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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파장 분위기였고, 입구 쪽으로 새로운 그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전시회를 위해 작업을 하느라 기계소리까지 윙윙거려 전체적으로 어수선했습니다. 마음이 급해 후다닥 그림을 보고 올 요량으로 전시관을 휘젓고 다녔지요. 그러다 관심 있는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와 자세히 보려고 그림 쪽으로 향했습니다. 디테일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생각 없이 뒤로 물러서다 그만 백인 할머니의 발을 밟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로 당황했고 할머니는 구시렁거리시며 기분 나쁜 황당함으로 언짢은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모기만 한 소리로 사과를 하고 얼른 자리를 피했지요. 관람객과 그림 사이의 거리감도 중요하지요.
자신의 작품을 45cm에서 봐 주기를 바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러시아 출생의 미국인 화가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입니다. 로스코의 그림은 평면 캔버스에 단순한 형태와 순색(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의 미학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이 쏟아내는 고요하고 정적인 에너지가 어찌나 크고 격정적인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모를 경건함마저 들어 혹자는 그의 그림을 종교적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에게, 이것도 그림이야?'
"네모, 색 몇 개 ... 작가가 너무 날로 먹는 것 아냐?", "네모와 색위에 달 하나 그리면 화투그림이네.", "이런 그림이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관람객들도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마크 로스코-
너무 단순한 그의 그림 앞에 관람객들은 당황합니다. 저런 그림이 왜 값이 비싼 지 이유조차 아리송해 고개까지 갸우뚱 하게 되지요. 그러나 마크 로스코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단순함에서 비롯됩니다. 전(before)과 후(after)가 있듯이 마크 로스코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알고 다시 이 그림들을 바라보면 뭔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 학생 연맹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마크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칩니다. 젊은 시절 드라마에 가졌던 관심을 발전시켜 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차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은 마크 로스코의 사상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모든 시작점에 선 창작자들이 그러하듯 로스코 역시 전원 풍경화, 실내화, 도시 풍경화, 정물화 , 그리고 뉴욕의 지하철 그림들 등 다양한 시도를 해 봅니다. 그때 그려진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지하철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평면적이고 냉소적으로 그려낸 초기 작품이지요. 작가는 인간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1930년대 다다이즘과 피카소의 그림이 유명하던 시절 마크 로스는 그리스비극, 니체의 비극, 셰익스피어 비극 등에 심취합니다. 한마디로 주류화풍과 거리 두기를 한 셈이지요. 대신 신화적 요소를 차용해 오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잃어 난 후
절단된 신체 말고는 그릴 것이 없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심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인물을 사용하듯, 마크 로스코 역시 초기에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을 '신화 제작자'라 칭하기도 했고요.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화야 말로 모든 문화를 관통하며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느낀 인간의 불행을 한 차원 높여 보편적인 불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안티고네>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원적인 비극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가 자신의 동생이자 반역자인 폴리네 이케스의 시신을 길거리에 방치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땅에 묻어주는 모습에서 국가에 맞서는 개인의 고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2차 대전과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이며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로스코는 순수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에 소위 '멀티폼(multiform)'이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그림들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멀티폼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캔버스에 색 덩어리를 이용하여 공간과 색을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로스코는 자신이 평생을 염원해 온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러한 추상을 그리기 전, 그는 면의 크기와 색의 농도를 머릿속에 수없이 조합한 후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 실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왔거든요.
<무제>를 살펴보면, 마치 색덩어리들만 뭉쳐있어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해당하는 작품군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이 시기부터 로스코는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는 구상표현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을 보신 분들은 색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고 표현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그린 황금기에는 색감의 시대에 비해 작품에 존재하는 색 덩어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도 보이고요. 물 먹은 한지 위의 떠다니는 사각형처럼 말이죠. 그는 밑 칠을 하지 않는 '로우 캔버스'를 통해 색을 여러 번 덧칠하는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직도 관람객들은 어렵게 느껴지지만요. 실제로 그의 그림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거대한 캔버스 안에 치열하게 놓인 색채들을 바라보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림을 앞에 두면 너무 가까워서 놀랄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캔버스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갖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런 방식으로 관람자가 작품과 교감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일부러 캔버스의 크기를 크게 만들기도 했고요. 큰 작품 안에서 자신을 찾고 싶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건...널 위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마크 로스코-
1958년 시그램 회사에서 마크 로스코에게 회사 신축 건물 1층에 있는 고급레스토랑에 위치할 벽화를 그려 줄 것을 부탁합니다. 30년 동안의 재정적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거액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스토랑에 방문한 후 마크 로스코는 고급스러움에 거부감을 느껴 결국 벽화를 그리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곳에 큰돈을 내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돈을 거머쥘 기회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습니다. 미술품이 단지 장식품이 되는 것을 거부한 거지요. 이 일화는 그가 그림에 대해 어떠한 철학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팝 아트가 트렌드일 때 로스코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유로움 대신 고상함을 택합니다.
그림과 마주하라.
나는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 아이러니,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잘 표현되는 것이 바로 로스코 채플입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공간으로 예배당에 잘 어울릴 만한 회화 연작을 부탁하였습니다. 1964년-1967까지 14개 이상 작품을 그리고 건축설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로스코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아침 6부터 마셔대는 술, 줄담배로 심장과 간질환이 있었고 두 번째 결혼한 아내와도 헤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로스코의 힘듦이 고스란히 작품에도 투영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로 검은색 계열로 전성기 때 사용하 던 오렌지 같은 밝은 칼라 대신 어두운 색으로 표현합니다. 로스코는 그 채플을 갤러리이자 사람들의 영혼이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로 탈바꿈해 놓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런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이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검게 칠한 캔버스 앞에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나'와 조우하게 합니다. 이것은 실랄한 민낯을 스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묻어 둔 나의 속 이야기를 풀어헤쳐야 하고, 나의 존재론적 고민도 덤으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못난 자신과의 용서와 화해의 작업을 원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 신음, 고뇌를 꺼내어 울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 비극적 감정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관람자가 그의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고 깊숙한 내면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이유에서 어떠한 조형적 묘사 없이 캔버스를 비워두고 대신 강렬한 색의 울림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YXyyeGTs0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제(레드)>로 마크 로스코가 죽기 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본 제인 딜렌버거라는 미술사학자는 작품을 보자마자 캔버스에서 공포를 느끼고 마크 로스코를 잡아 줘야 한다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마크 로스코는 10개월 뒤 작업실에서 숨을 거둔 상태로 발견됩니다. 실제 이 작품을 마주하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붉은 나머지 생명이 아닌 오히려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에 집착했다는 얘기는 다들 알고 계시죠. 한 사람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사업가이고, 또 한 사람은 한 세기의 예술 흐름을 바꾼 아티스트입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산 자'는 '죽은 자'의 예술혼과 철학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라는 큰 명제 앞에 스티브 잡스도 마크 로스코가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을 만나는 작업을 하고 갔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난 표현의 단순화, 종교적 명상의 태도,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 등 로스코가 견지해 온 모든 사유의 편린들이 잡스의 마지막 순간들과 함께 했을 겁니다. IT 업계에 충격을 던져 준 잡스나 20세기 회화 표현에 혁명을 일으킨 로스코는 그렇게 반세기 차이로 비슷한 길을 걸었고 , 자신만의 사고를 개척했습니다. 스마트 폰을 통해 단순함이 주는 파급효과를 스티브 잡스는 살면서 보았지만 마크 로스코는 로스코 채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70년 2월 25일 우울증이 심해지며 뉴욕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됩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쳐
# 마크 로스코# 추상회화# 테이트 모던# 로스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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