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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인상주의의 후원가

유능한 전시 기획자

뛰어난 안목의 수집가

천재적인 보트 설계, 제작자

우승을 거머쥔 요트 선수

열정적인 시의원

훌륭한 원예가

부르주아

화가

 

 

 

 

 

 

 

반복된 혁명과 혼란 속에 무너진 채 방치됐던 파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53년, 오스망 남작의 지휘 아래 추진된 도시 계획 덕분이라고 한다. 좁고 지저분했던 골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커다란 가로수 길을 따라 트렌디한 상점과 극장, 카페, 레스토랑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도시는 활기가 넘쳤고 거리마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순간을 마치 스냅사진처럼 그림으로 담아낸다. 그중에서 오늘의 주인공 귀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1848-1894)의 따뜻한 시선을 따라가 본다.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1848년 8월 19일 파리에서 아버지 마샬 카유보트와 어머니 세레스테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카유보트의 아버지 마샬은 가족이 운영하던 직물 사업의 일을 배우다 파트너들과 함께 군부대의 섬유와 시트를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안정적인 공급과 운영으로 오랜 기간 프랑스 정부와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여름휴가 때면 가족들과 늘 찾았던 예르 강 근처의 사유지를 포함해 37,000평에 가까운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고 근교의 큰 농장마저 소유하게 되면서 일 년 내내 식품 창고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그의 세 아들 구스타프와 르네, 마샬은 파리의 상류층이던 아버지의 재산이 경이롭게 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며 자랐으며 충분한 교육과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1870년 법학 학위를 취득한 구스타프는 당시 발발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파리 방어를 위해 센강을 지키던 기동대에 차출되었고 무사히 돌아온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조금씩 그려왔던 그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하기 시작하며 존경받는 화가 '레옹 보나'가 선생님으로 있던 에콜데 보자르에서 교육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카유보트는 친구이자 화가인 '주제페 드 니티스'의 소개로 '에드가 드가'를 알게 되었고 예술가들을 만나 토론과 친목을 나누는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게 1년간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참가했던 미술 경연대회에 46위에 오른 후로 아카데미보다는 임시로 만든 스튜디오에서 스스로 그림을 공부한다.

 

 

 

 

 

 

 

 

1874년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화가의 길을 원하는 아들을 위해 스튜디오를 만들어 주기로 결정하고, 당시 파리에서 살고 있던 미로메스닐 근처 건물에 이층짜리 작업실 공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던 겨울, 불행히도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스튜디오의 완공조차 보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화가의 길을 응원하던 아버지가 남긴 유산 일부를 받은 카유보트는 드가의 소개로 클로드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교류라고 견해를 넓혀갔다. 정부 사업을 했던 부르주아 아버지를 두고, 사실상 정부와 아카데미에 반감을 품는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것이 내심 신경 쓰였던 카유보트는 아버지의 사망 후 점차 주체적으로 생계가 어려운 화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1877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은 카유보트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1878년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전시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오스만대로  건물을 배경으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오른쪽 정면으로 남녀 한쌍이  걸어오고 있고 뒷모습이 반쯤 잘린 남자가 이 두 사람을 피해 가려는 듯 우산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뒤쪽 남성도 보이고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는 친구 같은 두 사람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네모 반듯한 돌 사이에 머금고 있는 빗물이다. 어쩌면 이렇게 사진 같을까! 사진을 찍듯 낡은 중세 건물에서 우아하고 세련된  도시롤 변모하는 파리 거리를 영원히 캠버스로 옮겨 온 느낌이다. 이 작품은 2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두 남녀는 실제 사람 크기와 똑같이 그려졌다고 한다. 덕분에 그림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마치 우리도 앞의 남자처럼 길을 비켜줘야 할 것만 같다.

 

 

 

촌티를 벗어나 우아하게  정비된 파리의 풍경들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전해진다. 오래전 큰 아이와 유럽 여행을 하면서 파리 시내를 잠깐 들른 적이 있다. 깃발 들고 우르르 무리를 지어 따라 간 여행이라 맘에 든다고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담아 가야 하는  그야말로 사진만 찍고 가는 소나기 관광이었다. 파리의 인상을 다 담아낼 수 없었지만 카유보트 그림에 드러난 파리의 모습들이 살짝 현대화되었을 뿐 그 독특한 분위기는 여행당시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찰나의 인상을 담기 위해 애를 쓴 반면 카유보트는 모든 대상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사실주의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도 빗물에 반짝이는 보드브럭, 건물의 창문과 굴뚝 하나하나가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카유보트를 이름만 인상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냅사진을 보듯  사람들의 모습 역시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보자면 여자의 옷 주름과 트리밍 된 모피의 느낌,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면사포의 패총이 아주 사실적이다. 당시 고급 패션이었을 거라 짐작도 해본다. 게다가 남자가 들고 있는 우산 끝에 잡힌 주림까지 섬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Gustave Caillebotte, Portraits in the Countryside,1876

 

 

 

 

 

 

