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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이름 '모이셔 자하로비치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지금의 벨라루스(구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23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스식 이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로 이름을 바꾼다.  생몰연대를 보면  보기 드물게 장수한 화가이다.  그의 사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서로 주장하기도 했던 화가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태어난

러시아에서 (1906-1910/ 1914-1922(8년),

프랑스(파리)에서 [1910-1914, 4년 /1922-1941,19년/ 프로방스 1948-1985,37년]: 총 60년, 샤갈의 무덤

미국(1941-1948, 4년)

그가  젊은 시절을 유학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 벨라와 어린 딸이다와 같이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도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숨을 거둔지라 이만하면 프랑스의 깃발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듯싶다. 

 

 

아버지는 청어 생선가게 종업원, 어머니는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9형제 중 장남, 그것도 유럽에서 2등 시민 취급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906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므로 유명한 예술학교들이 즐비했지만 샤갈에게 그림의 떡인 셈이었다. 샤갈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정규교육조차 받기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는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서  친구에게 임시통행증을 얻어 그곳 명문 예술학교에 등록해 2년 동안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짜반체바 미술 학교(1908-1910)에서  '레옹 박스트'라는 유대인이며 장식예술 디자이너이자 유명한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를 롤모델 삼아  성공하고 싶어 했다. 샤갈의 그림을 본 레옹 박스트는 마치 색채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실험극장과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며  러시아 출신 유태인 변호사  막심 리버의 후원으로 23살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드디어  떠나게 된다.

 

I

<I and the Village>, Wikipedia

 

후원자의 도움으로 동경해 오던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다.   하지만 언어가 수월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자고 나면 낯선 이국의 자연환경이 '어쩌다 내가 이곳에 와 이 고생인가?'싶은 소외된 샤갈의 시선이 향수병으로 커지게 된다.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이라면 샤갈의 마음 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후원받아 겨우겨우 온 주제에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밤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다.  사람들마다 풀어 가는 방식이 다 다를 테지만 샤갈은 꿈속에서나마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꿈을 꿀 때  그리운 고향의 풍경과 가족들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얼른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머릿속 생각이 손가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메모를 하듯이 말이다.

 

 

샤갈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어떤 감정, 어떤 추억을 기억에 담아 내려 했을 지 그의 입장에서 감상하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나와 마을> 작품은 24살에 그려진 작품으로 엄청난 화제작이었다.  당시 피카소의 큐비즘과 야수파 마티스의 영향을 샤갈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그려낸 작품이다. 두 사조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낸다. 실제로 샤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이 없다. 모딜리아니처럼 말이다. 언뜻 보면 아이들 그림 동화 속 삽화인가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은 초현실주의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샤갈 자신은 초현실주의 작가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말이다.

 

 

저는  오직 제 경험과 추억만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염소와 초록색 어린 소년이 교감하듯 서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다.  염소 젖을 짜는 여인이 등장하고, 일터로 가는 듯한 남성, 뒤집어진 집과 엄마인 듯한 여성, 늘 다니던 유대교 사원 등 두고 온 고향 가족들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샤갈이 주로 쓰고 있는 빨간색은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거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파란색은 자유의 상징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은 기쁨과 평화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례로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던 1937년 제작된 작품들은 유난히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많았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샤갈이 파리에 머물던 5년 동안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으로 보았고 나머지 80년 동안 반복한 사람으로 그를 이해했다. 

 

 

 

 

마티스 이후
진정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한 화가는
샤갈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생일(The Birthday),1915>,구글아트앤컬쳐

 

 

샤갈이 사랑하는 여인 벨라 로젠펠트가  꽃을 들고 작업실을 찾아왔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당신 생일이잖아요."

 

자신의 생일도 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샤갈!

꽃을 들고 축하해 주러 온 벨라의 모습이 샤갈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잠깐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보답으로 당시의 기쁨을 작업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샤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공중부양 할 수 있는 장면이다. 현실에서 불가능 한 자세로 입맞춤하는 장면이 샤갈의 마음상태라서 가능한 것일 테니 눈감아 주시라. 

