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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을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이 묘사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들 중 하나다.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난 표현을 선보였으며 꽃, 귀여운 어린이들, 그리고 웃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찬 야외 풍경그리기를 좋아했던 화가 르누아르다.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이왕이면 긍정적 태도를 갖고 사는 사람에게 한표 던지고 싶다. 현실은 비록 아수라장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의 세계만큼은 웃음과 행복한 일상을  듬뿍 담아 표현하고 싶었던 화가 르누아르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르누아르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일곱 자식 가운데서 여섯째다. 아버지 레오나르 르누아르는 석공이었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메를레 는 여직공이였다. 가난한 집에 흥부네 식구들 저리가라할 정도로 많은 아이들을  부양하느라  부모는 허리가 휘고 자식들은 늘 배가 고프다.  그런  가족들을 데리고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질까싶어 아버지는 리모주를 떠나 파리로 이사한다.  자신이 낳고 자란 공간을 떠나는 순간 고생은 불보듯 훤하고 산업화가 막 시작된 파리 도시는 르느와르 아버지같은 마음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이들로 가득찼다. 오히려 절대 빈곤층으로 내려앉는 그들의 삶은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난이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했을까? 13살 때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방 레비 프레르 와 콩파니에서 조각 장식을 배우는 견습생활을 시작한다. 주경야독의 시간이 르느와르에게 시작되었다.  낮에는 일해서 푼돈 모으고, 저녁에는 장식 예술과 소묘학교 야학반 수업에 드나들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하나로 날마다 직장에서 틈만나면 파리 루브르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꿈을 보러가는 시간! 주머니에 벌어놓은 돈은 몇 푼 없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을 르느와르를 생각해본다. 박물관에서 그는  18세기, 19세기 거장들의 작품 앞에 서서 자신의 그림이 그들과 나란히 걸리는 상상을 해본다.  당시 도기 공장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그림을 프린트로 인쇄해서 수행하게 되자 자동으로 실직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닥치는대로 간판 그림도 그리고 점포 차양에 그림도 그리고 부채, 가구에 그림도 그리며 생활비를 벌었다. 한 손에 꿈을 다른 한 손에 현실을 살아내며 본인이 써 볼 수 있는 방법은 다 쓰면서 꿈을 삶에 끼워넣기한다. 꿈에게 미안하지 않기위해서 말이다.

마침내 알음알음 글레르 선생 아뜨리에 들어가 정식 그림 교습을 받게된다. 열심히 살아 낸 시간 덕분에 화실에서 그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 알프레드 시슬레 같은 화실 동기생들과의 만남이다. 특히 크로드 모네와 함께 파리 외곽의' 라 그르누엘리에르'의 물가에서 스케치를 자주 했다고한다. 두 사람은 하루의 다양한 시간에 나무와 물에 비치는 빛과 움직임의 영향을 포착하기 위해 느슨한 붓질을 사용하는 등 인상주의를 불러일으킬 여러 이론과 기법 실천을 동시에 전개했다. 그 와중에 오지랖 넓은 프레데리크

바지유덕에 세잔과 피사로도 소개 받는다.

 

 

 

 

 

 

인상주의에 첫발을 내딛다.

 

 

 

 

 

 

꽤 유명한 장소이자 당대의 가이드북에 조금 '서민적'인 곳이라고 나와있던 그르누예르(크루아시쉬르센 섬의 해수욕장)에서 모네와 함께 머물었던 경험은 르누아르의 화가  인생에 있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르누아르는 그곳에서 진정한 '야외 사생'을 했으며 이 야외에서의 작업은 그의 팔레트를 바꾸며 붓터치를 세부화했다.  르느아르는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것을 이해했으며, 더 이상 그림자를 표현하는 데에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시기가 시작된다. 모네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선호한 반면 르누아르는 인물화를 선호했다. 그르누예르의 같은 풍경을 두고, 르느아르는 인물들의 중요성을 더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한 근접 시점을 받아들였다. 

