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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예술감각이군. 모리조의 작품보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살린 우아한 그림을 볼 수 없을 걸세."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 당시 모리조의 그림을 평가한 정치가, 미술 평론가 앙투안 카스타냐리의 말 중-

 

 

 

19세기 남성 중심 화가들이 모여서 예술에 관해 토론을 벌이던 주말 모임에 여성 화가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경직된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주인공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1841-1895)는 그런 면에서 복이 참 많은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프랑스 부르주아에서 유명한 로코코 화가 장 호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의 위대한 증손녀로 태어났다. 23세의 나이로 파리 살롱(Salon de Paris)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스승인 조셉 기하드( Joseph Guichard)로 부터 대단한 화가가 될 거라는 칭찬도 받았다. 집을 살롱으로 꾸며 인상파 화가들을 불로 모았고 드가의 권유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여성 화가로 유일하게 참여한다. 이 말은 곧 현대 예술의 태동을 알린 인상파 첫 전시회에 나란히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는 프랑스의 화가로,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에드가 드가(Edgar Degas), 폴 세잔(Paul Cezanne),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및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sley)를 포함한 인상파 그룹의 일원이다. 남성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인물이고 여정이 남다른 여성화가이다. 또한 카밀 코롯(1796-1875)의 제자이자 마네의 뮤즈였던 여인이다. 마네의 모델로 제자로 르느아르,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화가로 성장한다. 아마도 여성화가이 전에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에 실력까지 받쳐주니 함께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여성이 그림을 그리면 작품을 보기 전부터 거부하는 현상이 강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파리 살롱전에 6번이나 계속 당선된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주로 그녀의 그림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사생활, 정원에 대한 취향, 그리고 여성들이 한 가정적인 일들을 묘사하고 표현해 냈다. 

 

 

1874년 처음 시작된 인상주의 전시는 1886년까지 여덟 번 개최되었는데, 모리조는 딸 쥴리(Julie Manet)가 태어난 1879년을 제외하고 매 회마다 작품을 내놓았다. 결혼 후 화가의 꿈을 접은 언니와 달리 남편 외젠 마네의 외조로 모리조는 화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그밖에 런더너 벨기에의 미술협회 등 다른 미술단테의 전시회에도 참여하며 1892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자화상(1885년)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그녀의 자화상에서도 느껴지듯이 작품에 '나,여성' 이라 쓰여있진 않다. 오히려 모네, 마네, 그리고 렘브란트의 느낌이 조금씩 묻어나 있다. 자신감과 대단한 붓놀림이 화려하고 빠르다. 거침없이, 혹은 거의 신들린듯한 붓놀림이 느껴질 정도로 모리조의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녀 자체가 상류층 여성에 속하다 보니 여성들의 여가나 삶이 주로 그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다. 블루와 옐로우는 그 당시에 흔치 않은 색상으로 그림에 잘 등장하지 않는 색채인데 모리조는 세룰리안블루(Cerulean Blue), 카드뮴 노랑(cadmium yellow)등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다. 재정적 어려움이 없으니 다양한 시도에도 주저함이 없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1800년대 중반, 튜브형 물감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인상파 화가들과 같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스튜디오(작업실) 밖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제품 개발이었다. 튜브물감의 보급으로 모리조는 실내 작업실을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고 야외 작품에서 드러난 그녀의 인상주의적 작품은 빛이 느껴짐은 물론 흔들리는 바람까지 느껴지는 듯 그려져 있다. 이렇게 모리조는 대가들이 기피하는 색들을 지그재그로 깃털처럼 날리는 듯한 붓터치 기법으로 한 색조가 다음 색과 충돌할 수 있게 겹치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그림을 잘 살펴보면 약간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붓터치의 색상들이 교차되며 겹쳐 완성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줄리(1894),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osot)

 

 

 

 

 

