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죠.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입니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Saturn Devouring His Son, 1820-1823, Museo del Prado, Madrid/wikipedia

 

 

 

 

 

끔찍한 공포감을 주는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광기어린 눈빛으로 이미 상반신을 먹어치운 '사투르누스' , 여전히 희생자의 몸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 오싹해 집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야가 자신의 집 벽에 직접 그린 14점의 '검은 그림'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식 중 하나가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삼켰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말년에 제작되었으며, 전쟁의 폭력과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공포를 목격한 작가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고 여겨집니다. 고야의 독특한 화풍과 어두운 주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Lawz8TcPig

 

 

 

 

Madrid, Spain/Alamy

 

 

 

 

https://www.youtube.com/watch?v=BYFrvyNCOlM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극적인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18-19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 입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고 판화가이기도 하지요.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페인, 사라고사/여행과 날씨

 

 

1746년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사라고사 Zaragoza인근 소도시)에서 금도금 업자의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0대시절 가족과 함께 사라고사로 넘어가서 14살 때 호세 루잔 마르티네스(Jose Luzan Martinez)이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어 미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4년 동안 도제로 일하면서 이후 같은 호세루잔 도제이자 미래의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유(Franxisco Bayeu)와 친분을 만들어, 1763년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이사가게 됩니다.

 

 

 

 

 

1763년에 마드리드에 들어와 프란시스코 바이유 밑에서 일을 하면서, 미술 대회 입상을 노려보지만, 벨라스 아르테스 산 페르난도 (Bellas Artes de San Fernando)아카데미에 주최하는 2차례의 미술대회에 입상에는 실패하게 되어 1770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파르마 아카데미(Academy of Parma)에서 주최한 미술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본인이 고대하던 입상을 하게 됩니다. 

 

 

 

고야는 1771년 사라고사로 돌아와, 수도원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장식을 맡으면서  사라고사에 돌아온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도제로써 미술공부를 이어가게 됩니다.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합니다. 그 후 그는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1775년경부터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스페인 왕궁에 보낼 테피스트리(tapestry)삽화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테피스트리(tapestry)는 두꺼운 천 위에 수를 놓아서 만든 장식으로 벽이나 창문에 설치하여 겨울  같은 날에 방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리스트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됩니다 .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됩니다. 

 

 

 

 

 

 

 

 

 

 

 

Hunting Party, 1775/ Museo del Prado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Hunting Party>(1775)작품입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이고요.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290cm*226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유형의 사냥, 즉 도보 사냥과 기마 사냥을 한 장면에 담아냈습니다. 그림에는 다양한 사냥 도구와 사냥개들이 등장하며, 사냥꾼들이 서로 다른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가 왕실 테피스트리 디자인을 위해 받은 의뢰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고야는 자신만의 로코코 양식의 테피스트리(tapestry)삽화 제작으로 인지도를 쌓다가 1780년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Royal Academy of San Fernando)으로 선출됩니다. 1783년 고야는 카를로소 3세의 측근이었던 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 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고야는 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1785년 아카데미의 부원장으로 임명되더니 1786년 스페인 왕실 화가로 임명됩니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합니다.

 

 

 

 

 

 

The Parasol,1777, Francisco Goya, Artmajeur 매거진

 

 

 

 

 

이 작품은 고야가 왕립 테피스트리 공장에서 일 할 때 제작한 것으로, 당시 스페인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우아한 젊은 여성이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중심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 옆에 남성 동반자가 서 있습니다.  < The Parasol>은 고야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 고야는 스페인 귀족과 왕족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을 담은 그림들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가 마드리드에서 저명한 예술가로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당대 스페인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St. Bernardino of Siena Preaching to Alfonso V of Aragon, 1782-1783/Artchive

 

 

 

 

이 그림은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성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가 아라곤의 알폰소 5세 앞에서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 역사적 순간을 웅장하고 극적인 구도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은 고야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세련된 기법이 돋보입니다. 특히 인물들의 의상과 배경의 세밀한 묘사,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효과적인 사용이 눈에 띕니다. 

