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니다.
진정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 1960-1988). 2017년 뉴욕 소더비 컨템포러리 아트 경매에서 '무제' (1982)가 1억 150만 달러(약 1243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동안의 바스키아의 작품 경매 기록이 깨졌습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낙서 그림입니다. 파란색 배경에 맞춰진 강렬한 윤곽의 두개골은 미국 예술가가 경매한 작품 중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 되었습니다.
장 미셜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60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이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 (Haiti :높은 산들의 나라)포르토 프랭스(Port -au-Prince) 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이 인종적 유산의 결과로 젊은 쟝 미셸(Jean-Michel)은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합니다. 어려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읽은 것은 그가 성인이 된 후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고요.
어렸을 때 예술에 재능을 보인 바스키아는 어머니의 격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회계사이던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온 사무용품 종이나 문구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어린 아들의 창의적인 면을 눈여겨 본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뉴욕에서 열린 많은 미술관 전시회에 데리고 다닙니다. 6살이 되자 장 미셸(Jean-Michel)은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의 주니어 회원(Junior Member)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쟝 미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예술에 대한 사랑을 어린 아들에게 심어준 거지요.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천진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보호받기를 거부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되어 뉴욕의 빌리지를 'SAMO :Same Old Shit 흔해 빠진 낡은 것)'라는 사인과 함께 철학적인 시들과 낙서로 채워나갑니다. 그라피티는 당국의 입장에선 논쟁적이고 도발적이었지요. 앤디 워홀을 비롯해 당시 예술계 인사들에게 'SAMO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소년'으로 바스키아는 존재를 알리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사모 SAMO(1980) '라는 이름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의 3년 동안 뉴욕 타임스 스퀘어 거리에 지속적으로 낙서 (Graffiti)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린 그라피티의 로고 또는 이름에는 당연히 '바스키아'를 썼지만 당시 함께 작업했던 협력자인 디아즈(Diaz)와 저지른 낙서들에는 상당히 신비스럽고 상징주의적인 태그 인 '사모 SAMO'를 썼습니다. 1980년 그의 협업 자와 헤어졌을 때, 맨해튼 사방 군데에 써갈긴 '사모는 죽었다 SAMO IS DEAD'라는 낙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 시절 바스키아는 작업이 없을 때는 종종 브롱크스와 할렘 등에서 다른 하위문화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사교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1980년대 도시 문화 환경을 배경으로 태어났습니다. 농담, 허튼소리, 불량배, 애송이들과 동성연애자, 빈민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거리낙서'와 힙합문화의 상징 그라피티 (Graffiti) , 느릿느릿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똥 싼 바지 Saggy Pants, 그 힙합 hip-hop이 발생한 곳도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 지구였습니다. 그곳에는 스트리트 컬처(거리문화)와 비보이와 브레이크 댄스, 랩뮤직과 비트박스, DJ, MC등과 그라피티 등 힙합이 얽히고설킨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심, 그 장소 중심에 바스키아가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6qzDnQzGI
장 미셸 바스키아의 < Fallen Angel>(1981)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과 주제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적인 그래피티 스타일, 원시적인 표현,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날개를 가진 인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목에서 언급된'타락한 천사'를 나타냅니다. 바스키아 특유의 거칠고 즉흥적인 선과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되었으며, 해부학적 요소와 텍스트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스키아가 자주 다루던 인종주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독특한 스타일인 간단한 그림과 글씨, 독특한 도안, 그리고 선명한 색채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보여줍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 <전사 Warrior>는 원색의 추상적 심벌과 그래피티 스타일을 결합한 작품입니다.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고요. 이 작품은 46.4*38.1cm 크기로, 바스키아의 사회적 메시지와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이 작품은 약 472억 원에 낙찰되며 아시아 미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부와 가난, 정체성 등을 탐구했습니다.
