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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스무 살이 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서다.

자포니즘

조용한 기질의 화가

가족, 정물, 풍경, 꽃과 과일

화가의 아내 마르테 보나르(Marthe Bonnard(1869-1942)

르 카네 (Le Cannet):남프랑스 그들만의 은둔의 보금자리

색&

20세기 화가 중 가장 특이한 인물

 

 

2. 생애

 

 

 

피에르 보나르에게는 '색'이 전부였습니다. 색은 세상을 표현하고 경험하는 방법이었죠. 인생을 그리기보다는 피사체를 그렸고, 피사체를 표현할 때도 색채에 대해 준비하고 메모하였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마주해서 그림을 그리던 인상파의 선배와는 달리 피사체의 색채 메모를 들고 스튜디오로 돌아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기억에서 불러내어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이라기보다 종종 꿈같습니다. 독특한 색을 쓰는 관능적인 색채, 그 색의 베일 뒤로 가려진 스쳐 지나가던 시적인 암시, 조금씩 엇박자로 놓인 시각적 재치는 예상치 않은 공간적 수수께끼로, 보는 사람을 몰고 갑니다. 그것이 그가 다른 화가 작업과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프랑스 삼페인(France Champagne,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91,석판화, 파리 국립도서관

 

 

 

 

 

 

 

 

보나르는 1867년 10월 3일, 프랑스 파리의 서쪽 교외지역인 Hauts-de-Seine의 Fontenay-aux-Roses 에서 태어납니다. 프랑스 국방부 중요 관료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고 걱정 없이 보낸 화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법을 공부하였으며, 변호사로서 잠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소르본을 나와 변호사를 시작하던 피에르 보나르는 이 석판 인쇄를 시작으로 미술 인생을 시작합니다. 1889년 그는 프랑스 샴페인 광고를 위한 포스터 경쟁 모집에 나섰습니다. 이 포스터에는 미술 지망생이던 시절에 물랭루주에서 그를 따뜻하게 미술의 길로 안내해 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분위기와 당시 포스터의 천재 쥘 세례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던 자포니즘의 손부채가 왼손에 들려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 상징적이며 영적인 본성을 가진 젊은 예술가 그룹 나비파(Les Nabis)에 가입하고 당시의 시대적 유행이던 자포니즘(Japoinism)이라는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그는 네 폭 병풍을 비롯해서 고도로 일본화한 나비파 작업을 했습니다. 일본식 네 폭 병풍에 그린 아르누부 스타일 그림은 일본 목판화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합니다. 병풍이라는 동양식 소재에 서양식 그림스타일이 덧입혀 서양인이 기모노를 입고 폼을 잡은 듯한 어색하지만 나름 독늑한 분위기가 나는 목판화입니다. 보나르는 '나비파(Les Nabis)에서 가장 왕성한 자포니즘의 선두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비대칭적인 스타일과 형태의 왜곡을 통해 일본 장식 형식 중심으로 아르누보 스타일로 표현했습니다. 일본이 피에르 보나르와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것이 나름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심히 따라 한 화가가 예뻐 보였겠지요.  보나르는 미술을 잘 모르던 초짜 시절 노골적으로 일본 흉내를 냈지만, 금방 자포니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몽마르트르에서 드니와 뷔야르와 함께 스튜디오를 공유하던 시절 보나르는 연극 프로듀서를 만나 파리의 '연극 공연 프로덕션'에서 공동작업을 했습니다. 1891년 보나르는 몽마르트르에서 로트렉을 만나  독립 미술가 협회인 앙데팡당 전에 출품을 시작했고, 같은 해 시인 폴 르 클레르크가 창간한 라 르뷔 블랑슈의 삽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 석판화 일러스트들은 인상파의 화가들을 발굴한 것으로 훗날  유명한 프랑스의 화상 앙브루 아즈 볼라르에 의해 1895년 출판되기도 합니다.

 

 

2023.06.09 - [지식&교양] - 50-2. 탈 인상주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12)

 

 

 

 

 

이 당시 그의 그림은 대체로 친구와 가족 구성으로 채워집니다. 집과 식탁과 정원과 창문들로, 모두 내러티브와 자서전 적입니다. 그의 친구들이 피에르 보나르를 두고 '조용한 기질'의 사람으로, 그리고 그는 동료들 사이에도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게 눈에 띄지 않게 독립적인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자화상, 풍경, 거리 장면, 꽃과 과일을 묘사한 많은 정물을 그렸습니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던 그의 습관은 수많은 캔버스에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행하던 그림들을 그의 작은 스튜디오의 벽에 걸어 두곤 했는데 이 스튜디오는 사실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작은 스튜디오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Pierre Bonnard,<흰 고양이,(1867-1947)>

 

 

 

 

 

 

 

언뜻 보면 고양이 나무인줄 알 정도로 거인 흰 고양이! 기지개 켜기 직전의 동작 같기도 하다. 집에 두 마리 개를 키우는 데 그 녀석들 기지개 켤 때 보면 시원함 마저 들 정도로 나른함을 깨워주는 동작이기도 하다. 피에르 보나르는 어린 시절부터 공양이나 개를 키웠고 그런 동물들을 가족, 모델과 함께 그림에 그렸다. 보나르처럼 고양이를 변형하는 모험을 하면서 그 신비로운 매력을 전달해 주는 화가는 없다. 원래 대담한 색채를 쓰던 보나르가 그린 고양이가 대부분 흰색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당시 흰색은 그림의 여백 정도로 쓰일 뿐, 독자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보나르는 그런 흰색을 고양이에게 집중시켰다. 보나르는 1894년 작 ' 흰 고양이'는 길게 몸을 일으키는 고양이를 그린 작품으로 흰 부분의 부드러운 붓 터치는 형태의 윤곽선을 모호하게 나른한 고양이의 모습을 더욱 강조했다. 그림을 소장한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 설명에 따르면 보나르가 고양이 다리 위치를 잡기 위해 여러 장의 연습 데생을 한 사실과 고양이의 눈 주위가 많이 수정됐음을 X선 촬영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설명에는 "보나르는 평생 동안 많은 고양이 그림을 그렸지만 부분적이거나 확대한 그림이 많았다. ' 흰 고양이'는 그런 그림들의 중심이라고 소개됐다.

