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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문화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로 르네상스를 꼽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종교화가 신앙심의 근원인 동시에 위엄과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요.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위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위선으로 가득 찬 시대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화가가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Caravaggio, 본명 Michelangelo merisi (1571-1610/39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활동한 유명한 화가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와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교인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성화로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 본연의 심리를 꿰뚫고 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던 카라바조는 가톨릭 교회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16세기 뒷골목을 오가는 불량배, 거지, 매춘부 등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그들을 예수로, 성자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죠. 그  가 그린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9.29-1610.7.18)는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였던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밀라노 근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풍습에 따라 이름에 아버지 고향 이름을 붙였습니다.(다 카라바조:카라바조 출신/2007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사실이 만학도 아마추어 미술사가에 의해 밝혀집니다.)

 

 

 

6살이 되던 해 ,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합니다. 13세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표현법의 창시자로 그림 대부분을 암흑에 가깝도록 어둡게 처리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에 빛이 떨어지도록 하는 기법을 처음 시도합니다. 이는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대상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지요. 인물표현이 아닌 내면적 심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인간의 내면 표출에 대한 예술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탄생하게 된 기법인 셈이지요.

 


 

 

<Young Sick Bacchus>,1593/wikipedia

 

 

 

 

<병든 바쿠스 신>은 그의 초기작품 중 하나입니다. 무슨 영문인 지 알길 없으나  밀라노에서 로마로 혼자 가게 됩니다. 로마의 뒷골목을 헤매며 구걸도 하고 길거리 화가로 지내다 병에 걸립니다. 몸이 망가져  로마 주변에 있던  빈민구제소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납니다. 살아 나왔던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에 빗대  표현합니다. 신이지만 손톱에 때가 끼고, 시든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얼굴은 병 때문에 창백한 모습이고요.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합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술주정을 한다는 발상이 카라바조 답습니다. 충동적인 그의 성격은 매력적인 예술가로 보이게 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났기에 성격적 결함은 하나의 특징처럼 여져지기도 했지요. 보수적인 미술계에서는 스케치가 없는 계획되지 않는 작품 제작 방식, 지나치게 강렬하고 연극적인 연출 방식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하지만 젊은 작가들은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마치 디오니소스 뒤를 따랐던 광신도처럼 말입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카라바조를 숭배했고, 그의 화풍을 흠모했으며, 자신들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당시 기득권 미술가들은 카라바조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캔버스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는 형식을 파괴했고 사실주의 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신 중심의 관념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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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tune Teller>,1594/wikipedia

 

 

 

 

 

 처음으로 점쟁이를 사실적으로 등장시킨 작품이 카라바조의 <The Fortune Teller>입니다.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카라바조 자신이 로마 뒷골목 생활을 하며 모든 군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길거리 생활을 몸소 겪으며 성스러운 도시 로마 사람들의 이면의 삶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젊은 여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청년은 장갑을 쥔 손을 칼에 올리고 젊은 여인에게 손을 맞긴 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빝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입니다. 당시 집시들은 치마를 한쪽 어깨에 매달아 입고 거리를 다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점을 봐주고 돈을 받는 거죠.  젊은 집시 여인에게 점을 보는 젊은 청년은 귀족입니다. 깃털 달린 모자와 화려한 옷차림 그리고 칼은 청년이 귀족임을 상징하고 있지요. 장갑 긴 손을 칼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부유함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손금을 보는 것이 아나리 청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탐나는 가 봅니다. 귀족 청년은 훔치려는  여인의 행동을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귀족 청년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고, 집시 여인은 그런  귀족 청년을 바라보며 훔칠 기회를 노립니다.    이 작품에서 집시여인은 젊은 남자에게 두 가지를 훔칩니다. 운명을 점친다는 거짓말로 돈을 훔치고 그것을 미끼로 반지도 훔치려 하니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집시 여인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을 생략했습니다.  카라바조는 길을 가다가 점을 보는 집시 여인을 불러 서  이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마치 길거리 캐스팅처럼 말이죠. ) 다른 화가들에게도 카라바조의 모델 캐스팅 방법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그런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죠.