 

 

또한, 고야가 종교화와 역사화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화가임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적 재능과 기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인정을 받고 궁정 화가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The Family of the Infante Don Luis, 1784/Artchive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The Family of the Infante Don Luis'는 1783-1784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현재 이탈리아 파르마의 Fondazione Magnani-Rocca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스페인 왕실의 루이스 인판테와 그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야가 왕실의 초청을 받아 아레나스 데 산 페드로에서 작업한 것입니다. 

 

 

 

작품은 루이스 인판테가 카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자녀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야 자신도 그림의 왼쪽 하단에 등장하고요.이 장면은 일상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정적인 자세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Manuel Osorio Manrique de Zuniga(1784-1792)/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8세기 말에 그려진 초상화 작품입니다. 작품은 붉은 옷을 입은 어린 소년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수니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고야는 그의 부모의 의뢰를 받아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에서 소년은 화려한 붉은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손에는 새장에 묶인 새를 들고 있고요.주변에는 고양이들과 새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양이 눈동자가 커져 있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까치로 보이는 새를 훔칠 것 같습니다. 새가 물고 있는 것이 고야의 명암이라는 하네요. 당시 귀족 가문의 부와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야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예로, 밝고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적입니다. 후기 작품들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이 초상화는 밝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7U82wcxQ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만큼  미술 세계뿐 아니라 다른 여러 방면에서 후세에 큰 반향을 남긴 화가는 드물것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이 1819년 문을 열었을 때 고야는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의 전시실에는 단 세 작품만 전시되어 있었죠. 이후 고야의 작품은 쉬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왕실 컬렉션 외에 다른 경로로도 들어왔는데 현재는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작품이 고야의 것이지요. 150여 점의 회화 작품과 500여 점의 소묘, 판화 컬렉션까지 더해져 한 화가의 수집품으로서 질적이나 양적으로 가장 완벽합니다. 벨라스케스의 경우와 같이 고야를 이해 하려면 프라도 미술관의 방문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The Duke and Duchess of Osuna and their Children, 1787-1788/ wikipedia

 

 

 

 

이 작품은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 기론, 그의 아내 호세파 알론소 데 피멘텔, 그리고 그들의 네 자녀를 그린 가족 초상화입니다. 고야는 이들 가족을 개별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각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냈습니다. 회색과 녹색 톤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직물과 레이스 등의질감을 표현했습니다. 아이들 입은 옷차림이 다른 초상화들에 비해 편안한 차림이 눈에 띕니다. 고야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그림 분위기가 따뜻해 보입니다. 다른 귀족 초상화들에서 보이는 뻐기는 자세는 1도 없는 모습입니다. 우아하고 품위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드문 가족 초상화로, 플랑드르나 영국의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화실에서의 자화상, 1791-1792,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Artmajeur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옵니다.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 작품입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 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화가는 그림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Francisco Goya, 1796-1797 /Comfycap

 

 

 

그러던 1792년 고야의 인생에 있어서 갑작스러운 터닝포인트가 발생합니다. 왕실 화가로써 꽤 높은 수입을 벌고 있던 46세에 청력장애를 앓기 시작한 겁니다.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으나 학계에서는 뇌졸증, 뇌염, 납 중동, 매독 등의 다양한 추측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병에 대한 우울증 때문에 고야의 작품은 어둡게 변해갑니다. 이때 학계에서는 로코코 스타일의 화풍이 표현주의적으로 변화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White Duchess, 1795 (왼) The Black Duchess , 1797(오),알바공작 부인 , 1797/NYCultureBeat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알바 공작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녀"라고 부르고, 고야는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애는 스페인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부인은 자신의 초상화에 또 다른 화젯거리를 남깁니다. 

