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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은 대부분 태어난 도시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특성상 인적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었죠. 여행이 오늘날처럼 안전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오늘의 주인공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도 기록은 없지만 위트레흐트나 남부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
엘 보스코
헤오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반 아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 운 그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그림체가 특징입니다.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지게 표현했죠. 때문에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라 불렸습니다. 악몽같은 환영을 그린 대형 패널화들을 15-16세기에 제작했습니다.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고요. 종교 제단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공상적인 반인반수의 짐승들을 묘사한 그림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헌 , 그의 기괴한 그림과 풍자는 네덜란드 속담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설교서의 삽화에서 모티브을 얻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1501년경에 제작된 세 폭 제단화입니다. 삼면화는 성당의 제단화로서 서사적 구조와 짜임새 있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삼면화는 세 개의 연결된 패널로 구성되어 있어,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으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며 ,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합합니다. 공간 활용 면에서도 펼쳐졌을 때와 접혔을 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작품 보존에 유리한 면도 있고요. 관람자가 패널을 열고 닫으며 작품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 더 깊은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삼면화는 단일 화면의 그림이나 다른 예술 형식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표현 방식과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성 안토니우스가 겪은 정신적, 영적 고통을 묘사합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와 유혹을 통해 영적 교훈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쪽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가 육체적 시련을 겪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악마들에 의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안토니우스의 모습과 악마가 이끄는 행렬이 있는 동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중앙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가 다양한 유혹에 직면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야외 식탁에서 벌어지는 사악한 연회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죽음에 이르는 유혹을 상징합니다. 수도자의 두건을 쓴 여인이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모습과 함께 악마의 지배를 받는 도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패널은 성 안토니우스의 명상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유혹을 극복하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도와 절제,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르네상스 초기로, 중세 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는 유럽에서 종교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 종교 개혁으 조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과 정보의 전파가 빨라졌습니다. 신세계 발견으로 인한 지리적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르네상스 정신이 북유럽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스의 작품은 중세의 종교적 주제와 르네상스의 새로운 예술 기법을 결합하여, 당시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영적 갈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작품은 악의 유혹과 신앙의 힘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불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4-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화가 보쉬는 네덜란드 북부의 브라반트(Brabant)에 있는 "스-헤르토겐보쉬('s-Hertogenbosch)"란 작고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 보스는 네덜란드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스헤르토 헨 보스('s-Hertogen Bosch)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거기서 죽었기에 붙여졌습니다. 지금도 인구 약 15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죠. 14세기들어 도심이 확장되고 당시 네덜란드 지역의 북방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1463년 도시에 대 화재가 일어났으며, 13살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인 보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TNpZ2QzaY0
1520년까지 스헤르토헨보스는 번영하여 위트레흐트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독립된 주교령이었던 스헤르토헨보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가담하여 칼뱅주의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군을 막아내며 긴 전쟁의 서막을 열개 됩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난 뒤. 30년 전쟁의 발발로 1629년 네덜란드의 손으로 들어가며 스헤르토헨보스 가톨릭 인구와 브라반트인 (과거의 브라반트 공국으로 현재 북부는 네덜란드가 남부는 벨기에가 차지하고 있다.)"들은 암암리에 차별을 받게 됩니다. 1526년 18, 571명이었던 인구가 1665년에는 9,000명까지 급감하게 될정도로 말이죠.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종교적 갈등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토적 분쟁으로도 발전했습니다.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면서 시작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이에 반발하여 개신교 제후 동맹을 결성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으며, 유럽의 정치 지형과 종교적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815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설립된 이후 주도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시의 정책은 1203년에 세워진 성벽 밖으로 도심의 확장의 제한하여 주거난과 영아사망률이 네덜란드에서 최고였습니다. 또한 도시에 진입하는 노동자를 저지하기 위해 산업화 와 인텔리들을 불러올 고등교육 시설 설립을 막는 폐쇄적인 정책으로 도시의 중요도가 떨어졌다고 해요.
보쉬는 정통파 가톨릭 교회의 교인이었으며 지방 종교협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개성있는 그림들로 인하여 "16세기의 이단아 ( a heretic)"로 알려졌을 정도로 매우 기괴합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있는 40여 점 정도 되는 보쉬의 진품들은 정확한 연대나 날짜가 붙어있는 것이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 "마술사 Magician"처럼 , 그의 초기로 추정되는 작품들은 스케치와 구성, 그리고 화법에서도 미완성된 듯 다소 어색한 표현을 보여줍니다.
