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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가 충분히 진행된 오늘날 가정에서 일부 전통적 생활이 보전된 지역을 제외하고  많은 개들은 인간의 생산 활동에 기여하지 않는다. 개는 인간이 제공하는 식량, 거주지, 의료 서비스에 의존하여 살아가며, 개 자신의 번식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에 의해 번식된다.
 
 
 
 
 
 

 

 





 크기와 종을 불문하고 오늘날 사람에게 길러지는 개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구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유년기를 가정에서 보낸 유기견의 경우 더욱 치명적이다. 상당수가 유기 후 인간에게 구조되지 않으면 며칠 만에 굶주림 등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견이나 사냥견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중형견보다 생존능력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야생화되는 들개무리는 중형견 무리이며, 이들 또한 사람이 사는 곳과 가까운 야산을 배회하며 사람이 버린 먹이나 가축 절도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전에 <TV 동물농장>이라는 프로에 버려진 유기견들이 근처 산에 모여 있다가 밤만 되면 마을로 내려와 길고양이나 다른 생명체를 위협하는 일이 많아져 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그들도 살아야 하니 이해는 가면서도 방송 분량이 끝날 때까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인간들의 편리에 의해 선택되고 필요 없으면 맘대로 버려지는 부속품 취급 당하는 반려견들의 모습이 버려진 곳에서 주인이 와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더 짠하기도 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냥꾼인 늑대나 다른  야생 동물들과 살아갈 경우, 이미 유전적으로 개량이 되고 야생성이 거세된 오늘날의 개는 이들과 전투는 물론이고 먹이 경쟁조차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처는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야생의 독수리를 닭들과 함께 닭 장에 넣어 길렀더니 모양은 맹수인 독수리지만 하는 짓은 닭들과 같아 본인이 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우연히 다른 독수리가 발견하여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하여 점차 창공을 근사하게 비행할 수 있었다는 우화로 기억한다.

또 야생에서는 인간 사회에서와 달리 활발한 활동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가 높아 토끼 등의 작은 사냥감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우며 필연적으로 대형 초식, 잡식 동물을 사냥해야 하는데, 사냥 능력을 상실한 개보다 다른 야생 동물이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으므로 먹이 수급이 어렵워결국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개의 유전적 특징 때문에, 개를 유기하는 문제는 동물을 야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견주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어디선가 선한 눈망울을 굴리며 생활고에 버리고 간 반려견들이 선채로 원망조차 못하고 망부석이 되어가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기호가 다양해짐에 따라 개는 보다 온순한 성격과 작은 체격을 가진 동물로 개량되어 왔다.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의식도 발달하지 않았던 수천 년 동안 동물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육자의 선택적인 영역이었으며, 생물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한 개량에 따른 유전적인 문제는 크게 연구되지 않았다. 인간은 사육 목적에 따라 견종을 사냥개와 애완용개로 나뉘어 개량했으며, 반복적인 교배를 통해 각각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발현시킨 순종견들이 개발되었다. 대형견에서 소형견에 이르는 다양한 견종이 파생되었으며, 소형견들은 자연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여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로 변화했다.





 

 

 

 

 

 

 

 

 

 

인간에게 친근한 동물이기에 영화 등에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래시, 베토벤, 벤지, 하울링, 마음이, 리틀 포레스트 등이 있다. 그중에서 <베토벤>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베토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1992년 개봉한 작품이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2년 뒤 후속작도 개봉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베토벤 역을 연기한 세인트버나드는 '크리스'라는 이름의 개로 연기가 압권이다. 줄거리는 평범한 애견 분양 숍에 어느 날 도둑들이 출모해 강아지들을 납치한다. 이들은 종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철장에 넣고 훔쳐 달아나는데 개도둑들의 목적은 훔친 강아지들을 각종 불법적인 동물 실험의 실험체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중에 섞여있던 영화의 주인공 버나드종 강아지는 다른 영리한 강아지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추위와 습기에 떨며 쓰레기통에서 하룻밤을 지낸 어린 강아지는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신문을 가지러 나온 죠지를 따라 뉴튼 집안에 몰래 들어간다. 이 집주인인 죠지는 개 혐오주의자로 절대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고 반대하지만, 죠지의 세 아이들 은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막무가내이다.  뉴튼 집안의 세 아이들과 엄마 그리고 개 혐오주의자인 아빠 사이의 일어나는 기분 좋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영화이다. 어린 자녀를 두신 이웃님들 계시면 함께 보기를 권한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고양이 등 다른 몇몇 동물이나 개를 키울 경우 애완동물 보유세라는 세금을 걷는다. 예를 들면 반려견 등록 관리 비용, 분뇨나 소음으로 인한 공해, 개물림 사고 등으로 인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 다른 시민이 분담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국가의 정부에서 시행 중이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중국 등 30여 개국은 지역별로 세금 유무가 좀 다르다. 독일에서는 'hundesteuer'라는 제도로 개를 의무적으로 등록하고 품종을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한다. 주마다 세율이 다르며 사육두수가 늘어날 경우 누진세를 적용한다. 베를린의 경우 어린아이가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롤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품종이 연간 120유로(한화 17만 원 상당)가 부과된다. 두 마리가 되면 각각 연간 1165유로(한화 160만 원 상당)로 1년에 320만 원이나 되는 세금을 납부하여야 한다. 견주들의 높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 같아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개들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 처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양가감정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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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의 진화사

 
 

 
 

라이카: 구 소련의 우주 탐사견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로 간 개
 1954년 소련 태생
1957년 11월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발사되었지만
선내 장치의 고장으로 우주에서 생을 마감함
 
장군이: 7개월동안 300km달려 고향집으로 돌아온
진돗개 백구 이야기의 주인공
 
파트라슈: 네로와 함께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 플란더스의 개
 

 




 

아들개 바람이

 
 




 
사람에게 이만한 친구가 있을 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문화권에서 개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많다. 어린시절 국어책에서 배운 '오수의 개'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술에 곯아 들판에 누워 잠든 주인곁에 있다가 들판에 불이 나자 냇가로 가서 자신의 털을 적셔 불을 꺼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주인을 구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미국에 살며 온갖 종류의 개들을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본다. 몸집 작은 치와와부터 큰 덩치의 저먼세퍼드, 허스키 등 주인과 똑 닮은 그들의 성향에 신기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내 어릴적 동네 개들은 불쌍했다. 잘 먹여 키웠다가 한여름 보양철 마을 어르신들의 한 입감으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당시 부족한 단백질을 서민들은 그렇게라도 보충해야 했으니 이해 못할일도 아니다. 학교 갔다 오면 주인잃은 목줄과 텅빈 개집을 보며 섫게 운 적도 많았다. 이집저집 어린 동심에 상처 준 집들 많을 줄 안다. 그런 부정적 기억에 비하면 요즘 개들은 신분상승한 신데렐라들 같다.온갖 치장에 주인 욕심까지 더해져 개로서 살기보다 주인의 소품용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녀석들은 언제부터 인간 곁에 머물며 이럴게 길들여 지기 시작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8천년 전 암각화에 13마리의 개를 거느린 사냥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또 로마제국 시대 헬레나라는 이름의 개에게 묘비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까지 하다. 나역시 두 마리의 개를 키우며 그들의 명민함에 혀를 내두른 적이 많다. 자세히 노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사람보다 나은 구석이 참 많았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하늘나라로 간 엄마개 생각이 난다. 아마 한여름 몹시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 브리드로 4마리의 새끼를 얻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더운 날씨였다. 일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었다. 서둘러 집에 도착해 보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글쎄 눈도 못뜬 새끼들이 덥다고 칭얼대니 어미개가 새끼들 하나하나  입으로  물어 개 집 밖으로  꺼내 놓은 것이 아닌가! 사진이라도 찍어 둘것 그랬나 싶다. 촉촉하게 가슴 밑바닥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세상에
세상에나, 이런 일이!’


어미개의 영민함에 그날처럼 고마운 날이 없었다. 새끼 버리고 매정하게 제 인생 찾아가는 냉한 인간 어미도 있는데 말이다. 인간보다 백 재 천 배 낫다는 생각을 그날 엄마개가 보여 준 모성을 보며 진하게 느꼈었다. 










아빠 개 천둥이


 
 
 
 



 
개는 거주 지역의 경비, 수렵 보조, 목축 시의 다른 가축보호등 인간의 생산활동을 보조해주는 일꾼으로 활동해 왔었다.  그런 그들이 어느날 부터  인간으로부터 먹이를 제공받고 천적으로 부터 보호를 받으며 인간들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뛰어난 후각과 청각, 민첩하고 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작년 간암으로 먼저 간 아빠개 진돗개 천둥이는 청각이 엄청 예민했다. 사냥개 종류라 지나가는 야생쥐, 느릿한 걸음 걸이의  스컹크, 깝죽대는 청설모, 응큼한 너구리 까지 잡기도 하고 때로 상처를 입기도 하며 가족들 사랑을 참 많이 받았던 아빠개였다. 그런데 이녀석이 7/4 미국의 독립기념일 터트리는 폭죽소리에 맥을 못춘다.
겁이나 집 안으로 들여 달라고 유리창을 박박 긁기도하고 개 집 위로 올라가 오줌마려운 녀석처럼 낑낑대기도 해 가족들에게 '천둥'이라는 이름값 못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천둥이 귀에 폭죽 소리는 아마 전쟁때 터지는 대포 소리만큼 크게 들리는것이 아닐까 싶다.인간에 대한 신뢰 또한 강하기 땨문에 다른 육식동물에 비해 적은 훈련으로 가축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3만 년 전에 다다르면 이미 늑대가 아닌 개로소 인간에게 사육되고 있었다고도 전한다. 다른 가축과 비교해 인간과 함께 한 역사가 훨씬 깊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어느 지역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인류 문화권에서 개를 길렀다는 기록은 많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축화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소, 말, 돼지, 닭은 기르지 않았으나 칠면조, 알파카와 함께 개를 길렀다고 한다. 개의 가축화가 굉장히 이르고 보편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이곳 추수감사절에 먹는 주 메뉴인 칠면조를 실제로 보면  그 크기에 놀라고, 마켓에서 칠면조 가슴 부위만 따로 냉동해 파는데도 3-4인용 메뉴가 나올 정도로 그 무게감에 또 한번 놀라기도 한다. 
 그런 칠면조와 개가 함께 사육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재미난 스토리 하나 쯤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동양에서는 십이지중의 하나로 친숙한 동물이었으며 무려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개를 길렀다고 한다. 중국의 역대 황실은 페키니즈 등 애견 문화가 발달해 있었고, 일반 백성들 역시 집집마다 개를 많이 길렀다. 충성심이 강해 유교 사상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고양이보다 다루기가 쉬워 많이 길렀다고 한다. 중국 고사에 보면 견마지로, 사준사구 등 충신의 비유로 인용되기도 한다.



