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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할 때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갑자기 부러져서

오필리아는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빠지고 말았어.

 

그러자 옷자락이 물 위에 활짝퍼져

인어처럼 잠시 수면에 피었었다는 구나.

 

그애는 마치 인어처럼

늘 부르던 찬송가를 부르더라 .

마치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마침내

옷이 물에 스며들어 무거워지는 바람에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그 가엾은 것이 시냇물 진흑 바닥에 

휘말려 들어가 죽고 말았지.

-셰익스피어 <햄릿>중-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인 오필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주인공 '햄릿 Hamlet'보다 조연인 '오필리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비극의 여주인공이라서 말입니다. 햄릿의 진실한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한 '오필리아'. 19세기 중,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화가들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했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햄릿: 덴마크 왕자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숙부 클로디어스가 왕을 독살했다는 사실을 듣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결국, 복수 과정에서 많은 인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2. 리어왕: 리어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고자 하지만, 두 딸의 배신과 막내딸 코델리아의 진실한 사랑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족과 왕국이 파멸에 이릅니다. 

3. 오셀로: 베니스의 무어인 장군 오셀로는 이아고의 계략으로 인해 아내 데스데모나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죽인 후 진실을 알고 자살합니다. 

4. 맥베스: 스코틀랜드 장국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에 따라 왕이 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점점 파멸로 치닫습니다. 


 

 

 

Ophelia,1851-1852, Tate Britain , London /wikipedia

 

 

 

 

글을 읽고 각자 떠올려 본  오필리아의 모습이 비슷하신가요? 물위에 몸을 맡기고 먼 곳을 응시하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우리 감각을 사로잡습니다. 수풀과 물이 함께 오필리아의 고통을 흘려보내는 정교한 자연의 모습이 감탄스럽고요. 19세기의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오필리아 Ophelia>(1851-1852 )입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실제를 보는 듯 합니다.   물위에 누워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분명 허구의 이야기인데 사실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요? 치밀하게 묘사된 '오필리아 Ophelia '주변 배경 때문일 겁니다.  기존의 그림들은 배경이 덜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어 나중에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밀레이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잉글랜드 근교의 호그스밀 (hogsmill)강가에서 넉 달  동안 머무르며 배경을 그릴 정도로 인물보다 배경 묘사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치밀하게 묘사한 풍경위에 겹쳐진 밀레이의 시적 상상력이 나은 '오필리아Ophelia'인 거지요. 

 

 

 

 

 

'오필리아Ophelia'가 이렇게 죽게된 이유는 비극적인 상황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햄릿이 쓰여지던 16세기 후반 혹은 17세기 초반 영국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여성의 삶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신분, 가족, 연인 등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필리아'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은 그녀가 삶을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그녀의 죽음이 사고사를 가장한 듯 그려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수십 종의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각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요. 그림 속 버드나무는 세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강을 묘사한 부분에도 등장합니다.   '버림받은 사랑'을 상징하고요.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양귀비도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쐐기풀은 고통, 흰색의 데이지는 순수, 제비꽃은 순결 혹은 젊은날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오필리아 귓가에  작은 '장미'꽃 보이시나요.  '오필리아Ophelia'의 '햄릿'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염려했던 친 오빠 레어티스가 그녀를 '5월의 장미'라 불렀다고 합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활동하던 그들을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화가들이라 부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TATE BRITAIN)에 소장되어 있는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 Ophelia>이고요. 그들은 라파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이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은  문학적 스토리, 낭만적 서정, 그리고 중세적 신비를  자신들의 그림에 녹여내려 했습니다.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봄, 여름에는 풍경을 스케치하고 겨울 동안 주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스케치한 풍경에다 전경에 형상들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인물이 들어 갈 자리는 비워 놓은 채 말입니다. '오필리아Ophelia'는 희곡속의 가상의 인물입니다. 스케치할 실제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에게 인기 있어 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이었습니다. 그녀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대표라고 불리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연인이었죠. 나중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가련한 오필리아의 운명처럼 그녀 역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와 불행한 결혼 생활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밀레이는 실제로 익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느낌을 잡기 위해 밀레이는 엘리자베스 시달( Elizabeth Siddal, 1829-1862)을 무려 4개월 동안 물이 받아진 욕조에 누워 포즈를 취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죠.  욕조의 차가운 물을 램프로 데우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지만 문제는 램프의 불이 자주 꺼져 폐렴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밀레이를 상대로 병원비와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법정에 고발 하겠다고 협박할 정도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2M7U8eCeHA

