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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라면 한번쯤 가져보는 환상이 있다. 바로 무대위의 발레리나다. 발레복을 입고 여리여리한 무용수가 포즈를 취하는 장면은 언제봐도 부러운 장면이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꽃다발이 무대 위로 던져질때면 그 부러움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다 이런 환상이 깨져버린 날이 있었다.
바로 강수진 발레리나의 흉한 발 사진을 보고서였다. 혹독한 연습으로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흉한
발을 보며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소리없이 뿌려야했을 그녀의
눈물과 뼈를 깎는 자기 훈련이 일상처럼 지루하게 반복되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무한한 시간을 무너져 내리는 자아를 수시로 다독이며 자기를 넘어 선 찐 예술가로서의 모습이 일그러진 발가락을 보며 진한 울림으로 공명했다.



[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1881), 오르세미술관


#무용의 화가 ‘드가’
‘무용의 화가’로 불리우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열네 살의 어린 발레리나>이다. 언뜻보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드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한 조각 작품으로 ,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발레리나가 마주한 참담한 현실과 육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운명의 선택 앞에서 떨면서도 짐짓 의연한 척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1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고 있는 발레리나의 모습이고 집안의 생계를 모두 짊어져야 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당시 발레리나는 발레를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보고 귀족에게 후원을 받는 하층민 출신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이
예술로서의 발레가 아닌 발레리나에게 투자를 했을 뿐이고 자신이 후원하는 발레리나가
등장할 때 무대의 뒤편에서 관람하거나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원의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어린 발레리나들이 후원하는 귀족에게 성상납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가 작품에 등장하는 피곤하고 지친 발레리나 옆에 표정을 숨긴채 딸의 고통을 묵인하는 엄마의 무관심한 모습이 인정사정 없는 매니져 같아 보인다.

’그런 일은 내가 알바 아니고 너는 후원자들에게 잘 보일 생각이나 해. 너도 알다시피 당장우리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라고 읽히는 것은 내 과한 상상력일까?


무대 안팎을 다니며 개인적 움직임을 그려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무용수 선생님과 잘 안다는 이유로 무대 뒷편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장면들이 드가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무대의 앞• 뒤에서 리허설 연습 장면을 그린 그림속에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를 본다. 슬프게도 그림 속 그녀들은 서로가 소외되고 서로가 분산된 채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드가 덕분에 편하게 그가 살아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시대상과 문화 그리고 그림 속  인적구성을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과 비교도 해보고 추측도 해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기록적인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작품을 본 평론가  
위스망스는 “조각의 혁명”이라며 극찬했다.
당시에 ‘누가 조각에 실제 의상과 신발을 입힐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점에서다.
의상과 신발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입혀놓은 거라고 생각했을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이런걸보면 드가는 조각이라는 재료의 한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얼마나 기발하고 혁신적인 예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족 이야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진정한 파리지앵 ‘드가’와 그의 가족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 혁명이후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크게 전유럽으로 번지면서 생활양식은 물론 생각들도 크게 변하는 산업화시대였다.

에드거 드가는 상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그의 본명은 일레르 제르맹 애드가 드가(Hilaire-Germain-Edgar De Gas)이다.
그의 풀네임 이름중 ‘일레르(Hilaire)’는  프랑스 대혁명 때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가로 성공한 할아버지에게서 딴 것이고,
제르맹(Germain)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목화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외조부에게서 딴 것을 표나게 조합하여 이름에 짜맞춘 아버지의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드가 집안 역시 이탈리아와 미국에 은행과 기업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40대까지 돈 걱정없이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었던 드가의 밑천이
바로 양쪽 집안의 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했기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의 영향일까?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여성‘ 을 주제로 노년에 까지 그림을 그려낸 걸 보면 말이다.
#<개의 노래>


[The Song of The Dog], (1875-1877), The Cafe Concert



드가는 자신이 즐겨 갔던 카페를 배경으로 <개의 노래>를 그렸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 웃음이 나온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부르는 장면이 개와 닮아 붙여진 여자 가수의 별명이라고 한다. 다시 보니 우리 집 키우는 두마리 개의 제스처랑 너무 닮았다.^^

