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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거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1882,1,7, 고흐가 테오에게-

빈센트 반 고흐가 영혼의 동반자 동생테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들 중 하나다.


고흐는 살아 생전 달랑 그림 한 작품 팔고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다가 37세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다. 살아 생전에 화상인 동생 테오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주고 받은 형제간의 편지들 덕분에 당시 미술사의 귀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테오의 꼼꼼한 배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고흐 사후에 제수씨 요한나의 ‘고흐 그림 알리기 프로젝트’로 무명의 화가 고흐는 전 세계에 차츰 얼굴이  알려지게 되고 그림값도 2-3배씩 뛰게 된다. 하마터면 비운의 화가로 역사 속에 잊혀질 뻔한 그를 일약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한 것도 평생을 ‘고흐’ 알리기에 바친 제수씨 요한나의 희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흐가 하늘에서 동생 테오와 제수씨 요한나를 만나거든 크게 한턱 내셔야하지 않을까!
고흐의 유년 시절


칼뱅파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미술적 재능을 물려준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사이에 태어난 둘 째같은 첫째다. 낳자마자 사망한 장남 빈세트의 이름을 부모님은 고흐에게 그대로 물려주신다. 고흐는 그런 부모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형의 삶까지 짊어지고 사는 느낌으로 평생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고흐는 장 앙리 파브르처럼 곤충학자가 꿈이었던 독서광이다. 모든 곤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과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한다. 고흐의 꿈처럼 화가의 길이 아닌 곤충학자가 되었다면 괴짜 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화가로 살지 않았다면 좀더 오래 살기는 했을 것 같다.

고흐 집안을 보면 신께서 병도 주시고 약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병 내력이 집안에 있었다. 더불어 고흐와 동생 테오의 형제간의 찐한 우애도 함께 주셨다.  아버지 테오도뤼스와 헤이그에서 화상으로 성공한 큰 아버지 사이의 우애도 남달랐다고 전한다. 그것도 고흐 집안의 좋은 내력같다.  당시 네덜란드에 바르비종파가 유행이었는데 큰 아버지는 그들의 그림을 수집•판매하며 화가들을 육성하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고흐는 여러 대가들의 그림을 볼 기회가 많았고 특히 ‘밀레’라는 작가의 그림을 좋아해 모사를 하며 닮아가려 애쓴다. 참고로 바르비종파는 밖으로 나가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밀레의 작품중 <이삭 줍는 사람들> 그림이 그 중 하나다. 대부분의 그림이 안에서 그려지던 예전 시대에 비하면 획기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청년 고흐


16세 때 큰 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 미술 상인 구필 (Giypil &cie)화랑에서 일을 시작한다.  당시 아돌프 구필은 파리 살롱 수상작들을 판화로 만들어 찍어 파는 판화 인쇄업도 겸하고 있었다. 점차 수요가 늘고 구필 화랑의 런던 지점으로 파견되어 런던 생활을 시작한다. 고흐가 본 런던은 고도로 산업화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게 가치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 방식에 슬슬 염증이 나기 시작한다. 가난한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살롱 수상작 같은 엘리트  중심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던 것 같다. 게다가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들과 자주 논쟁을 벌여 결국 7년 만에 해고 되고 만다.

개인적으로 고흐의 여자 보는 눈은 빵점같다.그는 남녀간의 사랑을 사랑의 감정보다 연민에 가까운 순수함으로 여자들을 대한 것같다. 런던의 하숙집 주인 딸인 외제니 로예에게 실연을 당할때도 그랬다. 헤이그의 매춘부 시엔과의 동거 생활로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의 지탄을 받을 때도 똑같았다. 고흐의 초기 대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주인공 딸의 임신 소식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따돌림 당할 때는 더 덥답한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

고흐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 모두 개신교 목사셨다.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 온 고흐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고흐의 일생에서 그를 이해해 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영국 감리회 소속 토머스 슬래이드  존스( Thomad slade Jones) 목사를 만나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안정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잘하면 목사가 되어서 자신의 생각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울증이 찾아와 다시 집으로 가게 된다. 이를 보다못한 큰 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로테르담’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일을 하게 된다. 그 일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고흐의 이모부인 암스테르담의 요한에스 스트릭커 목사에게 도움을 구하고 목사고시 준비를 하던 중 코넬리아 보스- 스트릭커 목사 딸과 사랑에 빠져 중도 포기하고 정신적 충격만 더 커진 채 혼란스러워 한다. 그때 당시 고흐는 성직자들의 전도하는 방식에 다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도 그런 전도보다는 실질적으로 전도에는 불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래야만 성직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풍토에 신물이 나있었다. 일부러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워 합격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빠져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런 고흐를 아버지와 존스 목사가 브뤼셀에 있는  전도사 양성학교에 빈센트를 입학 시킨다. 이 선교 단체는 벨기에의 악명높은 탄광지대인 보리나주(Borinage)로 파견하는 일을 했다. 젊은 고흐는 탄광의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 노출된 광부들처럼 극단적인 세계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고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1880년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된다.


