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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세잔의 정물화 그림을 처음 보았던 학창 시절 그의 그림이 참 만만해 보였다. 어쩐지 미술학원 같은 곳에서 아직 기본기가 덜 닦인 초보 학생이 실수하듯 그려 낸  느낌이 들어 '저 정도면 나도 그리겠네.' 하며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다. 늘 보아온 고전주의 시대 사진같이 정교하고 안정적인 구도가 내 눈에 더 익숙했고 편안함을 가져다주어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교과서에 쓰인 세잔의 타이틀은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하며 한껏 그를 치켜세워 주고 있었다. 일반인 우리의 눈과 달리 일부 전문가들은 세잔의 그림들이 모더니즘 페인팅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라 얘기한다. 해석이 필요한 미술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도 있었으니 말이다. 

 

 

 

 

 

 

IT 분야에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iphon을 통해 혁명의 아이콘 역할을 했다면 미술분야의 폴 세잔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iphone을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시작된 스마트 폰의 빠른 보급은 안드로이드 체제의 Google과 함께 전 세계의 폰 소지자들에게 개인의 힘이 더 커지고 투명성과 공정성이 커지는 특별한 경험을 갖게 해 주었다. 미술계의 폴 세잔도 오랫동안 진리처럼 여겨온 원근법을 벗어나 사고의 틀을 과감히 깨부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통로가 돼 주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관찰과 노력으로 채우고자 사과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다. 쉽게 썩지 않고 오래 관찰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쉽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않는 조용하고 완벽한 모델이라 더 그러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불러 사과처럼 앉아있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40년 사과 사랑 덕분에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다초점이라는 상상도 못 한 새로운 시도를 해보게 된다. '예리하지 못한 시골화가', '실패한 화가'라는 자괴감 속에 살았던 세잔이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도 못 받고 후원자도 없었지만 끝까지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고집세고 묵묵한 시선을 한 번 따라가 본다. 

 

 

 

 





 
2. 생애 

 

 

 


 
1839년 프랑스 남쪽 끝에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 루이 오귀스트 세잔과 미혼녀 엘리자베드 오베르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한다. 그는 고향의 기숙사 국민학교 샛조제프를  나온 후 고등학교 부르봉을 다니면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친구로 사귀게 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병약하고 남루한 옷차림에 말까지 더듬었던 이 소년에게 세잔은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된다. 둘은 금세 단짝이 되었고  세잔의 친구인 에밀 졸라는 후에 프랑스 대문호가 되어 인상주의 사조를 대중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후에 졸라가 쓴 소설[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실패한 화가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오해해 한 때 절교하기도 한다. 졸업 후 인근에 사는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성적인 반대로 포기를 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잠시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된다.그러나 자신에게 맞지 않아 힘이 들었고,  졸라의 권유와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설득으로 , 다시 미술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된다. 늦깎이로 시작한 미술 공부는 쉽지 않았고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시험에도  떨어져 혼자서 독학을 하다시피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파리에서 기오망, 피사로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당시 잘 나가 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도 했다. 특히 피사로는 세잔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림도 그리며 세잔의 재능을 독려해 준다. 그로 인해  뭐든 잘하던 게 없었던 세잔은 그나마 가장 좋아했던 그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해 준 피사로를 평생 아버지처럼 따랐다. 인상파를 이끌었던 피사로의 입김으로 세잔도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립니다. 어느 날  아돌프 부게로에게 "그리다 만 그림을 그림이라고!! " 하는 조롱을 듣게 된다. 이런 조롱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던 세잔은 자신의 내면 안에 들었 던 인상주의에 대한 의문을 평생 숙제처럼 간직하고 문제를 풀려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당시 파리는 재능 넘치는 화가들이 무더기로 활동하던 시대였다. 고향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오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인상주의 사조에 합류했던 마네, 모네, 드가, 르느와르 같은 당대의 그들과 비교하면 세잔의 그림은 너무도 평범했다.  에밀 졸라는 자신이 사귄 파리의 예술가들을 세잔에게 소개도 해줘보고 도와주려 애썼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세잔은 타인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다. 파리로 온 후 10년간 세잔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친구의 모습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그는 매년 나라에서 개최하는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매 번 거절당했다. 그러던  세잔에게 기회가 왔다.  파리 살롱으로부터 낙선한 젊은 예술가들이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그들은 젊은 화가들의 실험적인 그림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파리 살롱전에 반기를 들며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가 바로 19세기 후반 서양 미술계를 점령한 인상주의다. 주류 미술계는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특히 세잔을 겨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어둡고 우울한 색조의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았다. 시간이 흘러 세잔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들은 하나둘 인정을 받고 주류 미술계로 입성한다. 세잔만 그대로였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향했지만 시간만 흘렀을 뿐 이룬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왔으니 면목이 없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돌아와 조용한 곳에 틀어박힌 채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계속 무언가를 그려대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 갔지만 이 관계도 오래가지 못한다.