이 초기의 작품들은 냉정하고 산문적인 배경을 통하여 악이나 죄, 육욕, 이단, 외설의 유혹과 같은 "인류의 취약성이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심상의 표현은 여전히 비교적 전통적이며, 때로는 숨어있는 악마나 이상하게 잘 차려 입은 마술사처럼 기괴한 표현이 있기도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라아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은 예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예수가 대제사장임을 의미하고요. 몰약은 예수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구세주이자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아기 예수, 예수의 어머니로서 순결과 헌신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1480, 비엔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스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잘 보여주며, 종교적 주제를 독특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십자가를 질어진 그리스도가 중앙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군중들을 나타내며, 보스 특유의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비시키며, 당시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표현 방식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흥미롭게 느껴지며, 후대 초현실주의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스의 종교적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함께,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두 그림을 보면, 둘 다 보쉬의 작품이고 제목도 같지만 분명히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조금은 다른 작품입니다. 먼저 구도를 보면,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위에서 내려자 보는 높은 시각으로 인하여 뒤 배경이 되는 공간, 즉 후경이 다소 축소되어 버렸습니다(비엔나 작품).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주요 주제와 그림 안의 주인공들의 표정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래서 극중의 비탄에 빠진 주인공들의 긴장감을 훨씬 더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머리를 살펴볼까요. 얼굴을 찡그린 병사들과 사악한 자들, 그리고 경멸할 만한 자들과 같은 밀집한 군중을 배경으로 윤곽만 보입니다. 그의 발과 발목을 비롯하여 허리 등 세로로 매달게 될 나무로 만든 큰 못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더욱 심화됩니다. 전경을 지배하는 그리스도는 무거운 십자가에 눌려 있습니다. 구레네(Cyrene)인 시몬은 등으로 쳐들어 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위 두 번째 그림(스페인 작품)에서 저 멀리 뒤 배경으로 비탄에 빠진 듯 보이는 여인이 오열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비엔나 작품을 보면 화폭의 앞 쪽, 선한 도둑이 성직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동안 병사들을 악한 절도범을 괴롭히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참회하는 선한 도둑의 극도에 달한 긴장감이 확연한 대조를 보임으로써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별하고 무척 극적인 작품입니다. 대상에 바짝 밀접하여 주인공들의 머리만으로 구성한 대답한 구도로, 1500년대의 예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화풍입니다. 이런 경향은 일반적으로 보쉬 후기의 위대한 창작들에서 발견됩니다. 화폭의 앞 면 전경 왼쪽에 폭도에 둘러싸여 있는 성스러운 여인(성 베로니카, St. Veronica)의 맑은 옆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모서리쪽, 그녀가 들고 있는 천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얼굴 형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에 응용하는 선과 악의 대조적인 모습은 보쉬 인생의 기독교 신앙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최고의 절정으로 끌어올리고 있죠.전체적으로 같은 제목에 세 번 째 벨기에 겐트 작품은 인간의 얼굴 표정과 악마의 얼굴을 비교 할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결과물입니다 . 이때까지 아직은 혼돈과 풍자적인 요소가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의 온화한 표정을 통하여 난폭한 대중들의 악마적인 표정과 대조시킴으로써 사건의 "평온"을 강조하고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Hieronymus Bosch의 <Ecce Homo>는 1475년에서 1485년 사이에 그려진 예수의 수난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군중 앞에 끌려나온 순간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있으며, 채찍질로 인해 손과 가슴, 다리에 상처가 나 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예수와 본시오 빌라도가 있고, 주변에는 조롱하는 군중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의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과 군중들의 "Crucifige Eum"(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이라는 응답이 고딕 문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템페라와 유화를 사용해 오크 패널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71cm*61cm입니다. 현재 독일 프랑크푸프트의 슈테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종교화하면 예수와 제자들, 십가자 등 전형적인 클리셰(Cliche')들이 떠오릅니다. 성경을 주제로하기 때문에 이미 많은 화가들이 주요 주제들을 다뤘고,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각색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그런데 500년이 지난 현시점에도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기괴하고 참신하고 독특한 작품이 있습니다. 종교화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플랑드르 화파 '헤레로니무스 보스' 작품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y Delights>그림을 소개합니다.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1500년대 최고의 사회상 고발입니다. "세 폭 화"는 르세상스 당시에 플랑드르에서 주로 사용하던 기법으로 12폭 병풍처럼 그린 화폭도 있을 정도로 메인 그림 주변에 그 그림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평일에는 양 날개를 접어서 닫아두고 주일날 미사를 들릴 때만 열었다 제단화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죠. 십자가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던 그림들이라 나름의 방법을 간구한 것이죠.
