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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앵그르의  작업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 중 한 명"

She said,"impressionism has produced...not only a new, but a very usegul way of looking at things.It is as though all at once a window opens and the sun air enter your house in torrents."

-"인상주의는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열리고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당신의 집으로 마구 쏟아지는 것과 같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는 서로에게 어떤 느낌일까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동료 같은 느낌일까요 아니면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할까요. 오늘의 주인공 마리 브라크몽의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은 후자였던가 봅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그녀를 끌어내리기 바빴으니까요. 그녀는 실력에 비해 알려진 것이 많이 없습니다. 알려진 많은 것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들이 쓴, 출판되지 않은 짧은 전기인 La Vie de Felix et Marie Bracquemond 에서 발췌한 내용들이고요. 인상주의의 몇 안 되는 여성 화가이자 모네와 동갑내기 화가인 마리 브라크몽의 시간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2. 생애

 

 

 

 

 

 

self-portrait,1870, Marie Bracquemond

 

 

 

 

 

 

 

그림 속 그녀를 보며 제일 눈에 띄었던 부분은 짙은 눈썹과 포도 모양의 목걸이입니다. 오뚝한 콧날과 다부진 입술은 나름 고집 있어 보였고요. 재능 있는 여성이 시대를 앞서 태어나면 사회의 굳어진 관습과 편견에 의해 꽃도 펴 보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기 일 수 지요. 설사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결혼이란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장벽 하나가 더 생기게 됩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도 챙겨야 하고, 그리고 자신도 성장해야 해서 이 세 가지 모두 챙기고 가려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됩니다. 마리 브라크몽 역시 그런 여인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복재화가 시절 남편을 만났습니다.  아름답고 실력 출중한 그녀에게 남편이 질투할 만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사랑했으므로 남편도 그녀를 돕고자 했겠지요. 그러나 29살 그녀와 36살 그는 급속도로 가까워진 시간만큼 또 관심사의 차이만큼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마리는 프랑스 브류타뉴지방의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불행한 중매결혼으로 태어난 아이였죠. 어려서부터 부모가 자주 거처를 옮겨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지요. 브르타뉴에서 쥐라(Jura)로, 스위스로, 리무쟁(Limousin)으로 이사를 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안정적인 생활환경에서 사는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고 해요. 그녀가 10대가 되었을 때 가족들이 파리 근교에 정착합니다. 얼마 후 그림 복원을 하며 마을의 젊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나이 든 화가 오귀스트 바소르(M.Auguste Vassor)라는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이후 마리는 17세가 되던 해, 화실에서 포즈를 취한 어머니와 동생, 스승을 묘사한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당선됩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대단하지요.

 

 

 

 

 

 

 

그 후 그녀는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를 소개받았고, 앵그르는 그녀에게 조언도 해주고, 그의 제자 두 명인 이폴리트 플랑드랭과 에밀 시뇰에게 그녀를 소개합니다. 비평가 필립 뷔르티(Philoppe Burty)는 그녀를 "앵그르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지요. 그녀는 "앵그르님의 혹독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그림 분야에서 여성의 용기와 인내심을 의심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꽃 그림, 과일 그림, 정물화, 초상화, 장르화만을 할당하곤 했다"라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여성 화가들의 위치를 동등하게 취급해 주 진 않았나 봐요. 남성 화가들의 추천이 큰 바람막이가 되고 스승이 되어 준 그들 역시 정해 진 장르만 여성 화가들에게 강요하는 듯한 모습도 추측해 보게 됩니다. 마리는 이런 부당함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고요. 당시 시대가 안고 있는 변하기 힘든  한계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런 앞선 여성 화가들의 작은 부딪힘이 오늘날  현대를 사는 여성 화가들의 높아진 입지만큼  기억해 줘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작은 발걸음에 시작해 조금씩 진화하는 거니까요. 

 

 

 

 

 

 

 

그녀는 후에 앵그르의 스튜디오를 떠났고, 외제니 황후의 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감옥에 있는 세르반테스(Cervantes)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함하여 그녀의 작품에 대한 커미션을 받기 시작합니다. 사진기가 나오기 전까지 왕을 포함한 왕실의 중요 인물들, 역사적 사건 등 모든 것들은 화가의 손끝에서 붓터치 하나로 분위기와 고급스러움을 표현해야 했으니 그녀의 역할이 꽤 중요해졌다는 말로 여겨집니다. 스냅사진 한 장 이면 몇 초 안에 끝날 일을 말입니다. 그녀는 프랑스 박물관의 총책임자 니 외베르크르크 백작(Count de Nieuwerkerke)으로부터 루브르 박물관의 중요한 복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녀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올드 마스터들을 복제하고 있을 때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외젠 몽트와지(Eubene Montrosier)는 소개를 주선했고,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2년 동안 약혼기간을 거쳐 1869년 8월 5일 결혼합니다. 이듬해 그들은 아들 피에르(Pierre)를 낳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 기간 동안 의료 시설 부족으로, 이미 연약했던 브라크몽의 건강상태는 아이를 낳은 후 더욱 악화됩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도미니크 앵그르의 화풍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의 화풍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장식 제품이나 도자기 위에 표현된 그녀의 모티프들은 중세 시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나 1877년부터 1880년 사이의 기간 동안, 그녀의 화풍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양산을 쓴 세 여인 (Three Women with Umbrellas)> 속에 나타난 분할된 붓 터치 및 한색과 난색의 병렬적인 표현 방법 등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어요.

