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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나는  내가 산 그림(정원의 여인들)의 진가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할 만큼 부자가 아니라는 게 그렇게 미안할 수 없다네.'

 

 

-1868.1.2. 바지유가 모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장 하나가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한 마디로 정의해 주는 말 같다. 

이런 친구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심도 품게 된다. 하지만 부모 입장이라면 이렇게 퍼주기만 하는  아들이 그리 달갚지 많은 않을 것 같다.

 

 

 

 

 

 

인상파 화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지만 그들의 동료이자 든든한 후원자 역할까지 했던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나 역시 '이런 화가가 있었나.'하고 찾아보았으니까 말이다. 모네, 시슬레 등과 함께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바지유는 1870년 터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에 참전해 2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전사한다. '29'이란 앳된 숫자가 일제강점기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인  천재 시인 '이상 (1910,9,23-1937,4,17)을  떠올려 보게도 한다. 만약 바지유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많은 그림을 통해 모네나 르누아르 못지않은 인상파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까운 그의 인생을   꽃에 비유하자면 동백꽃으로 표현해 주고 싶어 진다. 동백꽃은 한창일 때 봉오리 채 툭하고 떨어진다. 짧디 짧아서 시작도 못해본 그의 화가로서의 삶을  마음으로 따라가 본다.

 

 

 

 

 

2. 생애

 

 

 

 

 

 

바지유는 남프랑스의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진 몽펠리에에서  1841년 태어난다. 상원의원 출신의 아버지와 대지를 물려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의학도로 성장한다. 드가와 세잔이 법대를 다녔던 것처럼 바지유  또한 부모님의 기대로 인하여 의학 공부를 강요받는다. 그런 부모님의 바램과 달리 그는  스무 살에 파리의 의대로 진학하면서 한편으로  샤를 글레의 아뜰리에에 등록하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식의 장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던 중 인상주의 핵샘 인물들인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뜰리에 스승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끼고, 이젤과 물감을 들고 파리 근교에 위치한 퐁텐블로의 숲으로 향한다. 퐁텐블로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가 모여서 그림을 그렸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지유는 아뜰리에 풍경을 담은 작품을 남겼는데, 파리에서 작업하는 동안 여섯 차례 아뜰리에를 이전했다고 한다. 한 번은 들라크루아의 아뜰리에가 위치한 건물의 위층에 있는 아뜰리에를 사용하기도 했다. 모네도 종종 함께 사용한 이 아뜰리에에서 낭만주의의 대가인 들라크루아에 대한 존경과 함께 창작에 몰두했다. 한편, 바지유는 음악에도 조예가 남달랐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친구 에드몽 메트르와 함께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댄디스타일이었던 에드몽 메트르는 법학을 전공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문학과 음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간이 야전 병원,1865>, 프레데리크 바지유

 

 

 

 

 

 

 

모네에 대한 바지유의 우정은 별나다고 하겠다. 그림 속 병상에 누워있는 이가 모네다. 다리를 다쳐 붉은 색으로 다리 부분이 표시되어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모네 다리 위에 매달린 물통이다. 바지유가 아픈 친구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저 위에서 물을 흘러내리는 방식으로 상처 부위의 열을 식혔었나 보다. 누워있는 모네가 자신을 그리고 있는 바지유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 같다.

 

"야임마, 너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는 나를 그리고 싶냐?"

 

심박한 아이디어를 내어 친구 모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 바지유와 심통 부리는 모네의 티격태격 오고 가는 대화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정교한 묘사이자 기념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자티 안 내고 돈을 제대로 쓸 줄 알았던 바지유와 모네의 우정을 떠올려 보게 해 준 그림이라 정겹기도 하다. 

 

 

 

 

 

 

 

 

 