 

 

 

 

 

 

 

 

 

관람석 La Loge(1874),33살, 영국 런던에 있는 프랑스 인상파 수집 전문 갤러리 코톨드 미술 연구원 미술관(Courtauld Institute Gallery, Londres)

 

 

 

 

 

 

우아한 분위기의 커플이 묘사된 이 '관람석(La Loge)' 그림은 파리의 현대 생활에 대한 찬사로, 그야말로 무명의 르누아르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그림이다.  같은 해 첫 번째로 열렸던 파리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가장 눈부신 작품으로 지목되면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꽉 찬 느낌의 이 그림 속에는 오페라부터 캉캉 춤까지 구성된 버라이어티 쇼를 공연하는 극장의 흥겨운 모습과 파리의 문화 생활과 삶의 기쁨이 잘 녹아 있다. 개인적으로 오페라 스코프를 내리고 있는 그녀의 하얀 피부와 푸른 눈, 꽃 장식, 진주 장식 등 화려하고 세련된 그녀의 모습에 먼저 눈길이 갔다. 당시 여인들의 패션 트랜드를 살짝 엿보기 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에 초점을 맞추며 극장을 묘사하고 있지만, 입고 있는 복장과 분위기는 파리의 삶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르누아르는 1877년 몽마르트르에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Le Moulin de la Galette),1876]라는 자신의 걸작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인상파의 후원가이자 동료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사갔다. 이 야심에 찬 그림은 1870년대 르누아르가 추구한 양식의 특징을 갖고있다. 부드럽고 화사한 붓터치, 화사한 그림자, 검은색 미사용, 질감의 효과, 잎들과 구름을 가로지르며 스며드는 빛의 유희, 파리 대중들의 생활 풍경과 자기 주변의 모델들(몽마르트르의 "보엠"들과 친구들)에서 따온 풍취가 바로 그 특징이다. 하지만 에너지 넘치고 행복해 보이는 파리지앵들의 모습뒤에 슬픈 역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간의 전쟁(1870,7,19-1871,5,10) 이 있었다. 일명 보불전쟁이라고 하는데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제2제국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제2제국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세워졌으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연방 내 모든 회원국을 통합해서 독일 제국을 세웠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르느와르는 예술적 동료 바지유(1841-1870)를  이 전쟁에서 잃었다. 전쟁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강화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땅 3개 현이 독일에게 넘어가고 정신 못차린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이 와중에 혁명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이 그림의 장소 '물랭 드 갈레트'에서 지도부가 정부군가 싸웠으며 엄청난 수의 파리 시민군들이 이곳에서 정부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피로 얼룩진 상처의 현장에 르느와르는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마지막 수업 (The Last Lesson)]이라는 작품이 있다. 1871년 프로이센(독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프로이센(독일)에 땅이 귀속된 후 학교 수업에서 프랑스어를 금지하자 한 교사가 눈물을 머금고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ViVE LA FRANCE !"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슬픈 역사를 경험한 공통분모가 있어서일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머릿속에 이 제목만큼은 기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책을 공부했던 학창시절에도 나랏말의 소중함을 마음에 느꼈던 것같다.

 

 

 

 

 

 

 

 

 

 

 

뱃 놀이 일행의 오찬(Lunch of the Boating Party(1880), 40살 무렵

 

 

 

 

 

 

 