 

 

카라바조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기대하면서도 의뢰받은 종교화 대신 길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서민들의 생활상을 현실감 넘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이 선호했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매춘부, 농부, 부랑아 등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을 미술 애호가나 귀족들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종교화나 신화를 표현해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화상 발랑탱이 종교화를 의뢰했으나 그가 그린 것은 사기꾼을 묘사한 <점쟁이>였습니다. 이 작품을 받은 발랑탱은 카라바조에게 의뢰한 액수를 다 지불하지 않았고 카라바조는 다시 거리로 부랑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Boy Bitten by a Lizard>,1593-1594/wikipedia

 

 

 

1595년경 로마의 유력한 예술 애호가 눈에 들어 순식간에 이탈리아 최고 화가로 각광받기 직전까지도 카라바조는 다른 화가의 공방에서 정물을 담당하는 도제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정물이란 성화의 배경을 장식하는 사소한 분야로 여겨졌지요. 주문자가 있었을 리 없는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사람들 눈길을 끌어 헐값이지만 판매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그림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입니다.

 

 

어두운 배경에 강렬한 조명을 받으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린 소년은 탐스러운 과일에 손을 댔다가 숨어 있던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렸습니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수줍은 눈망울로 간청하듯 우리를 쳐다보니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지요. 중지를 물린 소년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벌어진 붉은 입술, 드러난 어깨, 장미를 꽂은 풍성한 머리카락은 보는 이의 성별에 상관없이 유혹적입니다. 소년 앞에는  탱글탱글한 식감이 눈에 보이는 신선한 체리와 고운 꽃이 있습니다. 물방울 맺힌 유리병에는 작업실 창문까지 비쳐 보이니 이 모두를 그려낸 화가의 재주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유리 화병에 그려 넣은 것처럼 살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카라바조가 빛의 양을 조절했다는 말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빛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르네상스 작품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출현으로 이제 르네상스 작품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카라바조를 따라 하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트렌드를 만들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Bacchus>,1596, The Uffizi, Florence /wikipedia

 

 

 

음악과 미술에 있어 당대 최고의 권위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델 몬테 추기경의 저택에서 머물던 시기의 카라바조는 추기경의 후원과 도움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델 몬태 추기경은 피렌체의 후원을 받아  메디치 가문의 예술품 매입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그린 그림을 그 자리에서 삽니다. 그리고 숙식을 제공하고 스튜디오를 마련해 주었지요. 카라바조는 그곳에서 다양한 창작을 실험해 보고, 테크닉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1590년대 중후반 경에 투스카니(토스카나)의 메디치 대공을 위해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위의 작품 <바쿠스 Bacchus,1596>와 <메두사의 머리 Head of tne Medudsa,1577>가 그것이지요. 

 

 

 

 

포도잎과 덩굴을 둥글게 말아서 만든 머리에 쓴 화환이 보입니다. 갈매기 눈썹에 동그란 얼굴, 적당히 취기가 오른 발그레한 볼이 생기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를 넘어 과하게 되면 술이 욕망이 가득한 사람을 잡아먹게 되지요. 술과 쾌락에 자신의 모든 젊음을 소비하는 당시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삼촌과 동생이 성직자였던 집안입니다. 누구보다 신앙심 깊었던 사람이 카라바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관성의  법칙처럼 카라바조를 다시 구렁텅이 삶으로 밀어 넣습니다. 쾌락에 탕진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늘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있지만 살아내지 못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과일바구니 보이시나요. 실사같이 정교해 한 입 깨물고 싶어 집니다. 로마에서 최초의 정물화가였다고 해요. 이런 과일의 섬세한 디테일은 네덜란드로 많이 파려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니타스'라는 정물화 스타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하고 벌레 먹은 구멍이 있는 사과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세속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신성한 구원을 의미하는 포도는 검정 포도는 죽음을 청포도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바쿠스의 손에 들려 있는 입 넓은 커다란 잔에는 와인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투명한 병에 담겨 있는 와인은 아무리 마신다 해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집은 대성당이나 귀족의 저택처럼 너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하다는 것은 세속의 삶이 만들어 낸 지극히 계층적인 개념이지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반 대중에게 그리스도의 집은 , 문 안으로 들어서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고, 배 고프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카라바조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이 그리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카라바조의 그런 독창성은 사물과 현상을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눈과 창의적인 해석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카라바조-






