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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무슈, 지팡이 두고 가셨구려"

"인간은 추악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coffee pot"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아웃사이더>에서 "괭하니 검게 반짝이는 눈은 OOO의 그림을 보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하고 배즈 루어먼이 연출한 2001년 뮤지컬 영화.

 

 

 

 

 

위 다섯 가지 힌트의 주인공 이름은 바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이다. 그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툴루즈 가문 출신의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Alphonse Charles, Count of Toulouse-Lautrec-Monfa, 1838~191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툴루즈 가문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열두 동료(Charlemagne's twelve peers)로 불리던 프랑스 최고의 대귀족 가문이었고 그들의 수장인 툴루즈 백작은 한 때 남프랑스의 1/3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영주였다. 긴 이름만큼이나 유서 깊은 집안에 태어난 장남이니 얼마나 귀히 여겼겠는가! "작은 보석'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로트렉이  계단에서 넘어진 후 기본적인 성장이 멈추기 시작했고, 12세에 왼쪽, 14세에 오른쪽 대퇴골이 부서져 로트랙 다리는 그날 이후로 성장을 멈추게 된다. 반신은 성인의 몸, 하반신은 아이의 상태였다고 한다. 상상해 보라.  남들이 보기 영락없는 "coffee pot" 모양새다. 집안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행해졌던 근친상간의 혼인이 문제였던 이유도 있다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장애인이란 천국과 지옥만큼의 열등감의 교차가 그를 어떤 삶의 장으로 이끄는지 한 번 따라가 보자.

 

 

 

 

 

 

 

2. 생애

 

 

 

 

 

 

명문귀족 가문이었지만 장애인인 아들을 둔 어머니는 고민이 참 많았을 것이다. 로트렉에게 그래도 다행인 부분이 엄마라는 존재가 든든하게 뒷 배를 봐 주고 계시다는 부분이다. 흔히들 말한다. 아버지는 잘 난 자식을 앞세우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아픈 손가락을 먼저 챙긴다고 말이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아픈 손가락 장남 로트렉이  미술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10살때부터 미술을 배우게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에게 미술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성장이 멈춘 아들에 대한 집안의 냉대를 피해 몽마르트르에 집을 얻어 아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비록 온전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성만으로도 결핍은 어느 정도 메꿔지리라 생각된다. 그는  카바레 무랑루즈의 한쪽 구석에서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명문가 차림에 몸은 왜소증 환자이니 매일 아리랑 곡선을 그으며   버텨나갔을 그의 일상이 우리의 삶 보다 더 힘겨웠을 생각에  가슴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다. 어디다 속시원히 하소연해 볼 수 도 없다. 그저 하루를 버티며 바뀔 것 같지 않은 냉랭한 현실에 원망, 분노, 체념이란 감정들이 섞이어 젊은 로트렉의 영혼을 잡아 흔들어 댄다. 그래서일까? 그는  더욱 자유 분방한 성생활과 알코올 의존증에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킨다. 다행인 점은   앙리 마리 레이몽드 드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긴 이름만큼이나 대조되는 그의 왜소증이   그를  더 민첩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한 꺼풀 벗겨진 눈과 마음으로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아름답게 미화하지도 않고 추하다고 나무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덤덤이 말이다.

 

 

 

 

 

 

 

 

 

 

 

물랑 루즈(Moulin Rouge),1891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나고 ,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벨에 포크(Belle Epoque) 시대로 여가와 유흥문화가 확산됐고, 자연스레 몽마르트로에는 물랭루주와 같은 댄스홀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고, 즐거움과 쾌락을 찾는 장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몽마르트르에 문을 연 물랭 루즈는 "빨간 풍차" 라는 뜻이다. M을 크게 사용하여 물랭 루즈의 상호를 세 번 표현했는데 춤을 추는 여자, 위의 라 글뤼(La Goulue)는 물랭 루즈의 유명한 댄서 이름이다. 그녀는 당시 시골에서 올라와 캉캉춤으로 인기를 끈 무희였다고 한다. 포스터에는 스타 캉캉춤 댄서 인 ' 라 굴뤼(La Goulue)와 '뼈 없는 발랑탱(Valentin Desosse)'이란 남성 댄서가 묘사되어 있다.  이 포스터는 공개되자마자 충격과 논란을 부러 일으켰고, 거리 곳곳에서 포스터를 떼어 가려는 사람들로 소동이 일어났으며,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지나가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보시다시피 라 굴뤼가 대중의 눈앞에 엉덩이와 속바지를 훤히 드러내는 낯 뜨거운 포즈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로트렉이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라굴뤼가 늘 금발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헤어스타일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은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다. 덕분에 라 쿨뤼는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캉캉춤 댄서가 된다.  처음 3000장 정도를 제작해서 파리 시내 곳곳에 붙인 이 포스터는 로트렉의 첫 번째 채색 석판화였다. 포스터 제작을 위해 쓰인 석판화는 1796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배우이자 시인인 알로이즈 제네펼더(1771-1834)에 의해 우연히 발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 미술의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 고전적 의미의 마지막 대가이자 전통적 회화 형식을 해체한 최초의 근대 화가)는 석판화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 거의 최초의 미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석파화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가능해지면서 19세기 중엽부터 석판화를 상업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원색 석판 포스터는 1869년 프랑스의 쥘 셰레(Jules Cheret,1836-1932, 모던 포스터의 아버지)에 의해 제작된다. 이후 19세기 포스터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근대적 개념의 포스터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무튼 포스터가 붙고 난 다음 날 로트렉의 이름은 파리 시내에 쫙 퍼지게 되었는데 '거리의 예술'이라고 하는 현대 길거리 포스터의 시초가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캉캉 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고, 물랑 루즈의 포스터 등 석판화로 상업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로사 라 루즈(Rosa La Rouge,1887)

