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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라면 한번쯤 가져보는 환상이 있다. 바로 무대위의 발레리나다. 발레복을 입고 여리여리한 무용수가 포즈를 취하는 장면은 언제봐도 부러운 장면이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꽃다발이 무대 위로 던져질때면 그 부러움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다 이런 환상이 깨져버린 날이 있었다.
바로 강수진 발레리나의 흉한 발 사진을 보고서였다. 혹독한 연습으로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흉한
발을 보며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소리없이 뿌려야했을 그녀의
눈물과 뼈를 깎는 자기 훈련이 일상처럼 지루하게 반복되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무한한 시간을 무너져 내리는 자아를 수시로 다독이며 자기를 넘어 선 찐 예술가로서의 모습이 일그러진 발가락을 보며 진한 울림으로 공명했다.



[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1881), 오르세미술관


#무용의 화가 ‘드가’
‘무용의 화가’로 불리우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열네 살의 어린 발레리나>이다. 언뜻보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드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한 조각 작품으로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발레리나가 마주한 참담한 현실과 육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운명의 선택 앞에서 떨면서도 짐짓 의연한 척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1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고 있는 발레리나의 모습이고 집안의 생계를 모두 짊어져야 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당시 발레리나는 발레를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보고 귀족에게 후원을 받는 하층민 출신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이
예술로서의 발레가 아닌 발레리나에게 투자를 했을 뿐이고 자신이 후원하는 발레리나가
등장할 때 무대의 뒤편에서 관람하거나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원의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어린 발레리나들이 후원하는 귀족에게 성상납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가 작품에 등장하는 피곤하고 지친 발레리나 옆에 표정을 숨긴채 딸의 고통을 묵인하는 엄마의 무관심한 모습이 인정사정 없는 매니져 같아 보인다.

’그런 일은 내가 알바 아니고 너는 후원자들에게 잘 보일 생각이나 해. 너도 알다시피 당장우리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라고 읽히는 것은 내 과한 상상력일까?


무대 안팎을 다니며 개인적 움직임을 그려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무용수 선생님과 잘 안다는 이유로 무대 뒷편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장면들이 드가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무대의 앞• 뒤에서 리허설 연습 장면을 그린 그림속에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를 본다. 슬프게도 그림 속 그녀들은 서로가 소외되고 서로가 분산된 채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드가 덕분에 편하게 그가 살아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시대상과 문화 그리고 그림 속  인적구성을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과 비교도 해보고 추측도 해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기록적인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작품을 본 평론가  
위스망스는 “조각의 혁명”이라며 극찬했다.
당시에 ‘누가 조각에 실제 의상과 신발을 입힐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점에서다.
의상과 신발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입혀놓은 거라고 생각했을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이런걸보면 드가는 조각이라는 재료의 한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얼마나 기발하고 혁신적인 예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족 이야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진정한 파리지앵 ‘드가’와 그의 가족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 혁명이후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크게 전유럽으로 번지면서 생활양식은 물론 생각들도 크게 변하는 산업화시대였다.

에드거 드가는 상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그의 본명은 일레르 제르맹 애드가 드가(Hilaire-Germain-Edgar De Gas)이다.
그의 풀네임 이름중 ‘일레르(Hilaire)’는  프랑스 대혁명 때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가로 성공한 할아버지에게서 딴 것이고,
제르맹(Germain)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목화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외조부에게서 딴 것을 표나게 조합하여 이름에 짜맞춘 아버지의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드가 집안 역시 이탈리아와 미국에 은행과 기업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40대까지 돈 걱정없이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었던 드가의 밑천이
바로 양쪽 집안의 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했기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의 영향일까?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여성‘ 을 주제로 노년에 까지 그림을 그려낸 걸 보면 말이다.
#<개의 노래>


[The Song of The Dog], (1875-1877), The Cafe Concert



드가는 자신이 즐겨 갔던 카페를 배경으로 <개의 노래>를 그렸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 웃음이 나온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부르는 장면이 개와 닮아 붙여진 여자 가수의 별명이라고 한다. 다시 보니 우리 집 키우는 두마리 개의 제스처랑 너무 닮았다.^^

