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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기 매체를 통해 가장 많이 보았던 직업군이 의료분야다. 밀물 들어 오듯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은퇴한 분들까지 현장에 투입되어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마치 ‘희망’이 씨뿌려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에 묵묵히 소명을 다한 그들 주변에 사람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코로나 시기 유명세를 탄 책이 실존주의 문학의  대가 알베르 카뮈의 첫 장편소설  <페스트>라고 한다.

야생동물이 옮겨온 병으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고,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잘못된 종교에 대한 신념으로 바이러스가 더 급속도로 번져가고, 사재기, 극심한 경제상황,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등

허구에서 바라본 전염병 얘기가 시간을 달리해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아  그의  선견지명에 새삼 놀랍다.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 오랑에서 자원 보건대 조직을 만들고 ‘페스트’와 싸우는
의사 리유를 향해 이 도시에 잠깐 왔다가 발이 묶여버린 의심 많은 기자 랑베르의 질문 장면이 나온다.

“도대체 여기에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리유의 대답은 간단했다.

“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다른 고장에서 온 자신은 상관없는 듯이
신문기자 랑베르가 다시 묻는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이 부분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머리에 박힌 몇몇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이국종 응급의와 코로나 시기 자발적으로 의료 봉사를 간 의료진들이 떠오른다.

너무도 성실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해 인간의 성실성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업의 본질을 앞세우고 자기가 맡은 직분을 묵묵히 완수해 눈앞의 닥친 재앙의 공포에 맞서는 모습은 불가능해 보여 그들을 더 빛나게 했던 것 같다.



나는 하루에도 수차례 누워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일단  환자 가까이에서 눈빛을 교환하고 나면,그 환자가 오래 기다린 탓에 힘겨워하고 있다거나, 뒤늦게 나타난 내게 억하심정을 호소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습관처럼 환자에게 다가가 이마에 깊게 푹, 손바닥을 얹는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교수님처럼 그러면 환자의 이마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방금까지 다급했던 땀내와 열기가 훅 밀어닥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 무슨일로 오셨나요?”
그리고 가만히 그의 마음을 느껴본다.
그 사람에게, 같은 사람으로 성큼 다가가는 느낌이다.
-남궁인,<지독한 하루>,문학동네,2017- 이 글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따뜻해진다. 차갑고 권위적이고 냉소적인 의사가 아니라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환자의 이마를 덮어주는 행위!
아프고 기다림에 지친 환자의 마음을 순식간에 순한 양으로 돌려버리는 마법이 있다.
이마를 덮어주는 이를 향해 늦었다며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할머니, 엄마, 그리고 누군가가 내 이마를 덮어주던 그 따스한 손길을 우리는 공통 분모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사람 냄새나는  의사라면  기꺼이 맡기고 싶지 않을까? 환자를 돈이나 숫자가 아닌 사람대 사람으로 대해주지 말이다.

나의 병원 경험은 늘 유쾌하지 않았다. 이국땅에서 낯선 이방인 의사 앞에 진찰을 받을때면 속시원히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함이 몰려왔다.한국의 의료시설과 비교가 되어 신뢰감도 떨어졌다.

그날도 억지로 정기적인 유방암 검진을 하던 날이었다. 의례적인 서류 작업을 마치고 초조하게 대기실 밖에서 이름이 불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에어컨이 켜진 진찰실에 들어가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마음도 몸도 얼어붙고 살갗에 와 닿는 에어컨 바람이 더 써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검사를 끝내고 진찰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예정에 없던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한다.

‘아, 뭐지.혹시…’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이 스파게티가 된다.

다시 환자복으로 갈어 입고 초음파실에 누웠다. 이럴때 누가 옆에라도 있었으면…

의사는 보이지 않고 이제 막 일을 시작한듯한 앳된 얼굴의 간호 보조원이 나를 향해 괜찮을거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의례적인 웃음이 아닌 가족을 대하는 웃음이 느껴져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 몸의 온도를 한 칸 올려주는 것 같았다. 의사는 옆 방에서 전달된 초음파 사진을 보며 따로 판독하고 있다고 했다. 의료 시스템이 섬세하게 분화되어 있다보니 어쩌다 방문하는 나같은 환자는 늘 헷갈린다. 어쨌든 그날 나의 치료제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의사가 아닌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준 그 어린 친구였다. 그당시 무표정한 얼굴에 타성에 젖은 목소리로 환자들에게 초조함과 소외감을 느끼게 한 스태프보다 업이 아닌 업의 본질을 느끼게 해 준 의료진은 어린 그녀로 기억된다.

솔직히 평상시에 그런 미소를 보았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았을거다. 불안하고깨지기 쉬운 환자들 마음자리에 ‘환한 미소’와 다독여 주는 말 한마디가 그때 그 장소에서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다.

딱딱하고 무표정한 의료진들 뒷켠에 환자들의 처지를 일일이 공감하다 번아웃된 의료진들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한다. 엄청난 환자수에 밀려 의료진들도 어쩌면 돌봄을 받아야하는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환자들을 향해 다가서려는 노력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그들만의 업의 가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옆 사람 떡이 더 커보이기 시작하면 떠올려 보라. 내가 지금 업의 본질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위한 밥벌이가 사실은 상대도 먹여 살리는 중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업의 본질을 지키려다 깨져 나가는 바보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오히려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이마
                        허은실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허은실,<이마>,[나는 잠깐 설웁다],문학동네,2017

#코로나#의료진# #업&업의 가치#이마얹기#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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