<The Cardsharps>,1595/wikipedia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 사기꾼> 작품입니다. 영국에서 7천만 원에 판 그림이 170억 원 상당의 카라바조 작품으로 감정되자 옛 주인이 화가 나 경매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랍니다.(2014.10.28)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인 랜슬롯 드와이츠는 2006년 경매사 소더비를 통해 4만 2천 파운드(한화 7천100만 원)를 받고 그림 한 점을 내다 팔았습니다. 드와이츠의 집안에서 1962년 140파운드에 사들인 이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사기꾼>과 비슷했는데  소더비는 카라바조 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사들인 저명 예술사가이자 수집가인 테니스 마흔 경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진품이라면서 1천만 파운드(약 170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깜짝 발표했습니다. 화가 난 드와이츠는 소더비가 제대로 감정을 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소더비는 카라바조의 작품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고요.

 

 

현재 이 그림은 170 역원의 보험에 가입돼  있습니다. <카드사기꾼>은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돼 있으며 감정가는 5천만 파운드(847억 원)다.

 

 

<The Cardsharp with the Ace of Diamonds>,1620-1640,Georges de La Tour/wikipedia

 

 

 

조르주 들라트르의 작품입니다. 카라바조의  <카드 사기꾼>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실어 봅니다. <타자>들의 세상이 보이시나요. 두 여인의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Medusa>,1597, Uffizi, Florence/wikipedia

 

 

메두사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마녀로, 로르고 네스 세 자매 중 한 명입니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지요.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거울처럼 잘 닦인 방패를 이용해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며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카라바조는 메두사의 이야기에서 다른 요소는 제외하고 잘린 메두사 머리만 그렸습니다. 원형 캔버스에 그려진 메두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림 속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여성의 모습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메두사의 모습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자신의 충동 때문에 겪는 고통과, 이 충동을 누군가가 멈추어주기를 바라는 카라바조의 마음이 투사된 그의 자화상으로 추측됩니다.

 


 

 

<Judith and Holofernes>,1598-1599 or 1602/wikipedia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지요. 끔찍한 장면이기도 하고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s>는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입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유디트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 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디트는 하녀 아브라와 함께 이 계획을 실현하여 성공시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의 대조 속에 홀로페르네스의 고통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유디트의 자세는 다소 모호해 보이며 주춤하는 듯하고요. 이 작품을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강렬한 명암대조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 표정입니다. 마치"내가 꼭 이런 일까지 해야 해." 조력자로 함께한 늙은 노파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Narcissus>,1597-1599/wikipedia

 

 

 

 

고대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나르시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나르시스는 너무 아름다워 누구든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졌지요. 나르시스가 태어났을 때, 리리오페는 한 예언자에게 찾아가 나르시스가 장수할 것인지를 물었고 예언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나르시스를 사랑하게 됐고 그의 아름다움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이들의 찬미와 감탄을 무시하고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거만한 나르시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 님프가 신들에게 복수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두소소,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얻을 수 없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듣게 됩니다.