바스키아의 전성기 시절 제작된 대표작입니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바스키아의 반 자전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은색 검을 들고 돌진하는 듯한 전사의 모습과 인상적인 눈 표현은 바스키아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그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한정되어 있어 희소가치가 높습니다. 바스키아는 거리 예술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적 인물이고 , 현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전사>는 아시아 미술 경매에서 서양 작품 중 최고가인 약 472억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2013년 <더스트 헤드Dustheads>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4,800만 달러(약 594억 원) 이상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구매자인 말레이시아 사업가 조 로우는 돈세탁 혐의에 연루되어 현재 도주 중입니다. 2016년 , 그는 1300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매각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IxBX2orLe5c
https://www.youtube.com/watch?v=W2LtUsyySOA
8살 때 길거리에서 까불고 놀다 자동차에 치인 후 , 바스키아는 지라 (비장)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복하는 동안 병원 입원실에서 1858년에 발행된 '그레이 해부학 Gray's Anatomy'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 것이 훗날 그의 작업이 생체 역학 이미지가 새겨진 남다른 에너지의 그림을 선보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Gray's Anatomy 는 인체 해부학에 대한 포괄적인 교과서입니다. 다양한 해부학적 구조, 시스템, 조직 등을 포함하며,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다수의 삽화와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의대생이나 의료 전문가들을 위한 필수적인 책입니다. 책은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순환계, 소화계, 호흡계, 생식계 등 인체의 모든 주요 시스템을 다루고 있고요.
부모는 이혼했습니다. 뉴욕과 푸에르토 리코에서 드문드문 학교에 다녔지만 1978년 9월, 17세에 브루클린에 있는 에드워드 머로 Edward R. Murrow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뉴욕의 거리로 튀어 나갔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길거리 그라피티를 시작하게 됩니다. 1978년 낙서 그룹 SAMO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SAMO(Same Old Shit의 약자)라는 그라피티 그룹을 결성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이 그룹을 통해 맨해튼의 외벽을 낙서로 채워나갔으며,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시작했습니다. SAMO 활동을 통해 바스키아는 그의 작품에 항상 'SAMOc'라는 서명을 남겼습니다. 거리의 낙서를 통해 10대 특유의 반항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과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고요.
마치 무당이 접신이 되어 한판 흐드러지게 굿판을 벌이듯 그렇게 뿜어져 나오는 그 무엇을 ,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자아를 표출해 냅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 시"또는 "개념 미술"의 형태로 인식했습니다. 그의 길거리 그라피티는 다운타운 펑크 전시가(punk scenester)로 등업 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 와 경력 몇 년 만에 유명 스타가 됩니다. 마치 뉴욕이 그를 열광적으로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스키아는 말장난을 좋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단어와 구를 지우고 반복했으며 잘못된 철자까지 사용했습니다. 또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과, 자신의 내면을 혼합하여 표현했습니다.
앤디 워홀에게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사라고 우겼던날,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잖아(앤드 워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장 미셸 바스키아)
소호의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하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던 아이티계의 바스키아와 당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티스트 워홀이 만나게 됩니다. 소호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든 엽서를 앤디 워홀에게 팔기 위해 보여주었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게 됩니다. 미국의 미술 시장은 새로운 스타를 갈망하고 있었고 바스키아의 격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업은 화랑가를 열광하게 합니다. 최초의 흑인 스타가 미술시장에 탄생하게 된 것이라서요.
뉴욕 그린위치빌리지의 거리에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고 용돈 벌이를 하면서 TV 출연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81년 카셀도큐멘타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홀의 동료인 미술상 브루노 비쇼프베르거(Bruno Bischofberger, 1940~)와 그라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90)의 소개로 가능했고 워홀의 작업실 '공장 facotry'에서 마주합니다.