 

 

 

 

 

 

 

 

 

 

 로자 라 루즈라고 불렸던 여인으로 매춘부였다. 로트렉이 가장 좋아했던 모델이었는데 그녀는 빨강머리였다. 그의 작품에는 빨강 머리 여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빨강 머리를 성적인 것과 연결한 그의 취향 때문이다. 그녀가 로트렉에게 매독을 안겨 준 여인으로 되어있고 로트렉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중의 하나였다. 이 시기 고흐와 교류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 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 무용수나 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 이와 같은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앙리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Eduardo Vuillard, 1868~1940)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매춘과 더불어 앙리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그냥 마시는 것도 아니라 술에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스타일. 그러다 개발한 게 독하기로 소문난 칵테일 어스퀘이크.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반 고흐가 환청으로 귀를 자른 것처럼 로트렉도 과대망상 증세가 심해지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이상한 돌발 행동들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작품수는 현저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린 그림들에선 뭔가 우울함과 절망감이 많이 느껴지고 더 이상 신선한 새로움을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광대 차우 카우(At the Moulin Rouge, The Clowness Cha-U- Kao,1895)

 

 

 

 

 

 

 

 

 

 

 

물랭루즈의 여자 어릿광대 차우카오이다. 동양적인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물랭루주의 어릿광대로 유명했다. 이 여인 역시 일하는 여성으로서 당시의 무희나 매춘부들처럼 천한 계층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 그녀의 자세나 태도가 그녀의 당당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로트렉이 원했던 자유가 그녀에게 있어서 신분차별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다.

 

 

 

 

 

로트렉의 시선은 자세히 보면 연민과 냉정함이 섞여있다. 그는 다른 후기 인상하 화가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화법을 가지고 있다. 윤곽선을 그리고 길고 가는 붓으로 채색하는 그의 작업 방법은, 순간 동작을 아주 빠르게 스케치하는 능력과 어울려 그만의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의 이런 화풍은 나중에 표현주의 작가들의 전범이 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나기 4년 전부터 로트렉은 화실에 있는 시간보다 바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노르망디 근처에 있는 휴양소에서 요양을 했지만 술을 끊을 수는 없었다. 37세 생일을 석 달도 남겨 놓지 않았는데 로트렉은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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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기

 

 

 

 

 

로트렉은 키는 남보다 30cm 정도 작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어느 누구보다 날카롭고  관찰력이 뛰어난 뎃생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희와 가수 등의 모습을 신랄하고 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감출 것 없는 세상을 화폭에 옮겼고,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박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옆에 나란히 않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 위로 날카롭게 통과한다. 그는 자신이 154cm에서 성장이 멈춘 육체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 자신을 견디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로트렉은 20년도 안 되는 화가로서 삶에 737점의 유화, 275점의 수채화, 363점의 포스터와 일러스트 등 5084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더 이상 홀대받거나, 조롱거리가 아닌 자유로운 삶이 있는 곳, 서커스단이나, 물랭루즈의 무희들 세계 속으로 들어가 소외받고 천대받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림을 그렸다. 아무런 허식 없이 생명과 생활의 리듬 그대로를  그려낸 것이다.  정상인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그들의 일상을 왜소증 환자라서 그들의 눈높이로 속살을 드러내 줌으로써 삶이 생존이 아닌 예술로 승화되었다. 속필과 생명의 눈깜박임 같은 생생한 색채, 그리고 인간 관찰의 산뜻함이 그의 작품을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구별되게 한다. 색상이나 선의 복잡함을 덜어내고 강조할 부분만 그려내어 주제를 명확히 하는 그의 스타일은 어쩌면 주인공으로 주류 사회에 살고 싶었을 그의 또 다른 욕망의 표현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눈높이 사랑의 집합체 로트렉!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의 그 만의 스토리가 있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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