 

 

어느 날 나르시스는 숲 속에서 외딴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샘은 고요하고 맑았습니다. 그는 샘물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갈증을 느껴 샘물을 말시려 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샘물 가까이 몸을 숙였을 때, 그는 고요하고 맑은 물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나르시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안아 보고 싶었지만 손이 닻자마자 흐려지며 사라지는 형상을 어찌할 수 없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물속의 자신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아아. 허무하구나, 사랑하는 자여!... 안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카라바조는 오비디우스의 로마신화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를 , <나르시스(Narcussus)>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르시스를 극도의 빛과 어둠으로 묘사해 그 신체에 표현된 밝기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가 되어 나르시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물은 작품 구성을 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나르시스는 물가에 앉아 오랫동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땅을 짚은 오른팔은 체중을 받치고 있지만, 왼팔은 물속의 형상을 잡고 싶은 듯 물속으로 뻗어있습니다. 나르시스의 두 손과 물에 반영된 두 손은 서로 만나 타원형을 이룹니다.

 

배경의 어둠은 나르시스의 바깥 세계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에 세상을 잊은 걸까요? 아니면, 욕망 때문에 닥치게 될 어둠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위 세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사랑해던 존재들과 그의 가족, 그리고 주변의 동물과 식물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물속의 나르시스의 모습은 젊은 모습이  아닙니다. 나르시스의 병적인 자기애로 말미암아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금 보고 있는 건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ew>,1599-1600/wikipedia

 

 

 

<성 마태의 소명>이라는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걸작 중의 하나로 예수님이 마태에게 그를 따르도록 영감을 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저요?"하고 물어보는 듯한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일까요? 아니면 맨 끝에서 예수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돈 세고 있는 젊은 남자일까요?  세금징수원이었던  마태오가 한쪽 손에 늘 돈 주머니를 챙기고 다녔으니  그가 마태오가 틀림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1년 뒤에 <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을 그리는데, 이 그림에서의 마태오는 젊은 남자 옆에 서있는 안경 낀 남자와 가장 비슷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결론 나지 않은 상태이고 작품을 X-ray로 촬영해 보니 예수의 손가락 방향이 세 번이나 수정된 것도 알아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다만 성격이 워낙 폭력적이고 통제가 되지 않아 후원자들이 뒷 수습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명성에 맞지 않게 로마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그때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었거든요.

 

1599년에서 160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이와 같은 시기에 그린 <성 마태의 순교(Martyrdom of Saint Matthew)>와 나란히 현재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SjUvh0g8&t=8s

 

 

 


 

 

 

<Amor Vincit Omnia>,1601-1602/Gemaldegalerie, Berlin/wikipedia

 

 

 

 

큐피드가 아기의 모습이 아닌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일까요? 나체의 모습이 보기 민망해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주인공은 사랑입니다. 라틴어의 ' Amor'는 '사랑'과 동급입니다. 

인간의 욕정, 육정, 욕망이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요. '사랑(Amor)'앞에 인간은 체면이고 재산이고 다 집어던진다는 말입니다. 발 밑에 바이올린, 류티, 악보가 있습니다. ' ㄱ '자 모양으로 생긴 곡자가 있고, 컴퍼스가 걸쳐져 있고요.  갑옷도 보입니다.  뒤쪽으로 책 같은 것도 펼쳐져 있습니다. 책 위에 깃털 펜도 보이고 또 월계관도 하나 얹혀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의 지식들, 건축, 음악, 무력  등 모든 것들이 '사랑'이란 단어에 굴복하게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사랑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도 하잖아요. 무서운 사랑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니까 '사랑'앞에 함부로 개기지 말아라.

사랑이 다른 가치를 넘어서 버린다. 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불나방 같은 사랑으로 그 '사랑'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표현을 합니다. 

 

 


 

<Supper at Emmaus>,1601/wikipedia

 

 

 

 

이 그림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엠마오에서 Luke와 Cleopas로 추정되는 두 제자 앞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집니다. 가운데 앉아 오른손을 들고 있는 인물이 예수입니다. 조개껍데기가 달린 옷을 입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클레오파스, 팔꿈치가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제자는 Luck, 그리고 왼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카라바조 자신이다.

