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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광 아래서 작업을 완성하지 않는다. 외광에서는 습작을  한다. 인간의 정신에 주는 시각인 유니티는 스튜디오 안에서만 발견되어진다. 외광 아래서는 오직 즉각적으로 눈에 부딪치는 자연의 현상만을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인상 자체가 내적인 느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스튜디오에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순간적인 인상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속 심상과 융화를 이룬 유니티이다.

-1892, <라르뷔 블뢰(La Revue bleue>지의 폴 그셀(Paul Gsell)과의 인터뷰-

 

 


인상주의 화가들을 일렬로 쭈욱 세워놓으면 가장 형님이시다. 마네, 모네, 르느아르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상주의 작가들과 함께 8차례의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화가다. 도시를 관찰하는 산보자의 시선으로 시대적 변화를 읽고 트렌드를 반영하려 평생 애썼던 화가다. 드라마 같은 서서도 성격이 괴팍하지도 않다. 문안한 매력에 스토리가 약해 다소 저 평가된 면이 있다. 수염까지 길게 기른 그의 자화상을 보고 나면 어쩐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인상주의 내부에서 실제로 그의 역할은 개성 강한 인상파 화가들을 품어주고  다독여주는 포용력 강한 아버지 역할이었다. 고집세고 독한 세잔, 나쁜 놈 콘셉트 고갱, 집요하게 점찍어 대던 쇠라까지 골고루 포용한 친화력 최고인 인상파 중의 인상파 형님이시다.






성공한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라셀 만자노 포미에의 아들로 ,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동부 세인트 토머스섬에의 중심가 샤를 로테 아말리 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미국령에 속하고 버진 아일랜드로 불리는 섬이다.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 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국적인 섬과 그 곳의 주민을 스케치하였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Caracas)로 도망쳐서 2년 동안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 멜비(Fritz Melbye)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4년 8월 세인트토모스섬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열대 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인데, 대담하게 그린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 뒤 전 생애에 걸쳐 그의 미술의 특징이 된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보여 주고 있다. 





 
1855년 가을 파리로 갔으며,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Exposition Universelle de 1855, Paris World's Fair)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풍경화 제작을 시작하고 르 살롱(le Salon) 프랑스 미술가전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가 다녔던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프랑스 국립 미술 학교)나 아카데미 쉬스 (Academie Suisse)에서는 평범한 전통 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껴 코로를 추종하였는데,  코로는 르 살롱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일컫는 것을 허용해 준다. 이 무렵 트렌드는 바르비종파(Barbizon,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활동한 풍경화가의 집단 또는  퐁텐블로 파(School of Fontaine bleau)로 불렸다. 당시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과 사실주의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에도 매력을 느꼈던 시기이다. 피사로의 예술 세계에 밑그림으로 깔린  탄탄한 기본기는 두 화가를 포함한 사실주의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퐁투아즈의 잘래 언덕(Jalsis Hill, Pontoise>,186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잘래힐, 퐁투아즈(Jalais Hill, Pontoise)>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던 시기의  피사로는 퐁투아즈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곳은 파리 근교의 소도시 중에서도 유독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되던 시골 마을이었다. 그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퐁투아즈의 전원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렸다.  비평가들과 동료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프랑스의 대표화가 반열에 오르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겸 문화평론가 에밀 졸라에 의해 "실기와 힘에 대한 진귀한 시"라고 묘사하면서 모범적인 현대적 풍경으로 칭송받았다. "이 작은 계곡, 이 언덕은 영웅적인 단순함과 솔직 담백함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평범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졸라는 피사로가 시골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이런 식으로 썼다.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은듯한 섬세한 표현이 눈에 쏙 들어온다. 한 여름 땡볕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는 양산을 쓴 흰 옷의 여인에게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묻고 싶어지게 한다. 한편 피사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갔는데 , 그곳에서 런던에 와 있던 모네를 만나고 또한 영국의 국민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를 만나게 된다. 그의 빛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에 피사로는 깜짝 놀라고 이후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의 문을 여는데 큰 영향을 받는다.

