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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rs at the Bar>,2001/CentriCentro

 

'헉'

'데벨로페(developpe)'자세: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는 동작

'so what'

 

이 그림을 보며 떠 올랐던 단어들입니다. 앙증맞은 작은 발, 용케도 발끝으로 서 있습니다. 힘든 표정하나 없이 말입니다. 좀 짧고 굵을 뿐인데 우리들 미의 기준은 정 반대에 가있어 그녀의 이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정작 그녀는 무표정한 듯 당당하게 오히려 우리를 꾸짖는 듯하고요.

 

 

인류가 만들어 놓은 도시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메말라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화가는 건조한 현실에 풍성함과 풍만함,그리고 온화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풍선 같은 빵빵한 모습으로 비율을 왜곡시켜 리듬감을 만들어 냅니다. 2023년 9월에 돌아가신 페르난도 베테로 할아버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예술은 즐거움을 줘야 합니다. 

 

 

 

페르난도 베테로(Fernando Botero,1932.4.19 -2023.9.15)는 콜롬비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부풀려진 인물과 독특한 양감이 드러나는 정물 등을 통해 특유의 유머감각과 남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장된 인체 비례와 뚱뚱한 모습으로 묘사된 인물 그림으로 유명하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뚱뚱한 모나리자 그림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고요. 많은 사람들이 보테로의 그림을 보고 뚱뚱한 그림이라 말하지만 보테로는 자신은 한 번도 뚱보를 그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색감과 볼륨을 중시하다 보니 이런 풍만함이 강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볼륨을 중요시 여겼던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악기>/디아티스트

 

 

 

 

악기에 구멍을 그리려는데
가운데 있는 구멍을
실제보다 작게 그려봤어요.
그러자
만돌린이 마치 폭발하듯이
사방팔방으로커졌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악기가 있는 보테로의 정물화 작품입니다.  화면 중앙에 만돌린, 호른, 북 등의 악기와 그 아래쪽에는 악보 몇 장이 놓여있습니다. 보테로는 사물의 양감을 강조하기 위해 만돌린 가운데에 있는 음향 구멍을 미세한 점으로 표현합니다. 이때의 경험 이후  사물의 양감을 과장하는 식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예술은
일상의 고됨으로부터
영혼을 쉴 수 있게 해 준다."

 

 

 

 

콜롬비아 메데인/South America Travel Centre

 

https://www.youtube.com/watch?v=fmF2-ZdWO8I

 

 

 

페르난도 보테로는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했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미술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2세 때 투우사 양성학교를 입학하며 투우를 배우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외딴 지역에 자랐던 보테로는 현대회화를 접할 기회도  없었고요. 이후 유학을 하고  멕시코를 떠나 뉴욕에 거주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터치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Mona Lisa ,Age Twelve>/1959/Sartle

 

 

 

 

그림은 색채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었을 때에야
완벽을 이룰 수 있다.
여러분은 구성을 고민하겠지만,
사실 회화를 결정짓는 것은 색채이다.
모든 요소가 색채의 자리를 발견할 때 평화가 있다.
-페르난도 보테르-

 

 

 

 

 

아이의 시선에서 현대인들이 지닌 몸짱, 얼짱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의 나이 31살에 Mona Lisa를 패러디한 <12세의 모나리자>가 뉴욕 현대미술관에 알프레드 바에 의해 전시되면서 뉴욕의 인기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모나리자>가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국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으로 말이죠. 이소식은 삽시간에 미국내에 퍼지고 <모나리자>를 보겠다는  엄청난 인파가 근처로 몰려 들었습니다. 한편 경쟁구도에 있 던  MOMA(뉴욕 현대 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이 소장하고 있던 페르난도 보테르의 <12살의 모나리자> 작품을  옷 가게 디스플레이를 하듯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뉴요커들의 눈에  더 재미있게 다가 온 모양입니다.  이때부터 보테르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며 상승곡선을 그립니다. (1959-1963)

