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언론이나 예술의 정치적인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지만, 여전히 권력과 부에 의해 눈치를 봐야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왕정 시대였던 19세기의 한 프랑스 화가는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풍자로 서민의 애환을 담아냈습니다. 독특한 화법과 메시지로 '풍자화의 대가'로 불리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와 동시대를 함께 했던 화가이자 판화가입니다. 두 화가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실주의' 화가로도 불립니다. 사실주의는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를 토대로 한 이상화된 이미지 대신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사실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변화하던 사회적 환경에서 나타났습니다. 19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사회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실주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주의 미술의 주된 특징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사실적인 묘사는 대상의 세부 사항과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감정적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현실을 표현하지요. 이 스타일은 과학적 관점을 통해 구축되며, 자연의 빛과 그림자, 투명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은 귀스타브 쿠르베입니다. 그는 "천사를 본 적이 없어 그릴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그의 대표작품으로 <오르낭의 매장>은 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사실주의 귀중한 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이후 인상주의 및 입체주의와 같은 다양한 예술 사조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고요. 또한 , 사실주의는 대중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예술 작품이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스무 살 무렵, 풍자 잡지 '실루에트'에 데생들을 발표하며 초창기 시사 만화가의 대열에 끼게 됩니다. 그 후, '카리카튀르', '샤리바리'등의 시사 만화를 담당하면서 독자들만이 아니라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왕정복고, 7월 혁명, 2월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적 사변들이 점점이 박힌 격동의 시공간이었습니다.
7월 혁명 : 1830년 7월에 발생한 혁명으로, 샤를 10세의 통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샤를 10세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업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억압에 반발하여 시민 계급과 일반 대중은 혁명의 불길에 불을 붙였습니다.
1830년 7월 28일 ,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봉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라파예트 장군이 이끄는 공화당원들과 국왕 군대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샤를 10세는 퇴위하게 되었고, 임시 정부는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프랑스의 정치적 형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mvHzCLP6ug
2월혁명: 1848년 2월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의 성립을 이끌었습니다. 이 혁명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억압의 결과로 촉발되었으며, 당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 반체제 지식인들과 혁명적 집회가 금지되자, 민중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는 빠르게 확대되었으며, 시민들은 파리 시내에서 충돌을 벌였고 군인들도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필리프는 2월 24일 퇴위하게 되었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 세력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2월 혁명은 제2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졌고 , 농민들은 새로운 체제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력으로 선출되자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 그러나 그는 재임 중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2제정을 성립시켰습니다.
파리코뮌: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의미합니다. 이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세운 최초의 민주적이며 혁명적인 자치 정부로,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긴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의 패배와 그로 인한 정치적 상황으로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민의를 무시하고 굴욕적인 조건으로 독일과 전쟁을 마무리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독일 군대의 승리 행진 중에 저항의 의사를 표현하고 자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시민들은 정부군이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회수하려는 시도에 반발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결국 파리 코뮌의 수립으로 이어졌고요. 3월 26일 , 코뮌 평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노동자와 시민들이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을 설립하였으며, 이들은 민중의 자치적 통치를 지향하였습니다.
1871년 5월 21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대규모 진압 작전인 '피의 일주일'로 인해 최종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코뮌 참여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처벌 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이후 여러 사회적 운동과 정치 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dGhGX6z8BA
도미에는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는 기법을 즐겼던 탓에 오래도록 별볼일 없는 화가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대 권력자들의 초상과 부르주아적 풍속을 비판적 화폭에 담음으로써 예술과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시대의 눈 밝은 기록자가 되었고요. 그의 화폭에 담긴 정치권력자, 은행가, 법관 따위의 지배계급은 한 눈에도 탐욕과 술수로 배불러 있는 모습입니다. 한번은, 루이 필리프 왕을 익살맞게 그린 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르주아( bourgeois)라는 용어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중세 유럽에서 자본과 재산을 소유한 시민 계급을 지칭하며,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이나 유산 시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르주아는 프랑스어'bourgeois'에서 유래합니다. 원래는 "성안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중세 시대, 부르주아 계급은 성대한 성벽 안에서 살며 상공업자나 농민, 소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 밖의 농민 계층인 무산자와 대비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부르주아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middle class를 지칭하며, 자본가나 부유한 시민 계급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이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비판받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 및 사회적 권력을 가진 계급입니다.