이 작품의 왼편은 "천국", 가운데는 "현실", 그리고 오른편은 "지옥"입니다. 이 그림을 닫으면 왼편 제일 상단부에 흰 원 안에 사람이 책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상단부에 왼편과 오른편 날개에 나뉘어서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중앙에는 지구의 천지창조 3일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요. 상단부에 쓰여 있는 글귀는 시편 33편 9절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당시에 아직도 천동설이 그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지구의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열면 화려하고 복잡하고 산만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제단화로 이 그림이 펼쳐진다면 각자의 상상력을 풀어헤쳐 오해를 낳을 여지가 많은 그림이지요. 왼편 천국 편부터 하나씩 풀어가 봅니다.
천국 편은 4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제일 상단부의 산에 날고 있는 새, 중심부의 물가에 있는 분홍색 건물, 그리고 그 아래 3명의 인간, 그리고 제일 아래 하단부에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있습니다.
제일 하단에 작은 웅덩이가 보입니다. 그 웅덩이 제일 오른쪽에 이상한 녀석이 보일 겁니다. 하반신은 물고기인데, 상반신은 팔도 나 있고, 머리는 오리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팔에 뭔가가 들려 있죠. 바로 책입니다. 저 녀석이 읽고 있는 저 책이 바로 "원죄"라는 책입니다. 저 원죄를 읽고 있는 녀석은 바로 루시퍼 ,악의 상징이며 악의 우두머리인 사탄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는데, 과연 반성은 할까요? 저 녀석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는 내용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만든 인류를 타락시킬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앉아 있는 벌거벗은 남자는 아담, 그리고 그 옆에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오는 여인은 하와입니다. 하와 뒤에 토끼를 그려놓은 이유는 다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뒤에 있는 나무는 독일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했던 자신의 이상적인 스승인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 모양입니다. 사탄의 계략은 하느님이 선하게 만드신 이 세상과 자신을 닮은 창조물이라고 하는 인간을 타락시키겠다는 계략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무숲 위로 푸르른 강줄기가 흐릅니다. 분홍색의 집이 등장합니다. 놀라운 것은 1400년대에 저런 건물을 생각해 냈다는 사실이죠.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장면입니다. 창문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부엉이 입니다. 부엉이는 2가지 의미로 존재합니다. 방탕을 상징하는 "밤"과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지혜"의 모습입니다. 곧 사탄이 계획했는데, 그 계획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저 두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한다는 것, 그럼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제일 상단의 왼쪽 산에 있습니다. 산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으로 새들이 나와서 산꼭대기로 돌더니 왼편의 무슨 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가 천국의 이야기 입니다.
이제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 볼까요? 천국에서 사라진 새들이 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9시 방향의 물가에 모여 있는 새들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정중앙에 붉은색 V자 모양이 거꾸로 된 모습이 있습니다. 3시 방향에 부엉이도 있고 새들은 정확하게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의 세계 중심에 이미 악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마들이 도대체 왜 새로 표현된 것일까? 새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새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되어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실 세계의 물을 보면 상단부의 물은 깨끗하지만, 하단부로 내려갈수록 물이 어두워집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준 세상은 맑은 물이었으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어둡게 변해 버린 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단부의 맑은 물 부분은 4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집니다. 인류의 4개 문명의 발생지를 의미하고요. 생명을 상징하는 물이 스스로 타락함으로 인해 생명을 저버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붉은색 V자 모양을 뒤엎어 놓은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습니다. 그 밑에 수많은 사람이 새에게서 열매를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은 9시 방향에도 같이 등장합니다. 새의 등에 앉아 고민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앉아 있는 새가 입에 열매를 물고 있는데 회색의 사람들이 그 밑에서 그 열매를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악마들의 달콤한 속삼임 속에 넘어가는 장면의 표현입니다.