犬馬之勞(개 견,말 마,갈 지,힘쓸 로)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노력이나 윗사람에게 바치는 자기의 온갖 노력을 개와 말에 비유해 낮추어 하는 말로 자신의 수고로움을 겸손하게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사준사구(四駿四狗)



사구사준이라고도 불린다.
네 마리의 충성스런 준마와 충견을 뜻하며, 칭기즈 칸을 도와 몽골 제국을 건국한 8인의 건국공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준은 내정과 전략에서 활동한 인물이며, 사구는 전투에서 공훈을 발휘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는 또 일찍부터 군견으로도 활용되었다. 고대 국가에서 개는 전쟁 시 군인과 함께 최전선에서 전투용으로 투입되었는데, 훈련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며 체구가 작고  날렵해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시대 그레이트 피레니즈의 조상격 되는 피레네 산맥의 대형견을 전투에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후방 경계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다만 이슬람권에서는 무함마드에게 피해를 입힐 뻔한 에피소드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쿠란 자체에서는 개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개를 널리 기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역 특성상 상당수의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유목민에게 개는 필수적이다. 무하마드 역시 유목민 생활을 했으며,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던 그도 유목용 개들에게 애정을 주며 곁에서 키웠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다. 아랍 역사에는 유목용이 아닌, 가정에서 키우는 개들도 많았는데, 주로 아프간 하운드처럼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의 애완동물로 사육, 번식되는 개들이었다.


 
-                             -to be continue-
 
 


 #개 이야기(1)#일상#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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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나비파(Navis)

원근법보다 더 깊은 평면성의 창조

신비주의자

상징주의자

종교와 예술에 대한 사명감

"보라고 가르치는 대로만 보고,

하라고 해놓은 길만 가는 작가는 되지 않겠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폴 고갱의 영향

 

 

2. 생애

 

 

작가들의 개성과 창조력이 넘치는 시대 19세기 후반의 미술!

그 시대에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하려 한 또 한 명의 작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모리스 드니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폴 세뤼지에를 주축으로 고갱의 영향을 받아 폴 랑송, 에두아르 뷔야르, 피에르 보나르와 예언자 히브리어를 뜻하는 나비(Nabis) 파를 결성하여 활약한 화가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쁜 '나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비파(Les Nabis)는 19세기말 사회적으로 팽배해진 물질주의의 한계와 색채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화면에 전개하는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에서 나온 나비파는 현의 단순화를 통해 그 속에 영원성을 부여하였으며 굵은 윤곽선을 통해 장식적 기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예언자를 뜻하는 말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세상에 없던 색깔, 세상에 없는 장소를 그림으로 묘사하고자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해 본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부분은  신비주의자, 상징주의 자들처럼 인간의 상상력과 주관적인 감성에 집중한 화가들로 봐주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드니는 1889년에 <신관습주의 선언(Manifeste du neo-traditionnisme)>을 발표했는데, 그는 1880년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자연주의의 사실적이고 묘사적인 회화 방식을 배척하기도 한다. 이 선언서에서 가장 유명한 첫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드니가 말하는  작품이란

 

 

전쟁터의 말이나 옷을 벗은 여인,
또는 어떠한 일화가 되기 전에 조합된 확실한 질서 속에서
색채로 덮인 평평한 표면'이라고 선언한다.

 

 

 

 

 

 

 

 

 

<부활절의 신비,1891,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그래 나는 그리스도교 미술가가 되어야 해,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자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해.

 

 

 

모리스 드니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다짐을 노트에 옮겨놓은 내용이다. 내용만 보아도 그가 종교와 예술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조르주 데 발리에르(Georges Desvallieres)와 함께 아르 사크레 아틀리에((les Ateliers d'art sacre)를  만들어 종교미술의 혁신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한다. 저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모던 아트와 아르 사크레에 관한 새로운 이론(1922)> 등의 책을 통해 입체파와 야수파, 그리고 추상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론을 펴내기도 한다. 순수한 선과 평면적인 형태, 그리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색채가 화면에서 이뤄내는 질서는 바로 자연의 성화를 나태 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흰색 옷의 언뜻 보면 유령처럼 보이는  이들이 뒷배경으로 지나간다. 정면에 여인 하나가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들을 향해 뭐라 말하는 듯하다. 그림은 성경의 <마르코 복음서(16.1-8)>의 나오는 '빈 무덤' 내용을 그린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은 장면이 그려져 있다. 향유를 발라드러러 온 그들은 뜻밖에도 예수님 대신 한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자 겁에 질려 땅에 엎드린 모습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그러나 화면의 윗부분은 성경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져 있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이층 건물이 서있고, 유연한 나뭇가지들 뒤편으로 녹색 들판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모리스 드니는 부활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빈 무덤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던 생 제르맹 앙레(Saint-Germain-en-Laye)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한 그림 안에 과거와 현재를 녹여 작품전체를 현대적 이미지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깨알 재미 하나 더 보태면, 그림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 앞에 작고 하얀 동그라미가 다린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나 있어 다소 기괴한 느낌도 든다. '이건 또 뭐지?' 하며 고개가 갸웃 해지기도 한다. 

 

 

 

 

상징주의 작가인 모리스 드니는 그림 곳곳에 종교적 상징을 배치했는데, 공중에 나타난 손의 이미지는 매우 오래된 그리스도교 도상으로서 '하느님의 손'(MunusDei)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손'은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나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에 자주 그려지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때로는 모리스 드니의 작품에서 나타난 손은 성체를 분배하는 사제의 손을 상징하기도 하고, 좀 더 넓은 의미로 성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 성부(하느님)의 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령처럼 보이던 이들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며, 또한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행렬, 구체적으로 첫 영성체를 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상징한다고 한다. 모리스 드니의 깊은 종교적 성찰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과거에 지나간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 우리에게 매 순간 벌어지는 지금 여기의 사건이라고 그림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소장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 뮤즈들(The Muses in the Sacred Wood,1893

 

 

 

 

 

 

 

 

당시 모리스 드니는  그림 제 일 앞에 그의 아내 마르트를 두 번 그려 넣는다. 보이시는 가! 쌍둥이처럼 비슷한 느낌의 여인을 말이다. 그녀는 1893년 결혼 후 드니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그의 뮤즈였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마르트는 등을 보이고 있는 모습과 옆모습으로 두 차례 그려진다. 나중에 모리스 드니가  남긴 글에서 밝혀진 내용이라고 한다. 그림의 배경은 드니가 평생을 살아던 고향 생 제르망 앙레의 숲이다. 수 백 살 된 마로니에 나무들은 자연의 모습이라기보다, 그것을 기반으로 디자인된 장식 미술처럼 그려져 있다. 이국적인 벽지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말이다. 이 그림에서 소위'뮤주들' 뒤에 보이는 나무들은 원근법을 적용해 배치한 것이 아니라 마치 앞으로 끌어당겨 일부러 모델 뒤에 배경처럼 세워 놓은 것 같다. 공간감보다는 평면적인 느낌을 강조한 부분이다. 원래 벽화라는 것이  공공미술의 성격이 강한데, 이 그림은 평면적이고  단순한 표현으로 벽화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개인적인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드니는 루브르를 다니면서 완고했던 당시 전통주의자들의 교육보다 더 오래된 거장들을 찾아 그들의 그림을 연구하고 모사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가 특히 끌렸던 작가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가 프라 안젤리코였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지역의 수도사로 본명은 귀도 디 페에트로(Guido di Pietro)인데 본명은 잊히고 프라 안제리코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Fra(수도사), Angelico(천사 같은)으로 '천사 같은 수도사님'이란 뜻이다. 동료 수도사들이 천사 같다고 불러서 어느새 그것이 이름이 되어 버렸다네요. 그의 그림의 특징은 '인간미'가 느껴지는 따뜻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수태고지>,1432-1446, Italy- Cortona , 핑크빛 옷에,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을 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어때요, 스승의 그림과 비교해 보니 느낌이 더 확 와닿지 않나요. 모리스 드니의 작품에 프라 안젤리코 화가의 느낌을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것 같네요.  아직 견고하게 고정되지 않은 원근법과 벽화 같은 느낌, 그리고 뭔가 인물에 집중하게 만드는 표현 방식이 마음에 든 드니는  자신의 작품에도 이 점을 열심히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잠시 사사한 다른 스승으로부터  벽에 그리는 느낌 같은 표현과 고풍스럽고 독특한 채색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드니의 작품들에서 벽화같이 장식적인 느낌이 풍기는 것은 선배 스승들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난 신이 행하시는 모든 기적을 그림으로 표현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리스 드니,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 (1898-1900)>,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이 그림에는 한때  고갱이 소장했던 세잔의 그림 <과일 그릇이 있는 정물>이 그려져 있다. 왼쪽부터 오딜롱 르동, 뷔야르, 루셀, 볼라르, 모리스 드니, 세뤼지에, 멜라르오, 랑숑, 보나르, 모리스 드니 부인

 

 

 

 

 

 

당대의 주요 화가들이 다 모였다. 작품에 몰려든 그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오고 가는 의견들로 담배 연기가 사그라질 때까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그들 특히 보나르와 뷔야르, 발로통, 폴 랑송과 공유했던 상징주의와 신비, 음악과 문학에서 파생한 드니의 그림들을 보며 그들은 드니를  '아름다운 성상의 나비'라 불렀다.

 

 

 

회화란 군마나 여인의 누드 혹은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하나의 질서에 걸맞게 배열된 색채들로 뒤덮인 평면이다."

 

 

 

 

 

 

3. 나가기

 

 

나비파의 일원으로 인상파 이후의 신선한 색채 감각과 고갱의 평면적인 장식성을 추구하며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아낸 모리스 드니!

파리에서 PER를 타고 생베르맹앙레 역에 내려 20분을 걸어가면 드니가 죽을 때까지 30년간 거주하며 작업했던 모리스 드니 미술관이 나타난다고 한다.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드니가 소유하기 직전까지 왕립병원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의 세계를 통틀어 흐르는 종교적인 색채의 그림들과 신비하고 상징적인 그림들 속을 수수께끼 풀어가듯 즐겼던 시간이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더 보이는 것들이 많았을 작가의 그림이기도 하다. 숭고하고 검소한 어느 수도원처럼 석조로 지어진 그의 미술관에 운 좋게 들린 다면 유독 신심이 뜨거웠던 드니의 작품 앞에 저절로 십자 성호를 그리지 않을까 싶다.

 

 

 

2023.03.24 - [지식&교양] - 46. 인상주의 화가, 고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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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스무 살이 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서다.

