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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철학적 함의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고, 좀 더 음탕한 작자들은 외설적인 의도 운운하면서 흠집을 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네 당신은 그런 대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어야한다.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그림은 분석의 소재일뿐이라고.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마네는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마네는 생상하게 이 세상을 풀어냈고, 빛과 어둠의 진실, 사물과 인간의 실제를 독특한 문법으로 표현해냈다. -에밀졸라,1867-
# 나-그림, 너 -관객

나를 향한 부정적 댓글 몇줄에도 우리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림속 당돌한 시선의 그녀는 억울하다. 파리시내 남녀들이 누드의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과 욕설을 거침없이 해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제성 높은 그림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주먹질 하기도 하고 지팡이로 후려치려는 무뢰배도 섞여있다. 고상한 척 하던 남자들이 순간 당황하고 뻘쭘해진다. 어제 밤 한 일을 들킨 것 같아 욕하고 화를 내며 위선를 감추려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올랭피아>,(1863)를 보고 당대 파리 시민들이 보인 호들갑스런 반응이다. ‘낙선전’의 작품 <풀밭위의 점심> 을 보고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던 관객들은 마네에게 또 한 방 크게 얻어 맞은 느낌이다. 당시 아카데미 학파 스타일에 길들여진 파리의 고상한 관객들이 <올랭피아>를 보고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천이나 성스런 샘물 근처에 그려져야할 여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서 부딪혔을 것 같은 여인이 무심한 듯 그림 밖을 응시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붓질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들여 그린 그림에 그들의 눈은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웬걸, 붓질이 그대로  다 보인다. 입체감이나 음영감도 없다. 평평한 느낌 그 자체다. 대신 물감을 여러번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채도가 떨어지지 않아 화사해 보이긴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나체에 대한 의례적 미화없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보이는 벌거벗은 몸을 그린거다.  그것도 거만하게 그림밖의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는 자세로 말이다. 표정에 수치심 따윈 찾아 볼 수 없다 .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이다.   머리의 꽃장식, 팔찌,벨벳 목걸이,천사가 아닌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후원자의 꽃다발, 그리고 발끝의 검은 고양이까지 현실의 매춘부를 연상하기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그래서 고상한 관객들은 천박한 작품으로 취급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그림 앞에 경호원 3명을 배치 시키고 다른 작품보다 높게 걸기도 했다고 한다.그래도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보려는 여인네들 마음 속은 어떤 꿍꿍이 속인지 궁금해진다.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빅토르 뫼랑’이란 이름의 화가 지망생이다. 아버지는 금속관련 일을 하는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이만하면 예술가 집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녀는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하다. 16살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기타를 메고가는 그녀를 보고 , 마네가 모델을 의뢰했다고 한다. 요즘같으면 길거리 캐스팅이라 해야 할 것같다. 사춘기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그 어디 쯤에 뫼랑의 신비로움이  있었으리라. 마네의 표현을 빌리면, “눈 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 라며 자유 분방함과 대담함을 함께 지닌, 그리고 화가로서의 재능까지 겸비한 그녀를 매우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마네의 예술 세계에 빼놓을 수 없는 모델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영적 멘토 역할을  창작자와  모델이라는 연장선에서 주고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인상주의 태동의 입구에서 안내자 역할로 역사에 남았다.
모델은 비난과 욕설 속에 살아 남아 사람들 속에 영원히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평범함속에 숨어 있는 단호하면서 냉정한 모습이 마네의 모델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고 전한다. 모델로서의 인내심, 대중적인 매력, 활기, 자유분방함과 대담함등 그녀의 모델로서의 자질은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연일 이어지는 비난 속에도 정작 본인은 별로 게의치 않고 일상을 살아 낸 것을 보면 어리지만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에두아르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네 주위에 늘 실험적인 젊은 화가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존 사회에 대한 반역과 낡은 미의식에 대한 혁신을 외쳤다.
상류계층에 속하는 마네가 그런 개혁에 동참하기에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마네는 할아버지와 어버지가 모두 판사였던 귀족 가문 출생의 금수저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아버지는 마네가 판사가 되길 바라셨고 화가로서의 길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17살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사원이 되기도 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1850년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 갔지만 학구적인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고 나오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 학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창작에도 고전을 모사하는 것 만큼 좋은 스승은 없는 것 같다. 당시 화단에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밀레, 쿠르베, 마네, 드가처럼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작가들과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던 작가들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마네는 돈을 버는 것과 좀 떨어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던 작가들 중 하나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던 집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게 된 최초의 그림은 <스페인 가수>이다.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런 마네가 살롱전에서 낙선하게된다.

