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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인상주의의 후원가

유능한 전시 기획자

뛰어난 안목의 수집가

천재적인 보트 설계, 제작자

우승을 거머쥔 요트 선수

열정적인 시의원

훌륭한 원예가

부르주아

화가

 

 

 

 

 

 

 

반복된 혁명과 혼란 속에 무너진 채 방치됐던 파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53년, 오스망 남작의 지휘 아래 추진된 도시 계획 덕분이라고 한다. 좁고 지저분했던 골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커다란 가로수 길을 따라 트렌디한 상점과 극장, 카페, 레스토랑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도시는 활기가 넘쳤고 거리마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순간을 마치 스냅사진처럼 그림으로 담아낸다. 그중에서 오늘의 주인공 귀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1848-1894)의 따뜻한 시선을 따라가 본다.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1848년 8월 19일 파리에서 아버지 마샬 카유보트와 어머니 세레스테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카유보트의 아버지 마샬은 가족이 운영하던 직물 사업의 일을 배우다 파트너들과 함께 군부대의 섬유와 시트를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안정적인 공급과 운영으로 오랜 기간 프랑스 정부와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여름휴가 때면 가족들과 늘 찾았던 예르 강 근처의 사유지를 포함해 37,000평에 가까운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고 근교의 큰 농장마저 소유하게 되면서 일 년 내내 식품 창고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그의 세 아들 구스타프와 르네, 마샬은 파리의 상류층이던 아버지의 재산이 경이롭게 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며 자랐으며 충분한 교육과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1870년 법학 학위를 취득한 구스타프는 당시 발발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파리 방어를 위해 센강을 지키던 기동대에 차출되었고 무사히 돌아온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조금씩 그려왔던 그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하기 시작하며 존경받는 화가 '레옹 보나'가 선생님으로 있던 에콜데 보자르에서 교육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카유보트는 친구이자 화가인 '주제페 드 니티스'의 소개로 '에드가 드가'를 알게 되었고 예술가들을 만나 토론과 친목을 나누는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게 1년간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참가했던 미술 경연대회에 46위에 오른 후로 아카데미보다는 임시로 만든 스튜디오에서 스스로 그림을 공부한다.

 

 

 

 

 

 

 

 

1874년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화가의 길을 원하는 아들을 위해 스튜디오를 만들어 주기로 결정하고, 당시 파리에서 살고 있던 미로메스닐 근처 건물에 이층짜리 작업실 공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던 겨울, 불행히도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스튜디오의 완공조차 보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화가의 길을 응원하던 아버지가 남긴 유산 일부를 받은 카유보트는 드가의 소개로 클로드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교류라고 견해를 넓혀갔다. 정부 사업을 했던 부르주아 아버지를 두고, 사실상 정부와 아카데미에 반감을 품는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것이 내심 신경 쓰였던 카유보트는 아버지의 사망 후 점차 주체적으로 생계가 어려운 화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1877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은 카유보트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1878년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전시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오스만대로  건물을 배경으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오른쪽 정면으로 남녀 한쌍이  걸어오고 있고 뒷모습이 반쯤 잘린 남자가 이 두 사람을 피해 가려는 듯 우산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뒤쪽 남성도 보이고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는 친구 같은 두 사람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네모 반듯한 돌 사이에 머금고 있는 빗물이다. 어쩌면 이렇게 사진 같을까! 사진을 찍듯 낡은 중세 건물에서 우아하고 세련된  도시롤 변모하는 파리 거리를 영원히 캠버스로 옮겨 온 느낌이다. 이 작품은 2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두 남녀는 실제 사람 크기와 똑같이 그려졌다고 한다. 덕분에 그림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마치 우리도 앞의 남자처럼 길을 비켜줘야 할 것만 같다.

 

 

 

촌티를 벗어나 우아하게  정비된 파리의 풍경들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전해진다. 오래전 큰 아이와 유럽 여행을 하면서 파리 시내를 잠깐 들른 적이 있다. 깃발 들고 우르르 무리를 지어 따라 간 여행이라 맘에 든다고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담아 가야 하는  그야말로 사진만 찍고 가는 소나기 관광이었다. 파리의 인상을 다 담아낼 수 없었지만 카유보트 그림에 드러난 파리의 모습들이 살짝 현대화되었을 뿐 그 독특한 분위기는 여행당시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찰나의 인상을 담기 위해 애를 쓴 반면 카유보트는 모든 대상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사실주의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도 빗물에 반짝이는 보드브럭, 건물의 창문과 굴뚝 하나하나가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카유보트를 이름만 인상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냅사진을 보듯  사람들의 모습 역시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보자면 여자의 옷 주름과 트리밍 된 모피의 느낌,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면사포의 패총이 아주 사실적이다. 당시 고급 패션이었을 거라 짐작도 해본다. 게다가 남자가 들고 있는 우산 끝에 잡힌 주림까지 섬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Gustave Caillebotte, Portraits in the Countryside,1876

 

 

 

 

 

 

<시골에서의 초상>이라 이름 붙여진 이 작품은 공원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여인들의 일상을 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빛, 눈이 부시게 화려한 한 무더기의 꽃들, 맑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조용히 헤집고 갔을 순간의 시간이 차분하면서도 아름답다. 시골 어르신들이 커다란 느티나무 정자에 모여 왁자지껄 얘기하는 정겨운 풍경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필요를 위해 손수 무엇인가 뜨개질하는 여인의 뒷 모습은 왠지 신성하기까지 하다.  카유보트는 종종 가족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는데 맨 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이 바로 카유보트의 어머니이다.흐트러지지 않은 책 읽는 자세가 눈에 더 들어온다.  회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은 카유보트의 사촌 마리, 뜨게질 하는 그녀의 손이 가늘고 여리다. 초록색 벤치에 않아 있는 여인은 이웃, 맞은편 여인은 숙모라고 한다.  섬세한 작업에 눈은 아플 것 같지만 두런두런 얘기 하고 들어 주며 돈 주고받는 카운슬링 역할도 나름 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카유보트는 도시 풍경 외에도 소소한 일상의 풍경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평범한 주제는 당시를 지배하던 아카데미 화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 

 

 

 

 

 

 

 

 

카유보트는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의 판매가 되지 않는 작품들을 좋은 가격에 사들이기도 하면서 예술가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힘을 보탠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다가올 때, 카유보트의 동생 르네가 예기치 않게 사망한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지 2년 도 채 되지 않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카유보트는 자신을 포함한 남은 가족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것이라 확신한다. 당시 28살이던 카유보트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슬픔과 두려움이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첫 번째 유언장을 작성한다.

 

 

 

 

 

 

"나는 1878년 인상파로  알려진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리는 데 필요한 금액이 내 재산에서 사용되는 것을 희망한다. 현재 그 금액을 산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3-4만 프랑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이 전시회에 참가하는 화가는 드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세잔, 시슬리, 모리조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국가에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유증이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다락방이나 지방의 미술관이 아니라 뤽상부르크 그리고 나중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물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내 유언이 이행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년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내 동생 마샬, 혹은 그리고 하지 못한다면 내 상속인이 이것을 관리할 것이다. 르누아르에게 유언 집행을 의뢰할 것이고, 그에게 그가 선택한 그림을 주기 바란다. 르누아르가 중요한 집행인이 될 것이다.  

-1876년 11월 3일 파리에서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유언 중)

 

 

 

 

 

 

 

 

 

 

Gustave Caillebotte, Floor Scrapers,1875

 

 

 

 

 

 

 

<바닥을 긁는 사람들>은 1875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품이다. 실내에서 바닥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들 중 하나이다. 지금가지의 노동 장면은 땅을 개간하거나 씨를 뿌리는 등 시골 농부의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갑자스런 도시화로 시골에서 무작정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향했을 것이다. 젊은 몸뚱이가 전 재산인 그들에게 이런 일이라도 있어 두고 온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개인적으로 내 초등시절 마룻바닥을 친구들과 함께 병을 사용하거나 초를 사용해 반질반질 윤기 나게 문질러야 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윗사람 보기 좋으라고 어린 고사리 손에 초와 병을 맡겨 당시 환경미화라는 이름하에 선생들은 강요했었다. 그림 속 남자들 처럼 서로 속삭이기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동심이란 이름으로 넓은 학교 바닥을 반질 반질 닦던 그날의 꼬맹이들이 겹쳐 보인다. 잘못하면 손끝에 나무 파편이 들어가 곪아터져 일상이 불편한 적도 있었다. 그림속 남자들의 손도 거친 손이 되기까지 수많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카유보트는 당시 밀레, 쿠르베처럼 정치적 혹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런 노동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일상의 모습을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덤덤히 담아낼 뿐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살롱에서 저속하고 천박하다는 악평을 받게 된다. 기존의 고전주의 그림에  세뇌가 된 살롱 심사위원들 눈에 이 그림이 함량미달처럼 보일 수 있다. 신처럼 그려대고 아름답게 묘사된 여신의 모습을 그려대던 당시 분위기와 상반되었으니 이런 그림이 허접하게 보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일상을 담아낸 카유보트의 시선이 신선하고 따뜻해서 참 좋다. 

 

 

 

 

 

 

 

3. 나가기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수많은 걸작을 감상할 수 있는 수혜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카유보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유보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전시회 비용과 화실 임대료를 대신 내주고 작품을 꾸준히 구입하는 방법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했다. 인상파 화가들이나 오늘날 그들의 그림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1894년 세상을 떠날 때 카유보트가 남긴 컬렉션에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드가, 세잔의 중요한 작품 68점 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면서 모든 작품들이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거부로 그의 주옥같은 컬렉션은 지금의 오르세 미술관에 자리하게 된다. 비록 화가보다는 수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특별한 노력 덕분에 인류는  풍성한 문화를 지금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인상주의 화가들 그림 앞에 서면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따뜻한 시선도 덤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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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나는  내가 산 그림(정원의 여인들)의 진가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할 만큼 부자가 아니라는 게 그렇게 미안할 수 없다네.'

 

 

-1868.1.2. 바지유가 모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장 하나가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한 마디로 정의해 주는 말 같다. 

이런 친구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심도 품게 된다. 하지만 부모 입장이라면 이렇게 퍼주기만 하는  아들이 그리 달갚지 많은 않을 것 같다.

 

 

 

 

 

 

인상파 화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지만 그들의 동료이자 든든한 후원자 역할까지 했던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나 역시 '이런 화가가 있었나.'하고 찾아보았으니까 말이다. 모네, 시슬레 등과 함께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바지유는 1870년 터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에 참전해 2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전사한다. '29'이란 앳된 숫자가 일제강점기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인  천재 시인 '이상 (1910,9,23-1937,4,17)을  떠올려 보게도 한다. 만약 바지유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많은 그림을 통해 모네나 르누아르 못지않은 인상파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까운 그의 인생을   꽃에 비유하자면 동백꽃으로 표현해 주고 싶어 진다. 동백꽃은 한창일 때 봉오리 채 툭하고 떨어진다. 짧디 짧아서 시작도 못해본 그의 화가로서의 삶을  마음으로 따라가 본다.

 

 

 

 

 

2. 생애

 

 

 

 

 

 

바지유는 남프랑스의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진 몽펠리에에서  1841년 태어난다. 상원의원 출신의 아버지와 대지를 물려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의학도로 성장한다. 드가와 세잔이 법대를 다녔던 것처럼 바지유  또한 부모님의 기대로 인하여 의학 공부를 강요받는다. 그런 부모님의 바램과 달리 그는  스무 살에 파리의 의대로 진학하면서 한편으로  샤를 글레의 아뜰리에에 등록하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식의 장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던 중 인상주의 핵샘 인물들인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뜰리에 스승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끼고, 이젤과 물감을 들고 파리 근교에 위치한 퐁텐블로의 숲으로 향한다. 퐁텐블로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가 모여서 그림을 그렸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지유는 아뜰리에 풍경을 담은 작품을 남겼는데, 파리에서 작업하는 동안 여섯 차례 아뜰리에를 이전했다고 한다. 한 번은 들라크루아의 아뜰리에가 위치한 건물의 위층에 있는 아뜰리에를 사용하기도 했다. 모네도 종종 함께 사용한 이 아뜰리에에서 낭만주의의 대가인 들라크루아에 대한 존경과 함께 창작에 몰두했다. 한편, 바지유는 음악에도 조예가 남달랐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친구 에드몽 메트르와 함께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댄디스타일이었던 에드몽 메트르는 법학을 전공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문학과 음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간이 야전 병원,1865>, 프레데리크 바지유

 

 

 

 

 

 

 

모네에 대한 바지유의 우정은 별나다고 하겠다. 그림 속 병상에 누워있는 이가 모네다. 다리를 다쳐 붉은 색으로 다리 부분이 표시되어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모네 다리 위에 매달린 물통이다. 바지유가 아픈 친구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저 위에서 물을 흘러내리는 방식으로 상처 부위의 열을 식혔었나 보다. 누워있는 모네가 자신을 그리고 있는 바지유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 같다.

