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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으니까요. 그래서 이 시장의 최정점인 미술 컬렉터를 보는 시각은 극과 극입니다. 미술에 투자하며 예술계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오직 돈을 좇으며 미술계를 왜곡하는 '검은손'으로 지탄받기도 합니다.

 

 

 

전설적인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도 호평과 혹평을 고루 받았습니다.  뒤샹, 피카소, 달리, 칸딘스키, 몬드리안 작품을 사들이며 현대 미술 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예술 중독자이지요. 그 옆엔 천 명의 남성과 잠자리를 가진 섹스 중독자라는 평가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녀의 사적인 생활에 초점을 두다 보면 페기가 살아생전  이루어 놓은 업적이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절대적입니다. 그의 삶을 훑는 건 20세기 미술 지형도를 그리는 일과 같습니다. 

 

 

 

Peggy Guggenheim/NYCulture Beat

 

 

 

미술품 하면 먼저 막대한 돈이 떠오릅니다. 구겐하임 가문의 이단아 미술 컬렉터의 중요한 자질 역시  재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기 구겐하임은 준비된 컬렉터였죠. 페기는 미국 명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898년 필라델피아에서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고 ,뉴욕에서 성장합니다. 유대계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은 광산업으로 어머니 가족은 은행업으로 부자가 됐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에서 자랐지만 페기의 유년은 우울함으로 가득합니다. 친가,외가, 양쪽 모두에 불행이 닥칩니다. 집안 내력처럼 이모, 외삼촌들의 성격과 행동은 어딘가 기이하고 괴팍했습니다. 그런 가풍을 참지 못한 이모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외삼촌 중 한 명도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요.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나무위키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페기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줍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일곱 살 페기가 아버지를 향해 " 밤마다 외출하는 걸 보니 애인이 생겼나 봐요?"라고 물을 정도였죠. 페기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신경질적인 어머니는 머나먼 존재였으니까요. 오직 아버지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과 여행을 다니며 좋은 취향을 길러 주려 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황망하게 떠납니다. 페기의 아버지는 타이타닉호 승선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타이타닉 Titanic ,1997> 영화에 상류층으로서 마지막 신사도를 발휘해 젊은 여인과 아이들에게  구명조끼와 자리를 양보하는 벤자민 구겐하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인디포스트

 

 

 

 

아버지를  잃은 페기는 명문가 여자의 삶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눈썹을 다 미는가 하면, 가족의 반대에도 푼돈을 받으며 서점에서 일을 합니다. 22세에 250만 달러 (현 ,3410만 달러)를 상속받게 됩니다. 신탁을 통해 매년 2만 2500달러를 벌었고요. 맨해튼 44 Street의 아방가르드 서점 "The Sunwise Turn'에서 회계로 일하면서 상류층 인사, 예술가들과 사귀게 됩니다.

 

 

 

전위적인 분위기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교제하며 페기의 안목이 길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즈음 스캇 피츠제러드<위대한 개츠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도 사귀게 됩니다. 스티글리츠는 FIVE 애브뉴의 갤러리에서 세잔, 피카소,  마티스의 전시회를 미국에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었습니다.  페기는 스티글리츠의 아내이자 화가 조지아 오키프와 첫 남편이 될 조각가 로렌스 베일을 만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0GnhPj7FKE

 

 

 

 

가문에서 페기는 이단아 취급을 받습니다. 성인이 된 페기는 탈출하듯 미국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전 세계 예술가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았던 파리였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는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하는 작품입니다. 영화엔 피카소, 달리, 샤갈, 장콕도,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 등이 등장합니다. 그 시절 파리는 20세기, 예술의 중요한 순간을 한데 그러모은 시기였습니다. 1921년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금세 예술의 도시에 푹 빠집니다. 미국에선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여겼던 페기는 보헤미안들로 가득한 파리에 녹아들며 예술가들과 어울립니다.

 

 

 

 

 

나는 현대미술에 대한 건 전부 뒤샹에게 배웠다.

 

 

 

Marcel Duchamp, <Fountain>,1917/wikipedia

 

 

1920년 파리로 이주해 몽파르나스에 사는 화가, 작가들과 교류했습니다. 만 레이(Man Ray, 본명 Emnanuel Radnitzky 1890-1976),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도 이 시절 친구가 됩니다. 뒤샹은 구겐하임에게 지속적으로 미술 자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뒤샹은 모던 아트에 대해 가르쳐주었으며,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사야 할지를 조언해 주고요.

 

추상미술: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점, 선, 면, 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한 미술의 한 가지 흐름이다. 형이나 색은 각각의 고유한 의미와 느낌을 가지고 있어 형과 색의 어울림만으로도 그리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엇이 이성의 속박을 벗어나서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즐겨 표현하려는 회화 시 등의 예술 혁신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서 다다이즘(DADAISM)에 이어서 일어남. 무의 식의 세계를 그대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을 중요한 기법으로 삼음.

