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 들어가기

 

나비파(Nabi)운동

생테티즘(Symthetism)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e)

ABC<회화 첫걸음>(de la peinture)

"그림에서 색채는 3-4개의 엄선된 색채만으로 충분하다.

선택된 색채들은 그것 자체로 표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다른 색채들은 오히려 이런 효과를 반감시킬 뿐이다."

 

 

 

 

2. 생애

 

 

 

 

 

세뤼지에의 아버지는 향수 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그런 아버지 덕에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뤼지에는 소년 시절 철학 연구에 많은 중점을 둔 중등학교인 리세 콩도르세(Lycee Condorcet )에 다녔고 그곳에서 철학 학사 그리고  수학 학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의 현실적인 아버지가 그를 도와 판매직에 몸담았으면 했지만 그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요. 그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의 유명한 사립 예술학교인 아카데미 쥘리앙(Academie Julian)에 입학합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1864,11,9~ 1927,10,7)는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전위 예술 나비파 운동, 생테티슴, 클루아조니즘의 영감을 준 프랑스 화가이기도 합니다. 모르는 용어가 몇 개 등장하지요.  <클루아종(cloison/프랑스어>의 원뜻은 '구분'의 뜻으로 미술용어로 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에마유에서 각각 색의 부분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클로아조니즘은 강렬한 선으로 화면을 구획 지어 대담하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화법으로 '구획주의'라고도  불립니다. 중세 유럽의 에나멜 기법인 '칠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클루아조네(cloisonne)에서 유래했고 퐁타방 지방에서 머물며 작업하던 에밀 베르나르(Ecmile Bernard)가 처음 구사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폴 고갱이 즐겨 활용한 기법입니다. 당시  일본풍 판화에 깊은 영감을 받은 고갱이 <황색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작품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생테티슴(synthetism)은 문예운동으로서 회화상의 상징주의 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주관적 해석과  상상력을 중요시하는 사조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단편화된 테크닉에 반발해 시도된 기법이지요. 회화표현에 있어서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하고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주로 고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젊은이들에게 공유됩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880년 중반에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였고, 1888년 여름에 프랑스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으로 여행을 가서 폴 고갱 주변의 소규모 미술가 그룹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걸 계기로 세뤼지에의 인생이 터닝 포인트를 맞습니다. 고갱이 세뤼지에에게 정말 큰 영향을 미쳤거든요.  고갱은 파리에서 퐁타방으로 이사 온 후 인상주의 화가들이 중요시하는 외관, 빛에 의한 섬세한 색채의 변화와 자연 묘사를 버리고 자신의 내면과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장식적인 화풍을 만듭니다.  원색의 가까운 순수한 색채를 쓰면서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인상주의 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을 찾고 있던 젊은 화가들에게 고갱이 힌트를 준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비파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폴 고갱입니다. 

 

 

 

 

 

 

 

 

 

 

 

<부적(The Talisman)>,Paul Serusier

 

 

 

 

 

 

 

 

"나무가 어떻게 보이는가? 초록색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초록색을 칠하라.

팔레트에서 가장 순수한 초록색을 칠하라.

그림자는 어떤가? 그림자는 약간 파랗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가장 순수한 파란색을 칠해보아라.

불그스레한 잎사귀에는 주홍을 칠하라."

 

 

 

 

 

 

무엇을 나타내는지 모를 정도로 지금 봐도 현대적인 추상미술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온통 색으로 밖에 인식이 안될 정도로 말입니다.

고갱의  말대로 세뤼지에가 풍경화를 완성한 것이 바로 위의 "부적"이라는 작품입니다. 언뜻 보면 색 덩어리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덩어리들이 초록색, 주황색 등으로 어떤 형체를 나타내고 있어 구별은 되는 것 같고요. 색만으로 형체를 표현한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고 놀라운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세뤼지에는 '부적'작품을 완성해 파리로 돌아와서 쥘리앙 학교의 미술을 배우는 친구들에게 보여줍니다.

 

 

 

 

"화가들은 본능적으로 모사를 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데

우리는 이 풍경화를 통해 그러한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낀다."