 

 

 

카라바조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예수의 후광을 없앱니다. 카라바조가 전통적인 묘사 방식과 이별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또 카라바조는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그가 도박판이나 술판이 벌어지던 뒷골목에서 보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는 수염이 없고 여성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잘 나가던 때 그려진 그림이라 예수의 얼굴이 제법 살집 있어 보입니다. 제자들도 신성한 사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이었던 본래 그들의 모습과 닮아있죠. 카라바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라고 보았던 거지요. 아마도 그의 이중적인 삶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시 추기경의 후원으로 상류 사회를 접함과 동시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천박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아무리 종교개혁이 있다고 하나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당시 로마는 여전히 교회 세력이 막강했습니다. 카라바조의 이런 표현이 그들 눈에 많이 거슬렸을 겁니다. 

 

 

 

그림 속 빵은 생존에 꼭 필요한 양식으로 성찬례의 신비와 결합해 고유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계약의 피를 상징하고요. 흰색 식탁보는 그리스도 수의를 표현한 것으로  죽음과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소박한 식탁 차림에 각종 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등장합니다. 작품 속 과일은 수많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포도는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와 성찬례의 신비를 상징합니다. 청포도는 부활을 검은 포도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썩은 사과와 색이 변한 무화과, 복숭아는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고요. 석류는 과즙과 껍질의 붉은색 때문에 그리스도가 흘린 피, 곧 수난을 의미합니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1605-1606,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가톨릭 신문

 

 

 

화가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두 가지 도상으로 나눠 그리곤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길을 걸어가는  장면과 숙소에 머물며 식사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으로 말입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작품입니다. 당시 카라바조는 파출소를 들락거리고,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델몬테 추기경도 떠나가고, 소란 혐의 등등 점점 멘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요. 예수님 모습이 심각해 보여요.

 

 

 

 

 

그림의 무대는 어떤 숙소입니다.  <엠마오 사건>중 빵을 쪼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옮긴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사실주의적 표현, 빛과 그림자의 대비와 극적인 구성으로 르네상스의 관념적 화풍에서 벗어나 근대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작품에 사실주의에 대한 고집과 대담한 구성을 이용하면서 방금 일어난 일 같은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으며,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길 만한 기물도 없습니다. 대신 밝고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된 화면에는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중앙에 예수님을 비롯해 좌우 각각 제자 한 명씩 그리고 숙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그 옆에 시중드는 여자가 눈에 띕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빵을 떼는 순간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왼쪽의 등진 제자는 양손을 들어 깜짝 놀라는 동작을 하고, 오른쪽의 제자는 놀라운 감정을 강한 동작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손으로 식탁을 잡고 몸을 앞으로 굽히며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려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현존을 당장 알리고 싶은 심정이 동작으로 드러난 거지요. 마침내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듯 두 제자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순간의 반가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전달됩니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카라바조가 성경 밖의 인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두 인물은 주제의 의미를 심화시키지요. 서 있는 남자는 놀란 제자들과 달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네요. 더욱이 옆에 나이 든 여자는 식탁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관심 없는 얼굴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손에 든 음식을 식탁에 잘 가져다 놓는 것일 뿐이죠. 이 두 사람은 평범한 인물로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은 특별한 인물이나 장소가 아닌 우리의 일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주의를 모으는 것은 식탁 위의 빵을 축복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많은 화가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지만 카라바조가 그린 예수님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초상이기 때문이죠.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 예수님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당당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그림 속 예수님은 위엄과 당당함보다는 나약하고 고통받는 인간적인 모습이며, 하물며 식탁에 왼손을 짚어 몸을 의존한 채 오른손을 들어 빵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불후의 명성은 작품에서 나옵니다. 그의 바람 잘 날 없었던 인생에도 예수님이 머물기를 카라바조는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보르게세 추기경의 경고-

 

 

 

 

 

<Death of the Virgin>,1604-1606/wikipedia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입니다. 당시 성당이 있던 지역은 로마의 빈민가였습니다. 성직자들이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죠. 그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던 의뢰인들은 성모의 죽음이 영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작품이 공개되자 의뢰인들은 경악했고, 작품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작품을 거부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성경의 내용과 무관하게 익사한 임산부를 등장시켰습니다. 더욱이 카라바조는 그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관례를 어겨버립니다. 아무리 주제가 성모의 죽음이더라도 실제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퉁퉁 불어버린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었고요.

