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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회화는 1600년부터 1750년 사이에 유럽에서 발달한 예술 양식입니다. 대체로 르네상스 미술의 요소를 발전시키면서 특유의 장식성과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였습니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지닙니다. 

 

 

 

바로크 회화는  주로 가톨릭 국가들에서 발전하였습니다. 반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카톨릭 교회의 필요에 의해 강화된 예술적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이 당시 카톨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30년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반쪽난 신앙심을 다시 돌려놓기 위해  미술이  적극적으로 이용됩니다.  이전보다 종교적 주제를 더 강조하고, 신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을 요구했습니다. 

 

 

 

바로크 회화의 발전에 중요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카라바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실주의적 기법은 에스파냐와 북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많은 화가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랐습니다. 미술사에 있어서 카라바조가 혁명가라면  오늘 살펴볼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개혁가입니다. 개혁은 혁명보다 많은 맥락을 필요로 하지요. 그리고 맥락은 시간이 지나면 가장 먼저 잊혀지기 쉬운 것 중의 하나이고요.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의 미술가 가문인 카라치 가문에서는 16 세기 초반 혁신적인 예술가인 코레조(Coreggio, 1490?-1534)의 빛과 그림자  처리에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티치아노가 라파엘로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판단하여 베네치아 인들의 채색법을 열심히 수련했고요.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1576)는 베네치아 태생으로 16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초상화 및 대형 종교화 작가입니다.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지요. 그는 색채의 사용과 빛의 표현에 있어 뛰어난 기술을 지녔습니다.  그의 화풍은 그림의 사실적 묘사와 함께 부드러운 색조 전이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제작한 초상화와 신화적 주제의 작품에서 두드러집니다. 그의 기술과 혁신은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집안  화가  중에서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사촌 루도비코 (Ludovico)의 공방에서 형 아고스티노(Agostino, 1557-1602)와 함께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 빛의 묘사와 감정 표현을 습득했습니다. 특히 표정 연구에 노력을 기울여 인물의 내면을 생동감 있게 접근하는 '카리카듀라(caricatura)'를  고안했는데 오늘날 '캐리커처'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이며 기교적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극복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안니발레도  1581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라파엘로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순성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안니발레를 일컬어 '고전주의적'이라 평가합니다.  이렇게 그는 바로크 시대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인 아카데미적 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안니발레와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의 2대 거장으로 불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화풍에서는 대조를 보였습니다. 대중은 곡절이 많았던 카라바조에 기우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특히 그의 화풍은 프랑스 푸생의 고전주의로 이어졌고, 프랑스 회화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흥미롭게 두 사람은 1600년경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체라시 예배당에서 실제 교류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oN9_Mh6Iw

 

 

 

 

Papal States, Rome/프레시안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 1600-1601, Oil on wood,Santa Maria del Popolo , Rome/wikipedia

 

 

 

 

 

 

 

 

 

안니발레가 그린 제단화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1600-1601) 입니다. 전통적인 빨강과 파랑의 천을 두른 성모의 이상적인 모습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볼로냐 화파의 특징인 희미하게 빛나는 색과 테두리는 마치 안개가 낀 듯한 효과를 줍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시선과 양팔을 활짝 펴고 무덤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모습이 이전과 달리 매우 역동적입니다. 열한 명의 사도가 성모의 관을 둘러싸고 있는데 전면 왼편의 베드로와 오른편 바울의 놀라는 표정에서 그의 장점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작품 <성모승천>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카라치가 선보인 뛰어난 테크닉과 직물의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배치된 구도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표현합니다.

 

 

작품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성모의 숭고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강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카라치의 <성모승천>은 고급스러운 색채와 빛의 사용이 돋보입니다. 그는 따뜻한 색조를 통해 인물을 더욱 빛나게 하고, 배경에는 어두운 부분을 활용하여 인물들이 더욱 부각되도록 했습니다.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는 빛 속에서  승천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로 인해 신성함이 강조됩니다.  성모승천은 이후 바로크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카라치의 혁신적인 구성 방식과 감정 표현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역사적인 장면을 그리는 방법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바티칸과 뿐만 아니라 여러 벽화 작업에서도 그의 방식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성모승천은 단순한 종교적 주제를 넘어서, 그의 예술적 아이디어와 기법이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성모 승천>과 함께 카라바조의 작품 둘도 마주보며 전시되어있습니다. 

