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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색채분할은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
'심사 없고, 포상도 없다.(No jury nor awards)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 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 -Impression),1898
마티스의 작품을 최초로 구매해 준 사람
독립미술가 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앙데팡당)의 창립회원 중 한 명
세일링(Sailing)을 좋아함
점묘법

 

 

7개 힌트의 주인공은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1863,11,11-1935,8,15)]이다. 처음에 그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했다. 그러다 쇠라와 함께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며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쇠라를 대신해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된 화가다. 일찍 가버린 동료 화가의 빈자리를 그는 어떻게 그림과 삶으로 채워갔을지 따라가 보자.

 

 

 

 

 

 

2. 생애

 

 

파리 태생이고 원래는 건축 쪽의 수련을 받고 있었으나, 18살 예민한 시기 모네의 작품전을 보고난 후 화가로서의 길로 들어선다. 

미술사에서 조르주 쇠라와 함께 '신인상중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평가받으며, '앙데팡당전'을 창립한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쇠라의 조직적인 작업 방식과 색에 대한 이론에 충격을 받아 쇠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친구가 되며, 신인상주의와 분할주의 방법을 묘사함으로써 후계자가 된다. 쇠라의 영향으로 인상주의의  짧은 붓 터치를 포기하고, 원색의 작은 점을 과학적으로  이웃하게 찍어 캔버스 위에서가 아니라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점묘주의의 정의를 구현해 낸다. 상상만으로도 섬세하고 눈과 팔에 무리가 갈 것 같다. 작품하나가 제대로 나오려면 몇 년은 기본으로 기다려 줘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모든 미술사는 기존 앞 세대의 흐름에 반기를 들며 탄생하는 것이 숙명이란 생각을 해본다. 당대 젊은이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자양분으로 그들의  열정까지 덧대어지며 미술사의 큰 물줄기가 방향을 튼다. 시냐크와 쇠라의 시작도 인상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실험을 하고 주류로 인정받기 까지 화가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평생 숙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 아닐까 싶다. 수없이 질문했을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일까?라는 스스로 의 질문에 작품으로 증명해 내는 그들의 뒷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쳐주고 싶어 진다. 그 결과물이 작품으로 승화되었음을 알기에 그들의 작품 앞에 서면 거친 숨결이 되어 오감을 자극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본다.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섞여 또 다른 이야기로 풍성해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누군가는 펑펑 울며 힐링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잃었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왔던 제자리로 씩씩하게 돌아가는 치유의 경험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폴 시냐크는 조르쥬 쇠라(Georges Seurat)와 함께 독립미술가협회를 만들어 '심사 없고, 포상도 없다.'라는 슬로건으로 파리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고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완전히 자유롭게 대중의 판단에 맡기도록 예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영향으로 24회 독립작가전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미술사에서 정의내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sme)'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시냑(Paul Signac,1863-1935)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이론이자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특히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된다고 한다.

 

 

 

 

 

 

2023.03.28 - [지식&교양] -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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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이었던 쇠라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영향은 그의 그림에도 미쳐 그가 이듬해 그려낸 <우물가의 여인들>이란 작품에 고스란히 남겨진다. 전문가들은  시냐크의 이 작품이 쇠라의 유작이 된 <서커스> 작품의 영향을  은연중 많이 받았다고 평가한다.

 

 

 

 

 

 

<우물가의 여인들,1892,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

 

 

 

 

 

 

<우물가의 프로방스 여인들,1892> 제9회 앙데 팡당 전시회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지중해의 작은 항구 마을 생 트로페를 배경으로 한 점묘법 그림이다. 황금 언덕, 푸른 바다, 두 명의 여인, 그리고 이미 물을 길어 언덕길을 오르는 여인 등 이야깃거리가 풍성해 보인다. S자 모양의 황금 언덕을 기준으로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푸른 바다를 쇠라의 유작인 <서커스, 프랑스 오르세 박물관, 1891> 작품과 비교해 관객이 앉아있는 정적인 공간과 같은 느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반대편 여인들이 있는 동적인 공간을 <서커스> 작품에서 서커스 단원들이 말위나 채찍을 휘드르는 동적인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듯 그려졌다는 평가다. 개인적으로 저 그림을 보고 놀랐던 점은 우물가 풍경이 서양이나 동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여인네들의 옷차림과 항아리 형태가 다를 뿐 물을 길어 올리며 주고받았을 일상의 잡다한 얘기들은 왠지 비슷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작은 시골동네 소식을 이곳 아니면 어디서 듣겠는가 말이다.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추측해 본다. 또한 '점묘법'을 지키기 위한 부담감도 함께 느꼈을 시냐크의 개인적 고뇌도 생각해 보게 된다. 