 

 

 

페기, 아들& 첫 남편 로렌스 베일Laurence Vail/Elisa Rolle

 

 

 

페기와 아이들/NYCulture Beat

 

 

 

 

파리에서  페기는 로런스 베일(Laurence  Vail 1891-1968)이라는 예술가와 결혼합니다. 7년간(1922-1930)의 결혼생활은 무참히 끝납니다. 로런스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울분을 품었고, 아내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페기는 로런스와 이혼하고 존 홈스라는 비평가를 만납니다. 존은 여자를 존중하는 남자였죠. 예술 전 분야에서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존 옆에서 페기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5년간 이어진 연애는 예고 없이 막을 내립니다.  존은 간단한 수술 중 마취사고로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의료사고인가 싶지만 수술 전날 술을 엄청 먹고 수술대 위에 올라갔다고 하네요.

 

 

 

 

허무하게 아버지를 잃고, 연거푸 사랑에 실패한 페기는 영원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존을 잃은 후 페기는 많은 남자들과  짦은 만남을 이어갑니다. 수많은 남성을 침대로 끌어들인 유태인 재벌 상속녀는 호사가들 먹잇감이 됩니다. '돈 많은 창녀'라는 심한 비난까지 있었고요. 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섹스를 하는 것은 하나의 여흥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Festival De Cannes logo.svg/wikipedia/ 매년 5월 프랑스 남부 지역 깐느에서 열리는 이 로고를 디자인 한 사람이 '장콕도(Jean Cocteau)'이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페기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지인이 페기에게 화랑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페기는 바로 실행에 옮기고요. 1938년 런던에서 모던 아트 갤러리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화랑을 열게 됩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 장 콕도 (Jean Cocteau)의 드로잉을 개관 전에 소개합니다. 이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영국 첫 개인전도 열고요. 이브 탕기 (Yves Tanguy 1900-1955)그리고 신인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헨리 무어(Henry Spencer Moore 1898-1986),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1898-1976)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를 모은 그룹전도 기획합니다. 페기에겐 현대미술의 신화로 추앙받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천재 조력자가 그녀를 돕습니다. 

 

 

 

 

 

Samuel Beckett/Peggy Guggenheim collection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버켓(Samuel Beckett 1906-1989))도 페기구겐하임의 연인이었습니다.베켓은 1939년 파리에서 작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의 비서로 일하던 중 파티에서 페기를 만납니다. 베켓도 페기에게 유럽의 옛날 거장 (Old Masters)들보다 모던 아트에 집중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술가들의 예술가였던 뒤샹과 손잡은 페기는 미술 컬렉터로서 명성을 얻어 갑니다.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 화랑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도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수완은 부족했죠. 적자가 심해져 1년 6개월 만에 '구겐하임 죈'문을 닫게 됩니다. 대신 페기는 더 큰돈을 들여 런던에 제대로 된 갤러리를 짓기로 합니다. 개관 전시회에 선보일 화가  리스트도 작성했지만, 끝내 새 화랑은  문을 열진 못합니다. 전운이 유럽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편 삼촌 솔로몬 R. 구겐하임은 뉴욕에서 뮤지엄 건립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xNnH8ygSzc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미술 컬렉터들은 미국으로 탈출합니다. 페기는 오히려 서슬 퍼런 파리로 향하고요. 나치에 붙잡히면 목숨도 잃을 수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하루에 그림 한 점씩 사들였습니다. 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구매합니다. 흥정도 필요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초현실적인 난장판 속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은 장난처럼 여져졌습니다. 그림 값은 터무니없이 쌉니다. 피카소 10점, 막스 에른스트 40점, 후안 미로 8점, 마그리트 4점, 만 레이 3점, 달리 3점, 클레 1점, 샤갈 1점... 등 당시 화가들이 그녀의 집 근처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하네요. 

 

 

 

 

 

#페기는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려 루브르 박물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박물관측은 "당신의 그림은 가치가 없다." 라며 무시합니다. 그 당시 페기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달리, 마그리트, 자코메티 등의 작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측도 30-40대 젊은 작가들을 연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 , 주로 미술사로 가치가 있는 작품 위주로 보관이 결정되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유럽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 가는 행운을 잡게 됩니다. 

