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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비자들은 제품을 산다기보다 제품에 표기되어 있는 브랜드를 산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미 브랜드는 기업의 이미지나 무형의 가치 창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해 안경, 시계, 신발, 향수 등 다양한 상품 라인에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치는 기업이 있습니다.
루이비통의 역사는 1821년 프랑스 안쉐(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대)라는 작은 마을의 살던 목공 집안의 한 아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연스레 목공기술을 익히던 그가 14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썰에 의하면 계모의 냉대가 심해 떠났다는 말도 있더군요. 땡전 한 푼 없었던 루이 비통은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파리에 도착합니다. 돈 떨어지면 근처 가게에서 일하고 다시 걸어가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차를 타면 5시간 남짓 걸릴 거리를 1년이 되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후 당시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7년간 일을 하며 그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도 알려지게 됩니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나폴레옹 3세)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합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인거죠.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습니다. 윗부분이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지요. 쉽게 말하면, 애니메이션 영화의 보석상자 모양새라 생각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러다 보니 재수 없이 자신의 트렁크가 밑바닥에 깔리게 되면 안의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트렁크가 망가지기도 했답니다. 혹은 물방울이나 비를 피하기 위해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짐을 쌓기 불편한 구조였던 거지요.
이에 착안하여 루이 비통은 트렁크를 평평하게 만들어 마차에 쌓기 편한 구조로 만들어 냅니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루이 비통만의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방수처리한 천을 사용하게 되지요.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우게 됩니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입니다. 1885년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 지점도 오픈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72EbS5yKvA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로 이어집니다. 인기가 많은 만큼 쉽게 모조품을 만들어 파는 경우들이 많아지면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상류층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트렁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훔쳐가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냅니다. 지금도 이 잠금장치 기술은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루이 비통의 대 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합니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 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다미에 (체크무늬)캔버스입니다.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들도 끊임없이 나오자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합니다. 또 탐험가들이 가방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어 아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힘을 쏟습니다. 이 정도면 장인정신 최고 아닌가요? 샤넬이 직접 자신의 가방을 만들어 달라며 주문제작한 '알마 백'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백을 주문해 만들어 낸 '스피디백(3초 백)'도 있고요. 대중교통이 용이해지며 트렁크나 여행용 가방을 만들 던 루이비통이 손가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창업주 루이 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류즈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킵니다. 1914년 상제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우게 됩니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 3대 가스통 루이 비통이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파빌론백(빠삐용 백)등 상품 라인 넓히기 시작합니다.
1970년부터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됩니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이백을 사기위해 파리에 오면 2,3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해요.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이 백을 많이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1977년 창업자 증손녀의 남편 앙리 라카미(철강유통사)가 경영권을 승계합니다. 그는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이 지닌 가능성을 식구들보다 먼저 알아보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공격적인 사업가이기도 했고요. 북미시장에 공을 들이고, 1978년 일본시장, 1984년 한국에 매장을 엽니다. 세계 속에 명품 여행용 가방, 핸드백 만드는 가방업체로 뻗어나간 시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fEl9AUF4I
https://www.youtube.com/watch?v=uDPyPwbU1Ok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가족 경영이 아닌 외부경영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87년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부터지요. 당시 크리스 찬 디올을 소유하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별명: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늑대)가 LV 측의 요청으로 지분을 투자하여 지분 싸움에 참전하게 되고 이는 그룹의 역사와 뿌리 자체를 바꾸는 선택이 됩니다. 아르노는 경영자였지만 누구보다 변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89년까지 공격적인 지분 인수로 그룹 전체의 43.5%를 확보하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그는 관습을 거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수의 특별한 창조적인 디자이너 들은 돈을 벌어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돈보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이미지와 캐릭터에 더 끌린다고 보았던 거지요.