중앙에 큰 무리가 동물들을 타고 원형으로 돌고 있습니다. 시계 반대방향이죠. 시간의 역주행으로 거스른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이 동물을 타고 있는 자들의 특징들이 당시 7가지 죄악으로 규정된 종교적 규율을 벗어난 탐욕, 음욕 등을 상징합니다. 3시 방향에 보면, 3명의 사람이 파란색의 물고기 물어 뜯어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 위헤서 토끼가 앉아 있지요. 토끼는 다산을 상징하지만, 무병장수와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큰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물어뜯어 먹히면서도 작은 붉은색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탐식의 모습입니다. 자연을 관리하도록 신에게 위탁받은 인간은 관리가 아닌 파괴로 인해 모든 상황을 망가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 돌고 있는 무리 가운데 연못처럼 생긴 곳이 있습니다. 그 물가를 보면 검은색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림 속에서 검은색은 사탄의 세력에 장악이 된 "원죄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원죄의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같이 물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 머리에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는 3시 방향의 숲에서 보입니다. 사람들이 숲에서 열매를 따고 있고, 그리고 부부같이 보이는 사람인지 큰 열매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 주변을 보니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부엉이가 등장했습니다. 열매를 손에 들고 또 나뭇가자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이 꽃같이 생긴 것으로 뒤집어쓴 채 춤을 추고 있습니다. 대낮인데 ,부엉이가 등장했네요. 바로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열매가 상징하는 것은 새들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도구라는 것이죠. "체리"는 "성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딸기는 "여자"를 상징하고요. 그래서 새들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는 상황이 보인 것입니다.
"대항해시대". 유럽은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한 시기가 이때엿습니다. 종교도 덩달아 풍요의 시기가 되었죠. 바로 현실의 장면 맨 오른쪽 아래 끝을 보면, 서 있는 5명의 무리가 보일 것입니다. 맨 앞에 검은색의 사람 그리고 그 옆에 흰색의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얼굴만 흰색이고 몸에는 레깅스 스타일의 옷을 입힌 것처럼 목 부분부터 발목까지 옅은 회갈색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이들은 "사제"를 의미합니다. 모든 이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야 할 사제들까지 탐욕에 물들어 원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11시 방향으로 분홍색 건물 앞 잔디에 커다란 딸기 한 개가 있습니다. 그 밑에는 전부 남자들이네요. 상상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겨 둘께요.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거닐게 됩니다. 어디까지 그 타락이 이어졌을까요? 4개의 물이 만나는 곳에 파란색의 집이 보이시나요. 이 집을 유심히 보면 아래 물이 잠긴 부분에 원으로 문이 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왼편에 남자가 가운데 여인의 중요한 부위를 만지고 있죠. 더 황당한 것은 그 여인의 뒤편에 한 남자가 붙어 있는 그림입니다. 이 처럼 다양한 묘사들이 거의 19금 수준입니다.
9시 방향으로 작은 크리스털이 보이시나요? 그 크리스털을 예전에 남성의 생식기라고 많이들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플랑드르 속담 중에 "불륜의 하룻밤은 깨어지는 유리와 같다."라는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털 속 모습은 10대로 보이는 소년과 2.30대 중년 부인의 모습입니다. 크리스털은 이미 금이 가 있습니다.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사랑이 아닌 단순히 즐기기 위한 성적 욕망를 채워가는 모습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 밑에 보면, 한 사람이 원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고 그곳에는 투명 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유리관 끝에는 검은 생쥐가 한 마리 보이네요. 원래 쥐는 그림에서 "선한 사람을 꼬여 타락하게 만드는 속임수"를 상징합니다. 결국, 맞은편 얼굴만 등장하는 이에게 쥐는 타락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는 것이죠. 그 타락에 빠진 자들은 흑사병으로 30-60%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는데, 엄청난 파급력으로 인간은 죽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 패널은 바로 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불에 타는 듯한 모습의 건물들입니다. 번쩍이는 불빛은 그것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검은색의 지옥 불빛 중 오른편을 유심히 찾아봐 주세요. 빛이 길게 앞으로 뻗어 나오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3그루의 나무가 보입니다. 그 빛과 나무 밑으로 붉은색의 용광로 같은 것이 보일 겁니다. 그 뻗어 나오는 빛은 바로 지옥문입니다. 작아서 안 보이지만, 내려받아서 확대해보면 사람들이 한 줄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신이 만들어 준 세상을 현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타락시킨 인간들이 들어갈 곳은 이곳이라는 소리죠.
사람의 위 모양이 보입니다. 위는 사람이 평생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저장한 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분홍색 끝부분이 피리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그 앞에 흰 천으로 둘러싸인 사람. 그 앞에 악마의 손에 끌려가는 게 힘없어 보이는 사람. 아마도 자신이 지었던 삶속에서의 죄를 저 피리가 다 이야기하나보다. 변명의 여지도 없고 희망도 없자 모든 걸 포기하고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 밑에는 얼굴과 깨어진 엉덩이가 보입니다. 깨어진 엉덩이 부분 옆에 있는 긴 나무에 열쇠가 있습니다. 그 열쇠에 매달려 죽은 사람과 그 밑에 머리, 뼈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가 그려 놓은 줄 착각할 정도입니다.