 

 

 

종교계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요. 결국 제단화는 철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교체됩니다. 카라바조의 눈에 성모의 죽음과 매춘부의 죽음은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 했던 모양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라바조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는 이 시기에 살인을 저지르며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포박당하는 그리스도 혹은 유다의 입맞춤 The Taking of Christ>,1602/ National Gallery of IReland

 

 

 

 

제자인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수난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들의 움직임을 체포당하는 그 순간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인물 (아마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깜짝 놀란 듯한 동작과 휘둥그레진 눈을 치켜뜨고  놀라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감으신 채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유다의 입맞춤을 받고 있고요. 유다는 그런 예수님을 단단히 부여잡고 예수님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을  캡처하여 마치 지금 우리 관람객들의 눈앞에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계시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 극적입니다.  그리고 화가는 그러한 느낌을 극대하 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장치르 더 해 두었습니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 등불을 들고 비추는 인물이 바로 그 장치입니다. 이 인물이 누구냐면,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화면상에 일부러 화가 자신을 그려넣음으로서, 마치 화가 자신이 그리스도가 체포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것을 그리고 있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등불을 들고 비추어 봄으로서 캄캄한 방이었을 그 순간의 상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한 효과로서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URJGv7-vI

 

 

 


 

 

 

<Tne Entombment of Christ.,1603-1604, Pinacoteca Vaticana,Vatican City/wikipedia

 

 

 

 

<그리스도의 매장>은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 정면에 걸릴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종교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구도를 따랐으며, 당대 성직자들로부터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화면 전체를 감싼 캄캄한 어둠 속, 예수의 시신을 관 속에 눕히고 있는 요한과 니코데모, 성모 마리아와 다른 두 마리아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서민적 모델의 사실적 묘사나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등 카라바조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특히 비통해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면 오른쪽에서부터 예수의 시신 위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이 빛을 통해 카라바조의 '테너브리즘 기법이 효과적으로 살아나며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운명을 다하고 17세기 바로크 시대가 도래하고 있던 그 무렵의 경계선에서,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가톨릭이 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미술양식을 탁월하게 구축해 나갑니다. 

 

 

 


 

 

<토마스의 의심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1602/wikipedia

 

 

 

카라바조가 1601-1602년에 제작한 <토마스의 의심>입니다.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토마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구부리는 예수가 보입니다. '신도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적 묘사가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못 봤던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검지 한마디가 들어간 걸 보니 상처 깊이와 길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며 부활을 증명해 보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단골 주제였습니다. 이들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바빴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성서 내용을 미화시킨 성화에 익숙한 보수적인 화가들과 주문한 교회는 카라바조 작품을 저주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사실적으로 당시 현실을 묘사하면서 신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베드로의 순교>/ART&Culture

 


 

 

 

 

https://www.youtube.com/watch?v=lH2V126BFeo

 

 

Chiesa di San Luigi dei Francesi <마태의 일생>

족보 없는 비렁뱅이 화가 카라바조에게 제단화를 맡긴 성당입니다. 