 

 

 

 


 

 

영국지도/ Freepik

 

 

 

 

 

얘는 천재니 얼른 입학시켜달라.
-밀레이의 엄마-

화가는 무슨 화가. 굴뚝 청소부 훈련이나 시키세요.
- 왕립예술원 원장-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신동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을 위해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있는 런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영국의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신분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9살은 왕립예술원에서 공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밀레이를 기초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밀레이는 11살의 나이에 왕립 예술원에 들어갔습니다. 왕립예술원 역사상 최연소 입학생의 탄생이었습니다. 재학 중에 아카데미의 모든 상을 휩쓸었고요. 

 

 

 

 

왕립 예술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미술을 주로 가르쳤습니다.하지만 밀레이가 보기에 이런 미술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1848년 친구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 1828-1882),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 등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를 만듭니다.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르네상스시대의 라파엘로 이전의 자연관찰과 세부묘사를 그리던 중세 미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의 매너리즘적 아카데믹 예술에 반발하고요.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사실적이고 복고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특히 강조했습니다. 

 

 


 

 

 

 

 

Isabella, 1848-1849, Walker Art Gallery,Liverpool/wikipedia

 

 

 

 

밀레이가 제작한 완벽한 라파엘전파주의(Pre- Raphaelite Brotherhood)에 합당한 첫 작품은 <이사벨라 Isbella>(1848-49)입니다. 이 작품은 1849년 로제티의 첫 라파엘전파 작품보다 한 달 늦게 왕립미술원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관람자에세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화면 속의 형제들은 라파엘전파의 구성원 일곱 명과 비슷해서 그가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에 대한 자신의 형제애를 표명이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의자 가장자리에 PRB라는 이니셜을 새겨놓았습니다. 왼편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인물이 페더릭 조지 스티븐스로 화가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유명한 평론가가 되었습니다. 인물들의 얼굴표정에서 그가 모델들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게됩니다. 이렇듯 밀레이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모델로 함으로써 충실한 묘사를 통해 각 인물의 특징을 살리며  생동감을 불어 넣습니다. 

 

 

 

 

 

존 키츠( John Keats, 1795-1821)의 시 <이사벨라, 혹은 바질 단지 Isabella:or the Pot of basil>는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원칙을 완전히 실행하게 될 회화로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키츠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를 썼습니다. 주인공 으로 등장하는 이사벨라와 로렌초 Lorenzo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다루었습니다.주인공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이후 그의 머리를 바질 화분에 묻고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와 모델들의 의상이 라파엘로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는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적이 매력을 지닌 시로 유명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14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상당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엔디미온"과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노래"가 있습니다. 키츠는 25세의 나이에 로마에서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영향은 알프레드 테니슨과 윌프레드 오언과 같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키치의 시에서 이사벨라는 오빠들의 하인이었던 로렌초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사벨라>는 오빠들이 여동생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던 계획이 방해받자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불운한 운명의 연인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이사벨라와 로렌초가 운명의 핏빛 오렌지를 나눠먹는 중입니다. 후에 로렌초의 머리를 벤 뒤 숲속에 묻어버리는 오빠들 가운데 하나가 호두를 거칠 게 까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어 이사벨라의 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평적 화면이 극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이사벨라>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양식화되어 있으며 계획된 신선함이 있습니다. 인물들의 빈틈없고 다양한 묘사, 어느 정도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세부에 대한 정확한 관찰, 멍청한 두 형제의 악의를 포착하는 화가의 방법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개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뻗치는 모티프는 계획적입니다. 개를 쓰다듬는 이사벨라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은 로렌초에게서 오렌지 반쪽을 힘들게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동작과 대조를 이루고요. 그리고 치밀한 세부묘사는 전체적인 구도의 비현실과 충돌합니다.

 

 

 

원근감이 무시된 채 좁은 공간안에 인물들이 빽빽히 차 있습니다. 공간 안에 함께 있을 뿐 서로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배경에 보이는 항아리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상징물로 존재하는 데, 로렌초가 살해당한 뒤 그의 영혼이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진실을 밝히자 그녀는 시체를 파내어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두게 됩니다. 

