적인 묘사는 대상의 세부 사항과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감정적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현실을 표현하지요.  이 스타일은 과학적 관점을 통해 구축되며, 자연의 빛과 그림자, 투명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은 귀스타브 쿠르베입니다. 그는 "천사를 본 적이 없어 그릴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그의 대표작품으로 <오르낭의 매장>은 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사실주의 귀중한 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이후 인상주의 및 입체주의와 같은 다양한 예술 사조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고요. 또한 , 사실주의는 대중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예술 작품이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스무 살 무렵, 풍자 잡지 '실루에트'에 데생들을 발표하며 초창기 시사 만화가의 대열에 끼게 됩니다. 그 후, '카리카튀르', '샤리바리'등의 시사 만화를 담당하면서 독자들만이 아니라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왕정복고, 7월 혁명, 2월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적 사변들이 점점이 박힌 격동의 시공간이었습니다.

 

7월 혁명 : 1830년 7월에 발생한 혁명으로, 샤를 10세의 통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샤를 10세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업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억압에 반발하여 시민 계급과 일반 대중은 혁명의 불길에 불을 붙였습니다.

1830년 7월 28일 ,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봉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라파예트 장군이 이끄는 공화당원들과 국왕 군대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샤를 10세는 퇴위하게 되었고,  임시 정부는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프랑스의 정치적 형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mvHzCLP6ug

 

 

 

2월혁명: 1848년 2월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의 성립을 이끌었습니다. 이 혁명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억압의 결과로 촉발되었으며, 당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 반체제 지식인들과 혁명적 집회가 금지되자, 민중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는 빠르게 확대되었으며, 시민들은 파리 시내에서 충돌을 벌였고 군인들도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필리프는 2월 24일 퇴위하게 되었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 세력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2월 혁명은 제2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졌고 , 농민들은 새로운 체제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력으로 선출되자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 그러나 그는 재임 중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2제정을 성립시켰습니다. 

 

 

파리코뮌: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의미합니다. 이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세운 최초의 민주적이며 혁명적인 자치 정부로,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긴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의 패배와 그로 인한 정치적  상황으로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민의를 무시하고 굴욕적인 조건으로 독일과 전쟁을 마무리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독일 군대의 승리 행진 중에 저항의 의사를 표현하고 자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시민들은 정부군이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회수하려는 시도에 반발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결국 파리 코뮌의 수립으로 이어졌고요. 3월 26일 , 코뮌 평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노동자와 시민들이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을 설립하였으며, 이들은 민중의 자치적 통치를 지향하였습니다. 

1871년 5월 21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대규모 진압 작전인 '피의 일주일'로 인해 최종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코뮌 참여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처벌 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이후 여러 사회적 운동과 정치 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dGhGX6z8BA

 

 

 

 

 

 

 

도미에는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는 기법을 즐겼던 탓에 오래도록 별볼일 없는 화가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대 권력자들의 초상과 부르주아적 풍속을 비판적 화폭에 담음으로써 예술과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시대의 눈 밝은 기록자가 되었고요.  그의 화폭에 담긴 정치권력자, 은행가, 법관 따위의 지배계급은 한 눈에도 탐욕과 술수로 배불러 있는 모습입니다. 한번은, 루이 필리프 왕을 익살맞게 그린 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르주아( bourgeois)라는 용어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중세 유럽에서 자본과 재산을 소유한 시민 계급을 지칭하며,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이나 유산 시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르주아는 프랑스어'bourgeois'에서 유래합니다. 원래는 "성안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중세 시대, 부르주아 계급은 성대한 성벽 안에서 살며 상공업자나 농민, 소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 밖의 농민 계층인 무산자와 대비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부르주아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middle class를 지칭하며, 자본가나 부유한 시민 계급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이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비판받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 및 사회적 권력을 가진 계급입니다.

부르주아라는 용어는 자본가 계급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프롤레타리아(무산자)'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두 계급 간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했습니다. 

 

 

 

도미에가  초석을 놓은 한 컷짜리 시사 만화를 한국에서는 흔히 '만평'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바로 그 진실성 때문일 겁니다. 화장으로 주름을 감추고, 근사한 넥타이핀으로 부를 드러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휘어진 등은 세월을 숨겨주지 못하는 것이죠.  화가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가 고개를 돌린 얼굴을 즐겨 그렸던 것도 이처럼 뒷모습이 드러내는 삶의 진실에 매료됐기 때문입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만화를 미술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회적 악습에 대한 일반적인 풍자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넓은 견지에서 보면 정치만화에 대한 체제와 힘은, 도미에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미에는  무엇보다 '상식의 인간'이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왕과 정치인, 법조인 등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인격만큼은 철저히 존중했습니다. 또 민중의 어려움을 적극 대변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주의자는 공화주의 이념을 지지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원칙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입니다. 이러한 이념은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정치적 사상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화주의는 개인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치 참여, 공익 우선, 법치주의)

역사적으로, 공화주의 이념은 고대 로마 공화정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 동안 공화주의자들은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는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사회 정의, 인권 및 평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길에 크리놀린 치마 The Crinoline in snow, 석판화, 1858/Bridgeman Images

 

 

Cage Crinoline underskirt, 1860s,ModeMuseum, Antwerp/wikipedia

 

 

 

 

 

도미에가 사회적 풍자로 전향한 이후 주 소재로 택했던 도시의 거리 중 하나입니다. 페티코트를 넣은, 넓은 크리놀린 치마의 윗부분에 눈을 쌓은 채,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파리의 부르주아부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녀의 뒤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낡고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 청소부가  긴 빗자루로 어이없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ftbuU-tcY

 

 

 

 

 

 

 

한국경제

 

 

 

 

1808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오노레는 유리 직공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유리공을 비롯해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때문에 회화 미술은 거의 독학으로 배웠으며, 석판화는 친구에게 배웠습니다.

 

 


 

 

Gargantua,1831 /Wikimedia Commons

 

 

 

 

 

종종 미술 작업으로 알바를 하며 용돈 벌이를 하던 그는 잡지<카리카튀르>에 초빙되어 정치적 풍자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왕정 시대로 정치 비판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도미에는  생계비를 위해 풍자화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1831년 작품'가르강튀아 (Gargantua)는 사람들과 왕족에 대한 상당한 충격을 준 그림이었습니다. 

 

 

 

카리카튀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발간된 풍자적인 잡지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이 잡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한 풍자적이고 신랄한 의견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였습니다. 

카리카튀르는 1830년대에 창간되어,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 매체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잡지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히 발행되었으며, 당시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들을 신랄한 그림과 유머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주요 특징으로 풍자적 내용, 예술성과 영향력 그리고 대중성과 접근성이 있습니다 .

카리카튀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정치적 풍자와 사회적 비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이 잡지에서 영감을 받아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였고, 민주적 가치와 시민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 풍자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 (Francois Rabelais)의 소설<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이 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거인 왕을 소환해 당시 루이 필리프 왕의 세금정책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국민이 낸 세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국왕과 지배계급, 국왕이 먹고 남은 쓰레기를 서로 먹으려는 정치인들, 불평등한 경제와 이권을 위한 야합 등을 적나라하게 담았습니다. 

 

 

 

 

프랑수아 라블레( Francois Rabelais)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가이자 인문주의자입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중세 사회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풍자적인 문체로 유명합니다. 그는 법률가이자 부유한 지주인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비교적 상류층에서 자랐으며, 몽펠리에 대학교와 푸아티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다양한 학문적 배경은 후에 그의 문학적 작업에 영향을 미쳤고, 신학,의학, 고전학 등을 포함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필명은 알코프리바 나지에( Alcofribas Nasier)이고 과장되고 익살맞은 요소를 사용해 언어유희와 풍자를 자주 활용했습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의 모험을 그린 풍자적 시사 소설입니다. 중세 사회의 가치관과 종교적 신념을 신랄하게 비판하지요. 특히 이 작품들은 외관상, 과장된 묘사가 특징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루이 필리프왕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를 '시민왕'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그는 금융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하원 의회의 결정으로 프랑스의 왕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의 통치에서는 산업 발전과 시민 계급의 경제적 기회를 강화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통치 아래에서 일반 시민의 삶의 질은 악화되었고,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서 반란의 불씨가 되었으며, 이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미에는  바로, 이 가르강튀아(gargantua)(1831) 라는 작품으로 23세에 갑자기 유명해집니다. 또한 이 작품때문에 6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르 카리카티르>에서 일하던 1830년, 프랑스에서는 짧지만 폭력적이었던 '7월 혁명'으로 샤를르 5세 (Charles x)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황제 루이 필립의 군주정치(July monarchy)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민왕 루이 필립이 전횡을 일삼자 도미에는 필립을 배 모양의  머리 (배는 프랑스에서 바보를 의미한다)를  하고 변기에 앉아서 국가 재산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동시에 이를 배설하여 아첨꾼들에게 나누어주는 거인으로 묘사하는 석판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신랄한 정치 풍자화는 7월 군주정치가 빚은 파렴치한 대학살의 잔인성을 도미에 특유의 재치와 해학으로 그려낸 걸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엄청난 정치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832년 풍자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과 6개월간의 징역형을 받기도 하면서 온갖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계속된 탄압으로 2년 뒤 <카라카튀르>도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오노레는 그저 돈을 위해 시작한 풍자화였지만, 본격적으로 정치와 서민들의 애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LWHXhPBZp8

 

 


 

 

도미에는  늘 돈 걱정을 하며 아마도 빚쟁이의 등살에 자주 법원에 불려 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판사 서기와 변호사 주변에 있는 거간 꾼 들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 자주 띄었던 사람은 변호사였죠, 1830년과 1860년 사이에 그는 이와 같은 주제를 그림으로 자주 그립니다.

 

 

 

 

The Legislative Belly, 1834/MutualArt

 

 

 

 

 

 

정치 풍자화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강화된 1835년 부터, 그는 정치적 풍자에서 사회적 풍자로 전향합니다. 자신들만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생활상을 코믹하게 풍자하였습니다.  법관의 권위적이고 교만한 얼굴, 거만하게 휘날 리는 그들의 법관복 등으로 다양한 법관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하고요.  도미에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풍자화를 관찰해 보면 그가 일상생활의 세부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풍자는 사실적 관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34년 4월 15일  파리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시위를 정부에서 폭력으로 탄압해 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출소 후 곧바로 학살을 목격한 오노레는 작품을 그려 기고했습니다.

 

 

 

바로 '프랑스노냉 거리의 1834년 4월 15일 Massacre de la rue Transnonain '(1834)이라는 석판화 작품입니다. 그림에서는 학살 당시의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던 폭력의 피해를 고스란히 옮겨놓았습니다. 이 작품은 거리와 카페 등 파리 시내에 전파되었고 본격적으로 왕정에 맞서 풍자화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석판화는 주로 유성 재료들로 그려진 이미지가 물과 기름의 성질로 인해 판 위에서 선택적으로 잉크를 흡수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기름 성분을 갖고, 나머지 부분은 물과의 접촉으로 잉크가 묻지 않도록 처리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든 판은 인쇄  시 원하는 이미지를 종이에 찍어낼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은 1798년 독일의 극작가인 알로이스 제네펠더에 의해 발명 되었으며, 19세기 많은 유명 화가들이 석판화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고야, 들라크루아, 모네 등)또한 , 일본 우키요에와 같은 외국 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QINGg1prE

 

 

 

 

 

Transnonain Street (Paris, 15,4, 1834)/Wikimedia Commons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의  작품 <Transnonain Street>(1834)는 프랑스에서 정치적 사건을 반영한 중요한 석판화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격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문 및 정치 풍자화로 잘 알려진 도미에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834년, 파리에서 발생한 폭동 이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으며, 도미에는 이 사건을 통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당시의 갈등과 비극적인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석판화 기법을 사용하여 이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기법은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여 감정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 Transnonain Street>에서는 주인공인 남자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관람자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있고요.  그림의 구도와 조명 또한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미술작품을 넘어,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과 사람들의 고통을 나타내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HgHRiXYmpk

 

 

 

 

 


 

 

 

Le Ventre Legislatif, 1834, Brooklyn Museum/ Wikimedia Commons

 

 

 

< Le Ventre Legislatif>는 강렬한 풍자로 프랑스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왕정 시대의 정치권력을 조롱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루이 필리프가 지배하던 시대의 의회를 풍자하고 있고요.  작품에서 도미에는 커다란 배로 형상화된 의회를 묘사하여 정치적 권력을 비꼬는 동시에 의회의 구성원들이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만화를 넘어서는 심오한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도미에는 굉장히 과장된 형태의 인물들이 국회의 회의실에서 모여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은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배가 상징적으로 부풀러져 있습니다. 이는  의원들이 국민의 이익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도미에는 이러한 도상적 표현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의 빈틈없이 그려진 세밀한 세부 묘사와 과장된 비율을 통해 풍자적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사실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자극합니다. 

 

 

 

Le Ventre Legislatif,1834/Alamy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의 정치적 시각과 예술적 기법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가 더욱 부각됩니다. 

 

 

 

 


 

 

 

 

Larabit(Marie Denis Larabit), 1836/wikimedia commons

 

 

 

 

Marie Denis Larabit 는 1830년에 태어나,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정치 체제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Marie Denis Larabit by Honore Daumier,1849/Alamy

 

 

 

 

 

 

 

 


 

 

Ecce Homo, 1850, Museum Folkwang,Essen/wikipedia

 

 

 

 

 

<Ecce Homo> 는 '보라, 이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인류의 고통을 하나로 연결 지으며, 도미에가 추구했던 사회 비판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석판화와 드로잉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요한 표현과 섬세한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였으며, 감정이 잘 드러나는 인물의 표정과 자세가 특징적입니다. 여백을 통해 한층 극대화된 인물의 고통이 강조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도만듭니다.

 

 

 

< Ecce Homo> 는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도미에의 사회적 비판이 고양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고요.  당시 프랑스 사회는 많은 사회적 이슈에 직면해 있었고, 예술은 이러한 갈등을 반영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도미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고,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1pkDfwdrY

 

 

 

 

 

 

 

 


 

 

이후 1848년에는 프랑스 내에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노동자들이 루이 필리프를 결국 폐위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에 오노레는 작품 <봉기>를 통해 프랑스의 마지막 왕을 쫓아낸 노동자들의 치열한 사투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정치판은 혼돈 그 자체였지요. 오노레는 끊임없이 풍자하고 비판했습니다. 어떤 권력이 들어와도 비판을 멈추지 않은 것이죠. 

 

 

 

 

 

 

 

 

 

 

 

 

<봉기>는 184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회 및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반발하여 일어난 혁명으로, 도미에는 이러한 사회적 격변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봉기'를 그렸습니다. 그가 표현한 내용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고난과 투쟁을 강조합니다.

 

 

 

작품 '봉기'는  다양한 인물들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통해 대중의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강렬한 표정과 동작을 통해 노동자들의 분노와 결의를 전달하며, 극적인 구성이 사실감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이는 도미에가 갖고 있던 사회적 비판의 관점을 잘 반영합니다.

 

 

 

도미에는 '봉기'를 통해 당시 권력을 상징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서민이 되는 상징적인 인물들을 통해 사회 구조의 불합리함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였습니다. 

 

 


 

 

Scapin, 1860-1862, Harvard Art Museum

 

 

 

 

 

 이 작품은 주로 'Crispin et Scapin'이라는 주제로, 극중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두 캐릭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Scapin'은 특히 캐릭터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작품은  도미에의 뛰어난 석판화 기술이 돋보이며,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극적인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도미에가 활동한 시대는  프랑스의 정치적 환경이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사회 비판의 기능을 하며, 특히 'Scapin'과 같은 풍자적인 주제는 관객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Scapin'은 코믹한 요소를 사용하여 사회적 현실을 비꼬는 도미에의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Scapin은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인 Molirere 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로, 특히 이탈리아의 코미디아 델라르떼(tragicomedy)전통의 일환으로 발전된 인물입니다. Scapin은 코믹한 하인 역할을 하며, 보통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Scapin 이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scappare"에서 유래되었으며, "도망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캐릭터는 이탈리아 코미디아 델라르떼의 특유의 캐릭터 중 하나로, 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도망치는 비겁한 하인의 전형입니다. 

몰리에르 (Moliere)의 연극 "Les Fouberies de Scapin"(1671, "Scapin의 속임수)"에서 이 캐릭터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젊은 연인들이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도록 돕고자 여러 가지 계략을 사용합니다. Scapin은 지혜롭고 기민한 캐릭터로 묘사되며, 그가 마주하는 상황들을 자신의 재치와 속임수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요. 이야기의 중심은 두 젊은 연인이 결혼하기로 결정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들이 다른 결혼 제안을 가져 오면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Scapin은 여러 속임수를 사용하여 두 연인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fDNMKEo6lQ

 

 

 

 

 

Crispin and Scapin, 1863-65, Musee d'Orsay, Paris/Artchive

 

 

 

 

 

 

<크리스팽과 스카팽>은 몰리에르의 희곡"스카팽의 간계"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인물의 모의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도미에는 극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줍니다. 두 캐릭터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미에는 특히 인물의 특성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마치 실제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어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도미에의 작품은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따릅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힘있는 목소리를 제공했습니다. 크리스팽과 스카팽의 모습은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도미에가 추구한 사회 풍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도미에의 독특한 화풍과 기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물 간의 도형을 구분하고 조명 효과를 통해 입체감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내용의 전개에 기여하며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도미에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휴머니즘적인 요소입니다. 그의 휴머니즘적 요소는 한 손에는 아이를 다른 한 손에는 빨래감을 들고 세느강둑을 오르는 여인, 강가에서 아이들과 정겹게 놀아주는 아버지, 어린 아기를 안은 채 보트를 끄는 남자 등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지만 가족간에 애틋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빈민층의 일상을 그린 회화작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Burden, 1850-1853/Wikimedia Commons

 

 

 

 

 

작품 속 주인공은 세탁부 여인으로, 그녀의  손에는 세탁물이 들려있고, 그 옆에는 그녀의 아이가 바싹 붙어 걷고 있습니다. 아이는 세탁부의 삶의 무게와 책임을 상징하며, 이는 그녀의 헌신과 보호 본능을 강조합니다. 배경은 간결하고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어 있으며, 이는 주인공이 처한 고단한 삶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에서 사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일상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작품의 무게감과 진지함을 전달하며, 세탁부의 의상과 배경 역시 어두운 톤으로 처리하여  그녀의 삶의 어려움을 표현했습니다.  주인공의 표정과 자세는 그녀의 힘겨운 노동을 강조합니다. 세부 묘사 또한 인물의 현실감과 내면을 전달하고 있고요.

 

 

 

 

 

<세탁부>는 도미에의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 작품으로, 노동자 계층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섹탁부를 이상화하지 않고, 그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의 인도주의적 시각과 그의 사회적 비판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The Laundress (La Blanchisseuse), 1863, Musee d'Orsay, Paris/wikipedia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방금 강가에서 빨래를 끝내고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것입니다. 한쪽 팔로 빨래 더미를 가득 안은 어머니는 혹시나 아이가  계단을 헛디딜까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도미에의 세심한 관찰력은 아직 키가 작아 계단을 오르기 힘든 아이가 다리를 한껏 올려 계단을 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그려냈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은 얼굴의 윤곽이 생략되어 그려졌습니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는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 그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미에는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노동자들, 소외된 여성들의 모습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결코 서민들의 모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지닌 힘이 바로, 도미에의 매력아닐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8p_2CLOhY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사실적으로 그려냈고요. 이후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놓고 왕을 비판하기 보다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4000점에 달하는 석판화를 그려낸 그는 1840년부터는 유화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유화작품 중 가장 대표작은  <3등 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1862) 등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1cOWV3-xxs

 

 

 

 

당시 열차칸을 계급화되어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1등칸, 부르주아는 2등칸, 가난하고 옷차림이 지저분한 이들은 3등칸에 타야만했습니다. 오노레는 어느 날 3등칸에 탑승해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유화물감으로 화폭을 옮긴 것이 작품 ,<삼등열차>입니다.

 

 

 

 

 

 

The Third-Class Carriage(New York), 1862-1864, Metropolitan Museum of Art,New York/wikipedia

 

 

 

 

 

그의 작품  <3등 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 >(1862-1864)는 열차라는 근대적인 이동 수단과 함께 서로에게 무관심한 얼굴로 앉아 있는 군중의 모습을 다룹니다.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의 파리에서 세 번째 등급 기차 칸에 실린 노동자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등열차>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여러 점의 유화 중 하나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중반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합니다.흔들리는 열차의 3등 객실,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기대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일상에 지친 서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승객들도 좁은 3등 객실 내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우울한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그림 속 장면은 기차의 불편한 환경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중앙에는 아기를 모유수유하는 젊은 여성과 할머니, 그리고 잠을 자고 있는 작은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이 세 인물은 한 가족을 형상화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무기력해 보이는 다른 승객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교감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창 밖 밝아오는 여명이 기차 내부의 궁핍함과 고달픔을 시각적으로 더 드러나게 합니다.

 

 

 

 

색채에 있어서 도미에는 주로 갈색 톤을 사용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러한 색채는 인물들의 삶에 무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사용된 색상은 감정적인 울림을 주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삼등열차>는 그 자체로 단순한 기차의 내부 묘사를 넘어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고난과 빈곤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예술이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에 대한 도미에의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30prRcY9pE

 

 

 

 

 

 

The Third-Class Carriage(Ottawa), 1863-1865,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FbvgwIcd0zo

 

 

 

 

 

 

 

The Third-Class Carriage( San Francisco), 1856-1858,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San Francisco/wikipedia

 

 

 

 

The First Class Carriage, 1864/MeisterDrucke

 

 

 

 

반면, <1등 열차 The First-Class Carriage>(1864)에서는 열차 안의 사람들은 행색부터 다릅니다.  혹여 있을 지 모를 서로에 대한 접촉에 염두에 둔 사람들은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유대감이나 인간적인 관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창가의 승객과 읽을거리에 몰두한 여성 그리고 할 일 없이 앉아있는 노인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모두 고독한 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The Second Class Carriage, 1864/ Allnumis

 

 

 

 

 

 

 

 


 

 

 

 

 

 

 

 

 

 

 

 

Don Quixote and Sancho Panza,1868/ Artchive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Don Quixote and Sancho Panza>(1868)는 프란시스코 고야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의 특징적인 유머와 풍자가 잘 드러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 )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어둠의 화가'라고 불리기도합니다.  그는 주로 낭만주의 예술의 기초가 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화가입니다. 고야의 작품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반영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화풍은 사실적이면서도 감정적이며, 어두운 주제를 자주 다루었습니다. 특히 빛과 그림자, 색채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낭만적인 요소와 현실적인 묘사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대표작으로 <마하>시리즈, <전쟁의 재난>, <사투르누스의 아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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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특희 그의 소설 <돈 키호테>로 유명합니다. 소설가, 극작가, 시인, 군인 등의 직업을 가졌으며, 종종 "지혜의 왕자"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로 일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22세 때, 그는 군인으로서 레판토 해전에 참여했고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돈 키호테>는 1605년 첫 번째 부분이 발표되었으며, 현대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당시의 기사 소설을 풍자하고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 1615년에 두 번째 부분이 발표되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생애의 대부분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았지만,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의 문학은 "세르반테스의 언어"라는 표현으로 스페인어의 중요서을 강조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1616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마드리드의 무명 수도원에 묻혔습니다. 

 

 

 

 

 

 

이 그림은 스페인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소설<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를 통해 인간의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에서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하인 산초 판자와 함께 나타납니다. 돈키호테는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으로, 이와 대조적으로 산초는 알아보기 쉽게 단순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두 인물 간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 차이를 잘 드러내며, 그들 각각의 꿈과 현실을 반영합니다.

 

 

Don Quixote and Sancho Panza 2 by Honore Daumier/ 1st Art Gallery

 

 

 

 

 

 

돈키호테의 비극적인 모습은 그의 허세를 나타내며,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자세는 관객에게 웃음을 자아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 산초 판자는 보다 현실적이고 덜 과장된 자세로, 그의  충실함과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유화 기법은 도미에의 특징인 매우 강렬한 브러쉬 스트로크와 단순한 색조를 반영합니다.

 

 

 

 

도미에는 강렬한 색상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특해, 배경은 기본적인 구성으로 처리되어 주 인물들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얼굴은 불분명한 형태로 묘사되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의 표정이 아닌 색상의 광택과 더불어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도미에의 독창적인 접근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복잡성과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캐릭터의 묘사를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꿈꾸며 자신을 진정한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어리석은 인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 간의 갈등을 표현하며, 인간이 가진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적 귀족과 권력자들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요. 따라사 이 작품은 단순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OlM_Ul84hA

 

 

 

 

Don Quixote and Sancho Panza, 1868, Neue Pinakothek, Munich

 

 

 

 

 

 

 


 

 

 

 

Lunch in the Country, 1868/Art UK

 

 

 

 

 

 

작품에서 도미에는 대자연 속에서 의 소박한 삶을 시각화하며, 도시와 자연에 대한 대조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평범한 삶을 표현하며, 이들은 마치 외부의 혼잡한 삶에서 잠시 벗어난 듯 보입니다. 도미에는 이러한 평온한 순간을 통해 산업화가 진행중인 시기의 소외된 사람들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도미에의 화풍은 사실적이며, 강렬한 색채와 생생한 인물 구성이 돋보입니다.  색감은 자연을 반영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는 그들의  감정과 사회적 상징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가 석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를 통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자연의 배경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도미에 특유의 사회비판적 시각이 잘 드러납니다.  오노레 도미( Honore Daumier, 1808-1879)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과 고난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화가로서 인정받았습니다.  이 작품역시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 문제를 살펴보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미에는  사심이 없었던 화가로 전해집니다. 문맹의 재봉사와 결혼했고 말년까지 가난했지만 작품 속에는 회화적인 즐거움과 비애가 조화롭게 뒤섞인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생활상을 누구나 공감할만한 의미와 형태로 포착했기에 현재에 와서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들로서도,그와 그의 시대와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그는 점차 시력이 나빠져서 결국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유작은 오늘날에는  미켈란젤로의 창의력에 비견되기도 하며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역사가인 '미슐레'는 도미에를 일러 "진정한 비판자는 당신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정부의 핍박으로 감옥에도 가고 실명하는 등 고난에 찬 인생을 살았으나, 그 서늘한 비판정신을 오롯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한 번 쯤은 돌아봐야 할 위대한 선구적 시대정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특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odvEF81Sg8

 

 

 

 

 

 

https://www.youtube.com/watch?v=hUhwWgy4L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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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회화는 1600년부터 1750년 사이에 유럽에서 발달한 예술 양식입니다. 대체로 르네상스 미술의 요소를 발전시키면서 특유의 장식성과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였습니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지닙니다. 