 

 

 


 

 

 

<Madonna and Child with st. Anne>,1605-1606, Galleria Borghese,Rome/wikipedia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가장 잘 나갈 수 있었던 때에 그린 가장 비극적인 작품이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성 안나를 묘사한 오른편의 늙은 여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녀는 당시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집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모 마리아 역시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으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로 그려집니다. 예수는 이미 많이 자랐음에도 갓난아기처럼 벌거벗은 채 그려져 있고요. 성스러워야 할 성화를 이런 식의 세속화된 인물들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을 듣게 됩니다. 이 그림의 실패로 그는 로마를 떠나게 되고, 그에게 이 같은 절호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드로 대성전을 수리하면서 새로 생긴 공간에 그의 작품을 걸기로 하고 제작을 의뢰합니다. 카라바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세계 교회의 심장인 베드로 대성전에 남게 된다는 것은 더 없는 영예이기에  흔쾌히 수락하고 심혈을 기울여 단기간에 완성합니다. 한 달가량 성당에 걸리면서 예기치 못한 반응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불같은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먼저 이 작품이 도상학적으로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과 교황좌가 있는 베드로 대성당에 걸기에 너무 조잡해서 분심스럽다는 여론에 밀려 철거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거기에서도 반대를 받아 다시 철거되게 됩니다. 이런  수모를 겪은 후 그의 작품의 옹호자이며 교황의 친척인 보르게세(Scipio Borghese) 추기경의 손으로 넘어가 그 가문의 소장품으로 남게 됩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1607, The Cleveland Museum of Art/Artprinta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당시 나폴리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 후안 알론소 피멘텔 에레라(Juan Aonso Piementel Herrera)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총독의 고향이었던 스페인 발라돌리드의 저택이 소장하고 있던 17세기의 작품 목록에 이 그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마치 카라바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염두에 둔 작품처럼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최후의 죽음을 기다리는 성 앤드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고 싶어 했던 성자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폴리에서 그려진 두 개의 대형 제단화 중 현존하고 있는 <성 앤드류의 삽자가>는 미국 클리블랜드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 <성 앤드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앤드류의 기적에 관한 중세의 전설을 먼저 살표 보아야 합니다. 성 앤드류는 로마의 귀부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혐으로 체포되었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됩니다. 화면은 십자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 성 앤드류의 십자가 처형이 취소되고, 사형집행관이 성 앤드류의 십자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석방의 순간, 성 앤드류는 자기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립니다. 늙은 성자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틀에 묶인 노끈을 풀려고 성 앤드류에게 다가갔던 사형집행관의 손이 마비되면서 성 앤드류는 기도한 대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성 앤드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성 앤드류의 최후에 대한 중세 전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에게 임박하고 있는 죽음을 예측이라도 하는 듯, 십자가에 초라하게 달려 마지막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성 앤드류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사실의 재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위대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결단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모두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모읍니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줄기 빛이 죽어가는 늙은 성자의 몸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도망자 처지인 카라바조 자신에게도 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The Beheading of St.John the Baptist>,1608/wikipedia

 

 

 

 

1608년 몰타에서 그린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입니다. 1606년 5월 28일 로마에서 살인죄를 저지른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거쳐 1607년 7월 초에 몰타(Malta)로 도피합니다. 그가 나폴리에서의 보장된 성공과 안전을 포기하고 몰타로 이주했던 이유는 기사 작위를 통한 사면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파사지오(Passaggio)라는 관례에 따라 성 요한 기사단에 그림을 헌정하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몰타의 대 영주와 귀족들은 카라바조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사면의 특혜를 주어 카라바조의 그림을 얻고 싶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삶을 용서받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그림 속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피에 자신의  서명을 합니다. 카라바조는 세례자 요한의 잘린 목 밑으로 흥건히 고인 붉은 피를 찍어 ;f. michel'이라고 서명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Frater of Michelangelo'의 약자로 보이는데, 이는 카라바조가 성 요한 기사가 되면서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를 이름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은 마태오복음 14장 3-12절과 마르코 복음 6장 17-29절이 그 배경입니다. 이 작품은 몰타에서 목숨을 잃은 120명의 성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영웅적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침공을 막다가 작렬하게 전사했고, 그들의 시신은 수습되어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이 그려진 산 조반니 대성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도록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과감히 탈피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장면을 어두운 몰타 감옥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다른 그림에서는 표현하지 않은 몰타의 성벽과 대문을 배경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또 성벽 오른쪽에는 감옥에 갇혀있는 두 명의 죄수들을 그려 넣어 창살 밖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중앙 땅바닥에 두 팔이 뒤로 결박된 채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목이 잘린 채 죽어가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겉옷은 순교를 상징하듯이 세례자 요한의 붉은 선혈과 함께 상체와 하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참수형을 선고받고도 계속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주문받았고, 명작도 탄생시킵니다. 참수형을 피하기 위해 나폴리로 도주하고, 그림 실력으로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위를 받은 후 6개월 후 기사단원과 싸워 중상을 입히고 또다시 도주자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몰타 기사단의 습격을 받아 얼굴이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고요.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10/caravaggio.org

