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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사이에 여성이 끼여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요즘은 동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인정을 받고 있지만 여성 작가들이 등장해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대두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구 여성 작가들이 등장한다. '미국 인상주의의 어머니'로 불리는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와 같은 인물이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접한 19세기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왜 이렇게 호감을  사게 되었는지 잠깐 살펴보자. 첫째, 인상주의 화가는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는 것이다. 둘째, 햇살 아래 수시로 변화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그림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풍경, 나무, 집뿐 아니라 거리풍경과 철도역 장면에까지 골고루 확대 적용한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그림을 통해 그 시대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던 것 같다.  모유수유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 등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 일상의 일들이 그녀 특유의 따뜻한 붓터치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의 그림 대부분에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카세트가 아이 엄마였겠거니 생각하지만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독신으로 산 이유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전문화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의 길을 선택한 대신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 그리고 자기 성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민 중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을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에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적어도 그다지 많은 제제와 편견을 받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매리 카사트(Mary Cassatt,1844-1926)는 현재의 피츠버그인 펜실베니아의 알레게니 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과 좋은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로봇 심슨 카사트(Rovert Simpson Cassatt)로 부동산 중개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캐서린 케소 존스턴(Katherine Kelso Johnston)의 집안은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메리의 엄마 캐서린 존스턴은 미국 상류 사회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학위도 있고 교양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였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7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2명은 어린 아기일 때 죽었다. 이후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처음은 펜실베이니아의 랜캐스터로 이사를 갔으나 이후 필라델피아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6살이 되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매리 카사트는 여행을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유럽에서 5년 이상을 지내면서 런던과 파리, 베를린과 같은 여러 수도들을 돌아다녔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고 처음으로 미술과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글로벌 교육을 어릴 적부터 받은 인재상이다.  현대에 태어나도 이런 조건의 부모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울트라급 금수저인셈이다. 우선 경제적 뒷받침을 해준 그녀의 아버지와 딸의 꿈을 믿고 지지해 준 어머니의 역할에 감사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짝 부럽기도 했다.  재능은 있으나 경제적 문제로 다른 길을 선택하거나, 선택한 길을 고지식하게 걸어가도 경제적 이유로 무너지는 지인들을 삶 속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1855년 Paris World's Fair에서 처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화가 앵그르, 외젠 들라크루아, 코로 그리고 쿠르베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 그녀가 맛 본 고전주의 미술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충격을 받고  평생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생생하게 보았으니 그 여운은 상당했으리라 추측된다. 매리 카사트의 집안은 화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상당히 반대했으나, 그녀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5살이 되던 해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미술을 한다는 것이 제약이 많았다. 실제로 학원의 20%는 여학생이었는데 대다수는 사교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하나의 기술로서 그림을 배웠으며 매리카사트처럼 전문적으로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공부하는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그야말로 남편 잘 만나기 위한 재테크개념 아니었을까 싶다. 신부수업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여전히 그림을 공부했다. 교사들의 느린 교육 방식과, 여학생에 관해 생색내는 듯한 남학생들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옛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마음의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훗날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학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여학생들은 그림을 배울 때 필수조건인 누드모델을 쓸 수도 없었다.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모델을 그리며 연구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이 간다.

 

 

 

 

 

 

유럽으로

 

 

 

 

 

1866년 그의 어머니와 가족의 친구들을 보호자로 삼아 파리로 이사했다. 에꼴데 보자르는 아직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리 카사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화가들에게 개인적으로 교습을 받기로 한다. 그녀는 장 레온 제롬(Jean-Leon Gerome)에게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그는 극 사실적인 작풍과 테크닉, 이국적인 소재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모작하여 그의 예술적인 감각도 키워나갔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이 예술가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장소로 최고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에드워드 마네가 드가를 만나 인상주의 뼈대를 세운 시작점도 이곳이었다. 그녀는 작품 모작을 할 때 필요했던 '모작 허가증'을 받는다. 당시 "모작가"들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증명서로, 모작가들 중 대부분은 수입이 적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박물관을 가득 메우며 모작한 작품을 팔았다. 남녀 간 교육의 불평등으로 인해  재주 있는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내몰리고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녹록지 않았을 그 시대 여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기도 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젊은 천재들의 발걸음이 머물렀을 이 공간이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1866년이 끝날 즈음, 그녀는  찰스 채플린 (Charles Chaplin)이 가르치던  그림 교실에 합류하게 된다. 1868년 또 다른 화가 토마스 쿠쳐(Thomas Couture)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대다수가 로맨틱하거나 도시적이었다. 예를 들면 야외로 스케치 수업을 나갈 때 학생들은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소재로는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곤 했다. 이 즈음 프랑스의 미술은 점점 작풍이 변화해 가는 단계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쿠르베와 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거부하는 풍조가 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인상파 양식의 기초를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매리 카사트는 계속해서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공부했으며 10여 년간 여러 좌절을 겪으면서도 파리 살롱에 꾸준히 그림을 제출했다. 1870년대 초 그녀는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벨라스케스, 루벤스, 코르레지오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는다.