화가로 길을 걷다.



외사촌 화가 안톤 모베에게 그림 지도 받은 것이 전부이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당시 화상의 길을 걷고 있던 동생 테오로부터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보내준 화집이나
편지를 통해 알게된다.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편이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인 부분이기도 하다.

뇌넨 시절의 고흐


뇌넨으로 다시 돌아 온 고흐는 아버지의 신앙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고 30에 가까운 아들이 재정적 독립은 고사하고 직장도 없이
화가의 길을 가려하는 고흐의 결정에 부모는 못마땅해 한다. 요즘같아도 그런 길을 응원해 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 copyright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10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5명의 광부와 광부의 식구들이 찐 감자와 커피로 저녁식사를 하는 다소 분위기가 어둡고 투박한 작품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촌으로부터 색채 사용과 모델 관찰등 그림의 기초를 배운 것 외에 정규학습을 받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밀레, 들라크루아,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독학한 것이 전부이다보니 당시 네덜란드의 어두운 화풍이 그대로 전해진 것 같다. 당시 에밀 졸라의 소설<Germinal, 1885>에 감명을 받아 그린것으로 알려져있다. 작가인 에밀 졸라는 1884년 , 북프랑스 앙장 탄광의 스트라이크를 직접 돌아본 뒤에 이 대작을 쓴 것으로 고흐 역시 그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테오에게 보낸 이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동생 테오는 형에게 파리로 오라는 초청을 하고 그곳에서 고흐는 1880년대 전후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인상파 미술의 흐름을 배우게 된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색을 포착하는 인상파의 혁신적인 미술 기법으로 고흐도 화풍의 변화를 겪는다. 예전보다 한층 밝아진 고흐의 그림은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자화상 그림에서 당시 인상파 화가 ‘쇠라’의 점묘법을 응용한 그림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이 자화상을 통해 본인 스스로를 화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비록 30대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고, 미술학교도 나오지 않았으며 , 그림 한 점 제대로 팔 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 고흐는 파리에 머물면서 인상주의 기법을 배우고 싶어했고 함께 그림을 그릴 미술 동료들을 만들고 싶어했다.  고흐가 파리에 왔을 때 에밀 베르나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등이 외국인 화가인 고흐를 환대해 주었다. 화랑 직원인 동생 테오의 형이라 홀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성실하고 진실한 고흐의 성격 뒤에 감정의 기복이 크고 극단적이며 타인의 비평을 눈꼽만큼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을 동료 화가들이 알게된 것이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 정기적인 그림 품평회를 열어 서로의 그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고한다. 다른 화가들과 다툼이 생기면 무릎을 꿇고 결투를 신청할 정도라 그의 괴팍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 모두 떠나갔다.
<고흐의 초상,1887,툴루즈 로트렉>
이 작품에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고흐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당시 파리 미술계의 외면에 고흐도 지쳐 있었는 지 모를 일이다. 좁은 집에서 형과 함께 생활하며 형과 화랑 고객의 다툼에 동생 테오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고흐는 동생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파리를 떠나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부로 떠나버린다. 무려 1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를에 도착한다.

고흐의 운명을 바꾼 아를


기온이 높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아를’ 지역은 원색적 색감이 살아있는 곳이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마을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길가의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와 라벤더가 가득핀 꽃밭이 생각만해도 그림같은 풍경이다. 눈이 녹고 꽃이 피면서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한 달 동안 무려 14점의 과수원 그림을 그려댔다.
<과수원의 꽃피는 살구나무, 1888, 고흐>
초록, 파란색을 섞어 표현한 나무줄기에서 왕성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 다른 작품 <꽃피는 복숭아 나무,1888,고흐>
풍성하게 핀 복숭아 꽃은 생명의 불꽃 같은 느낌이다. 아를 이란 지역이 이렇게 고흐를 화가로 키우는 중이었다. 아를에서 고흐는 태양의 색, 희망의 색, 생명의 색인 노랑을 발견한다.
<추수,1888,고흐>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풍경화와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아를에서 드디어 탄생했다.
<해질녘, 씨뿌리는 사람,1888,고흐>
밀레의 그림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으로 밀밭이 노란색, 하늘이 파란색인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생각이다. 고흐는 아를에서 환한 빛에 대한 영감을 발견하고 하늘이 노란색, 밀밭이 파란색으로 표현한다. 마치 땅에서 방금 솟아오른듯 경쾌하게 걷는 농부의 모습 속에 희망과 환희가 담겨있다. 아를에서 보낸 봄날이 고흐의 짧은 인생의 봄날이기도했다.
우키요에가 고흐에게 미친 영향
‘우키요에’는 일본의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한 회화 양식이다. 당시 유럽에서 일본 에도시대 목판화(우키요에)가 큰 인기를 얻어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모네>