 

 

 

바로크 회화는  주로 가톨릭 국가들에서 발전하였습니다. 반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카톨릭 교회의 필요에 의해 강화된 예술적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이 당시 카톨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30년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반쪽난 신앙심을 다시 돌려놓기 위해  미술이  적극적으로 이용됩니다.  이전보다 종교적 주제를 더 강조하고, 신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을 요구했습니다. 

 

 

 

바로크 회화의 발전에 중요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카라바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실주의적 기법은 에스파냐와 북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많은 화가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랐습니다. 미술사에 있어서 카라바조가 혁명가라면  오늘 살펴볼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개혁가입니다. 개혁은 혁명보다 많은 맥락을 필요로 하지요. 그리고 맥락은 시간이 지나면 가장 먼저 잊혀지기 쉬운 것 중의 하나이고요.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의 미술가 가문인 카라치 가문에서는 16 세기 초반 혁신적인 예술가인 코레조(Coreggio, 1490?-1534)의 빛과 그림자  처리에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티치아노가 라파엘로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판단하여 베네치아 인들의 채색법을 열심히 수련했고요.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1576)는 베네치아 태생으로 16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초상화 및 대형 종교화 작가입니다.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지요. 그는 색채의 사용과 빛의 표현에 있어 뛰어난 기술을 지녔습니다.  그의 화풍은 그림의 사실적 묘사와 함께 부드러운 색조 전이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제작한 초상화와 신화적 주제의 작품에서 두드러집니다. 그의 기술과 혁신은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집안  화가  중에서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사촌 루도비코 (Ludovico)의 공방에서 형 아고스티노(Agostino, 1557-1602)와 함께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 빛의 묘사와 감정 표현을 습득했습니다. 특히 표정 연구에 노력을 기울여 인물의 내면을 생동감 있게 접근하는 '카리카듀라(caricatura)'를  고안했는데 오늘날 '캐리커처'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이며 기교적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극복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안니발레도  1581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라파엘로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순성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안니발레를 일컬어 '고전주의적'이라 평가합니다.  이렇게 그는 바로크 시대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인 아카데미적 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안니발레와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의 2대 거장으로 불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화풍에서는 대조를 보였습니다. 대중은 곡절이 많았던 카라바조에 기우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특히 그의 화풍은 프랑스 푸생의 고전주의로 이어졌고, 프랑스 회화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흥미롭게 두 사람은 1600년경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체라시 예배당에서 실제 교류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oN9_Mh6Iw

 

 

 

 

Papal States, Rome/프레시안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 1600-1601, Oil on wood,Santa Maria del Popolo , Rome/wikipedia

 

 

 

 

 

 

 

 

 

안니발레가 그린 제단화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1600-1601) 입니다. 전통적인 빨강과 파랑의 천을 두른 성모의 이상적인 모습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볼로냐 화파의 특징인 희미하게 빛나는 색과 테두리는 마치 안개가 낀 듯한 효과를 줍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시선과 양팔을 활짝 펴고 무덤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모습이 이전과 달리 매우 역동적입니다. 열한 명의 사도가 성모의 관을 둘러싸고 있는데 전면 왼편의 베드로와 오른편 바울의 놀라는 표정에서 그의 장점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작품 <성모승천>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카라치가 선보인 뛰어난 테크닉과 직물의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배치된 구도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표현합니다.

 

 

작품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성모의 숭고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강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카라치의 <성모승천>은 고급스러운 색채와 빛의 사용이 돋보입니다. 그는 따뜻한 색조를 통해 인물을 더욱 빛나게 하고, 배경에는 어두운 부분을 활용하여 인물들이 더욱 부각되도록 했습니다.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는 빛 속에서  승천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로 인해 신성함이 강조됩니다.  성모승천은 이후 바로크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카라치의 혁신적인 구성 방식과 감정 표현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역사적인 장면을 그리는 방법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바티칸과 뿐만 아니라 여러 벽화 작업에서도 그의 방식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성모승천은 단순한 종교적 주제를 넘어서, 그의 예술적 아이디어와 기법이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성모 승천>과 함께 카라바조의 작품 둘도 마주보며 전시되어있습니다. 

 

on the Trail of Caravaggio walking Tour,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 1601/ Joy of Rome

 

 

 

성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예수에 의해 '베드로(반석)'라고 불리웠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어부로 살았으며, 형제 안드레와 함께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삶에서 여러 차례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체포 당시, 그는 세 번 이나 예수를 부인했고, 이후 부활한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 용서하셨고, 다시금 초기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첫 교황이며, 그의 무덤은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 바울의 개종, 1600-1601/ www.romeandyou.org

 

 

 

 

사도 바울은 기독교 초대 사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에 널리 퍼뜨린 인물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울로, 바리사이인 이었고, 로마 시민이자 다국어를 구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초기 사울은 기독교를 맹렬히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다마스커스(시리아)로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는 중 말에서 떨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환상을 경험 한 후 개종합니다. 이후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고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의 권능에 대한 증인이 되었으며, 그의 서신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Italy XP

 

 

 

 

 

 

 

이 제단화는 카라바조가 좌우 측면에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1601)과 <성 바울의 개종>(1600-1601)과 호흥합니다. 두 성자 모두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고, 같은 날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은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자처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지는 형 집행 모습입니다. 강렬한 색채와 명암, 극적인 구성, 특히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육체적 동작을 경사진 곡선으로 강조했습니다. 한편 등장인물의 평범함으로 인해 천상의 종교를 지상의  종교로 끌어내렸으며, '연극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실감 나게 합니다.  고뇌에 찬 베드로의 표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정도로 말입니다.  <성 바울의 개종>은 뜻밖에도 말이 그림 전체의 공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활짝 벌려 아치를 그리는 바울의 팔과 어울려 타원형의 아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성한 기적에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안니발레는 인물의 이상적 고전주의 형태로, 카라바조는 사실적으로 그려 화풍에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성격이 거칠었던 가라바조도 안니발레의 작품을 인정했으며, 서로의 만남을 행운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바로크 회화는 르네상스 양식보다  광범위하게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통합된 형태를 보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6HaWJPVXo

 

 

 

 

 

#https://www.youtube.com/watch?v=wGLkpcsZkVU

 

 

 

 

 

 

 

The Butcher's Shop, 1583,Oil on Canvas, Christ Church Picture Gallery,Oxford/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의 < The Butcher's Shop>은 1583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현재 옥스퍼드의 Christ Church 그림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5cm* 266cm의 크기로, 카라치가 고안한 특정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도살장 풍경을 묘사하지만, 일반적인 저속함을 초월한 독특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야만적인 모습을 떠올리는 우리와 달리  카라치는  도살자들이 조용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일상의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화면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객은 돈을 찾고 있는 모습으로 ,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운 분위기 대신 통제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도살"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시각적 아름다움과 함께 강한 상징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살자가 양을 도살하고 있는 장면은 단순한 학대가 아닌, 희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카라치는 도살자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슬픔과 책임감을 동시에 전달하고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일상의 묘사를 넘어, 인류와 고기 소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2SedB-eDvM

 

 

 

 

 

 

 

 

 

 

The Butcher's Shop, early 1580's , Kimbell Art Museum/wikipedia

 

 

 

안니발레는  경직된 고전주의에 매돌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근대성은 초기 대표작 <푸줏간The Butcher's Shop> 연작에서 확인됩니다.  당시 대세였던 종교화가 아니라 서민의 삶을 담으면서도 예상외의 대담한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일단 푸줏간이 그림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인물 묘사도 유쾌하고요. 일꾼들이 동물의 시체를 매다는 장면이 풍부한 색채와 빛의 변화를 담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해부학적으로 생생하고요. 당시 정물화에 푸줏간이 주제로 자리 잡은 것 은 이중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작품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푸줏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법 생겨났습니다. 그중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1655)>는 아예 소고기만을 갖고 정물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임 수틴은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를 극단적으로 상징한 <가죽을 벗긴 소>를 그려 렘브란트에게 헌정했고요.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도미에도 '푸줏간' 연작을 남기는 등 이 작품으로 인해 회화의 소재는 더욱 풍부해지고, 생활과 밀접해졌습니다.

 

 

 

렘브란트 ,Slaughtered OX, 1655, Louvre, Paris/wikipedia

 

 

렘브란트(1606-1669)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주로 빛과 어둠의 명암 효과를 조절하여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 성경 장면, 자화상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각 작품에서 고유한 심리적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빛의 효과를 강조하여 명암의 대조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근대적 명암의 시조'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0여 점에 달하는 유화,수채화, 동판화, 드로잉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사실적 수법을 넘어서, 인물의 내면 세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독특한 심리 묘사가 돋보입니다. 

 

 

2024.03.26 - [지식&교양] -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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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cass of Beei by Chaim Soutine, 1925, Minneapolis Institute Art/ Google Arts& Culture

 

 

 

카임 수틴은 20세기 초 리투아니아 출생의 화가로, 주로 표현주의 화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색채 사용은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수틴은 초기에는 그레코,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와 같은 대가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점차 그의 스타일은 생명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고요. 그는 발광하는 듯한 터치로 생명감을 강조했습니니다. 강렬한 색상과 감정이 실린 작품을 통해 깊은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2024.10.02 - [지식&교양] - 51-40. 카임 수틴( Chaim Soutine, 87)

 

51-40. 카임 수틴( Chaim Soutine, 87)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소개할 러시아 출신 화가 카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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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with Meat by Francis Bacon, 1954, Art Institute of Chicago/wikipedia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화가로,  그의 강렬하고 독창적인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로 인물화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그의 작품은 대담한 색상과 왜곡된 형태를 통해 극단적인 감정을 전달합니다.  대부분의 삶을 런던에서 보냈고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초기 생계는 가구 디자인과 인테리어 장식으로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화가로서의 커리어는 1944년에 '삼단 제단화'를 기초로 한 형상의 세 가지 습작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은 종종 고립된 감정을 강조하는 구도로, 추상적인 형태와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피카소와 근대 미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베이컨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인물의 왜곡된 형태를 통해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2024.04.26 - [지식&교양] - 51-9.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1992,62)

 

51-9.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1992,62)

'프랜시스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를 주장한  그  철학자 맞나?아닙니다.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철학자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시각적 충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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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처럼 안니발레도 지역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린 주역이었습니다 . 미술 서적에서 카라치라고 하면 안니발레, 형 아고스티노, 사촌 형 루도비코 세 사람을 묶어 가리키는 경우가 흔합니다. 셋의 고향은 라구 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북부의 도시 볼로냐입니다. 세 사람은 당시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매너리즘의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우아함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인체 비율, 뒤틀리지 않은 자세, 명쾌한 구도, 이해하기 쉬운 감정 표현 등을 추구했습니다. 

 

 

 

 

셋 중 어린 안니발레는 가장 대담하고, 가장 비사교적이며, 기성 화단으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촌 형 루도비코는 볼로냐 선배 예술가들과 비교적 활발히 교류했고, 형 아고스티노는 사교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반면 안니발레는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라고 생각하는 말수 적은 청년이었습니다.

 

 

 

 

안니발레는 파르마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각지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했고, 코레조의 감각적인 신비로움이나 베네치아 화가들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자기 것처럼 흡수했습니다. 고향 볼로냐에 있을 때도 형, 사촌 형과 함께 끊임없이 주변 사물과 모델을 스케치하는 등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카라치 3인방은 볼로냐에서 인기 높은 신예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Bologha,Italy/나무위키

 

 

1582년 카라치 형제와 사촌 루도비코는 미술학교 '아카데미아 데이 데시데로시( Desiderosi 열망)'를 설립했습니다. 후에 '아카데미아 델리 인카미나티(Incamminati, 약진)'로 개명했고요. 학교는 정해진 교육과정이 없이 학생들이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고찰하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귀도 레니가 유명합니다. 그의  당시 명성은 라파엘로와 비교될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안니발레는 볼로냐 화파를 이끌며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셋은 1589-1594년 볼로냐를 주 무대로 함께 작업했습니다. 마그나니 궁전과 삼피에리 궁전에서 프레스코화를 완성했습니다.

 

 

 

 

 

 

아고스티노 카라치 Agostino Carracci, The Lamentation, 1586/wikipedia

 

 

 

Agostino Carracci(1557-1602)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판화가, 태피스트리 디자이너, 미술 교사로, 그의 형제 안니발레와 사촌 루도비코와 함께 볼로냐에 아카데미아 델리 인카미나티를 설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금세공인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프로 스페로 폰타나와 바르톨로메오 파사로티 아래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실물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강조하고 매너리즘 스타일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다작의 판화가로, 틴토레토와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했으며, 볼로냐와 로마에서 주요 프레스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루두비코 카라치, 성 베드로의 울음/카톨릭 신문

 

 

 

루도비코 카라치(1555-1619)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의 초기 바로크 화가, 에칭 작가, 판화가입니다. 그는 사촌 아고스티노와 안니발레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 카라치 아카데미를 공동 설립하여 자연주의적 접근 방식을 예술에 도입했습니다. 루도비코의 작품은 감정적 깊이, 넒은 제스처, 영적인 주제로 유명하며, 매너리즘이 지배하던 시기 이후 이탈리아 미술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경력 내내 볼로냐에 머물며 볼로냐 화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그의 가르침과 작품을 통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셋의 대표적인 공동 작품으로는 볼로냐의 귀족인 필리포 파바의 저택 벽에 그린 <이아손의 모험> 연작이 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연작 중 한 점을 가리키며 누가 작업했냐고 묻자 공동 작품이라는 뜻에서 "카라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셋은 뜻을 같이했습니다. 

 

 

Massacte of the Innocents by Guido Reni, 1611, Pinacoteca Nationale di Bologna, Bologna/wikipeia

 

 

 

 

귀도 레니(1575-1642)는 볼로냐 출신으로, 특히 고전적인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는 음악을 배웠으나 9살부터 화가 데니스 칼배르트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볼로냐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라치 가문을 포함한 여러 화실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귀도의 작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이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주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에서 그는 색채의 독립성과 섬세함을 통해 절대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레니의 작품은 당대 다른 바로크 화가들과는 달리 명확한 비례와 밝은 색감을 띠고 있으며, 고전적 미를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 

 

 

 


 

 

 

 

Crucifixion with Saints, 1583, /wikipedia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인들 Crucifixion with Saints>은 1583년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제작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의 경력 초기 단계에서의 예술성을 반영하고  있고요. 이 유화는 현재 볼로냐의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교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된 산 니콜로 디 산 펠리체의 예배당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스타일에서 특징적인 자연주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여러 성인들이 한 장면에 나란히 배치된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Sacra Conversazione"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Sacra Conversazione)는 일반적으로 "성스러운 대화"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회화에서 주로 사용되며, 성모자상이 중앙에 배치되고, 그를 둘러싼 성인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는 형태의 회화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형식은 15세기 이후 이탈리아 화가들에 의해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의 특징은 성인들이 성모와 아기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이들은 대화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들은 대개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관람자에게 깊은 성스러움과 침묵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작품에는 성모 마리아,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시스코, 성 요한복음사가, 볼로냐의 수호성인 성 페트로니우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라치는 인간의 형태와 감정을 표현하는 혁신적인 접근 방식으로, 당시 전성기를 이룬 후기 매너리즘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매너리즘(Mannerism)은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입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정신과 고전적 규범을 반영하면서도 그에 대한 반발과 변형을 시도한 과도기적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는 당시 미술의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감정과 주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술가의 개성을 나타내기 위해 형식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했고요. 

매너리즘은 표현의 왜곡, 비대칭적인 구성, 그리고 복잡한 및 기묘한 형태를 강조합니다. 매너리즘의 예술가는 풍부한 감정, 긴장감, 불안감 등을 전달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비율과 비대칭 구도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또한 , 이 시대의 화가들은 색상 사용에 있어 기존의 규범을 넘어  과감하게 비정상적인 색채를 시도함으로써 감정적으로 더 깊이 있는 작품을 추구했습니다. 

이 미술 양식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규범과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에서 벗어나, 보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접근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일종의 반항으로, 그 당시 대중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테마에서의 탈피를 나타냅니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표현 형태를 구현하고자 하는 다각적인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조는 후대 초현실주의와 같은 다양한 예술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매너리즘의 특징을 갖춘 작품으로 여러 예술적 요소가 융합되어 있습니다. 매너리즘의 신체 양식과 비잔틴의 신비주의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엘 그레코 El Greco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egaz, 1586, lglesia de Santo Tome, Toledo/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묘사되며, 그의 머리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성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성 프란시스코(San Francesco d'Assisi)의 위치와 어두운 구름의 극적인 삽입은 작품의 감정적 긴장을 강화합니다. 카라치는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이 효과를 높였으며, 작품의 극적인 사실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1-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기독교 수도사이자 설교가로, 프란치스코회의 창립자입니다.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군인으로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환시를 경험한 후, 그는 세속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가난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1210년 교황의 승인을 받아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가난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심지어 자연과 동물에 대한 깊은 존경을 나태내었습니다.1209년 자신의 신념에 따른 첫 번째 규칙을 만들었고, 이는  공동체 생활과 복음을 따르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현재 그는 동물, 자연환경, 그리고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도 그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작품이 공개되었을 당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인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구성의 불협화음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카라치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그를 이탈리아 바로크 운동의 저명한 예술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제단화는 카라치에게 더 많은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바로크 예술 발전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Hc08dgjLrM

 

 

 

 

 


 

 

 

Baptism of Christ,1585/wikipedia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는 1584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그의 중요한 초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예술적  발전과 이탈리아 회화의 변화를 드러내며, 특정 인물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는 1583년에 법학 교수인 자코모 카노비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가 로마로 이주하기 전 볼로냐에서 만든 유일한 제단화입니다. 원래 위치에서 남아있는 소중한 예술작품이고요. 이 회화는 코레조의 영향을 받으며, 카라치가 새로운 예술적 관심을 탐구하는 첫 번째 중요한 사례입니다. 

 

 

작품은 상반부와 하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뉘며, 상반부는 천사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구름 위에 나타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반부는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와 주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요.  해당 장면은 그 당시 볼로냐 화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만소리스틱 양식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중앙에는 성부, 성령의 비둘기, 그리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볼로냐 학파( Bolognese School)는 이탈리아 볼로냐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및 학문적 그룹을 지칭합니다. 주로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동안 존재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기법뿐만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 세밀한 묘사와 빛과 그림자 사용에서 높은 기술력을 보였습니다. 

 

볼로냐 화가들의 만소리스트적 양식은 16세기 볼로냐에서 발전한 이탈리아의 미술 스타일입니다. 이 양식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나 성경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특히 , 볼로냐 학파의 화가들은 인물의 표현과 구성을 통한 극적인 효과를 중시했습니다. 특징 중 하나는 사실적인 인물 묘사입니다 . 화가들은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러한 사실성을 통해 감정과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또한 색채의 사용에서는 밝고 강한 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주었으며, 이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특성들 덕분에 볼로냐 학파의 회화는 감정의 깊이와 드라마틱한 느낌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tjHhKQkpVM

 

 

 

 

 

 

 

The Beaneater,1580-1590, oil on Canvas, Galleria Colonna,Rome/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 콩 먹는 사람 The Beaneater>(1580-1590)입니다. 로마의 콜론나( Colonna) 궁전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작품은 일반 서민의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매우 사실적인 정물화의 양식으로 그려졌고요.  카라치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작업 대상에 따라 "하향 조정"이 가능하여, 농민을 묘사할 때 소탈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거칠고 흉물스러운 요소가 돋보이는 표현 방식으로 그려져 있고요.

 

 

 

작품에서 묘사된 농민은 자연스럽고 솔직한 행동으로 관객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관람자가 마치 그의 식사를 같이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카라치의 그림은 고급스러움과 대조되는 주제를 통해 사회적 계급을 드러내며, 구도와 화풍에서 상반된 밸런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화풍은 거칠고 투박한 터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그림의 주제를 더욱 강조하게 만듭니다. 농민의 일상적인 식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에게 일상의 소소함과 동시에 그들만의 진솔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안니발레의 유화작품 <콩 먹는 사람>도 인물과 주제 선정에서 매우 현대적이며 ,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했습니다.

 


 

Fishing Scene , 1588년경, Louvre,Paris/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드로잉에 매우 능숙했습니다. 정확한 드로잉을 특히 강조했던 그는 종종 실제의 장면을 묘사하고 그것을 이상화된 상상의 풍경 속에 위치시키기도 했습니다. 그가  1588년 즈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 Fishing Scene> 작품입니다. 당시 볼로냐 빌라 장식에 사냥과 고지잡이 주제는 매우 인기있었습니다. 빌라의 현관 위에 걸리도록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카라치의 초기작으로  로마로 이주하기 전 그려진 그림으로 보입니다.

 

카라치는  위 그림에서 한 화면을 여러 개의 장면과 결합시켰습니다. 교묘하게 구성을 연출해 관람자가 전경에서부터 각 그룹의 사람들까지 아주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 본 다음, 배경으로 넘어가게 그렸습니다. 실제 인물들의 습작을 토대로 그린 다음, 풍경과 결합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이 흥미 있는 이유는 오른쪽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입니다. 카리치의 발전된 제스처 사용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설득력있고 유기적인 제스처의 사용은 카라치의 특기인데, 이는 이후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Venus, Adonis and Cupid, 1595,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Venus, Adonis and Cupid >는 1595년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제작한 유화 작품으로,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신화적인 주제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Venus는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됩니다. 그녀는 예술과 문학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인류 문화와 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Adonis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남성 미의 이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인 키니라스와 어머니인 뮈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뮈라는 아프로디테의 질투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결국 아도니스를 출산하게 됩니다. 아도니스는 어린 시절 아프로디테에 의해 하데스에게 보내져 페르세포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아프로디테에게 돌아오게 되며, 두 여신 사이에서의 갈등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도니스는 사냥을 좋았지만, 그는 사냥에서 큰 야생 멧돼지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이 멧돼지는 바로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레스가 질투하여 변신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지고요. 아도니스의 피에서 아네모네 꽃이 피어납니다. 그의 죽음 이후 아프로디테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아도니스의 죽음은 매년 "아도니아"라는 축제로 기념되며, 이 축제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기리기 위한  여성들의 슬픔의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아도니스가 다루는 생명의 순환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Cupid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날개를 가진 아기 천사의 형태로 묘사되며, 사랑의 화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존재입니다. 큐피드는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Eros)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로마 신화에서의 역할은 사랑과 욕망을 다스리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세 인물인 비너스, 아도니스, 그리고 큐피드가 숲 속 풍경을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도니스는 사냥개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치우며 비너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고전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색채와 함께, 인물 간의 감정적인 연결을 강조합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고전 미술 요소들을 통합하여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비너스의 몸은 티치아노의 여성 누드 표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니스는 사냥꾼으로 묘사되어 있고요. 이 작품의 구도는 대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감정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제스처와 시선의 교환이 눈에 띕니다. 이처럼 Venus, Adonis and Cupid 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주며, 사랑과 비극적인 신화를 통해 인물들 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Lqrb9R5XQM

 

 

 

 

 

 

 

 

The Choice of Hercules,1596,Oil on Canvas, Capodimonte Gallery,Naples/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 < The Choice of Hercules>(1596) 입니다.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가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근육질의 헤라클레스가 두 여성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미덕 (Virtue)과 악덕(Vice)을 상징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본능적으로 덜 고된 길인 악덕(Vice) 쪽으로 유혹을 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악덕(Vice)은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쾌락을 제공하는 여러 아이템들로 그를 유혹하고요. 반면, 미덕(Virtue)은 소박한 옷을 입은 여성으로 어렵고 고된 길을 따른다면 명예와 보상을 얻게 됨을 설명하며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는 고전적인 미화와 현대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당시 관람객들에게 더 큰 연관성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미덕(Vitue)의 길을 선택하는 것의 어려움과 그에 따르는 댓가를 강조하며, 헤라클레스의 결정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선택을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합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영웅입니다. 그의 이름은 "헤라의 영광"을 의미하고요. 강력한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로 신화 속에서 12개의 과업을 수행하며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과업은 힘겨운 도전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영웅적인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형제인 리누스를 죽인 후 양을 치며 방황하기도 하고, 다양한 악당들과의 전투을 통해 자신의 위엄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맹렬하게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전설은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고, 신들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웅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HK3r4_6xYk

 

 

 

 

 

 

 

Mocking of Christ,1596,oil on canvas,Pinacoteca Nacionale di Bologna/wikimedia commons

 

 

 

 

 

<그리스도를 조롱함 Mocking of Christ>(1596)은 신약 성경 <마태복음 15장 16-19절> 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졌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가시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붉은 염색 로브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인간의 죄로 인해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도 드러나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카라치는 사실적인 묘사와 뛰어난 색채 사용으로 유명하며,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이 드러납니다.  그의 화풍은 인물의 감정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전달합니다. 인물 간의 상호작용을 강렬하게 나타내고요.  이 그림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표정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곤란한 상황에서도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고요. 이와 같은 해석은 카라치의 대표적인 특징인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접근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조롱함"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 그리스도교의 깊은 의미와 상징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볼로냐의 피나코테카 나지오날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DAhxebcDGY

 

 

 

 

 

 

 

안니발레와 아고스티노 형제는 1595년 로마로 떠나 추기경 오도아르도 파르네세를 만나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로 교황청 내 권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안니발레가 그림을 그릴 장소는 파르네세 공작의 동생, 오도아르 파르네세 추기경의 개인 공간이었습니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였던 오도아르도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추기경이 된 탓에 종교적 열정이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르네세 가문은 오도아르도의 개인 공간이 젊은 추기경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꾸며지길 원했습니다. 

 

 

 

 

오도아르도 파르네세(1573-1626)는 이탈리아 파르마 공국의 유명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교황이 된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이자 파르마 공작 오타 비오 파르네세의 아들입니다. 그는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지닌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이러한 배경 덕분에 교황 추기졍으로 서품되었습니다. 

 

 

안니발레는  이 작품에 이르러 자신이 평생 존경하고 또 영감의 대상으로 얻었던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자신의 화폭속에 녹여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역동성, 라파엘로의 흠결 없는 단정함, 티치아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의 세련된 색채 감각,  코레조의 아련한 관능 등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으되 그들 중 누구와도 지나치게 닮지는 않았습니다. 호히려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평가입니다. 

 

 

 

 

 

 

The Loves of the Gods, 1597, Farnese Gallery, Rome/wikipedia

 

 

 

<신들의 사랑 The Love of the Gods>은 1597년에 제작된 프레스코로, 로마의 팔라조 파르네세(Palazzo Farnese)천장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신화의 다양한 연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오비드(Ovid)으 서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프레스코는 벽화 기법 중 하나로, 석회와 석고로 만든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그리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은 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벽이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프레스코는 기원전 약 3000년경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이 기법은 15세기부터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바티칸 궁전 벽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프레스코화는  벽에 그림물감이 흡수되어 마를 때 표면에 고착되므로 , 시간이 지나도 색깔이 변색되지 않고 내구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마르면서 광택이 줄어들고 색조가 차분해지는 특성이 있으며, 이러한 툭징이 프레스코화의 독특한 매력을 형성합니다. 