 

on the Trail of Caravaggio walking Tour,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 1601/ Joy of Rome

 

 

 

성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예수에 의해 '베드로(반석)'라고 불리웠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어부로 살았으며, 형제 안드레와 함께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삶에서 여러 차례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체포 당시, 그는 세 번 이나 예수를 부인했고, 이후 부활한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 용서하셨고, 다시금 초기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첫 교황이며, 그의 무덤은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 바울의 개종, 1600-1601/ www.romeandyou.org

 

 

 

 

사도 바울은 기독교 초대 사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에 널리 퍼뜨린 인물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울로, 바리사이인 이었고, 로마 시민이자 다국어를 구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초기 사울은 기독교를 맹렬히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다마스커스(시리아)로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는 중 말에서 떨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환상을 경험 한 후 개종합니다. 이후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고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의 권능에 대한 증인이 되었으며, 그의 서신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Italy XP

 

 

 

 

 

 

 

이 제단화는 카라바조가 좌우 측면에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1601)과 <성 바울의 개종>(1600-1601)과 호흥합니다. 두 성자 모두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고, 같은 날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은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자처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지는 형 집행 모습입니다. 강렬한 색채와 명암, 극적인 구성, 특히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육체적 동작을 경사진 곡선으로 강조했습니다. 한편 등장인물의 평범함으로 인해 천상의 종교를 지상의  종교로 끌어내렸으며, '연극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실감 나게 합니다.  고뇌에 찬 베드로의 표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정도로 말입니다.  <성 바울의 개종>은 뜻밖에도 말이 그림 전체의 공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활짝 벌려 아치를 그리는 바울의 팔과 어울려 타원형의 아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성한 기적에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안니발레는 인물의 이상적 고전주의 형태로, 카라바조는 사실적으로 그려 화풍에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성격이 거칠었던 가라바조도 안니발레의 작품을 인정했으며, 서로의 만남을 행운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바로크 회화는 르네상스 양식보다  광범위하게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통합된 형태를 보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6HaWJPVXo

 

 

 

 

 

#https://www.youtube.com/watch?v=wGLkpcsZkVU

 

 

 

 

 

 

 

The Butcher's Shop, 1583,Oil on Canvas, Christ Church Picture Gallery,Oxford/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의 < The Butcher's Shop>은 1583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현재 옥스퍼드의 Christ Church 그림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5cm* 266cm의 크기로, 카라치가 고안한 특정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도살장 풍경을 묘사하지만, 일반적인 저속함을 초월한 독특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야만적인 모습을 떠올리는 우리와 달리  카라치는  도살자들이 조용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일상의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화면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객은 돈을 찾고 있는 모습으로 ,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운 분위기 대신 통제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도살"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시각적 아름다움과 함께 강한 상징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살자가 양을 도살하고 있는 장면은 단순한 학대가 아닌, 희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카라치는 도살자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슬픔과 책임감을 동시에 전달하고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일상의 묘사를 넘어, 인류와 고기 소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2SedB-eDvM

 

 

 

 

 

 

 

 

 

 

The Butcher's Shop, early 1580's , Kimbell Art Museum/wikipedia

 

 

 

안니발레는  경직된 고전주의에 매돌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근대성은 초기 대표작 <푸줏간The Butcher's Shop> 연작에서 확인됩니다.  당시 대세였던 종교화가 아니라 서민의 삶을 담으면서도 예상외의 대담한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일단 푸줏간이 그림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인물 묘사도 유쾌하고요. 일꾼들이 동물의 시체를 매다는 장면이 풍부한 색채와 빛의 변화를 담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해부학적으로 생생하고요. 당시 정물화에 푸줏간이 주제로 자리 잡은 것 은 이중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작품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푸줏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법 생겨났습니다. 그중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1655)>는 아예 소고기만을 갖고 정물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임 수틴은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를 극단적으로 상징한 <가죽을 벗긴 소>를 그려 렘브란트에게 헌정했고요.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도미에도 '푸줏간' 연작을 남기는 등 이 작품으로 인해 회화의 소재는 더욱 풍부해지고, 생활과 밀접해졌습니다.

 

 

 

렘브란트 ,Slaughtered OX, 1655, Louvre, Paris/wikipedia

 

 

렘브란트(1606-1669)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주로 빛과 어둠의 명암 효과를 조절하여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 성경 장면, 자화상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각 작품에서 고유한 심리적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빛의 효과를 강조하여 명암의 대조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근대적 명암의 시조'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0여 점에 달하는 유화,수채화, 동판화, 드로잉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사실적 수법을 넘어서, 인물의 내면 세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독특한 심리 묘사가 돋보입니다. 