 

 

 

고야는 값비싼 레이스와 반짝이는 비단의 질감을 당시 어느 화가보다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재능이 번쩍이는 공작 부인 초상화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인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자존감이 가득한 고야는 그림을 통해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연인을 지목합니다.  레이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흙바닥에는 "나에게는 오직 고야 뿐 (Solo Goya)"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란한 화제를 제공한 두 사람의 열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공작 부인에게 절교를 선언 받은 고야의 그림은 더욱 더 검은 어둠 속의 그림으로 변해갑니다. 

 

 

 

 

알바 공작부인은 40세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 고야의 아들에게도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다른 정부는  그 시기 스페인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재상 고도이였다고 합니다. 고도이의 또다른 정부가 카를로스 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고요. 

 

 

이러한 이유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의 실제 모델이 귀족인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추정에 대해 고야는 당시 유럽에서 악명 높던 스페인의 이단종교재판소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고통을 치르게 됩니다. 공작부인과의 열애는 고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불만을 표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01년 이후 고야는 높은 연봉을 계속 받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위임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19세기 초, 고야는 주로 작위나 계급이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 이미지를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그는 또한 계급이나 계층등을 따지지 않고 대상이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친밀하고 심리적으로 심오한 초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Capricho No.1 : Francisco Goya y Lucientes,pintor(Francisco Goya y Lucientes,painter), 1797-1799/wikipedia

 

 

 

 

1792년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됩니다. 5년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을 맛 보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기간동안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관련 철학책들을 읽기 시작합니다.프랑스 대 혁명이 가져온 계몽주의에 눈을 뜨게 된 거지요.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판화 연작이 바로 "로스 카프리초스"입니다.

 

 

 

 

고야는 1793년부터 아쿠아틴타(Aquatinta)와 에칭(Etching)기법을 이용한 80점의 판화 작품을 제작하여 1799년  "로스 카프리초스"라는 제목의 판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카프리초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인 "카프리치오"(Capriccio)에서 나온 말로 "기분, 변덕, 혹은 착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프리치오"는 회화, 음악 그리고 문학의 용어로도 사용이 되는데, 형식에 구애받지않고 즉흥적으로 떠 오르는 내적인  착상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야가 살았던 18세기 중반이후의 스페인 사회에 대해 간략히 살펴봅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성적인 문란함, 성직자들의 타락,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 교회의 권위에 항거하면 종교재판의 "마녀 사냥"에 희생양이 되어 버리는 이러한 상태의 사회에서 정의는 온데 간데 없었고 불안과 공포 그리고 욕망에 대한 탐닉이 사람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고야는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존재적 좌절감과 불안감 그리고 당시 스페인이 처해있던 참혹한 현실을 미술로 승화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80점에 이르는 "로스 카르피초스"연작입니다. 

 

 

 

1799년 마침내 고야는 80점의 작품이 수록된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를 출판합니다. 자신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작품이 요통이 되는 것을 고위 관리 그리고 성직자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리 없었겠지요. "검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래는 모두 270 부가 출판이 되었지만, 시중에는 27부만이 돌았다고 합니다. 

 

 

 

고야 자신도 "검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판이후 판화 원본을 스페인 국와에게 선물로 헌정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판화 작품들이 영국의 윌리엄 호가스(Willian Hogarth, 1697-1764)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듯, 우매한 민중들을 교육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포장을 합니다. 그리고 각 작품들에 아주 교훈적인 제목과 설명을 덧 붙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야가 작품에서 고발하고자 했던 것은, 가난과 성매매, 미신, 타락한 성직자들의 행태, 종교재판이라는 공포스러운 제도를 앞세워 남용되는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들의 잔혹함이었습니다. 