 

 

 

 

화가라면 본능적으로 자연의 경관이나 인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사실처럼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보시는  이 작품 하나로 당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것에 그 놀라움이 있습니다. 어때요. 젊은  화가들이 당시 느꼈을 해방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 화가들이 모여 '나비파'를 결성하게 된답니다. 세뤼지에와 뜻을 같이 한 화가들은 모리스 드니, 폴 랑송, 케르 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아리스티드 마이욜, 펠릭스 발로통 등이 있습니다. 이 화가들은 대부분 유복한 중산층 출신에 지적인 지식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비파에 속한 화가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열었다고 합니다. 신비주의 와 종교, 철학, 문학, 음악 등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도 나누고 또 복장을 갖추고 비밀스러운 의식도 행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세뤼지에는 신비주의와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것들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또한, 나비파는 이집트시대 벽화, 중세시대 스테인드글라스, 비잔틴제국의 모자이크 작품에 적잖은 영향을 받습니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표현방식에 이끌렸으며,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신앙과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의 장식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비파에게 예술이란 삶에 가까이 있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이젤 위에 놓고 그리는 캔버스 회화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 펠릭스 발로통은 포스터, 목판화, 삽화, 병풍과 부채 등을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이어나가기도 합니다. 

 

 

 

 

 

 

 

세뤼지에는 1889년 가을 파리로 돌아왔지만 1890년 여름 르 풀뒤의 고갱에 다시 합류합니다. 그러나 그 해에 그는 아카데미 쥘리앙을 그만두고, 그의 철학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고 혼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나비파는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며 상징주의 자격증을 가진 몇몇 개인, 작가, 음악가, 배우 등으로 그룹을 넓혀갑니다. 그러다 1890년 대 중반이 되자, 대부분이 친구로 남아있던 나비파들은 개별적인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세뤼지에 자신도 신학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세뤼지에는 매년 여름 브르타뉴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위엘고트(Huelgoat) 그다음에는 샤토뇌프-뒤-파우(Chateauneuf-du-Faou)에서  폴란드 여배우 가브리엘라 자폴스카(Gabriela Zapolska)와 함께 정착합니다.  그는 정기적인 전시회, 특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전시회에 참가하던 파리에서 매년 겨울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의 폴란드 연인 가브리엘라 자폴스카가 갑자기 그를 떠나자 세뤼지에는 브르타뉴 샤토노츠-뒤-파우 지역으로 잠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캔디 장수 (The Candy Merchant),1894

 

 

 

 

 

그림 속 여인은 비가 오는 데도 판을 걷지 못하고 캔디를 팔고 있습니다. 유난히 드러나 보이는  코와 처진 눈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삶이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내리는 비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데  다 팔지 못하면 집에 두고 온 식솔들 먹거리 사는 일은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캔디를 사러 나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이상 없어 보입니다. 빨리 판 접고 집에 가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심난한 상황이니 말이죠. 좌판 위에 사탕, 우울한 여인의 얼굴, 그리고 뒷 배경이 되어 주는 벽에 입체감도 공간감도 전혀 느껴지질 않아 그림을 보는 내내 더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 "아줌마, 이거 내가 다 살 테니 얼른 집에 가요. 그렇게 앉아서 청승 떨지 말고, 어서 가요."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그는 여러 번 독일 보이론(Beuron)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의  종교적인 상징과 기하학 그리고 구성에서의 신성한 비율에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쎄뤼지에는 그의 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그에 따른 그림을 그리면서 1908년부터 그는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 랑송에서 미술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 아카데미는 나비 화가 폴-엘리 랑송(Paul-Elie Ranson)이 설립한 학교로, 설립 목적은 종합주의 의 명분을 보다 깊이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학교는 1955년까지 운영이 되는 데  이 기간 동안 그는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을 근거로 ABC<회화 첫걸음>(de la peinture)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그의 모든 미적 연구를 기억하기 위해 드로잉과 그림에 대한  이론적 논문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수산나와 장로들(Suzanne and Elders, 1910-12)

 

 

 

 

 

 

구약에 실린 수산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담았던 인기 주제입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남자들의 관음증도 있고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다니엘의 지혜로 극적으로 구하는 장면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시기마다 화가마다 수산나와 장로들의 묘사가 다른데 세뤼지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숨어서 보는 장로들의 모습이 가관입니다.  해바라기처럼 우뚝 묘사된 장로와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장로의 모습은 '나 여기 있다.'라고 광고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멍청한 장로들처럼 보이거든요. 넘볼 것 넘봐야지 말입니다. 그 후 세뤼지에의 작품 주제로 종교적인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계산과 측정 결과를 기초롤 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3. 나가기

 

폴 세르지에 가 퐁타방에서 고갱을 만나 미술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처럼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비록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고갱이 타이티로 떠나 버리면서 '나비파"로 불리는 그들은 흐지부지 되어 1900년대 이후 독자적인 길을 갖지만 말입니다. 그들 덕분에 20세기 회화의 기본 방향이 물꼬를 텄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3.03.24 - [지식&교양] - 46.인상주의 화가, 고갱(6)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