 

"야임마, 너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는 나를 그리고 싶냐?"

 

심박한 아이디어를 내어 친구 모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 바지유와 심통 부리는 모네의 티격태격 오고 가는 대화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정교한 묘사이자 기념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자티 안 내고 돈을 제대로 쓸 줄 알았던 바지유와 모네의 우정을 떠올려 보게 해 준 그림이라 정겹기도 하다. 

 

 

 

 

 

 

 

 

 

가족회합,모임(Familly Reunion,1867), 프레데릭 바지유,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몽펠리에 근처의 메릭(Meric)에 있는 가족 집 테라스에 모인 가족들 모습이다. 맨 왼쪽 부모 주변으로 그의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일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지유의 이 그림은 인상파의 야외 인물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작이라고 한다. 인물의 숫자를 세어보면 총 11명의 모델로 이들은 실제 가족과 친구들이라고 한다. 왼쪽에 착석한 부부는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의사가 되지 못하고, 당시 무직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가 된 아들의 모델이 된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래서인지 얼굴이 밝지 않다. 코로나 시기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을 그만하겠다며 완전히 무관한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둘째 아들과 썰렁한 부모 자식 관계를 맺었던 잠시 동안의  내 경험도 한 몫한다. 장신의 바지유는 자신의 모습도 맨 좌측 구석에 소심하게 살짝 그려 넣었다. 앉아 있는 남자와 나무 아래 팔짱 끼고 선 커플만 딴청을 부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바지유가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던 세 명을 그렇게 표현한 거라고 한다. 화창한 날이었는지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있어 빛과 그늘의 차이가 더욱 커보인다. 안정적인 구도와 과감한 붓질, 싱그러운 색감이 퍽 인상적이다. 녹색, 파란색 등 차가운 색 계열로 표현했지만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모델들은 거의 전면을 주시하지만 중앙의 3명은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경직된 분위기를 다소 해소시킨다. 우측 하단의 빈 공간은 나무 그림자와 모자 꽃바구니 등으로 화면의 균형을 맞추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 작품으로 1869년 바지유는 국전에 해당하는 살롱전에 입선한다. 하지만 친한 친구 모네가 낙선해 "아마 심사위원들이 실수로 내 작품을 지목했을 거야."라고 하면서 모네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그의 동료였던 까미유 피사로는 바지유의 재능에 대하여 극찬을 했다고 한다. 당시 살롱전에 입선하면 전시를 할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고 한다. 천사표 바지유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화가 친구들보다 자신의 그림이 먼저 입선이 되자 오히려 난처해하고  미안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렵게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지유는 돈 걱정 없이 그림을 그렸 던 자신보다 그들이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탓도 있다. 부자 친구가 마음씀씀이까지 이 정도면 내 친구로 꼭 만들고 싶어질 것 같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특히 모네와 르누아르가 성공할 수 있도록 티 나지 않게 후원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갖은 돈을 움켜쥐고 있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배려심 또한 많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모네, 르누아르처럼 작업실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넓고 넓은 작업실을 구해 함께 작업하는 식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던 그들의 그림을 수시로 사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후원해 생계 걱정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모네, 르누아르의 화려한 성공 뒤에 어쩌면 바지유의 그림자 같은 배려가 있어  힘든 시기를 무난히 넘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그림을 볼 때 피다가 져 버린 바지유의 삶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Bazille's Studio; on the Rue la Condamine, 1870, Musee d'Orsay , Paris

 

 

 

 

 

 

 

 

 

모자 쓰고 이젤 앞의 맏형 마네, 뒤에서 턱을 괸 채 그림을 응시하는 이가 모네이고 그의 오른편에서는 키가 큰 바지유가 팔레트를 든 채 서서 마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고, 그보다 더 왼편, 의자에 앉아 있는 이와 계단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이는 각각 루누아르와 작가 에밀 졸라,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바그너에 빠진 바지유의 친구 에드몽 메트로로 추정된다.  키 큰 바지유의 모습은 그가 존경하던 마네에게 부탁해 마네가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의 60여 점의 유작 중 최대 걸작이라고 일컫는 위 작품은 아카데미의 답답함을 벗어던져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젊은 화가들이 서로를 격려하자며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계단을 보니 2층 구조의 널찍한 화실이다. 당시 20대였던 바지유, 모네, 루누아르, 시슬레는 모두 화단의 풍운아 에두아르 마네(가운데 모자 쓴)를 흠모하고 있었다. 마네는 제도권에서 외면받던 화가였지만, 세 사람은 마네의 대담한 색채와 과감한 인물 묘사에 신선한 바람을 느끼며  마네는 자신의 바티뇰화실과 멀지 않은 바지유의 화실에 가끔 들로 후배들의 그림을 봐주곤 했다고 한다. 화가의 스튜디오답게 벽마다 여러 그림이 걸려 있는데, 창문 오른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은 르누아르가 1866년 그린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살롱에 출품하지만 떨어지고, 안타까운 마음에 바지유는 이 그림을 자신이 구매한다. 그 아래 있는 바지유의 그림  '화장(1870)'인듯하고 왼쪽 벽에 바지유의 '투망을 든 어부(1868)가 보인다. 요즘 화가들의 작업실을 보면 답답한 도심을 떠나 멀지 않은 널찍한 곳에 화실을 마련하거나 멀리 지방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실을 만들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사는 것과 일 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그리는 듯 사는 듯하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작가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완성 된 지 몇 달 만에 바지유의 뛰어난 재능과 너그러운 인품은 전쟁 포화 속에서 스러지고 맙니다.

인상파의 등장에도  함께 하지 못했지요.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운명도 엇갈립니다. 천사표 바지유도  자신의 안전보다는 항상 친구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를 먼저 걱정했던 성격 탓에 자원입대 합니다. 대부분의  인상 중의 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잠시 다른 장소나 나라로 피신하는 선택 을 한 것과 사뭇 대조적입니다. 바지유는 그해 11,28일 본-라-롤랑 드 전투에서 그의 부대와 함께 그의 장교가 부상을 입어 지휘를 맡아 독일군에 대항하다  2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인상파가 만개하기 직전에 그리도 좋아했던 친구들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맙니다. 그의 부친 가스통 바지유가 인상파 전시를 관람하다가 전시에 소개된 아들의 작품을 산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후 가족들이 몇 차례 공공 미술관에 바지유작품을 기증하면서 재조명받기도 했고요.

 

 

 

 

3. 나가기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존재할 수 없다.  인상주의란 말이 나오기 이전 한 때는 '베티노스파'라고 불릴 정도로 인상파 화가들의 소굴이었던 바지유의 작업실! 사실주의에 가까운 인상주의 묘사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했던 프레드릭 바지유!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2점으로 인생을 바꾼 화가 바지유! 뜨거운 가슴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못다 핀 청춘 바지유! 좀 더 살아줬더라면 우리는 더 풍부한 인상파의 그림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더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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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이 인상주의 동료들 사이에서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했 던 시슬레를 표현했 던 문장이다. 시슬레는 프랑스에서 낳고 자랐지만 두 번씩이나 프랑스 국적을 받는 데 실패한다. 어쩔 수 없이  영국시민으로 남은 채 루앙에서 아내가 죽은 지 몇 개월 후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한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시민권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대부분의 나라들과 사뭇 다른 프랑스의 법체계에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정출산으로 신문 지면을 오르내리던 유명인들의 떠들썩 한 얘기를 읽고, 보았 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 인 것 같다. 시슬레는 파리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지만 작품 하나도 팔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절이 있었다. 그의 인상주의 동료 작가들과 달리 거꾸로 흘러간 그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2. 생애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다. 나고 자란 곳은 프랑스였지만 그의 국적은 여전히 영국이다.  아버지는 실크 사업으로 부를 이룩했고 어머니는 음악 전문가였다. 시슬레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같은 사업가로 키우기 위해 시슬레가 열여덟이 되던 해, 그를 런던으로 보냅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이 이룩한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세상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하지만 자식 농사가 어디 마음처럼 쉽던가! 아무리 돈 많은 부모라도 자식의 열정을 이기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는 이치를  금방 알아버리게 된다.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공평함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든다.

 

 

 

 

 

 

 

사업에 관한 공부를 하기 위해 런던에 왔지만 정작 시슬레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기 싫은 사업 공부를 하느라 4년을 보내고 나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바로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한다. 자신의 뜻을 확고히 실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초창기 스위스 출신의 샤를 글레르의지도를 받게 되는데 어떤 평론가들은 샤를 글레르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도한 학생들이 훗날 인상파의 주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고전주의의 획일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풍경을 그립니다. 그런 그들을 지칭해 '외광파'라고 부르지요. 글자 그대로 풍경을 그리더라도 완성은 스튜디오에서 하던 당시 관행을 거슬러 야외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햇빛과 공기의 흐름을 그대로 살려 그려내던 화가 일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지게 됩니다. 일반 대중들에게 매우 낯선 기법이긴 했지만 말이다. 2년 후 스승이 에콜드 보자르를 떠나자 시슬레도 학교를 그만둡니다. 퐁텐블루 숲을 찾아가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화폭에는 극적인 장관이나 빼어난 건물이 없이 그저 평온하고 소박한 주위 풍경만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살아생전 이름을 날린 적이 없고, 사후에도 그 명성이 다른 동료들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그래도 '인상주의의 교과서'로 꼽히는 건 그의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중 ,<모레의 포플러 나무길,1890>은 세 번이나 도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림 대여 중에 분실된 걸 되찾기도 하고, 미술관 큐레이터가 공범이 되기도 하고, 무장 괴한들이 훔쳐 가기도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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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레 부부의 초상(Alfred Sisley and his wife,르누아르, 1868)>

 

 

 

 

 

 

 

 

 

 

시슬레는 동료들보다는 생각보다 빨리 살롱전에 입상합니다. 다음 해 시슬레는 브르타뉴 출신의 마리라는 여인을 알게 되는데 모델이자 프로리스티였던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들 사이에 아들 피에르와 딸 쟌느가 태어나고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렸지요. 당시 카페 게르브아(the Cafe Guerbois)에 자주 드나들면서 에두아르마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들과 깊은 교우를 맺습니다. 이듬해 살롱에 또다시 그의 그림이 당선됩니다. 상업적 성공이나 지명도는 아직 낮았지만 연거푸 살롱전에 당선이 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점점 굳혀가고 있었죠.  동료화가인  르누아르가  이런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보기만 해도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고 그림 같은 한 쌍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딱 ' 여기까지입니다. 그들 인생의 절정의 시간은 전쟁이란 외재변수를 만나 원치 않은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고 갑니다.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1870)이 터졌습니다. 시슬레는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피신을 갑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은 망하고 그의 집은 불에 탔거나 약탈을 당해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이 안타깝게도 그 당시 유실되고 맙니다. 이 전쟁은 시슬레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바로 경제적 상실이었죠. 전쟁 전까지는 모네와 르누아르 등이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시슬레는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유롭게 취미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그림을 그렸던 거죠.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요. 이후 시슬레는 유명한 화상 뒤랑 뤼엘(Paul Durand-Ruel)을  만나지만, 경제적인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습니다. 남은 여생동안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대신 이 시기 친구들인 모네(Claude Oscar Monet)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활발한 작업을 하며 맘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 서쪽의 마를리(Marly) 숲 근처의 루브시엔 (Louvueciennes)마을에 살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쉬렌의 센강(The Seine at Suresnes, 1877)

 

 

 

 

 

 

 

 

흰 구름이 마치 팝콘을 흩뿌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빨래 거품이 몽글몽글 생기는 장면과 흡사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평화로움은 첫 번째로 드는 감정이고 완만한 능선과 다리 그리고 배 한 척의 고요함을 하늘의 구름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이 역동적입니다. 화폭의 절반 이상이 구름이라 손가락으로 빨간 하트라도 그려대고 싶습니다.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는 센강 주변 쉬렌 지역입니다. 파리 서쪽에 자리를 잡은 쉬렌은 시슬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지역입니다. 왠지 다리 위에서  센강 아래로 뛰어내리며 수영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맑은 강물을 보니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이고 그 위로는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하늘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하늘이고 실제로 하늘을 쳐다볼 때처럼 눈이 부십니다. 이렇듯 인상파 화가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에 매료되었고 그런 빛을 그림에 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림의 절반을 하늘로 처리해서 그림 전체에 담은 빛은 그 어느 작품보다 풍부합니다. 주변의 정적인 배경들과 달리 움직이는 작은 배 한 척이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가고 있어 그림에 또 다른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습니다.