자포니즘

조용한 기질의 화가

가족, 정물, 풍경, 꽃과 과일

화가의 아내 마르테 보나르(Marthe Bonnard(1869-1942)

르 카네 (Le Cannet):남프랑스 그들만의 은둔의 보금자리

색&

20세기 화가 중 가장 특이한 인물

 

 

2. 생애

 

 

 

피에르 보나르에게는 '색'이 전부였습니다. 색은 세상을 표현하고 경험하는 방법이었죠. 인생을 그리기보다는 피사체를 그렸고, 피사체를 표현할 때도 색채에 대해 준비하고 메모하였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마주해서 그림을 그리던 인상파의 선배와는 달리 피사체의 색채 메모를 들고 스튜디오로 돌아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기억에서 불러내어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이라기보다 종종 꿈같습니다. 독특한 색을 쓰는 관능적인 색채, 그 색의 베일 뒤로 가려진 스쳐 지나가던 시적인 암시, 조금씩 엇박자로 놓인 시각적 재치는 예상치 않은 공간적 수수께끼로, 보는 사람을 몰고 갑니다. 그것이 그가 다른 화가 작업과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프랑스 삼페인(France Champagne,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91,석판화, 파리 국립도서관

 

 

 

 

 

 

 

 

보나르는 1867년 10월 3일, 프랑스 파리의 서쪽 교외지역인 Hauts-de-Seine의 Fontenay-aux-Roses 에서 태어납니다. 프랑스 국방부 중요 관료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고 걱정 없이 보낸 화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법을 공부하였으며, 변호사로서 잠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소르본을 나와 변호사를 시작하던 피에르 보나르는 이 석판 인쇄를 시작으로 미술 인생을 시작합니다. 1889년 그는 프랑스 샴페인 광고를 위한 포스터 경쟁 모집에 나섰습니다. 이 포스터에는 미술 지망생이던 시절에 물랭루주에서 그를 따뜻하게 미술의 길로 안내해 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분위기와 당시 포스터의 천재 쥘 세례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던 자포니즘의 손부채가 왼손에 들려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 상징적이며 영적인 본성을 가진 젊은 예술가 그룹 나비파(Les Nabis)에 가입하고 당시의 시대적 유행이던 자포니즘(Japoinism)이라는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그는 네 폭 병풍을 비롯해서 고도로 일본화한 나비파 작업을 했습니다. 일본식 네 폭 병풍에 그린 아르누부 스타일 그림은 일본 목판화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합니다. 병풍이라는 동양식 소재에 서양식 그림스타일이 덧입혀 서양인이 기모노를 입고 폼을 잡은 듯한 어색하지만 나름 독늑한 분위기가 나는 목판화입니다. 보나르는 '나비파(Les Nabis)에서 가장 왕성한 자포니즘의 선두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비대칭적인 스타일과 형태의 왜곡을 통해 일본 장식 형식 중심으로 아르누보 스타일로 표현했습니다. 일본이 피에르 보나르와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것이 나름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심히 따라 한 화가가 예뻐 보였겠지요.  보나르는 미술을 잘 모르던 초짜 시절 노골적으로 일본 흉내를 냈지만, 금방 자포니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몽마르트르에서 드니와 뷔야르와 함께 스튜디오를 공유하던 시절 보나르는 연극 프로듀서를 만나 파리의 '연극 공연 프로덕션'에서 공동작업을 했습니다. 1891년 보나르는 몽마르트르에서 로트렉을 만나  독립 미술가 협회인 앙데팡당 전에 출품을 시작했고, 같은 해 시인 폴 르 클레르크가 창간한 라 르뷔 블랑슈의 삽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 석판화 일러스트들은 인상파의 화가들을 발굴한 것으로 훗날  유명한 프랑스의 화상 앙브루 아즈 볼라르에 의해 1895년 출판되기도 합니다.

 

 

2023.06.09 - [지식&교양] - 50-2. 탈 인상주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12)

 

 

 

 

 

이 당시 그의 그림은 대체로 친구와 가족 구성으로 채워집니다. 집과 식탁과 정원과 창문들로, 모두 내러티브와 자서전 적입니다. 그의 친구들이 피에르 보나르를 두고 '조용한 기질'의 사람으로, 그리고 그는 동료들 사이에도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게 눈에 띄지 않게 독립적인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자화상, 풍경, 거리 장면, 꽃과 과일을 묘사한 많은 정물을 그렸습니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던 그의 습관은 수많은 캔버스에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행하던 그림들을 그의 작은 스튜디오의 벽에 걸어 두곤 했는데 이 스튜디오는 사실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작은 스튜디오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Pierre Bonnard,<흰 고양이,(1867-1947)>

 

 

 

 

 

 

 

언뜻 보면 고양이 나무인줄 알 정도로 거인 흰 고양이! 기지개 켜기 직전의 동작 같기도 하다. 집에 두 마리 개를 키우는 데 그 녀석들 기지개 켤 때 보면 시원함 마저 들 정도로 나른함을 깨워주는 동작이기도 하다. 피에르 보나르는 어린 시절부터 공양이나 개를 키웠고 그런 동물들을 가족, 모델과 함께 그림에 그렸다. 보나르처럼 고양이를 변형하는 모험을 하면서 그 신비로운 매력을 전달해 주는 화가는 없다. 원래 대담한 색채를 쓰던 보나르가 그린 고양이가 대부분 흰색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당시 흰색은 그림의 여백 정도로 쓰일 뿐, 독자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보나르는 그런 흰색을 고양이에게 집중시켰다. 보나르는 1894년 작 ' 흰 고양이'는 길게 몸을 일으키는 고양이를 그린 작품으로 흰 부분의 부드러운 붓 터치는 형태의 윤곽선을 모호하게 나른한 고양이의 모습을 더욱 강조했다. 그림을 소장한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 설명에 따르면 보나르가 고양이 다리 위치를 잡기 위해 여러 장의 연습 데생을 한 사실과 고양이의 눈 주위가 많이 수정됐음을 X선 촬영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설명에는 "보나르는 평생 동안 많은 고양이 그림을 그렸지만 부분적이거나 확대한 그림이 많았다. ' 흰 고양이'는 그런 그림들의 중심이라고 소개됐다.

 

 

 

 

 

 

 

핑크 소파가 놓인 드레싱 룸<The Dressing Room with Pink SofaBathroom >, Pierre Bonnard,1908, 벨기에 왕립 미술관

 

 

 

 

 

 

 

보나르가 26세이던 1893년에 마르테 드 멜리니(Marthe de Meligny)는 수십 년 동안 언제나 그림 속에 존재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50년 동안 평생에 걸쳐 그녀만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무려 385점이나 됩니다. 그의 성품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녀를 만나고 즉시 동거에 들어갔지만 결혼식은 32년 후가 지난, 그의 나이 쉰여덟이 되던 1925년에야 올렸습니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은 행동이지만 오랜 동거의 형태라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는 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보나르의 작품에 강박적인 주제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밀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그림 속에 나타납니다. 크게 작게 멀리 가깝게 오직 한 사람의 모델인 그녀는 많은 작품에 슬그머니 등장하는 상징이 됩니다. 그림 속 목욕통을 보면 '저렇게 작은 곳에서 어떻게 목욕을 한다지?' 하는 궁금증 부터 듭니다. 거울 앞에 어정쩡한 모습도 아니고 당당한 그녀의 뒤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실적이고 관능적이네요.

 

 

 

 

 

 

<정원에 있는 젊은 여성>이란 이름의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20년대 초에 보나르가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지만 20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보나르에게 비밀같은 여인이 있었어요. 아내가 죽고 1947년경에야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억'을 손질한 이 그림 속 젊은 여성의 이름은 르네 몽샤티(Renee Monchaty)입니다. 그녀가  깊은 생각 속에 앉아 있고, 오른쪽 끝에 그의 아내 마르테가 질투에 가득 차 그녀를 바라봅니다. 오로지 아내 한 사람만 바라보며 작업했다는 피에르 보나르에게 숨어있던 젊은 여성인 거죠.  르네 몽샤티는 그림 모델로 만나 6년 동안 몰래 사귀었습니다. 마르테는 르테를 크게 질투했으며, 보나르도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를 했고, 그녀는 두말없이 돌아섰는데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이 지독한 사건은 두 사람이 남프랑스 르 카네(Le Cannet)로 이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보나르는 1926년 남프랑스 칸느(Cannes)근처의 르 까네 (Le Cannet)로 이사를 왔습니다. 보나르가  말년에 보낸 그곳은 눈부신 빛과 색채로 그의 그림인생에 녹아듭니다. 1938년에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평생 미술 동무이던 Vuillard와 함께 그의 주요 작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20년을 한곳에 처박혀 살면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고집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내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은신처로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르  카네에 거주합니다. 그의 아내 마르테 보나르의 누드를 그리던 이 은거의 집은 현재  '보나르를 순례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The Almond Tree in Blossom>, Pierre Bonnard, 1947,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보나르는 프랑스 피비에라 르 카네 근처 그의 별장에서 마지막 그림인 '꽃 피는 아몬드 나무 <The Almond Tree in Blosson, 1947>를 그립니다. 그의 마지막 그림인 셈이죠. 고흐가 동생 테오의 아들에게 선물한 화사한 아몬드꽃 그림과 많이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고흐가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에게 자신 같은 힘든 인생이 아닌 풍요롭고 따뜻한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 아몬드 꽃 말이죠.  보나르는 아몬드 꽃잎들이 미처 지기도 전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늘 은둔의 생활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피했지만 반대로 그의 작품은 평생 잘 팔렸다고 합니다.

 

 

 

 

 

 

 

 

보나르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것은 색채만이 아니다. 
매끄럽게 연마되고, 다채로운 색의 베일로 가려졌으며'
예상치않은 공간적 수수께끼와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들에 의해 
강조된 뒤섞인 감정의 열기도 있다.

- Roberta Smith - 

 

 

 

 

 

 

 

 

 

 

"나는 모든 주제를 손안에 쥐고 있다.
돌아가서 이것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다시 생각하며, 꿈을 꾼다."

 

 

 

 

 

 

3. 나가기 

 

 

 

그의 일생은 다른 화가들의 드라마틱한 역경에 비하면 비교적 '긴장과 역경의 반전'이 없는 편이다. 그는 60년 동안 한결같은 발전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말이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제일 따분하고 어려운 일이 기도 하다.  많은 친구와 가족들이 있는 햇볓이 비치는 실내와 정원 같은 서술적이며 자서전적인 그림을 보면 조용했던 그의 기질 덕분에 가능했을 거라 짐작해 본다. 그의 부인 마르테는 수십 년 동안 늘 함께한 대상이었다. 음식이 남아있는 식탁에 않아있기도 하고, 목욕통에 비슴듬히 있는 일련의 그림에서처럼 누드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리고  대상만 있는 곳에 살짝 얼굴을 디미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몇 개의 자화상, 풍경화, 거리의 모습, 꽃과 과일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정물화 등 당시 일상이 보나르라는 화가의 프리즘을  통해 오감으로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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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나비파(Nabi)운동

생테티즘(Symthetism)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e)

ABC<회화 첫걸음>(de la peinture)

"그림에서 색채는 3-4개의 엄선된 색채만으로 충분하다.

선택된 색채들은 그것 자체로 표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다른 색채들은 오히려 이런 효과를 반감시킬 뿐이다."

 

 

 

 

2. 생애

 

 

 

 

 

세뤼지에의 아버지는 향수 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그런 아버지 덕에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뤼지에는 소년 시절 철학 연구에 많은 중점을 둔 중등학교인 리세 콩도르세(Lycee Condorcet )에 다녔고 그곳에서 철학 학사 그리고  수학 학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의 현실적인 아버지가 그를 도와 판매직에 몸담았으면 했지만 그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요. 그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의 유명한 사립 예술학교인 아카데미 쥘리앙(Academie Julian)에 입학합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1864,11,9~ 1927,10,7)는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전위 예술 나비파 운동, 생테티슴, 클루아조니즘의 영감을 준 프랑스 화가이기도 합니다. 모르는 용어가 몇 개 등장하지요.  <클루아종(cloison/프랑스어>의 원뜻은 '구분'의 뜻으로 미술용어로 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에마유에서 각각 색의 부분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클로아조니즘은 강렬한 선으로 화면을 구획 지어 대담하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화법으로 '구획주의'라고도  불립니다. 중세 유럽의 에나멜 기법인 '칠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클루아조네(cloisonne)에서 유래했고 퐁타방 지방에서 머물며 작업하던 에밀 베르나르(Ecmile Bernard)가 처음 구사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폴 고갱이 즐겨 활용한 기법입니다. 당시  일본풍 판화에 깊은 영감을 받은 고갱이 <황색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작품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생테티슴(synthetism)은 문예운동으로서 회화상의 상징주의 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주관적 해석과  상상력을 중요시하는 사조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단편화된 테크닉에 반발해 시도된 기법이지요. 회화표현에 있어서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하고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주로 고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젊은이들에게 공유됩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880년 중반에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였고, 1888년 여름에 프랑스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으로 여행을 가서 폴 고갱 주변의 소규모 미술가 그룹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걸 계기로 세뤼지에의 인생이 터닝 포인트를 맞습니다. 고갱이 세뤼지에에게 정말 큰 영향을 미쳤거든요.  고갱은 파리에서 퐁타방으로 이사 온 후 인상주의 화가들이 중요시하는 외관, 빛에 의한 섬세한 색채의 변화와 자연 묘사를 버리고 자신의 내면과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장식적인 화풍을 만듭니다.  원색의 가까운 순수한 색채를 쓰면서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인상주의 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을 찾고 있던 젊은 화가들에게 고갱이 힌트를 준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비파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폴 고갱입니다. 