 

 

 

 

 구도는 화면의 테마가 되는 중심사건에서 급격하게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관람자의 눈은 천천히 왼편을 향하면서 울통불퉁하게 나열되어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게 되고요. 이는 다시 건너편에 앚아 있는 인물들의 초상을 훑어보다가 불운한 여인의 부드러운 태도에 머물게 됩니다.  뒤쪽 벽을 덮고 있는 태피스트리의 평면성과 바깥쪽 풍경이 보이는 인접 벽면 사이의 관계 설정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공간이 애매모호하며, 풍경이 보이는 벽면은 테이블의 오른쪽 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뒷면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오른쪽으로 꺽이는 각도로 설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 태피스트리와 나란하게 옆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밀레이는 회화 공간을 재편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의 요구에 구성의 대담함을 적용시키는 일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는 피사의 캄포 산토에 있는 15세기 프레스코를 본뜬 조반니 파오로 라시니오의 석판화집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동일한 양식으로 일련의 드로잉을 제작합니다.  이는 구성원들 모두가 동일한 양식을 구사한 유일한 예이고요. 밀레이가 1848년에 그린 드로잉 <장미덩굴 곁의 연인들 Lovers by a Rosebush>은 <이사벨라>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두 연인은 물론 개까지도 <이사벨라>와 동일한 모델로 보입니다. 또한 꽃에 대한 묘사에서 밀레이가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레이의 <이사벨라>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이야기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이사벨라는 오빠의 하인인 로렌초와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사벨라의 오빠들은 그녀를 더 좋은 집안으로 결혼 시키기 위해  로렌초를 죽이기로 합니다. 그들은 로렌초를 죽여 숲에 묻어 버리고, 후에 로렌초의 죽은 영혼이 그를 그리워하던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사건의 진실을 밝힙니다. 결국 그녀는 숲속에서 로렌초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둔 채 두고 두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14세기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으로,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떠난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이 나폴리 근처의 별장에서 열흘 동안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100개의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사랑, 불륜, 신분 상승, 인간의 탐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중세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데카메론>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이사벨라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가 로렌초이고요. 그들은 오렌지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오빠 중 한 명은 호두를 까면서 개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있네요.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암시합니다.  또한 로렌초가 들고 있는 접시에 담긴 오렌지는 연인의 불행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레이는 창가에 있는 큰 항아리와 시계꽃으로 이사벨라와 로렌초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암시했습니다 . 시계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식물로서 꽃부리는 가시관을, 암술은 십자가의 못을, 꽃 수술은 못이 박힌 그리스도의 다섯 군데의 상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식탁 위에 있는 접시 중 하나는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로렌초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Isabella and her lover, whose head ultimately ends up in a pot of basil, 1849/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HJOC637xFuA&t=1s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 (목수의 작업장)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1849-1850, Tate Britain , London/wikipedia

 

 

 

초기에 라파엘 전파의 그림들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특히 <올리버 트위스트>로 유명한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는 밀레이의 작품인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를 택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찰스 디킨스 (1812-1870)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 비평가로,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등이 있으며, 15개의 소설을 포함해 수많은 단편소설과 비평을 썼습니다.디킨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1849). 실수로 손바닥을 못에 찔린 소년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고, 가족들은 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손바닥에 난 상처는 훗날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의 상처를 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잘 그렸지만 처음 발표했을 때 "불경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밀레이가 1848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Pre -Raphaelite Brotherhood: 르네상스 거장인 라파엘로 이전 14,15세기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는 유파)를 결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그리고 결성 이듬해 밀레이는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를 그렸습니다.

 

'이 훌륭한 작품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 생각에 공감하겠지.'

 

완성된 작품을 본 밀레이는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밀레이의 그림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성스러운 가족을 무슨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 "

-찰스 디킨스-

 

밀레이는 화가로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를 구해준 건 권위 있는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낸 밀레이와 그 동료들이야 말로 영국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만든 사람들이다. "

 

러스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미술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한 마디에 여론은 단숨에 반전됩니다. 

 

"러스킨 말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엄청나게 잘 그리긴 했네..."

 

뭐 ,이런식으로 말이죠. 