 

 

 

 

 

 

 

 

 

 

 

 

 

 

 

 

모레의 교회(Church in Moret, 1889)

 

 

 

 

 

 

 

 

모레 쉬르 루앙은 시슬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마치 모네의 낟가리 연작이나 뤼앙대성당 연작을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그는 이 교회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서서히 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남은 햇빛은 우뚝 솟은 교회의 허리까지 밀려 올라갔습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대한 성당 앞에서 더욱 작아 보이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어 감사한 귀갓길이 되길 희망해 봅니다.

 

 

 

 

 

 

 

 

 

3. 나가기

 

 

 

 

대부분의 화가들의 말년을  보면 인정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년고생을 하고 말년이 안정되는 삶과 초년에 부유하고 말년이 초라한 삶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 역시 전자를 택하고 말년은 편안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부자 집 도련님의 로 살 던 사람이 나이 들어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으니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쏜살같이 곤두박질치는 그런 느낌이랄까!  가끔 그의 그림을 사주는 이도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릴 뿐이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고자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겠죠. 좀처럼 나아질 기미 없이  근근이 살아온 그의 시간이 그래서 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가 봅니다. 대부분의 그림 값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 역시 그가 죽고 난 뒤, 작품 가격이 오릅니다. 뒤늦게 그가 위대한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평가된 것이지요.  900여 점의 유화와 100여 점의 파스텔화를 남긴 그에게  다소 늦었지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 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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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무슈, 지팡이 두고 가셨구려"

"인간은 추악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coffee pot"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아웃사이더>에서 "괭하니 검게 반짝이는 눈은 OOO의 그림을 보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하고 배즈 루어먼이 연출한 2001년 뮤지컬 영화.

 

 

 

 

 

위 다섯 가지 힌트의 주인공 이름은 바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이다. 그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툴루즈 가문 출신의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Alphonse Charles, Count of Toulouse-Lautrec-Monfa, 1838~191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툴루즈 가문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열두 동료(Charlemagne's twelve peers)로 불리던 프랑스 최고의 대귀족 가문이었고 그들의 수장인 툴루즈 백작은 한 때 남프랑스의 1/3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영주였다. 긴 이름만큼이나 유서 깊은 집안에 태어난 장남이니 얼마나 귀히 여겼겠는가! "작은 보석'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로트렉이  계단에서 넘어진 후 기본적인 성장이 멈추기 시작했고, 12세에 왼쪽, 14세에 오른쪽 대퇴골이 부서져 로트랙 다리는 그날 이후로 성장을 멈추게 된다. 반신은 성인의 몸, 하반신은 아이의 상태였다고 한다. 상상해 보라.  남들이 보기 영락없는 "coffee pot" 모양새다. 집안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행해졌던 근친상간의 혼인이 문제였던 이유도 있다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장애인이란 천국과 지옥만큼의 열등감의 교차가 그를 어떤 삶의 장으로 이끄는지 한 번 따라가 보자.

 

 

 

 

 

 

 

2. 생애

 

 

 

 

 

 

명문귀족 가문이었지만 장애인인 아들을 둔 어머니는 고민이 참 많았을 것이다. 로트렉에게 그래도 다행인 부분이 엄마라는 존재가 든든하게 뒷 배를 봐 주고 계시다는 부분이다. 흔히들 말한다. 아버지는 잘 난 자식을 앞세우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아픈 손가락을 먼저 챙긴다고 말이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아픈 손가락 장남 로트렉이  미술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10살때부터 미술을 배우게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에게 미술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성장이 멈춘 아들에 대한 집안의 냉대를 피해 몽마르트르에 집을 얻어 아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비록 온전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성만으로도 결핍은 어느 정도 메꿔지리라 생각된다. 그는  카바레 무랑루즈의 한쪽 구석에서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명문가 차림에 몸은 왜소증 환자이니 매일 아리랑 곡선을 그으며   버텨나갔을 그의 일상이 우리의 삶 보다 더 힘겨웠을 생각에  가슴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다. 어디다 속시원히 하소연해 볼 수 도 없다. 그저 하루를 버티며 바뀔 것 같지 않은 냉랭한 현실에 원망, 분노, 체념이란 감정들이 섞이어 젊은 로트렉의 영혼을 잡아 흔들어 댄다. 그래서일까? 그는  더욱 자유 분방한 성생활과 알코올 의존증에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킨다. 다행인 점은   앙리 마리 레이몽드 드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긴 이름만큼이나 대조되는 그의 왜소증이   그를  더 민첩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한 꺼풀 벗겨진 눈과 마음으로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아름답게 미화하지도 않고 추하다고 나무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덤덤이 말이다.

 

 

 

 

 

 

 

 

 

 

 

물랑 루즈(Moulin Rouge),1891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나고 ,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벨에 포크(Belle Epoque) 시대로 여가와 유흥문화가 확산됐고, 자연스레 몽마르트로에는 물랭루주와 같은 댄스홀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고, 즐거움과 쾌락을 찾는 장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몽마르트르에 문을 연 물랭 루즈는 "빨간 풍차" 라는 뜻이다. M을 크게 사용하여 물랭 루즈의 상호를 세 번 표현했는데 춤을 추는 여자, 위의 라 글뤼(La Goulue)는 물랭 루즈의 유명한 댄서 이름이다. 그녀는 당시 시골에서 올라와 캉캉춤으로 인기를 끈 무희였다고 한다. 포스터에는 스타 캉캉춤 댄서 인 ' 라 굴뤼(La Goulue)와 '뼈 없는 발랑탱(Valentin Desosse)'이란 남성 댄서가 묘사되어 있다.  이 포스터는 공개되자마자 충격과 논란을 부러 일으켰고, 거리 곳곳에서 포스터를 떼어 가려는 사람들로 소동이 일어났으며,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지나가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보시다시피 라 굴뤼가 대중의 눈앞에 엉덩이와 속바지를 훤히 드러내는 낯 뜨거운 포즈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로트렉이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라굴뤼가 늘 금발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헤어스타일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은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다. 덕분에 라 쿨뤼는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캉캉춤 댄서가 된다.  처음 3000장 정도를 제작해서 파리 시내 곳곳에 붙인 이 포스터는 로트렉의 첫 번째 채색 석판화였다. 포스터 제작을 위해 쓰인 석판화는 1796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배우이자 시인인 알로이즈 제네펼더(1771-1834)에 의해 우연히 발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 미술의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 고전적 의미의 마지막 대가이자 전통적 회화 형식을 해체한 최초의 근대 화가)는 석판화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 거의 최초의 미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석파화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가능해지면서 19세기 중엽부터 석판화를 상업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원색 석판 포스터는 1869년 프랑스의 쥘 셰레(Jules Cheret,1836-1932, 모던 포스터의 아버지)에 의해 제작된다. 이후 19세기 포스터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근대적 개념의 포스터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무튼 포스터가 붙고 난 다음 날 로트렉의 이름은 파리 시내에 쫙 퍼지게 되었는데 '거리의 예술'이라고 하는 현대 길거리 포스터의 시초가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캉캉 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고, 물랑 루즈의 포스터 등 석판화로 상업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로사 라 루즈(Rosa La Rouge,1887)

 

 

 

 

 

 

 

 

 

 

 로자 라 루즈라고 불렸던 여인으로 매춘부였다. 로트렉이 가장 좋아했던 모델이었는데 그녀는 빨강머리였다. 그의 작품에는 빨강 머리 여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빨강 머리를 성적인 것과 연결한 그의 취향 때문이다. 그녀가 로트렉에게 매독을 안겨 준 여인으로 되어있고 로트렉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중의 하나였다. 이 시기 고흐와 교류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 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 무용수나 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 이와 같은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앙리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Eduardo Vuillard, 1868~1940)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매춘과 더불어 앙리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그냥 마시는 것도 아니라 술에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스타일. 그러다 개발한 게 독하기로 소문난 칵테일 어스퀘이크.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반 고흐가 환청으로 귀를 자른 것처럼 로트렉도 과대망상 증세가 심해지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이상한 돌발 행동들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작품수는 현저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린 그림들에선 뭔가 우울함과 절망감이 많이 느껴지고 더 이상 신선한 새로움을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광대 차우 카우(At the Moulin Rouge, The Clowness Cha-U- Kao,1895)

 

 

 

 

 

 

 

 

 

 

 

물랭루즈의 여자 어릿광대 차우카오이다. 동양적인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물랭루주의 어릿광대로 유명했다. 이 여인 역시 일하는 여성으로서 당시의 무희나 매춘부들처럼 천한 계층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 그녀의 자세나 태도가 그녀의 당당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로트렉이 원했던 자유가 그녀에게 있어서 신분차별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다.

 

 

 

 

 

로트렉의 시선은 자세히 보면 연민과 냉정함이 섞여있다. 그는 다른 후기 인상하 화가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화법을 가지고 있다. 윤곽선을 그리고 길고 가는 붓으로 채색하는 그의 작업 방법은, 순간 동작을 아주 빠르게 스케치하는 능력과 어울려 그만의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의 이런 화풍은 나중에 표현주의 작가들의 전범이 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나기 4년 전부터 로트렉은 화실에 있는 시간보다 바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노르망디 근처에 있는 휴양소에서 요양을 했지만 술을 끊을 수는 없었다. 37세 생일을 석 달도 남겨 놓지 않았는데 로트렉은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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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기

 

 

 

 

 

로트렉은 키는 남보다 30cm 정도 작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어느 누구보다 날카롭고  관찰력이 뛰어난 뎃생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희와 가수 등의 모습을 신랄하고 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감출 것 없는 세상을 화폭에 옮겼고,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박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옆에 나란히 않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 위로 날카롭게 통과한다. 그는 자신이 154cm에서 성장이 멈춘 육체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 자신을 견디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로트렉은 20년도 안 되는 화가로서 삶에 737점의 유화, 275점의 수채화, 363점의 포스터와 일러스트 등 5084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더 이상 홀대받거나, 조롱거리가 아닌 자유로운 삶이 있는 곳, 서커스단이나, 물랭루즈의 무희들 세계 속으로 들어가 소외받고 천대받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림을 그렸다. 아무런 허식 없이 생명과 생활의 리듬 그대로를  그려낸 것이다.  정상인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그들의 일상을 왜소증 환자라서 그들의 눈높이로 속살을 드러내 줌으로써 삶이 생존이 아닌 예술로 승화되었다. 속필과 생명의 눈깜박임 같은 생생한 색채, 그리고 인간 관찰의 산뜻함이 그의 작품을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구별되게 한다. 색상이나 선의 복잡함을 덜어내고 강조할 부분만 그려내어 주제를 명확히 하는 그의 스타일은 어쩌면 주인공으로 주류 사회에 살고 싶었을 그의 또 다른 욕망의 표현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눈높이 사랑의 집합체 로트렉!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의 그 만의 스토리가 있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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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세잔의 정물화 그림을 처음 보았던 학창 시절 그의 그림이 참 만만해 보였다. 어쩐지 미술학원 같은 곳에서 아직 기본기가 덜 닦인 초보 학생이 실수하듯 그려 낸  느낌이 들어 '저 정도면 나도 그리겠네.' 하며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다. 늘 보아온 고전주의 시대 사진같이 정교하고 안정적인 구도가 내 눈에 더 익숙했고 편안함을 가져다주어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교과서에 쓰인 세잔의 타이틀은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하며 한껏 그를 치켜세워 주고 있었다. 일반인 우리의 눈과 달리 일부 전문가들은 세잔의 그림들이 모더니즘 페인팅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라 얘기한다. 해석이 필요한 미술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도 있었으니 말이다. 