작품의 모델은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 엠마 발라동이다. 드가는 그녀의  노래에 , “발라동의 커다란 입에서 흘러나오는
관능적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웠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네.“ 라며 찬탄를 보냈다고 한다.
<개의 노래>라는 작품은 당시 ‘음악을 회화에 어떻게 담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드가 나름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인 위주의 그림 속 주인공이 이방인의 얼굴로 바뀌어 볼거리의 풍성함를 함께 드러내 준다.
근처 카페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즐기며 노래를 음미하고 있었을 당대 파라지앵들의 일상을 느껴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회화는 약간의 수수께끼, 약간의 모호함,
약간의 환상을 필요로 하는 거야. 당신이 만약 의미를 완전하게 읽어버리면 더없이 지루하게 되고 말걸.”(드가)



#호기심과 진실

드가는 ‘호기심’이 많았던 작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아 그런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덕분에 작품의 주제도 폭이 참 넓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 그리던 전기를 지나
점차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으로 옮겨오는
후기의 화풍속에 무용수, 일상의 여인들, 경마장 속 움직임도 그의 손끝에서 잡아낸다. 드가는 누구보다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회화는 진실을 쫓아야 된다.”
현실 속 진실과 회화의 거리감은 솔직히 멀다.
움직임을 그리려할수록 움직임은 화가를 배신한다. 결국 진실을 추구하지만 진실을 잡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당시 드가는 예술은 그저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 뿐이다 라는 결론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리를 꾸준히 성찰해왔기 때문에 드가의 성찰적인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고지식한 작가라는 말이다. 그림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자리에서는 무엇인가 잘려나가게 된다. 이 가장자리를 자르는 방식에서 예술가들은 의외로 자기 나름의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작가는 대범하고 어떤이는 교묘하게 말이다.
<모자점에서>(1882)라는 작품 속에 드가의 동료 화가였던 메리커셋이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써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거울이 점원을 몽땅 잘라서 가려버린다. 그래서 이 점원은 얼굴이 없는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 점원은 불만스럽겠지만 보는 우리는 이런 부분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준다.

#드가의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 고등학교 시절 ,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고전 명화들을 모사하는 일을 했다.
좋은 작품을 보고 연습 하는 것만큼 큰 공부는 없는 것 같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를 하는 방이 따로 있었고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선 선배들의 작품들이 후배들의 그림 실력을 업그래이드 시키는 훌륭한 교재로써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 박물관 지도를 보면 드가가 습작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리만 건너면 드가의 작품을 모아 놓은 오르세 박물관이 보인다. 수없이 드나들었을 드가의 젊은 열정이 지금은 그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미래의 드가를 꿈꾸는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22살에 에콜데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미술을 전공한다. 이곳은 세계 제일의 정통 미술학교로 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배출한 곳이다.
쥘 마자랭 추기경이 소묘, 회화, 조각, 판화, 건축과 기타 다른 매체에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특히 루이 14세때 이 학교 졸업생들을  선발하여 베르사유 궁전의 왕실의 거주지들을 장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로인해 왕실의 사치에 백성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이곳 출신 예술가들을 열거 하자면 제리코, 들라크루아, 앵그르, 모네,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등이 있다.

드가는 24세에 이탈리아 사는 고모를 방문하러 간 적이 있다.  벨레빌 가족  <the bellelli family>,(1858) 이라는 작품으로 고모와 두딸 그리고 사업가 고모부의 어정쩡한 가족 관계를 묘사한 초기 작품이다.