 

러스킨이 거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밀레이의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났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밀레이는 러스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RPLiTZAry4

 

 

 

 


 

 

 

 

the Return fo the Dove to the Ark, 1851/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 1829-1896)의 작품 < The Return of the Dove to the Ark>는 1851년에 완성된 그림으로 , 성경에서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방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평화를 상징하며, 노아의 두 며느리가 비둘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저명한 미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이 작품의 세부 묘사와 감정적 깊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러스킨은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하여 구매하려 했으나 , 이미 토머서 콤에게 팔린 상테였습니다. 이 그림은 감정과 자연에 대한 신성한 연결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스타일로 특징지어집니다. 

 

 


 

 

Mariana, 1851/wikipedia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시 <Mariana>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 Measure for Measure>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황량하고 쇠락한 환경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리아나라는 여성을 묘사합니다. 시 속의 이미지는 마리아나의 고립감과 절망감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녀는 충족되지 않은 삶과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한탄합니다. 

 

 

 

이런 시 내용을 바탕으로 밀레이가 그린 <Mariana>입니다.  외로움 속에서 이미 떠난 연인을 허망하게 기다리는 여인의 고독함이 묻어납니다. 과거 빅토리아 시기 영국에서는 결혼 할 나이가 된 여성의 경우 집에서 수를 놓으며 연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직물을 잘 짜는 여성의 경우 훌륭한 신붓감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여인들은 오랜 시간 작업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여성들이 바깥출입은 뜸할 수 밖에 없었지요.  즉 좋은 직물짜기 솜씨는 여성의 정절과 정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 속 마리아나의 경우 자수에 공을 들이고, 정숙한 여인이 되고자 애를 써봐야 허무하기만 할 뿐입니다.  마리아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여주인공으로 바다에서 결혼 지참금을 몽땅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정혼자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여자이지요.  그래서인지 , 자수를 두다가 피곤한 듯  허리에 손을 받치고 기지재를 켜는 여인의 그림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주변으로 떨어진 잎사귀가 더 마음속을 스산하게 만들고요. 그림의 배경이 되는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은 '수태고지 ' 장면으로, 그녀의 성적 좌절감을 상징합니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달리 스테인드글라스에 수놓아진 현란함은 그녀의 욕망과 현실의 상반된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효과적으로 쓰였습니다. 밀레이의  섬세한 색채 및 세부 표현이 일품입니다. 

 

 

 


 

 

 

신부 들러리 The Bridesmaid, 1851/Artchive

 

 

 

 

 

 

 

패널에 유화 작품으로 피츠윌리엄 박물관 소장 작품입니다. 당시의 미신을 시각화한 흥미로운 그림입니다 . 이 그림은 퍼스의 아네트 별장 정원에서 그려졌습니다. 밀레이는 이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젊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의 미신과 풍습을 표현했습니다. 

 

작품은 신부 들러리의 역할을 넘어서, 당시 결혼과 관련된 미신적 행위를 시도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관습과 젊은 여성들의 기대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오렌지색 머리를 풀어헤친 젊은 여인이  어떤 미신적인 행위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 Huguemot, on St. Bartholomew's Day, 1852, private collection/wikipedia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연인 >(1851-1852). 라파엘전파(Pre-Rapahelite Brotherhood)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 세력의 신교도 학살을 다룬 작품입니다. 젊은 여성은 연인의 왼팔에 '카톨릭 신자의 상징'인 흰색 완장을 두르려 하지만, 남성은 여인을 부드럽게 제지하고 있습니다. 저 흰색 완장이 있어야만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작품은 영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라파엘전파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1572년 8월 24일 부터 10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벌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위그노 전쟁 중에 발생했으며,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긴장과 갈등이 심화된 결과였습니다. 학살은 결혼식에 참석하가 위해 파리를 방문한 위그노 귀족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aFnNykLgng

 

 

 


 

 

The order of Release, 1852-1853, Tate Britain, London/wikipedia

 

 

출처:경향신문

 

 

 

 