 

 

 

 

 

 

IT 분야에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iphon을 통해 혁명의 아이콘 역할을 했다면 미술분야의 폴 세잔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iphone을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시작된 스마트 폰의 빠른 보급은 안드로이드 체제의 Google과 함께 전 세계의 폰 소지자들에게 개인의 힘이 더 커지고 투명성과 공정성이 커지는 특별한 경험을 갖게 해 주었다. 미술계의 폴 세잔도 오랫동안 진리처럼 여겨온 원근법을 벗어나 사고의 틀을 과감히 깨부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통로가 돼 주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관찰과 노력으로 채우고자 사과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다. 쉽게 썩지 않고 오래 관찰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쉽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않는 조용하고 완벽한 모델이라 더 그러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불러 사과처럼 앉아있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40년 사과 사랑 덕분에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다초점이라는 상상도 못 한 새로운 시도를 해보게 된다. '예리하지 못한 시골화가', '실패한 화가'라는 자괴감 속에 살았던 세잔이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도 못 받고 후원자도 없었지만 끝까지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고집세고 묵묵한 시선을 한 번 따라가 본다. 

 

 

 

 





 
2. 생애 

 

 

 


 
1839년 프랑스 남쪽 끝에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 루이 오귀스트 세잔과 미혼녀 엘리자베드 오베르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한다. 그는 고향의 기숙사 국민학교 샛조제프를  나온 후 고등학교 부르봉을 다니면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친구로 사귀게 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병약하고 남루한 옷차림에 말까지 더듬었던 이 소년에게 세잔은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된다. 둘은 금세 단짝이 되었고  세잔의 친구인 에밀 졸라는 후에 프랑스 대문호가 되어 인상주의 사조를 대중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후에 졸라가 쓴 소설[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실패한 화가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오해해 한 때 절교하기도 한다. 졸업 후 인근에 사는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성적인 반대로 포기를 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잠시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된다.그러나 자신에게 맞지 않아 힘이 들었고,  졸라의 권유와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설득으로 , 다시 미술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된다. 늦깎이로 시작한 미술 공부는 쉽지 않았고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시험에도  떨어져 혼자서 독학을 하다시피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파리에서 기오망, 피사로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당시 잘 나가 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도 했다. 특히 피사로는 세잔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림도 그리며 세잔의 재능을 독려해 준다. 그로 인해  뭐든 잘하던 게 없었던 세잔은 그나마 가장 좋아했던 그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해 준 피사로를 평생 아버지처럼 따랐다. 인상파를 이끌었던 피사로의 입김으로 세잔도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립니다. 어느 날  아돌프 부게로에게 "그리다 만 그림을 그림이라고!! " 하는 조롱을 듣게 된다. 이런 조롱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던 세잔은 자신의 내면 안에 들었 던 인상주의에 대한 의문을 평생 숙제처럼 간직하고 문제를 풀려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당시 파리는 재능 넘치는 화가들이 무더기로 활동하던 시대였다. 고향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오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인상주의 사조에 합류했던 마네, 모네, 드가, 르느와르 같은 당대의 그들과 비교하면 세잔의 그림은 너무도 평범했다.  에밀 졸라는 자신이 사귄 파리의 예술가들을 세잔에게 소개도 해줘보고 도와주려 애썼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세잔은 타인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다. 파리로 온 후 10년간 세잔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친구의 모습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그는 매년 나라에서 개최하는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매 번 거절당했다. 그러던  세잔에게 기회가 왔다.  파리 살롱으로부터 낙선한 젊은 예술가들이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그들은 젊은 화가들의 실험적인 그림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파리 살롱전에 반기를 들며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가 바로 19세기 후반 서양 미술계를 점령한 인상주의다. 주류 미술계는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특히 세잔을 겨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어둡고 우울한 색조의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았다. 시간이 흘러 세잔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들은 하나둘 인정을 받고 주류 미술계로 입성한다. 세잔만 그대로였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향했지만 시간만 흘렀을 뿐 이룬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왔으니 면목이 없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돌아와 조용한 곳에 틀어박힌 채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계속 무언가를 그려대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 갔지만 이 관계도 오래가지 못한다.

 

 

 

 

 

 

 

 

 

<에스타크의 붉은 지붕들>, 1883-1885

 

 

 

 

 

 

 



 화면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고 따뜻하다. 탁트인 지중해 바다가 붉은색 지붕들과 함께 매력적인 작품이다. 세잔은 10년 동안 약 20 점의 에스타크를 그림으로 그렸고 그중에서 12점은 마르세유만을 바라보거나 가로지르는 그림들이다. 에스타크는(L' Estaque)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서쪽으롤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어촌 마을로 행정적으로 마르세유의 생활 공동체에 속한다.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환경이 좋은 그곳을 방문하거나 그곳에서 살았다. 1870년 7월 19일 프랑스와 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가 빌린 맨션에 이후에 아내가 되는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 Hortense Fiquet)와 함께 옮겨 산 것이 에스타크 거주의 시작이었다. 그는 에스타크에 열광했고  피사로에게,

 

"그곳은  카드놀이와 같다. 파란 바다위로 붉은 지붕들이 있고... 태양은 멋지고 목적물들은 나에게  흑색과 백색으로 실루엣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푸른색, 붉은색, 보랏빛으로 보인다."

 

라고 말하며 에스타크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에스타크에서의 생활은 세잔이 웅장한 풍경화를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고 세잔은 자신의 방에서 지중해의 바다가 있는 풍경을 수없이 그려댔다. 이러한 그림들을 그리며 세잔은 점진적으로 형식과 고유색을 버리고 인상주의 와 서서히 결별할 준비를 한다.

 

 

 

 

 

 

 

 


 세잔은 어느 시점부터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인상주의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 안티 인상주의를 표방하며 독자 노선을 걷게 된다. 예를 들면 모네는 인상주의 스타일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주의를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올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비해 세잔은 어느 순간부터 인상주의 문제점을 깨닫고 전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모네라는 화가를 장인 정신에 빗대면 세잔은 당대 혁신가라고 불리는 것이 옳을 듯싶다.


 
"나는 인상주의를 박물관에 있는 예술들처럼 강하고,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고전회화의 강인함과 인상주의의 가벼움을 비교하며 어떻게 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인상주의가 지닌 가벼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방법적인 면에서 깊이 고민한다. 다시 말해 세잔이 안티 인상주의가 된 것은 인상주의를 배척했다기보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진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의 첫 번째 해결책은 내부구조의 강화다.

당시 인상주의는 주로 표면을 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부구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껍데기만 있는 사람처럼 그림이 빈약해져 버리기 일쑤였다. 세잔이 취약하다고 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래서 세잔이 생각한 해결 방안은 다시 '중심 뼈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을 원통, 구, 그리고 원뿔로 이해하기 원한다."



 
세잔은 대상의 기본 구조를 강조하면 그림이 단단하고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상을 구조적으로 단순화하여 그리는 것으로 뭔가 단단한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세잔은 인상중의가 전적으로 '표면'에만 신경 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 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결책으로 그는  '내부구조'를 더 신경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방법을 찾으려 했다.

 

 


 
두번째 해결책으로 세잔은 다초좀(multi perspective)을 내세운다.

 

 

 




 

 

 

폴 세잔, 주방의 탁자 , 1888-1890

 

 






탁자 위의 정물들을 살펴보자. 중안의 항아리를 보면 뭔가 어색하다. 이는 항아리는 약간 위쪽에서 본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바구니는 거의 완전 옆면에서 본모습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보이는 각도가 각자 다른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사물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에 있는 하얀 주전자 두 개는 불안하게 각각 약간씩 기울어 있으며. 앞쪽의 작은 레몬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이렇게 세잔의 정물화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조금씩 다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미스터리 같은 세잔의 정물화가 뒤틀려 보이는 이유는 각 사물들에 다른 초점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한 그림에 5개, 혹은 그 이상의 초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체를 하나의 사진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5개의 사진을 각자 다른 각도에서 찍은 후 다시 누더기처럼 이어 붙여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느낌에 가깝다.
  놀랍지 않은가! 오랜 미술사에서 원근법을 기본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대에 기존 관념을 부수는 시도를 다양하고 꾸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잔의 정물화는 모든 사물이 조금씩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잔이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런 방식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이상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말이다. 그의 이 시도를 이해하고 난 후 보이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많이 다르다. 그림을 본 전과 후가 확실히 다른 느낌이라서 말이다.

 

 

 

 

 

 


세잔은 각 사물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최적의 방향을 찾으려고 했다.  위의 정물화에서 세잔이 물병은 약간 위쪽, 그리고 바구니는 완전히 옆쪽에서 그리는 것이 그 대상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그림을 보면 이상한 점이 몸통은 정면으로 그렸지만 허리와 다리는 옆면을 그렸다는 점에서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 벽화에서 또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자체는 옆면이지만 눈은 또 정면이다. 이를 실제라고 생각해 보면 괴상하기 짝이 없다.  이집트 미술만의  독특한 느낌이 나는 이유도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각 인체 부위에서 특징이 가장 정확히 드러나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얼굴은 눈, 코, 입 라인이 잘 드러나는 옆면, 눈은 전체가 보이는 정면, 몸통은 양팔을 다 보여주는 정면으로 그리는 것이 우리 몸의 특징을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특징이 더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리는 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더 진실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물병을 약간 위쪽에서, 그리고 바구니는 완전히 옆쪽 각도에서 그렸던 세잔의 의도와 유사하다. 세잔도 이집트인들처럼 대상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초점을 의도적으로 택하여 그린 것이다.

 

 

 

 

 

 



 

세잔은 양쪽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대상을 왜곡한다고 의심하게 된다. 양쪽 눈 사이의 거리만큼, 미세하지만 보는 각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볼 때, 왼쪽 눈에서 본 사과와 오른쪽 눈에서 본 사과는 미세하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다. 마치 시력 검사하러 안과에 가 한쪽 눈을 숟가락으로 가리고 시력 측정을 할 때 양쪽 시력이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신통하게도 우리의 뇌는 양쪽 눈에서 받은 두 시각 정보를 정리하여 하나의 사과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앉은자리에서 검지 손가락을 세워 눈 15cm 정도 앞 정도에 두고 양쪽 눈을 번갈아 깜빡여 가면서 보라. 왼쪽 눈이 본 손가락과 오른쪽 눈이 본 손가락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 눈은 보는 각도가 살짝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눈을 떼서 다시 보면 합쳐진 이미지로 정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사령탑인 뇌가 그렇게 정리를 해 준 것이다. 이점을 세잔은 인식의 왜곡으로 보았다. 우리 같으면 ‘어, 좀 다르네.’ 하며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인식의 왜곡을 없애기 위해 다른 생각을 했다. 만약 한쪽 눈을 가리고 다른 한쪽 눈으로만 사과를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양 눈으로 볼 때  생기는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세잔의 정물화에 여러 개의 초점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잔은 다시 말해 정물화를 그릴  때 양쪽 눈으로 전체를 하나의 장면을 인식하여 그린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을 한쪽 눈으로 카메라를 찍듯 그러고 나서 다시 이어 붙여서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이만하면 천재 아닌가!  틀린 형태를 화가 세계에서 과감하게 그려낸 그의 투박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실제로 세잔의 그림은 이후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탄생시켰고 입체주의는 몬드리안의 추상화까지 이어졌으니까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적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 수욕도(The Large Bathers),1898-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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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곤 했는데,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사과 정물화처럼 과감하게 단순화한 인물과 풍경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배치한 그림이다. 가장 큰 그림들 중 하나 이고 죽기 전까지 7년을 매달렸던 이 그림은 입체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그림을 본 파블로 피카소가 2년 후 최초의 입체파 그림인 '아비뇽의 아가씨'를 탄생시킨다. 이 그림에 어딘가 낯설지만 많이 본 느낌이 든다면 세잔의 원조 분위기가 피카소의 그림에 살짝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3.나가며 

 

 

 

 

 


세잔의 미술이 위대한 이유는  첫눈에 볼 때 보기에 좋은 그림을 그렸던 고전주의 영향권에서 과감히 벗어난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미술에 위대한 발견이었던 원근법을 과감히 버렸다. 원래 도화지 하나에 원근법 한 군데 기준을 정해놓고(소실점) 그림을 그리는데  세잔은 자기 시선이 머무는 곳에 소실점을 두고 그리고 다 그리면 다시 소실점 옮기는 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본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던 고전주의나 인상파의 빛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재현에서 벗어나 원근법을 파괴했고 형태의 덩어리로 보기 시작하고 실험을 통해 단단해진다. 자기 시선이 가는 곳이 소실점이 되어 한 그림 안에 여러 개의 소실점이 있었으니 그림이 편안해 보이진 않지만 대상을 그대로 재현해야 했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 위대한 발견이 된다. 이 시도는 후에  마티스의 야수파를 탄생시키고 피카소 같은 걸출한 인재에게 영향을 미치며 현대 미술이 화려하게 꽃 필 수 있도록 문지기 역할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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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광 아래서 작업을 완성하지 않는다. 외광에서는 습작을  한다. 인간의 정신에 주는 시각인 유니티는 스튜디오 안에서만 발견되어진다. 외광 아래서는 오직 즉각적으로 눈에 부딪치는 자연의 현상만을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인상 자체가 내적인 느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스튜디오에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순간적인 인상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속 심상과 융화를 이룬 유니티이다.