 

 

 

본인은 "행운이었다."라고 말하지만 당시 뉴욕은 추상표현주의 와 팝 아트가 대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죠. 미국에서 만들어진 세계적인 양식으로 자신도 대세야 따라가야 할지 아니면 하던 스타일을 계속 고수해 야 할 지 젊은 남미의 화가 보테로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동네스타에서 전국구 스타가 되기까지 고민도 참 많았고 시행착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을 거쳐 파리에 왔을 때 보테르는 실망합니다. 당시 보테르가 유학 가던 해 파리에 유행하던 작품들이 피카소와 마티스가 대세인 흐름이었죠. 그런데 자신과 맞지 않았어요.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일의 양식을 과감히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이 만들어 낸 인체의 아름다움과 바로크의 찬란한 색채 미술에  매료됩니다. 모사하고 연구하고 그리고 깨닫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만으로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요.

 

 

 

의기양양하게 고향에 돌아왔지만 , 미처 소화가 안 된 음식이 체하듯 자기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힘만 잔뜩 들어간 이상한 그림이 나오는 겁니다.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그림 말입니다. 그러다 '지오토'를 통해 공간감을 불어넣고, 멕시코의 벽화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을 통해 거대함을 융합시키기 시작합니다. 평면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것은 '지오토'로부터 가져왔고요. 거대하게 그리는 것은 '디에고 리베라 '로부터 가져옵니다. 이렇게 해서 보테로는 거대함을 통해 형태, 색채, 구조등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갑니다. 일명 '보테로 스타일'말입니다.

 

2023.12.30 - [지식&교양] - 50-58.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41)

 

50-58.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41)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1886년 멕시코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태어났습니다. 헌신적인 가톨릭 메스티조(스페인*북미 원주민이 섞인 라틴 아메리카 사람) 출신의 어머니와 크리올로(중남미

sun-n5y2.tistory.com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흉측하다." , '비만 작가', 그리고 키치(kitsch)'라는 비평을 줄곧 받았습니다. 타협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15년의 무명 시절을 버티어 냅니다. 지금은 60여 곳의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몸 값 비싼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회화는 20억대를 넘고요, 드로잉 작품도 8천 -9천만 원이 넘습니다. 그의 그림 속 '보테로족'들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걷어 낸 친근하고 재미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라틴 아메리카 미술을 덕분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고요. 

 

 

 

예술가는
자신의 영토에
뿌리를 깊게 내릴 때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La Casa de las gemelas Arias>,1973/Artnet

 

 

 

위 작품은 보테로가 1973년에 그려낸 <La Casa de Las Gemelas Arias>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인물들이 살이 찌고 크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보테로의 그림은 실제 인물의 비율과는 다른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캔버스 안을 가득 메우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고요. 또한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한 곳을 뚜렷이 응시하기보단 어디를 보는지 모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품을 감상할 때 표정에 집중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미술 수집가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실제 2014년 경매에서 $2,105,000(한화 약 25억 원)에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콜롬비아 댄스 Dancing in Colombia>,1980/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ww.youtube.com/watch?v=TXGh4658ASg

 

 

 

 

 

<춤추는 사람들>/www.pinterest.jp

 

 

 

색색의 조명 아래 빨간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담배를 물고 있는 그가 라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 분위기에 취해 찰나의 순간을 부비부비 몸으로 표현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나뒹구는 술병은 애교스러운 소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네요. 그나저나 빨간 리본 끈이 애교스럽습니다. 라틴 댄스는 멕시코 이남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족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 된 흑인 노예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춤입니다. 보테로는 이러한 라틴 댄스를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그려왔습니다. 

 

 

 

 

 

<Monalisa>1978/Google Arts&Culture

 

 

 

 

보테로는 정통으로 미술 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습득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라스케스, 반 아이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해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한 다는 것은 '존경한다.'라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그들 누구나 아는 모나리자를 볼륨감 있는 형상으로 만든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깨고 새로운 양식을 혼합했습니다. 고전미술의 패러디한 보테로의 그림을 대중들은 흥미롭게 생각하면서 누구나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고요.