자코바이트 사건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목표로 한 반란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제임스 2세의 지지자들이 주도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특히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자코바이트는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잉글랜드의 가톨릭 군주에 대한 거부감과 프랑스의 제한된 지원으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끈 반란으로, 이는 결국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습니다. 자코바이트 반란의 마지막 전투로, 스코틀랜드 인버네스 근처 컬로든 습지에서 벌어졌습니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는 컴벌랜드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 정부군과 맞섰으나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자코바이트 반란은 종결되었고, 스코틀랜드의 독립 항쟁도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이 작품은 밀레이가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입니다. 18세기 중반 반란에 가담한 스콜틀랜드 병사가 방면 받고 옥에서 풀려나는 장면입니다.  감격에 겨워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병사와 주인을 만나 기뻐 날 뛰는 개, 아버지의 등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잠든 아이의 표현이 무척 사실적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옥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의 아내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그림 속 여자는 남편을 구출하고자 성상납을 했습니다. 남편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치욕 앞에서 그녀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 속 그녀의 맨발은 고귀한 순결을, 성모마리아 베일 마냥 두른 파란 색 천은 거룩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Autumn Leaves, 1856, Manchester Cith Art Gallery,Manchester/wikipedia

 

 

 

 

 

 

<낙엽>(1856).

스산한 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네 명의 소녀가 마당에서 끌어모은 낙엽을 태우고 있습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과 무덤을 연상시키는 낙엽 더미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밀레이는 가을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낙엽 타는 냄새를 특히 좋아해 '지나간 여름의 향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삼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낙엽 더미를 둘러싼 소녀들이 각기 짓는 표정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왼쪽 끝의 소녀는 낙엽 태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있는 소녀는 움켜준 낙엽을 더미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듯 보입니다. 빗자루를 든  소녀는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네요. 손에 과일을 든 소녀는 낙엽더미를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은 소녀와 낙엽이 라는 서로 대비되는 소재를 통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세련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황혼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첫 사례"라고 소개했습니다. 

 

 


 

 

The BlindGirl,1856, Birmingham Museum &Art Gallery, Birmingham/wikipedia

 

 

 

 

 

 

 

 

풀포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소녀의 거친 손에서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콘체르티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 음악가로 추정되는 눈먼 소녀와 그녀의 여동생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홍시처럼 불그레한 볼을 가진 눈 먼 소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두운 하늘 아래 황금빛 들판과 더블 무지개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지만 그녀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할 겁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더 아름다운 모습의 세상으로 말이죠. 그녀의 영혼의 순수함과 민감함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Peace Concluded, 1856,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Minneapolis/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Peace Concluded, 1856>은 크림전쟁의 종전을 반영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소파에 기대어 평화를 알리는 신문을 들고 있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정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을 상징하는 장난감 동물들과 함께 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최근 혼란과 대조적으로 가정의 평온함을 통해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안도감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밀레이는 풍부한 색채와 세밀한 표정을 사용하여 그 순간의 감정적 깊이를 전달합니다. 

 

 


 

 

 

 

The Vale of Rest , 1858-1859/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the Vale of Rest>(1858-1859)는 황혼의 묘지를 배경으로 두 명의 수녀가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한 수녀는 무덤을 파고 있고, 다른 수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10월의 일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가을 풍경과 수녀들의 활동을 통해 죽음과 자연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프리 라파엘파의 세밀한 묘사와 상징성으로 주목받으며, 명확한 서사가 없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숙고하게 합니다. 

 

 

 


 

Spring(Apple Blossoms), 1859/wikimedia commons

 

 

 

 

존 에버렛 밀레이의 1859년 작품 <Spring (Apple Blossoms)>는 영국의 레이디 리버 아트 갤러리에 소장된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과 소녀들을 묘사하며, 젊음과 시간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구도는 전경의 인물들과 함께 은근히 포함된 낫을 특징으로 하여 죽음을 암시합니다. 밀레이는 명확한 서사보다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w19oYd7TxY&t=1s

 

 

 


 

 

 

 

The Eve of St. Agnes, 1863/wikipedia

 

 

 

 

 

 

도판 <성 아그네스의 전야  The Eve of St. Agnes>(1863)는 존 키츠의 시 <성 아그네스의 전야>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캔버스 유화는 주인공 마들렌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나오는 청록색 빛에 감싸여 옷을 벗는 깊이 있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장면의 감정적 강렬함을 포착하며, 기대감과 초자연적인 주제를 반영합니다. 말레이의 해석은 키츠의 서사에서 벗어나 시의 세부 사항에 엄격히 따르기보다는 시각적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둡니다.