상복입은 차가운 표정의 고모와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 가족과 유리된 고모부의 뒷모습이 드가의 손을 통해 잘 표현된 작품이다.  10년 동안 붙들고 그린 꼼꼼한 작품이라고 한다. 화목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 보는 내내 불편하다. 남편은 뭔가 항변하고 싶은데 씨알도 안먹힐 것 같은 싸늘한 표정의 고모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엄마편에 적극적인 아이와 웬지 중간적 존재로 애매함을 가진 아이의 모습도 대조적이다. 이 작품을 보면 드가는 미묘한 심리 묘사의 달인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탈리아에 몇년 머물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배운다. 흔히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추측하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드가는 여행에서 자극 받거나 그로인해 화풍이나 스타일이 변한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드가가 마네에 이끌려 카페 게르브아에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 순간이 결정적 순간으로 본다. 얼떨결에 인상주의 화풍의 리더격이 되어 버린 마네를 따르는 젊은 작가들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시점이란 얘기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 그림 모사를 하던 드가에게 마네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고 한다. 20대 후반의 드가를 30대에 들어선 마네가 함께 카페게르브아에 모여있던 동료들에게 데리고 간다. 그야말로 동아리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고 논쟁으로 날을 새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있던 곳이다. 마네가 만들어준 초고속 인상파 네트워크인 셈이다. 당대 실험적인 신선한 이념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드가는
‘독설 대마왕’으로 불리웠을 정도로 쓴소리를 많이 했다고한다. 그래도 결이 비슷한듯 다른 마네와 20년간 예술가로서 미묘한 경쟁의식을 가지며 교감해 왔다고 한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50대에 죽은 마네의 그림을 식견이 부족한 가족이   그의 그림을 잘라서 팔려고 하자 83세까지 살았던 드가가 마네의 짤려진 그림을 수습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마네는 드가가 그려준 <마네 부부>,(1868~69)의 그림을 부인 얼굴쪽 부분만 잘라 버렸다고 한다. 마네는 이에대해 변명도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 부인에 대한 강박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거란 추측이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 마음이 다쳐 다시는 안볼텐데 그래도 예술가로서 마네의 그림이 잘려지는 모습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서로의 예술세계는 보호해 주고 싶었던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양심 같은 것 아니었을까!



보자르를 졸업했지만 파리의 살롱 문화에는 별로 흥미를 못느낀것 같다.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일곱 번 출품하여 인상주의를 지지했지만  ‘인상주의‘라는 말을 싫어해서 스스로 사실주의 화가 또는 자연주의 화가로 불리길 더 선호했다. 결국 독자적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것을 보면 말이다.

드가는 외롭고 또 고독한 화가이며 매우 개인적이고 은둔적인 생활신조를 지닌 화가같다.  
자신의 작업실에 지인들을 한번도 초대하지 않은걸 보면 말이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간섭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더욱이 예술 창작 활동을 하는 미술가는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더 그런생각이 앞선다. 예술가를 구도자로 착각한것 아닐까싶다.



#드가를 보는 시선 르네상스,바로크와 같이 한 양식이 몇 세기동안  지속대던 시대가 끝나고 , 한 사조가 발생하면 곧바로 그것에 맞대응하는 다음 사조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19세기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관통하는 중심에 ‘드가’의 예술이 있다. 그를 이해하지 않고 그의 고집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사조는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출현시키고, 고갱을 아꼈으며, 쇠라의 작품을 걸 수 있게 용인해준 작가다. ‘메리트 모리조 ’라는 여성 동료 화가를 부모님의 반대, 마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전방위 설득시켜 인상주의 화풍안에 받아 들인 사람도 그다. ‘메리커셋’이란 미국인 여성에게 제 1회 전시를 가능하게 도운 사람 역시 드가다.
“ 내겐 추도사 같은 건 필요 없네.
그저 내 무덤 앞에서 그는 진정으로 데생을 사랑했노라고 말해 주시게”-드가-
드가의 삶을 살펴 보며 요즘처럼 사진 기술이 좋아 온갖 형태의 실험을 쉽고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일일이 눈으로 관찰하고 손으로 그려낸 그의 시간들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수없이 정교하게 그려댔을 별 것 아닌 선 한줄이 고민끝에
그려진 것을 안다. 원하는 동작을 그려내기 위해 무용수들의 각도를 계산하고, 모델의 머리를 4시간 동안 빗겨 주며 새로운 감을 잡아갔을 드가의 오랜 일상을 너무 쉽게 몇 줄 요약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예술이란 이름을 달고
자신을 넘어서려 애썼던 그와 그녀들에게 마음의 박수를 쉼없이 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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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철학적 함의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고, 좀 더 음탕한 작자들은 외설적인 의도 운운하면서 흠집을 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네 당신은 그런 대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어야한다.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그림은 분석의 소재일뿐이라고.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마네는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마네는 생상하게 이 세상을 풀어냈고, 빛과 어둠의 진실, 사물과 인간의 실제를 독특한 문법으로 표현해냈다. -에밀졸라,1867-
# 나-그림, 너 -관객