 

 

 

Modern Group Portraits in New York Exile/Stedelijk Studies

 

 

 

 

 

 

위:J.ERNST(지미 에른스트) , Peggy Guggenheim(페기 구겐하임), FERREN(패런) , DUCHAMP(뒤샹), MONDRIAN(몬드리안)

중간:M. ERNST(막스 에른스트), OZENFANT(오젠팡), BRETON(브르통), LEGER(레제), ABBOTT(애보트)

맨 아래:HAYTER(헤이터), CARRINGTON(캐링턴), KIESLER(키슬러), SELIGMANN(셀리그먼)

 

 

 

나치의  공세가 거세졌습니다. 페기도 유럽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림을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페기는 미국행 선박에 미술품을 싣기로 합니다. 그림을 이불보 사이에 넣어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탈출시킵니다. 페기와 함께 미국에 온 건 그림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나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 망명 작전에도 참여합니다.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한 인물 중엔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었습니다.

 

 

 

 

막스 에른스트와 도로시 채닝/NYCulture Beat

 

 

 

 

페기 구겐하임은 남부로 피난갔다가 1941년 여름 뉴욕에 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금세기 미술관 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고 유럽에서 가져온 그림을 선보입니다.  큐비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키네틱 아트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30명이었어야 하는데...

 

1941년 12월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결혼합니다. 전쟁을 저지른 독일이란 적성국가에서 온 탓에 정부 감시를 받고 있던 에른스트는 애정과 상관없이 안전을 위해 페기와 결혼을 합니다.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도 힘쓴 페기는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열게 됩니다. 여성 미술가로만 이뤄진 최초 전시회였습니다. 하필 이 기획전의 여성 화가인 도로시 채닝과 남편 에른스트가 열애에 빠지면서 결혼 생활도 파경에 이릅니다. 프리다 칼로는 이 전시로 미국 진출 발판을 마련합니다.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조선일보

 

 

 

 

1942년 맨해튼에서 아트 오브 디스 센추리가 입체파, 추상화, 초현실주의 그룹전으로 갠관하며, 오프닝 파티를 했을 때 페기 구겐하임은 한쪽 귀엔 알렉산더 칼더가 만든 귀걸이를 , 한쪽 귀에 이브 탕기가 만든 귀걸이를 달고 나타납니다. 페기는 유럽 화가들 외에도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 자넷 소벨, 클리포드 스틸, 그리고  잭슨 폴락을 소개하게 됩니다. 

 

 

 

 

 

 

 

 

내 첫번째 성취는 잭슨 폴록,
두 번째는 아트 컬렉션이다.
-Peggy Guggenheim-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ARTLECTURE Contemporary Art Platform

 

 

 

 

2024.04.17 - [지식&교양] - 51-5.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60)

 

51-5.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60)

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요? 누군가는 문득 우주를 떠올리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통만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는 '그림에서 꼭

sun-n5y2.tistory.com

 

 

 

 

 

페기는  신인 화가 공모전도 개최합니다. 미술관에서 잡부로 일하던 한 남자가 그림을 출품합니다. 페기는 이 무명화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합니다. 추상미술계의 스타 잭슨 폴록이 구겐하임 뮤지엄의 목수로 일하고 있을 때 그를 발굴합니다. 그리고 가난했던 폴락과 화가 부인 리 크래스너가 롱아일랜드 스프링 지역의 집을 살 때 2천 달러를 빌려줍니다. 그리고 매달 생활비를 지원합니다. <금세기 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어줍니다. 미국 현대미술 슈퍼스타 잭슨 폴록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페기는 1950년 베니스의 무세오 코레르에서 폴락의 전시도 열어 줍니다. 페기는 인생을 통틀어 폴록을 발견한 점이 가장 큰 성취라고 회고합니다. 그는 유럽에 소개되고,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금세기 미술관>/bianca-ariel.blogspot.com

 

 

 

 

1946년 화가 도로시아 채닝과 바람난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 이혼한 페기는 이듬해 갤러리를 닫고 베니스에서 살기로 작정하고 유럽으로 떠납니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그리스 국가관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게 됩니다. 이듬해엔 베니스 그랜드 카날 위팔라쪼 베니에 데이 레오니( Palazzo Venier dei Leoni)에 정착합니다.  1948년 페기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Marj Rothko 1903-1970), 아쉴리 고르키(Arschile Gorky 1904-1948)를 초대한 전시회를 열고 유럽에 이들 미국 화가들을 소개합니다. 