햇살이 눈부신 여름, 사토섬 선상에서 뱃놀이하면서 식사를 즐기는 행복한 남녀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초상화와 행복한 일상 생활의 단면이 잘 맞아 떨어진 작품이다.  세느강 위의 메종 푸르네즈 레스토랑 Maison Fournaise restaurant 의 배위(선상) 발코니다. 때마침 새로운 현대사회로 가는 파리의 풍속도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한가하게 식사를 한 후 술을 즐기는 분위기를 잘 포착하고있으며, 다양한 인물 표정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나도 살짝 엿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보트위에 점심식사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 시절 르느와르의 친구들 모습이다. 앞 줄 오른쪽에 밀짚모자에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칼리옷'이 의자를 돌리고 앉아 여배우 '에렌 앙들레'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룹을 함께 초대한 백작 바르비에르는 검정 모자를 쓴 다른 남자와 돌아서서 대화하고 있다. 그림이 쏠려있는 왼쪽 모서리에 꽃모자를 쓰고 강아지를 안고 앉아있는 여성, 알린 샤리고 (Aline Charigot)는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에는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지만, 훗날 그녀는 르느와르의 아내가 된다. 그 옆에 밀짚모자를 쓰고 서있는 남자는 아마도 르누아르 자신인 것 같다. 문화는 다르지만 어디선가 봄직한 이 장면을 통해 차려놓은 음식 몇 가지 없이도 이야기거리 풍성한 모든이의 젊은 날에 어느 하루를 지켜본 느낌이라 행복했던 그림이었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우울이 너무 많은데 또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는 여성을 좋아해.

여자들은 아무것도 의심하려 들지 않아.

그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은 정말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변하지."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과 일상을 그린 작품을 살펴보자.

 

 

 

 

 

 

[샤를르와 주르주 뒤랑 뤼엘],1882, 뒤랑-뤼엘, 파리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 뤼엘], 1882, 클락 미술관, 미국

[시골 무도회], 1883,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오랑주리 미술관,파리

[피아노 치는 이본느와 크리스틴느 르롤], 1897,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가브리엘, 장르누아르와 어린 여자아이],1895-1896, 베르넴-젼느 갤러리, 파리

[알제리 여인 차림의 가브리엘], 1905, 레온느 세를랭 컬렉션, 파리

[광대 복장을 한 코코], 1909,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Nude',(1910),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국립미술관, 69세

 

 

 

 

 

 

 

르느아르는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의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나는 여인의 엉덩이를 두드리듯 나의 누드화를 완성시킨다."

 

 

하고 말할정도다. 그의 누드화의 주요 색조는 붉은색으로서 그는 건강한 살결의 색을 표현 하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Belgrade   버전 '누드'의 모델 가브리엘라 (Gabriela) 르느와르 미술 인생 하반기에 중요한 뮤즈로 등장한다. 르느아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녀는 아이들의 유모로 르느아르와 가족같이 지내며 그의 모델이 된다. 남프랑스 르누아르의 작업실, 레 코레트에서 모델 겸 하녀 겸 가족으로 함께 지내며 많은 작품에 등장하며 르느아르의 예술 작업에 생기를 부여한다. 말년에 심한 관절염으로 손목이 마비된 그는  붓을 손목에 묶어 그림을 그렸다고한다. 그래서일까? 안타깝게도 르누아르의 후기 누드화를 보면 이런 필력의 감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초기 포동포동하고 건강해 보였던 여인의 누드가 부은 듯 뚱뚱하게 과장되어 있고 색채도 많이 망가져있다.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1875-1876, 오르세 미술관, 파리

[풍경 속 여인의 누드], 1883,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몸을 닦는 여인], 1912-1914,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쿠션에 기댄 누드, 대형누드],1907, 오르세 미술관, 파리

 

 

 

 

 

말년에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에서 잠깐 떠나 장식미술과 모던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당시 알제리와 이탈리아 및 프랑스 남부 지방을 몇차례 여행한 것이 그의 예술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친것 같다. 특히 라파엘의 그림에서 발견한 고전주의의 매력과 부드러운 채색의 표현력에 심취한다. 관절염이 심해진 르누아르를 자주 방문했던 앙리 마티스는  당연히 그의 영향를 받았을 것이다. 인상주의의 기본 원칙에 도전하며 실험과 혁신의 길을 택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인상주의의 테크닉을 완전히 버린것은 아니어서 그 기본기 위에 클래식하고 장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가 후대에 그린 수많은 여성 누드와 초상화, 인물화들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 가는 젊은 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준다.  파브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같은 후배 화가들에게 말이다. 르느와르의 미술은 19세기 후반 미술과 20세기 초 모더니즘 사이의 간격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준 존재감 있는 화가로 기억해 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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