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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이 인상주의 동료들 사이에서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했 던 시슬레를 표현했 던 문장이다. 시슬레는 프랑스에서 낳고 자랐지만 두 번씩이나 프랑스 국적을 받는 데 실패한다. 어쩔 수 없이  영국시민으로 남은 채 루앙에서 아내가 죽은 지 몇 개월 후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한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시민권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대부분의 나라들과 사뭇 다른 프랑스의 법체계에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정출산으로 신문 지면을 오르내리던 유명인들의 떠들썩 한 얘기를 읽고, 보았 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 인 것 같다. 시슬레는 파리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지만 작품 하나도 팔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절이 있었다. 그의 인상주의 동료 작가들과 달리 거꾸로 흘러간 그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2. 생애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다. 나고 자란 곳은 프랑스였지만 그의 국적은 여전히 영국이다.  아버지는 실크 사업으로 부를 이룩했고 어머니는 음악 전문가였다. 시슬레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같은 사업가로 키우기 위해 시슬레가 열여덟이 되던 해, 그를 런던으로 보냅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이 이룩한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세상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하지만 자식 농사가 어디 마음처럼 쉽던가! 아무리 돈 많은 부모라도 자식의 열정을 이기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는 이치를  금방 알아버리게 된다.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공평함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든다.

 

 

 

 

 

 

 

사업에 관한 공부를 하기 위해 런던에 왔지만 정작 시슬레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기 싫은 사업 공부를 하느라 4년을 보내고 나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바로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한다. 자신의 뜻을 확고히 실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초창기 스위스 출신의 샤를 글레르의지도를 받게 되는데 어떤 평론가들은 샤를 글레르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도한 학생들이 훗날 인상파의 주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고전주의의 획일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풍경을 그립니다. 그런 그들을 지칭해 '외광파'라고 부르지요. 글자 그대로 풍경을 그리더라도 완성은 스튜디오에서 하던 당시 관행을 거슬러 야외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햇빛과 공기의 흐름을 그대로 살려 그려내던 화가 일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지게 됩니다. 일반 대중들에게 매우 낯선 기법이긴 했지만 말이다. 2년 후 스승이 에콜드 보자르를 떠나자 시슬레도 학교를 그만둡니다. 퐁텐블루 숲을 찾아가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화폭에는 극적인 장관이나 빼어난 건물이 없이 그저 평온하고 소박한 주위 풍경만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살아생전 이름을 날린 적이 없고, 사후에도 그 명성이 다른 동료들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그래도 '인상주의의 교과서'로 꼽히는 건 그의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중 ,<모레의 포플러 나무길,1890>은 세 번이나 도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림 대여 중에 분실된 걸 되찾기도 하고, 미술관 큐레이터가 공범이 되기도 하고, 무장 괴한들이 훔쳐 가기도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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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레 부부의 초상(Alfred Sisley and his wife,르누아르, 1868)>

 

 

 

 

 

 

 

 

 

 

시슬레는 동료들보다는 생각보다 빨리 살롱전에 입상합니다. 다음 해 시슬레는 브르타뉴 출신의 마리라는 여인을 알게 되는데 모델이자 프로리스티였던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들 사이에 아들 피에르와 딸 쟌느가 태어나고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렸지요. 당시 카페 게르브아(the Cafe Guerbois)에 자주 드나들면서 에두아르마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들과 깊은 교우를 맺습니다. 이듬해 살롱에 또다시 그의 그림이 당선됩니다. 상업적 성공이나 지명도는 아직 낮았지만 연거푸 살롱전에 당선이 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점점 굳혀가고 있었죠.  동료화가인  르누아르가  이런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보기만 해도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고 그림 같은 한 쌍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딱 ' 여기까지입니다. 그들 인생의 절정의 시간은 전쟁이란 외재변수를 만나 원치 않은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고 갑니다.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1870)이 터졌습니다. 시슬레는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피신을 갑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은 망하고 그의 집은 불에 탔거나 약탈을 당해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이 안타깝게도 그 당시 유실되고 맙니다. 이 전쟁은 시슬레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바로 경제적 상실이었죠. 전쟁 전까지는 모네와 르누아르 등이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시슬레는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유롭게 취미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그림을 그렸던 거죠.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요. 이후 시슬레는 유명한 화상 뒤랑 뤼엘(Paul Durand-Ruel)을  만나지만, 경제적인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습니다. 남은 여생동안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대신 이 시기 친구들인 모네(Claude Oscar Monet)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활발한 작업을 하며 맘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 서쪽의 마를리(Marly) 숲 근처의 루브시엔 (Louvueciennes)마을에 살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쉬렌의 센강(The Seine at Suresnes, 1877)

 

 

 

 

 

 

 

 

흰 구름이 마치 팝콘을 흩뿌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빨래 거품이 몽글몽글 생기는 장면과 흡사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평화로움은 첫 번째로 드는 감정이고 완만한 능선과 다리 그리고 배 한 척의 고요함을 하늘의 구름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이 역동적입니다. 화폭의 절반 이상이 구름이라 손가락으로 빨간 하트라도 그려대고 싶습니다.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는 센강 주변 쉬렌 지역입니다. 파리 서쪽에 자리를 잡은 쉬렌은 시슬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지역입니다. 왠지 다리 위에서  센강 아래로 뛰어내리며 수영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맑은 강물을 보니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이고 그 위로는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하늘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하늘이고 실제로 하늘을 쳐다볼 때처럼 눈이 부십니다. 이렇듯 인상파 화가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에 매료되었고 그런 빛을 그림에 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림의 절반을 하늘로 처리해서 그림 전체에 담은 빛은 그 어느 작품보다 풍부합니다. 주변의 정적인 배경들과 달리 움직이는 작은 배 한 척이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가고 있어 그림에 또 다른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습니다.

 

 

 

 

 

 

 

 

 

 

 

 

 

 

 

 

모레의 교회(Church in Moret, 1889)

 

 

 

 

 

 

 

 

모레 쉬르 루앙은 시슬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마치 모네의 낟가리 연작이나 뤼앙대성당 연작을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그는 이 교회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서서히 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남은 햇빛은 우뚝 솟은 교회의 허리까지 밀려 올라갔습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대한 성당 앞에서 더욱 작아 보이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어 감사한 귀갓길이 되길 희망해 봅니다.

 

 

 

 

 

 

 

 

 

3. 나가기

 

 

 

 

대부분의 화가들의 말년을  보면 인정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년고생을 하고 말년이 안정되는 삶과 초년에 부유하고 말년이 초라한 삶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 역시 전자를 택하고 말년은 편안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부자 집 도련님의 로 살 던 사람이 나이 들어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으니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쏜살같이 곤두박질치는 그런 느낌이랄까!  가끔 그의 그림을 사주는 이도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릴 뿐이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고자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겠죠. 좀처럼 나아질 기미 없이  근근이 살아온 그의 시간이 그래서 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가 봅니다. 대부분의 그림 값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 역시 그가 죽고 난 뒤, 작품 가격이 오릅니다. 뒤늦게 그가 위대한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평가된 것이지요.  900여 점의 유화와 100여 점의 파스텔화를 남긴 그에게  다소 늦었지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 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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