앤디 워홀 (Andy Warhol)이 친구가 되어주고 바스키아를 제도권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른바 뉴욕 신 표현주의 예술 운동의 엘리트 집단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 두개의 머리 (Dos Cabezas, 1982) 작품입니다. 당시 54세였던 워홀은 22세에 불과한 바스키아와 함께 폴라로이드를 찍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집으로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워홀에게 보냅니다. 워홀은 그 작품의 뛰어남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마스크, 두개골, 그라피티, 모호한 상징은 곧 워홀의 팝 아트 이미지, 로고, 신문 헤드라인과 함께 공동 초상화로 결합되었습니다.
워홀은 당시 이미 팝아트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바스키아는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화가였고요. 두 사람의 만남은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예술가는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뜻밖의 제 3의 작품형태로 대중에게 어필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와 소비주의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대 사회의 대량 생산과 소비를 표현했습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 1982년 10월 4일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바스키아를 데려왔다.
그리니치빌리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SAMO'라는 이름을 쓰는 그 아이다.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쥐여줬고, 그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를 세련디피티에서 팔아 볼 수있게 주선해 준 적도 있디.
그는 나를 귀찮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일기 내용만 보면 ,이미 유명했던 앤디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작가 워너비 중 한 명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 바스키아의 예술성은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앤디 워홀은 마침내 바스키아를 인정하게 됩니다.
네오-표현주의와 스트리트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바스키아.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거칠며 강렬한 색채와 그라피티 스타일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예술은 데생, 콜라주, 그래픽, 텍스트 등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며 발전했습니다.
워홀의 작품이 대체로 정제되고 계산되는 느낌이라면, 바스키아의 작품은 보다 원시적이로 직관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표현 방식은 워홀의 예술적 성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를 넘어 거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사랑과 지원의 연결로 이어집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고요. 바스키아는 1983년 8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3년 9월 13일
바스키아가 찾아왓다.... 담배 한 갑을 사고 싶어서 자기 그림을 75센트에 팔았는데 일주일 뒤에 그의 갤러리에서 전화가 와서는 똑같은 그림을 자기네는 1000달러에 샀다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그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건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작기 그림을 2달러에 살 사람이 혹시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요즘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5000달러에 팔리고 있다.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을 2달러에 사 줄지 궁금해한다.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았던 두 사람은 1984년부터 공동 작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첫 공동작업에는 워홀과 바스키아 외에 이탈리아 작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가 참여합니다. 스위스에 있는 비쇼프베르거의 차고에서 함께 하거나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보내면 그 위에 그림을 덧그려 보내는 방식으로 15점을 완성합니다. 이후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이 본격화됩니다. 워홀의 팝아트 기법과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회화가 결합한 제3의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다양한 작품들은 예술계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대한 일종의 장난스러운 진술 같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던 헤링은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두 사람의 협업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984년과 1985년 2년 동안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협업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1985년 가을 열린 '엔디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1985.9.14-10.19)전이 혹평을 받으며 금이 갑니다. 합작한 작품 16점이 출품된 전시회에 대해 당시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가) 워홀의 명성에 편승했다. (워홀은) 젊은 바스키아의 인기를 이용한다."며 두 사람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실패한 전시회에서 비롯된 갈등은 더욱 심해져서 두 사람은 결별했습니다. 워홀은 집착적으로 바스키아에게 연락했지만 바스키아는 좌절과 분노를 이기지 못했고 마약에 과하게 의존하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워홀이 가벼운 담낭수술을 받은 다음날 상태가 갑작스레 악화돼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1987년 2월 22일 워홀의 나이 58세 였죠.
https://www.youtube.com/watch?v=3Dyj6i7Fod4
Basquiat 와 Madonna는 1982년 뉴욕에서 만나 짧지만 열정적인 연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1982년 뉴욕의 한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즉시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당시 Basquiat는 이미 유명한 아티스트였고, Madonna는 음악계에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예 가수였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몇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서로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Madonna는 Basquiat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보면 그가 침대에 없고 캔버스 앞에서 몰입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Basquiat 의 헤로인 중독 문제로 인해 결국 관계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Basquiat는 Madonna에게 선물했던 그림들을 돌려받아 검은색으로 덮어버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짧았지만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 뉴욕 예술계의 상징적인 로맨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스키에는 클럽을 즐겼고 양성애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찢어질 듯이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을 지녔고요. 한순간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미술시장 생리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워홀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우울증과 마약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기존 미술 시장에 반대 (반항)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하위 문화들이 아트리에나 살롱, 갤러리로 넘쳐듯 흘러들어 갑니다. 또한 소더비에서 경매된 그의 그림 값이 가히 기절할 지경이고요.