‘낙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 위의 점심>을 보고 사람들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뻔뻔스런 그림이라며 심하게 마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 유일하게 여자만 옷을 벗고 있다. 여자의 몸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기까지 하다. 그런데 벌거벗은 여자는 부끄러운 줄고 모르고 , 오히려 관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눈앞에서 실제 벌거벗은 여인을 쳐다보다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워 한다.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년 전 조카 결혼식이 열리는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근처 유명 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는데 3층 전시장에 아이가 엄마 몸을 빠져 나오는 사진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찍혀 있어 급 당황해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적이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져 피하고 싶었다. 내밀한 부분을 누군가 보는 것 마냥 찝찝했었다. 들키고 부끄러워 숨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올라 급하게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며 내 뒷꼭지가 뜨끔 뜨끔한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비정상이었을까?^^

아무리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기성세대 심사위원들이 선뜻 그림을 선택하기에 민망하고 도발적이다는 느낌도 있었을 것 같다.
여하튼 <풀밭위의 점심>은 마네에게 인생에쓴 맛을 알게 해준 작품이다. 어마 어마한 악풀에 시달리고 ,수많은 기사, 칼럼, 사람들의 비난이 ’그림계의 이단아‘ 마네에게 쏟아진다. 당시 살롱전은 주제, 구도, 색감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마네는 이것들을 깨부수고자 했다. 중요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 신적인 사람들 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시대에 반기를 든다.

#“내가 제일 잘나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란 작품을 보면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이 피리 부는 소년을 중앙에 떡하니 세우고 배경을 과감히 없애 버렸다. 손과 발 부분을 빼고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강조한 작품이다. 1864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당시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작아지는 과학적인 원근법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없애기 위해 고민했다고 한다. 배경을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배경과 인물을 뜯어내기 위해 경계선과 같은 테두리 선을 표현했다. 표현 대상에 대한 부피감, 무게감, 덩어리감을 나타내는 양감의 느낌도 거의 없애 버렸다. 굉장히 편평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눈에 너무 익숙해서 당연한 것 같은데 당시 원근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아주 쇼킹한 뉴스거리였다고 한다. 특히 살롱전 심사 위원들에게 마네의 이 작품은 영화 <친구>의 버전을 빌어 표현 하자면,

“마네, 이제 튀는 짓 그만해라.
이만하면 많이 놀랐다 아이가”

하며 제발 그만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낙선을 시킨다.

내 입장에서 <피리 부는 소년>은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증명사진 찍은 느낌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저 흔하게 찍어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진말이다. 이 그림이 뭐라고 그렇게 말이 많고 유명할까 싶었다. 기존에 상식으로 알고 있던 원근법을 없애려무지 노력했던 작가 마네의  고뇌에 찬 시도임을 알았을 때 보이는 것들이 정말 달리 보였다. 고전 티치아노의 작품<우르비노의 비너스> 에 아름다운 여인이 옆으로 누워있는
소위 ‘비너스의 구도’가 있다. 이 작품의 구도를 똑같이 따라한 작품이 <올랭피아>이다. 모델만 바꿨을 뿐인데,
“ 이 작품은 비난할 가치도 없다.”
’임산부와 노약자는 전시를 보러 가지 마라.‘
라는 신문기사가 실릴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림속 비너스나 여인들이 누드로 등장을 했을 때 장신구, 옷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 속 그녀는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커, 목걸이, 구두, 팔찌 등 이 여인이 인간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인간의 여인뿐만 아니라 이 모든 아이템들이 당시 파리에서 유행했던 매춘부들의 옷차림이라고 한다.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도 고급 매춘부들이 즐겨쓰던 가명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분노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이 손가락질 하던 매춘부들의 문화가 시간이 지나 귀족 부인들이 따라 했다는 걸 보면 아이러니하다.

이전까지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를 위해 그려진 비너스 그림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림속<올랭피아>가 관람객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듯 바라봐지고 전시가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의 시선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주객이 바뀐 그림 앞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하고 손가락질 했던 거다. 어쩌면 미술사속 커다란 흐름은 기존의 미술사를 부정하고 혁신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순환의 과정이란 생각을 해본다.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이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어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인상주의#마네(1)#풀밭위의 점심#올랭피아#피리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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