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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로또 당첨이 되면 여러분은 무엇을 제일 먼저 하고 싶으세요? 저는 프랑스에 1년 정도 체류하며 주변 유명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싶습니다. 물 한 병들고 아주 편안한 운동화에 배낭 하나 메고 말이죠. 살다 보면 꿈같은 일이 가끔 현실이 될 때도 있나 봅니다. 말년 운이 기동차게 좋았던 인상주의 화가 한 분을 소개합니다.

 

 

 

 

 

 

2. 생애

 

 

 

 

바로 아르망 기요맹(Armamd Guillaumin)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역에 관계된 공증 업무를 했다고 하는데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파리에서 출생한 기요맹은 삼촌이 운영하는 란제리 가게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드로잉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위스 아카테미(Academie Suisse)에서 공부할 때 만난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그는 함께 블라인드에 그림 그리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guses)에 작품을 전시했고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합니다. 화가 동료들 중에서도 유난히 가난했던 기요맹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교량 및 보도 건설과 직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의 가족이 파리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곳은 물랭입니다. 물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일을 겪게 됩니다. 그중 하나는 산이 많은 물랭 지역의 풍경이 기요맹에게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훗날 파리의 유명한 카페 소유자이자  미술품 수집가가 되는 외젠 뮈러를 친구로 사귀게 된 것이지요.

 

 

 

 

 

 

 

 

 

<주앵빌에 있는 마른 강 위의 다리(Bridge over the Marne at Joinville,1871)>

 

 

 

 

 

 

 

당시 프랑스 제2제국에서 점점 활기를 띠던 도시정비는 제3 공화국에서도 계속됩니다. 특히 1870년대 경기불황 이래로 지속적인 투자와 효율성의 향상이 요구되었지요. 센 강의 다리와 제방의 교체는 확장된 거리와 새로 생긴 대로만큼이나 파리의 상업의 효율적인 흐름에 향상이 요구되었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이론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도 각 정부는 공공사업이 경기부양책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지요. 당시 센강의 생 루이 섬에 살았던 기요맹은 수많은 정비 프로젝트를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산업과 노동자를 즐겨 그렸던 기요맹에게 센 강변에서 펼쳐지는 사업들은 바로 그가 화폭에 담고자 했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의 작품에 브르주아를 소재로 한 작품은 하나 도  없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마른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로 기차가 검은 연기 뿜어 내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검은색의 열차와 연기 덕분에 조용한 풍경에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저게 뭐 그리 특별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마차를 타던 시대에 무쇠 덩어리 같은 증기 기관차가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선로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때 그 위압감과 경이로움은 과히 경탄할 만하지 않았겠어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 건설된 다리를 보러 다니는 여행 프로 그램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다리와 기차는 또한 화가들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고요.  다리 아래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시간을 다투는 기차와 시간을 흘려보내는 낚시군 사이에 흐르는 상반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런 다리를 보면 어릴 적 동네 오빠들이 장난 삼아 다리 위에서 밑으로 뛰어 내리 던 위험한 장면들이 떠오르 곤 합니다. 그림의  다리보다 조금 작고 낮은 형태로 기억합니다. 더운 여름날  동네 오빠들을  따라 비료포대에 바람을 넣고 그것을 잡고 하나 둘 밑으로 뛰어내렸지요. 공기가 빠져 둥둥 떠내려 가 던 저를 동네 어르신이 간신히 건져 살려 냈지요. 수영은 배운 적이 없으니 물을 실컷 먹고 죽을 뻔했습니다. 혼이 날까 두려워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했고요. 귀에 물이 들어갔었는 지 당시 응급 처치를 따로 하지 않아 지금도 제 양쪽 귀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런 다리 그림을 보면  아찔했 던 경험과 고마운 이의 손길을 동시에 떠올려 보게 됩니다.

 

 

 

 

 

 

 

 

 

 

 

 

<일드 프랑스의 경치(Paysage d'ile de&nbsp; France)>

 

 

 

 

 

 

 

강둑 위로 뻗어 있는 작은 길 위에 삼삼오오 산책을 나온 남녀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 사이에는 석양빛이 담겨 있고 급할 것 없는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봄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강변 가까이 내려간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요.