 

 

 

 

 

 

 

관람석에서 (in the Loge,1878), 미국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파리의 유명한 코미디 프랑세즈 극장 특별관람석에 앉은 한 여성이 오페라 스코프로 무대를 바라보는 낮 공연 모습이다. 검은 드레스 정장을 입은 그녀와 박스 시트 관람석의 빨간색 벨벳과 금색 장식이 그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고, 누군가 멀리에서 오페라 스코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성 관람객 모습이 이 그림의 숨은 재미 같다. 드가와 친해지며 그와 함께 발레 공연이나 오페라 공연 장소에서  여러 인물들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아주 노골적으로 자세까지 확 틀어 쳐다보는 늙은 남성의 시선이 지금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 속물이라고 하기에 나 역시 젊고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눈 돌아가듯이 그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장면쯤으로 봐줄까 한다. 대신 옆에 않아 계시는 마누라한테 티 내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1878년 카사트가 보스턴에서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이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대부분 남성들의 유사한 그림의 힘을 능가한다.'라는 글을 써서 그녀를 칭찬했다. 여성이라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귀환

 

 

 

 

 

 

1870년 늦여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알투나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직업에 대해 반대했으며 그의 생활비를 대주기는 했으나 미술용품에 관련한 비용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부동산업자 아버지가 딸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측에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활비는 대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적정선에서 타협하신 선택 같다. 그녀는 뉴욕 갤러리에 그의 작품 두 개를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71년 7월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개인 화실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초상화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6주 동안 붓을 한 번도 들지 않았으며 유렵으로 돌아갈 때까지 붓을 다시 들 생각조차 없다. 나는 이다음 가을에 어서 서쪽으로 가고 싶고 일자리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주변환경들에 고민하는 그녀를 본다. 게다가 1871년 일어났던 시카고 대 화제사건 (Great Chicago Fire)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모두 잃게 된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들은 피츠버그의 대주교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카사트에게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코레지오의 작품들을 모작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일의 대가로 받는 비용은 그의 여행비와 생화비로 충당한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매우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지금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예술가 가문 출신인 에밀리 사테인(Emily Sartain)과 함께 유럽으로 다시 돌아간다.

1874년까지 카사트는 파리의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3년 후, 그녀의 부모와 그녀의 여동생 리디아가 프랑스에서 합류했다.

여러 차례 출품했던 작품이 남성 중심 살롱에 의해 거절당했고,  그녀의 출품작 중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는 파리의 공식 미술계의 정치와 전통적인 취향을 혐오하게 되었다. 마침 화가 에드거 드가(Edgar Degas)가 그녀를 초대하여 인상파 화가로 알려진 독립 예술가 그룹을 소개하고 합류를 권유하자 그녀는 기뻤다. 그들의 그림옆에 나란히 얼굴이라도 내밀수 있어서 말이다. 특히 드가의 예술과 생각은 그녀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카새트는 인상파 운동에 있어 상당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직접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밖에도 미국에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카새트는 그녀의 형제인 알렉산더(Alexander)에게 마네, 모네, 모리조, 르느아르, 드가, 피사로의 작품을 구매토록 설득하여, 그 후 알렉산더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수집가가 되었다. 카새트는 드가를 존경하였지만, 화풍에 있어서는 드가의 화풍을 맹목적으로 모방을 하지 않고 자신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다른 인상파 화가의 영향을 받아 주위의 일상적인 삶을 표현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고, 인물들의 동작의 중요성과 함께 직관의 감각을 중요시하였다. 

 

 

 

 

 

 

 

 

편지( The Letter,1890-91) 종이 위에 동판 애쿼틴트와 드라이포인트 요판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 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1890년  4월, 카사트도 당시에 새로운 화풍을 찾던 다른 인상파 화가들처럼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에서 열린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 전시회에 참석했다. 생전 못 보던 왜색 색판화 전시를 인상 깊게 본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삶을 시리즈 연작으로  목판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연속 10 작품이나 도전했다. 그 시리즈들은 아이들 씻기고, 화장실에 있는 여성들, 차를 마시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한 여성이 책상 앞에서 방금 도착한 편지를 뜯는지, 밀봉하는지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쩐지 내 어설픈 행동양식 하나를 살짝 ~들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림 속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 역시 침으로 편지를 부쳐서 말이다. 구성은 벽지와 여성의 옷 무늬, 편지와 봉투의 종이의 균형이 보는 사람을 그림 속 가까이 다가오게 만든다. 전통적인 일본 목판화 기법 영향 때문인지 일상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에 친근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인상파

 

 

 

 

 

 

1880년대 이후 카사트는 특히 엄마와 아이들,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졌다. 당시에 투표권과 사회적 평등권, 심지어 고등교육과 복장 개혁에 이르기까지 신여성이 등장하던 계몽적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1대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지금 시대에 보더라도 꽤나 과격한 주장을 했던 나혜석(1896-1948) 화가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녀는  일본 유학 당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계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투고하는 등 당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녀 사후  여러 형태의 비판이 존재하지만 먼저 세월을 앞서간 그녀의 인간을 향한 진심만큼은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엄마의 뜨개질(Young Mother Sewing,19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언제 보아도 웃게 하는 그림이다. 아이의 볼그레한 볼과 통통한 손가락 그리고 손뜨개질하는 젊은 엄마를 보며 잠시 눈을 감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겨울이었고 굵은 대바늘 두 개로 식구들 입힐 조끼를 뜨고 계셨던 엄마 생각이 난다. 젊은 엄마들이 5-6명 이웃집 누군가의 안방에 모여 수다를 떨며 대바느질 하는 모습 말이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에 손은 재빨리 오르락 내리락하며 쉴 새 없이 코를 뜬다. 따뜻한 뜨개실의 질감과 열심히 셋바람 맞고 깨지고 있을 남편, 자식들의 홑겹의 시간을 당신들이 손수 짜놓은 옷들을 입히고 목도리를 두르고 손에 껴주며 차가운 세상을  재미난 놀이터로 만들어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제는 이런 느림의 시간이 별 것 아닌 취급을 받지만 그녀들의 마음자리가 한기 드는 겨울밤이면 맥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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