 

 

 

 

 

 

 

 

 

 

<양산을 쓴 세 여인들, 일명 삼미신>, 마리 브라크몽, 1880, 오르세 미술관

 

 

 

 

 

붉은색, 흰색 양산을 쓴 여인들의 옷차림과 부채를 쥐고 얼굴 윤곽과 목선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앳된 보이는 헤어스타일로 포즈를 취한 세 여인들의 눈부신 모습들로 화면 전체를  꽉 채웁니다. 공연을 보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귀족 집에 초대받아한 것 멋을 낸 모습이 당시 트렌드를 알 수 있게 해 주어 보는 재미도 줍니다. 움직이기 다소 불편해 보이는 이 차림새 만으로도 그들의 경제적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당시 신분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며 좋은 점이 바로 이렇게 당시의 역사 이자 기록을 보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마리 브라크몽은 그녀의 남편 펠릭스가 예술 책임자로 있던 오퇴유(Auteuil)의  하빌랜드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합니다. 그녀는 저녁식사 서비스를 위한 접시를 디자인하고 1878년 만국박람회에서 출품되었던 '예술의 뮤즈들'을  주제로 그린 커다란 대형 도자기 패널 작품을 그려냅니다. 꾸준한 그녀의 노력 덕분으로 1864년부터 정기적으로 살롱에 그녀의 그림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매체상의 제약을 발견하자, 그녀의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에게  판화 에칭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새로운 매체와 그가 존경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과 같은 올드 마스터들에게도 소개합니다. 이 시기까지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후원회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벨기에 화가 알프레드 스테방스(Alfred Stevens)의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BUT

 

 

 

 

 

 

 

1887년과 1890년 사이에, 인상파의 영향으로, 브라크몽의 스타일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인상파의 영향으로, 브라크몽의 스타일은  캔버스는 점점 커지고 색은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가고 싶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고, 튜브형 물감이 발명되어 휴대가 간편해지면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지게 됩니다.  그즈음 그녀는 또한 외광파로 알려지게 된 마네, 모네와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파리 만국 박람회로 인해 식민지 시대 얻게 된 넘쳐나는 신기한 물건들과 동양 특히 일본의 우끼요에 판화의 등장으로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지요. 몰랐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얼마나 신나 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야외에서, 특히 세브르(Sevres)의 그녀의 정원에서 그려집니다. 그녀의 마지막 그림들 중 하나는 <세브르의 정원에 있는 예술가의 아들과 여동생(The Artist's Son and Sister in the Garden at Sevres)이란 작품입니다. 브라크몽은 점차 그녀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확립했고, 1879,1880, 그리고 1886년의 인상파 전시회에 그녀의 작품을 전시할 초대장을 받기도 합니다. 그녀의 그림들 중 일부는 <모던 라이프(La Vie Moderne)>에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1881년 그녀는 런던의 더들리 갤러리에 다섯 작품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를 통해 폴 고갱(Paul Gauguin)을 만나 가난한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오기 했다고 해요. 고갱은 마리 브라크몽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특히 그는 그녀가 현재 원하는 강렬한 음색을 얻기 위해 그녀의 캔버스를 준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브라크몽은 그녀의 작품을 계획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언뜻 보기에 자발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스케치와 데생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경향과 많이 달랐던 거죠.

 

 

 

 

 

 

 

 

 

Under the Lamp(1877), Marie Bracquemond

 

 

 

 

 

 

가스램프 아래에 두 남녀가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인상파 화가 알프레드 시슬리이고 여인은 나중에 시슬리의 아내가 되는 마리 루이즈입니다. 마리가 자신의 집에 두 사람을 초대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녹색 램프를 이용한 빛의 효과에 주목한 것이 특이합니다. 큰 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연기와 여인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슬리의 표정에 상대를 향한  애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단출한 식탁 위에 쌓여있는 접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케트 빵과 후식 접시에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녹색 램프를 한 번 더 쳐다보게 합니다.

 

 

 

 

 

 

그들의 아들 피에르에 따르면, 페릭스 브라크몽은 종종  그의 아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퉁명스럽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걸까요? 아니면 어떻게 감히 남편의 작품에   부인이 훈수를 둘 수 있나? 하는 좁쌀영감 심보 때문일까요? 아무튼 그녀의 남편은 그릇이 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공감해 드릴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의 그림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찾아오는 남편과의  가정 내의  마찰로 마리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림에 대한 집중도도 당연히 떨어졌겠지요. 점점 관객의 시선에서 그녀의 작품이 멀어져 가며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낙담했던 마리 브라크몽은 몇 점의 개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활동을 급기야 포기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동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의 일생 동안 인상주의의 확고한 옹호자로 남아있게 됩니다. 인상주의가 대세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죠. 가정 내에 변화의 기운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는 역할은 대부분 여성들이 더 빠르다고 여겨집니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남편의 많은 공격들 중 하나인 스타일에 대해 옹호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상주의가... 새로운 시각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한 번에 열리고 햇살과 공기가 집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3. 나가기

 

 

 

그녀는 1916년 1월 17일 파리에서 사망합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개인전을 가진 적이 없었지요. 그녀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919년에 베른하임 죈 갤러리에서는 그녀를 위하여 회고전을 개최합니다. 이 회고전의 도록 서문은 그녀의 열정적인 옹호자이자, 그녀의 작품 <양산을 쓴 세 여인, 일명 삼미신>을 구매하여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e Geffroy)가 직접 집필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프랑스 미술사학자 앙리 포시 옹(Henri Focillon)은 1928년  그의 저서에서 마리 브라크몽은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셋과 함께 인상파 운동의 세 명의 위대한 여성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회고적으로 묘사합니다.

 

 

 

2023.04.04 - [지식&교양] - 48.인상주의 화가, 매리 카사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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