 


 

 

 

My First Sermon, 1863/ The Victorian Web

 

 

My Second Sermon, 1864/ The Victorian Web

 

 

 

 

<나의 첫번째 설교>(1863)

<나의 두 번째 설교>(1864)

 

 

다섯 살 짜리 자신의  딸을 모티브로 그린 이 연작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난생 처음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긴장한 마음에 애써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만 잠들어버리고 만 아이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화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잘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Leisure Hours, 1864/Wikimedia Commons

 

 

 

 

 

이 작품은 사실주의 스타일로 그려졌습니다. 소녀들은 부유한 가정의 딸들로, 그들의 붉은 벨벳 드레스와 호화로운 주변 환경이 이를 나타냅니다. 소녀들은 글래스고의 부유한 섬유 상인인 존 펜더 경의 딸들입니다. 레드 벨벳의 느낌이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네요.  장식적 배경이 강한 병풍, 아이들 앞에 놓인 어항 속 물고기 2마리. 럭셔리한 옷에 잠깐 부러운 마음도 들지만 왠지 아이답지 않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모습같아 답답함 또한 드는 작품입니다. 어항 속 물고기가 자유롭지 못한 아이들 모습 같기도 하고요.  이작품은 현재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sther, 1865, private collection/wikipedia

 

 

 

구약성경의'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서 왕비가 되어, 모르드개와 함께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음모를 저지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으며,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발견하여 왕의 목숨을 구합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고,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의 부림절을 기념하는 배경이 됩니다. 

 

 

부림절(Purim)은 유대인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학살 위기를 극복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이 절기는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에서 유래하며, 주사위(푸르)를 던져 학살 날짜를 정하려 했던 하만의 음모가 좌절된 날을 기념합니다. 부림절은 유대력 아달월 14일과 15일에 지켜지며, 에스더서를 읽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즐겁게 지내는 날로, 하만의 귀라 불리는 과자를 먹고 축제를 즐깁니다. 

 

 


 

 

Rosalind in the Forest, 1867-1868/Walker Art Gallery

 

 

 

 

 

 

이 그림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로절린드라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주로 사랑과 정체성의 혼란을 다룹니다. 이 이야기에서 로절린드(Rosalind)는 그녀의 삼촌인 프레데릭 공작에 의해 추방되고, 친구 셀리아와 함께 아든 숲으로 도망칩니다. 로절린드는 가니미드라는 소년으로 변장하고, 셀리아는 농부 여인 알리애나로 가장 합니다. 그들은 숲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얽히며 사랑과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합니다. 결국 로절린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여러 커플이 함께 결혼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처럼 유머와 풍자를 통해 사회적 관습을 비판합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리버풀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작은 버전은 1868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습니다. 

 

 


 

 

The Boyhood of Raleigh, 1870, Tate Gallery, London/wikipedia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기에 두 소년이 혼이 나간 듯  골똘한 모습일까요?  이 그림은 어린 월터 롤리와 그의 형제가 데번셔 해안에서 제노바 선원의 바다와 육지 모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영웅적 제국주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고요. 엘리자베스 시대의 항해자들에 관한 제임스 앤서니 프루드의 에세이와 롤리의 전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림 속 소년들은 밀레이의 아들들이 모델이 되었고, 선원은 전문 모델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영웅적 제국주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정치 만화에서 패러디되거나 대중문화에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chill October, 1870, private collection/wikipedia

 

 

 

 

 

<Chill October>는 1870년에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유화로, 가을의 스코틀랜드 풍경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41.0cm* 186.7cm 크기로,밀레이가 처음으로 그린 대형 스코틀랜드 풍경화입니다. 이작품은 밀레이의 아내 가족의 집 근처, 퍼스에서 던디로 가는 철도 노선 근처 야외에서 그려졌습니다. 그림에는 긴 풀, 버드나무와 갈대가 있는 강둑, 그리고 멀리 언덕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음울한 회색 하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71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고,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The Martyr of Solway, 1871/ Artchive

 

 

 

Adove Stock

 

 

<솔웨이의 순교자 The Martyr fo Solway>(1871)는 주로 스코틀랜드의 코버넌터(Covenanters)였던 18세의 마거릿 윌슨(Margaret Wilson)을 다루고 있습니다. 17세기 후반 "킬링 타임(Killing Time)"동안 순교한 그녀는 1685년 , 장로교 신앙을 포기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죄로 익사형을 당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녀의 처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며 , 장로교 역사에서 순교의 상징으로 그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Hearts are Trumps, 1872/TATE

 

 

 

존 에버렛 밀레이의 유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이자 미술 수집가인 월터 암스트롱의 세 딸인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메리를 묘사하고있습니다. 그림은 그들이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계급 사회에서 잘 결혼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사회적 기대와 경쟁을 상징합니다. <Hearts are Trumps>라는 제목은 이러한 주제를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표현력 있는 붓질과 사회 구조를 전달하는 내러티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입니다. 