부르주아라는 용어는 자본가 계급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프롤레타리아(무산자)'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두 계급 간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했습니다.
도미에가 초석을 놓은 한 컷짜리 시사 만화를 한국에서는 흔히 '만평'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바로 그 진실성 때문일 겁니다. 화장으로 주름을 감추고, 근사한 넥타이핀으로 부를 드러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휘어진 등은 세월을 숨겨주지 못하는 것이죠. 화가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가 고개를 돌린 얼굴을 즐겨 그렸던 것도 이처럼 뒷모습이 드러내는 삶의 진실에 매료됐기 때문입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만화를 미술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회적 악습에 대한 일반적인 풍자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넓은 견지에서 보면 정치만화에 대한 체제와 힘은, 도미에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미에는 무엇보다 '상식의 인간'이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왕과 정치인, 법조인 등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인격만큼은 철저히 존중했습니다. 또 민중의 어려움을 적극 대변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주의자는 공화주의 이념을 지지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원칙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입니다. 이러한 이념은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정치적 사상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화주의는 개인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치 참여, 공익 우선, 법치주의)
역사적으로, 공화주의 이념은 고대 로마 공화정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 동안 공화주의자들은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는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사회 정의, 인권 및 평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미에가 사회적 풍자로 전향한 이후 주 소재로 택했던 도시의 거리 중 하나입니다. 페티코트를 넣은, 넓은 크리놀린 치마의 윗부분에 눈을 쌓은 채,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파리의 부르주아부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녀의 뒤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낡고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 청소부가 긴 빗자루로 어이없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ftbuU-tcY
1808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오노레는 유리 직공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유리공을 비롯해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때문에 회화 미술은 거의 독학으로 배웠으며, 석판화는 친구에게 배웠습니다.
종종 미술 작업으로 알바를 하며 용돈 벌이를 하던 그는 잡지<카리카튀르>에 초빙되어 정치적 풍자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왕정 시대로 정치 비판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도미에는 생계비를 위해 풍자화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1831년 작품'가르강튀아 (Gargantua)는 사람들과 왕족에 대한 상당한 충격을 준 그림이었습니다.
카리카튀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발간된 풍자적인 잡지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이 잡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한 풍자적이고 신랄한 의견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였습니다.
카리카튀르는 1830년대에 창간되어,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 매체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잡지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히 발행되었으며, 당시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들을 신랄한 그림과 유머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주요 특징으로 풍자적 내용, 예술성과 영향력 그리고 대중성과 접근성이 있습니다 .
카리카튀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정치적 풍자와 사회적 비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이 잡지에서 영감을 받아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였고, 민주적 가치와 시민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 풍자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 (Francois Rabelais)의 소설<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이 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거인 왕을 소환해 당시 루이 필리프 왕의 세금정책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국민이 낸 세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국왕과 지배계급, 국왕이 먹고 남은 쓰레기를 서로 먹으려는 정치인들, 불평등한 경제와 이권을 위한 야합 등을 적나라하게 담았습니다.