 

<벨라 샤갈>,위키피디아

 

 

마치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샤갈의 영원한 뮤즈 첫 번째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이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 유태인이며 보석 도매업을 해 부를 쌓은 부모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샤갈과는  8살 나이 차이가 나고,

첫 만남은 14살 (샤갈22세)로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닭 살 돋는 내용이긴 하다. 서로가 첫눈에 반해 장거리 연애를 했던 두 사람이다. 샤갈이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 그녀가 보고 싶어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귀하게 기른 딸을 가난뱅이 화가에게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벨라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샤갈이 유명세를 치르고도 한참 이어졌으며 오랜 설득 끝에 둘을 결혼하고 딸이다를 출생한다.  사랑과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샤갈의 삶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게다가 볼셰비키 혁명까지 일어나게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유럽 역사속 희생양은 항상 유태인이었다. 샤갈은 아내와 딸이 계속 차별을 받을 것이 뻔한 러시아 고향 마을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샤갈 생애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유럽 상황은 세계대전으로 뒤숭숭했지만 말이다.  

 

<에펠탑과 신랑신부,1939>,구글아트앤 컬쳐

 

 

에펠탑아래에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수탉을 타고 하늘을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를 떠나 오랫동안 방황하던 그가 파리를 창작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뒷쪽으로 유태인 전통 결혼식 장면이 그려져 있고 , 고향 마을 비테스크브르크,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  악기로 변신한 염소, 거꾸로 그려진 세 개의 촛대, 수탉 등은 유대교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유대인 결혼식, 장례식에  빠지지 않는 악기가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닭은 자기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림 속 닭은 샤갈 자신이란 이야기가 된다. 

 

 

샤갈 그림의 평생 화두는 신, 고향마을, 그리고 아내 벨라였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샤갈 이다. 하지만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33년 나치 당원들이 샤갈의 작품을 다른 '퇴폐예술'과 함께 불태워버린다.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까지 점령하자  홀로코스트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잠깐 피하려고 들른 뉴욕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벨라가 감염이 되고 전쟁 중이라 약을 구하기 어려워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스페인 독감으로 이른 나이 사망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도 비슷한 상황으로 알고 있다. 아내를 잃고 벽에 걸린 벨라의 그림을 모두 돌려놓을 정도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딸이다의 위로와 제안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잔뜩 담아 서 말이다. 

 

 

<하얀 십자가(1938)>,출처: 서울신문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을 지닌 샤갈이 최대한 색을 절제하며 쓴 작품이다. 나치 치하의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예수나 십자가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라는 메시지로  세계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하얀 십자가>는 샤갈 자신이 겪은 1925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과 1938년 나치의 수정같이 빛나는 밤의 공격사건 두 가지를 한 화면에 담아낸 그림이다.  정 중앙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가시관 대신 두건을 하의를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두르는 흰색과 검은색 숄로 가리고 있다. 발아래 놓인 촛대,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와 엄마, 붙타는 토라(유대인의 율법책), 불타는 유대교 회당에 나치 완장을 한 군인이 들어가고 있고 회당 윗편에 이미 독일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왼쪽 편을 보면 너무  급하게 나와 신발도 한쪽만 신고 나온 인물, 마을이 불타고 이미 죽은 사람, 죽은 가족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모습, 겨우 탈출했지만 노가 하나밖에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늘을 향해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배안의 사람들, 붉은 기로 무장하고 칼 들고 달려오는 저들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머리 위의 그들의 선조들이 울고 있다.  샤갈의  이 작품 덕분에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수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예술에도,
삶에도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색깔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 

 

 

 

두 번째 연인이었던 버지니아  맥닐과 7년동안 결혼하지 않고 살았지만 죽은 벨라를 잊지 못하는 샤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난다.  딸이다의 소개로 1952년 바바 브로드스키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하고 프로방스에서 98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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