 

 

2024.03.26 - [지식&교양] -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50-95.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t Harmenszoon van Rijn,57)

17세기 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났거든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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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cass of Beei by Chaim Soutine, 1925, Minneapolis Institute Art/ Google Arts& Culture

 

 

 

카임 수틴은 20세기 초 리투아니아 출생의 화가로, 주로 표현주의 화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색채 사용은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수틴은 초기에는 그레코,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와 같은 대가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점차 그의 스타일은 생명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고요. 그는 발광하는 듯한 터치로 생명감을 강조했습니니다. 강렬한 색상과 감정이 실린 작품을 통해 깊은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2024.10.02 - [지식&교양] - 51-40. 카임 수틴( Chaim Soutine, 87)

 

51-40. 카임 수틴( Chaim Soutine, 87)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소개할 러시아 출신 화가 카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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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with Meat by Francis Bacon, 1954, Art Institute of Chicago/wikipedia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화가로,  그의 강렬하고 독창적인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로 인물화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그의 작품은 대담한 색상과 왜곡된 형태를 통해 극단적인 감정을 전달합니다.  대부분의 삶을 런던에서 보냈고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초기 생계는 가구 디자인과 인테리어 장식으로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화가로서의 커리어는 1944년에 '삼단 제단화'를 기초로 한 형상의 세 가지 습작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은 종종 고립된 감정을 강조하는 구도로, 추상적인 형태와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피카소와 근대 미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베이컨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인물의 왜곡된 형태를 통해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2024.04.26 - [지식&교양] - 51-9.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1992,62)

 

51-9.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1992,62)

'프랜시스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를 주장한  그  철학자 맞나?아닙니다.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철학자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시각적 충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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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처럼 안니발레도 지역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린 주역이었습니다 . 미술 서적에서 카라치라고 하면 안니발레, 형 아고스티노, 사촌 형 루도비코 세 사람을 묶어 가리키는 경우가 흔합니다. 셋의 고향은 라구 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북부의 도시 볼로냐입니다. 세 사람은 당시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매너리즘의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우아함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인체 비율, 뒤틀리지 않은 자세, 명쾌한 구도, 이해하기 쉬운 감정 표현 등을 추구했습니다. 

 

 

 

 

셋 중 어린 안니발레는 가장 대담하고, 가장 비사교적이며, 기성 화단으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촌 형 루도비코는 볼로냐 선배 예술가들과 비교적 활발히 교류했고, 형 아고스티노는 사교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반면 안니발레는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라고 생각하는 말수 적은 청년이었습니다.

 

 

 

 

안니발레는 파르마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각지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했고, 코레조의 감각적인 신비로움이나 베네치아 화가들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자기 것처럼 흡수했습니다. 고향 볼로냐에 있을 때도 형, 사촌 형과 함께 끊임없이 주변 사물과 모델을 스케치하는 등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카라치 3인방은 볼로냐에서 인기 높은 신예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Bologha,Italy/나무위키

 

 

1582년 카라치 형제와 사촌 루도비코는 미술학교 '아카데미아 데이 데시데로시( Desiderosi 열망)'를 설립했습니다. 후에 '아카데미아 델리 인카미나티(Incamminati, 약진)'로 개명했고요. 학교는 정해진 교육과정이 없이 학생들이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고찰하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귀도 레니가 유명합니다. 그의  당시 명성은 라파엘로와 비교될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안니발레는 볼로냐 화파를 이끌며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셋은 1589-1594년 볼로냐를 주 무대로 함께 작업했습니다. 마그나니 궁전과 삼피에리 궁전에서 프레스코화를 완성했습니다.

 

 

 

 

 

 

아고스티노 카라치 Agostino Carracci, The Lamentation, 1586/wikipedia

 

 

 

Agostino Carracci(1557-1602)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판화가, 태피스트리 디자이너, 미술 교사로, 그의 형제 안니발레와 사촌 루도비코와 함께 볼로냐에 아카데미아 델리 인카미나티를 설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금세공인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프로 스페로 폰타나와 바르톨로메오 파사로티 아래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실물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강조하고 매너리즘 스타일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다작의 판화가로, 틴토레토와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했으며, 볼로냐와 로마에서 주요 프레스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루두비코 카라치, 성 베드로의 울음/카톨릭 신문

 

 

 

루도비코 카라치(1555-1619)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의 초기 바로크 화가, 에칭 작가, 판화가입니다. 그는 사촌 아고스티노와 안니발레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 카라치 아카데미를 공동 설립하여 자연주의적 접근 방식을 예술에 도입했습니다. 루도비코의 작품은 감정적 깊이, 넒은 제스처, 영적인 주제로 유명하며, 매너리즘이 지배하던 시기 이후 이탈리아 미술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경력 내내 볼로냐에 머물며 볼로냐 화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그의 가르침과 작품을 통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셋의 대표적인 공동 작품으로는 볼로냐의 귀족인 필리포 파바의 저택 벽에 그린 <이아손의 모험> 연작이 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연작 중 한 점을 가리키며 누가 작업했냐고 묻자 공동 작품이라는 뜻에서 "카라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셋은 뜻을 같이했습니다. 