<시골에서의 초상>이라 이름 붙여진 이 작품은 공원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여인들의 일상을 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빛, 눈이 부시게 화려한 한 무더기의 꽃들, 맑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조용히 헤집고 갔을 순간의 시간이 차분하면서도 아름답다. 시골 어르신들이 커다란 느티나무 정자에 모여 왁자지껄 얘기하는 정겨운 풍경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필요를 위해 손수 무엇인가 뜨개질하는 여인의 뒷 모습은 왠지 신성하기까지 하다.  카유보트는 종종 가족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는데 맨 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이 바로 카유보트의 어머니이다.흐트러지지 않은 책 읽는 자세가 눈에 더 들어온다.  회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은 카유보트의 사촌 마리, 뜨게질 하는 그녀의 손이 가늘고 여리다. 초록색 벤치에 않아 있는 여인은 이웃, 맞은편 여인은 숙모라고 한다.  섬세한 작업에 눈은 아플 것 같지만 두런두런 얘기 하고 들어 주며 돈 주고받는 카운슬링 역할도 나름 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카유보트는 도시 풍경 외에도 소소한 일상의 풍경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평범한 주제는 당시를 지배하던 아카데미 화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 

 

 

 

 

 

 

 

 

카유보트는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의 판매가 되지 않는 작품들을 좋은 가격에 사들이기도 하면서 예술가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힘을 보탠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다가올 때, 카유보트의 동생 르네가 예기치 않게 사망한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지 2년 도 채 되지 않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카유보트는 자신을 포함한 남은 가족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것이라 확신한다. 당시 28살이던 카유보트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슬픔과 두려움이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첫 번째 유언장을 작성한다.

 

 

 

 

 

 

"나는 1878년 인상파로  알려진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리는 데 필요한 금액이 내 재산에서 사용되는 것을 희망한다. 현재 그 금액을 산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3-4만 프랑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이 전시회에 참가하는 화가는 드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세잔, 시슬리, 모리조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국가에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유증이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다락방이나 지방의 미술관이 아니라 뤽상부르크 그리고 나중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물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내 유언이 이행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년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내 동생 마샬, 혹은 그리고 하지 못한다면 내 상속인이 이것을 관리할 것이다. 르누아르에게 유언 집행을 의뢰할 것이고, 그에게 그가 선택한 그림을 주기 바란다. 르누아르가 중요한 집행인이 될 것이다.  

-1876년 11월 3일 파리에서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유언 중)

 

 

 

 

 

 

 

 

 

 

Gustave Caillebotte, Floor Scrapers,1875

 

 

 

 

 

 

 

<바닥을 긁는 사람들>은 1875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품이다. 실내에서 바닥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들 중 하나이다. 지금가지의 노동 장면은 땅을 개간하거나 씨를 뿌리는 등 시골 농부의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갑자스런 도시화로 시골에서 무작정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향했을 것이다. 젊은 몸뚱이가 전 재산인 그들에게 이런 일이라도 있어 두고 온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개인적으로 내 초등시절 마룻바닥을 친구들과 함께 병을 사용하거나 초를 사용해 반질반질 윤기 나게 문질러야 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윗사람 보기 좋으라고 어린 고사리 손에 초와 병을 맡겨 당시 환경미화라는 이름하에 선생들은 강요했었다. 그림 속 남자들 처럼 서로 속삭이기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동심이란 이름으로 넓은 학교 바닥을 반질 반질 닦던 그날의 꼬맹이들이 겹쳐 보인다. 잘못하면 손끝에 나무 파편이 들어가 곪아터져 일상이 불편한 적도 있었다. 그림속 남자들의 손도 거친 손이 되기까지 수많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카유보트는 당시 밀레, 쿠르베처럼 정치적 혹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런 노동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일상의 모습을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덤덤히 담아낼 뿐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살롱에서 저속하고 천박하다는 악평을 받게 된다. 기존의 고전주의 그림에  세뇌가 된 살롱 심사위원들 눈에 이 그림이 함량미달처럼 보일 수 있다. 신처럼 그려대고 아름답게 묘사된 여신의 모습을 그려대던 당시 분위기와 상반되었으니 이런 그림이 허접하게 보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일상을 담아낸 카유보트의 시선이 신선하고 따뜻해서 참 좋다. 

 

 

 

 

 

 

 

3. 나가기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수많은 걸작을 감상할 수 있는 수혜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카유보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유보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전시회 비용과 화실 임대료를 대신 내주고 작품을 꾸준히 구입하는 방법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했다. 인상파 화가들이나 오늘날 그들의 그림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1894년 세상을 떠날 때 카유보트가 남긴 컬렉션에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드가, 세잔의 중요한 작품 68점 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면서 모든 작품들이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거부로 그의 주옥같은 컬렉션은 지금의 오르세 미술관에 자리하게 된다. 비록 화가보다는 수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특별한 노력 덕분에 인류는  풍성한 문화를 지금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인상주의 화가들 그림 앞에 서면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따뜻한 시선도 덤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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