-1892, <라르뷔 블뢰(La Revue bleue>지의 폴 그셀(Paul Gsell)과의 인터뷰-

 

 


인상주의 화가들을 일렬로 쭈욱 세워놓으면 가장 형님이시다. 마네, 모네, 르느아르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상주의 작가들과 함께 8차례의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화가다. 도시를 관찰하는 산보자의 시선으로 시대적 변화를 읽고 트렌드를 반영하려 평생 애썼던 화가다. 드라마 같은 서서도 성격이 괴팍하지도 않다. 문안한 매력에 스토리가 약해 다소 저 평가된 면이 있다. 수염까지 길게 기른 그의 자화상을 보고 나면 어쩐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인상주의 내부에서 실제로 그의 역할은 개성 강한 인상파 화가들을 품어주고  다독여주는 포용력 강한 아버지 역할이었다. 고집세고 독한 세잔, 나쁜 놈 콘셉트 고갱, 집요하게 점찍어 대던 쇠라까지 골고루 포용한 친화력 최고인 인상파 중의 인상파 형님이시다.






성공한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라셀 만자노 포미에의 아들로 ,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동부 세인트 토머스섬에의 중심가 샤를 로테 아말리 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미국령에 속하고 버진 아일랜드로 불리는 섬이다.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 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국적인 섬과 그 곳의 주민을 스케치하였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Caracas)로 도망쳐서 2년 동안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 멜비(Fritz Melbye)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4년 8월 세인트토모스섬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열대 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인데, 대담하게 그린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 뒤 전 생애에 걸쳐 그의 미술의 특징이 된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보여 주고 있다. 





 
1855년 가을 파리로 갔으며,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Exposition Universelle de 1855, Paris World's Fair)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풍경화 제작을 시작하고 르 살롱(le Salon) 프랑스 미술가전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가 다녔던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프랑스 국립 미술 학교)나 아카데미 쉬스 (Academie Suisse)에서는 평범한 전통 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껴 코로를 추종하였는데,  코로는 르 살롱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일컫는 것을 허용해 준다. 이 무렵 트렌드는 바르비종파(Barbizon,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활동한 풍경화가의 집단 또는  퐁텐블로 파(School of Fontaine bleau)로 불렸다. 당시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과 사실주의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에도 매력을 느꼈던 시기이다. 피사로의 예술 세계에 밑그림으로 깔린  탄탄한 기본기는 두 화가를 포함한 사실주의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퐁투아즈의 잘래 언덕(Jalsis Hill, Pontoise>,186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잘래힐, 퐁투아즈(Jalais Hill, Pontoise)>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던 시기의  피사로는 퐁투아즈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곳은 파리 근교의 소도시 중에서도 유독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되던 시골 마을이었다. 그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퐁투아즈의 전원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렸다.  비평가들과 동료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프랑스의 대표화가 반열에 오르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겸 문화평론가 에밀 졸라에 의해 "실기와 힘에 대한 진귀한 시"라고 묘사하면서 모범적인 현대적 풍경으로 칭송받았다. "이 작은 계곡, 이 언덕은 영웅적인 단순함과 솔직 담백함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평범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졸라는 피사로가 시골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이런 식으로 썼다.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은듯한 섬세한 표현이 눈에 쏙 들어온다. 한 여름 땡볕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는 양산을 쓴 흰 옷의 여인에게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묻고 싶어지게 한다. 한편 피사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갔는데 , 그곳에서 런던에 와 있던 모네를 만나고 또한 영국의 국민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를 만나게 된다. 그의 빛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에 피사로는 깜짝 놀라고 이후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의 문을 여는데 큰 영향을 받는다.

 

 




 
당시 화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임이 있었다.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서로의 작품에 강하게 비판도 하고 옹호도 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예술가들의 사적인 토론문화와  네트워크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서 피사로는 젊은 화가인 르누아르나 모네와 함께 활동한다. 주로 인상파들의 아지트로 여겨진 카페 게르부아는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있었던 카페로, 살롱 데 르퓌제(낙선전, 1863년 파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를 계기로 마네의 주변에 모이게 된 예술가들이 1866년쯤부터 이 카페에서 매주 1회씩 모임을 가졌다. 그 당시 몽마르트르 주변의 물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싸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젊은이들이나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모임은 근대 미술의 요람이었으나, 1868년부터 쇠퇴하여 2년 뒤에는 없어졌다. 당시 마네파 또는 바티뇰 그룹(The Batignolles Group)이라고 불리었던 이 모임은 , 마네를 중심으로  많은 작가, 평론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인상주의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루브시엔느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한다. 파리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동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파리 교외에 자리를 잡는다.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고집쟁이 화가 세잔이 퐁푸아즈에 와서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전한다.  솔직히 말해 피사로의 그림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주요한 모티브로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 강의 풍경을 사용해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도 해본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뒤랑뤼엘이 그의 그림을 팔아 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맏아들 뤼시앙(Lucians)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쓰곤 하였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그의 노력이 재정적 어려움을 만나 힘이 들었던 시기이다.

 

 

 

 


 
피사로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점에 특색을 보였으나 양식과 기법의 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자신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쇠라와 스스럼없이 교류하며 공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 동료들의 반대에도 그가 인상주의 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마지막 인상주의 미술전에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Jattle)]을 출품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무명 작가였던 쇠라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작품은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작으로 남았다. 요절하기 전 그가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준 것이 바로 피사로였던 셈이다. 







<퐁투아즈 곡물 시장(The Cereal Market in Pontoise)>,1893,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퐁투아즈는 파리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피사로가 프랑스로 넘어와 결혼한 후인 1872년부터 고향처럼 살았던 곳이다. 파리 근교라 파리를 왔다 갔다 하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 또한 세잔과 고갱이 자주 피사로의 퐁투아즈의 집 가든에 와서 함께 그림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점묘법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쇠라가 찍은 점처럼 완전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50대의 선배 화가가 후배 화가를 찾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하는 모습이 까미유 피사로의 또 다른 매력이다 비록 임팩트하게 기복 있는 삶을 살지 않았어도 그의 겸손함이 빛나 보이는 장면이다.  자신 스스로가 인상주의였던 피사로가 새로운 인상주의의 등장과 방향에 대해 직접 실험해 보고 고민해 봤던 흔적으로 보인다. 점과 같이 짧게 끊어뜨리는 붓터치로 점묘법의 느낌을 살려 그렸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풍경은 언제 봐도 매력적인 장소다. 우리네  시끌벅적한 시장의 분위기와 닮아 더 정감이 가는 작품이다. 신성한 노동의 힘으로 소리치고 흥정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여인네들 모습에 사람냄새 물씬 풍긴다. 우리를 앞으로 보고 앉은 두 여인 때문에 한 순간에  퐁투아즈 시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얼마냐고 물어봐야만 할 것 같다. 오른쪽으로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여인들에 둘러싸여 흥정을 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할아버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곡물의 주인장이거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구경하는 인물로 보인다. 왼쪽의 할아버지와 중앙의 여인은 피사로의 또 다른 작품에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저 뒤에 가득 메운 시장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시장이 더욱더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밀레를 닮고자 했던 피사로는 밀레가 농경지에서 일하는 농부를 그렸듯이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이런 식으로 그려냈다.

 

 

 


 
쇠라의 점묘화법은 대비되는 색들을 작은 색점들로 촘촘하게 찍어 빛의 움직임을 묘사한 기법인데, 질서정연하게 찍힌 순수색의 작은 점들은 너무 작아서 작품을 감상할 때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단지 화면 전체가 빛으로 아른거리는 효과를 자아낸다. 피사로는 이 기법을 채택하여 5년 동안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은 미술 상인과 수집과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화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이 기법을 포기하고 말았지마, 그 이유는 그가 부딪힌 반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충실하게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토록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제멋대로인 자연의 인상에 충실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Jeanne Holding a Fan], 1874

 





 메네트라는 별명을 가진 피사로의 막내딸 잔-라체은 짧고 병든 삶 후에 8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피사로가 아내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딸의 건강이 서서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그림들은 그의 가장 가슴 아픈 그림들 중 하나이다. 그녀가 죽기 몇 달 전에 그린 이 초상화에서 피사로는 야외에서 놀기보다는 난로 근처에 앉아 있는 그의 딸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 부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 귀함, 셈세함, 그리고 극동 예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덜 인상적인 피사로는 그와 그의 인상파 동료들이 즐겼던 일본 목판지문의 비대칭성을 이상한 각도의 의자와 메네트의 약간 중심에서 벗어난 머리 기울기와 함께 포함하고 있다.

 

 

 

 


1893년 3월 뒤랑뤼엘은 자기의 화랑에서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 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퐁네프의 오후 선샤인(Aternoon Sunshine, Pont Nerf)],1901

 





 카미유 피사로는 1903년에 세상을 떠났고 [퐁네프의 오후 선샤인]은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다. 피사로는 나이가 들면서 불행히도 시력에 문제가 생겨 실내에서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 그림 또한 그의 방에서 그린 훌륭한 예이다. 피사로는 백하점과 그들의 집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퐁네프의 바쁜 순간을 잡아냈다. 그의 빠른 붓놀림이 그 분주한 장면의 에너지를 훌륭하게 포착했다. 세상의 변화를 누구보다 세심하게 관찰한 산보자 피사로답게 근대화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주변풍경들을 아파트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마차 행렬, 증기 기관, 굴뚝 위의 솟아오르는 공장 연기 등 당시 급변하는 사회 현상을 말해주고 있었고 현재의 디지털 문화, AI로 인해 놀라움과 경이로움, 불안함 등이 함께 공존하듯 당시 파리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한눈에 사로잡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의 풍경화를 보면 온유한 성품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감동을 준다.