모리조는 마네를 만난지 6년의 세월, 싹트는 사랑을 감추며, 33살이란 매우 늦은 나이에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Eugene Manet)와 결혼함으로써 마네와는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된다. 그녀는 결혼해 딸 줄리 마네를 낳는다. 그녀는 딸의 모습을 다양하게 광범위하게 수년을 그렸으며 딸의 변화를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줄리 마네]는 모리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94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생각하는 줄리의 멍한 모습에 집중시키기 위해 붓질을 문지르는 스타일을 많이 썼고 모리조 특유의 거친듯한 붓놀림은 절제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줄리의 폐렴을 간호하다 본인이 걸려 사망에 이는다. 그녀의 나이 51살, 실력이 무르익을 나이이고 작품의 정체성이 분명해질 50대에 생을 마감한다. 재능과 아름다운 외모, 부모와 시부모의 재력, 천재 화가 마네의 사랑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녀는, 그녀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류층으로 시집가서 남편의 아내로 사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당연한 삶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삶을 과감히 깨뜨리고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자유분방함의 소재가 그녀의 주변이었고, 풍부한 파스텔 톤의 색채와 유려한 붓놀림으로 파리 근교의 풍경과 가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일상 속의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생기 가득한 색채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아버지였던 외젠 마네도 일찍 세상을 떠난 상태였으니 줄리 마네는 모리조의 죽음과 함께 16살에 고아가 된다. 다행히 평소 줄리를 예뻐한 '친절한 르누아르 아저씨"가 줄리의 후견인이 되어 평생 그녀를 보살핀다. 훗날 줄리는 어머니가 남겨준 자랑스러운 작품을 알리고 회고전을 하는데 주력한다.

 

 

 

 

 

 

 

[제비꽃을 장식한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에두아르 마네,1872, 오르세 미술관

 

 

 

 

 

 

모리조가 살아온 19세기는 이전 시대에 비해 여성 작가들이 많이 활동한 시기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성 작가들의 활동 범위는 많이 제한적이었던 사회였다. 모리조의 부모님이 모리조가 마네의 모델이 되는 것을 허락한 이유 역시 모네라는 당시 유명 남성 작가의 모델이 되는 것이 모리조의 화가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기 때문인 것 처럼, 당시 19세기 사회는 여성 작가 혼자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모리조는 마네라는 영향력 있는 남성 작가의 도움을 받아서 인상주의 화단에 진입한, 동시대 다른 여성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운이 좋았던 화가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당시 마네는 천재였지만 파리 미술계의 반항아로 더 알려진 화가다. 자유분방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그들의 우상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인상파의 그림을 예술로 취급하지 않은 모순된 면도 동시에 지닌 화가였다. 마네는 당시 그녀에게 직업적 영감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지만, 그녀를 틀에 가두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일화로 베르트 모리조는 1970년에 [어머니와 언니]를 작업했는데, 마네가 그녀의 그림을 비웃으며 붓을 댔다고 한다. 요즘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로 '선을 세게 넘은' 마네에게 소송이라도 걸었겠지만 당시 그녀는 그의 무례함을 지적하기보다 자신의 작업을 폄하였다고 한다.  그의 행동이 자신의 작업을 더 완성시켜주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녀는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해 불안해 떨었다고 한다. 직업란에 화가라 적지 못했고, 무덤의 묘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료 화가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자주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없애버렸다고 한다.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 그녀의 작품이 독특한 감각을 지닌 화가임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워낙 남성화가 위주로 기록되고 평가되는 시스템 안에서 인상주의 여성화가로 제대로 서있기가 어려웠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사후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을 하면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모네, 드가 ,피사로와 견주어도  뛰어난 명작임은 의심할 수 없다.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현실에서도 느끼지만 사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 있는 여성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오롯이 그의 능력으로 얻은 산물일지라도 여성으로서 얻은 권력과 전문성은 끊임없이 지금도 그 출처를 의심받으며 도마 위에 오르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평탄했을 모리조의 삶도 사회적 분위기에 갇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면들도 많아 보인다. 누군가의 한 발자국 앞섬으로 인해 다음 세대는 좀 더 공정할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 누군가의 편견을 깨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만들어 가고 있을 또 다른 모리조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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