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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오스트리아 반항아 화가
빈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
심벌리즘과 아르누보스타일의 대표적 작가
초상화와 누드그림,
장식패턴과 금색 사용(황금시대)
<키스>
스페인 독감
2. 생애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외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에서 비엔나로 이민을 온 금색 판화가였고요. 어머니 "안나"는 오페라 가수로 음악적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의 가족은 비엔나 남서쪽에 있는 작은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7명의 아이들 중 둘째로 자랍니다. 이민자의 상황이 그러하듯 가난했으며 합스부르크제국 초기에 같은 처지의 소수 민족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난 1873년 주식 시장 폭락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진 상황이었지요.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집세가 더 싼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 안의 슬픔도 많았습니다. 1874년 여동생 애나가 5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또 다른 여동생 클라라가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지고요. 다행히 클림트와 두 형제 에른스트와 게오르크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미술과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부모님의 유전을 받았으니 클림트 역시 눈에 띄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14살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을 받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발휘합니다. 졸업을 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합니다. "예술가 회사"로 알려진 예술 집단을 결성했으며 이는 나중에 비엔나 분리파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공예 운동과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카메라가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온 관객들의 모습을 비춘 듯한 그림을 그려 대박을 칩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발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여성들의 옷차림 가까이 보면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인사들의 얼굴도 찾아 보면 어디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숨은 그림 찾듯이 말이죠.
그 기쁨도 잠시 ,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클림트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의 죽음으로 3년간 작품 활동을 쉽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보수적이었습니다. 미술도 아직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유행할 정도로 말이죠. 이에 클림트는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1897)'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전통예술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반항적이고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요. 미술, 건축, 음악 등 복합 예술 공간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만들 것이 '제체시온'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됩니다. 동료인 마치는 '신학'을 의뢰받고 그는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을 그리게 됩니다. 빈 대학에서는 의학, 철학, 법학을 주제로 학문과 이성의 위대함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런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물론이고 관능적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세 작품들을 내놓았으니 대학 관계자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죠. 마치 인간이 우주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 <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 <법학>처럼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졸지에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림을 잠시 접었던 3년 동안 삶과 죽음,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클림트의 철학이 당시 관계 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거지요.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였고 특히 빈 대학교 교수진 87명은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육부 장관 리터 폴 하르텔 박사와 같이 클림트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고요.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철학>은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입증받게 됩니다. 그러나 패널화는 끝내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고, 클림트는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하라는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국가로 부터 받았던 제작비는 전액 되돌려 주고 ' 학부 회화' 최종판을 자기 소유로 하지요. 훗날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부 회화 사건 이후 클림트는 더 이상 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라베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1890년대 클림트는 복잡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키스(1907-1908)>,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세>가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했으며, 때로는 노골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세>작품 입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었습니다.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레가 사망한 후 남편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게 몰수당합니다.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고요.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지요.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되게 됩니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에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The Kiss(1908)>작품은 너무 유명해 따로 그림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그림인 지 벌써 아실 테니까요. 이 그림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유럽 열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작품이 예술계에서 중요한 이유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유럽에 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의 핵심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 운동은 장식 예술과 복잡한 디자인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지요. 당시 비교적 흔하지 않은 기법인 금박을 접목한 것으로 유명하고요. 금박의 사용은 작품에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며 지속적인 시각적 효과에도 기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지속적인 인기와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수년에 걸쳐 널리 복제되고 모방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포스터, 인쇄물, 심지어 아이스크림 커버에도 실려있을 정도니까요.
클림트는 그의 경력 동안 수백 점의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를 예술계의 주요 세력으로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요. 그의 영향력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후원했던 학생 중에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거장들도 있는데, 이들의 작품과 클림트의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 될 것 같습니다.
2023.08.23 - [지식&교양] - 50-32. 표현주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30
2023.07.27 - [지식&교양] - 50-22. 표현주의 , 에곤 실레(Egon Schiele,26)
클림트의 그림은 음악적이라고도 합니다. 클림트가 음악의 신이라 불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만나 '환희의 송가'를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림 <베토벤 프리즈> 작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건물 윗부분에 총세면으로 나뉘어 그려진 띠벽지 형태의 그림입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그림에 황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의 행복을 향한 염원을 드러낸 이 그림은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하지 않은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빈 캔버스가 있는한 희망은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초상화라고 합니다. 예상 낙찰가격이 1,025억 원이라고 하니 마지막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엄청난 낙찰가와 함께 누군가의 수장고에서 고이 모셔지기도 하고 다음 주인에게 팔리기도 하며 클림트의 여인들은 세계 곳곳에 황금빛을 물들이고 있네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우리들 마음을 홀리면서 말이죠.
3. 나가기
20세기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고 , 클림트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의 스타일을 전승해 주는 이가 없어 고립된 작가의 느낌도 살짝 듭니다. 그렇지만 현대 미술의 다양한 양식들 속에서 클림트의 작품만큼 대중적으로 많이 인용되고 응용되는 작품도 없을 듯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쳐,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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