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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를 타고 있는 나를 향해 3-4명의 남자 아이들이  '수련장(참고서 이름)' 이라며 놀린 기억이 있다. 별로 나쁜 별명은 아닌데 숫기없던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은 그저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미술시간에 알게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는 순간 움츠러 있던 내 마음 한 칸이 펴지는 경험을 했다. 웬지 고상해진 느낌, 뭔가 세련되진 느낌 그래서 내 존재가 괜찮은 느낌이 들었던 거다. 모네의 그림덕분에  내 인생을 다리미로 편 느낌을 떠올리며 그의 삶을 들여다볼까한다.

 

 

 

 

까치 The Magpie,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68-1869. 파리 오르세 미술관 Musee d'Orsay, Paris 소장,  왼쪽 대문에 외로운 까치 한 마리가 앉아있는 눈 내린 풍경, 그야말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그림이다. 이 시절에 모네는 눈이 내린 풍경을 자주 그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네의 [까치] 그림이다. 온통 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있다.  생명체 까치 한마리가 걸쳐둔 대문에 앉아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음미한다고 할까? 시각적으로 추운데 촉각은 왠지 따뜻하다.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길게 늘어선 그림자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온기를 느끼게한다. 내 오랜 유년의 기억속에 할머니댁에 가면 이런 분위기가 연출된 적 있다. 그때 할머니는 싸리나무 빗자루로 눈을 치우고 계셨다. 그 비질소리가 춥다고 웅크리고 있던 나를 문 밖으로  불러냈다. 사방으로 포위된 눈 울타리에 둘러쌓여 눈이 부시게 하얀 눈 덩이와 등을 훑고 간 한 줄기 빛이 따뜻하게 나를 통과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춥지만 따뜻했던  어린시절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잠시 머물다 올 수 있어  나는 모네의 이 그림이 참  좋다. 

 


 

인상파 등장 배경

 

 

 

인상파가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당시 그때 그때 물감을 만들어 쓰다보니 아틀리에 안에서만 그려지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튜브 물감이 발명 된 후 화가들은 이젤과 작아진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즈음 르네상스 시절의 후원가들처럼 화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술가들을 다독이고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주며 작가들의 예술활동을 도우면서 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판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진행했던 인물들이다. 일부 귀족층에게 판매하는 일련의 과정에 한계를 느낀다. 그러던중 그들은 중산층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중산층들을 예술로 가까이 끌어오기 위해 비평가들과 함께  예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려 노력했다. 1년에 딱 한 번뿐인 살롱전에 작품을 내기위해 기존의 작가들은 약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많은 작품들을 팔고 싶어했던 화상들은 빠른 회화작업, 독창성 있는 새로운 미술의 주류가 필요했고 집에 걸 수 있는 작은 그림이 필요했다. 이 모든 기준들이 인상파와 맞아 떨어졌다.

 


 
 '인상파'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미완성 작품이며 이것은 마치 인상과 같다. "

 

를루아라는 비평가가 클로드 모네[인상, 해돋이(1872)] 작품에 쏟아 부은  비판이다.  인상파 화가들 대부분이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가들이었다.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를 받은 그들은 나폴레옹 3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그런 그들을 위해 낙선전을 개최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다. 일명 거절당한 사람들의 전시회인 셈이다.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이들에대해 부정적이었다. 프랑스 화단의 이단아로 취급했고 임산부가 보기에 적절치 않다며 전시를 조롱하는 삽화를 싣기도 했다. 그래도 '익명의 화가들'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그들은 1874-1886 총 8회 전시를  개최한다. 지금으로 치면 '핵인싸'였던 그들은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에 모여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끌로드 모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모네. 동료 화가들이 밖에서 스케치 후, 작업실에서 마무리하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밖에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던 모네다. 모네는 고전적인 미술 시스템 안에서 주어졌던 색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하늘 색깔, 나무 색깔, 강의 색깔, 심지어 그림자 색깔까지 직접 봤을 때 시각, 햇빛, 날씨등에  따라서 달라졌던 풍경의 모습을 경험한다. 그는 빛을 작품 안으로 옮겨오기 위해 노력했으며 빨리 캐치해야 하므로 붓칠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래도 다양한 풍경들을 여러 색으로 표현하고 그림자에게까지 색을 입혀 풍부한 색을 만들어냈다. 