프랑수아 라블레( Francois Rabelais)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가이자 인문주의자입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중세 사회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풍자적인 문체로 유명합니다. 그는 법률가이자 부유한 지주인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비교적 상류층에서 자랐으며, 몽펠리에 대학교와 푸아티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다양한 학문적 배경은 후에 그의 문학적 작업에 영향을 미쳤고, 신학,의학, 고전학 등을 포함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필명은 알코프리바 나지에( Alcofribas Nasier)이고 과장되고 익살맞은 요소를 사용해 언어유희와 풍자를 자주 활용했습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의 모험을 그린 풍자적 시사 소설입니다. 중세 사회의 가치관과 종교적 신념을 신랄하게 비판하지요. 특히 이 작품들은 외관상, 과장된 묘사가 특징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루이 필리프왕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를 '시민왕'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그는 금융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하원 의회의 결정으로 프랑스의 왕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의 통치에서는 산업 발전과 시민 계급의 경제적 기회를 강화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통치 아래에서 일반 시민의 삶의 질은 악화되었고,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서 반란의 불씨가 되었으며, 이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미에는 바로, 이 가르강튀아(gargantua)(1831) 라는 작품으로 23세에 갑자기 유명해집니다. 또한 이 작품때문에 6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르 카리카티르>에서 일하던 1830년, 프랑스에서는 짧지만 폭력적이었던 '7월 혁명'으로 샤를르 5세 (Charles x)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황제 루이 필립의 군주정치(July monarchy)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민왕 루이 필립이 전횡을 일삼자 도미에는 필립을 배 모양의 머리 (배는 프랑스에서 바보를 의미한다)를 하고 변기에 앉아서 국가 재산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동시에 이를 배설하여 아첨꾼들에게 나누어주는 거인으로 묘사하는 석판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신랄한 정치 풍자화는 7월 군주정치가 빚은 파렴치한 대학살의 잔인성을 도미에 특유의 재치와 해학으로 그려낸 걸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엄청난 정치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832년 풍자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과 6개월간의 징역형을 받기도 하면서 온갖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계속된 탄압으로 2년 뒤 <카라카튀르>도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오노레는 그저 돈을 위해 시작한 풍자화였지만, 본격적으로 정치와 서민들의 애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LWHXhPBZp8
도미에는 늘 돈 걱정을 하며 아마도 빚쟁이의 등살에 자주 법원에 불려 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판사 서기와 변호사 주변에 있는 거간 꾼 들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 자주 띄었던 사람은 변호사였죠, 1830년과 1860년 사이에 그는 이와 같은 주제를 그림으로 자주 그립니다.
정치 풍자화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강화된 1835년 부터, 그는 정치적 풍자에서 사회적 풍자로 전향합니다. 자신들만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생활상을 코믹하게 풍자하였습니다. 법관의 권위적이고 교만한 얼굴, 거만하게 휘날 리는 그들의 법관복 등으로 다양한 법관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하고요. 도미에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풍자화를 관찰해 보면 그가 일상생활의 세부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풍자는 사실적 관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34년 4월 15일 파리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시위를 정부에서 폭력으로 탄압해 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출소 후 곧바로 학살을 목격한 오노레는 작품을 그려 기고했습니다.
바로 '프랑스노냉 거리의 1834년 4월 15일 Massacre de la rue Transnonain '(1834)이라는 석판화 작품입니다. 그림에서는 학살 당시의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던 폭력의 피해를 고스란히 옮겨놓았습니다. 이 작품은 거리와 카페 등 파리 시내에 전파되었고 본격적으로 왕정에 맞서 풍자화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석판화는 주로 유성 재료들로 그려진 이미지가 물과 기름의 성질로 인해 판 위에서 선택적으로 잉크를 흡수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기름 성분을 갖고, 나머지 부분은 물과의 접촉으로 잉크가 묻지 않도록 처리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든 판은 인쇄 시 원하는 이미지를 종이에 찍어낼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은 1798년 독일의 극작가인 알로이스 제네펠더에 의해 발명 되었으며, 19세기 많은 유명 화가들이 석판화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고야, 들라크루아, 모네 등)또한 , 일본 우키요에와 같은 외국 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QINGg1prE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의 작품 <Transnonain Street>(1834)는 프랑스에서 정치적 사건을 반영한 중요한 석판화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격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문 및 정치 풍자화로 잘 알려진 도미에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834년, 파리에서 발생한 폭동 이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으며, 도미에는 이 사건을 통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당시의 갈등과 비극적인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석판화 기법을 사용하여 이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기법은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여 감정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 Transnonain Street>에서는 주인공인 남자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관람자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있고요. 그림의 구도와 조명 또한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미술작품을 넘어,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과 사람들의 고통을 나타내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HgHRiXYmpk
< Le Ventre Legislatif>는 강렬한 풍자로 프랑스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왕정 시대의 정치권력을 조롱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루이 필리프가 지배하던 시대의 의회를 풍자하고 있고요. 작품에서 도미에는 커다란 배로 형상화된 의회를 묘사하여 정치적 권력을 비꼬는 동시에 의회의 구성원들이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만화를 넘어서는 심오한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도미에는 굉장히 과장된 형태의 인물들이 국회의 회의실에서 모여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은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배가 상징적으로 부풀러져 있습니다. 이는 의원들이 국민의 이익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도미에는 이러한 도상적 표현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의 빈틈없이 그려진 세밀한 세부 묘사와 과장된 비율을 통해 풍자적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사실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자극합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의 정치적 시각과 예술적 기법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가 더욱 부각됩니다.
