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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본능적 욕망(누드화)

28세  사망

스페인 독감

불안한 영혼의 아이콘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

성과 죽음

1980, 'Excess and Punishment' 독일 제작 영화

1980년 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대영예술진흥회)에서 다큐영화 'Schile in Prison" 

1990 'Arrpgance(오만)'소설

 

2. 생애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6,12- 1918, 10,31)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이다. 실레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있는 Tulln에서 1890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Adolf Schiele는 Austrian State Railway 회사의 Trlln 역 역장이었고, 어머니 Marie는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Krumlov(kramau) 출생의 체코인이었다. 어린 시절 실레는 기차에 매료되어 그것을 그리는데 몇 시간씩 보내곤 해서, 아버지가 스케치북을 없애버려야 할 정도로 몰입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에곤 실레, 1912,위키피디아

 

 

 

 

 

살면서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미남형으로 어머니가 사준 전신거울을 자주 봤다고 한다.  심지어 궁핍했을 때도 차림새 만큼은 단정하고 깔끔했다고 전한다. 자화상 속 그의 독특한 표정이 호기심 같기도 하고 , 불만이 어린것 같기도 하고, 치기 어린 청춘의 모습 같기도 하고 , '나보다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 하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보통 자화상 속에 인물이 주가 되는 데 빨간 꽈리고추가 참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가 11살 때 인근 Krems 라는  도시로 이사하여 두 번째 학교에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아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끄럼이 많고, 말이 적고, 운동과 그림을 제외하고는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했으나 말이다. 보통 그보다 어린 학생들 반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동생 Gertrude에 대해 근친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 번은 이 성향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그와 여동생이 잠긴 방에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문을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필름을 현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16세 때 허락 없이 12세의 여동생과 함께 기차로 Trieste까지 가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실레는 15세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하고, 그는 철도회사 직원이며 어머니 쪽 삼촌인 Leopold Czihaczec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실레가 자신을 본받기를 바랐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을 염려하다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이 Karl Strauch라는 화가를 선생으로 붙여주었다. 

 

 

 

 

 

 실레는 클림트도 한때 다녔던 비엔나의 Kunstgewerbeschule(School of Arts and Crafts)에 들어갔다. 그해에 그는 몇 명의 교수들의 주장에 의해 더 전통적인 학교인 비엔나에 있는 Akademie der Bildenden Kuenste로 보내졌다. 여기서 그의 주된 선생은 Christian Griepenkerl이었는데 이 사람은 고집스런 견해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여서, 혼란스럽고 실망한 실레는 3년 후그곳을 떠나게 된다. 

 

 

 

 

 

1907년 실레는 클림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젊은 화가에게 친절하게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고,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하였으며, 후원을 해줄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또 실레를 분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미술 공예 workshop인 비엔나 워크샵에도 소개하였다. 실레는 아카데미에서 3년을 마친 뒤인 1909년에 아카데미를 떠나서, 아카데미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New Art Group를 결성한다.

 

 

 

표현주의는 조형예술에서 생겨난 양식이며,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초(1901-1925년)에 특히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던 양식경향이다.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데 주력한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 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세잔, 고갱 , 반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특징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 몇몇 매우 간결하고 원색에 국한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 위키 피디아)



실레의 가장 초기작들은 클림트의 것들과 매우 유사하며, 아르누보의 영향도 보인다.

클림트는 1909년 비엔나 Kunstschau에 실레의 작품 몇 개를 출품하도록 초청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에드바르드 뭉크, 얀 투롭,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sexyality)도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의 명료성이 잠시 혼란을 보이고 한다. 그 후, 실레는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하게 되며 조금씩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포옹>,1917,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연합뉴스

 

 

 

실레의 <포옹>과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라는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복잡하게 뒤틀린 왜곡된 신체 묘사로 어쩐지 불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엉킨 두 남녀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그런 건가 싶기도 하다. 깔고 있는 천의 구겨진 선이 살아 움직이며 불안을 더 조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저리 표현한 것인가! 

 

 

1910년 실레는 누드화를 연습하기 시작하며, 그후 몇 년이 안 되어서 메마르고 병적인 색을 띠고, 종종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니는 도발적인 스타일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 점차 그의 그림은 복잡해지고 주제를 가지게 되었다. 프라하와  수 차례의 분리주의 전시회등도 참여하게 된다.