 

 

Massacte of the Innocents by Guido Reni, 1611, Pinacoteca Nationale di Bologna, Bologna/wikipeia

 

 

 

 

귀도 레니(1575-1642)는 볼로냐 출신으로, 특히 고전적인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는 음악을 배웠으나 9살부터 화가 데니스 칼배르트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볼로냐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라치 가문을 포함한 여러 화실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귀도의 작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이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주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에서 그는 색채의 독립성과 섬세함을 통해 절대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레니의 작품은 당대 다른 바로크 화가들과는 달리 명확한 비례와 밝은 색감을 띠고 있으며, 고전적 미를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 

 

 

 


 

 

 

 

Crucifixion with Saints, 1583, /wikipedia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인들 Crucifixion with Saints>은 1583년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제작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의 경력 초기 단계에서의 예술성을 반영하고  있고요. 이 유화는 현재 볼로냐의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교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된 산 니콜로 디 산 펠리체의 예배당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스타일에서 특징적인 자연주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여러 성인들이 한 장면에 나란히 배치된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Sacra Conversazione"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Sacra Conversazione)는 일반적으로 "성스러운 대화"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회화에서 주로 사용되며, 성모자상이 중앙에 배치되고, 그를 둘러싼 성인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는 형태의 회화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형식은 15세기 이후 이탈리아 화가들에 의해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의 특징은 성인들이 성모와 아기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이들은 대화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들은 대개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관람자에게 깊은 성스러움과 침묵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작품에는 성모 마리아,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시스코, 성 요한복음사가, 볼로냐의 수호성인 성 페트로니우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라치는 인간의 형태와 감정을 표현하는 혁신적인 접근 방식으로, 당시 전성기를 이룬 후기 매너리즘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매너리즘(Mannerism)은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입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정신과 고전적 규범을 반영하면서도 그에 대한 반발과 변형을 시도한 과도기적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는 당시 미술의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감정과 주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술가의 개성을 나타내기 위해 형식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했고요. 

매너리즘은 표현의 왜곡, 비대칭적인 구성, 그리고 복잡한 및 기묘한 형태를 강조합니다. 매너리즘의 예술가는 풍부한 감정, 긴장감, 불안감 등을 전달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비율과 비대칭 구도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또한 , 이 시대의 화가들은 색상 사용에 있어 기존의 규범을 넘어  과감하게 비정상적인 색채를 시도함으로써 감정적으로 더 깊이 있는 작품을 추구했습니다. 

이 미술 양식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규범과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에서 벗어나, 보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접근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일종의 반항으로, 그 당시 대중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테마에서의 탈피를 나타냅니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표현 형태를 구현하고자 하는 다각적인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조는 후대 초현실주의와 같은 다양한 예술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매너리즘의 특징을 갖춘 작품으로 여러 예술적 요소가 융합되어 있습니다. 매너리즘의 신체 양식과 비잔틴의 신비주의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엘 그레코 El Greco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egaz, 1586, lglesia de Santo Tome, Toledo/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묘사되며, 그의 머리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성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성 프란시스코(San Francesco d'Assisi)의 위치와 어두운 구름의 극적인 삽입은 작품의 감정적 긴장을 강화합니다. 카라치는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이 효과를 높였으며, 작품의 극적인 사실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1-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기독교 수도사이자 설교가로, 프란치스코회의 창립자입니다.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군인으로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환시를 경험한 후, 그는 세속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가난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1210년 교황의 승인을 받아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가난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심지어 자연과 동물에 대한 깊은 존경을 나태내었습니다.1209년 자신의 신념에 따른 첫 번째 규칙을 만들었고, 이는  공동체 생활과 복음을 따르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현재 그는 동물, 자연환경, 그리고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도 그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작품이 공개되었을 당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인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구성의 불협화음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카라치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그를 이탈리아 바로크 운동의 저명한 예술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제단화는 카라치에게 더 많은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바로크 예술 발전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Hc08dgjLrM

 

 

 

 

 


 

 

 

Baptism of Christ,1585/wikipedia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는 1584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그의 중요한 초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예술적  발전과 이탈리아 회화의 변화를 드러내며, 특정 인물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는 1583년에 법학 교수인 자코모 카노비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가 로마로 이주하기 전 볼로냐에서 만든 유일한 제단화입니다. 원래 위치에서 남아있는 소중한 예술작품이고요. 이 회화는 코레조의 영향을 받으며, 카라치가 새로운 예술적 관심을 탐구하는 첫 번째 중요한 사례입니다. 