Marie Denis Larabit 는 1830년에 태어나,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정치 체제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Ecce Homo> 는 '보라, 이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인류의 고통을 하나로 연결 지으며, 도미에가 추구했던 사회 비판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석판화와 드로잉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요한 표현과 섬세한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였으며, 감정이 잘 드러나는 인물의 표정과 자세가 특징적입니다. 여백을 통해 한층 극대화된 인물의 고통이 강조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도만듭니다.
< Ecce Homo> 는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도미에의 사회적 비판이 고양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고요. 당시 프랑스 사회는 많은 사회적 이슈에 직면해 있었고, 예술은 이러한 갈등을 반영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도미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고,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1pkDfwdrY
이후 1848년에는 프랑스 내에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노동자들이 루이 필리프를 결국 폐위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에 오노레는 작품 <봉기>를 통해 프랑스의 마지막 왕을 쫓아낸 노동자들의 치열한 사투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정치판은 혼돈 그 자체였지요. 오노레는 끊임없이 풍자하고 비판했습니다. 어떤 권력이 들어와도 비판을 멈추지 않은 것이죠.
<봉기>는 184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회 및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반발하여 일어난 혁명으로, 도미에는 이러한 사회적 격변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봉기'를 그렸습니다. 그가 표현한 내용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고난과 투쟁을 강조합니다.
작품 '봉기'는 다양한 인물들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통해 대중의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강렬한 표정과 동작을 통해 노동자들의 분노와 결의를 전달하며, 극적인 구성이 사실감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이는 도미에가 갖고 있던 사회적 비판의 관점을 잘 반영합니다.
도미에는 '봉기'를 통해 당시 권력을 상징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서민이 되는 상징적인 인물들을 통해 사회 구조의 불합리함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주로 'Crispin et Scapin'이라는 주제로, 극중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두 캐릭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Scapin'은 특히 캐릭터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작품은 도미에의 뛰어난 석판화 기술이 돋보이며,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극적인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도미에가 활동한 시대는 프랑스의 정치적 환경이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사회 비판의 기능을 하며, 특히 'Scapin'과 같은 풍자적인 주제는 관객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Scapin'은 코믹한 요소를 사용하여 사회적 현실을 비꼬는 도미에의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Scapin은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인 Molirere 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로, 특히 이탈리아의 코미디아 델라르떼(tragicomedy)전통의 일환으로 발전된 인물입니다. Scapin은 코믹한 하인 역할을 하며, 보통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Scapin 이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scappare"에서 유래되었으며, "도망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캐릭터는 이탈리아 코미디아 델라르떼의 특유의 캐릭터 중 하나로, 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도망치는 비겁한 하인의 전형입니다.
몰리에르 (Moliere)의 연극 "Les Fouberies de Scapin"(1671, "Scapin의 속임수)"에서 이 캐릭터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젊은 연인들이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도록 돕고자 여러 가지 계략을 사용합니다. Scapin은 지혜롭고 기민한 캐릭터로 묘사되며, 그가 마주하는 상황들을 자신의 재치와 속임수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요. 이야기의 중심은 두 젊은 연인이 결혼하기로 결정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들이 다른 결혼 제안을 가져 오면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Scapin은 여러 속임수를 사용하여 두 연인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fDNMKEo6lQ
<크리스팽과 스카팽>은 몰리에르의 희곡"스카팽의 간계"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인물의 모의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도미에는 극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줍니다. 두 캐릭터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미에는 특히 인물의 특성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마치 실제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어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도미에의 작품은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따릅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힘있는 목소리를 제공했습니다. 크리스팽과 스카팽의 모습은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도미에가 추구한 사회 풍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도미에의 독특한 화풍과 기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물 간의 도형을 구분하고 조명 효과를 통해 입체감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내용의 전개에 기여하며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도미에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휴머니즘적인 요소입니다. 그의 휴머니즘적 요소는 한 손에는 아이를 다른 한 손에는 빨래감을 들고 세느강둑을 오르는 여인, 강가에서 아이들과 정겹게 놀아주는 아버지, 어린 아기를 안은 채 보트를 끄는 남자 등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지만 가족간에 애틋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빈민층의 일상을 그린 회화작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세탁부 여인으로, 그녀의 손에는 세탁물이 들려있고, 그 옆에는 그녀의 아이가 바싹 붙어 걷고 있습니다. 아이는 세탁부의 삶의 무게와 책임을 상징하며, 이는 그녀의 헌신과 보호 본능을 강조합니다. 배경은 간결하고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어 있으며, 이는 주인공이 처한 고단한 삶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에서 사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일상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작품의 무게감과 진지함을 전달하며, 세탁부의 의상과 배경 역시 어두운 톤으로 처리하여 그녀의 삶의 어려움을 표현했습니다. 주인공의 표정과 자세는 그녀의 힘겨운 노동을 강조합니다. 세부 묘사 또한 인물의 현실감과 내면을 전달하고 있고요.