 

 

 

 

 

 

 

 

 

 

 

<부적(The Talisman)>,Paul Serusier

 

 

 

 

 

 

 

 

"나무가 어떻게 보이는가? 초록색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초록색을 칠하라.

팔레트에서 가장 순수한 초록색을 칠하라.

그림자는 어떤가? 그림자는 약간 파랗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가장 순수한 파란색을 칠해보아라.

불그스레한 잎사귀에는 주홍을 칠하라."

 

 

 

 

 

 

무엇을 나타내는지 모를 정도로 지금 봐도 현대적인 추상미술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온통 색으로 밖에 인식이 안될 정도로 말입니다.

고갱의  말대로 세뤼지에가 풍경화를 완성한 것이 바로 위의 "부적"이라는 작품입니다. 언뜻 보면 색 덩어리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덩어리들이 초록색, 주황색 등으로 어떤 형체를 나타내고 있어 구별은 되는 것 같고요. 색만으로 형체를 표현한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고 놀라운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세뤼지에는 '부적'작품을 완성해 파리로 돌아와서 쥘리앙 학교의 미술을 배우는 친구들에게 보여줍니다.

 

 

 

 

"화가들은 본능적으로 모사를 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데

우리는 이 풍경화를 통해 그러한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낀다."

 

 

 

 

화가라면 본능적으로 자연의 경관이나 인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사실처럼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보시는  이 작품 하나로 당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것에 그 놀라움이 있습니다. 어때요. 젊은  화가들이 당시 느꼈을 해방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 화가들이 모여 '나비파'를 결성하게 된답니다. 세뤼지에와 뜻을 같이 한 화가들은 모리스 드니, 폴 랑송, 케르 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아리스티드 마이욜, 펠릭스 발로통 등이 있습니다. 이 화가들은 대부분 유복한 중산층 출신에 지적인 지식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비파에 속한 화가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열었다고 합니다. 신비주의 와 종교, 철학, 문학, 음악 등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도 나누고 또 복장을 갖추고 비밀스러운 의식도 행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세뤼지에는 신비주의와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것들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또한, 나비파는 이집트시대 벽화, 중세시대 스테인드글라스, 비잔틴제국의 모자이크 작품에 적잖은 영향을 받습니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표현방식에 이끌렸으며,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신앙과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의 장식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비파에게 예술이란 삶에 가까이 있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이젤 위에 놓고 그리는 캔버스 회화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 펠릭스 발로통은 포스터, 목판화, 삽화, 병풍과 부채 등을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이어나가기도 합니다. 

 

 

 

 

 

 

 

세뤼지에는 1889년 가을 파리로 돌아왔지만 1890년 여름 르 풀뒤의 고갱에 다시 합류합니다. 그러나 그 해에 그는 아카데미 쥘리앙을 그만두고, 그의 철학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고 혼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나비파는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며 상징주의 자격증을 가진 몇몇 개인, 작가, 음악가, 배우 등으로 그룹을 넓혀갑니다. 그러다 1890년 대 중반이 되자, 대부분이 친구로 남아있던 나비파들은 개별적인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세뤼지에 자신도 신학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세뤼지에는 매년 여름 브르타뉴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위엘고트(Huelgoat) 그다음에는 샤토뇌프-뒤-파우(Chateauneuf-du-Faou)에서  폴란드 여배우 가브리엘라 자폴스카(Gabriela Zapolska)와 함께 정착합니다.  그는 정기적인 전시회, 특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전시회에 참가하던 파리에서 매년 겨울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의 폴란드 연인 가브리엘라 자폴스카가 갑자기 그를 떠나자 세뤼지에는 브르타뉴 샤토노츠-뒤-파우 지역으로 잠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캔디 장수 (The Candy Merchant),1894

 

 

 

 

 

그림 속 여인은 비가 오는 데도 판을 걷지 못하고 캔디를 팔고 있습니다. 유난히 드러나 보이는  코와 처진 눈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삶이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내리는 비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데  다 팔지 못하면 집에 두고 온 식솔들 먹거리 사는 일은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캔디를 사러 나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이상 없어 보입니다. 빨리 판 접고 집에 가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심난한 상황이니 말이죠. 좌판 위에 사탕, 우울한 여인의 얼굴, 그리고 뒷 배경이 되어 주는 벽에 입체감도 공간감도 전혀 느껴지질 않아 그림을 보는 내내 더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 "아줌마, 이거 내가 다 살 테니 얼른 집에 가요. 그렇게 앉아서 청승 떨지 말고, 어서 가요."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그는 여러 번 독일 보이론(Beuron)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의  종교적인 상징과 기하학 그리고 구성에서의 신성한 비율에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쎄뤼지에는 그의 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그에 따른 그림을 그리면서 1908년부터 그는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 랑송에서 미술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 아카데미는 나비 화가 폴-엘리 랑송(Paul-Elie Ranson)이 설립한 학교로, 설립 목적은 종합주의 의 명분을 보다 깊이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학교는 1955년까지 운영이 되는 데  이 기간 동안 그는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을 근거로 ABC<회화 첫걸음>(de la peinture)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그의 모든 미적 연구를 기억하기 위해 드로잉과 그림에 대한  이론적 논문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수산나와 장로들(Suzanne and Elders, 1910-12)

 

 

 

 

 

 

구약에 실린 수산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담았던 인기 주제입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남자들의 관음증도 있고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다니엘의 지혜로 극적으로 구하는 장면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시기마다 화가마다 수산나와 장로들의 묘사가 다른데 세뤼지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숨어서 보는 장로들의 모습이 가관입니다.  해바라기처럼 우뚝 묘사된 장로와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장로의 모습은 '나 여기 있다.'라고 광고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멍청한 장로들처럼 보이거든요. 넘볼 것 넘봐야지 말입니다. 그 후 세뤼지에의 작품 주제로 종교적인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계산과 측정 결과를 기초롤 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3. 나가기

 

폴 세르지에 가 퐁타방에서 고갱을 만나 미술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처럼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비록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고갱이 타이티로 떠나 버리면서 '나비파"로 불리는 그들은 흐지부지 되어 1900년대 이후 독자적인 길을 갖지만 말입니다. 그들 덕분에 20세기 회화의 기본 방향이 물꼬를 텄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3.03.24 - [지식&교양] - 46.인상주의 화가, 고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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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My Portrait, 1885>, 파리 살롱전 수상

나비파(Les Nabies)

목판화

장식성 뒤에 숨은 긴장감

신비로운 색채로 풍경을 담은 화가

보랏빛 풍경화를 남긴 작가

 

 

 

 

 

 

2. 생애

 

 

 

 

 

그림이 주는 장식성에 몰두했던 화가 펠릭스 발로통(Felix Vallotton,1865-1925)입니다.

펠릭스 발로통은  스위스 로잔의 평범하지만 조금은 보수적이었던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중등 교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엄격하게 대했지만 아들이 꿈과 목표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덕분에 17세 때인 1882년 발로통은 고전 연구로 로잔 대학을 일찍 졸업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한 발로통은 쥘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구스타프 블랑제와 쥘 르페르브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당시 쥘리앙 아카데미(Academie Julian)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 미술학교로 학구적인 교육 방식을 추구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는 작업이었지요. 발로통 역시 루브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홀바인, 뒤러, 앵그르의 작품에 크게 매료되었던 시기 이기도 합니다.  이 세 화가들은 그 후 평생 동안 발로통의 예술 세계의 기준이 되었으며 특히 초기 작품을 보면 그 영향을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 발로통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탄탄한 화가로 성장합니다.  1885,1886년 연달아 파리 살롱전에서 수상을 하기도 합니다. 바로 자신을  그린 <My Portrait,1885> 그림으로 말이죠. 살롱전 수상후 발로통은 매우 공격적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림도 많이 그렸고, 비평가로도 활동했으며, 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목판화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26살 때 목판화를 시작했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도전합니다. 이렇게 판화를 연구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인물이 바로 발로통입니다. 그의 목판화 작품 하나 감상하실까요.

 

 

 

 

 

 

 

 

 

 

<폴 베를린의 초상,(1891)>

 

 

 

 

 

 

 

 

 

오로지 흑백의 색깔이 전부인데 화가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재질이 나무라서 그럴까요?  깜깜한 밤에  이글거리는 불 앞에서 홀로 바이올린을 켜는 한 남자의 뒷 모습을 봅니다. 악기와 한 몸인 듯 코드를 누르는 왼 손과 활을 켜는 오른손  끝에 바이올린 선율이 예민하게 가슴을 파고 들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흑백의 정갈함이 품격으로 다가와 취향 저격입니다. 이 작품은  발로통이 완성한 첫 목판화 작품으로  그동안의 심차원적 구성의 목판화가 아닌 15세기적 단순성과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지요. 

 

 

 

"Simple is Best."

 

 

 

옷 입을 때 통하는 규칙이 그림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라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사라졌던 목판화는 새로운 부흥을 맞이하게 됩니다. 커다랗게 분할되지 않은 검은 면 위에 흰색의 면이 공간을 나누는 발로통의 목판화는 일본 판화를 연상케 합니다. 절제된 화면구성, 감각적이지만 실제와는 다른 진한 색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발로통은 자포니즘(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을 연구하고 자신의 작품에 선택적으로 수용합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회화의 사실성보다는 형식에서 발견되는 조형미와 장식성 었다고 보입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화가의 예술 세계는 자연스럽게 '나비파"로 연결되게 됩니다.