 

 

작품은 상반부와 하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뉘며, 상반부는 천사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구름 위에 나타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반부는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와 주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요.  해당 장면은 그 당시 볼로냐 화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만소리스틱 양식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중앙에는 성부, 성령의 비둘기, 그리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볼로냐 학파( Bolognese School)는 이탈리아 볼로냐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및 학문적 그룹을 지칭합니다. 주로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동안 존재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기법뿐만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 세밀한 묘사와 빛과 그림자 사용에서 높은 기술력을 보였습니다. 

 

볼로냐 화가들의 만소리스트적 양식은 16세기 볼로냐에서 발전한 이탈리아의 미술 스타일입니다. 이 양식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나 성경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특히 , 볼로냐 학파의 화가들은 인물의 표현과 구성을 통한 극적인 효과를 중시했습니다. 특징 중 하나는 사실적인 인물 묘사입니다 . 화가들은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러한 사실성을 통해 감정과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또한 색채의 사용에서는 밝고 강한 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주었으며, 이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특성들 덕분에 볼로냐 학파의 회화는 감정의 깊이와 드라마틱한 느낌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tjHhKQkpVM

 

 

 

 

 

 

 

The Beaneater,1580-1590, oil on Canvas, Galleria Colonna,Rome/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 콩 먹는 사람 The Beaneater>(1580-1590)입니다. 로마의 콜론나( Colonna) 궁전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작품은 일반 서민의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매우 사실적인 정물화의 양식으로 그려졌고요.  카라치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작업 대상에 따라 "하향 조정"이 가능하여, 농민을 묘사할 때 소탈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거칠고 흉물스러운 요소가 돋보이는 표현 방식으로 그려져 있고요.

 

 

 

작품에서 묘사된 농민은 자연스럽고 솔직한 행동으로 관객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관람자가 마치 그의 식사를 같이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카라치의 그림은 고급스러움과 대조되는 주제를 통해 사회적 계급을 드러내며, 구도와 화풍에서 상반된 밸런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화풍은 거칠고 투박한 터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그림의 주제를 더욱 강조하게 만듭니다. 농민의 일상적인 식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에게 일상의 소소함과 동시에 그들만의 진솔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안니발레의 유화작품 <콩 먹는 사람>도 인물과 주제 선정에서 매우 현대적이며 ,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했습니다.

 


 

Fishing Scene , 1588년경, Louvre,Paris/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드로잉에 매우 능숙했습니다. 정확한 드로잉을 특히 강조했던 그는 종종 실제의 장면을 묘사하고 그것을 이상화된 상상의 풍경 속에 위치시키기도 했습니다. 그가  1588년 즈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 Fishing Scene> 작품입니다. 당시 볼로냐 빌라 장식에 사냥과 고지잡이 주제는 매우 인기있었습니다. 빌라의 현관 위에 걸리도록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카라치의 초기작으로  로마로 이주하기 전 그려진 그림으로 보입니다.

 