 

 

 

 

74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모네나 르누아르와 같은 동료 작가들이 이룩한 부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작품 판매가 부진해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피사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 동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고갱, 쇠라, 세잔,고흐, 마티스 같은 후배 작가들을 지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리 미술계에서 푸대접받던 세잔을 퐁투아즈로 초대해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인상주위 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폴 세잔이 " 신과 같이 너그러운 사람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세잔을  보듬어 준 이가 피사로다. 고흐가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와 밝은 색채,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미술을 지도한 사람도 피사로였다. 그에게 정신과 의사였던 가셰(Paul Gachet) 박사를 소개해 준 것도 그였다. 개성 강한 인상파 화가들을 다독이고 후배들을 적극적으로 키워 전시회 참여를 독려하고 이로 인해 인상주의 미술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던 이가 바로 까미유 피사로다. 피사로가 도움을 주었던 다섯 명의 작가들은 모두 20세기 현대미술을 이끈 거장들로 성장했다. 고갱, 고흐, 세잔, 쇠라는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20세기 현대 미술을 견인한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피사로 자신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젊은 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점은 되새겨볼 만하다. 나이와 출신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파리 미술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사로의 튀지 않은 인생에 그의 작품까지 매력 없는 취급을 한다면 분명 잘못된 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성품을 닮은 풍경화와 동료, 후배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배우고 적용하는 삶을 살았던 피사로의 겸손한 시선에 엄지 척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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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예술감각이군. 모리조의 작품보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살린 우아한 그림을 볼 수 없을 걸세."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 당시 모리조의 그림을 평가한 정치가, 미술 평론가 앙투안 카스타냐리의 말 중-

 

 

 

19세기 남성 중심 화가들이 모여서 예술에 관해 토론을 벌이던 주말 모임에 여성 화가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경직된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주인공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1841-1895)는 그런 면에서 복이 참 많은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프랑스 부르주아에서 유명한 로코코 화가 장 호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의 위대한 증손녀로 태어났다. 23세의 나이로 파리 살롱(Salon de Paris)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스승인 조셉 기하드( Joseph Guichard)로 부터 대단한 화가가 될 거라는 칭찬도 받았다. 집을 살롱으로 꾸며 인상파 화가들을 불로 모았고 드가의 권유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여성 화가로 유일하게 참여한다. 이 말은 곧 현대 예술의 태동을 알린 인상파 첫 전시회에 나란히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는 프랑스의 화가로,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에드가 드가(Edgar Degas), 폴 세잔(Paul Cezanne),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및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sley)를 포함한 인상파 그룹의 일원이다. 남성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인물이고 여정이 남다른 여성화가이다. 또한 카밀 코롯(1796-1875)의 제자이자 마네의 뮤즈였던 여인이다. 마네의 모델로 제자로 르느아르,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화가로 성장한다. 아마도 여성화가이 전에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에 실력까지 받쳐주니 함께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여성이 그림을 그리면 작품을 보기 전부터 거부하는 현상이 강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파리 살롱전에 6번이나 계속 당선된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주로 그녀의 그림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사생활, 정원에 대한 취향, 그리고 여성들이 한 가정적인 일들을 묘사하고 표현해 냈다. 

 

 

1874년 처음 시작된 인상주의 전시는 1886년까지 여덟 번 개최되었는데, 모리조는 딸 쥴리(Julie Manet)가 태어난 1879년을 제외하고 매 회마다 작품을 내놓았다. 결혼 후 화가의 꿈을 접은 언니와 달리 남편 외젠 마네의 외조로 모리조는 화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그밖에 런더너 벨기에의 미술협회 등 다른 미술단테의 전시회에도 참여하며 1892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자화상(1885년)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그녀의 자화상에서도 느껴지듯이 작품에 '나,여성' 이라 쓰여있진 않다. 오히려 모네, 마네, 그리고 렘브란트의 느낌이 조금씩 묻어나 있다. 자신감과 대단한 붓놀림이 화려하고 빠르다. 거침없이, 혹은 거의 신들린듯한 붓놀림이 느껴질 정도로 모리조의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녀 자체가 상류층 여성에 속하다 보니 여성들의 여가나 삶이 주로 그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다. 블루와 옐로우는 그 당시에 흔치 않은 색상으로 그림에 잘 등장하지 않는 색채인데 모리조는 세룰리안블루(Cerulean Blue), 카드뮴 노랑(cadmium yellow)등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다. 재정적 어려움이 없으니 다양한 시도에도 주저함이 없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1800년대 중반, 튜브형 물감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인상파 화가들과 같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스튜디오(작업실) 밖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제품 개발이었다. 튜브물감의 보급으로 모리조는 실내 작업실을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고 야외 작품에서 드러난 그녀의 인상주의적 작품은 빛이 느껴짐은 물론 흔들리는 바람까지 느껴지는 듯 그려져 있다. 이렇게 모리조는 대가들이 기피하는 색들을 지그재그로 깃털처럼 날리는 듯한 붓터치 기법으로 한 색조가 다음 색과 충돌할 수 있게 겹치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그림을 잘 살펴보면 약간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붓터치의 색상들이 교차되며 겹쳐 완성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줄리(1894),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osot)

 

 

 

 

 

모리조는 마네를 만난지 6년의 세월, 싹트는 사랑을 감추며, 33살이란 매우 늦은 나이에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Eugene Manet)와 결혼함으로써 마네와는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된다. 그녀는 결혼해 딸 줄리 마네를 낳는다. 그녀는 딸의 모습을 다양하게 광범위하게 수년을 그렸으며 딸의 변화를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줄리 마네]는 모리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94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생각하는 줄리의 멍한 모습에 집중시키기 위해 붓질을 문지르는 스타일을 많이 썼고 모리조 특유의 거친듯한 붓놀림은 절제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줄리의 폐렴을 간호하다 본인이 걸려 사망에 이는다. 그녀의 나이 51살, 실력이 무르익을 나이이고 작품의 정체성이 분명해질 50대에 생을 마감한다. 재능과 아름다운 외모, 부모와 시부모의 재력, 천재 화가 마네의 사랑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녀는, 그녀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류층으로 시집가서 남편의 아내로 사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당연한 삶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삶을 과감히 깨뜨리고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자유분방함의 소재가 그녀의 주변이었고, 풍부한 파스텔 톤의 색채와 유려한 붓놀림으로 파리 근교의 풍경과 가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일상 속의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생기 가득한 색채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아버지였던 외젠 마네도 일찍 세상을 떠난 상태였으니 줄리 마네는 모리조의 죽음과 함께 16살에 고아가 된다. 다행히 평소 줄리를 예뻐한 '친절한 르누아르 아저씨"가 줄리의 후견인이 되어 평생 그녀를 보살핀다. 훗날 줄리는 어머니가 남겨준 자랑스러운 작품을 알리고 회고전을 하는데 주력한다.

 

 

 

 

 

 

 

[제비꽃을 장식한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에두아르 마네,1872, 오르세 미술관

 

 

 

 

 

 

모리조가 살아온 19세기는 이전 시대에 비해 여성 작가들이 많이 활동한 시기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성 작가들의 활동 범위는 많이 제한적이었던 사회였다. 모리조의 부모님이 모리조가 마네의 모델이 되는 것을 허락한 이유 역시 모네라는 당시 유명 남성 작가의 모델이 되는 것이 모리조의 화가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기 때문인 것 처럼, 당시 19세기 사회는 여성 작가 혼자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모리조는 마네라는 영향력 있는 남성 작가의 도움을 받아서 인상주의 화단에 진입한, 동시대 다른 여성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운이 좋았던 화가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당시 마네는 천재였지만 파리 미술계의 반항아로 더 알려진 화가다. 자유분방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그들의 우상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인상파의 그림을 예술로 취급하지 않은 모순된 면도 동시에 지닌 화가였다. 마네는 당시 그녀에게 직업적 영감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지만, 그녀를 틀에 가두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일화로 베르트 모리조는 1970년에 [어머니와 언니]를 작업했는데, 마네가 그녀의 그림을 비웃으며 붓을 댔다고 한다. 요즘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로 '선을 세게 넘은' 마네에게 소송이라도 걸었겠지만 당시 그녀는 그의 무례함을 지적하기보다 자신의 작업을 폄하였다고 한다.  그의 행동이 자신의 작업을 더 완성시켜주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녀는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해 불안해 떨었다고 한다. 직업란에 화가라 적지 못했고, 무덤의 묘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료 화가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자주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없애버렸다고 한다.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 그녀의 작품이 독특한 감각을 지닌 화가임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워낙 남성화가 위주로 기록되고 평가되는 시스템 안에서 인상주의 여성화가로 제대로 서있기가 어려웠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사후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을 하면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모네, 드가 ,피사로와 견주어도  뛰어난 명작임은 의심할 수 없다.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현실에서도 느끼지만 사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 있는 여성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오롯이 그의 능력으로 얻은 산물일지라도 여성으로서 얻은 권력과 전문성은 끊임없이 지금도 그 출처를 의심받으며 도마 위에 오르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평탄했을 모리조의 삶도 사회적 분위기에 갇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면들도 많아 보인다. 누군가의 한 발자국 앞섬으로 인해 다음 세대는 좀 더 공정할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 누군가의 편견을 깨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만들어 가고 있을 또 다른 모리조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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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사이에 여성이 끼여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요즘은 동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인정을 받고 있지만 여성 작가들이 등장해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대두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구 여성 작가들이 등장한다. '미국 인상주의의 어머니'로 불리는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와 같은 인물이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접한 19세기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왜 이렇게 호감을  사게 되었는지 잠깐 살펴보자. 첫째, 인상주의 화가는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는 것이다. 둘째, 햇살 아래 수시로 변화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그림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풍경, 나무, 집뿐 아니라 거리풍경과 철도역 장면에까지 골고루 확대 적용한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그림을 통해 그 시대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던 것 같다.  모유수유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 등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 일상의 일들이 그녀 특유의 따뜻한 붓터치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의 그림 대부분에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카세트가 아이 엄마였겠거니 생각하지만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독신으로 산 이유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전문화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의 길을 선택한 대신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 그리고 자기 성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민 중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을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에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적어도 그다지 많은 제제와 편견을 받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매리 카사트(Mary Cassatt,1844-1926)는 현재의 피츠버그인 펜실베니아의 알레게니 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과 좋은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로봇 심슨 카사트(Rovert Simpson Cassatt)로 부동산 중개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캐서린 케소 존스턴(Katherine Kelso Johnston)의 집안은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메리의 엄마 캐서린 존스턴은 미국 상류 사회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학위도 있고 교양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였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7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2명은 어린 아기일 때 죽었다. 이후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처음은 펜실베이니아의 랜캐스터로 이사를 갔으나 이후 필라델피아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6살이 되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매리 카사트는 여행을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유럽에서 5년 이상을 지내면서 런던과 파리, 베를린과 같은 여러 수도들을 돌아다녔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고 처음으로 미술과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글로벌 교육을 어릴 적부터 받은 인재상이다.  현대에 태어나도 이런 조건의 부모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울트라급 금수저인셈이다. 우선 경제적 뒷받침을 해준 그녀의 아버지와 딸의 꿈을 믿고 지지해 준 어머니의 역할에 감사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짝 부럽기도 했다.  재능은 있으나 경제적 문제로 다른 길을 선택하거나, 선택한 길을 고지식하게 걸어가도 경제적 이유로 무너지는 지인들을 삶 속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1855년 Paris World's Fair에서 처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화가 앵그르, 외젠 들라크루아, 코로 그리고 쿠르베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 그녀가 맛 본 고전주의 미술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충격을 받고  평생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생생하게 보았으니 그 여운은 상당했으리라 추측된다. 매리 카사트의 집안은 화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상당히 반대했으나, 그녀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5살이 되던 해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미술을 한다는 것이 제약이 많았다. 실제로 학원의 20%는 여학생이었는데 대다수는 사교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하나의 기술로서 그림을 배웠으며 매리카사트처럼 전문적으로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공부하는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그야말로 남편 잘 만나기 위한 재테크개념 아니었을까 싶다. 신부수업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여전히 그림을 공부했다. 교사들의 느린 교육 방식과, 여학생에 관해 생색내는 듯한 남학생들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옛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마음의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훗날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학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여학생들은 그림을 배울 때 필수조건인 누드모델을 쓸 수도 없었다.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모델을 그리며 연구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이 간다.

 

 

 

 

 

 

유럽으로

 

 

 

 

 

1866년 그의 어머니와 가족의 친구들을 보호자로 삼아 파리로 이사했다. 에꼴데 보자르는 아직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리 카사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화가들에게 개인적으로 교습을 받기로 한다. 그녀는 장 레온 제롬(Jean-Leon Gerome)에게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그는 극 사실적인 작풍과 테크닉, 이국적인 소재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모작하여 그의 예술적인 감각도 키워나갔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이 예술가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장소로 최고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에드워드 마네가 드가를 만나 인상주의 뼈대를 세운 시작점도 이곳이었다. 그녀는 작품 모작을 할 때 필요했던 '모작 허가증'을 받는다. 당시 "모작가"들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증명서로, 모작가들 중 대부분은 수입이 적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박물관을 가득 메우며 모작한 작품을 팔았다. 남녀 간 교육의 불평등으로 인해  재주 있는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내몰리고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녹록지 않았을 그 시대 여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기도 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젊은 천재들의 발걸음이 머물렀을 이 공간이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1866년이 끝날 즈음, 그녀는  찰스 채플린 (Charles Chaplin)이 가르치던  그림 교실에 합류하게 된다. 1868년 또 다른 화가 토마스 쿠쳐(Thomas Couture)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대다수가 로맨틱하거나 도시적이었다. 예를 들면 야외로 스케치 수업을 나갈 때 학생들은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소재로는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곤 했다. 이 즈음 프랑스의 미술은 점점 작풍이 변화해 가는 단계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쿠르베와 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거부하는 풍조가 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인상파 양식의 기초를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매리 카사트는 계속해서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공부했으며 10여 년간 여러 좌절을 겪으면서도 파리 살롱에 꾸준히 그림을 제출했다. 1870년대 초 그녀는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벨라스케스, 루벤스, 코르레지오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는다.