 

 

 

 

Los Caprichos, NO.43: The Sleep of Reason, 1797-1798/wikipedia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이 작품은 1797-1798년에 제작된 80점의 판화 시리즈 "Los Caprichos" 중 하나입니다. 책상에 엎드러 잠든 남성(고야 자신으로 추정)과 그를 둘러싼 불길한 동물들(박쥐, 올빼미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잠든 이성을 표현하며, 이성이 잠들면 비 이성적인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칭과 아쿼틴트 기법을 사용하여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그 한계에 대한 고야의 비판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후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Capricho No.24: NO hubo remedio(there was no help), 1797-1799/wikipedia

 

 

 

 

15년 동안 궁정 소속 화가로 활동한 끝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수석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왕과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780년대에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많은 귀족에게 주문을 받았고요.  그들 중 계몽주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과도 친분을 맺게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적, 도덕적, 정치적 개념을 고야(Goya)와 공유했고, 이들을 통해 익힌 그의 사상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카를 4세와 그의 가족들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1800-1801/wikipedia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프란시스코 고야가 1800년에 시작해 1801년에 완성한 대형 유화 작품입니다.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으며, 고야의 날카운 풍자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고야는 왕실 인물들의 외형적 특징과 내면적 성격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며, 특히 왕비의 권위와 왕의 무능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왕실의 허영과 탐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lvXGblFsv8&t=3s

 

 

 

 

 

1800년대는 스페인의 역사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카를로스 4세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여러 혼란이 일어납니다. 반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에 즉위합니다. 18세기말부터 스페인의 내정을 간섭해 오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총통으로 즉위하자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친형 조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임명해 버립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1808년부터 스페인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Senora Sabasa Garcia, 1804/National Gallery of Art

 

 

 

 

 

미국 워싱턴 D.C. 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가 그린 초상화 작품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배경을 완전히 생략하고 의상을 인상주의적으로 처리하여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줄였습니다. 대신 생동감 넘치는 붓놀림으로 세뇨라 사바사 가르시아( Senora Sabasa Garcia)의 만틸라(스페인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레이스 숄)의 섬세한 질감을 표현했습니다. 

 

 

 

모델인 사바사 가르시아(Sabasa Garcia)는 당시 스페인 외무장관이었던 에바리스토 페레스 데 카스트로의 조카였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고야가 외무장관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던 중 사바사 가르시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뛰어난 초상화 기법을 보여주며, 모델의 절제된 열정과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스페인의 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옷을 벗은 마하 La Maja desnuda, 1799-1800, 프라도 미술관 1층 36실/ 옷을 입은 마하 The Clothed maja, 1805 /View of the two paintings side by side/wikipedia

 

 

 

 

 

기존의 누드화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 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지요.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마하'가  나체로 누어 있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하(Maha)는 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을 뜻합니다.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지요.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습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마하,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옷을 벗은 마하는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 (Manuel Faria, 1767-1851)였습니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죠.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국가에 귀속 됩니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버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합니다. 

 

 

 

궁정화가 직위를 박탈당한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습니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죠.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드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궁금합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 공작부인입니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됩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 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합니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 (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1808년 5월 2일 :맘루크의 공격 The Charge of the Mamelukes, 1814/wikipedia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에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지요.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습니다.

 

 

 <1808년 5월 2일>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지요.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합니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하지요.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 말입니다. 그러나 고야(Goya)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습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리 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요?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겁니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세요.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르고 있습니다. 광기가 그림 전체에  휘몰아 칩니다. 

 

 

 

 

 

The Third of May 1808/wikipedia, 1814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습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 1808년 5월 3일 El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라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합니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춥니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러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하는 듯 보입니다. 

 

 

 

고야는 1800년대 들어서는 로코코를 포기하게 됩니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나타내는 사실주의를 드러냅니다.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검은 그림' 시리즈를 완성합니다.  검은색은 19세기 고야가 살았 던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색인지도 모릅니다. 실존적인 불안은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야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작품들 속에 표현 됩니다.  그 은밀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불안은 곧 죽음과도 밀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제정"은 유럽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기때문이죠.중세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 미지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직접적 으로 교감하면서 시작됩니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습니다. 