카라치는  위 그림에서 한 화면을 여러 개의 장면과 결합시켰습니다. 교묘하게 구성을 연출해 관람자가 전경에서부터 각 그룹의 사람들까지 아주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 본 다음, 배경으로 넘어가게 그렸습니다. 실제 인물들의 습작을 토대로 그린 다음, 풍경과 결합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이 흥미 있는 이유는 오른쪽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입니다. 카리치의 발전된 제스처 사용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설득력있고 유기적인 제스처의 사용은 카라치의 특기인데, 이는 이후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Venus, Adonis and Cupid, 1595,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Venus, Adonis and Cupid >는 1595년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제작한 유화 작품으로,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신화적인 주제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Venus는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됩니다. 그녀는 예술과 문학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인류 문화와 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Adonis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남성 미의 이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인 키니라스와 어머니인 뮈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뮈라는 아프로디테의 질투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결국 아도니스를 출산하게 됩니다. 아도니스는 어린 시절 아프로디테에 의해 하데스에게 보내져 페르세포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아프로디테에게 돌아오게 되며, 두 여신 사이에서의 갈등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도니스는 사냥을 좋았지만, 그는 사냥에서 큰 야생 멧돼지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이 멧돼지는 바로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레스가 질투하여 변신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지고요. 아도니스의 피에서 아네모네 꽃이 피어납니다. 그의 죽음 이후 아프로디테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아도니스의 죽음은 매년 "아도니아"라는 축제로 기념되며, 이 축제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기리기 위한  여성들의 슬픔의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아도니스가 다루는 생명의 순환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Cupid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날개를 가진 아기 천사의 형태로 묘사되며, 사랑의 화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존재입니다. 큐피드는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Eros)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로마 신화에서의 역할은 사랑과 욕망을 다스리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세 인물인 비너스, 아도니스, 그리고 큐피드가 숲 속 풍경을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도니스는 사냥개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치우며 비너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고전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색채와 함께, 인물 간의 감정적인 연결을 강조합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고전 미술 요소들을 통합하여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비너스의 몸은 티치아노의 여성 누드 표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니스는 사냥꾼으로 묘사되어 있고요. 이 작품의 구도는 대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감정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제스처와 시선의 교환이 눈에 띕니다. 이처럼 Venus, Adonis and Cupid 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주며, 사랑과 비극적인 신화를 통해 인물들 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Lqrb9R5XQM

 

 

 

 

 

 

 

 

The Choice of Hercules,1596,Oil on Canvas, Capodimonte Gallery,Naples/wikipedia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작품 < The Choice of Hercules>(1596) 입니다.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가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근육질의 헤라클레스가 두 여성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미덕 (Virtue)과 악덕(Vice)을 상징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본능적으로 덜 고된 길인 악덕(Vice) 쪽으로 유혹을 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악덕(Vice)은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쾌락을 제공하는 여러 아이템들로 그를 유혹하고요. 반면, 미덕(Virtue)은 소박한 옷을 입은 여성으로 어렵고 고된 길을 따른다면 명예와 보상을 얻게 됨을 설명하며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는 고전적인 미화와 현대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당시 관람객들에게 더 큰 연관성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미덕(Vitue)의 길을 선택하는 것의 어려움과 그에 따르는 댓가를 강조하며, 헤라클레스의 결정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선택을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합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영웅입니다. 그의 이름은 "헤라의 영광"을 의미하고요. 강력한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로 신화 속에서 12개의 과업을 수행하며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과업은 힘겨운 도전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영웅적인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형제인 리누스를 죽인 후 양을 치며 방황하기도 하고, 다양한 악당들과의 전투을 통해 자신의 위엄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맹렬하게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전설은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고, 신들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웅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HK3r4_6xYk

 

 

 

 

 

 

 

Mocking of Christ,1596,oil on canvas,Pinacoteca Nacionale di Bologna/wikimedia commons

 

 

 

 

 

<그리스도를 조롱함 Mocking of Christ>(1596)은 신약 성경 <마태복음 15장 16-19절> 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졌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가시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붉은 염색 로브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인간의 죄로 인해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도 드러나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카라치는 사실적인 묘사와 뛰어난 색채 사용으로 유명하며,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이 드러납니다.  그의 화풍은 인물의 감정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전달합니다. 인물 간의 상호작용을 강렬하게 나타내고요.  이 그림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표정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곤란한 상황에서도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고요. 이와 같은 해석은 카라치의 대표적인 특징인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접근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조롱함"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 그리스도교의 깊은 의미와 상징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볼로냐의 피나코테카 나지오날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DAhxebcDGY

 

 

 

 

 

 

 

안니발레와 아고스티노 형제는 1595년 로마로 떠나 추기경 오도아르도 파르네세를 만나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로 교황청 내 권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안니발레가 그림을 그릴 장소는 파르네세 공작의 동생, 오도아르 파르네세 추기경의 개인 공간이었습니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였던 오도아르도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추기경이 된 탓에 종교적 열정이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르네세 가문은 오도아르도의 개인 공간이 젊은 추기경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꾸며지길 원했습니다. 

 

 

 

 

오도아르도 파르네세(1573-1626)는 이탈리아 파르마 공국의 유명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교황이 된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이자 파르마 공작 오타 비오 파르네세의 아들입니다. 그는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지닌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이러한 배경 덕분에 교황 추기졍으로 서품되었습니다. 

 

 

안니발레는  이 작품에 이르러 자신이 평생 존경하고 또 영감의 대상으로 얻었던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자신의 화폭속에 녹여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역동성, 라파엘로의 흠결 없는 단정함, 티치아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의 세련된 색채 감각,  코레조의 아련한 관능 등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으되 그들 중 누구와도 지나치게 닮지는 않았습니다. 호히려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평가입니다. 

