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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Frank Gehry:1929,2,28- )의 건축은 딱딱한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하고 유동적이고 개성 있는 해체주의 건축을 선보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건축에서 해체주의 개념은 기존의 건축적 질서와 위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와 공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기존 건축의 직선적이고 규칙적인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건축 요소들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공간의 연속성을 추구합니다. 다양한 재료와 기술의 실험적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는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조형미를 추구합니다. 요즘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결합으로 건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여전히 시도 중이고요.  그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살펴봅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브리크매거진

 

 

 

 

 

2019년 가을, 프랭크 게리의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들썩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이어 프랭크 게리가 루이 비통을 위해 만든 두 번째 건물 '루이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는 네모난 형태 위에 얹힌 수원 화성의 포탑 지붕과 동래학춤의 춤선에서 건물의 이미지를 착안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빛을 최대한 건물에 끌어오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금속이 아닌, 스페인에서 직접 공수해 온 유리로 패널을 마감했습니다. 마치 건물 위를 유영하는 하얀 돛단배의 이미지. 프랭크 게리는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을 보고 도포 자락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게리의 비교적 최근작인 ' 루이 뷔통 메종 서울'은 프랭크 게리가 90세에 완공한 건물입니다. 

 

 

서울시 지도 /www.pinterest.co.kr

 

 

 

 

 

 

 

https://www.youtube.com/watch?v=KYpr2AF7CCI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가 커다란 랜드마크를 세웁니다. 사람이 몰리고, 돈을 벌어줄 거라서요.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그 어려운 일을 건물 하나로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구게하임 미술관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가, 프랭그 게리입니다.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은 한 번쯤 그의 뒤틀리고 구겨진 건물을 보았을 겁니다. 그는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을 까요? 

 

 

건축가 프랭크 게리 하우스, 산타 모니카 ,캘리포니아/123RF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위키백과

 

 

 

 

 

A dumb little house with charm/STIRworld

 

 

 

 

 

Frank Gehry, <Easy Edges> side Chair/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A로 돌아와 빅터 그루언 (gruen)사무실에 잠깐 있다가  가구를 제작하여 돈벌이를 합니다. 이지 에지스 "easy edges" 라는 가구들입니다. 이때 번 돈으로 산타모니카에 있는 벙갈로 같은 허름한 주택을 매입, 개조하여 자신의 집을 꾸밉니다. 프랭크 게리가 처음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자신의 집인 '게리 하우스'를 설계한 이후부터입니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철과 목재 합판 등의 싸구려 재료를 조합해 만든 디자인은 일종의 판잣집과 같은 모습이었죠. 그 기괴함에 마을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괴팍한 건물을 통해 무명의 프랭크 게리는 유명세를 얻었고 훗날 이 건물은 미국 건축가 협회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캐나다, 토론토 지도/나무위키

 

 

 

프랭크 게리는 1929년 2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 드문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게리는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놀려댔습니다. 이는 친구가 아닌 가족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독 프랭크 게리를 아꼈던 그의 할머니는 토요일 아침마다 철물점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작은 미래 도시 모형을 만들며 함께 놀았습니다. 이 놀이 경험은 훗날 프랭크 게리의 모형 중심의 설계 방식과 금속 합판과 골판지 등의 소재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과정 중에 프랭크 게리는 재료의 본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훗날 건축물의 특성으로 이어지고요.  한편 프랭크 게리는 아버지와도 자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합니다. 이처럼 프랭크 게리는 유년 시절 가족으로부터 건축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댄싱하우스>,프라하 체코,1996 /123RF

 

 

체코/신발끈 여행사

 

 

 

 

<댄싱 하우스 1996> 입니다. '건물이 이렇게 휘어져도 멀쩡할 수 있구나!' '벌어진 건물 다리만으로도 정말 건물이 춤을 추네!' 건축에 문외한인 제가 처음 보자마자 느꼈던 생각입니다. 만화에 나올 법한 건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통념을 깨는 것 같아 유쾌했습니다. 

 

 

프랭크 게리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로스 앤젤레스 주재의 건축 설계 사무소 빅터 그루엔에서 잠시 근무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창작의 저변을 넓혀갔습니다. 그가 당시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목록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받은 영감은 그를 건축가와 예술가의 경계에 선 인물로 불리게  합니다. 한편 바바라 아이젠버그가 쓴 프랭크 게리의 인터뷰집 < 프랭크 게리와의 대화>에서 그는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앙리 마티스, 조르지오 모란디와 같은 , 세기와 양식을 넘나드는 회화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예술적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기능과 효율을 간과한 낭비적 건축이라고 비판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인 프라하 체코의 <댄싱 하우스>역시 위와 같은 비판을 받은 사례입니다. 비평가들은 바로크, 고딕, 아르누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 프라하에 근본 없는 키치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며 주변 경관을 해친다고 비난합니다. '건축가인가?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은 프랭크 게리의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은 분류에 대해 "쓸데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불려도 좋으며, 그저 예술과 관련된 건축물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프랭크 게리는 건축뿐만 아닌, 다양한 인스톨레이션 작업과 의자 등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댄싱하우스>는 지금도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8cJVsst0vU

 

 


 

 

 

 

 

Frank Gehry/Architectural Digest

 

 

 

 

 