 

 

 

<신들의 사랑 The Love of the Gods>(1597)은 역동적인 구성과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주요 패널은 축제의 장면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만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화려한 색채와 복잡한 인물 표현을 특징으로 하여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여러 신화적 요소와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의 내용은 성적인 긴장감과 유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묘사가 그들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복잡한 인간 관계를 탐구하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카라치의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환상을 예고하는 중요한 예로 여겨지며, 그의 예술적 접근은 나중에 바로크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 풍요, 다산, 광기, 황홀경, 그리고 연극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며, 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합니다. 디오니소스의 출생 이야기는 여러 전승에 걸쳐 다릅니다.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자신의 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다 그녀가 공포에 빠져 죽자, 태아였던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허벅지에 숨켜 키웠다고 전해집니다. 디오니소스는 뉘사 산의 님프들에 의해 양육되었고, 그들은 디오니소스를 여자처럼 키우라고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초기 숭배 당시에는 수염을 기르고 긴 옷을 입은 성인 남성으로 묘사되었으나, 후에 젊고 육감적인 양성적인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의 상징 동물로는 표범, 사자, 호랑이가 있으며, 상징 식물인 포도나무와 함께 그의 숭배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또한 전통적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호자이며, 혼돈과 위험을 상징하는 신으로 이해됩니다. 이와 함께 그의 교리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공포와 흥분을 혼합한 의식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공주로, 크레타왕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입니다. 그녀는 신화에서 테세우스의 사랑과 관련이 깊으며,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테세우스를 도와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타래와 칼을 주었고, 이를 통해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낙소스 섬에서 그녀를 두고 떠났고,  그  후 디오니소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의 스타일은 차세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후에 나타나는 거장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들의 사랑>은 단순한 미적 기념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기 다른 신화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인간의 감정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The Loves of the Gods on the vault of the Farnese Gallery,1550/wikipedia

 

 

 

 

 

안니발레는 <신들의 사랑>을 작업할 동안 파르네세 가문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궁 내에서 그의 숙소는 하인이나 쓸 법한 누추한 곳이었으며, 천장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기는 커녕 인테리어에 필요한 사소한 디자인까지 떠맡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함께 작업했던 형  아고스티노가 작품 관련 의견 충돌로 볼로냐로 돌아간 후 사망했다는 소식마저 전해졌습니다.  평생의 예술적 동료인 형을 잃은 안니발레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신들의 사랑>이 완성되자, 로마의 화가와 지식인들은 새로운 걸작의 탄생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파르네세 가문의 인척이기도 한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은 고가의 금목걸이를 선물한 후 안니발레에게 그림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의로인인 오도아르도 추기경의 반응은 싸늘함에 가까웠고요. 대형 천장화 시세를 감안할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받았고, 그나마도 직접 얼굴을 보기는 귀찮다는 듯 하인을 시켜 전달했다로 합니다.

 

 

 

그렇게 안니발레는 형의 죽음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 우울의 덫에 걸리고 무기력에 빠져 그의 작업량이 심각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을 걱정한 제자들이 '하루에 두 시간은 그림을 그린다'는 내용의 약속을 받아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Cupid and Anteros wrestling framed by Atlantes and Ignudi,1550/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vxuvkV3oeos

 

 

 

 

 

 

 

 

 

Pieta,1600, Museo di Capodimonte,Naples/wikipedia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카라치의 < Pieta>는 관람자에게 슬픔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작품은 마리아의 상처 입은 아들을 바라보는 통찰 깊은 시선을 특징으로 합니다. 두 천사가 그리스도의 손과 가시관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동일 제목의 조각상을 명확히 참조하고 있으며, 피라미드 형태의 구성과 캐릭터의 제스처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카라치는 어둡고 극적 조명을 통해 고통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표현적 디테일을 통해 성스러움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상처와 마리아의 슬픈 감정을 섬세하게 조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고대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영향을 받아 인물들의 비율과 근육 구조를 세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카라치의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피에타 형식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통받는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시신을 단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카라치의 작품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추가되어 고통을 나누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oonarroti, 1475-1564)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 건축가, 시인으로,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평생 동안 피렌체와 로마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인생의 고뇌와 신앙을 정교하게 조화시킨 작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교육은 도미니코 기를란다요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에게 받았고, 메디치 가문의 후원하에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주요 작품으로<피에타>, <다비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및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특히 <피에타>는 그의 초창기 걸작으로, 신비롭고도 슬픈 아름다움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조각이기도 하고요. 또한 <다비드>와 같은 조각들은 완벽한 비례와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여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Pieta, 1498-1499,Mable , Saint Peter's Basilica, Vatican City/wikipedia

 

 

 

 


 

 

 

 

 

 

 

Domine, quo vadis?, 1601-02, oil on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Domine, quo vadis?> 는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유화로 제작되었으며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인물의 정면을 강조하며, 카라치 특유의 사실적이고 극적인 표현이 돋보입니다.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강하게 드러나며, 실질적으로 그는 자신의 고난을 직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부끼는 의복과 강렬한 표정은 예수의 감정을 잘 전달하고 있으며, 그의 신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카라치가 신의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뛰어난 기법을 사용하는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종교적 맥락과 인간의 고난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예술가의 기술적 뛰어남과 더불어 종교적 메시지를 강렬히 전달하는 이 그림은, 카라치가 후에 니콜라 푸생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가  인체 해부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자세와 감정을 묘사한 것으로, 바로크 미술의 전형적인 요소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은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 현대 회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는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예술 스타일을 추구했으며, 특히 역사화와 신화적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1624년 로마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카라치파의 영향을 받아 고전적 교양을 쌓았습니다. 그는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 작업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1639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루이 13세의 수석 화가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여겨집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예루살렘의 파괴>, <바쿠스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그는 그의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과 고전적 미학을 통해 후세의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Et in Arcadia ego by Nicolas Poussin,1637-1638,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 Paris/wikipedia

 


 

 

 

 

 

 

 

 

Rest on the Fligt into Egypt,1604/wikipeida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성 요셉이 이집트로 도망가는 여정 중 잠깐 쉬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의 추기경 드노 드 라 누 컬렉션에서 1672년 에 기록되었으며, 라 메라 가문의 소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772년 피에르 크로자에 의해 인수되었고 후에 에카테리나 2세에 의해 소장되어 현재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에르미타주 궁전의 231호 방 (이탈리아)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나무위키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의 슈테틴에서 태어났습니다. 1745년, 그녀는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통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재위 동안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크림 반도를 차지하고, 폴란드 분할에도 참여 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받은 예카테리나는 문학, 예술, 교육을 장려하고, 다양한 문화적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의 치세와 정책 덕분에 러시아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럽의 주요 정치적 강국으로 위치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 복제품도 존재합니다. 익명의 17세기 직사각형 복제품은 오를레앙 컬렉션에서 기록된 후 서더랜드 공작에 의해 인수되었으며,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복제품들이 여러 곳에 전시되거나 개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세련된 고전주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동시에 , 풍경에 담긴 감정과 자연의 묘사로 인해 그의 예술적 기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amentation of Christ, 1606,National Gallery/wikimidia Commons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 런던에 소장되어 있으며 ,  카라치는 이 주제를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여러 차례 다루었습니다.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뺨이 하늘을 향한 모습으로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 있습니다. 성모는 슬픔에 잠겨 있으며, 오른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괴로움을 표현하며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뒤에는 어두운 녹색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성모를 지탱하는 젊은 여성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acci, 1560-1609)는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장엄성과 함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는 볼로냐와 로마에서 활동하며, 후에 이 화풍을 전파한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사실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이 특징이며, 강렬한 빛과 색상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0fQZLgGJpw

 

 

 

 

 

 

 

안니발레 카라치는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작업했습니다.  1609년 제자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가난하게 죽었고요.  매장지는 로마의 위인들만이 묻히던 판테온, 생전에 존경하는 라파엘로의 묘 옆으로 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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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비범한 두뇌'와 '강한 탐구심'을 지닌 화가라고 평가한 르네상스 시대 화가가 있습니다. 생전의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생애나 작업 방식 등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도상학적 의미를 품고 있어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는데,이 때문에 그는 서양 미술사에서 '성스러운 괴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만약 21세기에 태어났다면 패션계에 몸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 출신  '보티첼리'의 삶으로 들어가 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 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종교적 주제와 고전 신화를 자주 묘사한 아름답고 복잡한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1486), <프리마베라Primavera>(1482), <동방 박사의 숭배 Adoration of the Magi>(1476)가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당시의 인본주의 사상과 고전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우아한 자태와 유려한 선, 섬세한 색채가 특징입니다. 평면에 깊이와 거리의 환상을 만드는 기술인 선형 원근법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는 복잡하고 상세한 구성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신화적인 그림과 함께  많은 종교 예술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종종 그의 그림에서 성탄절과 십자가 처형과 같은 성경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1485, The Uffizi, Tempera on Cannvas/wikipedia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한 걸작 중 하나인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1486)을 알아봅니다. 이 작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보여주며, 보티첼리의 기법과 미적 매력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비너스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나 키프로스 해안에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녀는 조개 껍데기 위에  서 있으며, 순결한 진주처럼 그려졌습니다. 바람의 신 제피르와 아우라가 그녀를 감싸고 있습니다. 플로라로 여겨지는 젊은 여성이 꽃으로 장식된 망토를 비너스에게 건네주려합니다.  장면은 풍부한 색채와 세부 사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찬미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고요.

 

 

 

wikipedia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캔버스에 그린 점에서 당시 혁신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나무 패널을 사용했습니다. 특유의 템페라 기법을 통해 인물들이 투명한 모습을 갖도록 했지요. 공기 같은 질감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입니다. 비너스의 포즈는 고전적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비너스 푸디카( Venus Pudica)' 유형으로 , 몸을 살짝 가리며 겸손함을 표현합니다.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는 "부끄러운 비너스"라는 뜻으로, 이는 그녀가 자신의 신체를 가리려는 소위"겸손한"태도를 나타냅니다. 이 자세는 종종 양손으로 한 부분을 가리면서도 동시에 다른 부분이 드러나도록 하여 시각적으로 관객의 눈을 끌게 합니다. 비너스 푸디카의 원형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입니다. 미술사에서 비너스 푸디카는 르네상스 시대에 대표적인 예술작품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주제적으로 이 그림은 오비드(Ovid)의 <변신 이야기Metamprphose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특히 메디치 가문에서 유행했습니다. 비너스를 감싸고 있는 바람 신 제피르와 님프의 부드러운 포옹은 신과 지상의 아름다움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강조합니다. 

 

 

 

이 그림은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메디치( 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에 의해 의뢰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과 르네상스 시대 고전적 이상을 기념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제작되었고요.보티첼리의 작품은 특정 시대의 미적 가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부흥으로서 메디치 가문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메타포 역할을 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가계도/ tygu.yonam.ac.kr

 

 

 

 

 

 

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결혼식 장식 그림이라는 설부터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의 출생을 계기로 정세가 복잡했던 피렌체에 여명이 밝아 오리라는 것을 표현했다는 설,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비너스를 우주의 조화에 대한 완벽한 인격화로 보고 '비너스의 탄생=인간성의 회복'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합니다. 

 

 

 

 

 

 

the face of Venus, 1485/wikipedia

 

 

The Hora of Spring, 1485/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K6PBfbkMzFU&t=1s

 

 

 

 

 

 


 

 

 

 

강인함 Fortitude, 1470, Tempera on panel, Uffizi, Florence/wikipedia

 

 

<포티튜드 Fortitude>는 보티첼리가 Lorenzo de Medici의 별장을 위해 만든 일련의 우화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녀의 의상은 빨강과 파랑의 화려한 드레스로 구성되어 있어, 힘과 우아함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지팡이는 인내와 안정성을 상징하며, 공손한 시선은 그녀의 강한 내면을 강조합니다. 복잡한 건축 요소와 장식된 왕좌가 그녀의 고귀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미덕의 엄숙함을 강화합니다.

 

 

 

 

보티첼리는  복잡한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을 통해 인간 형상과 주변 환경의 복잡성을 포착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초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관심을 드러내며, 전통적인 기독교 상징과 고대 인간 형태의 아름다움이 결합된 예술적 표현을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O0ZFMJYCY8

 

 

 


 

https://www.youtube.com/watch?v=GNQK8XTPub4

 

 

 

 

 

 

르네상스,피렌체 Florence / 프레시안

 

 

 

보티첼리(Botticelli)는 '작은 술통"을 의미합니다. 작은 술통처럼 뚱뚱했던 형의 별명에서 따온 별칭이라고합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린 시절 수업받던 금세공사 장인의 별명이었다고도 하고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라고도 알려진 그의 본명은 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로, 1444년 혹은 이듬해 제혁업자인 마리아노 필리페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둘째 형 안토니오와 함께 금세공사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18세 무렵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 1406-1469)의 공방에 들어가 화가 수업을 받았습니다. 당시 직업 화가들이 10세 무렵 도제로 들어가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늦은 나이였지요. 스승이었 던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의 작품입니다. 

 

 

 

 

Fra Filoppo Lippi, Madonna and Child, 1440, National Gallery of Art/wikipedia

 

 

프라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 1406-1469)는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로, 카르멜 성직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인상적인 자연주의와 사치로운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피는 플로렌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이모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는 8세에 인근 카르멜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420년 카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고요. 그의 초기 예술적 영감은 마사초의 작품에서 받았습니다.  

리피의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며, <마돈나와 아기 예수>같은 작품이 유명합니다. 그의 스타일은 마사치오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점차 독특한 명확한 표현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조로 표현되며, 도나첼로와 자코포 델라 쿠아르치아의 석조 작품의 이질감을 따르는 특징이 있습니다. 

리피(Lippi)는 1469년 스포레토에서 사망합니다. 그곳의 대성당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처녀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프레스코화 작업 도중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5년간 리피에게 물감 배합, 회화 기법, 금박 장식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리피의 공방에서 비중 있는 도제로 활동했습니다. 초기 그의 그림에서는 과도한 장식성, 선원근법을 사용한 정밀한 공간 배치, 힘찬 선, 아름답고 세밀한 세부 묘사가 돋보입니다.  이는 금세공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습득한 섬세한 표현력에 더해 스승이었던 리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또한 Filippo Brunelleschi(1377-1446),  Donatello(1386-1466), Masaccio(1401-1428)와 같은 당시 다른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 사람의 작품도 차례차례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Cath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Brunellesxhi's Dome/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TQ8F_yPwqzA

 

 

 

 

 

Filippo Brunelleschi(1377-1446  )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금세공사로서 ,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건축, 조각, 기계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요. 고대 로마의 판테온과 비교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 돔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하는 데 중요한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피렌체 대성당 돔, 산 로렌초 성당, 파치 예배당 등이 있습니다. 작품의 특징으로는 균형 잡힌 비례, 고전적 형태의 재해석, 기하학적 명확성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건축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원근법의 발전에도 기여하여 미술과 건축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qbiEvxk8GI

 

 

 

 

 

Donatello, Magdalence Penitent, 1440, Wood, Museo dell' Opera del Duomo, Florence/wikipedia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입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주로 피렌체에서 작업했으며, 표현의 깊이와 사실적인 묘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딕 조각의 전통을 극복하고 자연을 관찰하여 르네상스 조각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위치를 탐구하는 예술을 창조하며 그 시대의 미학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다비드상>,< 성 조르조 상>, <파치 가의 성모상>, <세례자 요한 상> 등이 있습니다. 

 

 

 

 

The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 before and after restoration,1425/ wikipedia

 

 

 

Masaccio(1401- 1428 )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원근법과 자연주의적 묘사 기법을 도입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방향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22년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미술에 있어 원근법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도입한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감정이 잘 표현된 인물들이 등장하며, 특히 강한 자연주의적 요소가 돋보입니다. Giotto 와 Donatello의 영향을 받으며, 고딕 양식의 복잡한 장식에서 벗어나 보다 자연스럽고 단순한 형태를 추구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 < 성 삼위일체>,<브란카치 기도소의 프레스코들>, <추방 The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이 있습니다. 그는 26살의 짧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후속 세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르네상스 미술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Botticelli의 훈련에는 그의 예술적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전 문학 연구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의 그림 중 많은 부분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불라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Publius Ovidius Naso)는 기원전 43년 3월 20일 태어나 기원후 17년 또는 18년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주의 술모에서 부유한 기사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로마로 유학하여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웠고, 법조계 진출이 아버지의 소원이었으나 , 사교를 즐기며 시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시를 지었으며, 특히 그의 대작인 <변신 이야기>( Metamprphoses)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신화의 변신 이야기를 연결하여 서술한 것으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또한 사랑의 기술 ( Ars Amatoria)라는 연애시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불만을 샀고, 결과적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유배 생활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고, 흑해 연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티첼리의 예술적 훈련은 피렌체 예술과 문화의 전통에 기반을 두었고, 그는 계속해서 그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든 매우 개별적인 스타일을 개발했습니다. 

 

 

 


 

 

보티첼리는 1467년경 도제 수업을 마친 후 늦어도 1470년 피렌체에 자신의 공방을 차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1470년에 독립적인 화가로 상업회의소에 걸릴 <용기>를 그렸기 때문이지요.  < 용기>와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그린 <베툴리아로 돌아가는 유디트>, <죽은 홀로페르네스의 발견> 등으로 급격하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도제 수업을 마칠 무렵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와 <성모자와 천사>에서 스승 리피의 영향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구도의  부자연스러움에서 초보 화가의 약점이 보이지만,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과 우아한 자세 등 그의 대표적인 특징도 엿보입니다. 

 

 

 

동방 박사의 숭배 Adoration of the Magi, 1475-1476, Tempera on paner, Uffizi Gallery, Florence/wikipedia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는 예술적 기법과 심오한 상징성을 함께 담고 있는 명작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에는 고대 건축물과 폐허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새로운 계약이 성립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은총 시대의 대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다양한 인물 표현을 통해 생동감을 불어넣었으며, 인물들은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인물의 표정과 자세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있지요. 그림 속 첫 번째 동방박사는 고인이 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코시모 데 메디치로, 그는 노인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흰 천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로, 그는 빨간 망토를 입고 아버지에게 예물을 봉헌하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동방박사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로 , 그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예물을 담은 성배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과스파레 델 라마의 의뢰로 제작하였으며, 당시에 피렌체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은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그들의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 보티첼리의  작품 또한 이러한 후원 속에서 탄생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ofuY0v7ewck

 

 

 

 

 

 

Detaul of the Adoration of the Magi, self Portrait of Botticelli/wikipedia

 

 

 

 


 

 

보티첼리는  곧 피렌체 예술가들의 최대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플라톤 학회를 만들고자 한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의 연회에 참가하며 플라톤 철학을 미술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런 한편 수많은 초상화와 제단화를 그렸으며, 그중에는 대 코시모에게 주문 받은 그림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 코시모 의 마상 창 시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나뭇가지로 장식된 방패를 든 팔라스>나 <수태고지>(1475)같은 작품들은 전하지 않습니다.

 

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나무위키

 

 

 

 

로렌초 일 마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로렌조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예술적 감각을 가진 인물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열렬한 후원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렌조는 1469년 20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통치권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피렌체는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예술과 문화가 융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재적 통치를 하였으며,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습니다.  로렌조는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인본주의 발전을 지지하여, 많은 고전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탈리아 내의 강대국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고, 나폴리 국왕과의 통상 조약 체결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피렌체 황금기의 종말로 이어지며, 르네상스도 쇠퇴합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힘과 영향력을 대내외적으로 강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메디치가 가계도/위키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n9WIReSXpks

 

 

 

 

 

 

메디치 가와의 긴밀한 관계는 1478년 로렌초 일 마니피코와 동생 줄리아노가 암살 습격을 받은 데 연루된 파치가 인물들의 처형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수많은 주문자들이 그림을 그렸다 해도 메디치 가의 공식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가 피렌체에서 가장 명망 높은 화가 중 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시기에 보티첼리는 스승 리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해 나갔으며, 도상학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데 매달렸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위키백과

 

 

교황 식스토 4세는 1471년부터 1484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 델라 로베레 가문의 부흥을 위해 친족들을 중용하며 족벌주의를 강화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 이단심문소를 설치했습니다.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았고, 이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던 이력이 있던 그는 프란치스코회 특전을 확대하는 등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과의 갈등으로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청의 재정은 악화되었으며, 후임 교황에게 막대한 빚을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sGlRBaVX9U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명성은 피렌체 밖에서도 자자했습니다. 독립 초기부터 다른 지역의 고객들에게 그림 의뢰를 받았던 그는 1481년 교황 식스토 4세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그리기 위해 로마로 갔습니다. 식스토 4세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에게도 예배당의 벽화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미켈란젤로의 벽화와 제단화 때문이지요.  이때 그린 보티첼리의 벽화 중 제단 벽화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부른 르네상스 시대  세 화가의 작품도 살펴봅니다.  

 

 

 

Adoration of the Magi, Domenico Ghirlandaio, 1485-1488, Ospedale degli Innocenti, Florence, Tempera on Panel/wikipedia

 

 

도미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8-1494)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로,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바스티아노 마이 나르디 등 여러 유명한 화가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1488)작품은 자신의 자화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1480)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그린 작품으로, 유다의 배신을 다소 현실감 있게 표현한 예술적 접근이 인상적입니다. '성모전' 연작은 당시 귀인의 생활을 반영하는 장면으로, 배경의 프리즈와 네모 기등에서 도나텔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금박을 사용하지 않은 최초의 화가 중 하나로, 이를 통해 더욱 현실적인 재료감과 색감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당시 플랑드르의 사실주의적 요소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요소가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어,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예시로 평가받습니다. 

 

 

 

 

 

Sermon on the Mount, Cosimo Rosselli, fresco, Sistine Chapel, 1481-1482/wikipeia

 

 

코시모 로셀리(Cosimo Rosselli,1439-1507 )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특히 성경과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화풍은 보통 강렬한 색채와 세심한 인물 묘사로 특징지어 집니다. 그는 고전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 신화와 이야기를 표현하며, 세밀한 배경과 인물의 감정 표현이 돋보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산상설교와 나병환자를 고치심>(1481)입니다. 종교적 주제를 통해 로셀리의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은 <갈대 바다를 건넘>(1481)이 있습니다. 

 

 

 

Delivery of the Keys, Pietro Perugino, 1481-1482, Fresco, Sistine Chapel , Vatican City/wikipedia

 

 

 

움브리아/ 위키백과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i, 1446-1523)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주로 움브리아 지방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조화의 혁명가"라 불리며,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조화로움과 정서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1481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벽화를 제작한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고, 제자 라파엘로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피에타>(1495)제작되었으며, 관상과 정감이 드러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루지노의 작품은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는 평온과 고요한 감정을 통해 자연과 인물의 조화를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각 인물의 신체와 배경의 경관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에는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 피에타>, < 하느님 아버지와 두 성인>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적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후배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듬해  피렌체로 돌아온 보티첼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비롯해 친밀한 후원자들을 위해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개발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이 오늘날 보티첼리 명성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들로, 장차 르네상스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입니다. 

 

 

 

 

Primavera, Tempera on penel, Uffizi, Florence, 1470-1480/wikipedia

 

 

 

 

 

 

 

<봄 Primavera>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조카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침실 곁방에서 발견된 것으로, 로렌초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그림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 비너스를 수행하는 삼미신, 비너스, 다산의 여신 플로라, 서풍 제피로스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이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고 있다는 데서 이들이 각기 어떤 서사를 가지고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보티첼리가 단순히 그리스 신화의 서사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도상학적 아이콘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며, 그가 자신만의 시와 철학을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적 회화의 전형인 사실주의와 일관된  서사를 완전히 무시한 데다, 원근법조차 무시한 독특한 화풍을 지닙니다. 그럼에도 유려한 선과 우아한 에로티시즘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사상으로, 주로 플라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신념적인 요소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이 도시에서 활동하며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프로클로스( Proklus)등 의 철학자는 신플라톤주의 를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을 중심에 두면서 세상이 아닌 초월적인 세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사상은 르네상스의 부활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많은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영혼의 상승을 강조합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 영혼의 행복을 정서적이기보다 지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보고, 현세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에 중점을 둡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사상으로의 회귀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철학과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려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FtMgt0nqgU

 

 

 

 

 


 

 

 

 

 

 보티첼리의 스타일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했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원근법의 사용과 고전 고대 연구에 대한 강조와 같은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의 요소를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주목할만한 작품은 섬세하고 천상의 인물을 창조하는 보티첼리의 능력을 보여주는 "마돈나와 천사와 함께 있는 아이"입니다. 이 그림은 부드럽고 흐르는 선과 미묘한 색상을 사용하여 그의 멘토인 Fra Filippo Lippi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마돈나와 천사들과 함께 있는 어린이,1470/파인아트 프린트

 

 

 

 

 

 


 

Madonna of the Magnificat, 1481, Tempera, Uffizi, Florence/wikipedia

 

 

 

 

 

이 그림은 중심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천사가 그녀의 머리를 관으로 씌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마리아는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있고, 실제로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은 루카복음의 마리아 찬가인 ' Magnificat' 입니다. 마리아는 깊은 파란색 로브로 우아하게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신성한 은총을 상징하고요. 그녀의 시선은 아래를 바라보며, 아기 예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왼손에 쥐고있는 석류는 고통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회화 주변에 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를 가진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풍부한 서사와 감정을 제공합니다. 배경은 평화로운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 이것은 르네상스 회화의 전형적인 요소로 화폭에 깊이와 맥락을 더합니다. 

 

 

'마그니피카트 Magnificat'는  루카복음 1장 46절에서 55절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자벳스에게 방문할 때 하느님께 찬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문해력에 대한 복잡한 담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작가로 묘사한 점에서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닙니다. 보티첼리는 전통적으로 독서를 하는 마리아를 묘사하는 대신, 그녀를 글을 쓰는 모습으로 그려 제기된 질문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적 기교와 초기 르네상스 예술의 풍부한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명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POr0Y2fI

 

 

 

 


 

 

보티첼리는 고전 신화에 매료되어 종종 그의 그림에 신화적 인물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야기에 끌렸으며 그의 그림에는 종종 비너스, 마르스, 아폴로와 같은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Venus and Mars, 1483, National Gallery ,UK/wikipedia

 

 

 

 

작품의 제작 시기가 르네상스 중엽에 해당하며, 이 시기의 미술은 인간 중심주의와 고대 로마 및 그리스 문화에 대한 재조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보티첼리는 인문주의적 요소와 고전 문헌의 영향으로 인해 이 작품을 통해 사랑과 전쟁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와 전쟁의 신 마르스(Mars)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비너스는 침착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마르스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르스는 잠에 빠진 듯한 상태로 그림의 중앙에 누워 있습니다. 주위에는 장난기 가득한 아기 사티로스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비너스는 전통적으로 사랑과 미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녀의 시선은 사랑의 힘과 따뜻함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마르스는 전쟁과 폭력을 상징하며, 깊은 잠에 빠지는 모습은 사랑의 힘이 전쟁보다 우월하다는 주제를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사랑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무화과와 월계수를 포함한 숲으로, 이는 비너스와 결혼을 상징하는 요소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 혼란스러운 구름 위에서 잠자는 마르스 머리 주위로 벌레가 모여 있는 장면은 사랑의 존재가 전쟁에서 가져오는 고통과 상처를 의미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 고유의 색채 사용과 유려한 선을 통해 인물들의 특징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비너스의 의상과 마르스의 노출된 신체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이상적인 인체를 강조합니다.  비너스의 우아함과 마르스의 강인함, 그리고 주위 천사들의 유희적인 모습 사이의 대조를 통해 더욱 흥미로운 구성으로 제시됩니다. 

