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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중산층이자 은행원이었던 챨스 스트릭랜드는 평소 주변사람에게 무심하고 말이 없고 재미없는 사내로 여겨졌다. 아내는 교양있지만 속물적인 구석이 있는 여자로 나타난다. 작중'나'도 처음엔 그를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사내라고 평가했고, 아내 조차 그를 예술따위엔 관심이 없는 교양없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스트릭랜드가 아내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트릭랜드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파리로 가게된다. 여자가 생겨서 파리로 갔을 거라는 아내의 예상과 달리 스트릭랜드는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여 집을 떠난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색다른 인물이었나에 대해 회상해본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좇아 떠난 그에게 금전적인 여유는 없었다. 더럽고 낡은 호텔방에서 머무르며 파리 하층민의 삶을 전전하던 스트릭랜드는 곧 생활고에 몸저 눕게 되지만, 평소 스트릭랜드를 천재라 여기고 가까이 하던 더크 스트로브라는 유순한 네덜란드 인의 도움을 받아 회복을 한다....-[달과 6펜스 중]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의 작품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입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타히티를 직접 답사했고, 거기서 폴 고갱이 살았던 집에 가 보고, 그가 데리고 살았던 여자와 얘기도 나누고, 그가 그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을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입시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개인적으로 이렇게 무책임한 가장이 또 있을까 싶다.  30대 중반의 아이들은  다섯, 외벌이 아내를 두고  자기하고싶은 일 있다며 사라져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처음에 들었던 폴 고갱에 대한 편견이 자료를 찾다보니 그에게도 변명의 시간은 주어져야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주식 중개업을 하던 그가 프랑스 주식 시장의 붕괴로  일순간 가지고 있던 직업, 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 메트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트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처가에서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다. 적어도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쳤다는 누명은 벗겨주고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같다. 

 

 

 

 

 

  외젠 앙리 폴 고갱(  Eugene Henri Paul Gauguin) )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라 혼란스러웠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한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자주 벌이고 사고를 쳤던 밑바닥에는 집안의 이런 내력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전업작가가 된 이후로 늘 돈에 쪼들렸던 고갱의 삶을 비춰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 문명의 독특한 도자기,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 들은 문물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미 계통 히스패닉분들은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성분들은 표현에 거침이 없어 깜짝 깜짝 놀라기도한다. 동양사람들이 민망해하는 패션을 올록 볼록 엠보싱같은 몸매에도 당당하게 입고 자신을 드러내는 화끈한 여인들이 그들이다. 아마 폴 고갱의 외할머니도 그런 남미 여인을 닮았고 그 모습을 내면화하지 않았을까 가볍게 추측해본다.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로만 남아있었다면,   훗날 인상파로 불린 카미유, 피사로 ,세잔,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을  팔아주기만 했었다면 미술사 속 폴 고갱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으나 현실은 고갱의 의지를 수없이 꺽었다.  현실에 꿈을 끼워맞추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걸림돌은 발을 떼는 곳마다 번호표 받고 대기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승과 같이 느끼던 피사로와의 편지에 고갱이 얼마나 힘들었느지를 볼 수가 있다. 굉장히 구질구질한 삶을 스스로 끝내고 싶지만

 

 

 

 

"나를 잡고 있는 건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만이 나의 삶을 잡고 있다."

 

 

 

 

그림이 본인의 삶의 목적이 되었던 고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파리 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 미술계의 넘버 원이 되고싶어했다.  [제 8회 인상파 전시회]에 19점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때 당시에 같이 소개되었던 쇠라[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가 거의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주목도 받지 못했다.  또 어떻게 보면 인상파 화가들 중  유일하게 도록에 화실 주소가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던  고갱은 이런 파리 생활에 지쳐있었다. 

 

 

 

 

 

"자연을 너무 곧이 곧대로 베끼지 말라,"

"예술은 추상적이고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내라."