<세탁부>는 도미에의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 작품으로, 노동자 계층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섹탁부를 이상화하지 않고, 그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의 인도주의적 시각과 그의 사회적 비판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방금 강가에서 빨래를 끝내고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것입니다. 한쪽 팔로 빨래 더미를 가득 안은 어머니는 혹시나 아이가 계단을 헛디딜까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도미에의 세심한 관찰력은 아직 키가 작아 계단을 오르기 힘든 아이가 다리를 한껏 올려 계단을 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그려냈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은 얼굴의 윤곽이 생략되어 그려졌습니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는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 그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미에는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노동자들, 소외된 여성들의 모습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결코 서민들의 모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지닌 힘이 바로, 도미에의 매력아닐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8p_2CLOhY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사실적으로 그려냈고요. 이후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놓고 왕을 비판하기 보다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4000점에 달하는 석판화를 그려낸 그는 1840년부터는 유화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유화작품 중 가장 대표작은 <3등 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1862) 등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1cOWV3-xxs
당시 열차칸을 계급화되어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1등칸, 부르주아는 2등칸, 가난하고 옷차림이 지저분한 이들은 3등칸에 타야만했습니다. 오노레는 어느 날 3등칸에 탑승해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유화물감으로 화폭을 옮긴 것이 작품 ,<삼등열차>입니다.
그의 작품 <3등 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 >(1862-1864)는 열차라는 근대적인 이동 수단과 함께 서로에게 무관심한 얼굴로 앉아 있는 군중의 모습을 다룹니다.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의 파리에서 세 번째 등급 기차 칸에 실린 노동자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등열차>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여러 점의 유화 중 하나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중반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합니다.흔들리는 열차의 3등 객실,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기대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일상에 지친 서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승객들도 좁은 3등 객실 내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우울한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그림 속 장면은 기차의 불편한 환경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중앙에는 아기를 모유수유하는 젊은 여성과 할머니, 그리고 잠을 자고 있는 작은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이 세 인물은 한 가족을 형상화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무기력해 보이는 다른 승객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교감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창 밖 밝아오는 여명이 기차 내부의 궁핍함과 고달픔을 시각적으로 더 드러나게 합니다.
색채에 있어서 도미에는 주로 갈색 톤을 사용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러한 색채는 인물들의 삶에 무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사용된 색상은 감정적인 울림을 주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삼등열차>는 그 자체로 단순한 기차의 내부 묘사를 넘어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고난과 빈곤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예술이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에 대한 도미에의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30prRcY9pE
https://www.youtube.com/watch?v=FbvgwIcd0zo
반면, <1등 열차 The First-Class Carriage>(1864)에서는 열차 안의 사람들은 행색부터 다릅니다. 혹여 있을 지 모를 서로에 대한 접촉에 염두에 둔 사람들은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유대감이나 인간적인 관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창가의 승객과 읽을거리에 몰두한 여성 그리고 할 일 없이 앉아있는 노인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모두 고독한 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Don Quixote and Sancho Panza>(1868)는 프란시스코 고야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도미에의 특징적인 유머와 풍자가 잘 드러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 )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어둠의 화가'라고 불리기도합니다. 그는 주로 낭만주의 예술의 기초가 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화가입니다. 고야의 작품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반영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화풍은 사실적이면서도 감정적이며, 어두운 주제를 자주 다루었습니다. 특히 빛과 그림자, 색채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낭만적인 요소와 현실적인 묘사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대표작으로 <마하>시리즈, <전쟁의 재난>, <사투르누스의 아들> 등이 있습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특희 그의 소설 <돈 키호테>로 유명합니다. 소설가, 극작가, 시인, 군인 등의 직업을 가졌으며, 종종 "지혜의 왕자"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로 일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22세 때, 그는 군인으로서 레판토 해전에 참여했고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돈 키호테>는 1605년 첫 번째 부분이 발표되었으며, 현대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당시의 기사 소설을 풍자하고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 1615년에 두 번째 부분이 발표되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생애의 대부분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았지만,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의 문학은 "세르반테스의 언어"라는 표현으로 스페인어의 중요서을 강조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1616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마드리드의 무명 수도원에 묻혔습니다.
