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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북미 1위 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이 하나 있습니다. 작품 <코코, 2017>입니다. 멕시코 마을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에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딱 봐도 갈매기 눈썹의 프리다 칼로(Fida Kahlo,1907-1954)입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사진출처:경향신문

 

 

 

 

평생 남편의 바람기와 사고 휴유증으로 고통스러웠던 아내 프리다와 남편 디에고는 멕시코 화폐에 실릴 정도로 유명인사이기도 합니다. 화폐는 그 자체로 '작품'이자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폐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위인이 실리기도 하고, 그 나라의 문화유산이 실리기도 하기 때문이지요.아마도 한 지폐에 그것도 부부가 함께 들어가 있는데 앞뒤로 갈라선 경우는 전 세계에 이 지폐 뿐일 겁니다. 멕시코의 500페소 지폐입니다. 한국 돈으로 약 35,000원에 해당하고요. 멕시코의 물가로 계산해도 꽤 고액의 화폐단위에 해당합니다. 멕시코의 독립운동가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그려진 1000페소 지폐도 있지만 유독 위조지폐가  많아 실제로 유통되는 500페소의 지폐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두 번이나 결혼한 부부였음에도 지폐의 앞면과 뒷면으로 서로 '갈라서' 있습니다.  모든 여성들의 공공의 적같은 존재가 앞면을 차지하고 있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입니다. 그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은  '국가의 영혼'을 작품으로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멕시코는 유럽의 지배에서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시작 이후 1920년대까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1921년 유럽에서 돌아온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모든 계층이 이해하는 그림'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벽화로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민중의 삶과 민족의 역사적 상징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큰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현재는 '멕시코 벽화운동'이라고 합니다. 

 

 

 

아내인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반대쪽인 뒷면에 있습니다. 멕시코보다는 멕시코 바깥에서 멕시코의 영향을 더 크게 미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에게 "우리는 절대 그녀처럼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것이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대 초현실주의 작가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은 것은 그녀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1970년대 미국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을까?>를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면서입니다.

 

 

 

 

내 그림들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왜 내 그림이 호전적이기를 기대하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내 그림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그녀는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습니다. 멕시코 원주민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프리다'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지요. 그녀의 아버지인  기예르모가  붙인 것으로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은 평생 평화롭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 기예르모는 무뚝뚝했지만 총명한 칼로를 유난히 아끼고 북돋아줬습니다. 어린 칼로를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로 말이지요. 칼로는 사진기를 다루는 법도 배우고, 아버지를 도와 수정 작업 등도 관여했는데, 이는 사실적이고 세밀한 칼로의 초상화에 대한 접근법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1913년 6살 척추성 소아마비로 9달간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가느다란 오른쪽 다리를 가리려 양말 여러 켤레를 겹겹이 신어야 했고요. 오른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긴치마의 멕시코 의상을 입곤 했지요. 프리다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 멕시코 국립 예비 학교에 입학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 기예르모로 당시 전통은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없던 기예르모는 좌절된 학자의 꿈을 이루고자 프리다에게 희망을 걸었던 거지요. 프리다는 의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5년 과정을 등록합니다.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했던 국립 예비 학교는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 기관이자 멕시코 혁명 이후 행동주의, 개혁주의 등 뜨거운 열정의  중심부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 셀로스의 정책 덕에 그 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어 프리다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 35명이었다니 대단하지요.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장차 멕시코의 주역이 될 아이들이 동급생이었으니 말입니다.

 

 

 

 

 

 

<부서진 기둥>,1944/나무위키

 

 

 

1925년 9월 17일 ,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났습니다. 척추 세 군데가 산산조각 났고요. 쇄골과 갈비뼈도 부러졌습니다. 골반뼈와 어깨뼈 탈골, 오른쪽 다리에 열한 군데 골절을 입었습니다. 이 정도면 몸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치명상이었다는 말이지요. 가장 심각한 부상은 쇠로 만든 난간 끝부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 생식기를 뚫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고통스럽고요. 출혈이 너무 심해 온몸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이 들고 있던 도자기 항아리가 깨지면서 그 안에 든 금가루가 칼로의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마치 사고 이후의 계속될 그녀의 심각한 고통을 예언하듯이 말입니다. 프리다의 부모님은 아마도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소식이었겠지요. 쇠 난간이 뚫고 들어간 복부, 피, 금가루, 당구공, 시끄러운 구급차 사이렌 소리는 모조리 프라다 칼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외과 전문의 들은 마치 프리다의 몸을 콜라주 작품처럼  다시 붙여야 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가 직잡 그린 디에고와 본인 / 나무위키