 

 

 

 

 

 

 

 

 

<에스타크의 붉은 지붕들>, 1883-1885

 

 

 

 

 

 

 



 화면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고 따뜻하다. 탁트인 지중해 바다가 붉은색 지붕들과 함께 매력적인 작품이다. 세잔은 10년 동안 약 20 점의 에스타크를 그림으로 그렸고 그중에서 12점은 마르세유만을 바라보거나 가로지르는 그림들이다. 에스타크는(L' Estaque)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서쪽으롤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어촌 마을로 행정적으로 마르세유의 생활 공동체에 속한다.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환경이 좋은 그곳을 방문하거나 그곳에서 살았다. 1870년 7월 19일 프랑스와 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가 빌린 맨션에 이후에 아내가 되는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 Hortense Fiquet)와 함께 옮겨 산 것이 에스타크 거주의 시작이었다. 그는 에스타크에 열광했고  피사로에게,

 

"그곳은  카드놀이와 같다. 파란 바다위로 붉은 지붕들이 있고... 태양은 멋지고 목적물들은 나에게  흑색과 백색으로 실루엣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푸른색, 붉은색, 보랏빛으로 보인다."

 

라고 말하며 에스타크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에스타크에서의 생활은 세잔이 웅장한 풍경화를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고 세잔은 자신의 방에서 지중해의 바다가 있는 풍경을 수없이 그려댔다. 이러한 그림들을 그리며 세잔은 점진적으로 형식과 고유색을 버리고 인상주의 와 서서히 결별할 준비를 한다.

 

 

 

 

 

 

 

 


 세잔은 어느 시점부터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인상주의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 안티 인상주의를 표방하며 독자 노선을 걷게 된다. 예를 들면 모네는 인상주의 스타일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주의를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올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비해 세잔은 어느 순간부터 인상주의 문제점을 깨닫고 전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모네라는 화가를 장인 정신에 빗대면 세잔은 당대 혁신가라고 불리는 것이 옳을 듯싶다.


 
"나는 인상주의를 박물관에 있는 예술들처럼 강하고,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고전회화의 강인함과 인상주의의 가벼움을 비교하며 어떻게 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인상주의가 지닌 가벼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방법적인 면에서 깊이 고민한다. 다시 말해 세잔이 안티 인상주의가 된 것은 인상주의를 배척했다기보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진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의 첫 번째 해결책은 내부구조의 강화다.

당시 인상주의는 주로 표면을 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부구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껍데기만 있는 사람처럼 그림이 빈약해져 버리기 일쑤였다. 세잔이 취약하다고 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래서 세잔이 생각한 해결 방안은 다시 '중심 뼈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을 원통, 구, 그리고 원뿔로 이해하기 원한다."



 
세잔은 대상의 기본 구조를 강조하면 그림이 단단하고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상을 구조적으로 단순화하여 그리는 것으로 뭔가 단단한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세잔은 인상중의가 전적으로 '표면'에만 신경 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 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결책으로 그는  '내부구조'를 더 신경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방법을 찾으려 했다.

 

 


 
두번째 해결책으로 세잔은 다초좀(multi perspective)을 내세운다.

 

 

 




 

 

 

폴 세잔, 주방의 탁자 , 1888-1890

 

 






탁자 위의 정물들을 살펴보자. 중안의 항아리를 보면 뭔가 어색하다. 이는 항아리는 약간 위쪽에서 본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바구니는 거의 완전 옆면에서 본모습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보이는 각도가 각자 다른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사물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에 있는 하얀 주전자 두 개는 불안하게 각각 약간씩 기울어 있으며. 앞쪽의 작은 레몬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이렇게 세잔의 정물화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조금씩 다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미스터리 같은 세잔의 정물화가 뒤틀려 보이는 이유는 각 사물들에 다른 초점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한 그림에 5개, 혹은 그 이상의 초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체를 하나의 사진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5개의 사진을 각자 다른 각도에서 찍은 후 다시 누더기처럼 이어 붙여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느낌에 가깝다.
  놀랍지 않은가! 오랜 미술사에서 원근법을 기본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대에 기존 관념을 부수는 시도를 다양하고 꾸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잔의 정물화는 모든 사물이 조금씩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잔이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런 방식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이상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말이다. 그의 이 시도를 이해하고 난 후 보이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많이 다르다. 그림을 본 전과 후가 확실히 다른 느낌이라서 말이다.