 

 

 

 

 

 

 

19세기 후반 시냐크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프랑스 무정부주의 사상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체제의 변화 방향성을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시냐크는 아나키즘 잡지에 그림을 실을 만큼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산업화로 인해 부의 양극화와 신흥 자본주의가 사회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AI로 인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충격만큼 그 당시 프랑스 시민들 또한 신문물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과 그럴 환경이 조성되지 못해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 간의 격차가 엄청났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Portrait of Felix Feneon)>

 

 

 

 

 

작품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에서 시냐크의 이러한 무정부주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작품에서 그는 미술비평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페네옹의 초상을 점묘로 표현했다. 추상적인 패턴과 색채를 사용했고 색조와 형태, 구도를 기계적으로 분할해 안정성을 보여줬다. 인물과 배경을 3차원적 공간에서 어우러지게 배치하기보다 각각의 요소들이 조형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강조하려 했다는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를 위해 분할주의에 입각한 점묘법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시냐크는 세일링(sailing)을 좋아하여 1892년부터 여행하기 시작하여 작은 배를 타고 프랑스의 거의 모든 항구, 네덜란드까지 갔으며, 상트로페를 기지로 삼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까지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방문한 여러 항구에서 시냐크는 빨리 스케치한, 생생하고 다채로운 수채화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스케치들로부터 작업실에서 큰 캔버스로 옮겼는데, 이전에 쇠라가 사용하던 작고 다양한 점과는 매우 다르게, 색을 작은 모자이크 모양의 사각형으로 조심스럽게 작업하기도 했다. 쇠라의 점묘법이 물 샐 틈 없이 꼼꼼하게 점을 찍어 표현을 한 것과 달리  시냐크는 큼직한 터치로 모자이크식 네모난 형태의 붓터치감으로 자신만의 점묘법을 그려 차별화하는 센스도 발휘한다. 눈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일 것 같다.

 

 

 

 

 

 

 

 

<항구의 집들, 생트로페,폴 시냐크>

 

 

 

 

 

 

 

 

물에 얼룩얼룩 비친 항구의 집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크고 강한 모자이크 사각형으로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시냐크는 배를 타고 여러 향구 도시 여행을 통해 다양한 풍경을 접했고, 특히 물이 있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생트로페에  주로 머물며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녔고, 물과 돗단배는 자연스럽게 시냐크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강렬한 색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면 전체에 풍부한 색채감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시냐크 스타일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 항구도시"다. 시냐크의 예술적 발전이 이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며, 신인상주의가 야수파의 시작을 알리는 사조로서 한 몫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전의 시냐크 작품에서 많이 보이 던 경직된 선적인 면이 많이 줄어들고  신인상주의의 특징이 극대화된 색채 요소들이 더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고흐를 만나 정기적으로 파리 외곽의 강과 카페 등을 그리기도 했고 고흐는 그런 시냐크의 기법에 감탄했다고 한다. 시냐크의 그림 중 고흐가 살았던 <노란 집> 배경의 그림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3. 나가기

 

 

 

점묘법의 창시자인 쇠라의 이른 죽음과 대조적으로 시냐크는 오래 살았다. 그만큼  '점묘법'을 알리기 위해 애쓴 시간이 길었다는 얘기도 된다. 흔히들 기억하는 것은 첫 번째를 기억하겠지만 점묘법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발전 시키기 위해 노력한 폴 시냑에게 개인적으로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가 없었다면 쇠라의 '점묘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점묘법'을 알리기 위한 저술활동, 그리고 독립미술가 전 '앙데팡당'을 기획해 젊은 작가에게 미술공간을  제공한 점 등 은 기억해 줘야 할 부분이란 생각을 한다. 그의 그런 노력 덕분에 인상주의로 시작했지만 개성 강한 화풍을 지닌 빈세트 반 고흐, 고갱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올 수 있었고,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도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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