 

 

 

 

 

 

 

 

나비파(Les Nabis)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뜻이라고 해요. 초창기 주로 종교적인 주제와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주제를  다루었고, 나중에는 일상까지도 주제로 포괄하여 다루게 됩니다. 1888년 발로통과 함께 쥘리앙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세루지에 , 보나르, 드니 등이 마음이 맞아 결성한 예술 집단이기도 합니다. 고갱의 영향으로 색채 분석에 의존해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에 싫증을 느낀 이들이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묘사와 굵은 유곽선을 통한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기법으로 자신의 사색을 화면에 담아내고자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회화는 사실적 표현이 아닌 그보다 더 높은 사상적이고 심경적인 것을 담고 있어야 했고 이에 동의한 발로통은 189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비파에 합류하게 됩니다. 캔버스의 화면은 또 다른 창조이고 따라서 형태나 색채가 모두 작가의 해석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긴 발라통은 토포스를 해석하기 위해 자신의 사색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함을 명확히 알고 아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그것은 나비파를 관통하는 개념이었고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비대칭균형 같은 대담한 구도와 넓게 칠한 단색, 이분법적 화폭 등은 나비파의 대표적인 특징이 됩니다. 나비 파는 공통된 아이디어와 목표를 공유했지만 그들의 스타일은 상당히 다르고 개인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이즈음 발로통의 그림은 평평한 색상 영역, 단단한 가장자리 및 세부 묘사의 단순화를 추구하는데 집중합니다. 그의 그림은 명확한 형태 파악과 아라베스크에 의한 화면구성으로 나비파의 특색을 나타내었으며 주제의 취급에 있어 사회주의의 독특한 풍자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표현의 단순화와 굵은 윤곽선을 통해 장식적 기법을 차용한 나비파는 20세기 초의 추상과 비구상 미술 발전의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The ball(1899)>, 오르세 미술관

 

 

 

 

 

 

 

빨간 띠를 두른 노란 모자를 쓴 소녀가 공을 주으러 갑니다. 소녀의 그림자가 짧은 걸 보니 정오쯤 되나 봅니다. 소녀는 엄마와 함께 지인의  집으로 놀로 왔나 봅니다. 엄마와 가까운 친척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저 멀리 서 있네요. 산책 중인 가 봐요. 또래 친구가 없는 소녀는 혼자 공을 가지고 놀다가 어른들로부터 떨어져 멀리 나오게 되었습니다. 잔디밭과 나무 사이를 벗어나 모래밭까지 나왔으니 말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공만 보고 뛰고 가고 있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어른이라면 그 자리에 멈춰 그냥 굴러가게 놔두었을 텐데 말이죠. 언뜻 보면 모래밭이 경계가 되어 소녀가 있는 곳은 어린이들의 세계, 숲은 왠지 어른들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소녀가 서 있는 그곳에 누군가의 있음 직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 올려 보게 됩니다. 소녀의 걸음걸이가 어쩐지 빨간 공을 따라가기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오늘 안으로 저 공을 주울 수 있을까요? 저 공이 멈추는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발로통의 이 그림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하고 있어요. 이러한 시선은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파격적인 시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키요에는 과감하게 사물을 잘라버리거나 위에서 아래를,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등 대담한 시선을 구현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키요에는 인상파 및 나비파에게 색채, 구도, 표현 방식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1899년 발라통은 세 자녀를 둔 파리의 젊은 미망인 가브리엘 베른하임 죈과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부자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인상파 화가들과 관계가 깊었던 유명한 화상 알렉산드르 베른하임 쥔(Alexandre Bernheim-Jeune)과 조스 베른하임 죈, 가스통 베른하임 죈이었습니다. 가브리엘과의 결혼은 발라동에게 날개나 다름없었고 그는 이 행운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예를 들면 베르넘에서 소유한 갤러리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된 경우이지요. 결혼과 동시에 주 수입원이었던 목판화 작업을 그만두고 회화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결혼 초 발로통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의 표시로 아내와 아이들, 처가 가족들의 모습을 종종 화폭에 담았는데 1902년 처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더 이상 그림 속에 처가 식구들은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The Poker Game>,1902

 

 

 

 

 

 

 

<카드놀이>는 처가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직전 그려진 작품으로 왼쪽에 보이는 이들이 발로통의 장모와 그녀의 친정 가족들입니다.

작품은 사실 등장인물보다는 왜곡된 화면 구성이 특징인데, 높은 소실점으로 바닥은 마치 상승한 것처럼 느껴지며 전경을 꽉 채우는 테이블과 램프는 작품에 답답함과 동시에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당시 발라통의 불편한 심기를 이렇게 드러낸 걸까요? 코너에 카드놀이를 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친정식구들을 발라통은 아마 반대편 코너에서 마음적 거리감을 느끼며 그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 봅니다.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그들 세계와 격리된 발라통의 복잡한 마음이 이해도 됩니다. 오래전 보았던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2010>의 막내딸과 아일랜드 출신 집안 운전 기사였던 막내 사위가 상류층 문화에 속하지 못하는 장면이 떠올려 지기도 합니다.

 

 

 

 

 

 

 

 

발라통의 작품은 시대의 감각을 기민하게 담고 있었지만 스타일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마니아층이 있었던 반면 작품이 너무 건조하고 긴장 속에 묶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발라통은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1700여 점의 그림과 200여 점의 드로잉을 완성합니다. 예술 비평 또한 꾸준히 발표를 했고 8편의 희곡과 자서전을 포함 3편의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Felix Vallotton, <The Neva with light fog>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엔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언제나 우리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가요

외로움이 다가와도 그대 슬퍼하지 마

답답한 내 맘이 더 아파오잖아

길을 거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

 

 

 

 

강수지 <보랏빛 향기>

 

 

 

 

 

 

색채 때문에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화면 가득 채운 보라색과 코너에 외롭게 서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보라색이 주는 묘한 신비감이 도시를 삼켜버린 안개의 이미지와 어쩌면 이리도 딱인지 모르겠습니다. 공간의 빛을 볼 수 있고 자유자재로 내뿜을 수 있었던 작가가 바로 발로통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발라통의 작품은 지금 봐도 전혀 시대의 간격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감각적입니다. 주제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한 시도를 했으며 화풍도 매우 당양하게 변화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의 생활을 과장하게 표현한 연작과 산업화 이후 사람들의 욕망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사회풍자, 비판의식도 엿보이니 말이죠. 말년에 연속적으로 그려낸 일련의 풍경화에서는 삶을 관조하는 시선도 느껴집니다.  발라통은 60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신선한 매력과 색채의 순수함으로 그리고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작품은 간결하지만 복작한 듯 느껴지고 대담한 색으로 단순화된 인물들에게는 묘한 생동감이 느껴지지요.  불안과 희망이 묘하게 교차한 느낌이랄까? 이러한 패러독스야말로 발라통 작품이 가진 진짜 매력이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듭니다.

 

 

 

 

 

 

3. 나가기

 

 

 

 

호기심 충만하고 자기 연구에 성실한 발로통 덕분에 우리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 성향을 관찰해 볼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일찍 작가 생활을 시작했고, 다작을 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던 발라통!

 목판화를 발전시켰고 감히 쓰기 어려웠을 보랏빛을 사용해 풍경화를 남긴 독특한 작가 발라통!

보는 이의 인생을 신비한 보랏빛으로 물들여 주는 화가 발라통!

그의 그림을 맛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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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스페인 인상주의 

 지중해를 찬란하게 그려낸 화가 

 발렌시아 아카데미의 정회원

30대 중반에 유명한 세계적인 스페인 화가

파리 만국 박람회 대상 수상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1위로 입상

800 통이 넘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

 

 

 

 

 

"소로야만큼 바다의 차가운 파랑을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가는 없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호야킨 소로야(Joaquin Sorolla)가 만들어낸 스페인의 인상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나라마다 지역적 , 문화적 특성이 달라서 인지 그의 작품을 보면 이국적인 느낌과 함께 바닷가에 뛰어노는 아이들, 여인들 그리고 파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것 같다. 소로야의 작품은 강렬한 스페인의 태양을 너무도 부드럽게 표현했는데,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붓터치와 색감이 우리들의 마음의 온도를 한껏 올려놓고 간다. 입꼬리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말이다. 떠나 보자! 소로야가 부르는 지중해 붉은 태양 푸른 바닷가 근처 마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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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하면 벨라스케스, 고야,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나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인상주의'라는 커다란 카테고리를 채운  화가들 중 '호야킨 소로야'라는 스페인 화가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사람을 보고 너무 좋으면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이 있듯이 소로야의 그림을  보자마자 반했다고 함이 옳을 것 같다. 마치 생각지도 않은 보물지도를 발견한 것 마냥 횡재한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풍경을 그린 스페인 화가 '호야킨 소로야'는 1863년  눈부신 햇살의 해안 도시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발렌시아'라는 지명만 들어도 왠지 친숙함이 몰려온다. 축구 좋아하는  첫 째가 읊어대는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리고 발렌시아 팀 하도 많이 들어 익숙해진 지명이기도 하다. 한국의 이강인 (2018-2021) 선수가 잠시 머물렀던 팀이기도 하다.  소로야가 두 살 때 스페인은 콜레라가 만연했고 그 바람에 양친을 모두 잃게 된다. 그의 이모댁에 입양되어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의 재능은  10대 후반 스페인 미술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찌감치 드러나기 시작했다. 18세에 마드리드로 이주해 프라도 미술관에서 많은 거장들의 그림을 모작하며 실력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역시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은 거장들의 그림을 모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가 보다. 프랑스의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전주의를 비롯한 앞선 사조들의 거장들이 그려낸 그림을 모작했듯이 말이다. 1884년 그가 그린 대형 역사화는 스페인 미술전에 전시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1살이었다. 그후, 로마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가며 화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특히, 1885년 파리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고, 1884년  그의 작품 <슬픈 유전(Sad Inheritance)>, (1899)이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갑니다.

 

 

 

 

 

 

 

 

슬픈 유전,(sad-inheritance, 1899-1900), 파리 만국박람회 대상작

 

 

 

 

 

 

 

벌거벗은 천진 난만한 아이들 속에 유난히 가늘어 진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한 바위 길을 목발에 의지한 채 내려가는 두 어린 형제의 모습이 몸놀림이 자유로운 아이들의 모습과 대조되어 짠하다.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놀아도 모자랄 나이에 일찍 현실의 불공평함을 깨달았을 형제의 모습이 짚고 있는 가느다란 목발만큼이나 삶도 위태롭고 불편해 보인다. 바닷 가 강렬한 빛에 눈을 반쯤 가리고 뽈록 나온 배를 자랑스럽게 디밀고 있는 저 동심은 이 두 형제를 보고 무슨 말을 건넬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다. 도와 주려  팔을 부추기는 검은 옷의 수도자는 놀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하셨 던 모양이다. 불편한 몸의 두 형제들에게 발렌시아의 강렬한 햇빛과 푸른 바다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었나 보다. 밀려오는 파도에 금방 깨질 거품이라도 좋으니 물속에서의 자유를 그렇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푸른 파도와 자유롭게 재잘대며 천국에 있는 냥 웃어젖히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귓가를 때릴 것 같다.

 

 

 

 

 

 

 

 

 

소로야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사실적이면서도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이 주로 그려집니다. 특히 , 이 작품은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을 그린 작품으로 소로야의 연민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초기 어두운 분위기의 사실주의적 그림들이 후기로 갈수록 빛의 효과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발렌시아 바닷가를 주제 삼아 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특히, 프랑스 여행 후,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에 크게 영감을 받은 소로야는 프랑스의 빛과는 또 다른 발렌시아 지방만의 뜨겁고 찬란한 태양을 자신만의 색감으로 그려내는데, 독창적이면서도 행복감이 묻어나는 작품들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를 외광 회화라고 하며 바다를 집중적으로 그리면서 호아킨 소로야는 유명해졌다. 상상해 보라!

기 다란 빨랫줄에  사이즈가 제법 큰 캔버스를 걸고 푸른 발렌시아 바다를 배경으로 아이들, 이웃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델로 삼아 모랫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렸을 호야킨 소로야를 말이다.  집은 마드리드였지만 1년에 한 달 이상 정도를 발렌시아 해변에 머물면서 발렌시아 해변의 강렬한 빛과 넓은 수평선에 빠져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야외에서 주로 그림을 그린 탓에 그의 작품 유화물감 표면에 모래알들이 항상 섞여 있었다고 한다.