 

 

 

 

 

 


세잔은 각 사물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최적의 방향을 찾으려고 했다.  위의 정물화에서 세잔이 물병은 약간 위쪽, 그리고 바구니는 완전히 옆쪽에서 그리는 것이 그 대상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그림을 보면 이상한 점이 몸통은 정면으로 그렸지만 허리와 다리는 옆면을 그렸다는 점에서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 벽화에서 또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자체는 옆면이지만 눈은 또 정면이다. 이를 실제라고 생각해 보면 괴상하기 짝이 없다.  이집트 미술만의  독특한 느낌이 나는 이유도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각 인체 부위에서 특징이 가장 정확히 드러나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얼굴은 눈, 코, 입 라인이 잘 드러나는 옆면, 눈은 전체가 보이는 정면, 몸통은 양팔을 다 보여주는 정면으로 그리는 것이 우리 몸의 특징을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특징이 더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리는 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더 진실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물병을 약간 위쪽에서, 그리고 바구니는 완전히 옆쪽 각도에서 그렸던 세잔의 의도와 유사하다. 세잔도 이집트인들처럼 대상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초점을 의도적으로 택하여 그린 것이다.

 

 

 

 

 

 



 

세잔은 양쪽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대상을 왜곡한다고 의심하게 된다. 양쪽 눈 사이의 거리만큼, 미세하지만 보는 각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볼 때, 왼쪽 눈에서 본 사과와 오른쪽 눈에서 본 사과는 미세하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다. 마치 시력 검사하러 안과에 가 한쪽 눈을 숟가락으로 가리고 시력 측정을 할 때 양쪽 시력이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신통하게도 우리의 뇌는 양쪽 눈에서 받은 두 시각 정보를 정리하여 하나의 사과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앉은자리에서 검지 손가락을 세워 눈 15cm 정도 앞 정도에 두고 양쪽 눈을 번갈아 깜빡여 가면서 보라. 왼쪽 눈이 본 손가락과 오른쪽 눈이 본 손가락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 눈은 보는 각도가 살짝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눈을 떼서 다시 보면 합쳐진 이미지로 정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사령탑인 뇌가 그렇게 정리를 해 준 것이다. 이점을 세잔은 인식의 왜곡으로 보았다. 우리 같으면 ‘어, 좀 다르네.’ 하며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인식의 왜곡을 없애기 위해 다른 생각을 했다. 만약 한쪽 눈을 가리고 다른 한쪽 눈으로만 사과를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양 눈으로 볼 때  생기는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세잔의 정물화에 여러 개의 초점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잔은 다시 말해 정물화를 그릴  때 양쪽 눈으로 전체를 하나의 장면을 인식하여 그린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을 한쪽 눈으로 카메라를 찍듯 그러고 나서 다시 이어 붙여서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이만하면 천재 아닌가!  틀린 형태를 화가 세계에서 과감하게 그려낸 그의 투박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실제로 세잔의 그림은 이후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탄생시켰고 입체주의는 몬드리안의 추상화까지 이어졌으니까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적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 수욕도(The Large Bathers),1898-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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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곤 했는데,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사과 정물화처럼 과감하게 단순화한 인물과 풍경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배치한 그림이다. 가장 큰 그림들 중 하나 이고 죽기 전까지 7년을 매달렸던 이 그림은 입체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그림을 본 파블로 피카소가 2년 후 최초의 입체파 그림인 '아비뇽의 아가씨'를 탄생시킨다. 이 그림에 어딘가 낯설지만 많이 본 느낌이 든다면 세잔의 원조 분위기가 피카소의 그림에 살짝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3.나가며 

 

 

 

 

 


세잔의 미술이 위대한 이유는  첫눈에 볼 때 보기에 좋은 그림을 그렸던 고전주의 영향권에서 과감히 벗어난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미술에 위대한 발견이었던 원근법을 과감히 버렸다. 원래 도화지 하나에 원근법 한 군데 기준을 정해놓고(소실점) 그림을 그리는데  세잔은 자기 시선이 머무는 곳에 소실점을 두고 그리고 다 그리면 다시 소실점 옮기는 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본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던 고전주의나 인상파의 빛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재현에서 벗어나 원근법을 파괴했고 형태의 덩어리로 보기 시작하고 실험을 통해 단단해진다. 자기 시선이 가는 곳이 소실점이 되어 한 그림 안에 여러 개의 소실점이 있었으니 그림이 편안해 보이진 않지만 대상을 그대로 재현해야 했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 위대한 발견이 된다. 이 시도는 후에  마티스의 야수파를 탄생시키고 피카소 같은 걸출한 인재에게 영향을 미치며 현대 미술이 화려하게 꽃 필 수 있도록 문지기 역할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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