<Flesh and Spirt>(1983) , 2018년 sale price 30,711, 000 USD(365억원)
https://www.youtube.com/watch?v=FL5XdMVcnVY
<untitled(yellow tar and Feathers)> / 13 November 2013, sale price 25,925,000 USD(310억 원)
<Brother's sausage> 17 November 2016/ sale price 18,650,000 USD(230억)
<Untitled (head)> / 20, June2020/ sale price 15,184,900 USD(180억 원 정도)
<Untitled(one eyed man or xerox face)> , 8 MARCH 2017 sale price 11,971,250 GBP( 187억 원 정도)
장 미셜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 작품 <Crown>(1982)입니다.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이고요. 특정 아티스트나 흑인들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 작품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고요. 때로는 서명 대신 사용되어 작품의 소유권을 표시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야먕, 결단력, 끈기를 상징하기도 하며, 예술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냅니다. 특정 인물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는 것은 그 인물을 사회의 규범적 모델과 대비되는 대안적 권위자로 인정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글을 쓰고 지운 흔적이 보입니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을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러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 (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제 , 흑인의 역사> (1983) 페널에 아크릴 페인트와 유성 페인트,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미술 재단.
바스키아는 자신의 조상이 미국 대륙에 도착한 서사시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남부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 센터까지. 그림의 중앙에는 오시리스 신이 나일강을 따라 인도하는 노란색 이집트 배가 보입니다. 두 개의 누비아 가면이 이미지 왼쪽에 있고, 그리피티는 "파라오를 지키는 "개와 "멤피스 테베 Memphis THEBES"라는 태그가 보입니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 사회에서 특별히 아프리카 유산 및 역사와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로 이집트가 서구 문명의 선구자라는 아프리카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폭이 16피트가 넘고 거의 8피트에 달하는 <Untitled, Devil>(1982) 작품은 화가의 가장 큰 캔버스 중 하나입니다. 바스키아가 겨우 22살이었을 때 만든 작품이고요. 중심인물은 충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악마입니다. 거리 예술가에서 스튜디오로 경력을 바꾼 바스키아의 오마주에서 이 극적인 인물은 캔버스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표현적인 제스처의 폭발 속에서 자신을 악마로 묘사하는 바스키아의 영웅적인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는 사람은 악마의 매혹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최면에 걸릴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981년과 1982년 봄에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보낸 두 시기 동안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022년 5월 필립스에서 8,500만 달러 (약 1. 054억 원)에 판매되었습니다.
바스키아의 3부작 대형 두개골 작품 중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간 해부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이것들 중 하나는 L.A 의 브로드 박물관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그림입니다. 원래 발렌티노의 공동 설립자인 잔카를로 지암메티의 컬렉션에 있었는데, 2021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9310만 달러를 달성하여 5천만 달러의 추정치를 거의 두 배로 늘린 작품입니다.
바스키아의 가장 유명한 두 가지 모티프는 서아프리카에서 민족의 구비 설화를 들려주던 연희자인 그리오 grio가 있고, 유서 깊은 광대 왕관 바스키아 크라운( crown)이 있습니다. 가는 팔과 큰 머리를로 보아 전통적인 서 아프리카 원시 예술의 형태를 가져와 표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나무 칸막이 위에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그리오 grio의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자신감, 여전히 폐와 복부의 해부학적 묘사가 돋보입니다. 크라운( crown)은 그의 시그니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 바스키아는 이탈리아 모데나에 두 개의 전시회를 가졌는데 , 그곳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업실 조수 스테판 토르톤에 따르면, 그는 1494년 메디치 왕조를 전복시킨 도미니카 수도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 매료되었고, 그것이 이 그림의 주제가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서양의 예술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바스키아가 갈망하던 1982년에 그려졌습니다. 2021년 5월 소더비에서 5080만 달러 (약 629억 원)에 판매되었고요.