 

 

이와 같이 < Venus and Mars>는 보티첼리의 미술적 기법과 철학적 주제를 함께 반영한 걸작으로, 르네상스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kHq6QXX30

 

 

 

 

 

 


 

 

 

Nastagio degli Onesti,1483, Part three,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Traveling in Tuscany

 

 

 

 

 

<Nastagio degli Onesti>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1483년에 제작한 연작 그림 중 하나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문학 작품인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졌습니다. 이 연작은 네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 Museo del Prado)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0-1353)은 중세 이탈리아 문학의 중요한 작품중 하나로, 10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로 유명하며, 에로틱한 요소와 비극적인 상황이 잘 결합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중세 시대의 삶에 관한 중요한 역사적 문서로서,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열흘'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이야기가 열흘 동안 진행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피렌체에서 발생한 흑사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외딴 별장으로 피신한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한 가지씩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각 이야기들은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운명, 인간의 의지력, 비극적인 사랑, 속임수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카치오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시 사회의 성 역할과 갈등을 풍자하였으며,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데카메론'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제프리 초서 등 여러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 모음이 아닌 서로 연결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Nastagio degli Onesti , 1483/ The Ark of Grace

 

 

 

이 작품의 이야기는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Nastagio degli Onesti)라는 귀족이 사랑을 승리하기 위해 괴로운 운명을 겪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나스타조가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후, 그녀의 고백이 절실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갑니다. 나스타조는 저주받은 영혼의 고통을 목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나가고자 합니다. 

 

 

The Story of Nastagio Degli Onesti, part one/wikipedia

 

 

 

< Nastagio degli Onesti>의 첫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가 숲속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구하려고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여성은 기사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나스타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두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가 그녀의 불행한 과거를 이해하게 되고, 기사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 패널은 나스타조가 자신의  사랑과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여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때 다시 한번 저주받은 여성의 고통이 제현됩니다.

 

The Story of Nasagio Degli Onesti ,part four/ Alamy

 

 

마지막으로 네 번째 패널에서는 나스타조의 사랑하는 여성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약속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결말은 꿈꾸던 사랑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의 힘과 고통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나스타조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러 장애를 극복하며,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깊은 댓가를 요구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연작은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과 갈망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선명한 색채, 섬세한 인물 묘사와 드라마틱한 구성을 사용하여 나스타조의 심리적 갈등과 주변 상황의 복잡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요소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s7i8eqM8

 

 

 


 

 

 

1492년 ,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죽으면서 피렌체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15세기 말이라는 세기말적 상황에서 대중은 종말론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대중의 허영을 지탄하고 갱생을 촉구하며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치품을 불태우는 '허영의 화영식'을 열었습니다. 이때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신봉자가 되어 자신의 '허영'많은 그림을 불 속에 집어넣었으며, 이후의 그림에서 이교도적인 색채를 지우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했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의 그리스도교 수도회입니다. 1206년 스페인의 성 도미니코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성 도미니코가 알비파 이단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를 느끼고,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을 절감하며 창설한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는 청빈을 중시하며 탁발 수도사로서의 생활을 이어왔고, 엄격한 생활과 학문 연구, 설교 및 교육에 힘써온 결과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수도회로 자리잡았습니다. 고난과 가난에 처한 이들을 돕고, 인권 옹호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철학과 신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위키백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1498)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사, 설교가 및 종교개혁가입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개혁과 민주정을 추진하며, 당시 교회의 부도덕성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르네상스/ 프레시안

 

 

사보나롤라는  페라라(FERRAR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인문주의 , 철학, 의학 등을 공부하다가 1475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는 1482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략 후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무너지면서, 사보나롤라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아 피렌체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신정 정치적 민주정치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며,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예언적 주장과 설교를 지속했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1470년 5월 30일에 태어나 1483년부터 149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통치했던 귀족입니다. 그는 발루아 가문의 일원으로 ,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하나로 여겨집니다. 샤를 8세의 통치 기간은 1483년부터 1498년까지입니다. 13살의 나이에 즉위한 그는 초기에는 누나인 안 드 보주에 의해 섭정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나폴리 왕국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이를 통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스빈다. 그의 원정은 1494년 시작되어 1495년 나폴리를 점령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다수의 적들과의 동맹이 형성되어 어려움을 겪었고,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랑스로 퇴각하게 됩니다. 1498년 의식을 잃고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tLou92CsEM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의 대립으로 인해 1498년에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 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가로 여겨지며,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회의 부패와 정치적 부당함에 대한 정직한 비판자로서, 그의 설교가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본명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교황이나 그의 정치적 능력과 논란 많은 개인사가 특징입니다. 1431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발렌시아 하티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교황으로서 많은 외교적 업적을 세웠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뛰어난 정치가 및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뛰어난 지성을 가진 교황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족벌주의와 호색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492년 부터 1503년까지 교황으로 재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BsslVx-qg

 

 

 

 

 


 

 

 

이 때문인지 역동적인 리듬감과 유려한 곡선, 우아하면서도 에로티시즘이 함축되어 있던 종래의 그림과 달리 말년에 그림들은 구도가 단순하고 응집되어 있으며, 곡선이나 옷 주름 등의 표현이 매우 소박하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화풍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변용,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마지막 영성체> 등에서 뚜럿이 드러납니다. 

 

 

 

 

 

 

The Calumny of Apelles, 1494-95, Tempera on panel, Uffizi, Florence/wikipedia

 

 

 

 

이 그림은 그리스의 고대 화가 아펠레스(Apolles)에 관한 전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아펠레스는 자신의 동료에게 모욕적인 누명을 쓰였고, 이를 통해  보티첼리는 고발과 증거의 진실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적인 이야기의 배경에서 보티 첼리는 비난과 오해가 가져오는 고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이 등장하며, 그의 손에는 부주의하게 선택된 판결을 상징하는 함축적인 제스처가 드러나 있습니다. 왕의 머리에는 당나귀 귀가 그려져 있어, 아폴로 신의 저주를 암시합니다. 그는 두 명의 인물, 즉 '무지( Ignorance)'와 '의심( Suspicion)'의 상담을 받으며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비난 (Calumny)'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는 자신의 무고한 희생자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왼손에는 불타는 횃불이 들려있어, 그녀의 비방이 불과 같이 언제든지 타오를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증오( Rancour)'와 '사기( Fraud)' 가 이 여성의 곁에서 그녀를 꾸미는 모습은 비난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나타냅니다.  가장 뒤편에는 '진실(Truth)'을 나타내는 누드 여성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모습으로, 진실이 어떻게 그들의 비극적 상황에 무관심할 수 있는지를 암시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 뛰어난 색채 사용과 섬세한 선묘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컴포지션은 동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그들의 내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며, 풍부한 기하학적 패턴과 조화로운 구성이 돋보입니다. 

 

 

 

이 작품은  보티첼리가 죽기 전 제작한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로 보이며, 그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의 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고통을 다룬 뛰어난 예술성으로 여겨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ZJmlv1HWuE

 

 

 


 

 

 

 

Mystic Crucifixion, 1500, Oil on Canvas and Egg Tempera, Harvard Art Museums, Boston/wikipedia

 

 

 

 

이 작품은 보티첼리의 경력 중, 도미니카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은 피렌체의 상태에 대한 강력한 진술로 여겨지며,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종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주요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발치에는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십자가를 끌어 안은채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요. 그녀의 곁에는 정의의 천사가 있으며, 이는 피렌체의 상징인 작은 사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배경에는 폭풍 구름이 있으며, 불과 무기들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사보나롤라의 강력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보티첼리의 화풍은 이러한 주제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보티첼리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그가 지닌 사상적 배경을 반영한 작품으로,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복잡한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uI_T_ehqM

 

 

 

 


 

 

The Mystical Nativity , 1500-1501, oil on canvas , National gallery , London/wikipedia

 

 

 

 

이 그림은  초기 피렌체 시대의 보티첼리 후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신비한 환경에서 천사와 다른 인물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담한 색상과 특이한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띕니다.  전반적으로 이 그림들은 보티첼리가 예술가로서 초기에 전통적인 고딕 기법과 떠오르는 르네상스 스타일을 모두 실험하면서 발전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제로 하여 기독교 신비주의와 종말론적인 요소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아기 예수와 마리아가 있습니다. 아기는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그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머리 위에는 천사들이 날고 있고요. 이 장면은 신성한 축복의 순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정원으로, 이곳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곳에는 여러 천사들이 있으며, 그들의 의상은 각각 화려한 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천사들은 다양한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루지아의 예언자들처럼 보입니다. 특히, 중심의 천사들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싸며, 그들의 구속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림의 좌측에는 세 명의 왕이 그려져 있으며, 그들은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비즈니스 복장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왕은 각각 동방에서 온 것으로 , 그들의 방문은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른쪽에는 목자들이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그들의 단순함과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비록 이 장면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나, 보티첼리는 신의 귀환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전조로 이들을 연결지었습니다. 그림의 중앙에서는 아기 예수 주변에 여러 악마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 함께 등장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이 궁극적으로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신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강조하려고 했으며, 이는 당시 기독교 세계의 갈등과 불안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비록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복잡한 상징성과 깊은 인문주의적 요소들이 섬세하게 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아래쪽  동영상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vg2-C9f0iQ

 

 

 

 

 


 

 

 

 

그의 생애 동안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보티첼리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 쇠퇴했고 그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다시 한 번 찬사를 받은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습니다. 오늘날 그는 이탈리아 르세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말년에  이르러 보티첼리의 창조력은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질병 때문에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닐  만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림조차 그릴 수 없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나 미켈란 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와 같은 젊은 화가에게 밀려 잊혔고, 65세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nm118

 

Masterpiece The Mystic Nativity - video Dailymotion

The story of the Mystic Nativity - Sandro Botticelli's beautiful image of hope in troubled times. This masterpiece was painted 500 years ago in Florence, at the height of the city's fame & influence. More at: https://hdclump.com/category/art/ https://hdclu

www.dailymotion.com

 

 

https://www.youtube.com/watch?v=-sZwjie1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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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서 약 1400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시기 전체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거의 200여 년을 지속한 르네상스는 다시 초기, 전성기, 그리고 후기로 구분이 되지요. 각각의 단계가 나타나는 시기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크게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알프스 이남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경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그 후 백 년 늦게 시작된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약 1500년에서 시작하여 1550년까지 지속됩니다. 

 

 

'플레말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15세기 초에 플랑드르(현, 벨기에 와 네덜란드지역)에서 고딕양식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회화를 등장시켰습니다. 자연스러운 형태의 구상과 일상생활의 소재들을 시적으로 묘사한 표현이 특징인 그의 작품은 당시 널리 유행한 국제 고딕 양식과 다른 화풍을 선보입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를 비롯한 북구 르네상스 화가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고요.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의 그림들에 다른 그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그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여성의 얼굴이라든지, 인물들의 자세, 실내 인테리어 표현 등에서 말입니다. 로베르 캉팽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와 함께 15세기초의 네덜란드의  사실주의적인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웁니다   그는 특히, 회화에 전통적인 종교관을 담으면서도 동시대의 주문자들이 성모마리아나 아기 예수, 성인들이 실제로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소망들을 잘 표현했습니다. 

 

 

 

 

메로드의 세 폭 제단화 Merode triptych, 1427-32, oil on oak, The Cloisters Collection in New York/The Met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1375-1444)의 대표작 < 메로드의 세 폭 제단화 Merode triptych>(1427-32>입니다. '수태고지(Annunciation'로 알려진 이 작품은  신약성서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 1:30)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 주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기독교에서 이 부분은 예수가  인간으로서 삶을 얻게 되는 순간이라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따라서 수태고지 테마는 유럽 성당 내 벽화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수태고지'도상은 푸른색 망토를 두른 여성과 날개 달린 천사 두 인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때에 따라 성모의 순결함을 강조하기 위해 흰 백합꽃이 등장하고요. 대체로 '수태고지'에서는 성모는 책 읽는 모습이나 수를 놓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애초에 수태고지는 마리아와 요셉이 생활한 갈릴리 지방 나자렛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캉팽은 나자렛 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플랑드르 지방에서 일어난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캉팽은 집안 구조뿐 아니라 소품들도 하나같이 15세기 플랑드르에서 사용하는 실제 일상 용품들로 채웠습니다. 그림에서 보듯 벽에 걸린 주전자, 긴 벤치형 의자, 마요르카 도자기 화병, 벽난로 가리개 등은 당시 플랑드르 사람들이 사용한 가재도구들이었습니다.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금빛 찬란한 천상의 화려한 장식을 버리고, 일상의 소품들과 풍경을 성화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신성한 것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 내린 것처럼 말입니다. 

 

 

 

Detail with the Virgin reading a book of hours/wikipedia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소품이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이 읽고 있는 책과 식탁에 놓인 책주머니입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가 등장하기 100여 년 전이므로 여기 놓인 책은 필사본으로 아주 귀한 책입니다. 책이 귀하다 보니 책 주인이 책을 소중히 다룬 흔적이 보입니다.  마리아는 책의 네 귀퉁이가 닳을까 천으로 책을 둘렀습니다. 이도 모자라 책을 가방에 넣어 소중히 보관했지요. 일부 학자들은 흰 천이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북유럽회화의 매력인 섬세한 그림에는 많은 상징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책과 두루마리가 놓여있습니다.  이는 신양성서와 구약성서를 상징합니다.  이들 정물 소재들은 대부분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안에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피렌체산 마졸리카 꽃병에 꽂아 놓은 흰 백합과 손에 들고 있는 흰 손수건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합니다.

 

 

멀리 구석에 걸려있는 커다란 물주전자는 구세주의 강림이 세상의 죄를 씻어 줄 것임을 뜻하고요. 탁자와 맨틀피스(벽난로 위쪽 장식용 선반) 위에 놓여있는 꺼져가는 촛불 대신 신성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합꽃이 세 송이인 것은 삼위일체를 상징합니다 .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학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이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한분이시지만, 세 가지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중요한 신념입니다. 

 

 

 

Detail of the Center panel/wikipeidia

 

 

 

왼쪽 벽면에 동그란 창을 자세히 보면 작은 아기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마리아를 향해 금빛 광선과 함 께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밝은 빛은 아직 가브리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마리아의 붉은 색 겉옷 가운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잉태의 상징이지요.  그와 동시에 테이블 위의 양초는 연기를 피우며 꺼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촛불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마리아의 붉은색 의복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피를 상징합니다 .기대어 앉은 보료의 푸른색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고요.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왼쪽의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 부부입니다. 마치 부부가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다가 수태고지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건함과  헌신을 상징하지요. 제단화는 메뉴스크립트에 비해 값이 다소 저렴할 뿐 만 아니라 그림에 자신들의 모습을 넣을 수 있어 신흥 상인들이 선호하는 주문 작품이었습니다. 

 

 

 

메뉴스크립트/Gettyimages

 

 

 

"매뉴스크립트"란 손으로 작성된 책이나 문서를 의미합니다. 주로 중세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종교적 내용이나 고전 문학 작품을 포함하며, 화려한 장식과 삽화가 특징입니다. 주로 중세의 채색 필사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주제의 성경, 기도서, 성무일도와 같은 문서에 화려한 삽화와 장식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전 문학 작품이나 법률 문서에도 사용되었지요. 각 페이지는 예술적으로 장식된 테두리와 머리글자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러한 메뉴스크립트는 당시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중세 시대 이후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유럽에서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종이와 목화 그리고 화약은 절대 반출금지 품목으로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서양에 종이가 밀수입되고 대중화되기 까지는 한참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책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가죽에 손글씨를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값이 엄청 났습니다. 지금 시대의 가치로 따지면 책 한 권이 거의 수입차 한대 값이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 책들은 망가지면 가죽이라 실로 꿰맸습니다. 전자책이 대중화 되고 있는 요즘시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중국의 종이 발명은 기원전 105년으로, 발명가는 채륜입니다. 채륜은 후한 시기에 궁정의 물자를 담당하며 비단 대신 쓰일 가볍고 편리한 재료를 찾던 중 , 나무껍질과 헝겊, 풀 등을 으깨어 얇게 펴 말리는 방법으로 종이를 제작했습니다. 이 방식은 종이가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 이후 중국 내에서 제지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Detail, Center Panel, with table, book of hours, fading candle and vase,1427/wikipedia

 

 

 

 

 이전의 국제화된 양식의 그림이 대부분 귀족적이었다면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1375-1444)의 그림에서는 돌연 평범한 시민의 가정으로 옮겨갑니다. 그림속에 묘사되고 있는 소재들, 즉 물그릇을 비롯하여 수건, 백합과 꽃병, 촛대, 의자 등, 15세기 플랑드르 보통 가정의 실내 정경임을 짐작케합니다.

 

 

 

이처럼 그림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후기 고딕 회화와 다를바 없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입각한 치밀하고도 구체적인 사실 묘사와 중간 색조의 미묘한 변화,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확한 명암처리, 그리고 지나친 점이 있으나 원근법적인 공간 등에서 캉팽 이전의 경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혁명적인 조형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Left panel, with street scene and attendant,1427/wikipedia

 

 

 

 

 

 

 

보다 중요한 것은 원근법에 의한 실제적인 공간이라든가, 명암에 의한 조각적인 표현, 미세하게 처리된 중간 색조의 변화 등 조형적인 새로움입니다.  특히 현실성을 결정짓는 요건, 즉 '무한의 깊이와 안정성, 연속성, 완전성을 갖춘 공간적 세계로 파고드는 '조형감각은 이전의 누구도 깨닫지 못한 개별적인 세계입니다. 더구나 밝고 선명한 이미지의 채색기법은 템페라에서 구하지 못한 유채라는 새로운 매재를 통한 조형의 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Right panel, detail with street scene and view of Liege, 1450/wikipedia

 

 

 

 

 

 

오른쪽 패널의 그림은 공방에서 일하는 요셉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옆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주로 나이든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작업대와 창가에 놓인 쥐덫은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님의 십자가는 악마를 잡는 쥐덫과 같다. 악마를 유혹하기 위해 쥐덫에 달아 놓은 미끼는 다름 아닌 주님의 죽음이었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킵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악마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요셉은 악마를 속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하잘 것 없는 일개 목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악마는 그런 요셉의 아들인 예수가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그림을 확대해서 천천히 보다 보면 이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재미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것이 바로 오른쪽 패널의 창문, 정확히 말하면 그 창문 너머의 풍경입니다. 

 

 

 

플랑드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좁은 폭의 건축물들과 십자가가 달린 중세 시대 양식의 첨탑이 있는 두 개의 교회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옷 , 모자, 신발들도 식별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이 제단화는 상세한 사실주의와 종교적 장면을 현대적인 실내로 혁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겨울이면 뼛속까지 한기가 도는 추운 플랑드르 사람들은 벽난로를 설치하고 유리창에 이렇게 덧문을 달아 추위와 바람을 막고자 했습니다. 

 

 

Detail with Coat of arms in Window, center panel, 1427/wikipedia

 

 

 

 

 

<메로드의 세폭 제단화 Merode triptych>(1427-32)가 있는 클로이스터스 (The Cloisters)는 뉴욕 워싱턴하이츠 포트 트라이언 공원에 위치한 미술관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분관으로 1930년대에 건축되었는데 그 모양은 중세 유럽 시대의 수도원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여 디자인되었습니다. 서양 중세 미술 및 건축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New York,USA/wikipedia

 

 

 

원래 클로이스터(Cloister)는 수도원이나 대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보도나 통로 자체를 일컫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수도회의 교회당을 뜻하며,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은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B8UKCOIThs

 

 

 

 

 

 

 

 

 

https://www.youtube.com/watch?v=q1X0Lj7YEMs

 

 

 


 

 

Tournai, Belgium/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cTE-EPXohuA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벨기에 투르네(Tournai) 출신입니다. 이 도시는 프랑스 국경에 있는 오래된 소도시입니다. 제조업과 무역이 활발했던 벨기에 투르네에서 자신의 공방을 열고,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과 시민들과 부르조아 시민들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반 에이크 형제와 비견 될 만큼 뛰어난 사실 묘사와 선명한 색채의 구사, 초기 유채화의 정착에 크게 기여한 화가입니다.  이쯤해서 두 형제들의 작품도 보고 가겠습니다. 

 

 

얀 반 에이크 형제들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요한 화가로 꼽힙니다.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1390-1441))와 그의 형 후브레흐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는 뛰어난 기법과 독창적인 스타일로 플랑드르 화풍에 큰 영향을 미친 형제들입니다.

 

 

먼저 얀 반 에이크는  사실주의와 세밀한 묘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유화 기법을 발전시켜 색체의 깊이와 생동감을 잘 표현했습니다.  대표작으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1434)가 있습니다. 

 

 

 

Arnolfini Portrait,1434/wikipedia

 

 

 

이 초상화는 결혼을 기념하는 그림으로, 완벽한 사실감과 세밀한 디테일로 주목받는 작품입니다. 특히, 뒷배경에 있는 거울은 두 인물의 모습과 함께 화가인 얀 반 에이크의 자화상과 조수의 모습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상징과 사실적인 디테일이 조화를 이루며 북유럽 르네상스 초상화의 전형을 제시합니다. 

 

Ghent Altarpiece, 1432/wikipedia

 

 

 

 

 

겐트 제단화는 구원과 구제를 주제로 한 복합적인 그림입니다. 여러 패널로 구성되어 있고요. 세밀한 장면 묘사와 복잡한 상징을 통해 중세 기독교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형 후브레흐트는 이 제단화를 시작했으나, 그의 사후 동생 얀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Saint John the Baptist, 1410, oil on oak panel,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Ohio, USA/ Wikimedia Commons

 

 

 

 

 

 

북유럽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입니다. 오크에 패널로 유화로 그려져있고요. 이 그림은 세례 요한이 하얀 천 아래에 털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붉은 십자가가 있는 깃발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배경의 화려한 금색 무늬의 비단은 신을 숭배하는 데 사용되는 최고급 물품을 사용하는 전통을 이어갑니다. 이 작품은 원래 삼면화의 오른쪽 날개로, 성모자 상을 바라보는 요한의 전신 이미지를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Cleveland, USA/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4hc6tzPOGG8

 

 

 

 

 

 


 

 

 

 

https://www.youtube.com/watch?v=-nJWLK1ct78

 

 

United Kingdom/wikipedia

 

 

 

 

 

 

 

 

예수 매장 세폭 제단화 The Seilern Triptych, oil on panel(60*48.9cm)central pannel without frame, 60*22.5cm wing without frame,1425, The Courtauld Gallery, UK/wikipedia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의 현존하는 최고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캉팽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85-1441)와 함께  국제고딕양식과의 급격한 단절을 특징으로 하였던 네덜란드 화파 최초의 대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중앙 패널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아리마데의 요셉 , 니고데모,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  패널에는 골고다 언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주문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뒤로 두 도둑이 매달린 십자가 사이의 빈 십자가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어 '십자가 에서 내림'을 상기시켜줍니다.  오른쪽 패널은 무덤에서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세 패널 모두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를 상징하는 금 덩굴과 포도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회화가 점차 사실적인 묘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장식적인 금색 배경을 사용하는 중세의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인물에게 보이는 조각적인 특성은 클라우스 슬뤼테르(1350-1405)의 영향입니다. 

 

 

 

David and Jeremian from the Well of Moses by Claus Slutter, 1395-1403/wikiepdia

 

 

 

 

Well of Moses, 1395-1403/wikipedia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 1350-1405)는 14세기 중반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나 1405년 또는 1406년에 부르고뉴의 디종에서 사망한 네덜란드 조각가입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필립 더 볼드의 궁정 조각가로 활동했으며, 북유럽 조각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디종의 샹폴 수도원에 있는 <모세의 우물Well of Moses>이 있습니다. 1395년부터 1403년 사이에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육각형 기단 위에 서 있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모세, 다윗, 예레미야, 스가리아, 다니엘, 이사야)의 대형 조각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책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와 감정 표현이 뛰어나며 , 중세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Angels holding instruments of the Passion, 1415/wikipedia

 

Mourners,1425/wikipedia

 

 

 

그들이  예수의 시신을 수의로 막 감싸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의 여러 인물들은 예수가 겪었던 수난의 여러 단계를  관람자들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성 요한에게 기대고 있는 마리아는 '애도'를 , 예수의 발을 기름으로 닦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름 부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골고다 언덕을 상징하는 천과, 천사들이 들고 있는 예수 수난 도구들은 '십자가 책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NMHKoRZ7J4

 

 

 

 

 

 

 

 

 


 

 

 

 

 

 

 

 

 

 

The Bad Thief to the Left of Christ,1410/ Stael Museum ,Frankfurt, Germany

 

 

 

 

<그리스도의 왼쪽에 있는 나쁜 도둑The Bad Thief to the Left of Christ>은 (1430) 삼부작의 패널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 중 한 명인 "나쁜 도둑"을 묘사합니다. 작품은 그의 육체적, 영적 고통을 강조하며, 그를 괴롭히는 악마들은 그의 저주받음을 상징합니다. 도둑의 찡그린 표정과 고립된 위치는 그리스도와 선한 도둑과 연관된 평온함과 구원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난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심판과 구원을 강조합니다. 

 

 

 

Germany/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K5YKurGRZyU

 

 

 

 


 

 

https://www.youtube.com/watch?v=awHWB1QTD8g

 

 

France/wikipedia

 

 

 

 

The Nativity, 1420, Musee des Beaux-Arts de Dijon , France/wikipedia

 

 

 

 

 

프랑스 디종 미술관에 소장된 초기 네덜란드 패널 회화입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세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의 패널에 결합한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캉팽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표현하며, 감정의 깊이와 서사의 복잡성을 포착하는 뛰어난 기술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캉팽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북유럽 르네상스 스타일을 잘 나타냅니다.  