 

 




 
당시 화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임이 있었다.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서로의 작품에 강하게 비판도 하고 옹호도 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예술가들의 사적인 토론문화와  네트워크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서 피사로는 젊은 화가인 르누아르나 모네와 함께 활동한다. 주로 인상파들의 아지트로 여겨진 카페 게르부아는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있었던 카페로, 살롱 데 르퓌제(낙선전, 1863년 파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를 계기로 마네의 주변에 모이게 된 예술가들이 1866년쯤부터 이 카페에서 매주 1회씩 모임을 가졌다. 그 당시 몽마르트르 주변의 물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싸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젊은이들이나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모임은 근대 미술의 요람이었으나, 1868년부터 쇠퇴하여 2년 뒤에는 없어졌다. 당시 마네파 또는 바티뇰 그룹(The Batignolles Group)이라고 불리었던 이 모임은 , 마네를 중심으로  많은 작가, 평론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인상주의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루브시엔느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한다. 파리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동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파리 교외에 자리를 잡는다.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고집쟁이 화가 세잔이 퐁푸아즈에 와서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전한다.  솔직히 말해 피사로의 그림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주요한 모티브로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 강의 풍경을 사용해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도 해본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뒤랑뤼엘이 그의 그림을 팔아 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맏아들 뤼시앙(Lucians)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쓰곤 하였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그의 노력이 재정적 어려움을 만나 힘이 들었던 시기이다.

 

 

 

 


 
피사로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점에 특색을 보였으나 양식과 기법의 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자신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쇠라와 스스럼없이 교류하며 공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 동료들의 반대에도 그가 인상주의 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마지막 인상주의 미술전에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Jattle)]을 출품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무명 작가였던 쇠라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작품은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작으로 남았다. 요절하기 전 그가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준 것이 바로 피사로였던 셈이다.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퐁투아즈는 파리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피사로가 프랑스로 넘어와 결혼한 후인 1872년부터 고향처럼 살았던 곳이다. 파리 근교라 파리를 왔다 갔다 하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 또한 세잔과 고갱이 자주 피사로의 퐁투아즈의 집 가든에 와서 함께 그림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점묘법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쇠라가 찍은 점처럼 완전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50대의 선배 화가가 후배 화가를 찾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하는 모습이 까미유 피사로의 또 다른 매력이다 비록 임팩트하게 기복 있는 삶을 살지 않았어도 그의 겸손함이 빛나 보이는 장면이다.  자신 스스로가 인상주의였던 피사로가 새로운 인상주의의 등장과 방향에 대해 직접 실험해 보고 고민해 봤던 흔적으로 보인다. 점과 같이 짧게 끊어뜨리는 붓터치로 점묘법의 느낌을 살려 그렸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은 언제 봐도 매력적인 장소다. 우리네  시끌벅적한 시장의 분위기와 닮아 더 정감이 가는 작품이다. 신성한 노동의 힘으로 소리치고 흥정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여인네들 모습에 사람냄새 물씬 풍긴다. 우리를 앞으로 보고 앉은 두 여인 때문에 한 순간에  퐁투아즈 시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얼마냐고 물어봐야만 할 것 같다. 오른쪽으로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여인들에 둘러싸여 흥정을 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할아버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곡물의 주인장이거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구경하는 인물로 보인다. 왼쪽의 할아버지와 중앙의 여인은 피사로의 또 다른 작품에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저 뒤에 가득 메운 시장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시장이 더욱더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밀레를 닮고자 했던 피사로는 밀레가 농경지에서 일하는 농부를 그렸듯이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이런 식으로 그려냈다.