나를 향한 부정적 댓글 몇줄에도 우리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림속 당돌한 시선의 그녀는 억울하다. 파리시내 남녀들이 누드의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과 욕설을 거침없이 해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제성 높은 그림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주먹질 하기도 하고 지팡이로 후려치려는 무뢰배도 섞여있다. 고상한 척 하던 남자들이 순간 당황하고 뻘쭘해진다. 어제 밤 한 일을 들킨 것 같아 욕하고 화를 내며 위선를 감추려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올랭피아>,(1863)를 보고 당대 파리 시민들이 보인 호들갑스런 반응이다. ‘낙선전’의 작품 <풀밭위의 점심> 을 보고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던 관객들은 마네에게 또 한 방 크게 얻어 맞은 느낌이다. 당시 아카데미 학파 스타일에 길들여진 파리의 고상한 관객들이 <올랭피아>를 보고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천이나 성스런 샘물 근처에 그려져야할 여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서 부딪혔을 것 같은 여인이 무심한 듯 그림 밖을 응시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붓질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들여 그린 그림에 그들의 눈은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웬걸, 붓질이 그대로  다 보인다. 입체감이나 음영감도 없다. 평평한 느낌 그 자체다. 대신 물감을 여러번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채도가 떨어지지 않아 화사해 보이긴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나체에 대한 의례적 미화없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보이는 벌거벗은 몸을 그린거다.  그것도 거만하게 그림밖의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는 자세로 말이다. 표정에 수치심 따윈 찾아 볼 수 없다 .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이다.   머리의 꽃장식, 팔찌,벨벳 목걸이,천사가 아닌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후원자의 꽃다발, 그리고 발끝의 검은 고양이까지 현실의 매춘부를 연상하기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그래서 고상한 관객들은 천박한 작품으로 취급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그림 앞에 경호원 3명을 배치 시키고 다른 작품보다 높게 걸기도 했다고 한다.그래도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보려는 여인네들 마음 속은 어떤 꿍꿍이 속인지 궁금해진다.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빅토르 뫼랑’이란 이름의 화가 지망생이다. 아버지는 금속관련 일을 하는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이만하면 예술가 집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녀는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하다. 16살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기타를 메고가는 그녀를 보고 , 마네가 모델을 의뢰했다고 한다. 요즘같으면 길거리 캐스팅이라 해야 할 것같다. 사춘기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그 어디 쯤에 뫼랑의 신비로움이  있었으리라. 마네의 표현을 빌리면, “눈 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 라며 자유 분방함과 대담함을 함께 지닌, 그리고 화가로서의 재능까지 겸비한 그녀를 매우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마네의 예술 세계에 빼놓을 수 없는 모델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영적 멘토 역할을  창작자와  모델이라는 연장선에서 주고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인상주의 태동의 입구에서 안내자 역할로 역사에 남았다.
모델은 비난과 욕설 속에 살아 남아 사람들 속에 영원히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평범함속에 숨어 있는 단호하면서 냉정한 모습이 마네의 모델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고 전한다. 모델로서의 인내심, 대중적인 매력, 활기, 자유분방함과 대담함등 그녀의 모델로서의 자질은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연일 이어지는 비난 속에도 정작 본인은 별로 게의치 않고 일상을 살아 낸 것을 보면 어리지만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에두아르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네 주위에 늘 실험적인 젊은 화가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존 사회에 대한 반역과 낡은 미의식에 대한 혁신을 외쳤다.
상류계층에 속하는 마네가 그런 개혁에 동참하기에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마네는 할아버지와 어버지가 모두 판사였던 귀족 가문 출생의 금수저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아버지는 마네가 판사가 되길 바라셨고 화가로서의 길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17살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사원이 되기도 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1850년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 갔지만 학구적인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고 나오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 학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창작에도 고전을 모사하는 것 만큼 좋은 스승은 없는 것 같다. 당시 화단에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밀레, 쿠르베, 마네, 드가처럼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작가들과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던 작가들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마네는 돈을 버는 것과 좀 떨어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던 작가들 중 하나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던 집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게 된 최초의 그림은 <스페인 가수>이다.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런 마네가 살롱전에서 낙선하게된다.

