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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55~71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고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워집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특성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실내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밖의 차가운 풍경과 다른 밝고 따뜻하고 포근한 실내 인테리어를 추구한 거지요. 북유럽 특유의 자연을 소재로 하여 실용적이며 간결한, 자연의 빛과 에너지를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유행시킨 원조가 칼 라르손(Karl Larsson 1853-1919)과 카린 라르손(Karin Larsson 1859-1928) 부부입니다.
1853년 5월 28일 , 스톡홀름에서 라르손은 태어납니다. 1857년 그의 유일한 형제인 요한이 태어나고, 가족은 방 한 칸 짜리 아파트로 이사합니다. 늘 화만 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훗날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밝힙니다. 어머니가 세탁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며 폭언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13살 때 학교 선생님의 설득으로 스톡홀름 미술 아카데미(Stockholm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갔습니다.1869년 앤티크 스쿨(antique school)에서 공부했고요. 학비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자 신문, 잡지의 만화와 삽화 등 닥치는 대로 그리다가 1877년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파리에 머물면서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번번이 낙선을 하게 됩니다. 라르손은 인상주의의 급진적인 화풍을 따르지 않고 밀레와 같은 자연주의 기법을 고수했기 때문이었지요. 거듭되는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라르손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인상파가 대세라 라르손이 고수하는 자연주의 기법은 파리 시민들에게 관심 밖이었습니다. 또한 라르손은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ㅡ 인상주의에 자극은 받았던 모양이에요. 스톡홀름 아카데미의 후진양성에 반기를 든 화가 들 중 한 명이 되니까 말이죠.
마음을 고쳐먹고 고국에 돌아가 기력과 재정을 보충한 라르손은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린 베르게(Karin Bergoo1859-1928)로 스웨덴에서 온 유학생이었지요. 부유한 사업가인 카린의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883년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밉니다. 라르손 역시 그녀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고요. 그녀와의 결혼으로 그의 인생도 180도 바뀌게 됩니다. 가장 먼저 화풍이 달라집니다. 유화를 고수해 오던 그에게 수채화를 권한 것도 아내 카린입니다. 밝은 색으로 그려진 풍경과 인물들은 그가 살롱전에 입선할 수 있도록 빛을 발합니다. 이후 카린과의 사이에 두 살 때 죽은 아이를 포함 모두 8자녀를 두었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작품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부모 복은 없었으나 아내 복이 참 많은 화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내 카린은 스웨덴 미술 아카데미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화가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스스로 모델이 되고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지 않아 전업 화가의 길은 포기했지만 미술 작업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림 대신 패브릭 제품과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국적인 식물을 키워 집 안팎으로 생기 넘치게 하거나 집안에서 사용되는 직물 (앞치마, 침대 덮개, 식탁보 등)과 자신과 아이들의 옷, 자수 작품, 가구(의자, 아이들의 나무 침대)를 디자인하게 됩니다. 밝고 유쾌하고 대담하고 생생한 색채와 모던한 추상적 스타일로 말입니다.
백 년 전 스타일이란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즘 모던한 집에 초대받은 느낌입니다. 열린 창문 한 곳으로 신선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어 환기를 시킵니다. 크고 작은 토분 위에 각종 다양한 녹색 식물들이 방안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합니다. 물조리를 들고 하나하나 목을 축여주는 어린 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정성을 쏟을까요? '물 많이 먹고 쑥쑥 커라.' 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성장했을 것 같습니다. 테이블 위의 뜨다 만 털 실 꾸러미를 보니 방금 자리를 떴는지 주름 진 방석 모양새가 엄마 카린의 부재를 알립니다. 살고 있는 사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공간에 주어진 여백과 밝은 색상이 겨울 내내 집에만 있어도 우울하지 않을 듯합니다. 소박함과 안락함으로 안주인의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장인도 점차 사위 라르손을 인정하게 되고 1888년 순트보른에 있는 작은 집을 라르손에게 선물합니다. '작은 용광로(Lilla Huttnas)'라고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집은 1891년 라르손 가족들이 스웨덴으로 귀국, 입주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조금씩 고쳐갔는데 라르손의 작품 속에 이 집이 묘사되면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집이 되었습니다. 순트보른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집을 예술가적인 취향으로 꾸며 그곳에서 가족들과 평화롭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작품도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아름답고 장식성이 강한 그림들을 그려 화제를 모으게 되고요. 수많은 삽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칼 라르손은 이충집에 30년 동안 살면서 7번이나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매년 여름마다 방을 하나씩 늘렸고요. 직접 제작한 의자에 흰색을 칠하고, 원목의 바닥, 자수한 텍스타일, 붉은 제라늄 화분의 단순한 민속 스타일로 집을 꾸민 아내 카린의 손길또한 남달랐습니다. 그녀 역시 화가이자 공간장식가이다 보니 눈썰미와 손놀림이 섬세합니다. 직접 만든 수공예 작품들로 그녀가 8자녀(죽은 아이 포함)를 정성 들여 키운 절제되고 온화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담백하고 실용적이어서 쓸수록 더 정이 가는 것 같고요. 남편 칼 라르손도 집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집이기 전에 영감을 얻는 장소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말이죠. 아내 카렌과 함께 몸소 실천하며 전달하고 자 했던 전원적이며 자유로운 생활 방식, 가족을 향한 따뜻한 철학은 이후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직접 보여준 동화 같은 일상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삶의 모델로 자리잡게 된 거지요. 백 년이 훌쩍 지났어도 칼 라르손의 작품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결정적인 이유 같기도 합니다.
<10월(October),1882>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4-99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1914-15>등이 잘 알려져 있어요.