 

 

 

 

 

The Nativity, The Virgin and Child/ Wikimedia Commons

 

 

 

<그리스도의 탄생 The Nativity >은 '그리스도의 탄생', '목자들의 경배', '믿지 않는 산파' 등의  주제가 어우러져 있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금발의 머리를 풀어헤치고 순백의 옷을 입고 있어 동정녀임을 암시합니다. 성요셉은 백발의 모습을 하고 있어 마리아의 순결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손에 들려있는 촛불은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의 환시를 연상시킵니다. 허물어져가는 마구간 안으로 황소와 당나귀가 있고 요셉의 뒤로는 천사로 부터 기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목자들이 아기 그리스도에게 예를 갖추고 있는데 복장이 순례자들의 복장입니다. 지붕 위에 있는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Saint Bridget of Sweden, 1303-1373)는 중세 시대의 유명한 신비가이자 설교가로, 스웨덴의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14세에 귀족 청년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고, 남편과 함께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읜 후,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던 중   여러 환시와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 그녀는 1344년 비르지타회(삼위일체회)를 창립합니다.  1391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그녀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치릴로와 메토디오, 시에나의 가타리나, 에디트 슈타인과 더불어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The Nativity, Saint Joseph/ Wikimedia Commons

 

 

The Nativity /Wikimedia Commons

 

 

 

the Nativity/Wikimedia Commons

 

 

 

 

 

 

 

'야고보 원복음서'에 나오는 믿지 않는 산파 이야기를 전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등을 보이고 있는 산파의 띠 장식에는 "동정녀가 세상에 아들을 낳아주었도다."라고 쓰여있고, 오른 손을 내밀고 있는 살로메의 띠 장식에는 "내가 만져본 후에 믿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천사의 띠 장식에는 "그를 만져랴, 네가 믿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고요. 이는 믿지 않는 살로메에게 구원의 메세지를 의미합니다. 살로메는 축 늘어진 손을 내밀어 예수를 만지려 하고 있습니다. 

 

 

 

 

The Nativity, Landscape/ Wikimedia Commons

 

 

 

 

 

 


 

 

 

 

https://www.youtube.com/watch?v=KdQRjgvqxwg

 

 

 

Spain/wikipedia

 

 

 

 

Marriage of the Virgin, 1420, oil on panel,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성모의 결혼Marriage of the Virgin >은 1420년경에 제작된 유화 작품으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고딕 양식의 미완성 교회 앞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약혼을 묘사합니다. 배경에는 기적의 꽃이 핀 지팡이 사건이 있는 로마네스크 건물이 보입니다. 이 작품은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며, 고딕 건축은 새로운 기독교 시대를 나타냅니다.  같은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과 함께  비교 , 감상해 보세요. 

 

 

 

 

 

 

Spozalizio(The Engagenent of the Virgin Mary), 1504, oil on the roundheaded panel, Pinacoteca de Brera,Milan/wikipedia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가 스무 살 무렵에 그린 <마리아의 결혼> 작품입니다. 같은 제목을 가진 스승 페루 지노의 작품과 전체적인 구성이 비슷합니다. 간결하고 우아한 선들, 감성이 풍부한 얼굴, 고요하고 순수한 분위기 등 페루 지노의 독보적인 표현법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멀리 보이는 건축물과 깊이감이 잘 표현된 공간은 스승과 제자가 고전 건축은 물론 원근법에도 통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스승 페루 지니의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이 소박한 장면을 라파엘로가 재치 있게 연출합니다. 요셉과  더불어 몇몇 구혼자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마리아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을 선택했고요. 화가는 요셉의 나뭇가지에만 꽃과 나뭇잎을 그려 넣어 그가 마리아의 특별한 베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선택받지 못한 청년들 중 한 명이 실망감에 나뭇가지를 꺽고 있고요. "에이, 꽃도 못 피는 나뭇가지 부러뜨려 버릴 테다.' 하는 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는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이런 인물을 오른쪽 귀통이에 그려 넣었습니다. 이런 변화로 고요한 화면에 생기와 잔잔한 활력이 스토리와 함께 더해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_Guv2Mk1E0&t=4s

 

 

 


 

 

 

 

 

The Betrothal of the Virgin- The Collection/ Museo del Prado

 

 

 


 

 

 

Blessing Christ and Praying Virgin, 1424, Phildelphia Museum of Art, PA, USA/wikimedia commons

 

 

 

작품은 두 개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쪽에는 기도를 드리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이고 , 다른 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하는 자세는 경건함과 신성을 나타내며, 그와 대조적으로 , 그리스도의 존재는 권위와 구원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 1375-1444)은 작품에서 부드러운 색조와 섬세한 조명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배경 역시 세밀하게 묘사되어 , 일상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관람자가 작품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ox0C6aoTo&t=2s

 

 

 

 

 

 


 

 

 

 

 

Annunciation ,1420-1425,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르네상스  초기에 일어난 플랑드르 회화의 약진은 '플레말의 대가'로 알려진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1375-1444)과 얀 반 에이크(1385-1441)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프레말의 화가', '플랑드르의 거장'이라는 이름은 프랑크푸르트 시테델미술관 소장품으로 이레주 근교에 위치한 프레말 수도원에서 가져온 <프레말 수도원제단화>의 이름을 그대로 가명으로 사용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수태고지는 캉팽이 여러 번 묘사했던 주제로, 그가 1425년경에 그린 유명한 <메로드의 제단화 Merode triptych>(1427-32>의 중앙 패널에도 수태고지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캉팽 그림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당대  집 안의 풍경을 매우 자세하게 재현한 점입니다. 이 작품은 고딕  성당내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15세기 부루즈아 의 복장을 하고 있는 마리아가 현관에 앉아 있고, 천사장 가브리엘은 계단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막 말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캉팽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격한 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화가는 자신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상징을 이용해 이 사건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의 옷 앞쪽에 상세하게 묘사된 '텅 빈 그릇'과 '반쯤 열려있어 안에 든 물건이 보이는 벽장'은 마리아가 경험하게 될 여러 가지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을 상징하는 기이한 빛은 아직 천사장 가브리엘이 온 것을 모르고 있는 마리아를 밝히고 있습니다. 캉팽은 마리아를 책 읽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녀의 현명함을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장 가브리엘보다 낮은 위치에 앉아 있습니다. 이는 또한 '겸손의 마리아'를 의미합니다.  그림 속 기둥은 그림을 수직으로 나누어 주는데, 가브리엘이 있는 왼쪽은 신성한 영역인 반면에 오른쪽은 마리아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하기전 그녀의 인간적인 측면을 묘사했습니다. 

 

 

 


 

 

 

 

Saint Veronica, 1428-30, stadel Museum, Frakfurt,Germany/wikipedia

 

 

 

Saint Veronica, 1410/wikipedia

 

 

 

이 작품은 성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수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성 베로니카(Saint Veronica )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며,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에 그의 얼굴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신화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로베르트 캉팽( Robert Campin, 1375-1444)은 이 작품에서 세밀한 묘사와 표현을 통해 성 베로니카의 감정을 전달합니다. 특히, 캉팽의 독특한 화풍은 인물의 표정과 의류의 디테일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색조와 조명의 사용은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며, 관객이 심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캉팽의  뛰어난 기법과 중세 초기 북유럽 화파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소들 덕분에 성 베로니카(Saint Veronica)는 단순한 종교적 이미지 그 이상으로, 인간의 감정과 고통을 표현한 깊은 의미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The Crucifixion,1425, oil on panel, Gemaldegalerie- Staatliche Museen zu Berin, Germany/Arthive

 

 

 

 

 

이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중심으로 구성되 어 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이 자리하고 있고요. 각 인물은 고뇌와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관람객이 사건의 비극성을 느낄 수 있도록 돕습니다.캉팽은 체계적인 색조와 조명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감정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모습은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며, 그의 신성함과 인간적인 고통을 함께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주요 상징들, 예를 들어 십자가, 성모 마리아의 슬품, 그리고 사도들의 통곡 등을 통해 신앙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들은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성찰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Berin, Germany/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hYuwppR_eh8

 

 

 

 

 

 


 

 

 

 

 

수태고지 1430-1440,The Annunciation, The Musee des Beaux Arts de Belgique, Brussels,Belgium, version of the central panel, at one time attributed to Jacques Daret, a pupil of Campin's/wikipedia

 

 

 

캉팽이 묘사한 <수태고지>는 다른 작가의 작품과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이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의 나사렛이 아니고, 15세기 벨기에 여염집 풍경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 또한 야훼의 중요 메세지를 전달하려 온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이 권위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리아는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19세기까지도 책읽는 여자는 위험한 여자로 간주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책을 읽고 있는 마리아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하는 순간을 천사조차 방해하기 어려워하는 엄숙한 순간으로 고양시킨 점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Holy Virgin in Glory, 1430, Musee Granet, France(Aix-en-Provence)/ Pin page

 

 

캉팽은 강렬한 색상과 빛의 대비를 사용하여 성모의 신비로운 존재감을 강조합니다. 두 색의 대비와 조화는 관람객이 그녀의 신성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배경에는 금빛의 요소가 사용되어 성스러운 공간감을 형성합니다. 그의 세밀한 묘사와 상징적 표현력 덕분에 성모 마리아의 신성과 모성의 아름다움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스러움과 심미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53NP_ydpmY

 

 

 

 

 

Russia/ wikipedia

 

 

 

The Holy Trinity (from the Diptych of the Trinity and the Virgin of the Hearth), 1433-1435, The State Hermitage Museum-St. Petersburg, Russia/Wikimedia Commons

 

 

 

 

 

 

 

<삼위일체 The Holy Trinity>(1433-1435)는 작품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성자 예수를 성부 하느님이 바쳐 들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요.성부는 옥좌에 앉아있는데 옥좌 왼쪽 조각에는 교회를 상징하는 페리칸  조각상이 있습니다.  새끼 펠리칸들에게 자기 살과 피를 떼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옥좌 오른편 조각에는 유대인 회당을 상징하는 암사자가 숫사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암사자가 햇빛으로 보호하던 세 마리 죽은 사자 새끼들이 숫사자의 포효로 다시 살아난다는 중세의 오랜 전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것은 성찬의 전례와 부활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배경으로 성막의 흰 커튼이 제켜지면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람들에게 완전히 드러나게 됨을 암시합니다.  계시(Revelation)는 어원적으로 '커튼을 제거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Virgin of the Hearth ( Detail fron Diptych of the Trinity and the Virgin of the Hearth), 1433-1435, oil on panel,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Russian Federation)/ Superstock

 

 

<성모자>는 부드럽고 따뜻한 모성애와 인성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공간은 관념의 공간이고 <성 모자>의 공간은 사실적인 공간입니다. 성모자가 있는 공간은 15세기 북유럽의 소박한 집이고 배경은 벽난로에 불이 집혀있고 창문과 페르시아식 창 덮개가 있으며 창너머로 15세기 북유럽의 소박한 집들이 보입니다.  또 넓은 접시와 물병, 벽에걸린 흰 수건은 일상의 소품들이지만 동시에 세례 때 사용돼는 소품들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와 함께 세례로 새로 태어나야함을 암시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속옷과 붉은색 겉옷은 하늘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hw6Ta3ZB84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1375-1444)는 뛰어난 사실 묘사와 선명한 색채 구사로 초기 유채화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고전시대 이후 사람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린 최초의 화가로 45도의 각도에서 얼굴을 묘사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시 널리 유행하던 국제 고딕 양식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화풍을 선 보였습니다. 이러한 화풍은 1427년 그의 공방에 들어온 2명의 제자 자크 다레 (Jacques Daret)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Rogier van der Weyden)에게 이어져 발전되었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자크 다레(Jacques Daret)의 유일한 작품인 아리스 근처 '생바스트 수도원'의 제단화는 한편으로는 베이던 (Rogier van der Weyden)의 작품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 보다 앞선 캉팽(Robert Campin)의 작품과 양식상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스 멤링( Hans Memling)과 렘브란트 (Rembrandt)의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베르 캉팽은 플랑드르 회화를 성립시킨 화가로 평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북구 르네상스화가들의 양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Hans Memling, Last Judgment Triptych,1450/ wikipedia

 

 

 

한스 멤링(Hans Menling, 1430-1494)은 15세기 플랑드르 화가로, 특히 사실적인 초상화와 종교적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브뤼헤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의 부유한 시민들을 위한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사실적인 스타일과 초상화 배경에 풍경을 포함시키는 최초의 플랑드르 화가 중 한 명으로 작품에 통일감을 주기 위해 여러 패널로 구성된 다폭 패널화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정교한 색채 사용과 조용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통해 관람자에게 묵상하도록 하는 성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wikipeida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빛의 화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초상화와 성경 장면을 다루는 작품에서 인물의 심리와 개성을 잘 담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감정 표현과 명암 대조를 통해 깊은 몰입감을 제공하며,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Portrait of a Man, 1435/wikipedia

 

 

 

 

 이 초상화는 <A WOMAN>과 함께 중산층 부부를 묘사한 것으로, 남자는 세상의 피로를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빨간색 샤프론을 쓰고 있습니다. 샤프론은 주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신분을 나타내고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 후기 유럽에서 발전한 패션 아이템으로, 플랑드르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남성의 복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자체가 지위와 부유함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복장 스타일은 당시 패션의 한 형태로, 사람들의 정체성이나 세속적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검은 배경은 그의 특징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캉팽은 얼굴과 의복의 처진 선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전달하는 질감과 기하학적 구성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이 작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Portrait of a Woman, 1435/ wikipedia

 

 

 

 

 

 

섬세한 세부 묘사와 사실적인 인물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 초상화은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며, 우아한 복장과 섬세한 머리 장식을 통해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납니다. 다만 그녀의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고, 남편의 초상화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한 조명과 제한된 색채 사용으로 현실감과 생동감을 전달합니다. 매끄러운 피부와 밝고 활짝 열린 눈이 특징입니다.

 

 

 

 

1435년이라는 연대는 초상화가 중요해지던 시기로, 당시 플랑드르 지역에서 인물 초상화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캄팽은 이러한 경향을 매우 성공적으로 반영한 화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The Werl Altarpiece,1438/wikipedia

 

 

베를 제단화< The Werl Altarpiece>는 1438년 로베르 캉팽이 완성한 삼면화로, 중앙 패널은 현재 소실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날개들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왼쪽 날개에는 기부자인 하인리히 폰 베를( Heinrich von Werl)이 성 요한 세례자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날개에는 벽난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성 바바라가 묘사되어 있고요. 이는 캥팽의 빛과 세부 묘사에 대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줍니다. 이 제단화는 북유럽 르네상스 스타일을 반영하며 당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Right wing showing Saint Barbara, Oak Panel, Museo del Prado, 1438/wikipedia

 

 

 

오른쪽  날개 패널의 '성녀 바바라' 에서는 또 다른 관점의 창문 밖 풍경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에 의해 탑에 갇히고 개종으로 인하여 참수당한 성녀 바바라는 순교자로서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탑과 함께 표현됩니다. 많은 화가들이 바바라의  배경에 탑을 위치 시키거나 그녀가 직접 작은 탑을 들고 있는 전설적인 모습 그대로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회화에서는 창문 밖 풍경의 탑으로 그녀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평범한 여인이 일반 가정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창문 밖 풍경에서 탑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창문들은 그림 속의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외부를 보여주고, 이어주며 , 연결하는 이 창문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한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을 도시적이면서도 창조적으로 탐구한 화가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3k1Fb1llfE

 

 

 

 

 


 

 

 

 

https://www.youtube.com/watch?v=qKXTHkZa15I

 

 

 

U.K/wikipedia

 

 

화열 가리개 앞의 성모자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1440/National Gallery, London,UK

 

 

 

<벽난로 앞의 성모자>는 약 1440년에 제작된 초기 네덜란드 회화의 중요한  예입니다.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가정적인 환경에 있는 모습을 그리며, 사실성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캉팽은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인물들에게 입체감을 부여해 생동감 있게 표현합니다. 마리아 뒤의 벽난로 스크린은 종종 그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를 일상생활과 결합하는 캉팽의 능력을  잘 보여주며,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1440/Bridgeman Images

 

 

이 회화에서도 성모자가 평범한 엄마와 아이처럼 어느 한 가정집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역시 창문이 열려 있고 그 너머로 또 한 번 1440년대의 거리 풍경이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높은 첨탑의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건물들이 보이고 그 뒤로는 산자락이 펼쳐집니다.  전경에는 건물들 앞에서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과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는 사람,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작품 전체는 세밀하게 관찰한 세부 장면들이 등장하며, 배경이 그려진 마을 풍경까지도 인물 만큼이나 정확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모가 읽던 책의 낱장들, 드레스 단의 장식, 화열가리개의 세공 등도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하느님 중심의 그림에서 인간 중심의 그림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서양미술사에서 사실주의 도시 풍경화가 성모자의 배경으로 그려진 최초의 작품이고요. 그는 겸손의 마리아를 표현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실내형 '성모자 '유형을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플랑드르 상인의 저택을 실내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화면  구성의 측면으로 보면, 이 창은 화면의 어두운 부분과 함께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지만,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당시 번영했던 한 도시의  풍경을 재현했습니다. 광장 중앙에 고딕양식의 성당이 보이고,  상점 앞으로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그림 안에도 선 원근법의 원리를 사용하여 공간의 깊이를 표현했습니다.

 

 

 

 

또한  플레말의 대가는 일상의 친숙한 생활소품들로 그리스도교의 복잡한 상징들을 표현했습니다. 우선 마리아의 머리 뒤에서 빛나고 있는 벽난로 가리개는 성모의 후광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왕골을 엮어 만든 둥근 가리개는 벽난로 앞에 있는 생활소품이지만, 그는 성인들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후광으로 대신합니다. 그는 일상의 소품으로 종교적 의미를 표현한 것이죠.

 

 

그리고  성모님께서 앉아 계신 의자도 어좌가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의자입니다. 그러나 의자의 모서리에 장식된 사자장식으로 인해 이 의자가 초라하지만 솔로몬이 앉은 사자의 권좌와 같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고, 왕 중의 왕이시며, 성모님은 그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붉은 큐션 위에 있는 성경책은 창밖의 세상과 성모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창밖의  도시 풍경으로 암시되는 세상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자모이신 성교회가 구원의 연결고리임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께서 귀를 기우리는 곳에 제대가 있고, 제대 위에는 미사 때 쓰이는 성작이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세상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성작사이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자모이신 성교회의  품에 계십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모습은 보통의 어머니와다르지 않습니다. 거룩한 교회도 평범한 가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초대된 세상을 향해 구원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14세기 말에 이탈리아 화가들도 황금색 배경을 포기하고 '겸손의 어머니'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실적인 배경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주로 성모자의 배경으로 '실내형(Domestic  Type)과 '정원형(Enclosed Garden)'을 선호했고요.  그러나 성모자의 배경으로 도시 풍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실주의 풍경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초기 플랑드르의 화가들입니다. 

 

 

 

 

Modonna and Child with Saints in the Enclosed Garden, 1440/1460)/National Gallery of Art

 

 

 

 

이 작품은 로베르 캉팽의 추종자가 1440년에서 146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15세기 네덜란드 예술의 자연주의적 스타일과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이 결합된 작품입니다. 장면은 둘러싸인 정원 안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정원은 마리아의 순결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한 회복된 에덴을 상징합니다. 그림 속 성인들로는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세례자 요한, 순교의 상징을 지닌 성녀 캐서린, 사과를 건네는 성녀 바바라, 그리고 탐욕을 상징하는 돼지와 함께 있는 성 안토니우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t. Luke Triptych/wikimedia Commons

 

 

로베르 캉팽에게 귀속된 <성 루카 삼면화>는 15세기 작품으로, 성 루카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세밀한 묘사와 오크 패널 위에 유화와 템페라를 사용한 점이 특징입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신앙적 주제를 반영하며,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인 성 루카를 강조합니다. 구성에는 성모의 겸손함과 신성한 역할과 같은 풍부한 상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적 배경 속에서 종교적 주제를 포착하는 화가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성 루크(St. Luck)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신약 성경의 복음서 중 하나인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의사이자 사도 바울의 동료로 간주되며, 그의 글은 문학적 가치가 놓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루카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했으며, 그의 복음서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모습과 사회 정의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마리아의 찬가와 같은 독특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어, 예수의 생애에서 여성을 역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 루크는 의사 및 예술가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 그의 축일은 매년 10월 18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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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감성을 가진 현대미술의 대가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예술가

빨갛고 파랗게 발린 물감, 흰 면과 검은 선이 보이는 그림.

바라볼 수록 경쾌한 느낌의 작품으로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

원근법, 중력, 부피 등 사실적 표현을 버린 그림.

단순한 선과 색채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 

 

 
 

 

 

이 정도면 힌트가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회화와 시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의 삶을  살펴볼까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미로가 캔버스 위에서 노래하는 그만의 시적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가, 도예가 , 조각가이며 야수주의 , 입체주의 , 초현실주의 모든 영향을 다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속에서 여러가지의 기법들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조속에서  경험한 화풍을 혼합하여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지켰던 화가입니다. 

 

 

 

스페인하면 미술사에서도 떠오르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입체주의 의 창시자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녹아내리는 시계와 상징적 콧수염으로 널리 알려진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바르셀로나 도시 전체에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대표적이죠.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피카소에 이름이 가려지긴 했지만 20세기 미술사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입니다. 동료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초현실주의자 중 가장 초현실적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화가이기도하고요. 호안 미로 특유의 거친 다갈색의 마포 위에 검은 선과 흰 선 및 빨강, 초록 , 파랑 원색 등 원색을 사용한 초현실주의 작품이 떠올려집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려 한다기 보다
작업을 시작하여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림이 붓 아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혹은 나에게 무언가 암시를 해서
단단히 자리를 잡아간다.
선은 여인이나 새의 형태가 되어간다.
-호안 미로-






 

경작지 The Tilled Field, 1924, Solomon R. Guggenheim Museum,New York/wikipedia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가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를 접하면서 < 경작지 The Tilled Field>(1924)라는 작품을 제작합니다. 이 작품은 그림 가운데 집을 기준으로 귀를 그려 넣었습니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의 소재들을 그려내어 현실 세계를 묘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무의식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 와 있는 것 같고요. 이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미로에 작품에 담겨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이기도 하고요.

 

 

호안 미로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의 가족 농장이 있는 카탈로니아의 몽 로이그를 배경으로 그렸고요. 대담하고 유기적인 형태와 선명한 색상을 특징으로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은 하늘, 바다, 땅을 나타내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다양한 인간과 동물 형상이 혼합되어 있고요. 중앙의 나무에는 눈과 귀가 그려져 있고, 이는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상징합니다.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예술가입니다. 특히나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얻은 해변 마을에서의 영감과 고향 카탈루냐 지역에서의 자연 풍경들은 그의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스페인 카탈루냐 역사를 먼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카탈루냐는 중세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으며, 1469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결혼으로 스페인에 합병되었습니다. 이후 자치권을 얻었지만 , 프랑코 독재 시기에 다시 박탈당했습니다. 카탈루냐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 GDP의 20%를 차지할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합니다. 독립을 원하는 이유는 문화적 차이, 경제적 불만, 그리고 중앙정부와의 갈등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WhDehSgc

 

 

 

 

 

카탈루냐/ HelpStart

https://www.youtube.com/watch?v=5y5uPLNIMzA

 

 
 
 
 
 
 

호안 미로는 어린시절부터 동물 ,곤충들을 좋아하여 시골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동물들과 곤충들의 움직임과 먹이 먹는 모습, 생활하는 모습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버릇이 많아 또래의 아이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났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Mont-roig del camp, The Church of Saint Miquel de Mont-roig/wikipedia

 
 
 
 

Mont-roig del camp/wikipedia

 
 
 
 
 

처음에는 동물이나 곤충으로 시작을 하였지만 나중에 인체를 그리기도 하였고 주로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들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미로의 아버지는 본인과 같이 장사를 하기를 원하셨고, 아들이 그림그리는 것을 엄격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하고싶은걸 못하게 되면서 이때 그는 정신병을 앓기 시작하였습니다. 심한 우울증과 음식거부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니 반대를 하였던 아버지는 결국 그림그리는 것을 승락하고, 미술학교에 보내줍니다.  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며 촉감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걸 굉장히 잘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호안 미로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촉감을 그림으로 그리는 걸 매력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만의 그림스타일을 찾기위해 무단히 노력했고요. 그는 25세에 생애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미술학교에서 선생님께 칭찬만 받아왔던 그는 어린 나이에 시작한 첫 전시를 실패한 후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파리행 열차를 탑니다. 프랑스 파리로 가서 앙드레 마송(Andre Masson, 1896-1987),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에 대해 논의하면서 본인의 스타일을 다시 찾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_Qtuey1IQw

 
 

 

 
 


 
 
 
 

예술가로서 활동을 위해 파리로  이주하여 생활했던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파리에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만나고, 초현실주의 대표 작가였던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와 만나면서 '초현실주의'예술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알프레드 바(Alfred Hamilton Barr Jr, 1902-1981)의 현대미술사 도표를 눈으로 훑다 보면 아래쪽 '초현실주의 Surrealism'이란 용어가 보이실 겁니다. 어느 사조의 영향을 받고 어떤 사조에 영향을 미쳤는 지 손가락으로 잘 따라가 보세요. 

 
 
 

알프레드 바의 현대미술사 도표/스마트 K

 
 
 
 
 

초현실주의 (Surrealism)는 192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입니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며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비합리적인 요소를 표현합니다 .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1896-1966)이 주도하여"무의식의 순수한 자동화"를  통해 창작하는 방식을 강조했습니다.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1967),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잠재의식을 드러냈습니다. 초현실주의는 현대 미술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해당하는 대표 작가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그의 뛰어난 기술력과 기괴한 이미지로 유명합니다. 1904년 스페인 피게레스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와 르네상스 미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1920년대후반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이 운동의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기억의 지속'이 있으며, 이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묘사하여 시간의 유동성을 표현했습니다.  달리는 또한 조각, 영화 ,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h/wikipedia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입니다. 일상적인 사물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여 현실과 인식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은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마그리트는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과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니다.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oad to Soul Writing

 
 

피레네 성 The Castle of the Pyrenees , 인간의 아들 Golconda, 출처: HMAP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입니다. 그는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다다이즘으로 전향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초현실주의 그룹의 일원이 되어 프로타주, 콜라주 등의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작으로 '셀레베스의 코끼리'가 있으며, 이는 그의 꿈과 무의식을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다다이즘(dadaism):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생, 1920년대 유럽 및 미국에서 성행하던 미술, 문예 운동입니다. 시인인 차라(T. Tzara)가 붙인 명칭으로, 모든 사회적, 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운동입니다. 문학에는 브르통(A. Breton), 엘뤼아르(P. Eluard), 미술에서는 뒤샹(M.Duchamp),아르프(H. Arp)등이 유명합니다. 후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됩니다. 