 

 

 

 

 

 

 

 

 

<바닷가 산책(strolling along the seashore),1909>

 

 

 

 

 

 

 

유학을 마치고 발렌시아로 돌아온 호아킨 소로야는 크로틸데 가르시아 델 카스티요와 결혼을 했고 2년 뒤엔 세 자녀를 두게 된다. 아내인 클로틸데와 그의 세 자녀는 호아킨 소로야의 인생에 큰 영향을 차지했으며 그의 여러 작품 속에 모델이 되기도 한다. 그런 그의 가족들은  호아킨 소로야의 든든한 후원자로 그의 곁에서 헌신합니다.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였던 소로야는 부모를 잃고 이모와 함께 자랐던 자신의 슬픔 가득한 경험을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히 아내 클로틸데와 주고받은 800여 통이 넘는 편지는 '남편한테 이런 지극한 사랑의 편지 한 번 받아 보고 싶다.'라는 부러움도 생길 정도로 그의 아내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께 전에 말했지요.

매번 같은 말만 하게 되네요.

그림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 그게 전부랍니다."

 

그가 아내에게 썼던 편지 내용 중 일부이다.

 

 

 

 

 

닭살 돋을 것 같은 소로야의 표현이 진심으로 다가 옵니다.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한 소로야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이 가슴에 와닿고요.

호아킨은 이 그림을 그리며 굉장히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속 두 여인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클로틸데와 큰 딸 마리아의 바닷 가 산책 모습을 스냅사진 찍듯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죠.  바닷가의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흰색 드레스, 양산 그리고 커다란 챙이 넓은 모자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고 산책길을 나온 모양입니다. 바람에 살랑 거리는 얇은 레이스가 두 사람을 마치 여신처럼 보이게 합니다. 주고받는 모녀 사이의 언어도 모델 자세를 주문하는 화가 자신도 무척 기분 좋은 작업 아니었을 까 싶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행복도 옆에 슬쩍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합니다.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 나오는 여유로운 일상을 표현해서 일까요? 기회가 되면  소로야가 그려낸 그 바닷가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그림입니다. 해변가를 폼 잡고 걸어도 좋겠죠. 소로야의 작품 성향을 보면 어떤 면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랑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 일본에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어  수없이 그려 대는  화가 이중섭의 모습도 살짝 겹쳐 보입니다.

 

 

 

 

 

 

 

 

 

 

Washing-the- horse,1909

 

 

 

 

 

 

 

 

"회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던 들라크루아의 일기 속 문장처럼 소로야의 그림은 일상 속에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삶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키우던 개를 데리고 바닷가 산책을 한 적은 있어도 화면 안에 꽉 들어찬 흰색의 말을 바닷가에 산책시키는 장면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이국적인 느낌으로 시선을 끌었던 작품이다. 내 어릴 적 마치 커다란 소를 코뚜레에 끼워 '이랴' 하고 몰고 가는 것처럼 스페인의 아이는 말에 재갈을 물려 자기 몸보다 몇 배 큰 말을 훈련시키고 있는 모습이 들라크루아의 일기 속 문장처럼 눈을 즐겁게 한다. 사극에 나오는 달리는 말도 좋고 경주마의 빠른 속도감도 나쁘지 않지만 그림 속 아이에게 유순하게 따라가는 말의 모습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신선하다.

 

 

 

 

 

 

 

호야킨 소로야는 늘 바빴고 분주하고 고된 전업 화가의 삶 속에서도 그는 그의 고향 해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았다고 한다.  그는 해변을 산책하는 숙녀, 물놀이하는 아이, 어부들 그리고 바다 풍경을 그 자리에서 아주 빨리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가 바다를 풍경으로 그린 대표작들과 작은 나무판에 그린 소품들까지 그가 바다 앞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행복해한 화가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대를 초월해 그의 그림은 여전히 따듯함과 함께   밝은 빛을 덤으로 받은 느낌이 든다. 소로야가 활발히 작업한 시기는 스페인이 필리핀 등지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에서 참패해 온 나라가 우울한 침체기에 빠졌던 때라고 한다.  틈만 나면 마드리드를 떠나 고향 바닷가로 돌아온 화가는 삶의 에너지를 회복하고  희망의 이미지를 얻고자 자신의 고향 발렌시아를 문턱이 달토록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위대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지 않던가!

 

 

 

 

 

 

1911년에 그의 일생의 대작, 길이 10미터, 총 14개의 작품인 <스페인의 광경>을 1919년 6월에 완성하고 마무리하였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스페인 전역을 다니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지중해 해안인 마드리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바다를 그렸다. 호아킨 소로야가 직접 가꾼 집과 정원은 9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내와 세 자녀가 스페인 국립 소로야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다정했던 남편,  자상한 아버지를 떠나보낸 가족들의 마음을 한 시인의 시어를 통해 표현해 본다.

 

 

 

 

 

 

목련후기

 

복효근

 

 

목련 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 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 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모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복 효근, <목련후기>, (마늘 촛불),2017

 

 

 

 

 

 

 

유럽에는 예술가들이 태어나 그들이 살았던 집들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그대로 보존한 하우스- 뮤지엄(House-Museum)들이 많다고 한다.  소로야 미술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기회가 되시면 유명 미술관도 보시고 소로야의 하우스 뮤지엄도 꼭 찾아보길 권해 본다. 소로야가 인류에게 준 이국적인 풍요로움을 한껏 음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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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기

 

 

 

 

소로야의 그림은 누군가의 설명이 없이도 힐링을 주는 작품이 많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알함브람 궁전의 독특한 기타 선율과 아이들이 있는 발렌시아의 푸른 바닷 가 풍경이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과 함께 오랫동안 시야를 가득 메울 것 같다. 그림 속 아이들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 잊고 있었던 순수의 세계로 데려다준다. 그의 작품에서 받은 따뜻함으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채우며 자신만의 독특함을 재 생산해 낸다. 이것이 좋은 그림들이 주는 순기능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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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로또 당첨이 되면 여러분은 무엇을 제일 먼저 하고 싶으세요? 저는 프랑스에 1년 정도 체류하며 주변 유명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싶습니다. 물 한 병들고 아주 편안한 운동화에 배낭 하나 메고 말이죠. 살다 보면 꿈같은 일이 가끔 현실이 될 때도 있나 봅니다. 말년 운이 기동차게 좋았던 인상주의 화가 한 분을 소개합니다.

 

 

 

 

 

 

2. 생애

 

 

 

 

바로 아르망 기요맹(Armamd Guillaumin)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역에 관계된 공증 업무를 했다고 하는데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파리에서 출생한 기요맹은 삼촌이 운영하는 란제리 가게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드로잉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위스 아카테미(Academie Suisse)에서 공부할 때 만난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그는 함께 블라인드에 그림 그리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guses)에 작품을 전시했고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합니다. 화가 동료들 중에서도 유난히 가난했던 기요맹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교량 및 보도 건설과 직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의 가족이 파리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곳은 물랭입니다. 물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일을 겪게 됩니다. 그중 하나는 산이 많은 물랭 지역의 풍경이 기요맹에게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훗날 파리의 유명한 카페 소유자이자  미술품 수집가가 되는 외젠 뮈러를 친구로 사귀게 된 것이지요.

 

 

 

 

 

 

 

 

 

<주앵빌에 있는 마른 강 위의 다리(Bridge over the Marne at Joinville,1871)>

 

 

 

 

 

 

 

당시 프랑스 제2제국에서 점점 활기를 띠던 도시정비는 제3 공화국에서도 계속됩니다. 특히 1870년대 경기불황 이래로 지속적인 투자와 효율성의 향상이 요구되었지요. 센 강의 다리와 제방의 교체는 확장된 거리와 새로 생긴 대로만큼이나 파리의 상업의 효율적인 흐름에 향상이 요구되었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이론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도 각 정부는 공공사업이 경기부양책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지요. 당시 센강의 생 루이 섬에 살았던 기요맹은 수많은 정비 프로젝트를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산업과 노동자를 즐겨 그렸던 기요맹에게 센 강변에서 펼쳐지는 사업들은 바로 그가 화폭에 담고자 했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의 작품에 브르주아를 소재로 한 작품은 하나 도  없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마른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로 기차가 검은 연기 뿜어 내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검은색의 열차와 연기 덕분에 조용한 풍경에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저게 뭐 그리 특별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마차를 타던 시대에 무쇠 덩어리 같은 증기 기관차가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선로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때 그 위압감과 경이로움은 과히 경탄할 만하지 않았겠어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 건설된 다리를 보러 다니는 여행 프로 그램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다리와 기차는 또한 화가들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고요.  다리 아래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시간을 다투는 기차와 시간을 흘려보내는 낚시군 사이에 흐르는 상반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런 다리를 보면 어릴 적 동네 오빠들이 장난 삼아 다리 위에서 밑으로 뛰어 내리 던 위험한 장면들이 떠오르 곤 합니다. 그림의  다리보다 조금 작고 낮은 형태로 기억합니다. 더운 여름날  동네 오빠들을  따라 비료포대에 바람을 넣고 그것을 잡고 하나 둘 밑으로 뛰어내렸지요. 공기가 빠져 둥둥 떠내려 가 던 저를 동네 어르신이 간신히 건져 살려 냈지요. 수영은 배운 적이 없으니 물을 실컷 먹고 죽을 뻔했습니다. 혼이 날까 두려워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했고요. 귀에 물이 들어갔었는 지 당시 응급 처치를 따로 하지 않아 지금도 제 양쪽 귀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런 다리 그림을 보면  아찔했 던 경험과 고마운 이의 손길을 동시에 떠올려 보게 됩니다.

 

 

 

 

 

 

 

 

 

 

 

 

<일드 프랑스의 경치(Paysage d'ile de&nbsp; France)>

 

 

 

 

 

 

 

강둑 위로 뻗어 있는 작은 길 위에 삼삼오오 산책을 나온 남녀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 사이에는 석양빛이 담겨 있고 급할 것 없는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봄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강변 가까이 내려간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요.

길이라는 것은 오고 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이 길을  보며 신 경림 시인의 <길> 이 떠올려집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진 자의 꽃>, 창비,1993

 

 

 

어때요? 이 시를 읽고 다시 그림을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나요?  같은 방향을 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분 좋은 산책길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요맹은 다른 화가들과 달리 안정된 수입원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끝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할 때는 일부러 야간 업무를 맡았다고 해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말이죠. 때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내 꿈과 정반대의 모양새를 취하고 나타날 때가 있지요. '나는 이런 일 할 사람 아닌데, ' 하고 말이죠.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불만을 터트리고 한없이 나를 끌어 내렸 던 일들이 엉뚱한 곳에서 단단한 경험으로 변신해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 줄 때가 있습니다. 기요맹의 고단했 던 시간도 그의 그림 속에 분명히 녹아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1870년  일어난 보불전쟁 이후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가 점점 증가했습니다. 기요맹은 당시 산업화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퐁투아주를 피사로와 함께 방문해 그림을 그립니다. 퐁투아즈에서 기요맹은 그곳의 풍경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한편 작품에 대한 구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게 됩니다.  세잔도 함께 퐁투아즈에 합류하면서 작품 세계는 더 깊어졌고 기요맹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화 세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당시 기요맹의 풍경화가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걸 보면 그가 두 사람보다  이 시점에서는 한 발 앞선 던 모양입니다.

