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후기 인상주의
자포니즘
나비파
나비주아브(Navi Zouave)
드레퓌스사건(1894-1908)
앵티미즘(intimisme,내면주의 경향)
2. 생애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이며 판화가이다.
1868년 11월 11일 손에루아르주 퀴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뷔야르의 아버지는 은퇴한 해군 보병 대장이었으며, 제대 후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마리 뷔야르보다 27살이 연상이었으며, 어머니의 직업은 드레스 재봉사였다고 한다. 그의 삼촌 역시 직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주변 환경 속에 익숙해서일까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옷의 무늬, 질감, 벽 문양등 장식적인 요소의 섬세한 그림이 유난히 돋보이는 화가다.
1877년 아버지가 은퇴한 후, 뷔야르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했다. 어머니의 재봉 작업장이 있던 Rue Daunou로 이사한 후, 마리스타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성적이 좋아 뷔야르는 장학금을 받아 명문 리세 퐁텐(Lycee Fontaine)에 출석하였고, 수사학과 예술을 공부하면서 미켈란 젤로의 작품과 고전 조각을 드로잉하기 시작한다. 레세에서 뷔야르는 미래에 나비파가 되는 케르 자비에 루셀, 모리스 드니, 작가 페에르 베버, 그리고 미래의 배우이자 무대 감독이 되는 오렐리앵 뤼네포를 만나게 된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그는 나비파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색의 영역과 내부의 장면을 조합한 그림을 제작하였고, 주제는 색과 패턴에 혼합시켰다. 뷔야르는 또한 극장의 세트와 실내 장식을 위한 패널에 채색을 하거나 접시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디자인하는 장식 예술가로도 활동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근대화와 도시화는 건축이나 집의 외관뿐만 아니라 실내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던 시기였으며 당시는 아르누보로 대표되는 실내 디자인이 막부상하던 때였다.
병풍이라는 동양적인 재질에 서구의 낯선 풍경들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니 이국적이고 근사하다. 당시의 옷차림이나 가족의 모습 등 문화를 엿볼수 있어 개인적으로 더 좋은 것 같다.
1889년 말에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와 다른 리세 출신 친구들과 함께 반비밀주의이자 반신비주의 모임인 나비파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고갱에게 영향받아 폴 세뤼지에를 중심으로 1890년경 결성된 나비파의 특징은 상징주의적인 신비로운 화풍으로 전통적인 회화와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단체였다. 대부분이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 출신의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피에르 보나르는 문학과 연극,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에 관심이 많은 지적이고 영적인 야심으로 가득한 젊은 화가들이었다. 이 모임이 추구한 방식은 사실적 표현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기반한 회화이다. 나비(Navis)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말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젊은 화가들이 새 시대의 사조를 여는 리더 역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젊은 화가 폴 세뤼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폴 고갱의 지도에 따라 색의 영역으로 구성된 추상에 가까운 항구 그림을 그려낸다. 이것은 최초의 나비파 작품인 <부적(The talisman)>이 되었고, 세뤼지에와 그의 친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은 예술을 그 토대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한 최초의 나비파 작가가 된다. 모리스 드니를 통해 뷔야르는 랑송의 스튜디오나 Passage Brady의 카페에서 만나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비밀이었고 회원들은 암호화된 별명을 사용하였다. 뷔야르의 별명은 그의 군 복무로 인하여 나비 주아브(Navi Zouave)가 되었다.
2023.03.24 - [지식&교양] - 46.인상주의 화가, 고갱(6)
나비파 일원중 뷔야르는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만난 피에르 보나르(1867-1947)와 만나게 되고 이후 둘은 예술적 유대감과 끈끈한 우정을 평생 이어간다. 1890년부터 10연 년 간 지속된 나비파 시기에 두 사람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밀한 일상의 '분위기'와 '느
낌'을 담는 그림을 추구한다. 19세기말 부르주아 가정의 단란하고 내밀한 생활을 즐겨 다룬 앵티미즘(intimisme, 내면주의) 경향을 대표한다. 일상의 모티브들을 따뜻하고 친밀하게 그렸던 그의 작품들에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앵티미즘은 인상파들의 풍경화와는 달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가정적인 실내 장면에서 빛과 색을 찾아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그림을 그리는 경향으로 뷔야르와 보나르를 대표적으로 꼽고 있다. 일상 안에서 위대함을 본 작가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In Bed>, Musee d'Orsay,1891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림 속 그나 그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옆자리에 눕고 싶어 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앵티미즘 작가답게 풀어낸 보고 또 보아도 쏟아지는 잠이 마치 선물 같다. 평면적인 그림으로 큰 이야깃거리 없이 그저 소박한 일상의 공간을 담아낸 이 작품은 요즘작가가 그려놓은 것처럼 심플해서 더욱 매력적이다. 불면증 환자들이 보면 한방에 치유가 될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림책 같기도 하고 일러스트와 같은 느낌때문인것 같다. 과감하게 화려한 색을 화면 가득 펼쳐 보이던 뷔야르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단출한 무채색과 몇 개의 선만으로 어느 일요일 오후의 늦잠 같은 달달한 휴식을 그려내고 있다.