귀가 보입니다. 그 사이에 칼도 있네요.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귀는 꽉 막혀 있네요.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고집스러움으로 결국 귀가 막혀 판단력이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벌로 그 귀를 자르고 있는데, 문제는 칼의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칼은 날카롭지가 않죠. 그래서 자를 수 없고요. 그렇다면 잘리는 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멀금한 사람 얼굴이 보입니다. 누구일까요? 독일에 르네상스 바람을 몰고 왔던 뒤러의 말을 빌려봅니다. 그는 자화상에서 "화가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5가지 주 된 특징을 사용한다. " 라고 말합니다. 그 4가지는 첫째는 사인입니다. 둘째, 관람객을 전면 응시하는 얼굴입니다. 또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목표물을 바라보지 않고 유일하게 우리를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죠. 셋 째, 배경입니다. 넷째, 종입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그림의 주인공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입니다. 지옥에서 그 중심부을 차지하며 여러 가지 시사하는 그림에 둘러싸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엉덩이 부분은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깨어진 그 부분 안에 왼편에는 술 창고가 있고, 오른편에는 탁자같은 것이 있어서 심판대가 아니냐? 는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일어나는 건 그의 천재적인 표현법 속에 아직 우리가 온전히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석해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리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스케이트 타는 악마도 있고, 나름 무거워지려는 그림 속에 익살스러움을 삽입하는 화가들의 유희도 즐겨보면 행복하답니다.
마지막 하단부분입니다. 하프에 매달린 사람, 메트로놈 같은 악상 기계에 눌려 죽은 사람, 오른편에 의자에 앉아서 냄비를 뒤집어쓴 새가 사름을 잡아먹는 장면, 그 의자 밑에 누워 기절한 여자, 왼편 아래에는 도박꾼들의 최후를 드러내는 듯한 모습, 마지막으로 오른편 아래에 수녀 가운을 쓰고 있는 돼지와 한 인간 사이의 묘한 이야기 등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우선 하프에 매달린 사람은 평생 쾌락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징벌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이제는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저 하프를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엉덩이에 악보가 그려져 있네요.
오른편으로 이동을 하면, 냄비를 쓴 새가 등장하는데, 이 새는 없는 새입니다. 환상 속의 새로, 이 새의 이름은 "툰달"입니다. 아일랜드 수도사가 쓴 "기사 툰달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툰달이 지옥을 다녀왔는데, 지옥에서 한 새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기에 "저 새가 무엇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지옥인이 "탐식의 사람을 잡아먹는 새다"라고 했다네요. 그 말을 툰달은 수도사에게 했고, 이후 지옥에 다녀온 툰달의 이야기에 근거해 지옥의 새는 "툰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저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벌을 내리는데, 자세히 보면 너무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잡아먹고 바로 사람을 그 엉덩이 부분의 유리로 보여주는데 , 바로 원래대로 살아납니다. 자세히 보면 그 유리에서 아래 작은 웅덩이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속에서 뭐 하나 봤더니, 바로 양옆에서 토하고 싸는 것을 그대로 먹으며 사는 형벌을 받는 모습이네요. 아우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요. 죄와 벌의 상관 관계가 묘하죠.
그리고 그 툰달 발밑에서 한 여자가 쓰려져 있습니다. 그 여자의 가슴에는 두꺼비 한 마리가 있고요. 두꺼비는 그림 속에서 허영을 상징합니다. 7가지 죄악 중에 등장하는 허영의 죄로 죽은 여인의 최후의 모습으로 악마에게 조롱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왼편으로 오면 토끼가 사람을 매고 가고 있습니다. 저 그림은 노름꾼들의 최후의 광경입니다. 카드놀이와 다트판을 대신한 악마들의 놀이에 이용당하고 있죠. 그래서 저 그림에 그 의미를 알려주는 주사위와 카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마지막 답이 남았습니다.
