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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춘기였던 내 눈에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름 그 당시 파리의 최첨단 패션이었을 테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여인들의 노력은 무죄이나 어쩐지 허세 잔뜩 부린 수꿩 혹은 수컷 공작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림 속 휴일을 즐기러 온 파리지앵들은 다들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  커다란 그림 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표정도 읽히지 않고  움직임도 느낄 수 없어 어딘지  모르게 '얼음 땡 '하고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생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는 집안 대대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고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도 꽤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살 때 국립미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 징병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880년 초반부터 열심히 화가로서 활동하지만 주류예술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다른 화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세기 중반 파리 사회는 기술문명과 교통수단이 혁명적으로 바뀌어 한 나절 여행이 가능해졌다. 튜브물감의 발명으로 빛을 찾아 화가들은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거친 붓터치로 '순간 포착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같은 인물이 그들이고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점이 된다. 쇠라가 활동하던 시절  광학이론이나 색채론 같은 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과학적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색채분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방법론으로 찾은 실행기법이 점찍는 기법이었다. 일명 점묘법인셈이다. 말 그대로 점을 하나하나씩 찍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얘기다. 그것도 3m*2m짜리 대작을 말이다. 이것을 열심히  실행한  쇠라나 폴 시냑[Victor Jules Signac, (1863-1935)]과 같은 화가를 신인상주의라 한다.

 

 

 

 

 

 

 

 

 

 

 

 

 

 

 

 

그링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 Jatte),1884,미국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햇살 알갱이들이 무수히 부서져 내리는 센 강변의 공원에 40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점묘주의의 출현을 알린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한 땀 한땀 손바느질 하는 느낌으로 점을 찍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인물들이 생동감은 온데간데없고  뻣뻣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쇠라는 2년에 걸쳐 유채 물감으로도 그리고, 스케치, 드로잉으로 다시 시도하면서 무려 70점 이상의 예비 작업을 거쳐 비로소 완성한다. 거대한 캠퍼스에 점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그려야 했으니 2년이란 시간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력은 또 얼마나 나빠졌을까! 이런 면에서 화가라기보다 과학자 혹은 수도자 느낌이 더 드는 화가다. 그림을 그린 1884년, 8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열렸던 인상파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였고, 그해 말 이 그림이 독립파 앵데팡당(Independent)에 걸렸을 때,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이 '네오-임프레셔니즘(Neo-Impressionism)이야'라고 흥분해, 처음으로 '신 인상파 주의'이름이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이 되어버리는 문제의 그림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 인상파 사이에 두 주류가 있었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 르느아르처럼 철저히 야외의 순간적인 빛을 그려야 한다는 외광파가 있었고,  반대편에 사실적인 화풍으로 극단적인 구도를 추구하는 에드가 드가파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쇠라의 그림에 외광파 모네는 반대를 했고, 드가는 찬성을 하며 카미유 피사로 같은 중재자의 부재로 결국 해산하고 만다."어떻게 해야 빛을 잘 표현할 수 있지?"에 대한 접근법이 서로 달랐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찰나와 과감한 붓터치의 그림을 선호한  외광파에게   아틀리에에 처박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정적이고 고요한 쇠라의 작품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쇠라의 점묘법은 색을 팔레트에 섞어서 바르던 기존 유화방식을 거부하고 원색의 점들을 병치시켜 그린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정체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인접해서 보라색처럼 보이는 착시효과 때문이다. 19세기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어떻게 빛과 색을 인지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했고 광학적으로 색을 분석하는 이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광학적 색채 이론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통해 점묘 분할법을 시도한다.  마치 3D이미지를 보는 듯 매우 질서 정연하고 입체적이지만 그로 인해 더 가상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전시회에 나온 이 그림을 보고 이집트 고대 그림과 비슷하다며 조롱당했다고 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간다. 오히려 디지털 세상인 지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랑자트섬은 어디일까?

 

 

 

 

 