에두아르 뷔야르의 가장 큰 관심은 여성 심리였는데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재봉사로 일했기에 가게에는 항상 여성이 많이 드나들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뷔야르는 섬세하고 모호한 여성 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여성들이 실내에서 대화하거나 뜨개질하는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분위기는 경쾌하고 자유롭게 표현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에두아르 뷔야르이지만, 뮤즈였던 3명의 여성이 있다. 중요 후원자인 나탕숑의 아내이면서 사교계의 여왕인 미시아와 스위스 미술 화상의 아내 루시, 그리고 여배우 루시 벨린이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남녀 관계는 내 가치관으로는 불가사의 한 면이 많아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평탄한 색면에 인물이 입은 옷과 커튼, 벽지들의 패턴 장식과 대담한 화면 구성이 두드러진다. 뭉개진 얼굴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장식적인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벽지나 직물의 패턴이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뷔야르는 모델에게 따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구도를 뛰어난 관찰력으로 스케치를 하고, 나머지는 기억과 상상으로 분위기와 느낌을 표현했다. 그림 속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판타지 소설도 아닌데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왼쪽 여인과 가운데 포스가 장난이 아닌 검정옷차림의 어머니처럼 보이는 이가 떡 버티고 계시다.
'어디 한번 올테면 와봐.'
하는 식으로 형님 포스 풍기신다. 왼쪽 여인은 벽 장식이 과감히 주인이 되어 여인을 그 패턴 안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작업 중 상황 같다. 궁둥이가 반쯤 걸쳐진 느낌이랄까? 뭉개진 얼굴과 두 손이 없었다면 패턴의 하나로 착각할 뻔했다.
나비 파는 언제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공통된 생각과 이상을 공유했으나, 1900년 전람회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1894-1908)에 의해 나비파의 해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는 유태인 프랑스 육군 장교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면죄되기 전에 유배지로의 추방이 선고되었다. 나비파에서 뷔야르와 보나르는 드레퓌스를 지지한 반면, 드니와 세뤼지에는 프랑스 육군을 지지하였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 범행동기, 범행 방법과 시기 등이 명확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 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런 사실에 격노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1898년 1월에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렸다. 이 글은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사회는 본격적으로 드레퓌스 파 와 반드레퓌스 파로 나뉘어 내전 수준에 준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비화되었고 국제사회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1906년 재심을 통해 무고함이 입증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
2023.07.12 - [지식&교양] - 50-14. 나비파,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23
2023.07.06 - [지식&교양] - 50-13. 나비파,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22)
1900년 나비파가 해체된 후 뷔야르의 스타일과 주제는 변화하였다. 나비파와 함께 할 때에 뷔야르는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1900년 이전에 그렸던 밀폐되고 붐비는 어두운 실내를 버리고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를 더 많이 그리기 시작하였다. 뷔야르는 계속해서 실내를 그리긴 했으나, 실내는 더 밝고 깊어졌으며 색채는 더 다채로워졌고, 얼굴과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졌다. 빛의 효과는 주제가 실내이든 파리의 공원과 거리이든 뷔야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림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장식뿐이다.
1900년 이후 나비파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보다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화려한 디테일과 생생한 색상으로 풍경과 실내를 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저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 인물에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내기도 했다.
말년에 뷔야르는 점차 자연주의로 돌아가, 1908년 11월 Gallerie Bernheim- Jeune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다수의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반모더니즘 비평가로부터
"체계적인 변형에 대한 우아한 항의 "
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3. 나가기
에두아르 뷔야르의 작품은 초기작에 비해서 1920년대 이후를 거치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바뀌어갔다. 나이가 들면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섬세한 관찰력을 지닌 그는 매번 변화와의 징후를 감지하고 나비파 화풍을 거쳐서 화법과 양식을 바꾸고 끊임없이 평생 기술을 익히는데 주저하지 않은 화가이다. 인물 묘사부터 아르테코까지, 회화뿐 아니라 실내 장식 예술가였고 중년을 지나서 초상화, 풍경화까지 장르를 점점 확장하여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호평을 얻었으며 동료 화가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잔잔한 일생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관성 있는 평을 받은 복 받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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