 

 

 

 

국립학교에 다닐 당시 프리다는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를 만났습니다. 남편 디에고는 당시 젊고 당돌한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고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과 몸집이 모두 산과 같았던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림 속 그와 그녀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와 딸 같지 않은가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죽음이 늘 가까이 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만성통증과 상실감을 실제로 겪어내야 했고요. 놀림받고 멸시당하고 부정당하는 상황도 수시로 겪어야 했습니다. 결혼 후  디에고와 여러 작품 활동을 했지만 디에고의 여성 편력으로 2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을 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프리다는 그녀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또 다른 사고'라고 말할 정도로 말입니다. 진통제 없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던 프리다에게 남편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는 심리적인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타인이 정해주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에 책임을 지려합니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고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 영화 프리다 중에서-

 

 

 

 

<Henry Ford Hospital>,1932/Frida Kahlo Virtual Exhibition

 

 

 

프리다 칼로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진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실적인 수법과 판화공방에서 습득한 묘사력 등이 전부였지요. 그래도 프리다의 초기 작품은 동시대의 미술경향에 대한 지식들을 결합시킨 모습입니다.

 

 

 

과거에 겪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해서 그녀는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모두 유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침대 위쪽에 매달아준 거울을 올려다보면서 회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서 슬퍼하는 딸을 위해 사진가였던 아버지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이젤을 제작해 주었고요. 그림 작업은 프리다에게 구원 같았죠. 프리다가 그린 자화상 들은 개인적인 삶,  가톨릭 교리, 그리고 멕시코 토착문화에 대한 이해 등이 모두 통합된 것이었습니다.

 

 

 

 

프리다의 그림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녀 자신의 자전적 주제를 다루는 측면으로 볼 때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현실 세계와 상상 속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로 그녀의 삶 자체가 곧 예술이었죠. 그림 속 그녀는 틀에서 벗어나 꽃들이 온몸을 에워싸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과 망가진 생식력을 숨겼습니다. 화려한 컬러의 옷도 보호막이 되어주었고요. 특히 그녀는 오른쪽 신발의 굽을 더 길게 그렸다고 해요. 문자 그대로 균형을 잃은 채 살아가는 느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멕시코의 벽화 화가이자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외적인 화가로써의 인지도를 쌓기 시작합니다. 끊임없는 리베라의 외도와 계속되는 유산으로  심리적 고통은 나날이 심해져 갔고 프리다는 심적인 고통이 커갈 때마다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없었다면 프리다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면적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점차 디에고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1934년  미국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더 큰 악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이 관계를 맺어 배신감과 좌절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할 지경에 이릅니다.  맞은 곳 또 때려 실신 직전입니다. 그러나 프리다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작품에 올인하는 방법으로 망가진 마음을 다독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1936년 이후 프리다의 작품은 기법에서도 풍부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녀 삶에서 일어난 믿지 못할  사건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직관과 세밀한 통찰력을 발휘해  더욱 세련된 기교를  드러냅니다.

 

 

 

 

1938년 프리다는 초현실주의  거장인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게 됩니다. 브르통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 보았고, 더불어 프리다를 초현실주의자로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해 11월 뉴욕의 쥴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그때 화랑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전위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는 화랑은 더 적었기 때문에 프리다의 전시회는 중요한 문화적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첫 개인전에서 프리다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게 됩니다. 경제공황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전시된 총 25점 중 반이나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 중 상당수가 화가에게 새 작품을 위로했을 정도로 말이죠.