작품에도 등장해 상당수의 인상주의 화가들, 오스트리아 구스타프 클림트 등 당시 많은 화가들이 자포니즘(Japonism)영향을 받았다.
목판화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서 고흐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화가에게도 직접 사서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리 위 소나기,1887,고흐>
고흐는 캔버스를 모눈 종이 형태로 구획을 나눈 뒤 차례대로 면을 메우는 방식으로 우키요에를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일본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작품을 모눈 종이 방식으로 똑같이 그려낸 고흐는 우키요에의 선위주 구성과 밝고 가벼운 화풍에 영향을 받는다.

<다리 위 소나기, 1887,고흐>
<아를의 랭글로아 다리, 1888>
<생 마레 드 라메르의 고깃배들,1888,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고흐>
<일본풍 가부키 배우,1887,고흐>
지중해성 기후를 낀 아를의 여름밤은 비가 오지 않아 많이 어둡지 않다. 여름밤을 가득 매운 별빛에 매료된 고흐는 어떤 도시보다 투명하고 화려한 아를의 여름밤의 색감을 좋아했다. 동생 테오에게 아를 밤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며 써보낸 편지를 보면 말이다.  아를의 포룸 광장과 카페로 오는 주민들을 표현한
<밤의 카페 테라스,1888>
작품에 가스등 불빛때문에 노란빛으로 표현된 카페와 푸르게 표현된 하늘엔 큰 별들이 빛나고 있다. 아를에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른다면
<론강 위에 빛나는 별들,1888,9>
을 꼽을 것 같다. 노란 등불과 유사한 별빛, 지상과 천상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고요하고 맑은 밤하늘,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의 마음자리가 평온해 보인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9>





<론강 위의 빛나는 별들>을 그린 9개월 후 생 레미 요양원에서 고흐의 밤 하늘은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별일 빛나는 밤,1889>


밤하늘은 어지러운 소용돌이로 표현했고 달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도대체 고흐의 고요한 밤하늘은 어디로 간 것일까? 9개월 동안 고흐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폴 고갱의 등장
라마르틴 광장 인근에 방 2칸을 얻은 고흐는 자신이 빌린 방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2장을 동생 테오에게 보낸다.
<노란집, 1888,고흐>
<노란 의자가 있는 침실, 1888,고흐>
고흐는 테오의 돈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최소 생활비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굳이 방 2개를 빌렸을까? 그는 프랑스 남부에 화가의 공동 스튜디오를 꾸미고 싶어했다. 친구라고 생각한 파리 미술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기다렸지만 아무도 고흐의 편지에 답을 보내지 않았다. 고흐는 파리의 미술가를 친구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모두 고흐의 괴팍한 성격에 넌더리난 상태였다. 가장 호의적이던 툴루즈 로트렉마저 고흐에게 답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를 떠나 남부 시골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처럼 파리화단의 외톨이였던 고갱만이 여름에 아를에 갈 것을 전했다.
고갱은 원래 주식 중개인으로 지내다 서른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당시 파리 미술계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림도 잘 팔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는 고갱은 원시의 현란한 빛과 강렬한 색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 테오는 아를에 가서 형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구매해 주는 조건으로 부탁을 받아 들인다. 고흐는 꿈에도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고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1887년 고흐와 고갱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그때 고흐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고갱에게 선물하고 싶어했다.