바로 오른편 돼지입니다. 돼지가 수녀의 가운을 쓰고 있네요. 진짜 돼지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남자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부색이다. 약간 회색빛이 도는 옷을 입고 있네요. 사제의 무릎에 있는 것은 결혼 서약서입니다. 이 시기는 "대항해시대"로 유럽은 임명 , 황금기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황금기로 인해 "종교와 양심의 타락"을 맞이하게 되지요.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종교적인 모든 타락상을 고발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행인 것은 펠리페 2세가 주변의 도움으로 그의 그림들을 스페인으로 잘 가지도 왔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오늘 전 세계의 적은 작품들이 존재하는 그의 그림 중 10편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양면성"을 고발한 그림으로 당시에 그림의 주제도 그랬지만., 파격적인 그림의 형태를 지녀서 그 시기에는 누구도 이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바르셀로나의 미로가 이 그림을 접한 후 충격에 싸여 있었고, 이후 이 그림을 모티브로 "경작지"를 완성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초현실주의 이상적인 출발점을 제시한 그림으로 무려 500년을 앞서서 그린 최고의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던 톤도(tondo, 둥글다:이탈리아어)로 목판에 그려졌습니다. 톤도는 원형으로 그려진 회화나 부조를 말하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 새겨진 예로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 말기부터 15-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팔각형으로 표구를 한 흔치 않은 모양입니다.
신발은 도망을 치느라 그런 건지 돈이 없어 쫓겨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왼발에는 부츠, 오른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온 걸 보면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혹시 상처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건가 싶지만 부츠의 발목이 그리 길지 않은 앵글이라서 그렇게 보이진 않네요. 허리춤에는 단도와 주머니를 차고 있고 바구니에는 수건으로 보이는 물건이 매달려 있습니다. 버들고리의 둥근 고리에는 나무로 만든 숟가락이 끼워져 있습니다. 문고리에 숟가락 끼워 놓은 것처럼 말이죠. 홀쭉한 뺨과 목의 주름을 보면 중년 이후로 보입니다 . 오른쪽의 죽은 나뭇가지에는 악의 상징인 올빼미가 앉아 있습니다. 마당에는 새 두마리가 땅을 헤적이며 모이를 찾고 있습니다. 목에 날카로운 장식을 두른 강아지는 몸을 웅크리고 공격적인 표정을 하고 행상인을 바라보네요.
이곳은 사창가입니다. 문 앞에서 남자가 오크통에서 와인을 따르러 가는 여자를 잡고 수작을 부리네요. 술은 필요 없으니 자신과 함께 있자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는 집 밖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를 기다리는 걸까요? 아니면 이 집을 지나쳐 가는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는걸까요? 그는 술집에서 방금 나온 게 아니라, 여행길에 그곳을 지나치다가 쾌락에 유혹당한 듯 길 위에 멈춰 선 모습입니다. 그는 유혹 때문에 현재의 가난한 상태가 되었고, 또다시 유혹에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나그네의 영적인 상태는 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오른손에는 모자를 잡고 있는 팔과 몸은 계속 앞으로 가는 방향이자만, 고개는 사창가를 향하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나그네 마음을 시각화하였습니다. 외양간에는 소가 음메 소리를 내며 울 듯하고 문틀에는 까치 한 마라가 앉아 있습니다. 저 멀리 전원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지고 있고요.
상처 입은 집은 지붕이 무너져 기둥이 드러난 지 오래되었는데 미처 손을 쓸 여력이 없었나 봅니다. 창문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유리창은 아홉군데나 깨져있네요. 이층 창틀에 걸린 빨래까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북유럽 화가들의 전통입니다. 다리에 난 털과 발바닥의 각질과 주름까지 묘사된 나그네든 행상인이든 거리에서 지내야 하는 이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보쉬의 중기 작품들은 파노라마 식의 3폭 그림입니다. 그 작품 숙의 인물들은 다채롭고 창으력이 풍부하며, 화려하면서도 대단히 복잡합니다. 환상이 폭발한 것처럼, 대혼란의 종말이나 악몽의 상황을 예언한 풍경과 인류 최초의 순결한 전원 풍경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중기의 작품들은 초기의 환상과 관념이 점차 다듬어지고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쉬의 후기 작품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무척 특이합니다. 규모도 파격적이며 인간심리를 그려낸 초원이나 지옥의 풍경이 조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플랑드르(현재에 벨기에 서부와 네덜란드 남서부,프랑스 북부를 포함해 면한 중세의 국가) 속담이나 문학, 비밀문서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데, 반은 인간이며 반은 동물인 환상적인 창작 인물이나 악마가 자유롭게 산재합니다. 물론 "기도 중인 성자 (ST. Jerome in Prayer)와 같은 평화롭고 근심 없는 작품들도 존재합니다.