 

 

 

 

 

 

[설교 뒤의 환상 (Vision After the Sermon)'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s Fight with the Angel)],Paul Gauguin,1888]

 

 

 

 

 

 

선명한 붉은 색감과 단순한 구성을 볼 수 있다. 야곱과 천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오른쪽과 왼쪽에는 싸움을 지켜보는 퐁타방의 여인들이 있다.  그림 속 여인들 머리에 쓴 흰색의 쓰개머리 모자가 인상적이다. 몇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2019)에 나오는 일하는 사람들 복장과 유사해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속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성경속 이야기를 빌리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늙어서 아들 이사악을 얻었다.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아들 에사우와 야곱을 얻는다. 이들이 성장한 어느날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사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장자권 갖는 이의 축복을 받는다. 이를 안 형이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하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자신이 첫눈에 반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는다. 세월이 흘러 야곱은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동안 모은 재산, 처자식을 먼저 보낸다. 그래도 야곱은 형이 두려워 야폭강가에서 머뭇거린다. 잠을 청한 야곱에게 천사가 나타나 동틀무렵까지 씨름을 하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야곱을 향해 축복해주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느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를 치고 멀리서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의 모습을 본 형 에사우는 벼르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고 동생 야곱과 화해한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작품이 더 풍성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싶다.

고갱이 고흐한테 이 그림에 대해서 편지를 썼었다. 

 

 

 

"풍경과 싸움하는 모습은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네."

 

 

 

 

결국 이 화면 속의 모습은 여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머릿속에서 그려진 환영을 표현하고있다. 단순화된 인물들과 밝은 붉은 색은 당시 유럽 화가들 사이에 유행이던 일본식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중앙에 나무가 이렇게 가로지르면서 이쪽 세계를 이 나무로 갈라서 표현을 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그림 속에서 찾은 굵은 윤곽선과 색채다. 드디어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원색의 미술이 시작된 시기이다.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라는 1888년, 그가 쓴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정제된 미술은 관능으로부터 나오며 영혼으로부터 자연을 섬긴다. 그냥저냥의 자연주의는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실추시키고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떠러지고 마는 것이다, 자연은 원시미술 속에 깃든 영혼에서 나온다.'

-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1888-

 

 

 

 

 

 

 

 

 

 

고갱은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싶었고  유럽을 떠나려고 결심한다. 당시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 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실패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 Paul Gauguin, 1889, 뉴욕 버퍼로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The Albright-Knox Art Gallery),41]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1889]

 

 

 

 

1889년 2월에 고갱은 남프랑스의 퐁타방으로 와서 베르나르와 함께 지내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5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와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렸지만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출품을 거부당했다. 고갱은 파리 만국 박람회 전시장 옆의 카페 볼피니에서 인상파 화가 특별 전시회를 열었는데, 고갱의 작품만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았다. 6월 20일 ,터덜 터덜, 다시 퐁차방에서 작은 어촌 르풀뒤로 와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은 더해만 갔다. 그 당시에 그린 '엘로 그리스도'이다.짙은 윤곽선과 굵은 윤곽선으로 구획을 표현하는 클로아조니즘(Cloisonnism)방식이다. 다시말해 강렬한 선으로 화면을 구획지어 대담하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화법을 일컫는다. 이 윤곽 구획 방식은 함께 작업하던 에밀 베르나르가 시작한 방식이다.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단편화된 테크닉에 반발해 시도되었다.  십자가 속에 그리스도가 분명한 이 '노랑 예수'는 경건하고 육체적으로는 무척 고단해 보인다. 되는 일도 없던 시절이라 신앙심 하나로 퐁타방 마을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에 걸려있던 작가 미상의 나무 십자가 조각상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 교회에 선물했는데, 주교가 교회에 걸을 수가 없는 그림이라고 거절당한다.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고갱의 넘어지기만 하는 뒷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든다. 여하튼  고갱의 이 그림은 시가 1천 6백억 원이 넘게 평가된다고 한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야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서양인들도 지배층으로 어느정도 정착했던지라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이 이후에 유명해졌다지만 당시의 고갱은 유명인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도 아닌 그냥 흔한 서양인 아저씨일 뿐이라 굳이 아는 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것이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타히티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Two Tahitian Women, Paul Gauguin, 1899,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51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들' 또는 '빨간 꽃과 유방'으로 불리는 이 그림은 벗은 것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이 묘사되어있다.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고갱이 이 섬과 원주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보여 준다. 화면 구성이 도발적이면서도 그 구도가 대담하고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풍만한 정감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빈곤과 고독에 시달렸고, 지병에 괴로움을 당한 데다 타히티 섬의 현지 행정 당국의 백인 관리들과 자주 충돌했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1897)]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고갱이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또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잦은 분쟁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그린후  프랑스로 보내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카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둔다. 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많던 화가 폴 고갱은 파리가 아닌 이렇게 먼 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장소가 되었다. 굳이 힘들게 그곳까지 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싶긴하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타히티에는 제대로 된 고갱의 그림을 찾을 수 없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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