‘낙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 위의 점심>을 보고 사람들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뻔뻔스런 그림이라며 심하게 마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 유일하게 여자만 옷을 벗고 있다. 여자의 몸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기까지 하다. 그런데 벌거벗은 여자는 부끄러운 줄고 모르고 , 오히려 관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눈앞에서 실제 벌거벗은 여인을 쳐다보다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워 한다.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년 전 조카 결혼식이 열리는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근처 유명 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는데 3층 전시장에 아이가 엄마 몸을 빠져 나오는 사진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찍혀 있어 급 당황해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적이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져 피하고 싶었다. 내밀한 부분을 누군가 보는 것 마냥 찝찝했었다. 들키고 부끄러워 숨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올라 급하게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며 내 뒷꼭지가 뜨끔 뜨끔한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비정상이었을까?^^

아무리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기성세대 심사위원들이 선뜻 그림을 선택하기에 민망하고 도발적이다는 느낌도 있었을 것 같다.
여하튼 <풀밭위의 점심>은 마네에게 인생에쓴 맛을 알게 해준 작품이다. 어마 어마한 악풀에 시달리고 ,수많은 기사, 칼럼, 사람들의 비난이 ’그림계의 이단아‘ 마네에게 쏟아진다. 당시 살롱전은 주제, 구도, 색감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마네는 이것들을 깨부수고자 했다. 중요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 신적인 사람들 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시대에 반기를 든다.

#“내가 제일 잘나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란 작품을 보면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이 피리 부는 소년을 중앙에 떡하니 세우고 배경을 과감히 없애 버렸다. 손과 발 부분을 빼고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강조한 작품이다. 1864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당시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작아지는 과학적인 원근법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없애기 위해 고민했다고 한다. 배경을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배경과 인물을 뜯어내기 위해 경계선과 같은 테두리 선을 표현했다. 표현 대상에 대한 부피감, 무게감, 덩어리감을 나타내는 양감의 느낌도 거의 없애 버렸다. 굉장히 편평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눈에 너무 익숙해서 당연한 것 같은데 당시 원근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아주 쇼킹한 뉴스거리였다고 한다. 특히 살롱전 심사 위원들에게 마네의 이 작품은 영화 <친구>의 버전을 빌어 표현 하자면,

“마네, 이제 튀는 짓 그만해라.
이만하면 많이 놀랐다 아이가”

하며 제발 그만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낙선을 시킨다.

내 입장에서 <피리 부는 소년>은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증명사진 찍은 느낌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저 흔하게 찍어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진말이다. 이 그림이 뭐라고 그렇게 말이 많고 유명할까 싶었다. 기존에 상식으로 알고 있던 원근법을 없애려무지 노력했던 작가 마네의  고뇌에 찬 시도임을 알았을 때 보이는 것들이 정말 달리 보였다. 고전 티치아노의 작품<우르비노의 비너스> 에 아름다운 여인이 옆으로 누워있는
소위 ‘비너스의 구도’가 있다. 이 작품의 구도를 똑같이 따라한 작품이 <올랭피아>이다. 모델만 바꿨을 뿐인데,
“ 이 작품은 비난할 가치도 없다.”
’임산부와 노약자는 전시를 보러 가지 마라.‘
라는 신문기사가 실릴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림속 비너스나 여인들이 누드로 등장을 했을 때 장신구, 옷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 속 그녀는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커, 목걸이, 구두, 팔찌 등 이 여인이 인간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인간의 여인뿐만 아니라 이 모든 아이템들이 당시 파리에서 유행했던 매춘부들의 옷차림이라고 한다.

<올랭피아>라는 이름 자체도 고급 매춘부들이 즐겨쓰던 가명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분노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이 손가락질 하던 매춘부들의 문화가 시간이 지나 귀족 부인들이 따라 했다는 걸 보면 아이러니하다.

이전까지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를 위해 그려진 비너스 그림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림속<올랭피아>가 관람객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듯 바라봐지고 전시가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의 시선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주객이 바뀐 그림 앞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하고 손가락질 했던 거다. 어쩌면 미술사속 커다란 흐름은 기존의 미술사를 부정하고 혁신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순환의 과정이란 생각을 해본다.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이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어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인상주의#마네(1)#풀밭위의 점심#올랭피아#피리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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