 

 

 

 

 

 

The Loves of the Gods, 1597, Farnese Gallery, Rome/wikipedia

 

 

 

<신들의 사랑 The Love of the Gods>은 1597년에 제작된 프레스코로, 로마의 팔라조 파르네세(Palazzo Farnese)천장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신화의 다양한 연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오비드(Ovid)으 서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프레스코는 벽화 기법 중 하나로, 석회와 석고로 만든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그리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은 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벽이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프레스코는 기원전 약 3000년경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이 기법은 15세기부터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바티칸 궁전 벽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프레스코화는  벽에 그림물감이 흡수되어 마를 때 표면에 고착되므로 , 시간이 지나도 색깔이 변색되지 않고 내구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마르면서 광택이 줄어들고 색조가 차분해지는 특성이 있으며, 이러한 툭징이 프레스코화의 독특한 매력을 형성합니다. 

 

 

 

<신들의 사랑 The Love of the Gods>(1597)은 역동적인 구성과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주요 패널은 축제의 장면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만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화려한 색채와 복잡한 인물 표현을 특징으로 하여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여러 신화적 요소와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의 내용은 성적인 긴장감과 유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묘사가 그들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복잡한 인간 관계를 탐구하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카라치의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환상을 예고하는 중요한 예로 여겨지며, 그의 예술적 접근은 나중에 바로크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 풍요, 다산, 광기, 황홀경, 그리고 연극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며, 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합니다. 디오니소스의 출생 이야기는 여러 전승에 걸쳐 다릅니다.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자신의 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다 그녀가 공포에 빠져 죽자, 태아였던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허벅지에 숨켜 키웠다고 전해집니다. 디오니소스는 뉘사 산의 님프들에 의해 양육되었고, 그들은 디오니소스를 여자처럼 키우라고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초기 숭배 당시에는 수염을 기르고 긴 옷을 입은 성인 남성으로 묘사되었으나, 후에 젊고 육감적인 양성적인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의 상징 동물로는 표범, 사자, 호랑이가 있으며, 상징 식물인 포도나무와 함께 그의 숭배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또한 전통적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호자이며, 혼돈과 위험을 상징하는 신으로 이해됩니다. 이와 함께 그의 교리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공포와 흥분을 혼합한 의식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공주로, 크레타왕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입니다. 그녀는 신화에서 테세우스의 사랑과 관련이 깊으며,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테세우스를 도와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타래와 칼을 주었고, 이를 통해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낙소스 섬에서 그녀를 두고 떠났고,  그  후 디오니소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의 스타일은 차세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후에 나타나는 거장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들의 사랑>은 단순한 미적 기념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기 다른 신화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인간의 감정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The Loves of the Gods on the vault of the Farnese Gallery,1550/wikipedia

 

 

 

 

 

안니발레는 <신들의 사랑>을 작업할 동안 파르네세 가문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궁 내에서 그의 숙소는 하인이나 쓸 법한 누추한 곳이었으며, 천장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기는 커녕 인테리어에 필요한 사소한 디자인까지 떠맡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함께 작업했던 형  아고스티노가 작품 관련 의견 충돌로 볼로냐로 돌아간 후 사망했다는 소식마저 전해졌습니다.  평생의 예술적 동료인 형을 잃은 안니발레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신들의 사랑>이 완성되자, 로마의 화가와 지식인들은 새로운 걸작의 탄생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파르네세 가문의 인척이기도 한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은 고가의 금목걸이를 선물한 후 안니발레에게 그림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의로인인 오도아르도 추기경의 반응은 싸늘함에 가까웠고요. 대형 천장화 시세를 감안할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받았고, 그나마도 직접 얼굴을 보기는 귀찮다는 듯 하인을 시켜 전달했다로 합니다.