 

 

 




A Spanish civilian about to decapitate a Fench soldier with an axe, 1863, 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wikipedia

 

 

 

 

 

고야는 전쟁의 잔혹함을 다룬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181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제작한 <전쟁의 재난>연작에서 나폴레옹 전쟁 중 일어난 폭력과 잔학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고야는 프랑스군의 만행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이 자국민에게 가한 폭력도 똑같이 기록했습니다. 그이 작품들은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고야(Goya)는 전쟁의 무의미함과 잔혹성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페르디난도 7세 Fernando VII, 1814-1815/wikipedia

 

 

 

 

프란시스코 고야의 1814-15년 작품<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점령이 끝나고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한 후 제작되었습니다. 고야는 이 초상화에서 왕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며, 왕의 복장과 자세를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시기는 고야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한 후, 고야의 작품 세계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고야는 여전히 궁정 화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그이 작품에 는 이전과는 다른 솔직함과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에서 고야는 왕의 모습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Francisco Goya,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 , 1815/pinterest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입니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되지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입니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여러 위기를 겪으며 왕정의 신임을 잃고 마드리드 생활에 환멸을 느낀 고야는 1819년 외곽에 '귀머거리의 집'이란 뜻의 '킨타 델 소르도'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1층과 2층에 있는 거실의 벽에 거대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는데 모두가 악행, 공포, 불안 , 죽음과 같이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 모두에 일관적인 도상적 의미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작가의 광기를 띠고 있어 '검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이 검은 그림들은 고야 사후에 조심스럽게 잘려 캠버스에 담겨  스페인 정부에 기증됩니다.

 

 

 

 

Two Old Ones Eating Soup, 1819-1823, Oil Mural transterred to Canvas / wikipedia

 

 

 

 

<두 노인의 식사>, 1820-23/ 캔버스로 옮겨진 삽화

 

이 작품의 제목은 <두 노인의 식사>입니다. 아주 어두운 배경 위에 한 노인이 식사를 합니다. 그 옆의 노인은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인간인지 죽음 그 자체인지 불투명합니다. 책을 읽는 중으로 보이지만 식사를 방해하는 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함께 지적인 갈망을 함께 표현해 낸 듯한 이 작품을 통해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겠습니다. 주로 갈색과 회색 톤으로 그려졌는데 강한 표현을 위해 일부러 일그러진 형태로 표현된 인물들은 최소한 의 붓질로 완성되었습니다.  보는 이에게는 악몽을 꾸는 듯한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요. 이 작품을 비롯한 '검은 그림'들은 추후 이 집을 구매한 프랑스 남작에 의해 벽화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1881년 스페인 정부에 모든 그림들이 기증되면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됩니다. 

 

 

 

 

 

이렇듯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 고야가 살아왔던 시대는 옛 왕정 체제가 끝날 즈음이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사상이 만연한 현대적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미적, 도덕적 경계를 초월하여 앞서 갔었고, 오늘날까지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이탈리아 바로크식과 프랑스의 세련된 로코코식 회화로 시작된 그의 초기 작품을 지나 학구적인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쳐 인간중심으로, 그들의 희로애락을 주제로 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개발하며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의와 초현실주의의 초석을 마련합니다. 

 

 

 

 

 

 

 

 

 

난 항상 초조함 속에 살고 있어.
파고든 주제의 끝까지 가지 못하면 난 잠도 잘 수 없고 
휴식도 취할 수 없어 .
지금의 이 삶을, 난 '산다'라고 말할 수 없어.
- 고야가 영원한 친구인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 내용 중-

 

 

 

 

 

 

 

 

The Dog, 1823/네이트뉴스

 

 

 

고야가 '개'를 그린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상황과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야는 70대에 정신적, 육체적 병마로 고통받으며 홀로 지내던 시기에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고립감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정치적 갈등과 분쟁에 대한 고야의 환멸감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추악함과 순수함에 모두 민감했던 화가로, 이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본질과 야만성에 대한 그의 통찰을 포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귀쫓기 / 아트인사이트

 

 

 

사회적 풍자, 성적 내용, 미신과 마녀 및 유령을 소재로 하는 그의 그림은 '환상적'입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고요.