 

 

 


 

 

The Yeoman of the Guard, 1876/TATE

 

 

 

The two Princess are Richard of Shrewsbury(left)and Edward V of England(right). They are the sons of King Edward IV of England and Elizabeth Woodville, Edward V wears the garter of the Order of the Garter beneath his left Knee. The assassin's shadow is on the stairs.,1878/w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1878년 작품 <탑 속의 왕자들 The Princes in the Tower> 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 (Edward V)와 그의 동생 리처드(Richard of Shrewsbury)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에드워드 4세 (Edward IV)와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런던탑에 갇혀 있는 동안의 두 왕자를 그린 것으로,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캔버스의 유화로 런던 대학교의 로열 할러웨이(Royal Holloway)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르익은 버찌 Cherry Ripe, 1879/wikipedia

 

 

 

Portrait of John Everett Millais, 1881/ wikipedia

 

 

 

< 19세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Portrait of John Everett Millais>(1881)

1881년 50대의 밀레이는 사실성과 감미로운 감성이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우아한 화가의 모습으로 화면에 꽉 차있게 그려 놓았습니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느낌으로 내면세계의 온유함과 부드러운 성향을 보여주듯 잔잔하면서 섬세한 세부묘사로 사실과 색채묘사가 돋보이는 자화상입니다.  인자함과 인내심이 보이는 인상에서 편안함과 평안함이 함께 보이는 밀레이.  화면의 바탕색과 의상의 색은 배경과 인물의 동등한 위치를 동일시하는 색채로,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은 능란한 묘사로 뛰어난 시각적 색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Effie Gray/wikipedia

 

 

 

 

 

 

존 러스킨 Porrait of John Ruskin, 1853-1854/wikipedia, 밀레이가 그린 러스킨의 초상화, 애슈몰린 박물관 소장

 

 

 

 

 

 

살면서 '사랑'이란 이름은 다양한 빛깔로 찾아듭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그리고 에피 그레이 (Effie Gray, 1855-1896)의 '금지된 사랑' .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로 마무리 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은 세 사람간의 관계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1848년 영국의 한 교회.  29세의 러스킨과 19세의 그레이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에서 이름 높은 지식인이었던 데다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발랄한 성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지요. 누가 봐도 흠잡을 때 없는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둘의 성격부터 정반대였습니다. 러스킨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레이는 거침없는 외향적 성격이었거든요.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중매로 결혼한 두 사람은 결혼 한지 6년이나 지났는데도 잠자리를 한번도 함께 한 적이 없습니다. 러스킨은 애초에 아이를 원치 않고 에피를 소중히 지켜주고 싶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지만, 실은 에피의 벗은 몸이 자기가 상상한 여인의 모습과 달라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실토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지요. 러스킨에게 육체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1853년 여름.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 밀레이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게 됩니다. 당시 존 러스킨은 에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으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하여 밀레이를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초청했던 것이죠.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밀레이를 자기 제자처럼 아끼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밀레이는 그곳에서 러스킨의 아내인 그레이(Gray)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첫눈에 반합니다.  불행한 세월을 살던 아내 그레이의 눈에 밀레이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성격도 쾌활했거든요. 에피(Effie Gray)는 밀레이가 배려심 많고 남자다운 모습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마침내 그레이는 결혼 생활 속사정을 밀레이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망설임도 잠시, 친정 부모를 설득하고 , 둘은 힘을 합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54년 그레이와 러스킨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냅니다.  이듬해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와 에피 그레이(Effie Gray)는 결혼하게 되고요.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지요. 밀레이는 '은인 뒤통수를 친 불한당.'