 

 


 

The Elephant Celebes, 1921, Tate Modern,Londeon/wikipedia

 
 
 
 

Andre' Breton: The Architect of Surrealism/ The New European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1896-1966)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여 초현실주의를 정립했습니다. 브르통은 자동쓰기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표현을 강조하며, 문학과 미술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나자'와 '광기의 사랑'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 EPN(교육정책뉴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로, 무의식 개념을 대중화하고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 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구분하고,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성욕을 인간 행동의 주요 동력으로 보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연구는 심리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심리 치료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입니다. 이는 아이들이 남근기 (약 3-6세) 동안 이성 부모에게 무의식적인 매력을 느끼고, 동성 부모와 경쟁하려는 심리적 갈등을 설명합니다. 이 콤플렉스는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유래했으며, 아이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형성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면서 해소됩니다. 해결 되지 않으면 성인기에 심리적 장애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Mont-roif,1919/Fundacio' Joan Miro'
Portrait of Hiberto Casany( The Xhauffeur, 1918, Kimbell Art Museum

 
 
 
 
 
 
 

Prades, the Village, 1917 summer/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초기 호안의 그림에서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표현주의 성향의 그림, 분할되어 있는 붓터치, 병렬적인 색조합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그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형태적 감수성과 서정적인 감동을 조화롭게 표현했습니다. 미로가 파리로 가기 전, 스페인의 시골 마을 몬트로이그에서 요양하며 그린 것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는 고향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깊은 애착을 유지했으며 매년 여름 카탈루냐의 몬트로이 마을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의 분위기를 작품에 표현하기도 했죠.

 

 

 

이후 미로는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변모하며 밝고 소박한 색채와 상징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확립된 호안의 미술체계는 훗날 나이가 들어도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뜻을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해석을 미뤄두고 남녀노소 누구나 그의 그림을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1918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듬해 피카소(1881-1973)를 알게 됐습니다. 당시 작품에는 앙리 루소(1844-1910)의 작품을 닮은 정밀한 풍경화와 인물화가 많았습니다.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는 프랑스의 독학화가로, 주로 이국적인 정글과 동물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844년 프랑스 라발에서 태어나 세관원으로 일하며 그림을 긜기 시작했습니다. 루소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모사하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구현하여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앙리 루소, The Drean, 1910,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wikipedia

 

 

 

호안 미로는  피카소와 동시대에 살면서 깊은 친교를 가졌으며 스페인 내전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추수>라는 제목의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가 파리에 거주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 하여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 공화국관에서 발표했습니다. 

 


미로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본래의 실용적인 기능을 탈락시키고, 그 자리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는 온갖 사물을 수집, 보관하며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새롭게 정의하며 조립했지요.

 

 

사물에대한 관심은 조각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물질과 오브제에 대한 미로의 관심은 판화와 직물의 영역으로까지 뻗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새, 여인, 밤, 낮 등 미로 특유의 언어는 그의 조각 작품에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미로의 조각품은 회화와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고 있었으며, 회화의 기호를 오브제로 대체한 것이었습니다 .

 
 
 
 

Self- Portrait, 1919, 웹뉴스

 

 

 

 그는 파리에 가자마자 자신의 그림들을 화상에게 판매하거나 전시회을 열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고향출신이자 이미 유명할때로 유명해진 입체파 거장 '파블로 피카소'를 만납니다. 사실 둘은 초면이었지만 호안이 파블로의 어머니를 잘  알고 있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파블로는 청년화가 호안에게 파리에서의 주의점과 미술적인 조언을 해주며 호안의 파리 정착을 도왔습니다. 훗날 피카소는 친한 화상을 통해 얻은 호안의 '자화상'을 간직하며 이날을 회상했다고 합니다. 둘 다 스페인 독재를 피해 타국에 와 있었기에 동병상련을 느꼈을 테지요. 둘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돼 평생 이어졌습니다. 


 
 

Horse, Pipe and Red Flower, 1920, Philadelphia Museum of Art, 26 Octorber-15 November,1920/wikipedia

 


 
 

무의식, 욕망을 자유롭게 해줬고,
예술에 대한 다른 힘을 부여했다. 
완전히
자유를 갖고, 
꿈을 꾸듯이 그렸다. 
-호안 미로-

 
 
 
 
 
 
 
 

The Farm, 1921-1922,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USA/wikipedia

 
 

밝고 짙은 색채라는 공통적인 특징 외에 형태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메시지는 육체에서 정신으로 끊임없이 변모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1년부터는 입체주의의 영향이 강한 일련의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1922년 고향으로 들아온 그는 농원을 소재 삼은 역작을 발표하며 초현실주의로 전환했습니다. 주요작품은 '상상 속의 풍경' '농장' '네덜란드의 실내'드이다. 

 
 
 

1921년에 그는 항상 애착을 가졌던 농장의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 The Farm>(1921) 작품은 푸르스름한 하늘과 고향의 따뜻하고 친숙한 색상을 사용해 카탈루냐 시골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을 묘사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몬트로이의 풍경 사진과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호안 미로의 초기 경력에서 핵심 작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안의 그림은 초기 바르셀로나 느낌과 피카소의 입체파를 넘어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922년부터는 헤밍웨이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 좀 더 단순화되고 이른바'초현실주의'화풍을 띠게 됩니다. 빨강, 파랑, 초록 , 노랑 4가지 기본적이며 색조합을 사용했으며 단순한 구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호안 미로의 느낌을 보이게 됩니다. 

 

 
 
 

그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점차 초현실주의 화풍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그의 대표작 1922년 <농장>을 시작으로 1924년 <카탈루냐 풍경>, 1925년 <어릿광대의 사육제>까지 고향의 농경지를 소재로 많은 초현실주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1919년 미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나고 앞서 살펴 본 것처럼 겨울은 파리에서, 여름은 몬트로이에서 보냈습니다.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 초현실주의 같은 당시 유행하던 예술 운동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가게 됩니다. 

 

 
 

 

미로와 달리는 스페인 초현실주의의 미술가들인데, 미로는 '심리적 오토마티즘'즉 자동기술법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하며, 미리 생각하지 않고 낙서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나가는 쪽에 속합니다.  다른 초현실 미술가들처럼 미로 역시 훈련되지 않은 아이들과 정신병자들이 그린 그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발적인 방식으로 기묘한 생명체가 어우러진 목가적인 지중해풍 세계를 환기하는 반 추상적 그림과 벽화, 조각 등을 비롯해 직물, 소묘, 드로잉까지 다양한 미술작품들을 남겼습니다 . 그가 추구한 초현실주의적 표현방식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공상이나 환상 등 상상을 초월한 것들, 즉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꿈에서나 본듯한 사물과 사물, 현상과 사물들이 전혀 상관이 없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The Carnival of Harlequin, 1924-1925,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wikipedia

 

 

1925년 파리에서 자신의 첫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1929년 결혼도 하고 발레 공연 코스튬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작업들을 했습니다. 

 

 

 

이러한  초현실주주의적 표현은 < The Carnival of Harlequin 어릿광대의 사육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미로의 파리에서의 삶이 극도로 가난하여 배고픈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배고픔과 고립은 그에게 수많은 환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는 춤추는 고양이, 주사위 모양의 상자 안에 날개가 달린 생명체, 떠다니는 음표 등 알아보기 어려운 환상적인 요소로 가득 찬 그림으로 표현됩니다.  즉 , 이 과정에서 미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무엇이든 그리며, 이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각을 캔버스에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미로가 유명세를 얻기 직전에 제작된 것으로서 자신의 상상력이 최대치일 때의 작품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대표작입니다. 이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선호하고 난 후 미로와  마송이 초현실주의를 회화에 적용시킨 첫 작품입니다. 단순하게 그린 그림같지만 한편으로 보면 좀 어지럽고 알록달록한 색감에 곡선들이 많아서 장난기가 있는 그림같기도 합니다. 이후 별자리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미로의 삼원색 사상은 몬드리안의 사상과도 일치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색이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단순화된 원색인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Andre Masson, Battle of Fishes/Smarthistory

 
 
 

앙드레 마송(Andre Masson, 1896-1987)은 프랑스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오토마티즘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후,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앙드레 브르통과의 만남을 계기로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마송은 모래와 기름을 사용하여 우연의 효과를 강조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으며, 그의 작업은 추상 표현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Automatic Drabing by Andre Masson ,1924/wikipedia

 


 
 

호안 미로의 여인, 새, 별, 사다리 등의 모티프로 대표되는 호안 미로 고유의 언어를 소개하고, 그러한 시적 언어를 재료 삼아 미로가 창조해내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달에서 짖는 개 Dog Barking at the Moon,1926,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USA/wikipedia

 

 

 

 

<달에서 짖는 개 Dog Barking at the Moon>(1926)은 스페인 카탈루냐의 몬트로이그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그의 고향 풍경에 대한 기억과 카탈루냐 민담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요소와 유머러스한 만화적 요소를 결합하여, 밝은 색상의 개가 달을 향해 짖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배경의 어두운 하늘과 빈 공간은 고독과 신비로움을 더합니다. 

 

 

 

 

 

 
 

색이 내게 말을 건냈다. 
하지만 
형태는 판독해야 할 상태로 남아 있다. 
나는 곡선과 직선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Rp_9ewOuk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바르셀로나 대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1852-1926)는 곡선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호안 미로의 그림 역시 직선을 거의 보기 어려운데, 이는 르네상스 이래 이어져 온 전통적인 규범을 떨쳐내려는 20세기 미술 운동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균형미,아름다움과 같은 전통적 미학에서 감정을 전달하고 왜곡하고 전치시키는 등의 미술 기법이 성행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연, 곡선을 강조되고 있었고,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호안 미로의 그림에서도 자유로운 곡선이 눈에  띕니다.

 


 
 
 
 

호안 미로는
우리 모두 중 가장 초 현실주의적인 사람이다.
-앙드레 브르통(프랑스 시인, 초현실주의 대표)-

 
 
 
 
 
 

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1926/ ARTLECTURE

 

 

 

 

그는 첫 스승 모데스토 우르헬의 가르침을 받아 미술의 기초를 배웠는데, 그림에 감정을 불어넣는 과정을 배우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초기 대표작은 1926년 '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과 '달을 향해 짖는 개' 등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호안 미로 특유의 유아적인 그림체가 돋보입니다.

 

 
 

미로는 1924년부터 초현실주의 그룹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구성원들은 그가 무의식적 경험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 미로를 굉장히 존경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작업을 하던 호안 미로는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 시리즈를 작업했습니다.미로에 따르면 이 시기는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회화와의 이별이었으며, 미로는 콜라주, 조각과 같은 다른 매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호안 미로는 자신의 평생 친구인 죠셉 루이스 세르트(Josep Lluis Sert)를 만나게 됩니다 . 세르트는 나중에 미로에게 작업실을 만들어 선물하고, 바르셀로나에 미로와 함께 호안미로미술관을 짓기도 합니다. 

 
 
 

Josep Lluis Sert/ Arquitectura Catalana

 

https://www.youtube.com/watch?v=2zOD99djAzo

 
 
 
 
 
 
 
 


 
 
 

1930년대 미로는 부르주아 사회를 지지하고 있던 르네상스 후기 의 회화 방식을 부정하는 '회화의 암살 (Assassination of Painting)'을 선언해 당대 미술가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근법, 중력, 부피가 주는 환영, 음영, 색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며 회화의 전통을 탈피했습니다.  해방된 공간을 만든 이 선언은 이후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로는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식으로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만들어냈고, 이는 기존의 회화의 규칙을 깨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추수 The Reaper, 1936/Joan Miro

 
 
 

The Reaper/The Olive Press

 
 
 

시간이 지나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자극받아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1937년  '추수The Reaper'라는 제목의 그림벽화는 훗날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 공화국관에 걸려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카탈루냐의 농부를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으로, 낫을 든 농부를 그려, 당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과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qLGRLKbvLY

 

 

 

 

 

 
 


 
 
 
 

1936년 스페인 내전에 관한 다큐멘터리 풀 영상은 맨 아래 칸에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스페인 내전 (1936-1939)은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우파 군부 간의 갈등으로 발생했습니다. 내전은 민주적 개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의용군이 참여했습니다.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였고, 이후 36년간 독재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여겨지며 ,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주요 원인은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30년대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좌파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주의 , 공산주의 , 무정부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우파 군부는 이러한 변화에 반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파시즘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이 스페인 내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6-1939년까지 약 3년간의 전쟁은 스페인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안겨줍니다. 3년간의 전쟁은 '프랑코' 독재정권이 40년동안 지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fcwN3u5-Sw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 A SOFIA(스페인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립 예술 센터)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 a Sofia/wikipedia

 

피카소, 게르니카,1937,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 위키백과

 

 

이 혼란의 기간은 많은 예술가들이 역사적인 작품을 배출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들입니다. 미로 또한 유럽 전역을 떠돌며 꾸준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는 작품들이 많았고요.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정점에 이를 때, 미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작품이 함께 전시 된 파리 만국전람회를 위해 반 전쟁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위키백과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1937년에 제작된 대형 유화로, 스페인 내전 중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과 민간인 고통을 표현한 강력한 정치적 성명으로 , 반전 상징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회색, 검정, 흰색의 단색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혼란과 폭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fiKgVyPEZ8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절제된 문체와 '빙산 이론'으로 유명하며, 전쟁과 인간의 존재 조건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표작을 <노인과 바다>,<무기여 잘 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이 있으며,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전쟁 경험과 모험적인 삶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OVVrLRi-xgs

 
 
 


 
 
 
 
 
 
 

Summer, 1938, 종이에 과슈/ Mutual Art

 
 
 

이 작품 <여름>은 엄마와 두 아이인듯한 반 인간적 생명체들이 여름해변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풍경입니다. 단순한 형태와 원색들이 그들의 즐거운 한 때를 표현해 줍니다. 매우 호방하고 관능적 쾌락을 짐작케하는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미로는 모든  사물들을 명쾌한 윤곽선과 밝은 색조로 환원하여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결과 그림은 장식적인 동시에 표현적이었죠. 그는 항상 "내게 있어 형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사람, 새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로가 그려내는 우주에는 지상과 천체를 구분하는 지평선이 없습니다. 그 우주는 태양과 달, 별, 여인의 시각적 모티프로 구현됩니다.  각각의 모티프들은 마치 '이디어그램(Idogram:표의문자>'를 연상케 합니다. 별자리를 이용하여 재미있게 그림을 만들기도 하였고 짙고 밝은 색채와 추상적인 곡선은 보는이를 하여금 충분하게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디어그램(Idogram)은 표의 문자를 생성하는 도구로, 주로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를 제작하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 사용자는 텍스트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원하는 스타일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특히 3D 렌더링과 글자 디자인에서 강점을 보입니다. 

 

초기에는 다양한 예술 집단과 다다이즘에 속한 화가, 시인들과 교류하며 점차 사실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소박하면서도 찬란한 색채, 단순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해나갔고, 이후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미로 특유의 상징적인 모티프를 구축하며 그만의 독특한 우주론을 정립해나갔다.

 
 
 
 
 

별자리 시리즈 :아침 별 Constellation the Morning Star,1940/Joan Miro

 
 
 
 
 
<별자리:아침 별 Constellation the Morning Star>(1940)은 유명한 별자리 시리즈의 일부로 1940-1941년 사이에 제작된 23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전쟁으로 피난 중인 미로가 프랑스를 떠나 마요르카로 이동하면서 탄생했습니다. 작품들은 탈출, 자연, 그리고 천체 이미지를 주제로 하며, 별, 새 , 인간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기호 언어를 사용합니다. <아침 별>은 미로의 아내에게 선물된 후 나중에 호안 미로 재단에 기증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시적인 강렬함과 종이에 구아슈를 활용한 혁신적인 사용으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호안 미로( John Miro, 1893-1983)가 경험해야 했던 제2차 세계 대전은 그를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고, 그를  일상으로부터의 도피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외감과 예술에 대한 실험은 < The Constellations 별자리 시리즈>로 흘러갔습니다.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미로는 전쟁 이후의 잔혹한 현실 대신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이를 그림에 표현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다듬어 나가게 됩니다.  별, 여자, 새 등 상형문자적 형상을 구사하여 유아적 천진난만함에 절묘한 기술이 매치된  시를 회화화했습니다. 그는 생전 '그림이나 시는 사랑, 즉 완전한 포용을 경험할 때 만들어진다'과 생각했습니다. 

 

 

 

미로의 첫번째로 중요한 미술관 회고전은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종전 후, 미로는 세라믹, 판화 도서삽화 그리고 조각과 같이 다양한 미디엄을 가지고 자유롭게 실험하는 작가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재료적인 특성의 실험뿐만 아니라 그림 스타일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습니다.

 

 

 

 

 

별자리 시리즈: 무지개를 향하여 The Constellation : Toward the Rainbow,1941/ Reddit

 
 
 
 
 
 

 

나는 단어가 시를 만들어내고, 
음표가 음악을 만들어내듯이
색을 쓰려 한다.

 
 

 

1940년부터  제작된 23점의 시리즈인 < The Constellations: 별자라 시리즈>는 모래시계 모양과 별, 눈, 원, 삼각형, 초승달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 얇은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마치 우주의 마법같은 별자리를 연상시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호안 미로의 초기작과 초현실주의적 작품들과는  또 다른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를 사용하여 구성된 자신만의 추상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작품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호안 미로는 1946년 첫 조각품을 만들게 되는데, 미로는 회화 뿐만 아니라, 세라믹 , 조각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청동으로 작게 작업하였다가  나중에는 미로의 특징적인 색과 상징들의 표현된 독특하고 재미난 조각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Figure and Bird , 1948, Lithograph/ MutualArt

 


 

1956년 호안미로(Joan Miro, 1893-1983)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영감을 받고 자란 곳인 평화로운 섬 마요르카(Mallorca)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가 호안미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로는 다양하고 많은 작업을 하게 됩니다. 

 
 

studt Abroad in Palma de Mallorca/CIEE

 
 
 
 

Joan Miro Museum Mallorca

 
https://www.youtube.com/watch?v=a95vPYD-u1s

 
 
 
 
 
 
 
 


 

Women III, 1965 by Joan Miro/ Joan Miro

 
 
 


 
 
 

Girl escaping , Sculpture and ceramics, 1967/ Fundacio' Miro'

 
 
 

미로의 독창성과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는 오브제 작품도 볼 수 있습니다. 노끈, 마네킹, 수도 펌프 등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사물을 새롭게 조합해 창조했다. 

 
 
 
 

 


 
 

태양 앞의 인물 Figure in front of the Sun, 1968/ Fundacio Miro

 
 
 

 

 

<태양 앞의 인물 Figure in the Sun>은 후기 작품으로 호안 미로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전의 작품들보다도 훨씬 단순한 구성과 배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검은색의 두터운 선들과 도형의 색상, 배치 중 하나의 요소라도 제거되면 그림 안에서의 균형이 안 맞아 보일 정도로 예리한 구성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달빛 아래 카탈루냐 농부 Catalan Peasant in the Moonlight, 1968/Joan Miro

 
 
 
 
 
호안 미로의 1968년 작품 < Catalan Peasant in the Moonlight>(1968)는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로 제작된 아크릴 회화입니다. 이 작품은 색채를 주요 요소로 강조하며, 1920년대 미로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수평적 구분이 특징입니다. 추상적인 형태로 구성된 농촌 풍경 속에는 달빛 아래 일하는 농부의 실루엣이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미로의 독특한 색채 사용과 상징적 표현을 잘 보여줍니다.  
 
 


 
 

불에 탄 캔버스 Burnt Canvas 1/Pisacane Arte

 
 
 

 


 
 
 
 
 
 
 
 

Woman,1946/ ArtArt

 
 


 
 
 

그의 그래픽 작업이 큰 돌파구를 갖게 된 것은 1967년 카보런덤 판화를 소개할 때 였습니다. 미로는 새로운 테크닉과 특별히 애쿼틴트와 같은 다른 에칭 기법을 결합하여 그는 '어떤 그림도 상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1967-1969년도 사이에 제작된 그의  카보런덤 프린트의  중요한 부분은 , 197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가치를 평가받아 미국의 여러 곳에서 전시됩니다. 

 

카보런덤 프린트는 실크스크린 인쇄 기법의 일종으로, 카보런덤이라는 연마재를 사용하여 큭별한 질감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 기법은 판화에서 사용되며, 표면에 거친 질감을 더해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줍니다. 카보런덤은 매우 단단한 물질로, 주로 연마 작업에 사용되지만, 예술적으로는 인쇄판에 질감을 추가하는 데 활용됩니다. 

 
 
 

Tete au soleil couchant, 1967, Etching with aquatint and carborundum in colours, on Arches wove paper/Masterworks Fine Art Gallery

 
 
 
 
 
 
 


 

하늘빛 황금하늘 The Gold of the Azure, 1968 by Joan Miro/Joan-Miro.net

 
 

 

 

 

추상적인 형태와 풍부한 색조를 통해 미로의 상상력을 드러냅니다. 깊은 청색 배경에 별과 같은 형태들이 배치되어 있고요. 황금색 요소가 신비로움을 더하며, 색채의 조화가 우주적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미로는 이 작품을 통해 즉흥성과 의도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켰으며, 관람자에게 다양한 해석을 유도합니다.  

 

 
 
 


 
 
 

 

Solar bird, Sculptures and ceramics, 1968/Fundacio' Joan Miro'

 
 

호안 미로의 <태양 새>(1968)는 조각과 도자기 세라믹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그의 독특한 상징 언어와 색채 사용이 돋보입니다. 이 작품은 태양과 새를 주제로 하여, 자연과 우주를 연결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미로는 일상적인 사물을 예술로 변형시켜 새로운 위미를 부여하며,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 조각은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그의 예술적 실험과 창의성을 잘 나타냅니다. 또한  조각이라는 매체는 호안 미로에게 자신의 상상과 아이디어를 3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추가적인 길을 만들어 준 셈이지요.

 

 

 

마요르카 Joan Miro 미술관-작가의 작업실에서-/SSALAD

 
 

20세기의 춤추는 상상계, 호안 미로/ 문화공간 175, 세종문화회관 웹진

 
 
 
 


 
 
 
 

달과 해와 별 하나의 모델 Model for Moon, sun and one star, 1968/Alamy

 
 

 

호안 미로의 작품 <달, 해 그리고 하나의 별>(1968)은 1968년에 제작된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미술관 1층 North Patio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미국 시카고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바르셀로나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동,시멘트, 도자기 타일로 만들어졌으며, 미로의 독특한 상상력과 상징적 언어를 표현합니다. 작품은 천체와 자연의 요소를 결합하여 우주론적인 시각을 제공하며, 관람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유도합니다. 

 

 


 
 


 
 
 
 
 

Fissure 11, 1969, Etching with aquatint printed in colours on BFK Rives wove paper/Cristea Roberts Gallery

 
 
 
 
 
 
 
 


 

 

상징은 호안 미로의 말기를 압축하는 단어입니다.  미로는 자연과 사물의 본질에 관해 끊임없이 탐구한 작가입니다.  그는 특히 사물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종교적 본질과 마술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상징화되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그가 오랜 천착한 여자, 별, 탈출의 사다리, 달, 원, 해 , 시선, 새, 남근 등 후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11개의 상징을 통해 작품 세계를 표현합니다. 미로의 작품속에 나타나는 상징들이 지니는 의미가 깊은 사색과 조형적, 철학적 탐구를 통해 형성된 것음을 깨닫게 됩니다.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초현실주의 예술가 중 가장 초현실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찾기 위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스페인의 대표 화가입니다.

 
 
 
 

Sobreteixim with eight umbrellas, 1973,Textiles/ Fundacio' Miro'

 
 
 
 
호안 미로의 작품 < Sobreteixim with Eight Umbrellas>(1973)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독특한 섬유 예술 작품 중 하나로, 거대한 테피스트리가 특징입니다. 이 작품은 전체 벽을 차지하며, 여덟 개의 우산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미로는 전통적인 회화 매체를 넘어섰으며, 회화와 직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작품은 두꺼운 직조의 질감을 강조합니다. 색채와 형태가 조화를 이루어 미로의 추상적인 회화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여인, 새, 별 , 태양, 달, 별자리, 사다리 등 미로의 그림은 시적이고 상징적인 기호들로 가득합니다. 초기에는 시의 한 구절을 작품 속에 직접 인용하기도 했는데,  갈수록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사실적인 요소는 과감하게 변형합니다. 단순한 선과 순수한 원색을 이용해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호안 미로 , 몬로이치 IV, Mont-roig IV, 1974, Lithograph/여성신문

 
 
 

호안 미로의 <Mont-roig IV>(1974)는 석판화로, 그의 독특한 상징적 언어와 생동감 있는 색채가 돋보입니다. 이 작품은 자연과 우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여인과 새 같은 요소들이 상징적으로 표현됩니다. 미로는 복잡한 형태와 선을 통해 감정과 움직임을 전달하며, 관람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미로의 전반적인 스타일인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잘 나타낸 작품입니다. 

 

 

석판화는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 평판 인쇄 기법입니다. 이 방법은 석회석으로 된 평평한 판에 그림을 그린 후, 물과 기름의 성질을 이용해 인쇄합니다. 석판에 유성 잉크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화학 용액을 발라 도안을 고정시킨 후, 물을 발라 잉크가 그림 부분에만 남도록 합니다. 이후 종이를 얹고 압력을 가해 인쇄합니다 .이 기법은 1798년 독일의 알로이스 제네펠더에 의해 발명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QINGg1prE

 

 
 


 
 

풍경 속의 여인과 새들, 1970-1974/ 아트인사이트

 
 
 
 
호안 미로의 <풍경 속의 연인과 새들>(1970-74)은 그의 독창적인 상징 세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여인과 새들이 함께 있는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기하학적 형태가 특징입니다. 미로는 여성을 "우주"로 묘사하고,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존재로 그려져 ,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미로의 독특한 우주관을 반영합니다.  
 


 
  
 
 
 

Woman with a Beautiful hat, Star, 1978/Fundacio' Joan Miro'

 

파랗게 붓칠한 캔버스 , 굵게 그린 검은선, 빨강, 노랑 원색 대비가 강렬하다. 추상화 같지만 모자를 쓴 여인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호안 미로는 그림을 정말로 사랑한 예술가였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작품들을 남겨줬지요. 미로는 야수주의 , 입체주의 , 초현실주의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냈습니다. 
 

 


스페인에서의 독재와 내전 등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미로는 끊임 없이 예술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많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광범위한 작품들을 탄생시킨 미로는 진정한 예술가였습니다. 
 