 

 

 

 

 

 

 

핑크 소파가 놓인 드레싱 룸<The Dressing Room with Pink SofaBathroom >, Pierre Bonnard,1908, 벨기에 왕립 미술관

 

 

 

 

 

 

 

보나르가 26세이던 1893년에 마르테 드 멜리니(Marthe de Meligny)는 수십 년 동안 언제나 그림 속에 존재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50년 동안 평생에 걸쳐 그녀만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무려 385점이나 됩니다. 그의 성품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녀를 만나고 즉시 동거에 들어갔지만 결혼식은 32년 후가 지난, 그의 나이 쉰여덟이 되던 1925년에야 올렸습니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은 행동이지만 오랜 동거의 형태라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는 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보나르의 작품에 강박적인 주제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밀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그림 속에 나타납니다. 크게 작게 멀리 가깝게 오직 한 사람의 모델인 그녀는 많은 작품에 슬그머니 등장하는 상징이 됩니다. 그림 속 목욕통을 보면 '저렇게 작은 곳에서 어떻게 목욕을 한다지?' 하는 궁금증 부터 듭니다. 거울 앞에 어정쩡한 모습도 아니고 당당한 그녀의 뒤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실적이고 관능적이네요.

 

 

 

 

 

 

<정원에 있는 젊은 여성>이란 이름의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20년대 초에 보나르가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지만 20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보나르에게 비밀같은 여인이 있었어요. 아내가 죽고 1947년경에야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억'을 손질한 이 그림 속 젊은 여성의 이름은 르네 몽샤티(Renee Monchaty)입니다. 그녀가  깊은 생각 속에 앉아 있고, 오른쪽 끝에 그의 아내 마르테가 질투에 가득 차 그녀를 바라봅니다. 오로지 아내 한 사람만 바라보며 작업했다는 피에르 보나르에게 숨어있던 젊은 여성인 거죠.  르네 몽샤티는 그림 모델로 만나 6년 동안 몰래 사귀었습니다. 마르테는 르테를 크게 질투했으며, 보나르도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를 했고, 그녀는 두말없이 돌아섰는데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이 지독한 사건은 두 사람이 남프랑스 르 카네(Le Cannet)로 이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보나르는 1926년 남프랑스 칸느(Cannes)근처의 르 까네 (Le Cannet)로 이사를 왔습니다. 보나르가  말년에 보낸 그곳은 눈부신 빛과 색채로 그의 그림인생에 녹아듭니다. 1938년에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평생 미술 동무이던 Vuillard와 함께 그의 주요 작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20년을 한곳에 처박혀 살면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고집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내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은신처로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르  카네에 거주합니다. 그의 아내 마르테 보나르의 누드를 그리던 이 은거의 집은 현재  '보나르를 순례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The Almond Tree in Blossom>, Pierre Bonnard, 1947,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보나르는 프랑스 피비에라 르 카네 근처 그의 별장에서 마지막 그림인 '꽃 피는 아몬드 나무 <The Almond Tree in Blosson, 1947>를 그립니다. 그의 마지막 그림인 셈이죠. 고흐가 동생 테오의 아들에게 선물한 화사한 아몬드꽃 그림과 많이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고흐가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에게 자신 같은 힘든 인생이 아닌 풍요롭고 따뜻한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 아몬드 꽃 말이죠.  보나르는 아몬드 꽃잎들이 미처 지기도 전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늘 은둔의 생활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피했지만 반대로 그의 작품은 평생 잘 팔렸다고 합니다.

 

 

 

 

 

 

 

 

보나르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것은 색채만이 아니다. 
매끄럽게 연마되고, 다채로운 색의 베일로 가려졌으며'
예상치않은 공간적 수수께끼와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들에 의해 
강조된 뒤섞인 감정의 열기도 있다.

- Roberta Smith - 

 

 

 

 

 

 

 

 

 

 

"나는 모든 주제를 손안에 쥐고 있다.
돌아가서 이것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다시 생각하며, 꿈을 꾼다."

 

 

 

 

 

 

3. 나가기 

 

 

 

그의 일생은 다른 화가들의 드라마틱한 역경에 비하면 비교적 '긴장과 역경의 반전'이 없는 편이다. 그는 60년 동안 한결같은 발전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말이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제일 따분하고 어려운 일이 기도 하다.  많은 친구와 가족들이 있는 햇볓이 비치는 실내와 정원 같은 서술적이며 자서전적인 그림을 보면 조용했던 그의 기질 덕분에 가능했을 거라 짐작해 본다. 그의 부인 마르테는 수십 년 동안 늘 함께한 대상이었다. 음식이 남아있는 식탁에 않아있기도 하고, 목욕통에 비슴듬히 있는 일련의 그림에서처럼 누드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리고  대상만 있는 곳에 살짝 얼굴을 디미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몇 개의 자화상, 풍경화, 거리의 모습, 꽃과 과일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정물화 등 당시 일상이 보나르라는 화가의 프리즘을  통해 오감으로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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