작품의 모델은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 엠마 발라동이다. 드가는 그녀의  노래에 , “발라동의 커다란 입에서 흘러나오는
관능적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웠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네.“ 라며 찬탄를 보냈다고 한다.
<개의 노래>라는 작품은 당시 ‘음악을 회화에 어떻게 담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드가 나름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인 위주의 그림 속 주인공이 이방인의 얼굴로 바뀌어 볼거리의 풍성함를 함께 드러내 준다.
근처 카페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즐기며 노래를 음미하고 있었을 당대 파라지앵들의 일상을 느껴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회화는 약간의 수수께끼, 약간의 모호함,
약간의 환상을 필요로 하는 거야. 당신이 만약 의미를 완전하게 읽어버리면 더없이 지루하게 되고 말걸.”(드가)



#호기심과 진실

드가는 ‘호기심’이 많았던 작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아 그런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덕분에 작품의 주제도 폭이 참 넓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 그리던 전기를 지나
점차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으로 옮겨오는
후기의 화풍속에 무용수, 일상의 여인들, 경마장 속 움직임도 그의 손끝에서 잡아낸다. 드가는 누구보다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회화는 진실을 쫓아야 된다.”
현실 속 진실과 회화의 거리감은 솔직히 멀다.
움직임을 그리려할수록 움직임은 화가를 배신한다. 결국 진실을 추구하지만 진실을 잡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당시 드가는 예술은 그저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 뿐이다 라는 결론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리를 꾸준히 성찰해왔기 때문에 드가의 성찰적인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고지식한 작가라는 말이다. 그림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자리에서는 무엇인가 잘려나가게 된다. 이 가장자리를 자르는 방식에서 예술가들은 의외로 자기 나름의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작가는 대범하고 어떤이는 교묘하게 말이다.
<모자점에서>(1882)라는 작품 속에 드가의 동료 화가였던 메리커셋이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써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거울이 점원을 몽땅 잘라서 가려버린다. 그래서 이 점원은 얼굴이 없는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 점원은 불만스럽겠지만 보는 우리는 이런 부분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준다.

#드가의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 고등학교 시절 ,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고전 명화들을 모사하는 일을 했다.
좋은 작품을 보고 연습 하는 것만큼 큰 공부는 없는 것 같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를 하는 방이 따로 있었고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선 선배들의 작품들이 후배들의 그림 실력을 업그래이드 시키는 훌륭한 교재로써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 박물관 지도를 보면 드가가 습작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리만 건너면 드가의 작품을 모아 놓은 오르세 박물관이 보인다. 수없이 드나들었을 드가의 젊은 열정이 지금은 그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미래의 드가를 꿈꾸는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22살에 에콜데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미술을 전공한다. 이곳은 세계 제일의 정통 미술학교로 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배출한 곳이다.
쥘 마자랭 추기경이 소묘, 회화, 조각, 판화, 건축과 기타 다른 매체에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특히 루이 14세때 이 학교 졸업생들을  선발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왕실의 거주지들을 장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로인해 왕실의 사치에 백성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이곳 출신 예술가들을 열거 하자면 제리코, 들라크루아, 앵그르, 모네,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등이 있다.

드가는 24세에 이탈리아 사는 고모를 방문하러 간 적이 있다.  벨레빌 가족  <the bellelli family>,(1858) 이라는 작품으로 고모와 두딸 그리고 사업가 고모부의 어정쩡한 가족 관계를 묘사한 초기 작품이다.