 

 

 

 

 

 

 

이 무렵 세잔과 기요맹은 오베르에 있는 가쉐박사를 자주 찾아갔는데, 사회주의자이자 자유 분방한 사고의 소유자인  가쉐박사는 두 사람의 그림을 자주 구입해 주었다고 하네요. 가쉐박사와 고흐의 인연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가쉐 박사는 그림을 수집하는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친구였던 외젠 뮈러가 파리에 차린 카페가 성공을 거두고 그 역시 기요맹의 작품을 구입해 줍니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가 높아졌지만 기요맹의 재정 상태는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뒤 이어 잠깐의 파리 코뮌시대가 지나고 나자 대중들의 취향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찬바람 부는 시간이 닥쳐오게 됩니다. 문제는 사실주의의 대가 쿠르베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파리코뮌의 적극적인 지지자였거든요. 파리 코뮌은  70일 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으로 기억하시면 쉬울 듯합니다. 

 

 

 

 

 

 

 

 

 

<낚시하는 기요맹 부인(Madame Guillaumin Fishing, 1885)>

 

 

 

 

 

 

그림 속 그녀의 얼굴 표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꼭 다문 입술을 한 옆모습을 보니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모양입니다. 낚시하러 온 옷차림 치고 다소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요. 낚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혹시 세월을 낚으러 오신 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때는 기요맹과 결혼 전이라 그가 제시하는 다소 엉뚱한 주제에도 기꺼이 모델을 서 주지 않았을까 미리 짐작도 해 봅니다.

 

 

 

 

기요맹의 붓터치는 그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고 그림에는 더 많은 빛이 담겼으며 구성은 한층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의 인생 중반을 지나며 기요맹은 인상파 그룹의 확고부동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1886년, 드디어 노총각 기요맹은 사촌인 마리와 결혼합니다. 45세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다소 늦은 나이고 그 당시에도 꽤 늦어진  결혼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이었던 마리 덕분에 기요맹의 경제 사정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런 기요맹에게  1891년  뜻밖의 노다지 같은  행운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가 주관하는 복권에 당첨이  된 거지요. 제가 사는 곳에서도 편의점에 가면 슈퍼 로또, 파워 볼, 메가 등 다양한 종류의 로또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금액이 클 때 가게 밖에까지 줄을 서서 모래 한 알 같은 행운을  잡으러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요. 될까 말까 한 행운을 기요맹은 드디어 잡습니다. 거금 10만 프랑을  받게 되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의 말년을 살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내가 당선된 것처럼 신나는 일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뒤 기요맹은 이제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룰 바탕으로 에게해, 크로잔과 지중해 연안으로 주기적인 그림 여행을 다닐 수 있었고 네덜란드도 다녀오는 행운을 누립니다. 초년 부자 보다 말년 부자가 좋아 보이는 것은 기요맹 화가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기요멩은 86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로는 장수한 화가 중 한 명이었고 그가 사용한 강렬한 색은 나중에 야수파의 탄생과도 연결됩니다.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인상파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 이자 인상파에 가장 충실했 던 화가로 기억합니다.

 

 

 

 

 

 

 

3. 나가기

 

 

 

 

비록 폴세잔과 카미유 피사로의 위상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사는 동안 인상파의 이론을 삶으로 충실히 그려냈던 화가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막판 뒤집기 같은 그의 인생도 또렷하게 남고요. 강렬한 색상으로 유명한 기요맹의 작품들은 현재 전 세계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파리. 크뢰즈 주 와 프로방스 알프 코트 다쥐르의 지중해 연안 근처 주변 지역을 그린 풍경화들로 가장 유명하기도 합니다. 왕년의 기요맹은  "크로장 파"의 리더로 불리기도 했고요. 인상주의 화가들 목록에서 눈에 띄지 않아 생소한 이름처럼 느껴진 그의 삶을 재 조명해 볼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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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앵그르의  작업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 중 한 명"

She said,"impressionism has produced...not only a new, but a very usegul way of looking at things.It is as though all at once a window opens and the sun air enter your house in torrents."

-"인상주의는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열리고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당신의 집으로 마구 쏟아지는 것과 같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는 서로에게 어떤 느낌일까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동료 같은 느낌일까요 아니면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할까요. 오늘의 주인공 마리 브라크몽의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은 후자였던가 봅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그녀를 끌어내리기 바빴으니까요. 그녀는 실력에 비해 알려진 것이 많이 없습니다. 알려진 많은 것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들이 쓴, 출판되지 않은 짧은 전기인 La Vie de Felix et Marie Bracquemond 에서 발췌한 내용들이고요. 인상주의의 몇 안 되는 여성 화가이자 모네와 동갑내기 화가인 마리 브라크몽의 시간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2. 생애

 

 

 

 

 

 

self-portrait,1870, Marie Bracquemond

 

 

 

 

 

 

 

그림 속 그녀를 보며 제일 눈에 띄었던 부분은 짙은 눈썹과 포도 모양의 목걸이입니다. 오뚝한 콧날과 다부진 입술은 나름 고집 있어 보였고요. 재능 있는 여성이 시대를 앞서 태어나면 사회의 굳어진 관습과 편견에 의해 꽃도 펴 보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기 일 수 지요. 설사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결혼이란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장벽 하나가 더 생기게 됩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도 챙겨야 하고, 그리고 자신도 성장해야 해서 이 세 가지 모두 챙기고 가려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됩니다. 마리 브라크몽 역시 그런 여인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복재화가 시절 남편을 만났습니다.  아름답고 실력 출중한 그녀에게 남편이 질투할 만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사랑했으므로 남편도 그녀를 돕고자 했겠지요. 그러나 29살 그녀와 36살 그는 급속도로 가까워진 시간만큼 또 관심사의 차이만큼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마리는 프랑스 브류타뉴지방의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불행한 중매결혼으로 태어난 아이였죠. 어려서부터 부모가 자주 거처를 옮겨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지요. 브르타뉴에서 쥐라(Jura)로, 스위스로, 리무쟁(Limousin)으로 이사를 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안정적인 생활환경에서 사는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고 해요. 그녀가 10대가 되었을 때 가족들이 파리 근교에 정착합니다. 얼마 후 그림 복원을 하며 마을의 젊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나이 든 화가 오귀스트 바소르(M.Auguste Vassor)라는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이후 마리는 17세가 되던 해, 화실에서 포즈를 취한 어머니와 동생, 스승을 묘사한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당선됩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대단하지요.

 

 

 

 

 

 

 

그 후 그녀는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를 소개받았고, 앵그르는 그녀에게 조언도 해주고, 그의 제자 두 명인 이폴리트 플랑드랭과 에밀 시뇰에게 그녀를 소개합니다. 비평가 필립 뷔르티(Philoppe Burty)는 그녀를 "앵그르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지요. 그녀는 "앵그르님의 혹독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그림 분야에서 여성의 용기와 인내심을 의심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꽃 그림, 과일 그림, 정물화, 초상화, 장르화만을 할당하곤 했다"라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여성 화가들의 위치를 동등하게 취급해 주 진 않았나 봐요. 남성 화가들의 추천이 큰 바람막이가 되고 스승이 되어 준 그들 역시 정해 진 장르만 여성 화가들에게 강요하는 듯한 모습도 추측해 보게 됩니다. 마리는 이런 부당함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고요. 당시 시대가 안고 있는 변하기 힘든  한계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런 앞선 여성 화가들의 작은 부딪힘이 오늘날  현대를 사는 여성 화가들의 높아진 입지만큼  기억해 줘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작은 발걸음에 시작해 조금씩 진화하는 거니까요. 

 

 

 

 

 

 

 

그녀는 후에 앵그르의 스튜디오를 떠났고, 외제니 황후의 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감옥에 있는 세르반테스(Cervantes)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함하여 그녀의 작품에 대한 커미션을 받기 시작합니다. 사진기가 나오기 전까지 왕을 포함한 왕실의 중요 인물들, 역사적 사건 등 모든 것들은 화가의 손끝에서 붓터치 하나로 분위기와 고급스러움을 표현해야 했으니 그녀의 역할이 꽤 중요해졌다는 말로 여겨집니다. 스냅사진 한 장 이면 몇 초 안에 끝날 일을 말입니다. 그녀는 프랑스 박물관의 총책임자 니 외베르크르크 백작(Count de Nieuwerkerke)으로부터 루브르 박물관의 중요한 복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녀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올드 마스터들을 복제하고 있을 때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외젠 몽트와지(Eubene Montrosier)는 소개를 주선했고,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2년 동안 약혼기간을 거쳐 1869년 8월 5일 결혼합니다. 이듬해 그들은 아들 피에르(Pierre)를 낳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 기간 동안 의료 시설 부족으로, 이미 연약했던 브라크몽의 건강상태는 아이를 낳은 후 더욱 악화됩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도미니크 앵그르의 화풍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의 화풍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장식 제품이나 도자기 위에 표현된 그녀의 모티프들은 중세 시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나 1877년부터 1880년 사이의 기간 동안, 그녀의 화풍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양산을 쓴 세 여인 (Three Women with Umbrellas)> 속에 나타난 분할된 붓 터치 및 한색과 난색의 병렬적인 표현 방법 등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어요.

 

 

 

 

 

 

 

 

 

 

<양산을 쓴 세 여인들, 일명 삼미신>, 마리 브라크몽, 1880, 오르세 미술관

 

 

 

 

 

붉은색, 흰색 양산을 쓴 여인들의 옷차림과 부채를 쥐고 얼굴 윤곽과 목선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앳된 보이는 헤어스타일로 포즈를 취한 세 여인들의 눈부신 모습들로 화면 전체를  꽉 채웁니다. 공연을 보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귀족 집에 초대받아한 것 멋을 낸 모습이 당시 트렌드를 알 수 있게 해 주어 보는 재미도 줍니다. 움직이기 다소 불편해 보이는 이 차림새 만으로도 그들의 경제적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당시 신분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며 좋은 점이 바로 이렇게 당시의 역사 이자 기록을 보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마리 브라크몽은 그녀의 남편 펠릭스가 예술 책임자로 있던 오퇴유(Auteuil)의  하빌랜드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합니다. 그녀는 저녁식사 서비스를 위한 접시를 디자인하고 1878년 만국박람회에서 출품되었던 '예술의 뮤즈들'을  주제로 그린 커다란 대형 도자기 패널 작품을 그려냅니다. 꾸준한 그녀의 노력 덕분으로 1864년부터 정기적으로 살롱에 그녀의 그림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매체상의 제약을 발견하자, 그녀의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에게  판화 에칭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새로운 매체와 그가 존경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과 같은 올드 마스터들에게도 소개합니다. 이 시기까지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후원회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벨기에 화가 알프레드 스테방스(Alfred Stevens)의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BUT

 

 

 

 

 

 

 

1887년과 1890년 사이에, 인상파의 영향으로, 브라크몽의 스타일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인상파의 영향으로, 브라크몽의 스타일은  캔버스는 점점 커지고 색은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가고 싶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고, 튜브형 물감이 발명되어 휴대가 간편해지면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지게 됩니다.  그즈음 그녀는 또한 외광파로 알려지게 된 마네, 모네와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파리 만국 박람회로 인해 식민지 시대 얻게 된 넘쳐나는 신기한 물건들과 동양 특히 일본의 우끼요에 판화의 등장으로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지요. 몰랐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얼마나 신나 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야외에서, 특히 세브르(Sevres)의 그녀의 정원에서 그려집니다. 그녀의 마지막 그림들 중 하나는 <세브르의 정원에 있는 예술가의 아들과 여동생(The Artist's Son and Sister in the Garden at Sevres)이란 작품입니다. 브라크몽은 점차 그녀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확립했고, 1879,1880, 그리고 1886년의 인상파 전시회에 그녀의 작품을 전시할 초대장을 받기도 합니다. 그녀의 그림들 중 일부는 <모던 라이프(La Vie Moderne)>에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1881년 그녀는 런던의 더들리 갤러리에 다섯 작품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를 통해 폴 고갱(Paul Gauguin)을 만나 가난한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오기 했다고 해요. 고갱은 마리 브라크몽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특히 그는 그녀가 현재 원하는 강렬한 음색을 얻기 위해 그녀의 캔버스를 준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브라크몽은 그녀의 작품을 계획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언뜻 보기에 자발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스케치와 데생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경향과 많이 달랐던 거죠.