길이라는 것은 오고 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이 길을  보며 신 경림 시인의 <길> 이 떠올려집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진 자의 꽃>, 창비,1993

 

 

 

어때요? 이 시를 읽고 다시 그림을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나요?  같은 방향을 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분 좋은 산책길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요맹은 다른 화가들과 달리 안정된 수입원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끝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할 때는 일부러 야간 업무를 맡았다고 해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말이죠. 때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내 꿈과 정반대의 모양새를 취하고 나타날 때가 있지요. '나는 이런 일 할 사람 아닌데, ' 하고 말이죠.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불만을 터트리고 한없이 나를 끌어 내렸 던 일들이 엉뚱한 곳에서 단단한 경험으로 변신해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 줄 때가 있습니다. 기요맹의 고단했 던 시간도 그의 그림 속에 분명히 녹아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1870년  일어난 보불전쟁 이후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가 점점 증가했습니다. 기요맹은 당시 산업화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퐁투아주를 피사로와 함께 방문해 그림을 그립니다. 퐁투아즈에서 기요맹은 그곳의 풍경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한편 작품에 대한 구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게 됩니다.  세잔도 함께 퐁투아즈에 합류하면서 작품 세계는 더 깊어졌고 기요맹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화 세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당시 기요맹의 풍경화가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걸 보면 그가 두 사람보다  이 시점에서는 한 발 앞선 던 모양입니다.

 

 

 

 

 

 

 

이 무렵 세잔과 기요맹은 오베르에 있는 가쉐박사를 자주 찾아갔는데, 사회주의자이자 자유 분방한 사고의 소유자인  가쉐박사는 두 사람의 그림을 자주 구입해 주었다고 하네요. 가쉐박사와 고흐의 인연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가쉐 박사는 그림을 수집하는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친구였던 외젠 뮈러가 파리에 차린 카페가 성공을 거두고 그 역시 기요맹의 작품을 구입해 줍니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가 높아졌지만 기요맹의 재정 상태는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뒤 이어 잠깐의 파리 코뮌시대가 지나고 나자 대중들의 취향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찬바람 부는 시간이 닥쳐오게 됩니다. 문제는 사실주의의 대가 쿠르베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파리코뮌의 적극적인 지지자였거든요. 파리 코뮌은  70일 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으로 기억하시면 쉬울 듯합니다. 

 

 

 

 

 

 

 

 

 

<낚시하는 기요맹 부인(Madame Guillaumin Fishing, 1885)>

 

 

 

 

 

 

그림 속 그녀의 얼굴 표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꼭 다문 입술을 한 옆모습을 보니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모양입니다. 낚시하러 온 옷차림 치고 다소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요. 낚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혹시 세월을 낚으러 오신 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때는 기요맹과 결혼 전이라 그가 제시하는 다소 엉뚱한 주제에도 기꺼이 모델을 서 주지 않았을까 미리 짐작도 해 봅니다.

 

 

 

 

기요맹의 붓터치는 그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고 그림에는 더 많은 빛이 담겼으며 구성은 한층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의 인생 중반을 지나며 기요맹은 인상파 그룹의 확고부동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1886년, 드디어 노총각 기요맹은 사촌인 마리와 결혼합니다. 45세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다소 늦은 나이고 그 당시에도 꽤 늦어진  결혼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이었던 마리 덕분에 기요맹의 경제 사정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런 기요맹에게  1891년  뜻밖의 노다지 같은  행운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가 주관하는 복권에 당첨이  된 거지요. 제가 사는 곳에서도 편의점에 가면 슈퍼 로또, 파워 볼, 메가 등 다양한 종류의 로또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금액이 클 때 가게 밖에까지 줄을 서서 모래 한 알 같은 행운을  잡으러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요. 될까 말까 한 행운을 기요맹은 드디어 잡습니다. 거금 10만 프랑을  받게 되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의 말년을 살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내가 당선된 것처럼 신나는 일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뒤 기요맹은 이제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룰 바탕으로 에게해, 크로잔과 지중해 연안으로 주기적인 그림 여행을 다닐 수 있었고 네덜란드도 다녀오는 행운을 누립니다. 초년 부자 보다 말년 부자가 좋아 보이는 것은 기요맹 화가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기요멩은 86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로는 장수한 화가 중 한 명이었고 그가 사용한 강렬한 색은 나중에 야수파의 탄생과도 연결됩니다.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인상파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 이자 인상파에 가장 충실했 던 화가로 기억합니다.

 

 

 

 

 

 

 

3. 나가기

 

 

 

 

비록 폴세잔과 카미유 피사로의 위상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사는 동안 인상파의 이론을 삶으로 충실히 그려냈던 화가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막판 뒤집기 같은 그의 인생도 또렷하게 남고요. 강렬한 색상으로 유명한 기요맹의 작품들은 현재 전 세계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파리. 크뢰즈 주 와 프로방스 알프 코트 다쥐르의 지중해 연안 근처 주변 지역을 그린 풍경화들로 가장 유명하기도 합니다. 왕년의 기요맹은  "크로장 파"의 리더로 불리기도 했고요. 인상주의 화가들 목록에서 눈에 띄지 않아 생소한 이름처럼 느껴진 그의 삶을 재 조명해 볼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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