상복입은 차가운 표정의 고모와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 가족과 유리된 고모부의 뒷모습이 드가의 손을 통해 잘 표현된 작품이다.  10년 동안 붙들고 그린 꼼꼼한 작품이라고 한다. 화목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 보는 내내 불편하다. 남편은 뭔가 항변하고 싶은데 씨알도 안먹힐 것 같은 싸늘한 표정의 고모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엄마편에 적극적인 아이와 웬지 중간적 존재로 애매함을 가진 아이의 모습도 대조적이다. 이 작품을 보면 드가는 미묘한 심리 묘사의 달인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탈리아에 몇년 머물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배운다. 흔히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추측하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드가는 여행에서 자극 받거나 그로인해 화풍이나 스타일이 변한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드가가 마네에 이끌려 카페 게르브아에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 순간이 결정적 순간으로 본다. 얼떨결에 인상주의 화풍의 리더격이 되어 버린 마네를 따르는 젊은 작가들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시점이란 얘기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 그림 모사를 하던 드가에게 마네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고 한다. 20대 후반의 드가를 30대에 들어선 마네가 함께 카페게르브아에 모여있던 동료들에게 데리고 간다. 그야말로 동아리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고 논쟁으로 날을 새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있던 곳이다. 마네가 만들어준 초고속 인상파 네트워크인 셈이다. 당대 실험적인 신선한 이념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드가는
‘독설 대마왕’으로 불리웠을 정도로 쓴소리를 많이 했다고한다. 그래도 결이 비슷한듯 다른 마네와 20년간 예술가로서 미묘한 경쟁의식을 가지며 교감해 왔다고 한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50대에 죽은 마네의 그림을 식견이 부족한 가족이   그의 그림을 잘라서 팔려고 하자 83세까지 살았던 드가가 마네의 짤려진 그림을 수습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마네는 드가가 그려준 <마네 부부>,(1868~69)의 그림을 부인 얼굴쪽 부분만 잘라 버렸다고 한다. 마네는 이에대해 변명도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 부인에 대한 강박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거란 추측이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 마음이 다쳐 다시는 안볼텐데 그래도 예술가로서 마네의 그림이 잘려지는 모습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서로의 예술세계는 보호해 주고 싶었던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양심 같은 것 아니었을까!



보자르를 졸업했지만 파리의 살롱 문화에는 별로 흥미를 못느낀것 같다.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일곱 번 출품하여 인상주의를 지지했지만  ‘인상주의‘라는 말을 싫어해서 스스로 사실주의 화가 또는 자연주의 화가로 불리길 더 선호했다. 결국 독자적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것을 보면 말이다.

드가는 외롭고 또 고독한 화가이며 매우 개인적이고 은둔적인 생활신조를 지닌 화가같다.  
자신의 작업실에 지인들을 한번도 초대하지 않은걸 보면 말이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간섭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더욱이 예술 창작 활동을 하는 미술가는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더 그런생각이 앞선다. 예술가를 구도자로 착각한것 아닐까싶다.



#드가를 보는 시선 르네상스,바로크와 같이 한 양식이 몇 세기동안  지속대던 시대가 끝나고 , 한 사조가 발생하면 곧바로 그것에 맞대응하는 다음 사조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19세기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관통하는 중심에 ‘드가’의 예술이 있다. 그를 이해하지 않고 그의 고집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사조는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출현시키고, 고갱을 아꼈으며, 쇠라의 작품을 걸 수 있게 용인해준 작가다. ‘메리트 모리조 ’라는 여성 동료 화가를 부모님의 반대, 마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전방위 설득시켜 인상주의 화풍안에 받아 들인 사람도 그다. ‘메리커셋’이란 미국인 여성에게 제 1회 전시를 가능하게 도운 사람 역시 드가다.
“ 내겐 추도사 같은 건 필요 없네.
그저 내 무덤 앞에서 그는 진정으로 데생을 사랑했노라고 말해 주시게”-드가-
드가의 삶을 살펴 보며 요즘처럼 사진 기술이 좋아 온갖 형태의 실험을 쉽고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일일이 눈으로 관찰하고 손으로 그려낸 그의 시간들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수없이 정교하게 그려댔을 별 것 아닌 선 한줄이 고민끝에
그려진 것을 안다. 원하는 동작을 그려내기 위해 무용수들의 각도를 계산하고, 모델의 머리를 4시간 동안 빗겨 주며 새로운 감을 잡아갔을 드가의 오랜 일상을 너무 쉽게 몇 줄 요약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예술이란 이름을 달고
자신을 넘어서려 애썼던 그와 그녀들에게 마음의 박수를 쉼없이 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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