이 나무가 없었더라면,
사유지 전체가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바로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 작은 날벌레나 나방을 쫓아준다.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새인데 앙징맞은 서열 막내가 딴짓을 하네요. 붉은 색 모자와 대롱거리는 줄무늬 타이즈가 귀엽습니다. 라르손의 말대로 자연이 주는 혜택은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오늘 라르손 가족에게 주어진 선물은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거지요. 여인을 포함해 아이들까지 모두 모자를 쓰고 정장차림이네요. 덩치 큰 강아지도 식구들 틈에 끼어 먹고 싶은가 봅니다. 자연스럽게 눕혀진 나무 근처 음료병 두 개가 무심한 듯 놓여 있고 흰 닭 한 마리가 깜짝 우정출연했네요. 자세히 보니 나무에 'K'라는 이니셜과 하트도 보입니다. 수채화라 가볍고 화사한 색깔이 녹색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담백합니다.
두딸과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 카렌의 모습입니다. 인스타에 올려도 조회수 꽤 나올 것 같습니다. 아늑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라서 말이죠. 붉은색 그릇장과 준비대 선반에 올려진 갖가지 종류의 그릇들 독특한 중앙의 램프까지 무례하지 않다면 식사 초대받고 싶어 집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아내 카렌을 그리는 아빠 칼 라르손의 붓끝은 신이 나서 춤을 추웠을 거예요. 칼 라르손에게 어릴 적 '집'이라는 곳은 안전한 쉴 곳의 개념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말이죠. 그는 아이들을 위해 툭탁툭탁 만들고 색칠하고 아내가 짠 직물들로 옷을 해 입고 자연을 만끽하는 일상의 행복을 그래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눈길이 한 번 더 간 작품입니다. 나가서 놀고 싶은 데 바지춤에 손을 넣은 채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멍때리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해서 말이죠. 한국이라면 "땡땡 아~공부해야지"라고 부르며 주의를 줄 것만 같습니다. 녹색의 사이드 테이블과 빨간색 의자 그리고 단단하게 매어 둔 방석까지 방 분위기에 활력을 넣어주는 포인트가 되어줍니다. 창가에 꽃아 둔 꽃 몇 송이는 엄마 카렌의 아들을 위한 깜짝 배려일까요? 섬세한 그녀의 감각과 배려를 보는 듯 해 기분이 좋아집니다. 벽에 걸린 액자, 빙 둘러앉은 주변 소품들 모두 아빠의 작품들일테지요. 거울에 비친 아빠 라르손의 눈길이 다정합니다. 열린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퍽 이국적이고요.
집안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직물기계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살림의 고수에 속하는 어느 지인의 집에 들렀다 낡은 재봉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작업대에 쌓인 천을 다 꿰매는 일이 오늘 그녀가 마무리 해야 할 일인가 봅니다. 삭막하지 않게 작업대와 창문 곁에 녹색식물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벽돌색, 톤 다운된 녹색, 그리고 겨자색 벽면이 원목의 느낌과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물합니다. 벽에 걸린 총은 호신용이겠죠?
라르손은 주제를 선택할 때, 소박하고 생기 있는 민속예술에서 자주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라르손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은 밝은 색채와 세심하게 공을 들인 선입니다. 그는 특히 전원풍경과 실내를 그린 수채화로 명성을 얻습니다. 항상 가정의 행복 또는 농민의 소박한 삶을 중심주제로 삼았습니다. 어린시절 라르손에게 집은 안락함과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카린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집이라는 공간은 일터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당시 안데르스 소른과 에드바르드 뭉크 같은 중요한 스칸디나비아인 동료 화가들은 사랑과 죽음, 비극적 운명과 중산계층의 혁명과 같은 주제로 선택한 것에 비해, 라르손은 자신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소재를 얻었던 점이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스웨덴 군인들은 구약성서 다음으로 칼 라르손의 그림을 간직하고 다녔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y8hnjkPZzb8
1890년대 출판물에 색을 재현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그의 자품은 점점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의 책들이 제작되었고 1909년 독일에서 '햇빛 속의 집(The House in the Sun)'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 수록집은 3개월 만에 4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라르손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죠. 2001년까지 40쇄를 인쇄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작품이 완성된 것은 1915년 제목은 ,동지 제물(Midwinter Sacrifice)이었는데 기근을 피하기 위해 스웨덴 왕이 제물로 나서는 장면으로 묘사한 세로 6미터 가로 14미터의 대작입니다. 북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Domalde 왕은 자신의 재임 기간 내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첫해는 제물을 두 번째 해는 사람을 각각 바쳤으나 세 번째 해에도 역시 대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고 풍연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의 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미술관 이사회에서 이 작품의 게시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거절을 통보 받은 라르손의 실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내가 죽고 나면 훨씬 더 좋은 곳에 걸려 찬사를 받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는군요. 실제로 이 작품은 일본인에게 팔렸다가 1992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서 라르손 작품 전시회를 할 때 걸리게 됩니다. 스웨덴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질 않았고 결구 1997년 일본인으로부터 다시 작품을 사들여 원래 전시하고자 했던 곳에 걸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28EYsIupnY
평화롭고 아늑한 전원생활의 고귀한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세기말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시각을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화가 칼 라르손!!! 무등을 태우고 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 칼 라르손의 모습이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칼 라르손에게 좋은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뮤즈가 되어 준 아내 카린의 역할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테지요. 두 사람의 협업이 오늘날 스웨덴 브랜드 IKA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디자이너 혹은 실내 인테리어 전문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백 년이 지났어도 그의 가족사랑은 따뜻함의 색감만큼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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