중세 사람들에게 '배'라는 것은 무엇을 뜻했는가? '이것은 대개 교회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가엾은 기독교들의 영혼들이 가득 승선한 배의 종착지는 천국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풍랑에 의해 배가 난파되어 버릴 수 도 있고 자칫 잘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도 있을 터 , 이 배를 요리조리 잘 움직여 가엾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선장과 승무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죠.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바보들의 배>에 나오는 '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은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무 보트가 전경을 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요상합니다. 떠들썩하고 방탕한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중세 시대에 배라는 것은 주로 교회를 의미했고, 그랬다면 보쉬의 이 그림에서도 경건함과 엄숙함이 느껴져야 하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배의 오른쪽 돛대줄 위에 건들건들 올라 앚아 있는 것은 어릿광대, 볼 장 다 본 느낌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궁정의 어릿광대나 바보는 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풍자해도 탈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광대는 당나귀 귀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자신의 모형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습니다(월터 보싱) . 우리는 이 어릿광대를 <바보들의 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쉬는 '배'의 이미지를 패러디함으로써 당시의 부패한 교회를 슬쩍 비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보트 안에는 사람들이 한 가득 올라타 질펀하게 놀고 있습니다. 유독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자들이 있네요. 바로 수도승과 수녀들 입니다. 가운데에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둔 이 성직자들은 한창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계시는데 중세의 그림에서 이 노래의 의미는 아주 남달랐습니다. 즉 이시기 '남녀의 이중창'은 대개 '정사'의 바로 전 단계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세부 묘사를 들여다 보면 체리 접시와 배의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는 포도주 단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육욕'의 결정판입니다. 게다가 배의 돛대에는 십자가 대신 터키의 초승달이 그려진 분홍색 깃발이 보입니다. 중세의 문헌에 등장하는 '배'가 일단 맥락상 '교회'를 뜻한다면, 그 배의 돛대는 무조건 십자가를 의미했습니다. 돛대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올빼미가 보입니다. 보쉬의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올빼미는 주로 '사악함'을 의미합니다.
조각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Christ) 모습과 함께 단어가 보입니다. "조심, 조심, 하느님이 지켜보고 있다." 네 개의 작은 장면과 일곱 가지 대죄를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칠죄종)를 주요 악덕으로 구분합니다. 일곱 가지 죄는 그 자체가 죄이며 인간이 자기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서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나태를 일컫습니다. 화가들은 미술작품에서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큰 죄들과 함께 비겁함과 변덕, 우둔함과 무지, 간통과 부정,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것을 더해 악덕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죄의 근원을 동시대의 일상 생활을 배경으로 자세히 묘사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문서화 된 주인은 스페인의 Philip II 왕이었습니다. 1574년 San Lorenzo de El Escorial 왕립 수도원에서 전시되었다가, 1939년 Museo del Prado가 취득 하게 됩니다.
위쪽으로 '죽음(왼쪽)', 최후의 심판(오른쪽), 아래쪽으로 '지옥 (왼쪽), '천국(오른쪽)'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음 이후를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전 룰렛처럼 둥근 판이 위치해 있는데, 도넛 판은 7개의 죄를 의미하는 그림들과 죄명이 나뉘어 있습니다. 폭식과 과음을 의미하는 gula 영역에는 술을 병 째 마시는 사람, 계속해서 음식을 나르는 여인, 뚱뚱한 자식이 음식을 달라고 보채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태, 게으름을 의미하는 acedia 영역에는 벽난로 앞에 앉아 만사가 귀찮은 듯 눈을 감고 쉬고 있는 사람과 앞에서 기도를 권하는 수녀가 서있습니다.
욕망, 쾌락, 사치를 의미하는 luxuria 영역에서는 두 커플이 분홍색 텐트 안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네요.그 앞에서 광대들이 연극을 선보입니다. 오만함을 의미하는 superbia 영역에서는 악마가 쥐고 있는 거울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이 보입니다. 자아도취에 흠뻑 빠진 모습입니다. 분노를 의미하는 ira 영역에서는 술을 취해 칼을 들고 싸우는 두 남성과 이를 말리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의미하는 invidia 영역에서는 노예를 부리고 매를 키우는 한 남성을 보며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탐욕을 의미하는 avarcia영역에는 소송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척 하면서 뒤에서 다른 손으로 뇌물을 받고 있는 한 판사가 보입니다.
DEATh
죽음, 침대 위로 보이는 해골과 천사와 마귀가 죽은 이의 영혼을 데려가려한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Hell
지옥, 지옥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 참상을 그렸다.