이 그림은 스페인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소설<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이를 통해 인간의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에서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하인 산초 판자와 함께 나타납니다. 돈키호테는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으로, 이와 대조적으로 산초는 알아보기 쉽게 단순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두 인물 간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 차이를 잘 드러내며, 그들 각각의 꿈과 현실을 반영합니다.
돈키호테의 비극적인 모습은 그의 허세를 나타내며,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자세는 관객에게 웃음을 자아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 산초 판자는 보다 현실적이고 덜 과장된 자세로, 그의 충실함과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유화 기법은 도미에의 특징인 매우 강렬한 브러쉬 스트로크와 단순한 색조를 반영합니다.
도미에는 강렬한 색상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특해, 배경은 기본적인 구성으로 처리되어 주 인물들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얼굴은 불분명한 형태로 묘사되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의 표정이 아닌 색상의 광택과 더불어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도미에의 독창적인 접근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복잡성과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캐릭터의 묘사를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꿈꾸며 자신을 진정한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어리석은 인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 간의 갈등을 표현하며, 인간이 가진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도미에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적 귀족과 권력자들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요. 따라사 이 작품은 단순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OlM_Ul84hA
작품에서 도미에는 대자연 속에서 의 소박한 삶을 시각화하며, 도시와 자연에 대한 대조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평범한 삶을 표현하며, 이들은 마치 외부의 혼잡한 삶에서 잠시 벗어난 듯 보입니다. 도미에는 이러한 평온한 순간을 통해 산업화가 진행중인 시기의 소외된 사람들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도미에의 화풍은 사실적이며, 강렬한 색채와 생생한 인물 구성이 돋보입니다. 색감은 자연을 반영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는 그들의 감정과 사회적 상징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가 석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를 통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자연의 배경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도미에 특유의 사회비판적 시각이 잘 드러납니다. 오노레 도미( Honore Daumier, 1808-1879)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과 고난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화가로서 인정받았습니다. 이 작품역시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 문제를 살펴보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미에는 사심이 없었던 화가로 전해집니다. 문맹의 재봉사와 결혼했고 말년까지 가난했지만 작품 속에는 회화적인 즐거움과 비애가 조화롭게 뒤섞인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생활상을 누구나 공감할만한 의미와 형태로 포착했기에 현재에 와서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들로서도,그와 그의 시대와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그는 점차 시력이 나빠져서 결국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유작은 오늘날에는 미켈란젤로의 창의력에 비견되기도 하며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역사가인 '미슐레'는 도미에를 일러 "진정한 비판자는 당신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정부의 핍박으로 감옥에도 가고 실명하는 등 고난에 찬 인생을 살았으나, 그 서늘한 비판정신을 오롯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한 번 쯤은 돌아봐야 할 위대한 선구적 시대정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특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odvEF81Sg8
https://www.youtube.com/watch?v=hUhwWgy4L5c
'지식&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48. 구스타보 두다멜( Gustavo Dudamel, 1) (10) | 2024.12.06 |
---|---|
51-47. 윌리엄 호가스 ( William Hogarth, 94) (6) | 2024.11.29 |
51-45.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92) (8) | 2024.11.19 |
51-44.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91) (28) | 2024.11.10 |
51-43.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90) (26) | 202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