 

 

 

1978년 제작된 위 그림은, 기존의 모나리자가 가지고 있는 슬림한 곡선을 과감하게 확대해 놓은 듯한 모습입니다. 또한 원작과는 다르게 풍만하게 표현된 모나리자의 얼굴에서는 행복하고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고요. 모나리자의 시선처리는 보테로가 추구하는 대로, 표정에 집중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얼굴 같은 인체의 특정 부위는 확대해 놓았지만 손은 작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유머러스함을 느끼게 합니다. 

 

 

 

 

< Mona Lisa>는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 뉴욕의 현대미술관인 MOMA에서 공식적으로 구입한 작품으로 현대인들의 불안한 우상성을 파괴했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과한 채 외모만 보고 거부감을 갖는 현명함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alog.auric.or.kr

 

 

벨기에의 유명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원작이 다소 어둡고 침착한 분위기라면, 페르난도 보테로의 스타일로 재탄생한 작품은 선명하고 밝은 색상을 통해서 작품 속 분위기를 한층 더 해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물뿐만 아니라 인물의 주변 사물마저 모두 뚱뚱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자의 모자를 크게 표현하면서 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죠. 아래에 그려진 강아지도 작가는 잊지 않고  실제 그림보다 튼실하게 표현해 놓았네요.

 

 

 

 

 

 

<벨라스케즈를 따라서>/디아티스트

 

 

 

보테로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 역시 벨라스케스의 1656년 작품인 < 흰 옷의 왕녀 마르가리타>를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벨라스케스는 많은 왕족의 초상화를 그린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당시 펠리페 4세가 첫 결혼에서 얻은 자녀 열 명을 모두 잃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첫 아이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작은 천사'라고 불리며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요. 그런 만큼 벨라스케스도 2-3년이 멀다 하고 그녀의 초상화를 계속 그려야 했습니다. 빈에 있는 그녀의 외삼촌의 신부이기도 해서 사진이 없던 시절 화가들이 그려서 보내는 거죠. 자신의 신부가 잘 자라고 있는지 이런 식으로 확인을 하면서 말이죠.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으로 유전병이 내려오고 있었어요. 이렇게 예쁜 마가리타 공주님도 10대가 되며 주걱턱이 되고 연약했죠. 16세에 시집을 가고 6년 동안 매년 임신을 하다 2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드레스는 대담하게 그렸지만, 공주의 얼굴만큼은 부드러운 깃털로 쓰다듬듯 조심스레 그렸 던 벨라스케스의 애정이 묻어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보테로는 벨라스케로부터 질감이나 양감의 표현법을 배웠고, 그가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기품 있는 인물과는 다르게 보테로는 마르가리타 공주를 큰 몸집에 유달리 작은 얼굴로서 비정상적인 비례의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공주'는 여러 버전으로 그릴만큼 매우 특별한 소재였습니다. 원작과는 달리 자신만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창조해 냅니다. 

 

 

 

 

<얼굴>/동아일보

 

 

 

 

길이 2m가 넘는 캔버스를 꽉 채운 '얼굴'. 작은 얼굴이 대세라지만 이 무뚝뚝한 '얼큰'소녀를 사람들은 무척 좋아합니다.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사가는 엽서 중 하나라고 하고요. 초록 머리띠에 빨강 귀고리, 살짝 화장한 소녀를 보고 또 보게 됩니다. 자꾸 보면 볼수록 정이 들지 않나요.