 

 

 

 

<What the Water Gave Me>,1938/ wikipedia

 

 

 

1939년 프리다는 처음으로 뉴욕과 파리에서 국제 전시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브르통의 제안을 받아 파리 피에르 콜르(PierreColle)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어 피카소, 칸딘스키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참 유행하고 있는 초현실실 주의 모임에 동참하면서 그녀의 작품들은 더욱 강한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The Two Fridas>,1939/wikipedia

 

 

 

<두 명의 프리다>는 리베라와 결별한 후 3개월 만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프리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그녀 안에 내재된 두 가지면, 즉 유럽인인 동시에 멕시코 토착인이며, 무덤덤한 동시에 과격하고 상심한 동시에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점이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그녀는 두 가지 측면 모두 자신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프리다의 카멜레온과 같은 면을 받아들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안에도 얼마나 다른 내가 존재합니까!  칼로 잘게 분석하고 샆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다중성을 모두 포함한 모습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열린 대규모의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1939)]와 [상처 입은 탁자(The Wounded table,1940)]를 출품하여 더욱 명성을 날렸습니다. 남미의 화가로서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예도 안았고요. 그 이후 주요 단체의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면서 예술가로서의 프리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녀는 라 에스메랄다 공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이후 10년 동안 재직하게 됩니다.

 

 

 

 

1946년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뉴욕에 필립 박사와 윌슨 박사에게 척추접합수술을 받게 됩니다. 프리다는 다시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작업도 하루에 몇 시간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고요. 이런 육체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작품 활동 외에도 정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합니다.

 

 

 

1950년대 프리다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또 받아야 했습니다. 오른발이 썩어 들어가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 영국 병원에서 받은 골수이식수술은 세균감염으로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힘이 허락하는 한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육체의 붕괴는 어쩔 수 없이 그림에 흔적을 남겨 산만하고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뒤로 정물화를 주로 그리게 됩니다.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계속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죠. 이 시기의 정물화의 소재들은 집 정원에서 따거나 현지 시장에서 사다가 프리다의 옆 테이블에 놓아둔 것들이죠. 빨강, 노랑, 초록 등 최소한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형태의 윤곽선도 배경에 흡수되고 표면자체도 거칠어집니다. 이런 과일의 깃발이나 평화의 비둘기, 문구 등을 곁들여 작품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1953년 프리다는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전시장소는 프리다의 친구 롤라 알바레스의 소유로 멕시코 시티에 위치한 '갈레리아 데 아르테 콘템포라네오(현대 미술 갤러리)'이고요. 역사적인 개막식 날, 프리다의 병세는 너무 악화되어 지인들은 상의 끝에 카사 아술의 침대를 갤러리에 옮겨 프리다의 그림들 사이에 놓기로 합니다. 

 

 

 

 

 

 

<Viva la Vida, Watermelons>,1954/ google Arts& Culture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일기 중-

 

 

사망하기 8일 전 수박들의 단면을 통해 자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면을 승화시킨 'Viva la Vida"라는 그림입니다. 프리다는 다채로운 모양으로 잘라 놓은 수박을 그려 자신의 삶을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풍랑 치듯 힘들었던 지나온 시간을 부드러운 수박 속 살에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란 말로 예찬합니다. 짧은 인생 그러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다 간 그녀의 인생을 응원하는 말 같습니다. 무척 담대하고, 사랑에 대담했으며 , 자신의 인생 자체도 고통 스러울텐데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모습이 우리가 그녀를 주목하는 이유 같습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향해 프리다는 본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실 안에서 창조하며 살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는 것 같습니다.

 

 

이혼 후에도 여러 작품을 그리면서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재결합 후 여러 작품을 남기고 공산주의 활동에 나서다 폐렴의 재발로 인해 1954년 7월 13일 사망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AdUv90AxI

 

 

 

오늘날 프리다 유골은 고대 멕시코  공예품 단지에 담겨 가장 편안했던 마음의 고향인 코요아칸의 파란 집 '카사 아술'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1958년 '프리다 박물관'으로 새 단장하여 개관되었고요.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초고가를 기록하는 그림은 남편 디에고의 작품이 아니라 아내 프리다 칼로의 작품입니다. 살아생전 바람기로 속 썩이던 남편을 작품으로 한 방 먹인 것 같아  '셈통이다' 싶기도 합니다. 죽음이 늘 주변에 낮게 갈리워졌던 그녀의 고단한 삶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녀에 비해 가진 것이 참 많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녀만큼 치열하게 사는 것 같지 않고요.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를 향해 엄지 척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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