<두 송이의 해바라기,1887,고흐>
<해바라기, 1888,고흐>

고흐의 이런 섬세한 마음도 모른 채 고갱이 타이티로 가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을 미련없이 팔아버린다. 아무튼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한 고갱을 위해 총 7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그림 2점을 고갱의 방에 걸었다고 테오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갱이 해바라기 그림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느끼길 기대하며 말이다.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 꽃병, 배경, 테이블도 온통 노란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해바라기 그림이 고갱에게 환한 빛으로 다가가길 기대했던 것 같다. 이렇게 단 한 명의 동료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고흐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1888,10,23
아를에 고갱이 도착한다. 방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고흐에게 보답하고 싶었던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그려 선물로 준다. 고갱의 그림 속 자신을 보고 미쳐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함께 살자마자 부딪히기 시작한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강한 에고를 지닌 자기 중심적 고갱과 타인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성품의 고흐가 모든 일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림의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 야외 스케치를 다니는 고흐를 구식이라고 비웃기까지 하자 고흐는 고갱과의 사이에 위기감을 느낀다. <고갱의 의자,1888,고흐>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고갱을 위해 팔걸이 의자를 준비한 고흐는 그림 속 의자 위에 기우뚱한 촛불과 미끄러질듯한 책 2권으로 당시 고흐의 불안를 표현한다. 1888,12.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며 격렬하게  싸우고 난 후 화해할 목적으로 들라크루아 전시를 보기 위해 마르세유로 떠난다. 그곳에서도 들라크루아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극단으로 엇갈렸다. 대단한 화가로 생각한 고흐에 반해 철지난 싸구려 화가라고 생각한 고갱의 말다툼은 심해지고 아를에 머무는 것에 회의를 느낀 고갱은 파리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다. 고갱의 선언에 단 한 명의 동료인 고갱과 이별하게 된 고흐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1888,12,23
또 한 차례 격렬한 말싸움으로 다툼이 심해지자 고갱은 밖에서 잠을 자겠다고 집을 나선다. 그런 그를 면도칼을 든 고흐가 뒤따라가고 5년간의 선원 생활로 세계를 떠돌았 던 고갱은 거친 남자 고흐를 무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고흐는 칼을 떨어트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술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집으로 간 고갱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고흐를 발견한다. 고갱을 해치려던  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다. 고갱은 동생 테오에게 고흐 상태를 알린 뒤 아를을 떠난다.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아를에 도착한 테오는 고흐를 정신 병원에 입원 시킨다. 발작이 일어날 때 물감을 빨아 먹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하고 발작이 끝나면 발작 상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형의 모습에 동생 테오 역시 수심이 깊어진가. 다행히 한 달 여의  치료가 끝나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고흐가 퇴원 후 그린 첫 작품으로
<귀를 자른 자화상,1889,고흐>
<자화상,1889,고흐>
자신의 상태가 나아졌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지만 상태가 안 좋아져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힘들어 한다. 병원 치료후 고흐의 그림에 소용돌이가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발작을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발작이 끝나면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 간헐적 발작이 멈췄을 때 그린 그림들이다. 소용돌이 치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고흐의 모습이 안스럽다.
1890년
고흐에게 생 레미  요양원은 퇴원을 권한다. 경찰 탄원 등 주민의 반대로 아를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파리로 갔지만 요한나와 결혼해 파리에서 가정을 꾸린 동생 테오의 집에도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화가 피사로의 제안으로 파리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게 되고 당시 화가이며 우울증 환자인 의사 가셰를 만나게 된다.
<닥터 가셰의 초상,1890,고흐>

결혼한 동생 테오에게 아들이 생기고 형의 이름을 따 빈센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테오는 형에게 아들의 대부를 요청하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른이 아이의 대부가 되면 좋겠다고 하며 거절한다. 그러자 형에게 아기방을 장식할 그림을 요청하고 조카를 위해 아를 생활 초기의 과수원 풍경을 회상하며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준다. 고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아를에서의 봄과 여름을 듬뿍 담아서 말이다.

<꽃피는 아몬드나무,1890,고흐> 1890,여름
고흐 화가 인생 최초로 아를에서 그린

<아를 인근 붉은 포도밭,1888,고흐>
그림이 약 400프랑에 팔린다. 동생 테오는
”세상이 형의 재능을 알아봤고 형은 이제 곧 성공할 거야.”
하며 형을 격려 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흐의 우울증은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림 속에서 이미 길을 잃고 있었다. 고흐의 성공에 대한 테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드디어 세상이 고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흐는 성공을 기다리기  힘든 상태였다.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밑그림 없이 급하게 그린 <나무 뿌리와 둥치,1890,고흐>
그림에 숲에서 길을 잃고 뒤엉킨 삶의 매듭을 스스로 끊어 버리려는 모습이 보인다.
<번개 구름 아래 밀밭, 1890,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고흐> 1890,7월
고흐는 밀밭에 가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삶의 마지막까지 가혹했던 고흐는 심장을 비켜 늑골 사이에 총알이 박혀 피를 흘린 채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고흐의 상태가 치료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알아차린 의사 가셰는 고흐를 방치한 채 파리의 테오를 부른다. 테오는 고흐가 죽기 전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건강도 나쁘고 직장 생활도 좋지 않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 형도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알아서 살아라.“

더 이상 형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힘들다는 뜻을 전했다. 10여 년 동안 고흐의 생활비를 지원한 테오에게 아무도 뭐라할 수 없다. 하지만 고흐는 테오의 편지에 대해 테오가 자신을 외면한 것으로 받아 들였고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고흐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한 한 인간의 쓸쓸함이 고흐의 죽음을 통해 절절히 느껴진다. 이렇듯 예술가를 경외하는 이유가 작품에 대한 뛰어난 재능만이 아니라 재능을 불꽃처럼 태우며 자신의 삶을 희생양 삼아 만들어 낸 걸작들 때문 아닐까 생각해본다.

1890,7,29,고흐 사망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반 고흐도 정신병이 생겨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2,25서른 넷의 나이로 형을 따라갔다.
직적적인 자살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살같은 죽음이었고 형재는 현재 나란히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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