 

 

peggy Guggenheim/ bianca-ariel.blogspot.com

 

 

 

 

 

"세상에 즐거움을 줬으면 됐지" 페기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마음엔 늘 유럽이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다시 유럽에 갑니다. 이번엔 파리가 아니라 베니스였습니다. 운하 근처 대저택을 개조해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오늘날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성지입니다. 페기는 베니스에서 30여 년을 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LPcv0hnN24

 

 

 

 

 

추상표현주의 화가 로버트 드니로 시니어(1922-1993)&배우 로버트 드니로/newsis

 

여담으로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1946년 자신의 화가 부모(로버트 드 니로 시니어&버지니아 애드미럴)가 , 자신이 3살 때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의 갤러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도르소두로에 위치한 페기 구겐하임 박물관/익스피디아

 

 

 

https://www.youtube.com/watch?v=NK25iL7PfWE

 

 

 

 

 

 

이후 구겐하임은 유럽의 뮤지엄에 컬렉션을 대여했으며, 1969년엔 삼촌이 설립한 뉴욕 구겐하임뮤지엄에 대여했습니다. 결국 페기 구겐하임은 1976년 자신의 베니스 집과 컬렉션을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에 기부합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입체파, 초현실주의, 미래파, 추상표현주의 등 20세기 전반 미국과 유럽 미술을 아우르는 중요한 컬렉션이 됩니다. 

 

 

 

화려한  삶을 산 여성은 남성들의 숙덕공론에 둘러싸이기 일쑤죠. 페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력은 페기에게 자유와 명성을 줬지만, 세상은 자유롭고 잘 나가는 여성을 마뜩잖게 여깁니다. 페기는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서 인류의 보물을 지켜내고 대중과 공유했습니다. 그럼에도 기회를 틈타 값싸게 예술을 사들인 장사치로 폄하됩니다. 평생 아무 일 안 해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재벌이 굳이 목숨까지 걸며 포화 속으로 뛰어든 이유가 꼭 돈 때문일까요?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니 감상은커녕 창고에 넣어두기만 한다.
주식을 가장 유리한 시점에 팔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Peggy Guggenheim-

 

 

 

 

 

페기는 예술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잭슨 폴록 작품 수십 점을 기부한 페기는 "세상에 즐거움을 줬으면 됐지."라고 쿨하게 말합니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신의 컬렉션을 과감히 대여해주기도 합니다. 비즈니스와 거리가 먼 행보들입니다. 페기는 투기사업으로 변질된 뉴욕 미술 시장을 보며 한탄합니다. 

 

 

 

 

 

Peggy Guggenheim/ 실용오디오

 

Peggy Guggenheim/NYCulture Beat

 

 

 

페기 구겐하임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근현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고, 소개하고, 구입하면서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페기는 1976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베니스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81세의 페기 구겐하임은 자신의 집 정원 14마리의 라사 압소(Lhasa Apso) 애견 옆에 묻혔습니다. 구겐하임은 한 때 57마리의 라사 압소견들과 함께 살았다고 하네요. 1976년 그녀 사후  그녀의 소장품으로 베니스에 뮤지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이 창설됩니다. 

 

 

 

 

 

Peggy Guggenheim/조글로

 

 

프랑스에 살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의 자손 7명은 한때 파리 법정에 구겐하임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구겐하임의 증손자이자 아트딜러인 산드로 롬니는 구겐하임이 페기 구겐하임의 컬렉션 그대로 베니스 팔라쪼에 전시할 것을 소망했지만, 구겐하임 측은 지속적으로 미술품을 사들여 거의 절반을 바꾸어 전시하며, 할머니가 애견들과 잠들어 있는 정원을 파티장소로 대여함으로써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Peggy Guggenheim/yes24

 

 

 

 

 

 

페기 구겐하임의 딸 페긴 베일 (1925-1967)은 화가였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베긴은 몬드리안, 레제의 친구였던 프랑스 화가 장 엘롱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혼 후 런던의 프란시스 베이컨 전시 오프닝에서 만난 영국인 화가 랄프 롬니와 재혼합니다.

 

Pegeen Vail Guggenheim/ Bridgeman images

 

Pegeen Vail Guggenheim/Visit Venice Italy

 

 

 

 

 

양아버지 막스 에른스트를 비롯, 이브 탕기, 앙드레 브레통, 마르셸 뒤상, 잭슨 폴락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베긴은 MOMA를 비롯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에서 전시했습니다.  페긴은 1943년과 1945년에 엄마의 < 아트 오브 디스 센추리 갤러리>에서 열린 여성작가 31인전 'The Women'에서 프리다 칼로, 리크래스너, 도로시아 채닝 등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습니다. 평생 우울증에 시달려온 페긴은 41세에 마약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랄프와 롬니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남겼고요.

 

 

 

 

미술을 사는 사람들,그들은 열정으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트인사이트

 

 

 

 

페기는  오해와 손가락질에도 꿋꿋이 할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 영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예술을 사랑했고요. 예술 안에서 살다가 자신의 안목과 작품을 남긴 채 떠났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구해내고, 미국에서 발굴한 예술은 인류의 자산으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피카소, 몬드리안, 폴록, 뒤샹, 칸딘스키의 이름을 잊지 않는 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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