 

 

 

 

Fight with Cudgels /네이트 뉴스

 

 

 

 

 

 

 

 

고야는 자신의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깨인 '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사회적 모순, 이를테면 미신과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그림에 표현했습니다. 고야가 친구들과 달랐던 점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믿고 '비이성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신과 환상을 이해하고 '이성'과 '비이성'을 같은 위치에 있는 인간의 특성으로 보았던 점입니다. 이성의 빛으로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계몽주의 역시 사실은 야만과 공포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고야(Goya)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비이성'적인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야의 예감처럼 계몽주의 를 내세우며 들이닥친 나폴레옹 군에 의해 스페인은 황폐화 됩니다.  계몽주의 사상과 유럽 문명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구실 또는 변명으로 사용됨으로써 신뢰를 잃었지요.  그 이후 식민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정책적 위장으로 인식되기에 이릅니다. 고야(Goya)전쟁 그림에는 잔혹한 학살의 장면이 담겼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참혹한 사회적 현상들을 데생 연작으로 그려냅니다. 

 

 

 

 

사람들이 '빛'과 '이성', '지식'을 방패 삼아 우리의 공포를 하찮게 취급할 때, 고야는 그 공포를 직접 드러냈습니다. 그는 우리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았고,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예술가 (창조력을 지닌 작가들)이 어떻게  현실적 정치와 국가정치라는 폭력에 맞서 예술로써 싸우는 지 조명하고 탐색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진실'이라 믿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고야가 멸망하는 진실은 눈에 보이는 형태들의 진실이 아니라 멸망, 사랑, 폭력, 전쟁 그리고 광기의 진실이었습니다. 

 

 

 

 

 

Spanish entertainment, 1825/wikipedia

 

 

 

 

 

프란시스코 고야의 1825년 작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Tauromaquia>(투우마키아)시리즈입니다 . 이 석판화 작품들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인 투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Taurimaquia>는 고야(Goya)의 말년에 제작된 중요한 프로젝트로, 투우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고야의 예술적 경력 전반에 걸쳐 그를 매료시켰던 주제로의 회귀를 보여줍니다. 

 

 

 

고야의 작품은 단순한 엔테테인먼트의 묘사를 넘어서, 당시 스페인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의 대담한 붓터치와 주관적인 표현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Taurmaquia> 시리즈는 고야의 예술적 성숙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스페인의 전통문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Fransisco Goya, Bullfight in a Divided Ring, 1828/ Alamy

 

 

 

 

 

그는 가장 용감한 겁쟁이였다.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로만, <고야의 유령>(2008)-

 

 

 

 

 

 

 

https://www.youtube.com/watch?v=d4q2S8-U-bk

 

 

 

 

 

 

의사와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Dr Arrieta , 1820/ G. Economy

 

 

 

 

 

 

이 작품은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1820년에 그려진 유화 작품입니다. 고야가 병상에서 자신을 돌봐준 의사 아리에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다른 자화상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 뿐만 아니라 의사 아리에타를 함께 그린 점이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화상을 넘어 관계성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의초기 자화상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전통적인 종교화의 요소를 차용하면서도 세속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초상화의 현대화와 세속화 경향을 보여줍니다. 배경에 등장하는 어두운  형상들은 고야의 '검은 그림'시리즈와 연관성을 가지며, 병중의 환영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RSI8avqQQ

 

 

 

 

 

 

 

 잔인한 괴물들을 잊지 않는다면, 진실은 살아있을 것이다.
- 츠베탕 토도로프<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영화 <고야의 유령>(2008)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영화<고야의 유령(2008)>에 등장하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 고야를 평한 발언이다. 고야(Goya)야말로 평생 세속적 영광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방황한 불쌍한 영혼이었다며, 용감한 겁쟁이라고 언급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p0rq9ak98o

 

 

 

 

 

 

 

 우리는 항상 경계를 구분 짓고자 합니다.  자신이 세운 경계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진실은 어디에 있을 까? 과연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 "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