 

 

 

 

모네는 약 20년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가난한 화가로 지내왔다.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던 거장의 30-40대를 거치며 모네는 파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한다. 그가 시련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빛! 그 빛에 대한 연구만은 멈추지 않은 모네! 그런 모네가 그림에만 열중했다는 증거가 동료들의 그림속에  남아있다.

 

 

 

[아르장퇴유의 정원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스튜디오 보트에서 작업하는 모네]

[숲 언저리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온 종일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던 모네는 그야말로 한 우물만 파는 빛의 화가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흐름에따라 빛의 변화하고 풍경의 색과 형태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빛을 연구해왔던 모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그것은 빛과 풍경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연작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같은 풍경을 봄,여름,가을,겨울, 새벽, 아침, 점심,저녁, 빛의 변화에 따라 매 순간을 포착할 계획을 세운다. 한 가지 대상을 가지고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은 그당시 획기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그 첫 번째 실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집 근처 '건초 더미'였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표현해 같은 대상이지만 각각 다른 매력을 지닌 [건초 더미] 연작이 탄생한다. 심지어 작품에 전부 다른 제목을 붙이기까지한다.

 

 

 

 

[건초 더미] 연작은 성공했을까? 

 

 

 

 

1891년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건초 더미]는 작품당 3천-4천 프랑으로 팔리며 평균 3백-4백 프랑에 거래된 이전 그림에 비해 무려 열 배가 오른 그림값으로 팔렸다. 드디어 모네에게 쨍하고 해뜰날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모네의 의도를 깨닫고 그의 무모할 것같은 시도를 인정한 것인지 대중뿐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우호적이었다. 모네에게 이어진 극찬세례로 가난한 화가에서 별안간 스타 화가로 발돋움한 시기이다. 모네는 살고있는 지베르니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도시 지베르니는 그림의 소재가 다양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아무렇게나  쌓인 논밭의 '노적가리'는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모네는  하루 일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노적가리의 색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황당하게도 농부들이 노적가리를 다 실어가 버려 그림을 그릴 대상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난처한 상황도 있었다. 모네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찾아 나섰고 강변의 '포플러 나무'를 소재로 연작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 소재라는 모네의생각은 예상과 빗나가고 어느 날 강변 목재업자들이 포플러 나무를 베어버린다. 포플러 나무가 베어진 후 충격에 빠진 모네는 움직이지 않는 소재를 또 다시 찾아야 했다. 그때 찾은 것이 바로 '루앙 대성당' 이다. 

 

 

 

[푸른 안개에 싸인 루앙 성당,1894]

[아침의 루앙 성당,1894]

[햇빛 아래 루앙 성당,1894]

[석양의 루앙 성당,1894]

[흐린날의 루앙 성당,1984]

 

 

 

모네에게도 어려운 과제였던 연작 [루앙 성당]은 약 30점이 그려진다. 

 

 

 

[생 라자르 역,1877] 증기와 햇빛이 어우러진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직접 기관사를 찾아가 "나 화가인데 기차를 좀 멈춰달라." 하고 요구하고 실제로 손님들이 내리기도 했다는 얘길 들으며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지금의 모네를 만든 일생일대의 선택, 그것은 바로 지베르니에 정원이 딸린 저택을 구매한 것이다.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모네는 농가 주택을 사 작업실로 사용하던  중 주변의 땅을 구입하며 점차 넓혀간 정원에 모네는 자신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에 물을 대 연못으로 재탄생 시킨다. 색감,온도 등 미묘한 표현을 중요시했던 모네는 자신의 그림을 실험할 야외 연구실을 하나 만든 셈이다. 자신의 진정한 걸작은 정원이라 할 만큼 정원에 대한 애정과 그 자부심은 최고였다. 이 시기 모네가 매료된 또 다른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수련] 이다. '수련'은 물과 빛의 반사, 나뭇잎들과의 조화 덕분에 모네에게 최고의 영감을 준 존재다. 초기에는 수련의 풍경을 넓게 담아냈지만 점점 수련에만 집중하며 대담한 구도와 필체를 꽃피운 [수련] 직접 가꾼 정원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데 몰두한 모네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나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던 이때  모네에게 예기치 못한 악재가 한꺼번에 닥친다. 오랜 시간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의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썬텐 크림을 바르고 썬글라스를 써도 이렇게 장시간 오래 노출된 모네의 눈이 성하다면 더 이상할 노릇이다.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다. 백내장은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시력이 저하되는 질병이다.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하며, 발병 초기에는 특별한 이상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한다. 당시에 백내장 수술의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은 데다 관찰을 해야하는 화가에겐 더욱 절망적인 질병임은 사실이다.