 

 

 


 
쇠라의 점묘화법은 대비되는 색들을 작은 색점들로 촘촘하게 찍어 빛의 움직임을 묘사한 기법인데, 질서정연하게 찍힌 순수색의 작은 점들은 너무 작아서 작품을 감상할 때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단지 화면 전체가 빛으로 아른거리는 효과를 자아낸다. 피사로는 이 기법을 채택하여 5년 동안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은 미술 상인과 수집과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화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이 기법을 포기하고 말았지마, 그 이유는 그가 부딪힌 반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충실하게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토록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제멋대로인 자연의 인상에 충실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Jeanne Holding a Fan], 1874

 





 메네트라는 별명을 가진 피사로의 막내딸 잔-라체은 짧고 병든 삶 후에 8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피사로가 아내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딸의 건강이 서서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그림들은 그의 가장 가슴 아픈 그림들 중 하나이다. 그녀가 죽기 몇 달 전에 그린 이 초상화에서 피사로는 야외에서 놀기보다는 난로 근처에 앉아 있는 그의 딸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 부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 귀함, 셈세함, 그리고 극동 예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덜 인상적인 피사로는 그와 그의 인상파 동료들이 즐겼던 일본 목판지문의 비대칭성을 이상한 각도의 의자와 메네트의 약간 중심에서 벗어난 머리 기울기와 함께 포함하고 있다.

 

 

 

 


1893년 3월 뒤랑뤼엘은 자기의 화랑에서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 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퐁네프의 오후 선샤인(Aternoon Sunshine, Pont Nerf)],1901

 





 카미유 피사로는 1903년에 세상을 떠났고 [퐁네프의 오후 선샤인]은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다. 피사로는 나이가 들면서 불행히도 시력에 문제가 생겨 실내에서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 그림 또한 그의 방에서 그린 훌륭한 예이다. 피사로는 백하점과 그들의 집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퐁네프의 바쁜 순간을 잡아냈다. 그의 빠른 붓놀림이 그 분주한 장면의 에너지를 훌륭하게 포착했다. 세상의 변화를 누구보다 세심하게 관찰한 산보자 피사로답게 근대화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주변풍경들을 아파트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마차 행렬, 증기 기관, 굴뚝 위의 솟아오르는 공장 연기 등 당시 급변하는 사회 현상을 말해주고 있었고 현재의 디지털 문화, AI로 인해 놀라움과 경이로움, 불안함 등이 함께 공존하듯 당시 파리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한눈에 사로잡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의 풍경화를 보면 온유한 성품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감동을 준다.

 

 

 

 

74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모네나 르누아르와 같은 동료 작가들이 이룩한 부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작품 판매가 부진해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피사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 동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고갱, 쇠라, 세잔,고흐, 마티스 같은 후배 작가들을 지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리 미술계에서 푸대접받던 세잔을 퐁투아즈로 초대해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인상주위 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폴 세잔이 " 신과 같이 너그러운 사람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세잔을  보듬어 준 이가 피사로다. 고흐가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와 밝은 색채,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미술을 지도한 사람도 피사로였다. 그에게 정신과 의사였던 가셰(Paul Gachet) 박사를 소개해 준 것도 그였다. 개성 강한 인상파 화가들을 다독이고 후배들을 적극적으로 키워 전시회 참여를 독려하고 이로 인해 인상주의 미술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던 이가 바로 까미유 피사로다. 피사로가 도움을 주었던 다섯 명의 작가들은 모두 20세기 현대미술을 이끈 거장들로 성장했다. 고갱, 고흐, 세잔, 쇠라는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20세기 현대 미술을 견인한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피사로 자신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젊은 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점은 되새겨볼 만하다. 나이와 출신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파리 미술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사로의 튀지 않은 인생에 그의 작품까지 매력 없는 취급을 한다면 분명 잘못된 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성품을 닮은 풍경화와 동료, 후배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배우고 적용하는 삶을 살았던 피사로의 겸손한 시선에 엄지 척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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