 

 

 

빈 분리파는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주축으로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빈 분리파 혹은 비엔나 분리파라고 한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그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빈 분리파는 1897년 4월 3일 초대 회장으로 클림트를 내세워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Koloman Moser),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협회 등의 기구 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실레는 17세인 Walburga(Wally) Neuzil을 만나서 비엔나에서 같이 살게되며, 그녀는 그의 가장 놀라운 작품 중 몇 개의 모델도 하게 된다. 그녀는 이전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실레와 Wally는  폐쇄공포적이라고 느낀 비엔나의 환경을 탈출하기를 원하며,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 Krumau로 간다. 그곳은 실레의 어머니의 출생지이며, 현재 실레 기념 박물관이 있다. Kramau에 연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활양식, 특히 마을의 십 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것을 몹시 좋지 않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두 사람은 영감을 주는 환경과 작업을 할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아 비엔나에서 35km 서쪽에 있는 Neulengbach(노이렝바흐)로 옮겨 갔다. 실레의 스튜디오는 노이렝바흐의 비행 청소년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고, 실레의 생활 방식은 마을 주민들에게 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결국 미성년의 어린 소녀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실레는 체포되었다. 경찰들이 실레를 체포하러 스튜디오에 왔을 때 그들이 포르노라고 생각하는 그림 수백 장을 몰수하였다. 실레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재판에서 유혹과 유괴 혐의는 기각되지만, 어린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죄로 인정되었다. 판사는 재판정에서 촛불에 그의 그림 한 점을 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미 21일간 구속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여 3일간의 투옥이 선고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실레는 감방에 갇여있는 어려움과 불편을 묘사하는 그림 12점을 그렸다. 그는  투옥된 후에 죽음과 부활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의 누드가 여전히 주된 주제이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그의 그림은 더 커지고 세밀해졌다. 하지만 군복무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경치나 군 장교 같은 사람들을 간단하게 그리는 정도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모성과 가족의 주제를 실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부인 Edith는 이 시기 여성을 그린 대부분의 작품의 모델이지만, 전쟁 동안의 여건 때문에 많은 작품의 모델들은 남성이었다. 

 

 

 

 

 

실레는 비엔나의 교외 Hietzing, 101 Hietzinger Hauptstrasse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길 건너편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Edith 와 Adele Harms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중류층이었으며, 아버지는 자물쇠 장인인 개신교 신도였다. 실레는 사회적으로 더 받아들여 질 수 있는 Edith를 선택하지만 Wally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Wally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그를 떠나서 다시는 보지 않았다. 이 버림받음으로 인해 그는 '죽음과 소녀'를 그리게 되는데. Wally의 초상은 이전의 그림에 바탕을 두고 있고, 자신은 새롭게 그렸다. 그해 2월 실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기를 '나는 유리하게 결혼을 할 예정이다. Wally가 아니라.'라고 했다.  Edith의 집안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1915년 6월 17일, 실레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결혼하게 된다.

 

 

 

 

 거의 1년 동안 징병을 피해다녔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실레의 생활과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결혼 3일 후, 실레는 군 복무를 명령받았고, 프라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레는 동료들과 함께 전시장에서 살았으며, Edith는 그와 함께 가서 호텔에서 머물렀다. 실레의 상관은 그들이 가끔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군복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베를린에서 전시를 했으며, 같은 해에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러시아 포로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포로 러시아 장교와 그의 상관인 Karl Moser를 그렸는데, 이 상관은 사용하지 않는 상점을 스튜디오로 사용하도록 주기도 하였다. 

 

 

 

 

 

 

Krumau- Crescent of Houses(The Small City V),1915, The Israel Museum, Jerusalem

 

 

 

 

 

실레가 그린 풍경화다. 전체적으로 낡고 어둡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좁은 공간을 이용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빨랫줄에 촘촘히 널려있는 나부끼는 빨랫감들, 창문 틈으로 얼굴을 디민 익명의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들, 진한 브라운 칼라 지붕들 , 그리고 날카롭고 불안해 보이는 선들이 실레 내면의 심리를 드러낸 것 같이 무겁게 다가온다.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많은 작품을 내었으며,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원숙하게 잘 드러내 주었다. 그는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초대되었으며 그의  작품 50개가 선정되어 중앙 홀에 전시되기도 했다. 또한 전시회의 포스터를 다자인 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흉내낸 것으로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초상을 넣기도 했다. 다행히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으며, 그 결과 실레의 그림의 가격은 높아졌고,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게 된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은 그의 인생도 예상치않은 복병을 만난다. 그해 가을 유럽에서 2천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 퍼지기 시작한다. 코로나를 겪은 인류는 작은 바이러스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안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인간의 존엄성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들임을 순식간에 먼지 같은 존재들로 사라질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노약자, 어린이들 , 그리고 임신부들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일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해 임신 6개월인 Edith는 스페인 독감으로 10,28일 사망하며, 실레도 3일 후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한국의 <날개>, <오감도>를 쓴 천재시인이며 건축학도였던 이상 시인이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사흘동안 그는 Edith의 스케치 몇 점을 그리는데,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들이다. 

 

 

 

3. 나가기

 

어떠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괴상하고, 에로틱하며, 포르노적이고, 불안하며 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초기에 그는 클림트와 Kokoschka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 그의 초기 작품에는 그들을 흉내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날카롭게 그려진 각진 선과 색의 조합은 그가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관습을 거부하고 추함과 과장된 감정을 예술에 솔직하게 도입했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큰 봉우리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막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28살 생애, 짧은 기간, 예술적 경력은 불행히도 불과 10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작업은 비엔날 표현주의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인정해 주자. 그의 강렬한 선이 남긴 드로잉이 눈을 감아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자꾸 떠올를 것 같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앤 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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