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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파 인물들 속에 낯선 일본인 이름이 나와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떻게 그 시대 때 프랑스 파리까지 와 공부할 생각을 했던 걸까? 그의 지나 온 시간이 궁금해 들여다봅니다.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는 육군 군의총감의 자리까지 오른 군의관이었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소학교)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지타는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피카소나 오드리 헵번 같은 유명인들이 고양이를 좋아한 것처럼 후지타 역시 고양이와 여자를 사랑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고양이 그림은 생각보다 비싸다고 한다. 화가의 등에 장난치듯 올라 선 고양이의 자세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후지타의 영감을 생생하게 불어넣어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적을 굳이 따지지 않는 다면, 한국 개화기시절 책상 앞에 앉은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인다. 공부를 마친 후지타는 결혼과 함께 신주쿠에 아틀리에를 차렸지만 곧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26살에 일본에는 일 년 전에 결혼한 부인을 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처음 유학을 떠날 당시에는 3년을 계획하였지만 파리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미술가를 무시하는 나라'인 일본에 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북한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자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박태원의 머리스타일이다. 지금 보면 동그란 안경태에 다소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당시 후지타 쓰구하루가 유행시킨 일명'갓빠머리'스타일이라고 한다. 서양물 먹고 돌아온 후지타가 긴자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요즘 연예인 못지않은 패션 감각이었으리라. 그를 따라한 스타일이 유행을 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파리로 유학을 온 후지타는 4년 후 파리에서 각광받는 화가로 성장하며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일본 출신의 화가로 유명세를 탄다. 그는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합니다. 1917년 6월 파리에서 고대하 던 그의 첫 개인전이 열립니다. 당시 수채화 110점이 모두 팔렸고 피카소가 이 전시를 3시간에 걸쳐 감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1919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여섯 점이 모두 입선되어 선배 화가인 마티스와 보나르 등과 같은 방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리베라와 샤갈 등과 교류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예술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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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쓰구하루는 일본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을 중시하는 동양의 화풍으로 서구적인 주제를 그렸습니다. 특히 삽화로 파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인상파들에 의해 일본판화인 우키요에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시기로 일본 출신인 후지타는 삽화로 단숨에 파리 화단에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우키요에: 17세기-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데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의 형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에서의 송금이 끊겨 빈곤한 나날을 보내던 중 후지타는 프랑스인 모델 페르난드 바레이(Fernande Barrey)와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파리 이주 후 후지타가 그린 주제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딘지 섬뜩하고 염세적이며 차가운 표정의 아이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을 겪고 난 아이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작은 입술만큼이나 표정도 새초롬한 것 같습니다. 어딘지 생기도 없어 보이고요. 피부가 너무 창백하게 보여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인 가부키 느낌도 들고요.
1921년 살롱 도톤에 '나부상'을 출품하여 '놀라운 유백색의 피부'라는 극찬을 받은 후지타는 여자의 누드, 고양이, 어린아이들을 즐겨 그립니다. 특히 후지타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미끄러질 듯한 피부 표현법은 지금도 놀랄 정도입니다. 촉촉하고 빛나는 피부를 뽐내는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의 작품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들 뿐만 아니라 경탄을 불러일으킬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법과 기묘한 구도와 형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구사한 인물의 표현 방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지타는 자신의 캔버스나 재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자신만이 가능한 기법을 숨긴 채 떠났습니다.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는 등 화가로서 성공하기 시작한 후지타는 192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나폴레옹이 1802년에 제정한 훈장으로서 프랑스의 훈장 중 가장 명예롭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
훈장 수훈자는 각종 국가적 행사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후 후지타는 1933년 일본으로 돌아가 파리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일본의 화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후지타 쓰구하루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참혹했던 전쟁으로 기억됩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주요 3국 중 하나였고요. 전쟁 시 일본의 미술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협력을 했습니다. 파시즘체제 아래 권력을 옹호하거나 민중을 선동했고, 종군기록화를 제작함으로써 실제 전투장면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15년간의 전쟁 속의 미술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잊혀 갔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전쟁 책임의 문제와 패전에 대한 논의는 금단의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후지타 쓰구하루 역시 미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화가입니다. 왜냐하면 종군화가로 전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이죠.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종전 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여론의 호된 비판을 견디지 못한 후지타는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59년 아내와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습니다. 이름을 레오나르 후지타로 개명하고요.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하고 그의 시신은 일본이 아닌 파리 교외에 묻힙니다.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생애는 일본의 근대상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후지타는 서양화를 본토에서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후 일본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서구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근대 일본, 전통에 대한 추구를 통해 서구와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던 근대 일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후, 패전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선 자신 역시 전쟁의 피해자임을 역설했던 근대국가 일본의 모습과 스스로 지지하며 그렸던 전쟁화에 대한 비난을 자신이 희생양이 된 듯 그려낸 후지타의 말년의 작품들이 소리 없이 겹쳐집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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