 

일본 고베지도/여행과 날씨

 

 

<Fish dance restaurant,kobe, japan,1989> 물고기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대단했습니다. 어렸을 적의 기억 때문이라고 하네요.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물고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만들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zTZ9wvNHhY

 

 

 

Golden fish by Frank Gehry at the Olympic Village in Barcelona, Catalunya,Spain,1992/Alamy

 

 

Fish Lamps by Frank Gehry/ Colossal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 1997/ 미주한국일보-워싱턴 DC

 

 

 

 

스페인 빌바오/땅집고

 

 

 

 

1991년 프랭크 게리는 인생을 바꿀 만한 제안을 받게됩니다. 바로 스페인 항구 도시 빌바오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이었죠. 광업 도시인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는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197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인구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도시는 점점 슬럼화되어 가고 있어 지요. 이에 바스크 정부가 꾀한 대책은 문화예술 산업을 통한 경제부흥. 그 일환으로 바스크 정부는 미술관 그립을 계획합니다. 정부는 프랭크 게리에게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공업 도시 빌바오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건물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랭크 게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입니다.

 

 

 

빛이  반사되는 티타늄 외벽의 우주 전함을 연상케하는 외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금세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1997년 개관 이후 빌바오는 매년 1백만 명이 찾아오는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건물 하나로 도시 전체의 번영을 꾀하는 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rDLh7OsThM

 

 

 

 

 

 

https://www.youtube.com/watch?v=zd6xbBL6ejw

 

 

 

 

2024.04.19 - [지식&교양] -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51-6.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61)

'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sun-n5y2.tistory.com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트립어드바이저

 

 

 

 

로스엔젤레스,캘리포니아주, 미국/위키백과

 

 

 

 

프랭크 게리가 18살이 되던 1947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트럭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처음 프랭크 게리는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원소들과 씨름하던 그는 이내 화학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유년 시절의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과 그림을 즐겼으며 , 무엇보다 할머니와 모형을 만들던 순간이 기억에 사무쳤다고 회고합니다. 

 

 

 

프랭크 게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건축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학교(USC)를 옮겨 건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고요. 이후 프랭크 게리의 가족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이주하게 됩니다.  1956년 27세인 그는  이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게 됩니다. 훗날 프랭크 게리는 직장을 위해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게 됩니다.(1960년)

 

 

로스앤젤레스 특유의 온화한 날씨와 자유로운  분위기, 과연 그의 가족이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면 프랭크 게리의 선택이 지금과 같았을까요? 프랭크 게리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건축적인 특징이 로스엔젤리스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1998년  프랭크 게리는 자신의 정서적 고향인 로스 엔젤레스의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완공까지 약 5년이 걸린 건물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구겨진 철판으로 점철된 건물은 로스 앤젤레스의 명소를 넘어 '미국을 바꾼 10개의 건물'로 선정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Ed1uDOZJE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Winegraph

 

 

 

 

 

La RioJa, Spain Map/Britannica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2005 엘시에고 스페인 프랭크 게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모델 작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모든 작업은 모델에서 시작해서 모델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델 작업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동시에 해결하고, 디테일 등 모든 작업을 모델에서 판단, 결정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역사에서 꼭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CATIA'시스템입니다. 본래 항공기,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되던 'CATIA'는 프랭크 게리가 원하는 정밀도로 철재 패널을 비틀고 구부릴 수 있었습니다. 흡사 우주 전함을 닮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소프트 웨어를 통해 철저한 모델 작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CATIA'시스템은 이후 자하 하디드와 같은 유명 건축가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 게리는 컴퓨터에 그리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를 컴맹에 가깝다고 소개합니다. 컴퓨터 작업 이전 그는 철저하게 모형을 통해 재료의 특성과 구조 세부 등을 연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프로젝트 전시에 공개된 수백 개의 건축 연구 모형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당시의 컴퓨터로는 불가해한 창의적인 구조 역시 수많은 모형을 통한 모델 작업의 결과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여러 건물 중 가장 구부러지고 비틀린 작품을  고르자면 그건 단연 스페인의 와이너리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나무의 비틀린 형상을 토대로 벽돌 건물 위에 얹은 티타늄 캐노피는 마치 미래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합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조형물을 만들어 냅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아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한번 가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Marques de Riscal Reserva Rioja/ 컬처램프
윈스턴의 와인스토리-마르께스 데 리스칼 /컬처램프

 

 

 

 


 

musee louis vuitton paris/sportgranada.com

 

 

 

구겐하임 빌바오의 성공이 계속되자 루이비통에서 동반자가 되자고 게리를 끌어 안습니다. 그의 나이 80대. 파리에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을 짓게 됩니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형상을 이미지화한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입니다. 

 

 

Celebrating Louis Vuitton's daring construction by Frank Gehry/Vogue France

 

 

 

 

 

https://www.youtube.com/watch?v=_ed-d4Zxxnc

 

 


 

 

 

Rip Zaha Hadid/World Red Eye

 

2000년대 들어 자하 하디드와 교우가 많아 지면서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들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건축계에 새로운 경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볼 수 있을까요? 올해 95세를 맞은 그는 아직 은퇴하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합니다. 백 세 시대 그의 상상력이 첨단 디지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얼마나 나래를 펼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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