<암 앤드 해머, 팔과 망치 II(1985)>,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 스크린, 스위스 브루노 비숍 베르거 Bruno Bischofberger AG 아트 갤러리 .
빨간색 원 안에 망치를 들고 있는 근육질 팔, 암 앤드 해머 (Arm& Hammer)는 미국의 가정 용품 제조업체인 처치 앤드 와이트 (Church & Dwight )가 판매하는 베이킹 소다 브랜드 입니다. 이 회사는 탈취제 베이킹 소다를 사용하여 치약, 세탁 세제, 겨드랑이 탈취제, 고양이 용품을 만들어 대중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회사의 유명한 무쇠 팔뚝 상표 브랜드를 복제해서 앤드 워홀 (Andy Warhol)이 팝 아트 변형 작업을 했고, 바스키아( Basquiat )도 팔뚝 대신 색소폰 연주자를 넣어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붉은 원에는 'Liberty 1955'라는 표시처럼, '리버티 레코드 Liberty Records'음반 레이블로 변형시켰고요. 1950년대 때마침 새롭게 인기를 얻고 떠오른 아프리카계 재즈 음악 성공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존재감을 새롭게 일깨워준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시기를 재음미한 것입니다. 음반 레이블이 팝 아트와 아트 팝에 기여한 부분이 큽니다.
<최후의 만찬 , 10개의 펀칭 백 (1986-87)>. 펀치 백에 아크릴과 유채, 앤디 워홀 미술관 The Andy Warhol Museum.
10개의 흰색 샌드백에 바스키아가 그린 예수님의 이미지와 각각 '심판'이란 말이 적힌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길 건너편에서 전시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바스키아 Basquiat와 앤디 워홀 Andy Warhol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지금은 앤디 워홀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시그니처인 왕관 모티프도 보입니다.
<죽음을 타고 Riding with Death> (1988), 아크릴, 크레용. 캔버스, 개인소장품.
확신과 혼란, 바스키아가 해골을 타고 가는 라이더 (기사)의 모습입니다. 바스키아의 마지막 그림 중 하나이며, 죽기 몇 주 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골격이 말과 같은 생명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바스키아는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종종 단어와 텍스트가 포함되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하룻밤 사이에 그를 유명 인사가 되어 슈퍼 히어로처럼 명성과 부를 얻게 했습니다.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88년 늦여름 어느 날, 바스키아는 그의 작업실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살아생전 맨해튼이라는 도시를 캔버스 삼아 강렬하고도 충동적인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1980년대 미술계를 뒤흔든 반항적인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팝아트의 황제'로 20세기 후반 미국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우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주인 이 그린 듯한 이해할 수 없는 도상과 이미지들, 강력한 색채와 글자들로 가득했지만요.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화법에 진지하고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였던 바스키아. 지금도 어딘가에서 바스키아를 꿈꾸는 이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https://www.youtube.com/watch?v=TVX8z5b7jHQ
장편영화 <장 미셸 바스키아 >(1996)
https://www.youtube.com/watch?v=C8S7ePyMJ4U
'지식&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31. 페르시안 사라비 마스티프(Persian Sarabi Mastiff, 50) (0) | 2024.07.31 |
---|---|
51-30. 키스 해링( Keith Haring, 78) (16) | 2024.07.25 |
51-28. 장 뒤뷔페(Jean Debuffet, 76) (2) | 2024.07.17 |
51-30. 캉갈 ( Kangal ,49) (0) | 2024.07.16 |
51-29.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77) (0) | 2024.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