 


1975년, 호안 미로는 친구인 세르트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호안 미로 미술관을 설립합니다. 미로의 친구인 건축가 조세프 루이스 세르트에게 의뢰하여 지은 건물로 지중해 전통 양식인 자연채광을 이용한 하얀색의 건축물은 아주 깔끔합니다. 마치 흰도화지 같기도 하고요.안으로 들어가면 여러가지 색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피카소처럼 ,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에 미술관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자연과 함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몬주익 언덕에는 그러한 호안 미로의 그림, 세라믹, 조각 등의 다양한 작품을 즐길 수 있는 호안  미로미술관이 있습니다. 미로 미술관은 그저 작품을 전시해놓은 공간이 아닌 건물 디자인, 작품 등 무엇 하나 호안 미로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의 영혼이 들어간 장소입니다. 
 
 


 

Fundacio Joan Miro , 1975/wikipedia

 

Montjuic in Barcelona/wikipedia

 
 
 
 
미로의 미술관이 있는 이 동네는 예전부터 아주 아름다운 동네로 몬주익 언덕위에 위치하여 바르셀로나 시가 한눈에 다 보이는 경관이 아주 아름다운 곳입다. 동심을 간직한 스페인의 존경받는 미술가로 칭송을 받으며 지금도 관람객들이 끈어지 않습니다.  모든이들이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미로의 그림을 볼 수 있고 공항과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 미로의 작품이 그려져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미로가 기증한 그림 200여점, 조각 150점, 스케치는 무려 5000여점을 남겼습니다. 미로의 작품이 새겨져있는 엽서를 팔기도 하고 여러가지 기념품들을 파는 상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술적 업적을 남기기위해 미술관을 세운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신진 작가들을 위하여 대관을 할 수 있도록 하여서 현재에도 미로의 미술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4 Wings by Alexander Calder in the garden/wikipedia

 
 

 

 

 

알렉산더 콜더(1898-1976)는 미국의 조각가입니다. 그는 '모빌'이라는 움직이는 조각을 창안하여 조각 예술의 전통적인 개념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콜더는 기계 공학을 전공했으나 예술로 전향하여 뉴욕과 파리에서 활동하며 와이어와 금속을 사용한 추상 조각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키네틱 아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는 작품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지이는 부분을 포함하는 예술을 의미합니다. '키네틱'은 '활동적인'또는 '동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물리학 용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예술 형태는 20세기 초부터 기계적 운동성과 사람의 손바람을 이용한 작품으로 시작되었으며,. 현대에는 과학 및 기술의 발달로 영상이나 빛의 변화하는 운동성까지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는 알렉산더 콜더와 테오 얀센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5lIKV7XkhcU

 
 
 

 


 

 

여자와 새 Dona i Ocell, Joan Miro park, Barcelona,1983/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m2PN_XG7jVg

 

 

1982년 바르셀로나 호안미로( Joan Miro, 1893-1983) 공원에 설치한 '여자와 새'공공 미술작품이 미로의 공개된 마지막 작품입니다. 하지만 호안 미로는 마지막까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1983년 12월 25일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후 후안 미로는 자신이 태어난 곳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옵니다. 미로가 쉬고 있는 곳은 호안 미로 미술관과 멀지 않은 곳인 몬주익 공동묘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oz0pw1ApAVk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1983년 바르셀로나에서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으며 현대 예술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이 독창적인 스타일은 어떤 특정 사조로도 분류될 수 없는 순수하고 세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독특하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여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The Spanish Civil WAR
 
 
https://www.youtube.com/watch?v=Lu5f9hp0IP4

 
 
 
 
 
https://www.youtube.com/watch?v=Ovlqo6yXr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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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보다 더 뛰어난
다가오는 새 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파울 클레에 대한 논고> 1957-1958-

 

 

 

 

추상인듯 추상아닌, 추상직전에 멈춘 듯한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면과 색으로 형태를 이룬 강렬한 대비가 특징입니다. 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하고 엉뚱해 보이는 그림을 그렸고요. 보이지 않는 이면을 그리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61년 평생 1 만 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캔버스에 그린 것은 적고, 신문지, 판지, 천, 붕대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한 소품이 많습니다. 스위스 화가이자 판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처럼 완전한 추상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클레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구상화를 최대한 틀은 유지하되 구체적인 형상은 변형시켰고 추상화 직전에 멈춘듯한 그림들입니다. 

 

 

 

클레는 일생 동안 미술 재료부터 다양한 화파의 연구까지 평생 실험하고 실천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갔습니다. 어떤  한 예술 화파에 머무르지않았고요. 어떤 스타일이나 재료에만 빠져있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하며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다양하게 시도해보려면 미리 테스트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클레의 작품은 대부분 작은 사이즈가 많습니다. 모든 미술 사조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작가의 내면이 반영되지 않은 예술은 속임수다
예술작품에는 감동이 있어야한다.
-파울 클레-

 

 

 

 

 

 

Senecio,1922, Kunstmuseum Basel, Basel

 

 

 

 

 

이 그림은 세네치오(Senecio, Head of a Man Going Senile)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노인의 얼굴을 유쾌하게 형상화했습니다.  1922년에 제작된 입체파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동그란 원 안의 평평한 도형으로 마치 가면을 쓴 느낌이  듭니다. 그 안에 빨간색  눈동자자 고개를 조금만 갸웃하면 또르르 반대편으로 기울어질 것 만 같습니다.  눈에 리듬감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클레는 화가도 연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세네치오입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동심을 갖고 있어서  어떤것이든 만들어 내고 그려내는 연주자 같은 화가라는 뜻이죠. 세네치오는 클레 입장에서 나이들어가는 어른들의 초상화일수도 있고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자화상이기도합니다. 인물이 얼마나 다양하게 예술적으로 표현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죠. 

 

 

 

 

다양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조합해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만의 동그라마로 그린 얼굴입니다.  삼각형의 눈썹과 직사각형에 가까운 턱과 뺨, 이마 등 크게 여섯 조각의 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화사한 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따뜻함과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파울 클레는 색으로 면으로 형태로 다양하게 그림에 리듬을 줍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마치 자신이 작곡을 하는 것처럼 기하학적 형태로 리듬감을 줍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짜 예술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보이지않는 내면을 드러내 조합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새로운 그림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것을 같다고 본것입니다.

 

 

 

단순하고 생략된 선, 부드럽고 편안한 색, 평면적이지만 말을 건네면 미소를 띨 것 같은 입체감,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것 같은 순수함이 화면에 베어나옵니다. 아이들 그림에서 느끼는 가식없는 모습이 감동을 선사하듯 그의 그림에 눈이 한 번 쉬어갑니다. 

 

 

클레는 색에 대한 개념도 자연에 보이는 색 그대로 쓰는 것을 의미없다 생각했습니다. 색 조합이 벌써 다르죠? 빨강,노랑, 그리고  분홍. 게다가 대담하게도 빨간 눈동자를 그렸습니다. 밝은 색으로 인해 가벼울수있는 색채의 느낌을 표면 질감을 무겁고 거친듯이 표현하면서 조화를 이룹니다.

 

 

 

 

 


 

 

 

 

 

Bern/ 몽트래블 유럽여행 스위스여행

 

 

 

https://www.youtube.com/watch?v=xnLa6sJsGNw

 

 

 

 

 

1879년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인근의 작은 마을 묀헨부흐제(Munchenbuchsee)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문학, 미술에 재능이 있었고요. 독일인 아버지는 베른 국립음악학교 교사였고 스위스인 어머니 또한 성악가였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시죠? 파울 클레는 7세에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해 열한 살에  이미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여는 베른음악협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정도로 프로급 바이올린 연주실력을 갖췄다는 얘기지요. 그와 동시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으니 보통 재능이 아닌 거지요. 가족들조차 그가 나중에 무엇이 될지 궁금해 했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음악가의 길을 계속 걷기를 바랐으나 클레는 미술을 선택합니다. 

 

 

 

그가 음악이 아닌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당시 음악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주류 예술이었고, 미술은 새롭게 시작하는 단계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다양한 그는 비교적 더 발전시킬 것이 많은 미술이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미술계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미술을 선택합니다. 

 

 

 

20세가 되던 1898년 미술 공부를 위해 아버지의 나라 독일 뮌헨으로 떠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HahN6f3Xy8

 

 

 

 

 

 

 

 

뮌헨 지도/나무위키

 

 

 

 

20세기 뮌헨은 다양한 역사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도시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뮌헨은 서독의 재건과 함께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많은 기업들이 동독에서 이사를  와 산업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1938년에는 뮌헨 협정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이고요. 나치당의 중요한 활동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21세기 뮌휀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최대 도시이자 경제,사회,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경제적으로는 IT, 생명공학, 출판 등 다양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높은 소득과 낮은 실업류을 자랑합니다. 문화적으로 옥토버페스트와 같은 세계적인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FC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가 위치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안정적인 제도와 낮은 범죄율로 삶의 질이 높아 살기 좋은 도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ilterfingen, Ink on paper, 9.5*16.9cm, July 19, 1895/ Guggenheim Museum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를 추상화 작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으나 초기엔 사회를 풍자한 캐리커처, 판화, 선화, 드로잉을 주로 선보였습니다. 특히 드로잉에서 진가를 발휘했죠. 베른주의 힐터핑겐(Hilterfingen)마을 풍경을 잉크로 그린 이 드로잉도 그의 수준급 묘사력을 증명하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완성한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후 추상화 작품에서 드러나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는 탄탄한 드로잉 실력이 바탕이 됐습니다. 파울 클레가 컬러에 몰두하기 전 1980년대 후반에 제작한 드로잉과 1900년대 초의 에칭 작업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이 대거 소장하고 있습니다. 

 

 

Two Gentlemen Bowing to One Another by Paul Klee, 1903/ Guggenheim Museum

 

 

 

 

국적도 아버지의 나라 독일을 선택한 파울은 곧바로 뮌휀 미술학교에 입학합니다.   클레는 뮌휀에서 Heinrich Knirr와 상징주의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의 지도를 받습니다.  이후 3년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자신의 미술적 시각을 넓힙니다. 그는 이탈리아로 연구 여행을 떠나서 제노바, 나폴리, 피렌체, 로마 등지에 머무르며 작업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클레는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보다도 해양도시의 풍경과 나폴리 수족관의 풍경이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내륙지방에서 자라온 그의 회화의 모티브로 배나 고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 여행의 체험에서 였을것입니다.

 

 

 

프란츠 폰 슈트크(Franz von Stuck)는 독일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건축가로, 주로 고대 신화를 주제로 한 상징주의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1863년 독일 테텐바이스에서 태어나 뮌헨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1892년 <The Sin>으로 큰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뮌헨 분리파를 공동 설립하고, 뮌헨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폴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 여러 유명 예술가들을 가르쳤습니다. 

 

 

 

 

 

프란츠 폰 슈투크 Franz Stuck, The Sin, 1893, symbolist painting, Decadentism, Neue Pinakothek, Munich/wikipedia

 

 

 

 

초기의 경향은 어둡고 괴이한 세기말적 분위기의 판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클레는 1906년 피아니스트 릴리 슈툼프(Lily Stumpf)와 결혼 후 뮌휀에서 살았습니다. 아내가 피아노 교습을 하고 같이 아들을 키우며 음악 연주와 그림 작업을 병행했습니다. 

 

 

 

뮌헨으로 돌아온 그는 표현주의 사조의 태동을 느끼며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과 '청기사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는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활동한 독일 표현주의 화풍의 하나이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티와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독일 표현주의 그룹이죠. '푸른 기사'라는 어원은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했던 두 요소인 푸른색가 말을 상징합니다. 마르크에게 말을 비롯한 동물은 순수한 영혼성을 대표했고, 칸딘스키는 푸른색을 현대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시원희 색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색채와 형태의 과장을 통해 정신적, 초자연적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청기사파는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산되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파울 클레(Paul Klee), 가브리엘레 뮌터, 아우구스트 마케( August Macke) 등이 있습니다. 

 

청기사파 멤버들의 작품 특징과 대표 작품을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색채와 형식의 조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Wassily Kandinsky,1913, Tretyakov Gallery,Moscow/wikipedia

 

 

 

 

프란츠 마르크: 동물을 영적인 순수함의 상징으로 표현하며, 강렬한 색채 사용이 특징입니다. 

 

 

 

 

Franz Marc, The Tower of Blue Horses, 1913/wikipedia

 

 

 

가브리엘레 뮌터: 풍경화와 인물화를 통해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사용했습니다. 

 

 

가브리엘레 뮌터, Portrait of Marianne von Werefkin, 1909/ Meister Drucke

 

 

 

 

 

아우구스트 마케: 색채와 빛의 조화를 통해 일상의 장면을 밝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August Macke, Lady in Green Jacket, 1913, Museum Ludwig, Cologne/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k36jLW-hLPU

 

 

 

 

   1910년 파울클레(Paul Klee)는  August Macke, Franz Marc 및 Alexej von Jawlensky 그룹의 동료 멤버들과 함께 전시를 했습니다.  1911년 아우구스트 마케와 바실리 칸딘스키, 그리고 프란츠 마르크와 만나면서 <청기사파>화가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파울의 예술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단순화하는 작업 위주였습니다. 흑백의 판화, 혹은 단색의 파스텔 정도의 작품에 매진하고 있었지요. 이는 점차 그가 표현주의에서 입체파, 상징주의, 추상미술 쪽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알프레드 바( Alfred Barr, 1902-1981)의 <현대미술사 도표> 참고하세요(1910년).

 

 

 

 

Alfred barr modern art diagram/ Edward Tufte

 


 

 

 

 

 

 

 

로베르 들로네, Formes Circulaires Soleil, 1912-13/Alamy

 

 

 

 

제 2회 청기사파 전시회부터 참가한 파울 클레(Paul Klee)는 1912년 로베르 들로네( Robert Delaunay)와의 만남 이후 색에 대한 고민에 빠집니다. 입체주의에 근거한 들로네의 색채 배열은 파울 클레 (Paul Klee)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오르피즘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회화에서 영향 받은 것은 색채의 리듬과 패턴을 화면의 구성적 요소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 색채의 생동감 있는 사용과 기하학적 형태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입니다. 그는 색채와 추상을 성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강조한 오르피즘(Orphism)예술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들로네의 작품은 종종 리드미컬하고 역동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큐비즘의 요소를 그의 독특한 색채 접근 방식과 결합합니다. 그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큐비즘에서 추상 미술로의 전환을 반영하는 대형 장식 작품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그의 혁신적인 스타일과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잘 보여줍니다. 
로버트 들로네는 주로 강렬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 빨간색 등 다양한 색상이 두드러지며, 이러한 색상들은 천체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ㅏㄷ. 들로네는 색채의 조화를 통해 형태와 공간뿐만 아니라 운동감까지 나타내고자 했으며, 이는 오르피즘 스타일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오르피즘(Orphism), 또는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은 20세기 초에 등장한 예술 운동입니다. 큐비즘에서 파생되었고요. 이 운동은 순수한 추상성과 생동감 있는 색채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야수파(Fauvism)와 신인상주의 (Neo-Impressionism)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르피즘은 인식할 수 있는  주제를 넘어 형태와 색상을 사용하여 의미를 전달하고 감각을 불러일으키려 했습니다. 이 용어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명명했으며, 추상적이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신화 속 음악가 오르페우스(Orpheus)에 비유하여 음악과 유사한 조화와 리듬을 강조했습니다. 

 

 

 

 


 

 

1914년 4월 친구들과의 12일간 튀니지 여행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다양한 색이 존재하는 튀니지 문화를 통해 색채의 리듬과 패턴에 대한 영감을 얻은 그는 입체파, 상징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Flower Myth,1918/Paul Klee

 

 

 

 

 

색채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화가다.
-파울 클레-

 

 

 

아프리카 튀니지 여행을 하면서 고민하고 있었던 색채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점,선, 면과 같은 단순한 형태와 원시미술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파울 클레는 색채를 하루 중 어느 때인지를 알려주는 수단이나 감정적인 반응들을 유도해내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구성적 요소로 사용했습니다.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파울 클레. 파울은 그가 가진 음악적 재능과 여행을 통해 얻은 색채 영감을 단순한 형태로 결합해서 자신만의 회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강렬한 빨간색이 매력적인 1918년 <Flower Myth>를 시작으로 독창적인 그림들을 만들어 냅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몰락의 위기에 허덕이던 유럽의 미술계에 색다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클레의  그림 제목들은 종종 시의 한 구절처럼 보입니다.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작품 제목을 미리 결정해 놓았습니다. 클레는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림에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지도 않았고요. 색과 선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은 자연 속 식물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순수한 느낌의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실제로 아이의 심성을 가지지 않고선 그릴 수 없는 그림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서인지 , 그의 그림은 문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이한 제목의 그림들이 많습니다. 파울 클레가 문학적 재능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겠죠.

 

 

 

 

 

 

 

 


 

 

 

미술이 대상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느다면
문학과 같은 세부 묘사로 머물면서
모방의 노예가 될 것이다.
-파울 클레-

 

 

 

 

 

 

 

 

https://www.youtube.com/watch?v=-c9SrqFSREk

 

 

 

 

in the Style of Kairouan, 1914/LACMA

 

 

튀니지/위키백과

 

 

 

파울 클레의 "카이로안 스타일"는 1914년에 제작된 중요한 추상 표현주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클레가 순수 추상 작품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튀니지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자연광에 매료되어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직사각형, 다각형, 원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다양한 파스텔 색상을 특징으로 하며, 음악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종종 이 구성을 악보의 시각적 표현으로 해석하며 , 색깔 있는 직사각형이 음악의 음표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 작품은 스위스 베른에 있는 미술관인 쿤스트뮤지엄 베른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2일 동안의 짦은 튀니지 여행에서 귀한 순간을 경험한 클레가 집으로 돌아와 그린 위 그림이 앞으로 펼쳐질 그의 작품 경향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색채의 리듬과 패턴 , 그리고 단순한 형태가 결합된 독창적인 추상 회화의 시작이지요.

 

 

 

1914년 8월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클레는 전쟁에 참전한 친구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를 잃었습니다. 친구를 전쟁으로 잃은 사건은 이념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가져와 급진적인 개혁 성향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가 독일 국적이었던 클레도 징병 되었으나 다행히 전선에 배치되지 않았고 항공기에 페인트 칠을 하는 곳에서 복무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PUxZ4qrKLM

 

 

 

 

 

 

 

Mount Niesen, 1915/Pin Page

 

 

 

 

 

파울 클레의 '니젠 산'(1915)은 스위스 산악 풍경의 본질을 포착한 표현주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기하학적 형태와 생동감 있는 색상 팔레트를 사용하여 '니젠 산'의 장엄한 존재감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 클레는 종이에 수채화를 사용하여 자연 경관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강조했습니다. 추상과 자연 요소를 결합하려는 그의 관심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풍경에 대한 클레의 탐구의 일환으로,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합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파울 클레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Once Emerged from the Gray of Night, 1918/WiKiOO.org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하며
무겁고 귀한 존재가 되어
신의 기운으로 충만한 저녁에 기운다. 
이제는 푸른 하늘에 에워싸여
만년설 위를 떠돈다
별을 찾기 위해

<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그가 아니라면 감히 생각할 수 도 없을 법한 아름다운 제목입니다.  파울 클레는 그림을 그린게 아니라 캔버스에 시를 쓰는 화가란 생각을 합니다.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수많은 관계들이 있습니다. 빛과 어둠, 길고 짧음, 넓고 좁음, 뾰족함과 뭉툭함, 동그라미와 네모... 채도와 명도가 다른 파랑과 초록과 빨강과 갈색과 노랑들... 사이사이에 있는 글자들, 글자들의 배열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클레는 아마도 어떤 의미를 숨겨놓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밤의 깊은 회색은 가고 검푸른 새벽을 지납니다. 다시  검푸른 저녁을 지나 밤의 깊은 회색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돌고도는 것이 우리 삶을 닮았습니다. 

 

 

 

 

이 작품은 파울 클레가  예술과 시의 독특한 융합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클레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은 색색의 사각형 그리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검은 선들을 자세히 보면,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아라비아 대문자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림은 시의 연에 해당하는 은색 띠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색상 구성은 회색에서 밝은 파란색으로 전환되고요.

 


 

 

 

 

 

 

 

Red Girl with Yellow Bowl, 1919/Alamy

 

 

 

 

 


 

 

 

1920년대 작가는 바이마르와 데사우 캠퍼스에 새로 형성된 바우 하우스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1921년  파울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함게 당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제의를 받습니다. 청기사파 이후 오랜만에 재회한 칸딘스키와 함께 10년간 바우 하우스 교수직을 역임합니다. 

 

 

 

Redgreen Violet-Yellow Rhythms,1920/ Redbubble

 

 

 

추상적인 작품으로, 클레가 색채 이론과 리듬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색채 간의 상호작용과 그들의 감정적 영향을 탐구한 결과로, 음악과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클레는 이 작품에서 생동감 있는 색채와 리드미컬한 패턴을 사용하여, 단순한 형태와 색을 결합해 역동적인 시각적 경험을 창조하는 그의 혁신적인 추상 예술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아이가 그린 것 같은 형태와 다양한 색채를 배열하며 특이한 화풍을 시도한 그림들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17년부터입니다. 음악가이면서 글도 잘 쓰는 시인이었던 그는 시를 읽고 영감을 얻어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품도 제작했습니다. 연이은 전시의 성공으로 1920년 무렵에는 이름이 꽤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으나 당시 미술시장은 유동적이어서 클레의 경제적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나무가 있는 율동적인 풍경 속의 낙타,1920/ galleryart.com

 

 

 

 

낙타가 있는 율동적 풍경 속의 나무를 그린 것처럼도 보입니다.  작품의 핵심은 기하학적 무늬 속에 숨은 낙타 한 마리입니다. 사막을 횡단하지 못하고 낙타는 어딘가의 담벼락, 나무들 사이 갇혀있습니다. 그럼에도 낙타의 표정은 밝아 보입니다. 무언가 홀가분하게 보이는 것은 색색깔의 나무들이 주는 부드럽고 동화적이며 따뜻한 느낌 때문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클레는 항공기 유지보수 관련 작업을 했습니다. 항공기의 위장용 카무플라주를 복원하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 1917년  즈음, 미술 비평가들은 클레를 독일의 신예 예술가 중 최고라고 극찬했습니다.

 

 

 

파울 클레는 새로 설립되는 학교 <바우하우스>의 교수 제안을 고민끝에 받아들이고 바이마르로 갔습니다.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꿈꾸는 혁신적인 성향의 조형 학교 <바우하우스>에서는 칸딘스키를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고, 강의와 출판을 병행하며 학생들에게 10여 년간 미술이론을 가르쳤습니다.

 

 

 

 

바우하우스 BAUHAUS, The Bauhaus building in Dessau was designed by Walter Gropius. It was the longest-serving of the three Bauhaus locations(1925-1932), UNESCO World Hertiage Site/나무위키

 

 

 

 

The Three Bauhaus locations/History of Graphic Design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강의하게 됐는데, 1921년부터는 독일 바이마르에, 1926년부터는 데사우에 있었습니다.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클레는 광고용 자료를 만들기도 했고, 책 제본, 스테인드 글라스 및 벽화 페인팅 워크샵도 진행했습니다. 

 

 

 

 

Bauhaus founder Walter Gropius(1883-1969)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1883-1969)에 의해 독일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예술 및 디자인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예술과 공예, 기술을 통합하여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현대적 건축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곳에서는 타이포 그래피,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69wOKg6yp4

 

 

 

 

Geometric Posters Bauhaus Cover Templates with Abstract Geometry Retro Architecture Minimal/iStock

 

 

 

 

 

https://www.youtube.com/watch?v=NMs0ksuLmDE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수도:베를린)/위키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uVRix0yLmuE

 

 

 

 


 

 

 

 

 

https://www.youtube.com/watch?v=vjPjDEIJ3dU

 

 

 

 

 

Angelus Novus, 1920, monoprint, Israel Museum, Jerusalem/wikipedia

 

 

 

 

 

 

 

 

파울 클레가 자신만의 오일 전사 기법을 사용해 만든 모노프린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넓게 뜬 눈, 벌어진 입, 펼쳐진 날개를 가진 천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관조하면서도 진보를 상징하는 폭풍에 의해 미래로 밀려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연관성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글에서 이를 "역사의 천사"로 해석하며 역사를 일련의 재앙으로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출처:인문학서원 에피쿠로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은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문화 비평가, 수필가로 , 현대 철학과 문화 이론에 깊이 있는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경험, 언어, 기억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변증법적인 철학 접근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벤야민은 근대성, 역사적 유물론, 미학이라는 주제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종종 복잡한 아이디어를 탐구하기 위해 아포리즘과 "사유 이미지"같은 혁신적인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신학과 정치와 자주 교차하며 계몽주의 개념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제시하고 역사와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옹호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cxfA0Lzn0

 

 

 

 

 

 

 


 

Cold City, 1921/Artvee

 

 

 

 

 

 


 

 

실재로 그의 작업들을 감상하다보면 그 시대의 미술사적요소들을 가능한 다양하게 실험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욕심이 많은 작가이기도 하고요.  클레는 작곡과 회화는 동일한 창조 과정이라는 원칙을 출발점으로 자신의 작업을 실험적으로 전개해 나갔습니다. 음악과 미술의 근본 구조는 동일하다는 생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 

 

 

 

파울 클레의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그의 생각이 독일의 이상주의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생각의 변환요점을 말해주는 문맥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것을 묘사하기보다 이미 내 감정안에 생성된 이미지들을 표현해내는 것이죠. 클레의 작품 중에 구성상으로 볼 때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색채 조합이 있고 , 색 바탕 위에 굵은 선만으로 그려진 작업들이 있는데 이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많은 소리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합니다. 색채의 이미지는 곧 그에게 음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칸딘스키의 음악적 회화처럼 파울 클레의 그림에도 음악과 접목된 그림들이 많습니다. 음악을 소재로 한 몇 작품을 모아 보았습니다. 

 

 

 

붉은 색의 푸가 Fuge in Rot, 1921/이코노미스트

 

 

 

 <붉은 색의 푸가 Fuge in Rot>(1921) 작품은 푸가의 구조와 조성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음악적인 구조로 표현 했는데, 마치 악보 위에 음표들을 배열하듯이 색채들이 정확히 배열되었습니다. 색들의 움직임을 느낄수있지요.  클레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의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조화로운 색채와 그가 사량했던 음악적 요소를 자유롭게 구성하였습니다. 선과 단순한 조형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기하학적이면서도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동심이 느껴지는 작업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푸가(Fugue) 는 다성음악의 한 형식으로, 하나의 주제를 여러 성부가 순차적으로 모방하며 발전시키는 대위법적 기법입니다. 주제는 처음에 한 성부에서 제시되고, 다른 성부들이 이를 모방하여 응답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로 구성되며, 각 성부가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여 연주합니다. 푸가는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정점에 이르렀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음악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3mG0zF8rpA

 

 

 

Rhythmisches,1930/Wikimedia Commons

 

 

<Rhythmisches>(1930)작품은 모방과 반복을 통해 리듬을 구현한 작품입니다. 