 

 

 

 

 

 

 

 

 

Under the Lamp(1877), Marie Bracquemond

 

 

 

 

 

 

가스램프 아래에 두 남녀가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인상파 화가 알프레드 시슬리이고 여인은 나중에 시슬리의 아내가 되는 마리 루이즈입니다. 마리가 자신의 집에 두 사람을 초대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녹색 램프를 이용한 빛의 효과에 주목한 것이 특이합니다. 큰 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연기와 여인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슬리의 표정에 상대를 향한  애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단출한 식탁 위에 쌓여있는 접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케트 빵과 후식 접시에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녹색 램프를 한 번 더 쳐다보게 합니다.

 

 

 

 

 

 

그들의 아들 피에르에 따르면, 페릭스 브라크몽은 종종  그의 아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퉁명스럽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걸까요? 아니면 어떻게 감히 남편의 작품에   부인이 훈수를 둘 수 있나? 하는 좁쌀영감 심보 때문일까요? 아무튼 그녀의 남편은 그릇이 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공감해 드릴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의 그림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찾아오는 남편과의  가정 내의  마찰로 마리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림에 대한 집중도도 당연히 떨어졌겠지요. 점점 관객의 시선에서 그녀의 작품이 멀어져 가며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낙담했던 마리 브라크몽은 몇 점의 개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활동을 급기야 포기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동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의 일생 동안 인상주의의 확고한 옹호자로 남아있게 됩니다. 인상주의가 대세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죠. 가정 내에 변화의 기운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는 역할은 대부분 여성들이 더 빠르다고 여겨집니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남편의 많은 공격들 중 하나인 스타일에 대해 옹호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상주의가... 새로운 시각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한 번에 열리고 햇살과 공기가 집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3. 나가기

 

 

 

그녀는 1916년 1월 17일 파리에서 사망합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개인전을 가진 적이 없었지요. 그녀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919년에 베른하임 죈 갤러리에서는 그녀를 위하여 회고전을 개최합니다. 이 회고전의 도록 서문은 그녀의 열정적인 옹호자이자, 그녀의 작품 <양산을 쓴 세 여인, 일명 삼미신>을 구매하여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e Geffroy)가 직접 집필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프랑스 미술사학자 앙리 포시 옹(Henri Focillon)은 1928년  그의 저서에서 마리 브라크몽은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셋과 함께 인상파 운동의 세 명의 위대한 여성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회고적으로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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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색채분할은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
'심사 없고, 포상도 없다.(No jury nor awards)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 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 -Impression),1898
마티스의 작품을 최초로 구매해 준 사람
독립미술가 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앙데팡당)의 창립회원 중 한 명
세일링(Sailing)을 좋아함
점묘법

 

 

7개 힌트의 주인공은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1863,11,11-1935,8,15)]이다. 처음에 그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했다. 그러다 쇠라와 함께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며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쇠라를 대신해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된 화가다. 일찍 가버린 동료 화가의 빈자리를 그는 어떻게 그림과 삶으로 채워갔을지 따라가 보자.

 

 

 

 

 

 

2. 생애

 

 

파리 태생이고 원래는 건축 쪽의 수련을 받고 있었으나, 18살 예민한 시기 모네의 작품전을 보고난 후 화가로서의 길로 들어선다. 

미술사에서 조르주 쇠라와 함께 '신인상중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평가받으며, '앙데팡당전'을 창립한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쇠라의 조직적인 작업 방식과 색에 대한 이론에 충격을 받아 쇠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친구가 되며, 신인상주의와 분할주의 방법을 묘사함으로써 후계자가 된다. 쇠라의 영향으로 인상주의의  짧은 붓 터치를 포기하고, 원색의 작은 점을 과학적으로  이웃하게 찍어 캔버스 위에서가 아니라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점묘주의의 정의를 구현해 낸다. 상상만으로도 섬세하고 눈과 팔에 무리가 갈 것 같다. 작품하나가 제대로 나오려면 몇 년은 기본으로 기다려 줘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모든 미술사는 기존 앞 세대의 흐름에 반기를 들며 탄생하는 것이 숙명이란 생각을 해본다. 당대 젊은이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자양분으로 그들의  열정까지 덧대어지며 미술사의 큰 물줄기가 방향을 튼다. 시냐크와 쇠라의 시작도 인상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실험을 하고 주류로 인정받기 까지 화가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평생 숙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 아닐까 싶다. 수없이 질문했을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일까?라는 스스로 의 질문에 작품으로 증명해 내는 그들의 뒷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쳐주고 싶어 진다. 그 결과물이 작품으로 승화되었음을 알기에 그들의 작품 앞에 서면 거친 숨결이 되어 오감을 자극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본다.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섞여 또 다른 이야기로 풍성해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누군가는 펑펑 울며 힐링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잃었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왔던 제자리로 씩씩하게 돌아가는 치유의 경험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폴 시냐크는 조르쥬 쇠라(Georges Seurat)와 함께 독립미술가협회를 만들어 '심사 없고, 포상도 없다.'라는 슬로건으로 파리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고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완전히 자유롭게 대중의 판단에 맡기도록 예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영향으로 24회 독립작가전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미술사에서 정의내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sme)'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시냑(Paul Signac,1863-1935)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이론이자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특히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된다고 한다.

 

 

 

 

 

 

2023.03.28 - [지식&교양] -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47. 신인상주의, 조르주 피에르 쇠라(7)

고등학교 시절 쇠라의 이름과 함께 기억에 남았던 영상은 단 한 가지였다. 점잖아 보이는 남성 옆에 여인이 입고 있던 옷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하게 나온 스타일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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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이었던 쇠라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영향은 그의 그림에도 미쳐 그가 이듬해 그려낸 <우물가의 여인들>이란 작품에 고스란히 남겨진다. 전문가들은  시냐크의 이 작품이 쇠라의 유작이 된 <서커스> 작품의 영향을  은연중 많이 받았다고 평가한다.

 

 

 

 

 

 

<우물가의 여인들,1892,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

 

 

 

 

 

 

<우물가의 프로방스 여인들,1892> 제9회 앙데 팡당 전시회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지중해의 작은 항구 마을 생 트로페를 배경으로 한 점묘법 그림이다. 황금 언덕, 푸른 바다, 두 명의 여인, 그리고 이미 물을 길어 언덕길을 오르는 여인 등 이야깃거리가 풍성해 보인다. S자 모양의 황금 언덕을 기준으로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푸른 바다를 쇠라의 유작인 <서커스, 프랑스 오르세 박물관, 1891> 작품과 비교해 관객이 앉아있는 정적인 공간과 같은 느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반대편 여인들이 있는 동적인 공간을 <서커스> 작품에서 서커스 단원들이 말위나 채찍을 휘드르는 동적인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듯 그려졌다는 평가다. 개인적으로 저 그림을 보고 놀랐던 점은 우물가 풍경이 서양이나 동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여인네들의 옷차림과 항아리 형태가 다를 뿐 물을 길어 올리며 주고받았을 일상의 잡다한 얘기들은 왠지 비슷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작은 시골동네 소식을 이곳 아니면 어디서 듣겠는가 말이다.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추측해 본다. 또한 '점묘법'을 지키기 위한 부담감도 함께 느꼈을 시냐크의 개인적 고뇌도 생각해 보게 된다. 

 

 

 

 

 

 

 

19세기 후반 시냐크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프랑스 무정부주의 사상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체제의 변화 방향성을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시냐크는 아나키즘 잡지에 그림을 실을 만큼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산업화로 인해 부의 양극화와 신흥 자본주의가 사회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AI로 인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충격만큼 그 당시 프랑스 시민들 또한 신문물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과 그럴 환경이 조성되지 못해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 간의 격차가 엄청났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Portrait of Felix Feneon)>

 

 

 

 

 

작품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에서 시냐크의 이러한 무정부주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작품에서 그는 미술비평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페네옹의 초상을 점묘로 표현했다. 추상적인 패턴과 색채를 사용했고 색조와 형태, 구도를 기계적으로 분할해 안정성을 보여줬다. 인물과 배경을 3차원적 공간에서 어우러지게 배치하기보다 각각의 요소들이 조형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강조하려 했다는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를 위해 분할주의에 입각한 점묘법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시냐크는 세일링(sailing)을 좋아하여 1892년부터 여행하기 시작하여 작은 배를 타고 프랑스의 거의 모든 항구, 네덜란드까지 갔으며, 상트로페를 기지로 삼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까지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방문한 여러 항구에서 시냐크는 빨리 스케치한, 생생하고 다채로운 수채화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스케치들로부터 작업실에서 큰 캔버스로 옮겼는데, 이전에 쇠라가 사용하던 작고 다양한 점과는 매우 다르게, 색을 작은 모자이크 모양의 사각형으로 조심스럽게 작업하기도 했다. 쇠라의 점묘법이 물 샐 틈 없이 꼼꼼하게 점을 찍어 표현을 한 것과 달리  시냐크는 큼직한 터치로 모자이크식 네모난 형태의 붓터치감으로 자신만의 점묘법을 그려 차별화하는 센스도 발휘한다. 눈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일 것 같다.

 

 

 

 

 

 

 

 

<항구의 집들, 생트로페,폴 시냐크>

 

 

 

 

 

 

 

 

물에 얼룩얼룩 비친 항구의 집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크고 강한 모자이크 사각형으로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시냐크는 배를 타고 여러 향구 도시 여행을 통해 다양한 풍경을 접했고, 특히 물이 있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생트로페에  주로 머물며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녔고, 물과 돗단배는 자연스럽게 시냐크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강렬한 색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면 전체에 풍부한 색채감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시냐크 스타일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 항구도시"다. 시냐크의 예술적 발전이 이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며, 신인상주의가 야수파의 시작을 알리는 사조로서 한 몫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전의 시냐크 작품에서 많이 보이 던 경직된 선적인 면이 많이 줄어들고  신인상주의의 특징이 극대화된 색채 요소들이 더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고흐를 만나 정기적으로 파리 외곽의 강과 카페 등을 그리기도 했고 고흐는 그런 시냐크의 기법에 감탄했다고 한다. 시냐크의 그림 중 고흐가 살았던 <노란 집> 배경의 그림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3. 나가기

 

 

 

점묘법의 창시자인 쇠라의 이른 죽음과 대조적으로 시냐크는 오래 살았다. 그만큼  '점묘법'을 알리기 위해 애쓴 시간이 길었다는 얘기도 된다. 흔히들 기억하는 것은 첫 번째를 기억하겠지만 점묘법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발전 시키기 위해 노력한 폴 시냑에게 개인적으로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가 없었다면 쇠라의 '점묘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점묘법'을 알리기 위한 저술활동, 그리고 독립미술가 전 '앙데팡당'을 기획해 젊은 작가에게 미술공간을  제공한 점 등 은 기억해 줘야 할 부분이란 생각을 한다. 그의 그런 노력 덕분에 인상주의로 시작했지만 개성 강한 화풍을 지닌 빈세트 반 고흐, 고갱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올 수 있었고,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도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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