이후 그는 80-90년 대 셀린느, 겐조, 벨루티, 렐랑, 로에베 등의 브랜드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특히 1997년 젊은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고 동시에 그를 그룹의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하며 루이 비통이 대격변을 맞기 시작합니다. 일명 3초 백으로 불리는 PVC라인의 모노 그램 가방을 대중화시키며, 루이 비통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까지 크게 됩니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재미없는 요소를 뽑아내
화려한 것으로 탈바꿈시키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속물적인 반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 마크 제이콥스-
평소 광적인 아트 컬렉터였던 그는 무라카미 타카시, 리처드 프린스,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의 현대 미술가들과의 협업은 물론 더 나아가 퍼렐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마돈나는 물론 카니예 웨스트 같이 떠오르던 셀럽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유행을 선도합니다. 아주 특별한 능력 있는 관종이었던 거지요. 탁월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디자이너였습니다. 제이콥스 덕분에 콜라보 라인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 업체에서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디자이너의 캐릭터를 중요시했던 아르노 회장의 베팅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가 수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1997-2013) 루이비통이 5-10% 꾸준히 성장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2013년 11월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를 맡고 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임명됩니다. 루이 비통의 클래식 팬들은 마크 제이콥스가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브랜드를 밀고 나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루이 비통의 위상을 낮추었다는 평이 있어 그가 떠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미래지향적이면서 고풍스러운 미니멀 디자인으로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브랜드를 유지합니다. 조용하고 우직하게 브랜드를 고급화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또 이 시기부터 니콜라와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셀렙들이 루이 비통으로 넘어와 셀럽 위주의 캠페인 홍보, SNS활용이 본격화됩니다.
한편, 2011년부터 남성 부문을 이끌던 킴 존스가 2018년 가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디올로 건너가며 루이 비통을 떠나고,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가 새 수석 디자이너가 됩니다. 당시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위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남성 부문 디자인 수장으로 영입된 인사조치는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입니다. 거기에 역사상 첫 흑인 디자이너에다 비전공자라는 점 역시 여러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21,11월 28일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인은 2년 간 투병해 왔던 희귀성 심장 혈관 육종(심장암)으로 사망 전까지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다음 컬렉션들과 아이템들을 연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던 점이 많은 사람들을 인상 깊고 안타깝게 하는 부분입니다.
2023년 2월, 버질이 떠난 남성 부분의 새로운 디렉터로 페렐 윌리엄스가 임명됩니다. 동년 여름 진행될 SS24 컬렉션부터 업무를 맡게 됩니다. 버질에 이어 패션 비전공자 출신의 유색인종이 다시 한번 임명됩니다. 그는 21세기 대중음악계를 대표한 아이콘이기도 해서 엄청난 파격성을 띈 인사였지요. 루이 뷔통 입장에서는 영국계 엘리트 디자이너들 보다는 매출 신장을 위해 이미 인지도가 높고 다방면에서 특출함을 보이는 페렐이 오히려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의견도 다수 존재합니다. 다만 아직 풀 컬렉션을 진행해 본 경험이 없고 , 과거 디자인했던 제품들 또한 호불호가 꽤나 갈리는 편인지라 우려 섞인 반응들 또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2023년 6월 20일, 페렐의 SS데뷔 컬렉션이 파리 패션위크 오프닝날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루이 뷔통 내에는 버질이 없는 동안 컬렉션을 전개해온 특출 난 제단사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었습니다. 비 전공자인 퍼렐은 스트릿 컬렉션을 주된 방향성으로 밀고 가며 창의적인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마담 격이라는 우려 섞인 의견도 다수 있었지만 말이죠. 이러한 예상과 달리 전임이었던 버질 아블로와 유의미하게 비교될 정도로 스트릿이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테일러링 착장으로 선보였고, 얼굴마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존 LV 다미엔 패턴에 카모플라쥬 색을 입힌 '다모플라쥬'패턴을 쇼 초반부에 배치하며 새로운 퍼렐 본인의 시그니쳐를 선보입니다. 과거 샤넬과의 컬래버, NIGO와의 오랜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 퍼렐만의 색을 진하게 입혔는데 본인이 샤넬에도 오랫동안 몸 담았던 터라 중후반부에 대거 등장시킨 진주 장식과 트위드, 크롭 기장에 꽉 끼는 재킷 특유의 핏 등 샤넬의 색이 너무 들어간 것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죠. 전체적으로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https://youtu.be/pDsjAIrmSKM
의례 그런 패션쇼 이려니 하고 보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뮤지션 출신이라 음악 선택도 탁월했고요. 종교적인 가스펠 음악을 패션쇼에 삽입하면서 예상치 않은 신선한 조합에 몸이 같이 움직이더군요. ' 조이'라는 음악을 흥에 겨워 신들리듯 불러대는 모습에 마음까지 시원해졌습니다. 럭셔리, 고귀함, 스트릿을 혼합한 패션쇼, 그리고 재해석능력이 뛰어났다는 개인적 생각과 함께 패션 좋아하는 남자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덕분에 루이 비통은 더 커진 파이를 가져갈 수 있겠다 싶고요. 보수적인 집단이면서 오픈 마인드로 그 시대 사람들과 조금 더 소통하려는 루이 비통의 노력이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인정신을 갖춘 기업으로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기업이면 더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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