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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 희끗 머리에 서리가 온 듯하고 축축 파마가 풀리기 시작하면 버티다 가는 곳이 미장원이다.

공공의 장소지만 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앉아서 서비스를 기다리는 손님의 숫자만큼 각자 살아온 이야기가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연령도 다양하고 인종도 다양하다. 마치 옛날 빨래터에 온 동네 여인들이 식솔들 빨래를 두들기며 왁자지껄 자신들의 사는 이야기를 풀어 놓고 해소하고 쓸만한 정보를 얻어가는 특별한 공간처럼 말이다.

몇 시간을 머리에 롤을 말고 앉아 있다보면 당연히 옆 사람과 간단한 얘기가 오고 가고 마음이 맞는다 싶으면 몸을 좀더 기울여 상대의 이야기를 내가 열심히 듣고 있다는 몸짓을 취한다.

미장원 가운을 골라 입고 민낯의 얼굴을 마주 하고 있으면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개성이 여과없이 들어나기 시작한다. 오늘도 파마약 냄새 맡으며 흘러 나오는 노래 소리에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년의 여자 손님 목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려왔다. 눈을 떠 그곳을 바라보니 백인 남편과 나란히 앉아있는 까만 단발 머리의 중년 여성이 보였다.

‘영어가 유창한 걸 보니 한인 2세인가?’

잠시후 빈 의자가 있는 내 옆으로 그녀가 왔고
처음 만난 그녀에게 목소리가 너무 좋다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별 뜻없이 시작한 대화는 그녀가 살아온 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짧고 강렬하게 펼쳐 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들은 내용을 짜집기하며 열심히 머리속에 블록쌓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아이들, 자신의 직업, 소신, 요즘하는 일 …등등
고구마에 주렁 주렁 달려 나오는 생각지 않은 굵직한 얘기들이 민낯의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게 했다. 적당히 추임새도 넣어가며 그녀의 이야기에 나 역시 몰입해서 들었고 그녀의 굵직한 삶이 남자로 태어 났으면 훨씬 좋았겠다 싶었다.

그녀와의 대화중 인상 깊었던 세 가지는
이것이다.

첫째, “고양이는 호랑이를 절대 키울 수 없다.” 이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을 때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자식의 성공을 무기로 나를 증명해 보이고자 했던 어리석은 젊은 엄마 시절의 내 모습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둘 째 ,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의대 공부하는 아이들의 힘듬을 함께 나누고자 50세대 변호사 공부를 시작해 변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많지만 직접 자식의 힘듬을 공감하겠다며 실천에 옮기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겠나!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며 헛헛한 중년을 엉뚱한 곳에 쏟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고정 관념을 깨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는 그녀의 뒷 모습에 어느 자식이 힘들다고 포기하겠는가?

셋 째, 머리를 건강하게 길러 어린 암환자들에게 줄 머리를 도내이션 하신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건강하게 모발을 잘 관리해 기부한 머리카락이 예쁜 가발이되어 암 환자 아이들에게 보내지고 그 가발을 쓰고 찍은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너무 좋다고 하신다.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훨씬 행복함을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녀는 남은 시간을 세상의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했다.

짧은 시간 의외의 장소에서 나이를 잘~  살아낸 성숙한 어른 한 명을 만난 기분이 들어
꼼짝없이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새로운 길을 내고 열심히 소신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에게 화려하지 않아도 특별함이 있다.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몸에 베인 태도는 겸손으로 드러난다. 배나 사과 크기의 능력을 가진이들이 앵두 크기로 낮아질 때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의 낮은 곳으로 환원하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신앙을 가진 나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일상에서 결코 만나 볼 수 없는 사람을 미장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내 삶에 조연으로 등장한 그 분들께
고맙다는 이야기를 이 글을 통해 해드리고 싶다. 너무 바빠 볼일은 없을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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