 

 

 

성별도 구별이 불가능하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가의 인물은 의도적인 몰개성을 보여줍니다. 그림의 인물이 소녀라는 사실도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 머리띠, 복장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입은 꼭 다문 채 앞을 보고 있어 엄숙한 분위기의 초상화 같으나 옆으로 돌린 눈으로 인해 다소 희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A Love Letter to Latine America>/Opera Gallery

 

 

 

 

보테로 작품 속의 인물들은 무표정과 정자세로 정면을 바로 보는 것이 또 다른 포인트입니다. 인물의 이목구비는 누군지 구분을 하지 못하지만 헤어스타일과 옷의 색감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양감을 부각한 그림으로 독특한 조형세계를 만들었습니다. OHP라는 기계를 사용해 스케치를 한 그림을 벽면에 쏘면 비율이 커지는데, 그림을 그릴 때 보테로가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서커스 단원들> ,<곡예사>/공연의 모든것-플레이 DB

 

 

보테로는 공연 중인 광대의 기이한 모습을 담을 유화와 드로잉을 다수 남겼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공중제비 타는 곡예사가 관중으로 가득 찬 서커스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공중제비를 타는 곡예사의 위험한 자세는 마치 영구 정지된 것처럼 보입니다. 

 

 

 

 

<소풍>/서울신문

 

 

보테로는 풍경을 인물 못지않은 중요한 조형 요소로 간주합니다. 산, 마을, 숲의 선은 다소 복잡하게 처리하는  반면에, 인물은 부드러운 양감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무릎에 누워 있는 여성은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남성과의 심리적인 유대감을 보이지 않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통령 가족>/제주도민일보

 

 

 

 

 페르난도 보테로는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입체감 있는 형태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뒤, 과장되게 부풀어 오른 인간의 형상 및 정물화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보테로는 비율의 왜곡을 실험하는가 하면, 형태의 관능을 강화하기 위해 혹은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형태의 덩치를 크게 부풀렸습니다. 

 

 

<대통령 가족>은 전형적인 남미 상류층 가족에 대한 보테로의 풍자적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가족의 아들들은 각기 정치가, 군인, 교회 성직자가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서 있는 어머니의 목에 걸린 여우 목도리는 그녀의 부를 암시합니다. 왼쪽의 할머니는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녀를 무릎에 앉힌 채 앉아  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 두 사람은 모두 곧 혼인할 나이에 접어든 장성한 아이들을 덤덤히 바라보고 있고요. 이와 동시에 할머니는 어린 소녀의 순결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보테로의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가족>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형식상 고야의 <카를 로스 4세의 가족, 1800>의 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 화가의 초상이 담긴 부분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1656>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화가는 애완견을 고양이로 대체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바닥을 기어가는 뱀은 이 동물에 관한 중세의 도상학적 해석, 즉 근심을 몰고 오는 흉조라는 뱀의 의미를 보란 듯이 참조한 것 같습니다. 보테로가 유일하게 뚱뚱하게 그리지 않는 대상이 '뱀'이라고 합니다. 

 

 

 

보테로는 밝고  평평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남미의 대중 미술에 대한 작은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밝은 색채 사용을 통해 이 그림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탐욕과 부패에 대한 비판-역시 밝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0xKQUoCvsM

 

 

 

 

작가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면 더 이상 나아갈 때가 없어 곰팡이가 피듯 망가지기 쉽다고 합니다. 보테르 역시 매너리즘이 찾아왔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재를 바꿉니다. 특히 1963, 64년 조소작품에 전념합니다.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집을 구입에 살았습니다. 그곳은 구리 광산과 청동 주조 공방이 많은 곳이고, 또한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1992년 <Botero Monumental Sculpture>라는 이름으로 파리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드 광장까지 31개 조각상이 설치됩니다.  프랑스 출신도 아니고 생존 작가로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전시공간을 허락해 준 일도 파리시의 전무후무한 일이고요.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 'Raval'이라는 곳에 <CAT,1981> 작품이 설치되며 마약과 매춘으로 암울했던 도시 미관이 예술가의 조각상 하나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도시 재정비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 작품을 보러 관광객들이 찾아오며 바르셀로나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공공미술이 도시정화를 하며 문화의 도시로 탈 바꿈 하게 된 거죠. 자신의 자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뭘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테로는 자신의 재능을 길거리 작품으로 내 놓으며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갑니다.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하더라도
미술관은
엘리트를 위한 곳이다.
길바닥에
작품을 설치하면
모든 사람이 감동받을 수 있다.
- 페르난도 보테로, 피가로지 인터뷰 중- 

