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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즈 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은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카 주의 크라코프에서 출생한 유대계 화가이다.

사진출처: 신발끈여행사
폴란드의 행정구역, 사진출처:위키백과

 

 

크라코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Jozef Pankiewicz)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 특히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와 에두아르 뷔야르(Jean-Edouard Vuillard)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이 처음 파리를 찾은 것은 1910년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동급생 대분이 빈이나 뮌헨으로의 유학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키슬링만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 세잔과 르누아르의 나라 프랑스로 향했다. 이미 인상파는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파리 젊은 이들은 "입체파"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미학의 주도자 격인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과 친해져, 자주 제작을 함께 할 기회도 가졌다고 한다. 

 

 

 

<Still life with fruit, 1913>,그림출처: Wahoo Art.

 

 

세잔의 느낌도 나고 피카소의 입체파 영향도 받은 느낌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그림이다."

이것저것 후배의 그림에 훈수를 두려 하는 피카소에게 젊은 키슬링이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그림에

자부심을 드러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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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자원하여 입대했고, 1915년 프랑스 솜전투(Battle of the Somme)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당대 예술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특히 20세기 초 파리로 모여든 동유럽 출신의 미술가 및 유대인 미술가들과 함께 모여 에콜 드 파리(파리파)를 결성했다. 한마디로 에콜 드 파리(파리파)는 같은 이념이나 양식, 명확한 계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폴란드 등으로부터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해 타국으로부터 모여 온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그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파리파)의 대표 화가였으며 초상화와 정물화에 능했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줄스 파스킨(Jules Pascin), 리투아니아의 생 수틴(Chaim Soutine), 옛 러시아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Portrait of Moise Kisling, Amedeo Modigliani, 위키피디아

 

 

실물은 훨씬 귀여워 보이던데 모딜리아니가 그린 친구 키슬링은 각이 지고 강해 보여 살짝 무섭게 보인다.

모딜리아니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그는 가난하고 병든 그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맞이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했다. 키슬링은 1919년 개인전을 통해 호평을 받고 이후 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의 작품들을 크게 분류한다면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여성 누드화이다. 그는 현대 미술 운동의 요소들을 자신의 그림에 적극 받아들여 매혹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소화해 내고 적용했다. 

 

 

 

폴 세잔(Paul Cezanne)과 드랭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물화와 풍경화는 엄격한 구성에 입체파의 대담한 기하학적 형태와 풍부한 색채감으로 추상적인 완벽함은 물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준다. 정물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장면의 본질을 포착하려 노력했으며 이 독특함은 그의 초상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색깔은 선명하고 붓놀림은 거침이 없다. 천부적으로 쾌활하고 열린 마음인 그는 많은 친구들을 얻었고, 파리의 밤 축제에서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결혼한 그의 아내 르네는 종종 남편의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해와 신뢰로 가득 찬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결말이 비극적이었던 친구화가 모딜리아니에 비하면 드물게 '축복받은 화가'아닌가 싶다.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Potrait of Madame Renee Kisling>, Allpainter Online Gallery

2023.09.03 - [지식&교양] - 50-3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31

 

 

50-3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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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은 무엇보다도 이국적이고  관능미에 찬 나부상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략된 배경에 우울한 표정의 여인들이 담긴 초상화와 누드화는 파리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성과 표현주의적 경향을 자세히 드러내 준다. 얼굴보다 아이라인이 커다란 눈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크고 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 눈인가 착각이 들정도다. 빛의 부드러움과 모든 디테일의 정밀함이 모델의 눈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은 초상화이다. 그가 이 카테고리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키슬링의 여성 편향적 성향과 애수 어린 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Nu sur un divan noir>,1913, 위키피디아

 

 

위에서 모델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 그림은 세잔의 영향과 놀랄만한 견고성과 공간의 깊이를 형성하는 처리 기술을 보여준다. 복잡한 형태를 다룰 줄 아는 성숙한 예술가의 솜씨라고나 할까. 1913년 파리로 돌아오면서 키슬링은 몽파르나스에 있는 조제프-바라 거리 3번지의 스튜디오로 이사했는데, 이 작품이 아마도 그 곳에서 그려지지 않았나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그가 파리 비평가들과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라서 말이다.

 

 

<KiKi de Montparnasse in a red Jumper and a blue scarf,1925>, Mutual Art.

 

 

 

1925년 완성된 키슬링의 <몽파르나스의 키키>의 주인공, 앨리스 프린(Alice Prin)통칭 키키라고 하는 모델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시골마을 부르고뉴(Bourgogne) 태생으로 몽파르나스 부근에서 키슬링을 비롯한 슈틴, 후지타 쓰구하루, 등 에꼴 드 파리의 화가들이 경쟁적으로 그녀를 모델 삼아 20세기 가장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모델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몽파르나스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가난한 화가의 모델을 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키슬링, 드랭, 피카소, 후지타 등 의 모델로서 또는 몽파르나스의 카페에 모인 예술가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키슬링은 100장 이상의 키키의 초상을 그렸다. 그녀를 그린 그림은 파리의 거리에서 대호평으로 이어졌다. 

 

 

키슬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불안한 시대 배경 속에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거나 야단법석 파티를 일삼는 가운데 일찍부터 화가로서 성공한 '축복받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의 화가답게 누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닌 빛나는 색채로, 정물, 풍경, 초상화 등 독자적인 작품을 그려냈다. 

 

 

 

<Portrait De Femme>, 그림출처: Paintingstar.com

 

 

개인적으로 묘한 분위기의 검은 머리의 이 소녀가  내 시선을 잡아 끈다. 애수에 찬 저 눈빛, 그렁그렁한 그래서 또르르 곧 쏟아질 것만 같은 저 아이의 눈, 아이의 눈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속사정을 왠지 침묵하며 들어줘야 할 것만 같다. 미국의 여성화가 마가렛 킨(Margaret Keane,1927~ )의 <빅 아이즈> 작품 속 눈 큰 아이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두 번째 남편 월터의 유령화가로 존재하다 법정에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마가렛 킨이 그려낸 눈 큰 아이와 참 많이 닮아있다. 키슬링이 먼저 태어났지만 말이다.

 

 

<빅아이즈>, 다음영화

 

 

 

 

 

 

키슬링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미국으로 가서 미술학교 교수로도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6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953년  4월 29일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스-코트다쥐르(Provence-Alpes-Cote d Azur)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의 상당 부분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스위스 아비뇽 프티 팔레 미술관(Musee du Petit Palais)에 소장되어 있다. 모이즈 키슬링이 살았던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그의 두 아들 중 작은 아들 장(Jean)은 파리에 살며 그의 아버지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모이즈 키슬링# 마가렛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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