 

 

 

그렇게 안니발레는 형의 죽음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 우울의 덫에 걸리고 무기력에 빠져 그의 작업량이 심각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을 걱정한 제자들이 '하루에 두 시간은 그림을 그린다'는 내용의 약속을 받아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Cupid and Anteros wrestling framed by Atlantes and Ignudi,1550/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vxuvkV3oeos

 

 

 

 

 

 

 

 

 

Pieta,1600, Museo di Capodimonte,Naples/wikipedia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카라치의 < Pieta>는 관람자에게 슬픔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작품은 마리아의 상처 입은 아들을 바라보는 통찰 깊은 시선을 특징으로 합니다. 두 천사가 그리스도의 손과 가시관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동일 제목의 조각상을 명확히 참조하고 있으며, 피라미드 형태의 구성과 캐릭터의 제스처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카라치는 어둡고 극적 조명을 통해 고통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표현적 디테일을 통해 성스러움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상처와 마리아의 슬픈 감정을 섬세하게 조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고대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영향을 받아 인물들의 비율과 근육 구조를 세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카라치의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피에타 형식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통받는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시신을 단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카라치의 작품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추가되어 고통을 나누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oonarroti, 1475-1564)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 건축가, 시인으로,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평생 동안 피렌체와 로마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인생의 고뇌와 신앙을 정교하게 조화시킨 작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교육은 도미니코 기를란다요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에게 받았고, 메디치 가문의 후원하에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주요 작품으로<피에타>, <다비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및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특히 <피에타>는 그의 초창기 걸작으로, 신비롭고도 슬픈 아름다움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조각이기도 하고요. 또한 <다비드>와 같은 조각들은 완벽한 비례와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여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Pieta, 1498-1499,Mable , Saint Peter's Basilica, Vatican City/wikipedia

 

 

 

 


 

 

 

 

 

 

 

Domine, quo vadis?, 1601-02, oil on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Domine, quo vadis?> 는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유화로 제작되었으며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인물의 정면을 강조하며, 카라치 특유의 사실적이고 극적인 표현이 돋보입니다.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강하게 드러나며, 실질적으로 그는 자신의 고난을 직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부끼는 의복과 강렬한 표정은 예수의 감정을 잘 전달하고 있으며, 그의 신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카라치가 신의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뛰어난 기법을 사용하는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라치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종교적 맥락과 인간의 고난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예술가의 기술적 뛰어남과 더불어 종교적 메시지를 강렬히 전달하는 이 그림은, 카라치가 후에 니콜라 푸생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가  인체 해부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자세와 감정을 묘사한 것으로, 바로크 미술의 전형적인 요소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은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 현대 회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는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예술 스타일을 추구했으며, 특히 역사화와 신화적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1624년 로마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카라치파의 영향을 받아 고전적 교양을 쌓았습니다. 그는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 작업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1639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루이 13세의 수석 화가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여겨집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예루살렘의 파괴>, <바쿠스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그는 그의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과 고전적 미학을 통해 후세의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Et in Arcadia ego by Nicolas Poussin,1637-1638,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 Paris/wikipedia

 


 

 

 

 

 

 

 

 

Rest on the Fligt into Egypt,1604/wikipeida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성 요셉이 이집트로 도망가는 여정 중 잠깐 쉬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의 추기경 드노 드 라 누 컬렉션에서 1672년 에 기록되었으며, 라 메라 가문의 소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772년 피에르 크로자에 의해 인수되었고 후에 에카테리나 2세에 의해 소장되어 현재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에르미타주 궁전의 231호 방 (이탈리아)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나무위키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의 슈테틴에서 태어났습니다. 1745년, 그녀는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통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재위 동안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크림 반도를 차지하고, 폴란드 분할에도 참여 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받은 예카테리나는 문학, 예술, 교육을 장려하고, 다양한 문화적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의 치세와 정책 덕분에 러시아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럽의 주요 정치적 강국으로 위치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 복제품도 존재합니다. 익명의 17세기 직사각형 복제품은 오를레앙 컬렉션에서 기록된 후 서더랜드 공작에 의해 인수되었으며,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복제품들이 여러 곳에 전시되거나 개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카라치의 세련된 고전주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동시에 , 풍경에 담긴 감정과 자연의 묘사로 인해 그의 예술적 기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amentation of Christ, 1606,National Gallery/wikimidia Commons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 런던에 소장되어 있으며 ,  카라치는 이 주제를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여러 차례 다루었습니다.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뺨이 하늘을 향한 모습으로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 있습니다. 성모는 슬픔에 잠겨 있으며, 오른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괴로움을 표현하며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뒤에는 어두운 녹색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성모를 지탱하는 젊은 여성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acci, 1560-1609)는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장엄성과 함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는 볼로냐와 로마에서 활동하며, 후에 이 화풍을 전파한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사실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이 특징이며, 강렬한 빛과 색상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0fQZLgGJpw

 

 

 

 

 

 

 

안니발레 카라치는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작업했습니다.  1609년 제자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가난하게 죽었고요.  매장지는 로마의 위인들만이 묻히던 판테온, 생전에 존경하는 라파엘로의 묘 옆으로 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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