Paradise
천국, 황금빛으로 그려진 천국에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환영하는 천사들과 하느님
Last Jugement
최후의심판, 예수 그리스도와 12사도의 모습, 아래는 심판에서 구원을 기다리며 무덤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전체 화폭에서 네 갈래의 모서리에는 둥그런 그림 4개가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이 맞는 최후의 것 4가지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을 표현했습니다. 스케일이 큰 이 그림은 성서 내용을 상당 부분 정리하는 동시에 히에로니무스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이 죄를 짓는 모습과 최후를 그만의 화풍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3QkJ4wIDwQ
<죽음과 수전노>는 1490-1516년 사이에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작품입니다. 목판에 그린 유화 작품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인 예이며, '메멘토 모리(mementomori)'전통에 속하는 관람자에게 죽음의 불가피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그림은 수전노 또는 고리대금업자의 임종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면은 여러 시간대를 결합하여, 수전노가 젊었을 때 재물을 축적하는 모습과 죽어가는 순간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림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 화살을 든 해골 형성으로 옷장에서 나오는 모습
수전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천사
유혹을 상징하는 금화 주머니를 들고 있는 악마
영적 구원을 상징하는 창문의 십자가
세속적 소유물과 악마들로 가득 찬 상자
이 작품은 도덕성, 삶의 덧없음, 물질적 부와 영적 구원 사아의 갈등을 탐구합니다. 탐욕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며, 죽음 앞에서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보스의 복잡한 상징주의와 생생한 이미지는 복잡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며, 오늘날까지도 관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우선순위와 물질적 집착의 궁극적인 무의미함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은 인간의 선과 악, 기괴한 상상의 짐승, 비현실적인 풍경 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스의 작품 주제는 크게 종교와 도덕적 교훈이 혼합돼 나타납니다. 종교화 속에 장르화(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익명의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적인 요소가 보이거나, 장르화 속에 도덕적 교훈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스의 작품 <건초수레>도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룬, 도덕적 교훈이 담긴 하나의 풍자적인 교리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세 폭 패널로 구성된 <건초 수레 Haywain Triptych>의 중앙 패널에는 인간의 타락한 도덕성을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거대한 건초 수레는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옥에서는 인간들의 저지른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고요. 왼쪽 패널에는 인간의 영벌에 관한 주제를 담은 총 네 개의 이야기를 묘사했습니다. 반역 천사의 추락,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 패널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가득 실은 마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시끌벅적한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건초더미에서 각자 움켜잡을 수 있는 만큼 취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습니다. 마차 뒤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과 황제를 비롯해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습니다. 마차 주위에는 서민들이 하나같이 한 움큼이라도 건초를 더 가지려고 욕심스럽게 다투고 있고요. 사다리를 놓고 건초더미에 오르려는 사람, 갈퀴로 건초를 빼돌리려는 사람, 바퀴에 걸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건초를 조금이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 등 사람들이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모두 커다란 건초더미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건초 수레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욕심을 상징합니다. 건초를 차지하려는 탐욕은 다른 죄를 낳기도 하고요.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뚱뚱한 수도사가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자신이 모아 놓은 건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그를 대신해 수녀들이 큰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고요. 마음의 수양을 쌓고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수도자의 서약은 저버리고 교회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 왼쪽에는 여자 환자가 고통스럽게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보채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이 한 집시에게 손금을 보고 있고요. 이들 뒤로는 검정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아이를 업은 마술사이자 도둑이 보입니다. 모두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이들 위쪽에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묘사돼 있습니다.
건초 꼭대기에는 두 쌍의 남녀가 한때를 즐기고 있습니다. 소박한 차림의 한 쌍은 덤불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고, 우아한 차림을 한 다른 한 쌍은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오른쪽에는 공작새 꼬리를 한 파란색 악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탐욕에만 눈길이 가 있습니다. 부를 향한 인간의 온갖 탐욕과 범죄, 혼돈과 분열의 결말은 어떨까요?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수레는 기이한 생물들에 의해 천천히 그들의 목적지인 오른쪽 패널, 곧 최후의 심판인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PSEdduXXc
2016년 뉴서커스와 연극,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보스 드림즈(4월 6-8일 , LG아트 센터)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의 그림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보스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보스재단의 의뢰로 2016년 초연한 작품입니다. 캐나다의 서커스 단체 '세븐 핑거스'와 덴마크 극단 '리퍼블릭크' , 프랑스의 비디오 아티스트 앙쥐포티에가 협업했습니다.
세븐 핑거스의 예술감독인 사무엘 테트로는 "서커스는 공중에 더 있는 에어리얼 퍼포먼스 등으로 신체를 초현실적 이미지로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보스의 그림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AkfWEooME
https://www.youtube.com/watch?v=vBG621XEe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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