 

 

 

 

카라바조의 평생 충동이  조절되지 못했습니다. 더욱 파괴적으로 나타났지요. 주택침입죄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공증인 파스콸로네를 폭행해 체포되기도 했고요. 임대료를 6개월이나 납부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이 사는 방의 창문에 돌을 던진 혐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605년 , 교황 즉위 1년 축하식에서 일어납니다. 캄포 마르치오에서 네 사람씩 편을 이뤄 싸움을 했는데, 이 싸움으로 인해 한쪽 리더였던 란초 다 테르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상대편 리더였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른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참수형 선고를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그림에는 참수에 관한 그림이 많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살았던 소년입니다. 필리스타인의 투사 골리앗은 괴물처럼 큰 덩치에 청동투구와 비늘갑옷으로 무장한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군에게 1:1로 싸워지면 상대의 종이 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때 소년 다윗이 갑옷과 투구를  모두 거절한 채 맨 몸으로 막대기와 돌멩이를 손에 들고나가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집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 속 다윗을 과거 소년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골리앗의 얼굴에는 습격을 받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도달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지금의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카라바조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조절되지 못했던 충동의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1도 망자 신분이 되어 나폴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입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위>은 승리자 다윗을 새롭게 해석하여 슬픈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려냅니다. 목이 잘린 골리앗의 흉측한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는 해석이 17세기부터 있었습니다.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 또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요. 자신의 광포한 본성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영원한 형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자신의 비참한 얼굴(골리앗)을 들고 있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얼굴(다윗)과 대비시키며 이중초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고요.  이 그림을 들고 교황을 찾아가려다 중간에 폭력배들에게 칼도 맞고 잠시 억류되어 있다가  그림을 실은 배가 먼저 떠나가고 맙니다. 먼저 간 이 그림을 찾아 교황님께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수포로 돌아갔고 이 그림을 찾으러 가는 길 위에서 객사하고 맙니다. 교황은 이미 사면을 내린 상태였지만 카라바조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후였죠. 

 

 

 

 

 

어떤 사학자는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의 의미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칼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는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자신의 성경 <시편>에 단 주석의 일부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 한다."

 

세속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빛의 마술사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카라바죠,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은 인간보다 신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풍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림은 장식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카라바조(어느 법정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xDXx3aNK4TA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 (1577-1640)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1605년 루벤스의 친형이 당대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보르메오 가문의 대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루벤스와 카라바조가 같은 이에게 후원을 받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기간 루벤스가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602-1604)을 접하고 구도 등이 비슷한 동명의 작품(1612년)을 그렸다고 분석합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꼽았다.  그는 "당대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화가 주종을 이었는데, 얼굴을 찡그리는 찰나의 순간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활들 짝 놀라는 손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시작점이자 중심이자 그 자체였던 카라바조의 영향력은 넓고 멀리 갑니다. 벨기에의 루벤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그리고 카라바조의 빛은 현대의 <아이리쉬 맨> 영화의 감독 마틴스콜세이지와 같은 거장에 이르기까지 닿아 있습니다.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던 천재 중의 천재화가 카라바조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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