파리 센 강 북서부 위치한 유원지로 도시인들이 콧바람 쐬러 가는 피크닉 장소였다. 19세기 파리의 브리즈와들이 근교로 소풍을 나와서 주말에 여가를 즐기는 모습은 근대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풍경이었다. 그랑자트섬이 브르즈와 계통이 즐겨 찾는 섬이었다면 강건너에는 노동자 계층이 유원지가 있는데 아스니엘이라는 쇠라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랑자트섬에는 브르주아 계층뿐만 아니라 노동자, 군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있다. 쇠라는 근대화 이후 다양한 계층이 모호하게 뒤섞여버린 새로운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정 가운데  흰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분할하고 화면을 정확히 수평과 수직 대각선 구도로 분할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위치에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인물을 배치한다. 감각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쇠라의 작품은 신 인상주의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 거대 작품 속 인물 군상을 알게 되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아는 만큼 읽히고 보일 테니까.  작품의 오른쪽 옷을 잘 차려입은 남녀가 강 건너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손에는 가죽 끈이 들려있고 그 끝에 원숭이 한 마리가 묶여있다. 당시 원숭이는 방탕함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 여인은 방탕한 여자 즉 매춘 여성임을 암시한다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위치의 그와 그녀는 사실  도시의 이목을 피해서 그랑자트섬으로 밀회를 즐기러 나온 커플인셈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당시 이 섬이 성을 파는 직업여성들의 활동 장소였고 그림 속 두 명의 경찰관이 이들의 문란행위를 순찰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걸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그림이 도시인들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곳으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림을 보는 재미 아닐까 싶다.  여기 있는 사람의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뭉특한 가면처럼 그려져 있다. 이들은 그저 옷차림 만으로 직업과 신분을 파악할 수 없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도시인의 욕망이 느껴지는가?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점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이 작품 속에서 도시의 작은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으로 무명화가였던 쇠라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점을 찍는 대작을 하며 에네지를 너무 고갈해서 그럴까?  쇠라는 화가로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31살의 나이에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점묘법은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들], 피카소의 큐비즘, 브라크, 마티스까지 영향을 미친다. 20세기 회화의 시작점에 점하나 찍고 홀연히 떠나가버렸다.  그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현재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에 팔렸다. 1924년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미술관에 빌려 준 적이 없을 정도로  가장 사랑받는 대표 소장품으로써 명예를 누린다고 한다. 그의 점묘법은 동료 화가였 던 폴 시냑에 의해 더 연구되고 발전된다. 

 

 

 

 

 

 

 

 

분첩을 쥐고 화장하는 젊은 여성(Young Woman Powdering Herself),1888-1890, 영극 런던대학교 코톨드 미술연구소(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그림 속 '분첩으로 화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마들렌 노브로크(Madeleine Knobloch)이다. 그녀는 쇠라의 모델이며 애인이었고 이 당시 쇠라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쇠라의 부모나 주변에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투명 인간이었다. 숨겨진 여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오늘 화장을 한다. 슬프게도 이 그림을 완성하고 1년 뒤 31살이던 쇠라와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피에르는 유행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부모에게 소개하여 결혼하기로 한지 며칠도 안 돼 갑자기 요절하고 만 것이다. 요절한 쇠라만큼이나 날벼락 맞은 여인이 마들렌 아닐까? 불행 끝 행복 시작의 평탄한 미래를 꿈꾸었을 그녀의 소박한 꿈은 개꿈이 되어 쇠라와 어린 아들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 남은 이 그림 외에 자신의 정체성마저 인정받을 수 없었던 노브로크는 아들과 쇠라가 세상을 떠나고 시댁 가족과 의사소통마저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결국 쇠라의 그림 중 집에서  보관하던 일부를 상속 재산으로 챙겼다. 비운의 화가만큼이나 비운의 여인이 된 그림 속 여주인공 마들렌이다. 그녀 역시 쇠라 사후 12년 뒤인 1903년 , 35살로 비슷한 증세로 죽는다. 

 

 

 

 

 

  

 

 

 

서커스 The Circus (Le Cirque),1890-1,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쇠라의 세 번째 서커스 시리즈  작품이다. 초기 구성의 고요한 모습 대신 역동적인 움직임의 서커스 연희 장면이 특징이다. 활동적인 움직임의 마술 장면은 언제 봐도 아슬아슬 긴장감이 든다. 텀블링을 하는 광대, 귀한 백마을 타고 기예에 가까운 묘기를 보이는 그녀, 사람들의 표정은 읽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위기만큼은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 그림 속의 말은 1888년 당시 동물 서커스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신세계 곡마단 누보 서커스( Nouveau Cirque) 단 포스터에서 차용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선과 색의 감정적 묘사라든지 마상의 곡예 장면 등은 쇠라가 구성했다.  등장하고 있는 관중 모습들 속에는 좌석의 첫 번째 줄에 실크 굴뚝 모자를 쓴 동료 화가 샤를 앙그랑(Charles Angrand) 모습도 보이지만,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쇠라는 1891년 3월 갑자기 사망했을 때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던 몇 안 되는 화가였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신인상주의파 리더인 그의 친구 폴 시냑(Paul Signac)이 갑작스럽게 가버린 쇠라의 그림을 사주고 점묘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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