 

 

 

 

 

 

 

관람석에서 (in the Loge,1878), 미국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파리의 유명한 코미디 프랑세즈 극장 특별관람석에 앉은 한 여성이 오페라 스코프로 무대를 바라보는 낮 공연 모습이다. 검은 드레스 정장을 입은 그녀와 박스 시트 관람석의 빨간색 벨벳과 금색 장식이 그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고, 누군가 멀리에서 오페라 스코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성 관람객 모습이 이 그림의 숨은 재미 같다. 드가와 친해지며 그와 함께 발레 공연이나 오페라 공연 장소에서  여러 인물들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아주 노골적으로 자세까지 확 틀어 쳐다보는 늙은 남성의 시선이 지금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 속물이라고 하기에 나 역시 젊고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눈 돌아가듯이 그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장면쯤으로 봐줄까 한다. 대신 옆에 않아 계시는 마누라한테 티 내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1878년 카사트가 보스턴에서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이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대부분 남성들의 유사한 그림의 힘을 능가한다.'라는 글을 써서 그녀를 칭찬했다. 여성이라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귀환

 

 

 

 

 

 

1870년 늦여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알투나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직업에 대해 반대했으며 그의 생활비를 대주기는 했으나 미술용품에 관련한 비용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부동산업자 아버지가 딸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측에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활비는 대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적정선에서 타협하신 선택 같다. 그녀는 뉴욕 갤러리에 그의 작품 두 개를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71년 7월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개인 화실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초상화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6주 동안 붓을 한 번도 들지 않았으며 유렵으로 돌아갈 때까지 붓을 다시 들 생각조차 없다. 나는 이다음 가을에 어서 서쪽으로 가고 싶고 일자리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주변환경들에 고민하는 그녀를 본다. 게다가 1871년 일어났던 시카고 대 화제사건 (Great Chicago Fire)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모두 잃게 된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들은 피츠버그의 대주교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카사트에게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코레지오의 작품들을 모작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일의 대가로 받는 비용은 그의 여행비와 생화비로 충당한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매우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지금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예술가 가문 출신인 에밀리 사테인(Emily Sartain)과 함께 유럽으로 다시 돌아간다.

1874년까지 카사트는 파리의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3년 후, 그녀의 부모와 그녀의 여동생 리디아가 프랑스에서 합류했다.

여러 차례 출품했던 작품이 남성 중심 살롱에 의해 거절당했고,  그녀의 출품작 중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는 파리의 공식 미술계의 정치와 전통적인 취향을 혐오하게 되었다. 마침 화가 에드거 드가(Edgar Degas)가 그녀를 초대하여 인상파 화가로 알려진 독립 예술가 그룹을 소개하고 합류를 권유하자 그녀는 기뻤다. 그들의 그림옆에 나란히 얼굴이라도 내밀수 있어서 말이다. 특히 드가의 예술과 생각은 그녀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카새트는 인상파 운동에 있어 상당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직접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밖에도 미국에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카새트는 그녀의 형제인 알렉산더(Alexander)에게 마네, 모네, 모리조, 르느아르, 드가, 피사로의 작품을 구매토록 설득하여, 그 후 알렉산더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수집가가 되었다. 카새트는 드가를 존경하였지만, 화풍에 있어서는 드가의 화풍을 맹목적으로 모방을 하지 않고 자신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다른 인상파 화가의 영향을 받아 주위의 일상적인 삶을 표현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고, 인물들의 동작의 중요성과 함께 직관의 감각을 중요시하였다. 

 

 

 

 

 

 

 

 

편지( The Letter,1890-91) 종이 위에 동판 애쿼틴트와 드라이포인트 요판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 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1890년  4월, 카사트도 당시에 새로운 화풍을 찾던 다른 인상파 화가들처럼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에서 열린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 전시회에 참석했다. 생전 못 보던 왜색 색판화 전시를 인상 깊게 본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삶을 시리즈 연작으로  목판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연속 10 작품이나 도전했다. 그 시리즈들은 아이들 씻기고, 화장실에 있는 여성들, 차를 마시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한 여성이 책상 앞에서 방금 도착한 편지를 뜯는지, 밀봉하는지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쩐지 내 어설픈 행동양식 하나를 살짝 ~들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림 속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 역시 침으로 편지를 부쳐서 말이다. 구성은 벽지와 여성의 옷 무늬, 편지와 봉투의 종이의 균형이 보는 사람을 그림 속 가까이 다가오게 만든다. 전통적인 일본 목판화 기법 영향 때문인지 일상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에 친근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인상파

 

 

 

 

 

 

1880년대 이후 카사트는 특히 엄마와 아이들,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졌다. 당시에 투표권과 사회적 평등권, 심지어 고등교육과 복장 개혁에 이르기까지 신여성이 등장하던 계몽적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1대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지금 시대에 보더라도 꽤나 과격한 주장을 했던 나혜석(1896-1948) 화가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녀는  일본 유학 당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계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투고하는 등 당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녀 사후  여러 형태의 비판이 존재하지만 먼저 세월을 앞서간 그녀의 인간을 향한 진심만큼은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엄마의 뜨개질(Young Mother Sewing,19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언제 보아도 웃게 하는 그림이다. 아이의 볼그레한 볼과 통통한 손가락 그리고 손뜨개질하는 젊은 엄마를 보며 잠시 눈을 감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겨울이었고 굵은 대바늘 두 개로 식구들 입힐 조끼를 뜨고 계셨던 엄마 생각이 난다. 젊은 엄마들이 5-6명 이웃집 누군가의 안방에 모여 수다를 떨며 대바느질 하는 모습 말이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에 손은 재빨리 오르락 내리락하며 쉴 새 없이 코를 뜬다. 따뜻한 뜨개실의 질감과 열심히 셋바람 맞고 깨지고 있을 남편, 자식들의 홑겹의 시간을 당신들이 손수 짜놓은 옷들을 입히고 목도리를 두르고 손에 껴주며 차가운 세상을  재미난 놀이터로 만들어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제는 이런 느림의 시간이 별 것 아닌 취급을 받지만 그녀들의 마음자리가 한기 드는 겨울밤이면 맥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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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춘기였던 내 눈에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름 그 당시 파리의 최첨단 패션이었을 테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여인들의 노력은 무죄이나 어쩐지 허세 잔뜩 부린 수꿩 혹은 수컷 공작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림 속 휴일을 즐기러 온 파리지앵들은 다들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  커다란 그림 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표정도 읽히지 않고  움직임도 느낄 수 없어 어딘지  모르게 '얼음 땡 '하고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생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는 집안 대대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고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도 꽤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살 때 국립미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 징병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880년 초반부터 열심히 화가로서 활동하지만 주류예술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다른 화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세기 중반 파리 사회는 기술문명과 교통수단이 혁명적으로 바뀌어 한 나절 여행이 가능해졌다. 튜브물감의 발명으로 빛을 찾아 화가들은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거친 붓터치로 '순간 포착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같은 인물이 그들이고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점이 된다. 쇠라가 활동하던 시절  광학이론이나 색채론 같은 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과학적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색채분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방법론으로 찾은 실행기법이 점찍는 기법이었다. 일명 점묘법인셈이다. 말 그대로 점을 하나하나씩 찍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얘기다. 그것도 3m*2m짜리 대작을 말이다. 이것을 열심히  실행한  쇠라나 폴 시냑[Victor Jules Signac, (1863-1935)]과 같은 화가를 신인상주의라 한다.

 

 

 

 

 

 

 

 

 

 

 

 

 

 

 

 

그링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 Jatte),1884,미국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햇살 알갱이들이 무수히 부서져 내리는 센 강변의 공원에 40여 명의 인물이 그려진, 점묘주의의 출현을 알린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한 땀 한땀 손바느질 하는 느낌으로 점을 찍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인물들이 생동감은 온데간데없고  뻣뻣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쇠라는 2년에 걸쳐 유채 물감으로도 그리고, 스케치, 드로잉으로 다시 시도하면서 무려 70점 이상의 예비 작업을 거쳐 비로소 완성한다. 거대한 캠퍼스에 점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그려야 했으니 2년이란 시간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력은 또 얼마나 나빠졌을까! 이런 면에서 화가라기보다 과학자 혹은 수도자 느낌이 더 드는 화가다. 그림을 그린 1884년, 8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열렸던 인상파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였고, 그해 말 이 그림이 독립파 앵데팡당(Independent)에 걸렸을 때,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이 '네오-임프레셔니즘(Neo-Impressionism)이야'라고 흥분해, 처음으로 '신 인상파 주의'이름이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이 되어버리는 문제의 그림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 인상파 사이에 두 주류가 있었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 르느아르처럼 철저히 야외의 순간적인 빛을 그려야 한다는 외광파가 있었고,  반대편에 사실적인 화풍으로 극단적인 구도를 추구하는 에드가 드가파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쇠라의 그림에 외광파 모네는 반대를 했고, 드가는 찬성을 하며 카미유 피사로 같은 중재자의 부재로 결국 해산하고 만다."어떻게 해야 빛을 잘 표현할 수 있지?"에 대한 접근법이 서로 달랐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찰나와 과감한 붓터치의 그림을 선호한  외광파에게   아틀리에에 처박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정적이고 고요한 쇠라의 작품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쇠라의 점묘법은 색을 팔레트에 섞어서 바르던 기존 유화방식을 거부하고 원색의 점들을 병치시켜 그린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정체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인접해서 보라색처럼 보이는 착시효과 때문이다. 19세기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어떻게 빛과 색을 인지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했고 광학적으로 색을 분석하는 이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광학적 색채 이론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통해 점묘 분할법을 시도한다.  마치 3D이미지를 보는 듯 매우 질서 정연하고 입체적이지만 그로 인해 더 가상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전시회에 나온 이 그림을 보고 이집트 고대 그림과 비슷하다며 조롱당했다고 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간다. 오히려 디지털 세상인 지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랑자트섬은 어디일까?

 

 

 

 

 

파리 센 강 북서부 위치한 유원지로 도시인들이 콧바람 쐬러 가는 피크닉 장소였다. 19세기 파리의 브리즈와들이 근교로 소풍을 나와서 주말에 여가를 즐기는 모습은 근대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풍경이었다. 그랑자트섬이 브르즈와 계통이 즐겨 찾는 섬이었다면 강건너에는 노동자 계층이 유원지가 있는데 아스니엘이라는 쇠라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랑자트섬에는 브르주아 계층뿐만 아니라 노동자, 군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있다. 쇠라는 근대화 이후 다양한 계층이 모호하게 뒤섞여버린 새로운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정 가운데  흰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분할하고 화면을 정확히 수평과 수직 대각선 구도로 분할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위치에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인물을 배치한다. 감각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쇠라의 작품은 신 인상주의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 거대 작품 속 인물 군상을 알게 되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아는 만큼 읽히고 보일 테니까.  작품의 오른쪽 옷을 잘 차려입은 남녀가 강 건너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손에는 가죽 끈이 들려있고 그 끝에 원숭이 한 마리가 묶여있다. 당시 원숭이는 방탕함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 여인은 방탕한 여자 즉 매춘 여성임을 암시한다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위치의 그와 그녀는 사실  도시의 이목을 피해서 그랑자트섬으로 밀회를 즐기러 나온 커플인셈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당시 이 섬이 성을 파는 직업여성들의 활동 장소였고 그림 속 두 명의 경찰관이 이들의 문란행위를 순찰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걸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그림이 도시인들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곳으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림을 보는 재미 아닐까 싶다.  여기 있는 사람의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뭉특한 가면처럼 그려져 있다. 이들은 그저 옷차림 만으로 직업과 신분을 파악할 수 없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도시인의 욕망이 느껴지는가?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점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이 작품 속에서 도시의 작은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으로 무명화가였던 쇠라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점을 찍는 대작을 하며 에네지를 너무 고갈해서 그럴까?  쇠라는 화가로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31살의 나이에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점묘법은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들], 피카소의 큐비즘, 브라크, 마티스까지 영향을 미친다. 20세기 회화의 시작점에 점하나 찍고 홀연히 떠나가버렸다.  그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현재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에 팔렸다. 1924년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미술관에 빌려 준 적이 없을 정도로  가장 사랑받는 대표 소장품으로써 명예를 누린다고 한다. 그의 점묘법은 동료 화가였 던 폴 시냑에 의해 더 연구되고 발전된다. 