 

 

 

 

Polyphony,1932, tempera on linen, Kunstmuseum Basel/Wikipedia Commons

 

 

 

<Polyphony>(1932) 작품은 음악의 다성부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클레는 색채를 통해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며, 배경의 색상 블록은 깊은 베이스 화음을 시뮬레이션하고, 표면에 다양한 색상의 작은 점들을 배치하여 바흐의 폴리포니 구조와 유사한 대위법적 요소를 구현했습니다. 이 점들은 서로 다른 색상과 크기로 배치되어 다양한 음의 흐름과 조화를 시뮬레이션하며, 복잡한 음악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템페라 기법으로 린넨에 그려졌습니다. 스위스의 에마누엘 호프만 재단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manuel Holffmann Foundation/Schaulager

 

 

엠마누엘 호프만 재단(Emanuel Hoffmann Foundation)은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예술재단입니다. 현대 미술 작품의 수집과  보존을 목적으로 합니다. 1933년 마야 호프만-슈테흘린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에마누엘 호프만의 예술적 관심을 이어받아 설립되었습니다. 이 재단은 바젤의 공공 미술 컬렉션에 중요한 기여를 해왔습니다.  현재는 샤울라거(Schaulager)에서 작품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manuel Holffmann Foundation/ The Art Newspaper

 

 


 

 

 

 

https://www.youtube.com/watch?v=8ORjZG0UKM4

 

 

 

 

 

Ghost of a Genius, 1922/google Art&culture

 

 

 

 

<Ghost of a Genius>(1922)는 카드 위에 놓인 종이에 오일 전사와 수채화를 사용하여 제작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림에는 작은 몸체 위에 놓인 커다란 머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클레의 자화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형 같은 모습의 이 인물은 축 늘어진 팔과 기울어진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클레가 그의 아들을 위해 인형을 만들면서 탐구했던 인형극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빨간 풍성, 1922/유로저널

 

 

 

 

 

파울 클레의 작품 <빨간 풍선>은 다양한 기하학적 요소와 색채의 조화 속에서 붉은 풍선을 중심으로 표현된 그림입니다.  클레 특유의 상징적이고 시적인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강렬한 빨간 풍선을 태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클레는 무명천에 초코를 입히고, 종이에 검은색 유화 물감을 칠한 뒤 그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어 제작했습니다. 

 

 

 

튀니지의 풍경을 보고 색채를 다양하게 혼합해 강하게 시선을 끌어들이는 밝은 톤의 작품을 다수 발표했습니다. 또 초기으 판화나 드로잉과 달리 점차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상징을 드러내며 추상화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풍선, 나무, 집 같은 고유의 모양을 드러내면서도 원, 사각형 , 삼각형 등 기하학 형태로 승화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구상화와 추상화 양식을 동시에 취하는 독창적인 추상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빛바랜 듯한 색채도 이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지저귀는 기계 Twittering Machine, 1922,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wikipedia

 

 

 

 

 

파울 클레는 점을 움직이면 선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레는 단 하루도 선이 없는 날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도 그림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클레는 여러 가지 특이한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천과 석고 위에 색칠을 하기도 하고, <지저귀는 기계 Twittering Machine>(1922)에서처럼 '오일트레이싱'이라는 기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오일 트레이싱을 하기 위해 그는 종이의 한쪽 면을 검게 칠했습니다. 그런 다음 검게 칠해진 쪽을 밑으로 해서 다른  종이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위에 놓인 종이에 그림을 그리면 모든 선들이 밑에 있는 종이에 눌려서 찍히게 됩니다. 몇 개의 검은 얼룩과 함께요. 요즘의 먹지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기법입니다.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 1923, 바젤, 개인 소장/X.com

 

 

 

 

 

 

 

클레가 1923년 완성한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은 숲속의 밤 풍경을 동화처럼 묘사한 작품입니다.  어두운 숲속에 신기하게 생긴 다양한 색의 식물들이 흔들리듯 서 있습니다. 일곱 마리의 노란 새는 숲속 여기저기에서 지저귀고요. 어떤 새는 구름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어떤 새는 예쁜 꽃잎 위에 살포시 앉아 노래를 부릅니다. 거대한 밤은 노란 새들에게 동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다양한 색감의 식물에는 몽상적인 그림자 역할을 부여합니다. 춤추는 식물, 노래하는 새들과 어두운 밤이 선율처럼 변주되며 크고 작은 진동으로 공명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상상의 세계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구현해 주고 있습니다. 

 

 


 

 

 

Portrait of Mrs.P. in the South, Watercolor and Oil Transfer Drawing on Paper, with Couache and ink on Paperboard Mount,Sheet,1924/Guggenheim Museum

 

 

시칠리아,이탈리아/위키백과

 

 

 

 

1924년 여름 파울 클레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해에 제작한 이 작품이 말해주듯 시칠리아에서 마주한 황금빛 태양과 붉은 노을은 튀니지 여행과 마찬가지로 파울 클레의 작품에 새로운 틀을 제시했습니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을 종이에 그대로 옮긴 듯한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활동은 이전 작품에선 볼 수 없는 대담함입니다. 그는 주인공의 모자를 삐뚤게 그려 신분을 짐작할 수 없게 했고, 가슴에는 하트 문양을 더해 생명력을 상징했습니다. 이 문양은 그가 이 시기 작품에 종종 활용한 이미지로, 때로는 입,코,몸통에 유사한 모양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작품 표면에 퍼져 있는 어두운 얼룩도 파울 클레가 자주 사용한 전사 기법으로 완성했습니다. 구상화의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 마치 카툰처럼 코믹하게 그린 초상화도 그의 전매특허 스타일 입니다. 

 

 

 

 

 

 


 

 

 

Actor's Mask,1924/Flickr

 

 

 

 

 

 

 

회화의 대부분은 작은 사이즈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한 가지 스타일이 아나라 다양하고요. 어린아이의 시점이 보이는 형태와 음악적인 느낌의 구조물에서 장난스러운 유머와 재치가 느껴집니다. 특히 인물이 주제인 것은 짖궂은 표정이 묘하게 여운이 남습니다. 

 

 

자신이 접했던 미술사조와 추상미술의 결합 가능성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끈질기게 탐구한 클레는, 유화, 수채화, 파스텔, 잉크, 에칭 등 한 가지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섞는 혼합매체를 사용했습니다. 때로는 동화 같고 때로는 환상적인 꿈 같은 이미지 속에서 문자와 기호, 동물과 식물, 사람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말이죠.


 

 

 

 

 

 

 

 

Fish Magic, 1925/wikipedia

 

 

 

 

 

환상과 현실을 결합하여 꿈 같은 수중장면을 묘사합니다. 파울 클레가 그린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수중, 천체, 지상의 요소들이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색소 위에 검은 표면을 섬세하게 덧입힌 후 긁어내는 기법을 사용하여, 마치 어린이들의 크레용 놀이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중앙에 붙여진 모슬린 천 조각은 콜라주 같은 느낌을 더해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을 강화합니다. 물고기, 식물, 시계탑과 같은 기발한 요소들은 클레의 환상과 자연 경험에 대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Around the fish,1926/Paul Klee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가 그린 작품으로, 중앙에 있는 정교한 물고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상징과 물체들이 둘러 싸고 있는 신비로운 그림입니다. 이 작품에는 십자가 , 보름달과 초승달, 느낌표, 갈라진 물체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구성은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이 혼합된 느낌을 줍니다. 클레의 독특한 상상력과 공간 활용을 잘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p0_UfkBLbA

 

 

 

 

 

뒤셜도르프, 독일/위키백과

 

 

Black Knight, 1927/MeisterDrucke

 

 

 

검은 기사(1927)는 파울 클레의 표현주의 그림으로, 어두운 기사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주로 검정과 회색톤을 사용하여 신비롭고 음영이 짙은 구성을 보여줍니다. 유화로 그려졌으며, 흰색 템페라로 코팅된 캔버스를 나무에 장착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Pastorale(Rhythms), 1927, MoMA, NYC,Tempera/Flickr

 

 

 

 

'목가(리듬) Pastorale (Rhythms)'(1927)은 파울 클레가 바우하우스 시기에 창작한 추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템페라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크기는 69.3*52.4cm입니다. 클레는 이 작품을 통해 리듬과 추상을 탐구하며, 색채와 기하학적 형태의 조화를 통해 음악적인 특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은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Cat and Bird, 1928,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wikipedia

 

 

 

 

 

<고양이와 새>(1928)는  표현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고양이의 이마 위에 새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새는 고양이의 꿈이나 욕망을 상징합니다. 클레는 어린이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단순한 선과 형태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창의성을 강조합니다. 그림은 핑크, 갈색, 파랑, 초록, 보라 등의 차분한 색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트 모양의 빨간 코는 "사랑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클레가 영적 진리와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며, 게슈탈트 심리학을 통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발전한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학파는 인간의 정신 현상을 개별적인 감각 요소의 집합이 아닌, 전체로서의 구조와 특질에 중점을 두고 이해합니다. '게슈탈트'라는 용어는 독일어로'형태' 또는 '모양'을 의미하며, 전체가 부분의 단순한 합 이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요 연구자들로는 막스 베르트하이머, 볼프강 쾰러, 쿠르트 코프카 등이 있습니다. 

 

 

 

 

 

 


 

성과 태양, 1928/The Historyof Art.org

 

 

파울 클레의 <성과 태양 Castle and Sun>(1928)은 기하학적 형태인 삼각형과 사각형을 사용하여 도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따뜻한 색조를 사용하여 햇빛을 받는 성의 인상을 표현했습니다. 표현주의 , 입체주의 , 초현실주의 요소가 결합된 이 그림은 추상적인 형태와 인식 가능한 형태를 융합한 클레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v_HdKYF_7g

 

 

 

 

 


 

 

 

Monuments at G, 1929/Artvee

 

 

 

 

 

 

 

 

 


 

 

 

1931년, 그는 뒤셀도르프의 미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위해 바우하우스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클레의 작품을 '체제 전복적'이고'미쳤다'라며 비웃었고 그가 더는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낙인을 찍었습니다. 

 

히틀러가 장악한 독일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탄압하면서 자유로운 예술작업이 박탈이 됩니다. 독일 미술에 헌신하던 그는 결국 1933년 추방되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갑니다. 나치는 파울을 추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을 몰수하고 불태웠습니다.  예술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 대한 절망감에 일부 독일 화가들은 미국으로 망명했고, 다리파 화가 키르히너는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Pine Tree,1932/MeisterDrucke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Pine Tree(1932)는 클레의 고전적인 현대 미술 스타일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추상적인 형태와 알아볼 수 있는 자연 요소를 결합하는 클레의 능력을 잘 나타냅니다. 아마도 기하학적 형태와 생생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여, 자연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려는 그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Colors from a Distance, 1932/ Arthur.io. A Digital Museum

 

 

 

 

 


 

 

 

 

 

 

https://www.youtube.com/watch?v=4f7zhuCkgoY

 

 

 

1931년 뒤셀도르프의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일하던 클레는 새로운 색칠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미리 색칠해 놓은 배경색 위에 물감을 한 방울씩 찍어 발랐습니다. 모자이크처럼 생긴 이 그림은 클레의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크기를 자랑합니다. 주황색과 노란색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파란색과 보라색에 대비되어 따뜻한 빛을 냅니다. 그림 제목인 '파르나소스'는 그리스에 있는 산 이름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와 음악의 신인 아폴로가 그곳에 산다고 믿었지요.

 

 

 

파르나소스산에서 Ad Parnassum,1932/Wikimedia Commons

 

 

 

 

 

 

 

1923년부터 클레는 '매직 스퀘어'라고 칭한, 상징적인 색상을 사용한 상상 속의 색상으로 구성된 일련의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이 시리즈 중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 <파르나소스산에서Ad Parnassum>(1932)입니다. 이 그림은 현실과 기억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의 조화를 이루며 그려졌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그리스 델포이 인근이 파르나소스산에서 따왔습니다. 파르나소스산은 아폴론 신과 아홉 뮤즈의 신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산은 예술에 봉헌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 파르나소스산에서'를 의미하는 작품 제목은 아치형의 문을 통과한 후 펼쳐지는 파르나소스산에 이르는 길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클레가  <파르나소스산에서>를 그린 시기는 바우하우스 학교의 교수직을 포기한 직후였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 중에서 기본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작업하는 연습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그런 요소를 상기시킵니다 .  클레는 단지 기억에 의한 풍경을 그렸을 뿐이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림 속 조각나고 색깔에 의해 정의되는 이 작품이 클레가 보기에 화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음악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빛나는 주황색으로 그린 원은 태양을 연상시킵니다. 긴 대각선으로 형성된 큰 정상은 지붕, 산 또는 피라미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클레는 자신의 그림들이 추상적이지만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그림은 클레가 1928년에 이집트를 방문하여 직접 본 대피라미드 또는 클레에게 매우 익숙했던 스위스 알프스산맥 툰 호숫가의 니센산을 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Ad Parnassum, 1932,detail/Ocean's Bridge

 

 

 

 

이 작품은 보기  드물게 클레의  대형 작품 중 하나로,  '매직 스퀘어'시리즈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그가 거친 공정은 정교하고 복합적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흰 바탕의 캔버스에 톤을 죽인 카세인 페인트로 그리드 형식의, 큰 평면의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런 다음 흰색 유화 물감으로 작은 사각형을 톡톡 두드려서 추가했습니다. 이 작업을 테레빈유로 희석한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계속 반복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황색 원과 선을 추가했습니다.

 

 

 

 

아치와  대각선에 사용된 검은색은 그림 전체에 일종의 역동성을 만들어냅니다.  클레는 색상 스펙트럼의 모든 색을 아우르는 자신만의 색상 배치를 개발했습니다. 이 작품의 보색인 주황색과 파란색의 대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주요 색상 층은 두 가지로, 밝은 색상에서 어두운 색상으로, 파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다양하게 변조됩니다. 톤을 죽인 색상의 그리드를 먼저 배치한 후 형태를 나타내는 레이어를 마치 모자이크처럼 깔았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작곡가 요한 요제프 푹스(Johann Joseph Fux)가 쓴 책 <파르나소스산으로 오르는 계단 (Gradus ad Parnassum)>(1725)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음악 이론서로, 음악적 테크닉과 작곡 기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대위법과 화성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요.  푹스는 이 책을 통해 작곡가들이 음악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원리와 실습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폴리포니'라는 음악적 개념을 정의하는데, 이는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멜로디가 함께 음악적  배열로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파울 클레는 이 책을 알고 있었으며 폴리포니를 '여러 독립된 주제의 동시성'으로 이해했습니다. 클레가 서로 다른 색상과 모양을 오케스트라의 다성음악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두드려서 만들어진 점으로 구성된 이 캔버스에는 작은 색색의 블록들이 마치 파도처럼 펼쳐집니다. 이  이미지는 클레가 자신만의 점묘법으로 모자이크를 연출한 것처럼 보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조르주 쇠라가 발전시킨 분할주의를 생각나게 하지만, 클레는 과학적이지는 않으나 색상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색상은 이탈리아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성당의 모자이크 작품에서 볼 수있는 영성과 화려함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클레가 남긴 붓 자국은 조밀하고 균일하면서 화려한 질감을 자아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FEpKh3-PI

 

 

 

 파울 클레의 위 작품과  점묘법으로 유명한 신 인상주의자 조르즈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와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작품을 비교해 보세요. 

 

 

 

점묘법: 작은 점들을 사용하여 색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서로 다른 색의 점들이 시각적으로 혼합되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 냅니다.

조르주 쇠라는 프랑스 화가로, 점묘법을 창시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이 대표작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이러한 점묘법을 통해 빛과 그림자를 과학적으로 표현하며, 다잇 사회 계급의 모습을 담고 있스비낟. 쇠라는 색채이론을 예술에 적용하여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폴 시냑의 작품은 신인상주의와 점묘법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조르주 쇠라으 ㅣ영향을 받아 점묘법을 발전시켜, 점을 크게 그리고 사각형의 모자이크처럼 표현하는 색채 분할주의를 완성했습니다. 시냑의 작품은 색의 병치를 통해 대조를 이루며,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여 풍경과 인물을 표현합니다. 

 

 

A Sunday Ar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by Georges Seurat (1859-1891),1884-1886, Art Institute of Chicago/wikipedia

 

 

Women At The Well by Paul Signac(1863-1935), 1892/ Artchive

 

 

 


 

 

Small Room on Venice,1933/MeisterDrucke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우하우스는 운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학교가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해야 하는 등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학교는 존재하기가 힘들어졌고 결국 클레는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의 교수로 갔습니다. 그러나 1933년 뒤셸도르프로부터 갑자기 해직 통보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나치가 클레를 급진적인 미술가로 분류하고 유대인으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애써 쌓은 미술가로서의 가치를 모두 잃은 듯 느낀 클레는 태어나고 자란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했습니다. 

 

 

 

 


 

 

 

 

스위스로 돌아온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원래 다작을 하던 파울이지만, 귀향 후 194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독 이 3년간의 작품이 많습니다. 파울 클레가 스위스로 돌아 가 그린 작품들입니다. 

 

 

 

Flowering, Oil on Priming on Canvas on Stretcher, 81.5*80cm,1934/ MeisterDrucke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은 스타일, 테크닉, 주제, 재료 면에서 끊임없이 변화해왔습니다. 모자이크 패턴이 마치 물결처럼 흐르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그가 색채의 명암과 채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형태와 색채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이 작품처럼 형태뿐 아니라 색채를 작품의 주요 구성 장치로 사용하면서 점차 고유한 추상화의 틀을 구축했습니다. 색의 명암과 채도를 달리하며 색 자체로 그림에 리듬감과 숨을 불어넣어 색채 활용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 시기에 그는 컬러 자체의 고유한 성질과 순수성을 탐구했으며, 색채를 정신성과 영혼, 심리를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해 추상화에 정신성을 담아냈습니다. 

 

 

 

 

 

 

 

Hardy Plants,1934, Minneapolis Institute of Art/ Google Arts & Culture

 

 

 

 

 

파울 클레의 작품 <Hardy Plants>(1934)는 그의 추상적 형태와 생생한 색채 탐구를 반영하는 작품입니다 이 시기에 클레는 바우하우스 운동과 나치 정권의 정치적 압력 등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예술의 표현력을 믿었던 그의 신념을 구현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자연과 추상을 널리 탐구했던 클레의 작업 중 하나로, 식물 모티프를 사용하여 회복력과 성장을 전달합니다. 

 

 

 

 

 

 

 

Mountain Village, 1934/Craftfineart.com

 

 


 

 

 

Sparse Foliage,1934/MeisterDrucke

 

 

 

 

 

 

<Sparse Foliage>(1934)는 표현주의 스타일로 제작된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유화, 구아슈, 수채화, 목탄을 종이에 혼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클레의 혼합 매체 사용은 자연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그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반영하여 질감 있고 층이 있는 구성을 만들어냅니다. 작품의 제목인 "Sparse Foliage"는 식물 생명의 최소주의적 묘사를 암시하며, 이는 클레의 예술적 스타일의 특징인 단순함과 추상화를 강조합니다.

 

 

 

 


 

 

At the Core, 1935/Pinterest

 

 

 

 

 

추상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진 표현주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과녁 같은 구성을 특징으로 하며, 색상이 짙은 갈색에서 밝은 색조로 전화되어  붉은색 중심에 이릅니다. 이는 클레가 표현주의 운동 내에서 색채와 형태를 탐구한 특유의 거칠과 낡은 외관을 만들어냅니다. 

 

 


 

 

 

 

Walpurgis Night,1935/ Reproduction Gallery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간 클레는 1935년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려 했으나, 원인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피부가 딱딱해지고 세포막의 점액이 건조해져서 나중에는 몸에 부종이 생기고 마비가 되는 '피부경화증'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깊은 무기력에 빠져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2년 후에는 치료를 받으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피부 경화증(경피증)은  피부가 단단해지는 만성 자가면역 질환으로, 피부뿐만 아니라 폐, 심장, 위장관, 콩팥 등 여러 내부 장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질환은 면역계의 이상으로 콜라겐이 과도하게 생성되어 조직의 섬유화를 일으키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 화학물질과의 연관성도 보고되고 있고요. 증상으로는 레이노 현상, 피부 두꺼워짐, 관절 및 근육 통증, 소화기 문제 등이 있으며, 치료는 주로 증상 완화와 장기 손상 예방에 중점을 둡니다. 

 

 

 

 

 


 

 

 

 

Characters in Yellow,1937/wikipedia

 

 

 

파울 클레가 죽기 3년 전 완성한 이 그림은 말기 작품 중에서도 컬러감과 율동감이 돋보이는 명작으로 꼽힙니다.  그의 작품을 다수 보유한 바이엘러 재단도 이 작품을 대표 소장품으로 인정할 정도입니다. 그는 작품 전반에 음악적 구조를 대입, 캔버스에 율동적인 선과 색채를 얹어나가며 규칙과 불규칙 사이를 조율했습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기호를 주로 표현하면서 특히 선과 도형의 리드미컬함이 도드라졌습니다. 그에게 캔버스는 곧 악보였고, 물감은 음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리듬과 패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캔버스에 다양한 색조와 율동감을 드러낸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Harbor with Sailing Ships,1937/The Art Print Company

 

 

 

Legend of the Nile,1937/Alamy

 

 


 

 

Revolution of the Viaduct,1937/ wikimedia commons

 

 

 

 

 

 

파울 클레의 작품 <고가다리의 혁명(Revolution of the Viaduct,1937)> 는 그의 독특한 예술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클레는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예술 사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종종 환상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들을 특징으로 합니다. <고가다리의 혁명>은 이러한 클레의 스타일을 보여주며, 나치 정부에 의해 "퇴폐미술'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클레의 예술적 비전과 그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입니다. 

 

 


 

Candlestick, 1937-38/BestofBharat

 

 

 

 

그렇게 다시 그림에 집중하던 클레에게 들려온 최악의 소식은, 히틀러의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이었습니다. 나치는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에서 클레와 칸딘스키 등, 여러 화가들을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고 작품 제작을 금지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작품을 몰수하고 많은 작품을 불태웠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한 미술가들은 큰 충격에 빠졌는데 다리파 화가 키르히너는 자살했고 몇 명의 예술가는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퇴폐미술전에 '광기와 정신병'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된 클레의 그림은 7점이 전시 되었고, 나치는 일반 대중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 102점을 몰수했습니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린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파울 클레-

 

 

 

 

A Woman for Goods, 1938/Google Arts & Culture

 

 

 

Park Bai Lu,1938/King&McGaw

 

 

 


 

 

 

 

 

The Vase, 1938/PubHist

 

 

 

 

 

 

54.5*88cm크기의 올리브유와 삼베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클레의 특유의 추상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며, 종종 생생한 색상과 기하학적 형태를 통합합니다. 클레의 예술은 일반적으로 음악과 리듬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여 형태와 색상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만들어냅니다. 


 

 

 

 

Heroic Fidding, 1938/Kanvah Art

 

 

 

새의 섬 Insula dulcamara, 1938, Zentrum Paul Klee, Bern/wikipedia

 

 

 

 

1937년부터 1940년 사망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을 그린 클레. 그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로 인정받았으나, 스위스 정부로부터는 무절제하고 너무 혁명적이라고 감시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Heroic Roses,1938,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Dusseldorf/wikipedia

 

 

 

 

영웅적인 장미들(Heroische Rosen)는 스위스-독일 화가 파울 클레가 1938년에 그린 표현주의 회화입니다. 이 작품은 물감이 스며든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크기는 68cm*52cm입니다. 그림에는 추상적인 빨강 장미 세 송이가 흐릿한 녹색과 파란색 배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붓질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스케치 같은 느낌을 줍니다. 클레의 삶의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의 경화증과의 싸움을 반영하며, 후기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형문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Oh! These Rumors!, 1939, Beyeler Foundation/wikimedia Commons

 

 

 


 

 

 

색은 우리의 생각과 우주가 만나는 장소다. 
- 파울 클레-

 

 

 

 

 

Untitled(Still Life),1940, Zentrum Paul Klee, Bern, Switzerland/Artchive

 

 

 

 

1940년 6월 29일, 61세에 사망한 클레의 집, 테이블 위에는 위 그림이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그전과는 또 아주 다른 분위기의 그림 속, 아랫부분 왼쪽에 있는 형태는 천사라고 하는데, 병에 걸린 후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천사를 자주 그렸다고합니다.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창의적이었던 파울 클레. 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을 찾아보면서 새삼 그의 재능에 감탄하게 됩니다. 보통은 한 가지 맥락에서 시작해서 일정하게 가지를 뻗어나가는데 그의 회화는 종횡무진으로 경계를 넘는 실험의 연속인 듯, 구상과 추상미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습니다. 음악과 미술의 거리를 넘고, 문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이것들을 하나로 융합한 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  그를  통해 우리는 눈이 즐거운 그림의 시대를 지나 고민하고 사유하는 그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통의 경우보다는 조금 더 창조의 핵심에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파울 클레의 묘비에 새긴 글-

 

 

 

 

 

 

 

 

 

 

 

 

Death and Fire, 1940,Zentrum Paul Klee, Bern/wikipedia

 

 

 

 

클레는 몸이 굳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죽을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2500여 점을 그렸습니다. 발병 후부터는 두꺼운 검정 크레용과 거친 선, 칙칙한 색감으로 그림을 채웠고요.  죽은 해에 그린 <죽음과 불>을 보며, 예전의 유쾌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해골 같은 흰색 얼굴이 중심에 있고, 입과 눈은 독일어로 죽음을 뜻하는 T,o,d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전신 경화증 투병 끝에 사망한 해에 그린 <죽음과 불Death and Fire>은 스위스 바젤 미술관,베른 젠트럼 파울 클레 미술관 소장 되어 있습니다. 

 

 

 

 

 

 

 

 

2005년 스위스 베른에 그의 업적을 집대성한 파울 클레 센터( Zentrum Paul Klee)가 세워졌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많았던 그의 특성을 잘 나타낸 기하학적  건축물이 눈에 띕니다.  비록 독일 나치에 의해 폄하되었지만, 독일과 스위스 사람들은 그에 대한 그리움과 위대함을 이런 건축물로 표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H85mG9AZ5HI

 

 

 

 

음악적 재능이 타고났던 파울은 이미 발전한 음악계가 아닌 미술계에 자신의 재능을 쏟을 정도로 새로운 모험을 즐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음악과 미술의 경계,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화가 "파울 클레'.  독특한 그의 삶을 이해하고 미를 이해하는 중심적 요소에 음악과 여행이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요즘시대에 태어났으면 실컷 실력 발휘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파울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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