그레이는 '남편을 배신한 천벌을 받을 여자'가 됐습니다. 러스킨은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 되었고요.  하지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따지고 보면 러스킨도 잘못이 있다"고요.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애초에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 그레이와 밀레이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사랑이든 직업이든 투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지요.  주변의 시선이나 비난이 신경 쓰일 수도 있고,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키를 돌려 자신의 길을 가는 게 행복의 지름길 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과거는 흘러갔고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니, 스스로 떳떳하다면 방향을 틀어서 라도 행복을 거머줘어야지요.

 

 

 

 

 

어쨌거나 에피 찰머스 그레이 (Effie Chalmers Gray 1828-97)는 1848년 에피 러스킨이 되었다가 1855년 에피 밀레이가 되었습니다. 그레이와의 금슬은 좋아서 자식을 8명이나 낳았습니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레이는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좀 사업적으로 바꿨습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밀레이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과 타협하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물론 밀레이는 친구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에서 탈퇴하고 그가 비난하던 아카데미즘 화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고 그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삽화가가 되어  일러스트레이션 그림들도 다수 그렸습니다. 1869년에는 주간 신문인 <그래픽>지에 화가로 채용되었습니다. 이후 밀레이의 그림들은 매우 상업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70년대에는 돈이 잘 벌리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이들을 그린 그림들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 비누회사에 그려준 <비눗방울 >이미지가 대박을 터트리기도 하고요.

 

 

 

 1853년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준회원 자격을 얻었고, 1863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1885년에 준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로써 그는 세습되는 직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1896년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에 사망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돈과 사랑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행복한 화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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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러스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적성에 안맞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일에 집중한 덕분에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몇 번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처럼 열렬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평이었습니다. 정말로 밀레이를 깊이 원망했다면 그러진 않았겠지요. 세 사람의 어긋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간 느낌이라 다행인 부분입니다. 

 


 

 

 

 

 

<비눗방울들>,1886/한국경제

 

 

 

 

 

 

아이가 비눗방울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된 밀레이가  다섯 살 외손자를 바라봤을 때 딱 그런 느낌인 거죠.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밀레이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래뵈도 라파엘전파에서 순수예술을 했던 사람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광고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대박이 나 평생 먹고 살 돈을 벌게 됩니다.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 포스터 이미지이자 포장지로 쓰이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거지요.  한편 비령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광고지는 나오는 족족 사라져 버렸고, 그는 영국에서 가장 부자 화가가  되었습니다. 

 

 

 

 

비누광고의 모델, 외손자 윌리엄 멜본 제임스 경 Sir William Miboune James, 1881-1973/wikipedia, 영국의 해군 제독, 정치인, 작가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친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 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에게 보낸편지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1848년에 결성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주요 3대 화가 중 한 명입니다.  활동했던 시기부터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의 모습이나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가 커다란 크기의 화폭에 순수한 자연의 모습만을 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간간이 이 작품에서처럼 우연히 등장하는 듯한 인물들을 풍경 속에 등장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쏟아지는 초상화 작업 의뢰로부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다.

 

 

 

 

 

실제로 말년에 들어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대부분의 수입원이 바로 초상화 판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풍경화는 그에게 있어서  순수하게 자연을 접하는 일종의 안식처였던 것이죠.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던 시기에도 그는 꾸준하게 자신의 풍경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이 풍경화들도 수집가들에게 팔리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 작품 역시  왕립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Glen Birnam, 1891, Manchester Art Gallery/Art UK

 

 

 

 

 

 

1855년 결혼에 이르게 된 두 사람은 그녀가 나고 자라난 퍼스 지방 부근의 보워스웰에서 1857년까지 머물렀습니다. 말년에 들어 밀레이는 돈이 덜 되는 풍경화에 천착했습니다. 당시 운동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1873년, 스코틀랜드에 사냥과 낚시를 하며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집을 한 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퍼트셔의 테이 강 유역에 있는 버넘과 던켈드의 마을 풍경을 좋아했는데, 1881년부터 1890년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버넘 홀에서 늦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겨울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밀레이가 버넘 홀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지방의 풍경을 그린 그의 모든 작품들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요. 밀레이를 잘 알고 있었던 어린이 책의 저자이자 삽화가인 베아트릭스 포터는 이 작품에 대하여 1892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버넘 홀을 무척 사랑했던 밀레이는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무척 아쉬워했다.

작품 속에서 뒤돌아 서 있는 애절한 모습의 인물은

마치 그곳을 떠나야 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지엔씨미디어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하며, 미래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그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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