 

 

 

 

 

 

 

 

분첩을 쥐고 화장하는 젊은 여성(Young Woman Powdering Herself),1888-1890, 영극 런던대학교 코톨드 미술연구소(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그림 속 '분첩으로 화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마들렌 노브로크(Madeleine Knobloch)이다. 그녀는 쇠라의 모델이며 애인이었고 이 당시 쇠라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쇠라의 부모나 주변에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투명 인간이었다. 숨겨진 여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오늘 화장을 한다. 슬프게도 이 그림을 완성하고 1년 뒤 31살이던 쇠라와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피에르는 유행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부모에게 소개하여 결혼하기로 한지 며칠도 안 돼 갑자기 요절하고 만 것이다. 요절한 쇠라만큼이나 날벼락 맞은 여인이 마들렌 아닐까? 불행 끝 행복 시작의 평탄한 미래를 꿈꾸었을 그녀의 소박한 꿈은 개꿈이 되어 쇠라와 어린 아들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 남은 이 그림 외에 자신의 정체성마저 인정받을 수 없었던 노브로크는 아들과 쇠라가 세상을 떠나고 시댁 가족과 의사소통마저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결국 쇠라의 그림 중 집에서  보관하던 일부를 상속 재산으로 챙겼다. 비운의 화가만큼이나 비운의 여인이 된 그림 속 여주인공 마들렌이다. 그녀 역시 쇠라 사후 12년 뒤인 1903년 , 35살로 비슷한 증세로 죽는다. 

 

 

 

 

 

  

 

 

 

서커스 The Circus (Le Cirque),1890-1,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쇠라의 세 번째 서커스 시리즈  작품이다. 초기 구성의 고요한 모습 대신 역동적인 움직임의 서커스 연희 장면이 특징이다. 활동적인 움직임의 마술 장면은 언제 봐도 아슬아슬 긴장감이 든다. 텀블링을 하는 광대, 귀한 백마을 타고 기예에 가까운 묘기를 보이는 그녀, 사람들의 표정은 읽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위기만큼은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 그림 속의 말은 1888년 당시 동물 서커스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신세계 곡마단 누보 서커스( Nouveau Cirque) 단 포스터에서 차용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선과 색의 감정적 묘사라든지 마상의 곡예 장면 등은 쇠라가 구성했다.  등장하고 있는 관중 모습들 속에는 좌석의 첫 번째 줄에 실크 굴뚝 모자를 쓴 동료 화가 샤를 앙그랑(Charles Angrand) 모습도 보이지만,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쇠라는 1891년 3월 갑자기 사망했을 때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던 몇 안 되는 화가였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신인상주의파 리더인 그의 친구 폴 시냑(Paul Signac)이 갑작스럽게 가버린 쇠라의 그림을 사주고 점묘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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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중산층이자 은행원이었던 챨스 스트릭랜드는 평소 주변사람에게 무심하고 말이 없고 재미없는 사내로 여겨졌다. 아내는 교양있지만 속물적인 구석이 있는 여자로 나타난다. 작중'나'도 처음엔 그를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사내라고 평가했고, 아내 조차 그를 예술따위엔 관심이 없는 교양없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스트릭랜드가 아내를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트릭랜드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파리로 가게된다. 여자가 생겨서 파리로 갔을 거라는 아내의 예상과 달리 스트릭랜드는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여 집을 떠난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색다른 인물이었나에 대해 회상해본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좇아 떠난 그에게 금전적인 여유는 없었다. 더럽고 낡은 호텔방에서 머무르며 파리 하층민의 삶을 전전하던 스트릭랜드는 곧 생활고에 몸저 눕게 되지만, 평소 스트릭랜드를 천재라 여기고 가까이 하던 더크 스트로브라는 유순한 네덜란드 인의 도움을 받아 회복을 한다....-[달과 6펜스 중]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의 작품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입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타히티를 직접 답사했고, 거기서 폴 고갱이 살았던 집에 가 보고, 그가 데리고 살았던 여자와 얘기도 나누고, 그가 그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을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입시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개인적으로 이렇게 무책임한 가장이 또 있을까 싶다.  30대 중반의 아이들은  다섯, 외벌이 아내를 두고  자기하고싶은 일 있다며 사라져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처음에 들었던 폴 고갱에 대한 편견이 자료를 찾다보니 그에게도 변명의 시간은 주어져야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주식 중개업을 하던 그가 프랑스 주식 시장의 붕괴로  일순간 가지고 있던 직업, 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 메트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트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처가에서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다. 적어도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쳤다는 누명은 벗겨주고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같다. 

 

 

 

 

 

  외젠 앙리 폴 고갱(  Eugene Henri Paul Gauguin) )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라 혼란스러웠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한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자주 벌이고 사고를 쳤던 밑바닥에는 집안의 이런 내력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전업작가가 된 이후로 늘 돈에 쪼들렸던 고갱의 삶을 비춰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 문명의 독특한 도자기,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 들은 문물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미 계통 히스패닉분들은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성분들은 표현에 거침이 없어 깜짝 깜짝 놀라기도한다. 동양사람들이 민망해하는 패션을 올록 볼록 엠보싱같은 몸매에도 당당하게 입고 자신을 드러내는 화끈한 여인들이 그들이다. 아마 폴 고갱의 외할머니도 그런 남미 여인을 닮았고 그 모습을 내면화하지 않았을까 가볍게 추측해본다.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로만 남아있었다면,   훗날 인상파로 불린 카미유, 피사로 ,세잔,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을  팔아주기만 했었다면 미술사 속 폴 고갱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으나 현실은 고갱의 의지를 수없이 꺽었다.  현실에 꿈을 끼워맞추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걸림돌은 발을 떼는 곳마다 번호표 받고 대기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승과 같이 느끼던 피사로와의 편지에 고갱이 얼마나 힘들었느지를 볼 수가 있다. 굉장히 구질구질한 삶을 스스로 끝내고 싶지만

 

 

 

 

"나를 잡고 있는 건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만이 나의 삶을 잡고 있다."

 

 

 

 

그림이 본인의 삶의 목적이 되었던 고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파리 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 미술계의 넘버 원이 되고싶어했다.  [제 8회 인상파 전시회]에 19점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때 당시에 같이 소개되었던 쇠라[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가 거의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주목도 받지 못했다.  또 어떻게 보면 인상파 화가들 중  유일하게 도록에 화실 주소가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던  고갱은 이런 파리 생활에 지쳐있었다. 

 

 

 

 

 

"자연을 너무 곧이 곧대로 베끼지 말라,"

"예술은 추상적이고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내라."

 

 

 

 

 

 

[설교 뒤의 환상 (Vision After the Sermon)'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s Fight with the Angel)],Paul Gauguin,1888]

 

 

 

 

 

 

선명한 붉은 색감과 단순한 구성을 볼 수 있다. 야곱과 천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오른쪽과 왼쪽에는 싸움을 지켜보는 퐁타방의 여인들이 있다.  그림 속 여인들 머리에 쓴 흰색의 쓰개머리 모자가 인상적이다. 몇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2019)에 나오는 일하는 사람들 복장과 유사해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속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성경속 이야기를 빌리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늙어서 아들 이사악을 얻었다. 이사악은 레베카와 결혼하여 아들 에사우와 야곱을 얻는다. 이들이 성장한 어느날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사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장자권 갖는 이의 축복을 받는다. 이를 안 형이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하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자신이 첫눈에 반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는다. 세월이 흘러 야곱은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동안 모은 재산, 처자식을 먼저 보낸다. 그래도 야곱은 형이 두려워 야폭강가에서 머뭇거린다. 잠을 청한 야곱에게 천사가 나타나 동틀무렵까지 씨름을 하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야곱을 향해 축복해주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느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를 치고 멀리서 절뚝거리며 오는 동생의 모습을 본 형 에사우는 벼르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고 동생 야곱과 화해한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작품이 더 풍성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싶다.

고갱이 고흐한테 이 그림에 대해서 편지를 썼었다. 

 

 

 

"풍경과 싸움하는 모습은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네."

 

 

 

 

결국 이 화면 속의 모습은 여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머릿속에서 그려진 환영을 표현하고있다. 단순화된 인물들과 밝은 붉은 색은 당시 유럽 화가들 사이에 유행이던 일본식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중앙에 나무가 이렇게 가로지르면서 이쪽 세계를 이 나무로 갈라서 표현을 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그림 속에서 찾은 굵은 윤곽선과 색채다. 드디어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원색의 미술이 시작된 시기이다.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라는 1888년, 그가 쓴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정제된 미술은 관능으로부터 나오며 영혼으로부터 자연을 섬긴다. 그냥저냥의 자연주의는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실추시키고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떠러지고 마는 것이다, 자연은 원시미술 속에 깃든 영혼에서 나온다.'

-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1888-

 

 

 

 

 

 

 

 

 

 

고갱은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싶었고  유럽을 떠나려고 결심한다. 당시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 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실패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 Paul Gauguin, 1889, 뉴욕 버퍼로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The Albright-Knox Art Gallery),41]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1889]

 

 

 

 

1889년 2월에 고갱은 남프랑스의 퐁타방으로 와서 베르나르와 함께 지내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5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와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렸지만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출품을 거부당했다. 고갱은 파리 만국 박람회 전시장 옆의 카페 볼피니에서 인상파 화가 특별 전시회를 열었는데, 고갱의 작품만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았다. 6월 20일 ,터덜 터덜, 다시 퐁차방에서 작은 어촌 르풀뒤로 와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은 더해만 갔다. 그 당시에 그린 '엘로 그리스도'이다.짙은 윤곽선과 굵은 윤곽선으로 구획을 표현하는 클로아조니즘(Cloisonnism)방식이다. 다시말해 강렬한 선으로 화면을 구획지어 대담하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화법을 일컫는다. 이 윤곽 구획 방식은 함께 작업하던 에밀 베르나르가 시작한 방식이다.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단편화된 테크닉에 반발해 시도되었다.  십자가 속에 그리스도가 분명한 이 '노랑 예수'는 경건하고 육체적으로는 무척 고단해 보인다. 되는 일도 없던 시절이라 신앙심 하나로 퐁타방 마을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에 걸려있던 작가 미상의 나무 십자가 조각상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 교회에 선물했는데, 주교가 교회에 걸을 수가 없는 그림이라고 거절당한다.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고갱의 넘어지기만 하는 뒷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든다. 여하튼  고갱의 이 그림은 시가 1천 6백억 원이 넘게 평가된다고 한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야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서양인들도 지배층으로 어느정도 정착했던지라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이 이후에 유명해졌다지만 당시의 고갱은 유명인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도 아닌 그냥 흔한 서양인 아저씨일 뿐이라 굳이 아는 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것이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타히티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Two Tahitian Women, Paul Gauguin, 1899,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51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들' 또는 '빨간 꽃과 유방'으로 불리는 이 그림은 벗은 것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이 묘사되어있다.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고갱이 이 섬과 원주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보여 준다. 화면 구성이 도발적이면서도 그 구도가 대담하고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풍만한 정감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빈곤과 고독에 시달렸고, 지병에 괴로움을 당한 데다 타히티 섬의 현지 행정 당국의 백인 관리들과 자주 충돌했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1897)]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고갱이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또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잦은 분쟁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그린후  프랑스로 보내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카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둔다. 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많던 화가 폴 고갱은 파리가 아닌 이렇게 먼 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장소가 되었다. 굳이 힘들게 그곳까지 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싶긴하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타히티에는 제대로 된 고갱의 그림을 찾을 수 없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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