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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결혼 기념일이다. 달력에 아무리 커다랗게 표시를 해 놓아도 우리집 짝꿍은 무덤덤한 중년의 한 사내다. 나역시 뭔가 요구하기에 감흥이 없어진지 오래다. 귀찮아서 말이다. 그냥~ 무탈하게 지나온 시간에 감사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늦은 저녁을 먹여 세 남자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설거지를 잠깐 미뤄두기로 했다. 구독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한 작가의 작품을 보다 그림 한 점이 눈에 쏘옥~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서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꾸 볼 수록 저 단발머리 소녀의 수줍은 듯
보이는 붉은 두 뺨이 자꾸만 내 마음을 과거로 과거로 데려가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그려진 그림 속에 내 모습도 보이고, 친구들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림 속 여백에 채워진 몇 안되는 소품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내게,

‘나, 기억나지?’

하며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마음이 적당히 뜸이 들고 나니
그림 앞에 무장해제한 채 서 있는 내 순수했던 마음이 보인다.



단발 머리 소녀를 천천히 보고 있자니 초등학교 친구 하나가 불쑥 얼굴을 디밀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친정 엄마 돌아가셔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하고 다른 공간에서 서로의 일상을 챙기느라 잊고 있었다. 사람 노릇하며 사느라
내쪽에서 연락을 거의 끊고 살다시피 했었다.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말이다.

그녀를 만난 시간은 짧았다. 신기하게도 함께 공유한 추억은 경계를 금방 허물고 그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헤어지며 주고 받은 전화 전호는 또 일상이란 이름앞에 서랍 속에 들어가 언제 꺼낼 지 모를 잠금 상태로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내 성격도 참~ 이상도 하지!
그냥 쉽게 연락하면 될껄 …
미국와서 부치기로 한 내 마음담긴 소포 꾸러미는 아직도 내용물이 채워지지 못한 채 공수표가 되어 마음 한켠을 무겁게한다.
자꾸만 후 순위로 밀려가는 순수라는 이름의 우정!


남도 출신의 작가 ‘신철’은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착해지고
순수해졌면 좋겠어요.”

라고 했다. 그런의미에서 그의 그림에 내가 항복했다. 그의 뭉툭한 붓끝에 내 마음이 깊게 찔렸다. 한 번 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으로 이미 시간 여행을 다녀왔으니 말이다.

핸드폰 배경 화면에 그의 그림을 깔고 검지 쓰윽~하고 화면을 넘기니 행복해진다.
질릴 때까지 그의 작품이 주는 순수를 한동안 즐기는 것으로 다가올 결혼 기념일의 밍밍함을 대신하기로 했다. 내가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며 그림으로부터 받은 작은 위로다.
# 신철#순수#동화# 착함# 친구#우정#결혼 기념일# 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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