 

 

 

 

 

[죽음의 침대 위 까미유,1879]

 

 

 

 

 투병끝에 죽음에 이른 첫 번째 부인 까미유의 모습이다. 죽은 영혼이 빠져나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이다. 서늘한 공기와 빛,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합쳐진 보기드문 작품이다. 저런 상황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놀랍다. 철저한 반복에 의한 직업의식 아니면 가능했을까? 모네의 인생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여인은 엘리스 오슈데다. 그녀는 모네의 그림을 후원했던 사람의 아내다. 경제 불황으로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 옮겨 다니다  모네의 집에 함께 살게된다. 아픈 카미유의 생활를 도왔던 엘리스는 잠적을 감춘 남편이 죽고나서 모네와 재혼한다. 까미유의 아이 2, 엘리스의 아이 6 총 8명의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외벌이 모네는 그래서 작품가격에 더 예민했는 지 모르겠다. 인간적으로 '연작'을 해서 빨리 팔지 않으면 집값과 아이들 부양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 엘리스 마저 잃고 까미유의 큰 아들까지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뒤이어 1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조국 전쟁의 공포와 상실의 아픔 한 가운데서 모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련(water Lilies),1915-1926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진흙 속에 핀 수련처럼 자신만의 꽃을 피워낸 화가 모네 ,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중대한 결심을 한다.  초대형[수련]을 그리기로 마음 먹는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말이다.  [수련]으로 일생일대의 대작을 만들겠노라 다짐을 한다. 일흔 살이 넘는 연로한 나이에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매진한 초대형[수련]입니다. 모네는 왜 이런 악조건 속에서 초대형 프로젝트를 감행했을까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모네는 자신의 모든 삶을 태워 대작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후 9번 운명 교향곡을 작곡한 것처럼요. 모네에게 [수련 프로젝트]가 절망의 탈출구였던 셈이죠. 빛을 예민하게 살펴야했던 그의 작업방식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시력에 무리를 준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69세에 처음 시력에 이상을 느낀 후로 10년 사이 색과 형체마저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네는 어떻게 끝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시력 약화로 물리적 한계는 있었지만 사물의 색채,형태는 기억과 경험으로 재현이 가능했다고해요. 백내장 진단 이후 시각적 심상 표현을 심리적 심상 표현으로 그려냅니다.  실제로 백내장이 악화된 1910년대 후반~임종 직전의 수련 그림은 매직아이를 보는 수준으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선의 모임으로만 보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수련]이 주는 감동은 모네의 처절한 노력과 고민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모네는 [수련]시리즈를 불멸의 작품으로 삼고 1818년 1차 세계대전 직후 평화를 기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오렌지 나무를 기르던 왕실의 온실을 재설계해 모네만의 모네만을 위한 미술관을 건립합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네의 [수련] 중 총 8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높이 2미터 길이는 약 100미터로 8점의 그림을 이어 붙여 놓았죠. 엄청난 크기로 관객들을 압도합니다. 덕분에 인상파의 시스티나라는 별명을 얻은 오랑주리 미술관.  그만큼 대단한 모네의 [수련]을 한껏 감상할 수 있는 곳! 

약 8년간 계속된 모네의 초대형 [수련]프로젝트!

사람에게 상처받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모네의 [수련]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희망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평생 빛을 따라다닌 빛의 화가 모네의 집념어린 영혼과 마주칠 때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툴툴 털고 웃으며 일어설  용기를 얻지 않을까.

 

 

"이곳에 들어가서는 다른 어떤 생각을 하지 말고 감상에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의 눈으로 돌아와서 내 망막을 통해서 지켜 본 이 현실의 세상들을 눈으로 그린 화가 모네.
 노화가의 투혼을 편안하게 놓여진 의자에 앉아 실컷 느끼고 감상해 볼 수 있어 이 세대는 축복인지 모르겠다.

 



" 아무리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빛은 곧 색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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