가족회합,모임(Familly Reunion,1867), 프레데릭 바지유,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몽펠리에 근처의 메릭(Meric)에 있는 가족 집 테라스에 모인 가족들 모습이다. 맨 왼쪽 부모 주변으로 그의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일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지유의 이 그림은 인상파의 야외 인물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작이라고 한다. 인물의 숫자를 세어보면 총 11명의 모델로 이들은 실제 가족과 친구들이라고 한다. 왼쪽에 착석한 부부는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의사가 되지 못하고, 당시 무직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가 된 아들의 모델이 된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래서인지 얼굴이 밝지 않다. 코로나 시기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을 그만하겠다며 완전히 무관한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둘째 아들과 썰렁한 부모 자식 관계를 맺었던 잠시 동안의  내 경험도 한 몫한다. 장신의 바지유는 자신의 모습도 맨 좌측 구석에 소심하게 살짝 그려 넣었다. 앉아 있는 남자와 나무 아래 팔짱 끼고 선 커플만 딴청을 부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바지유가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던 세 명을 그렇게 표현한 거라고 한다. 화창한 날이었는지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있어 빛과 그늘의 차이가 더욱 커보인다. 안정적인 구도와 과감한 붓질, 싱그러운 색감이 퍽 인상적이다. 녹색, 파란색 등 차가운 색 계열로 표현했지만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모델들은 거의 전면을 주시하지만 중앙의 3명은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경직된 분위기를 다소 해소시킨다. 우측 하단의 빈 공간은 나무 그림자와 모자 꽃바구니 등으로 화면의 균형을 맞추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 작품으로 1869년 바지유는 국전에 해당하는 살롱전에 입선한다. 하지만 친한 친구 모네가 낙선해 "아마 심사위원들이 실수로 내 작품을 지목했을 거야."라고 하면서 모네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그의 동료였던 까미유 피사로는 바지유의 재능에 대하여 극찬을 했다고 한다. 당시 살롱전에 입선하면 전시를 할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고 한다. 천사표 바지유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화가 친구들보다 자신의 그림이 먼저 입선이 되자 오히려 난처해하고  미안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렵게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지유는 돈 걱정 없이 그림을 그렸 던 자신보다 그들이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탓도 있다. 부자 친구가 마음씀씀이까지 이 정도면 내 친구로 꼭 만들고 싶어질 것 같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특히 모네와 르누아르가 성공할 수 있도록 티 나지 않게 후원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갖은 돈을 움켜쥐고 있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배려심 또한 많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모네, 르누아르처럼 작업실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넓고 넓은 작업실을 구해 함께 작업하는 식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던 그들의 그림을 수시로 사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후원해 생계 걱정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모네, 르누아르의 화려한 성공 뒤에 어쩌면 바지유의 그림자 같은 배려가 있어  힘든 시기를 무난히 넘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그림을 볼 때 피다가 져 버린 바지유의 삶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Bazille's Studio; on the Rue la Condamine, 1870, Musee d'Orsay , Paris

 

 

 

 

 

 

 

 

 

모자 쓰고 이젤 앞의 맏형 마네, 뒤에서 턱을 괸 채 그림을 응시하는 이가 모네이고 그의 오른편에서는 키가 큰 바지유가 팔레트를 든 채 서서 마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고, 그보다 더 왼편, 의자에 앉아 있는 이와 계단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이는 각각 루누아르와 작가 에밀 졸라,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바그너에 빠진 바지유의 친구 에드몽 메트로로 추정된다.  키 큰 바지유의 모습은 그가 존경하던 마네에게 부탁해 마네가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의 60여 점의 유작 중 최대 걸작이라고 일컫는 위 작품은 아카데미의 답답함을 벗어던져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젊은 화가들이 서로를 격려하자며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계단을 보니 2층 구조의 널찍한 화실이다. 당시 20대였던 바지유, 모네, 루누아르, 시슬레는 모두 화단의 풍운아 에두아르 마네(가운데 모자 쓴)를 흠모하고 있었다. 마네는 제도권에서 외면받던 화가였지만, 세 사람은 마네의 대담한 색채와 과감한 인물 묘사에 신선한 바람을 느끼며  마네는 자신의 바티뇰화실과 멀지 않은 바지유의 화실에 가끔 들로 후배들의 그림을 봐주곤 했다고 한다. 화가의 스튜디오답게 벽마다 여러 그림이 걸려 있는데, 창문 오른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은 르누아르가 1866년 그린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살롱에 출품하지만 떨어지고, 안타까운 마음에 바지유는 이 그림을 자신이 구매한다. 그 아래 있는 바지유의 그림  '화장(1870)'인듯하고 왼쪽 벽에 바지유의 '투망을 든 어부(1868)가 보인다. 요즘 화가들의 작업실을 보면 답답한 도심을 떠나 멀지 않은 널찍한 곳에 화실을 마련하거나 멀리 지방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실을 만들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사는 것과 일 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그리는 듯 사는 듯하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작가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완성 된 지 몇 달 만에 바지유의 뛰어난 재능과 너그러운 인품은 전쟁 포화 속에서 스러지고 맙니다.

인상파의 등장에도  함께 하지 못했지요.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운명도 엇갈립니다. 천사표 바지유도  자신의 안전보다는 항상 친구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를 먼저 걱정했던 성격 탓에 자원입대 합니다. 대부분의  인상 중의 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잠시 다른 장소나 나라로 피신하는 선택 을 한 것과 사뭇 대조적입니다. 바지유는 그해 11,28일 본-라-롤랑 드 전투에서 그의 부대와 함께 그의 장교가 부상을 입어 지휘를 맡아 독일군에 대항하다  2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인상파가 만개하기 직전에 그리도 좋아했던 친구들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맙니다. 그의 부친 가스통 바지유가 인상파 전시를 관람하다가 전시에 소개된 아들의 작품을 산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후 가족들이 몇 차례 공공 미술관에 바지유작품을 기증하면서 재조명받기도 했고요.

 

 

 

 

3. 나가기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존재할 수 없다.  인상주의란 말이 나오기 이전 한 때는 '베티노스파'라고 불릴 정도로 인상파 화가들의 소굴이었던 바지유의 작업실! 사실주의에 가까운 인상주의 묘사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했던 프레드릭 바지유!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2점으로 인생을 바꾼 화가 바지유! 뜨거운 가슴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못다 핀 청춘 바지유! 좀 더 살아줬더라면 우리는 더 풍부한 인상파의 그림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더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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