 

 

 

 

 

 

 

<셀레스티나(Celestina)>/google Arts&Culture

 

 

 

셀리스티나는 스페인 소설 <카리스토와 멜리베아의 희비극>의 등장인물 중 하나입니다. 피카소와 고야는 소설의 비극적인 면에 초점으로 맞춰 셀레스티나라는 작품을 남기고 있는 반면, 보테로는 특유의 희화화된 인물을 통하여 극의 해학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귀족 명문가 아들 칼리스토가 멜리베아라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거리>/아트인포

 

 

 

보테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거리를 통해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20세기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의 신사는 정치적 성향을 띤 인물로서 양복차림에 넥타이, 중절모까지 엄격하게 차려입고 있습니다. 수녀는 종교적 경직성을, 제복을 입은 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경찰은 사회적 경직성을 상징합니다. 

 

 

 

 

 

<Death of Pablo Escobar>,1999/1st Art Gallery

 

 

https://www.youtube.com/watch?v=GwmegwCRiH8

 

 

 

 

보테로는 콜롬비아에서 태어났지만 스페인, 미국, 멕시코, 이탈리아로 옮겨 다니며 작업했습니다. 내전과 분쟁이 많았던 나라인 콜롬비아는 참혹한 현실과 싸울 수밖에 없었죠. 보테로는 '내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라며 평화를 이야기했지만 콜롬비아 범죄 조직의 표적이 되면서 위협 때문에 콜롬비아에 자주 가지 못 했다고 합니다. 범죄에 얼룩져 가는 콜롬비아에 대해 안타까워한 보테로는 이렇게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Clown in His Trailer>,2007/Mutual Art

 

 

 

그의 작품들은 이처럼 인물들을 기존 인물화들의 비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인물들을 뚱뚱하게 그리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 "르네상스와 바로크 거장들의 색과 형태에서 나만의 유형이 시작되었다. 나는 단지 뚱보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즉 보테로는 그림에서 빛과 그림자가 아닌 형태와 색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 속에서 그의 방향을 만드는 것이었죠. 또한 보테로는 그림을 그릴 때, 색을 미리 계획해 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붓을 집었을 때 순간적인 상상과 직감에 따라 색을 정한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속 모든 색상은 그의 감각과 예술정신에서 비롯된다는  뜻이죠. 

 

 

 

 

페르난도 보테로 <자화상>,2009.6.29/연합뉴스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와 구성, 스로인, 형태 등이죠.
그런데
작가마다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마티스나 반 고흐, 샤갈 같은 경우는
형태보다는 색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조토나 마사초 같은 화가들은
형태를 중요시했죠.
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같은 이탈리아 작가들은
색과 양감 모두를 중시했습니다.
저도 어떤 하나를 강조하기보다는 서로 그 요소들 간의 연결되는 부분을 찾고 있습니다. 



 

60년이 넘게 소재만 바뀌었을 뿐 그의 양감 가득한 그림 속 인물들은 죽을 때까지 그려졌습니다. 새우깡 과자의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질소를 가득 채우듯 그의 볼륨감 있는 스타일은 지금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 때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니며 투우를 배웠던 그의 그림 앞에 선 노 화가의 모습이 당당하고 아름답습니다.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만 보이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덜컹거렸을 여정에 기립박수 쳐드리고 싶습니다. 근본도 없고 계보도 없어 후계자도 없습니다. 스타일이 강하니 아류작이 되어버리기 쉬워 후배화가들이 감히 따라가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래도 풍선처럼 부풀려진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보테로의 이 말 한마디는 꼭 기억할 것 같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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