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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피렌체. 피렌체라는 인류의 문화 콘테츠가 탄생하게 된 것은 정복자 줄리어스 시저 덕분입니다. 그는 기원전 59년 이곳 피렌체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면서 아르노 강가의 이 작은 마을을 "꽃 피는 마을"이란 뜻의 "플로렌티아"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후로 플로렌스는 변방의 마을로 지속되어 오다가 14-15세기에 이르러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으로 탄생합니다. 피렌체 공화국에는 강력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메디치가의 정예군 검은 군단은 일대를 휩쓸며 이 일대를 코스카나 공국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피렌체는 그 수도가 되었습니다.
3명의 교황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ser Pier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를 필두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수많은 작품을 피렌체에 남겼습니다. 이 시기가 사실상 피렌체의 황금시대입니다.
오늘 살펴 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hllini, 1500-1571))는 1500년 11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반니 첼리니( Giovanni Celini )는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음악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지요. 실제로 유명한 플룻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에서 활동할 때에는 플룻으로 유명해져 교황 직할 연주단에서 플룻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그는 금세공사인 안토니오 마르코네 디 산드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피렌체인들은 첼리니를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세공의 원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오래된 다리 양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은방들이 들어선 폰테 베키오에(Poner Vecchio)는 첼리니(Celini)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Fx2lmnrr8g
https://www.youtube.com/watch?v=GY8ymP-1Eck
1543년 프랑수아 1세를 위해 황금 소금통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고요. 조각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살리에라( Saliera )황금 소금통은 높이 가 고작 26cm 밖에 안 되는 작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섬세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작품입니다. 살리에라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금세공 기술의 끝을 보여주는 걸작 중에 걸작으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2003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hes Museum)에서 도난을 당했고 2006년 다시 찾게 됩니다.
이 금세공의 초상의 작품인 소금 그릇의 제작동기와 디자인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완성하는 과정 등의 설명이 자세하게 그의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프랑스 체류는 왕의 애첩의 질투와 갈등으로 1545년 퐁테블루의 작업을 미 완성한 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옵니다.
15살때 금세공술을 배웠습니다. 단 1년 만에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피렌체에서 유명해집니다. 작품 실력이 아니라 친구들과 난동을 부리다가 잡혀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게 약 6개월간 시에나( Siena)로 도망을 갔습니다. 프란체스코 카스트로 밑에서 도제생활을 했고요. 프라카스트로(Fracastoro)라는 가명으로 금세공 일을 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볼로냐( Bologna)로 옮겨 활동했고 그곳에서 플룻과 금세공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피사( Pisa)로 옮겼다가 다시 로마로 옮겼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20살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를 다 쓸고 다녔다는 얘기죠.
로마에서 첼리니는 귀족 가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그는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어,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첼리니는 특히 교황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1527년 로마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침략자인 부르봉의 공작 카를 3세를 사살한 그의 용맹성이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입니다. 첼리니는 곧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황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포상으로 두루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페라라로 만투아로 베네치아로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옮겨 다녔다는 얘기입니다. 교황 클레멘테 7세와 바오로 3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수없는 추기경들과 군주들을 찾아 57세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타향살이가 그의 출세하려는 야심과 동시에 전염병과 전쟁을 피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로마에서 내려온 20살 의 벤베누토 첼리니(Benveuto Cellini)는 은세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주로 촛대 등 작은 소품으로 시작해 귀족 집안의 황금 레다와 백조 메달 작업을 하는 등 그의 실력과 명성은 금방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 클레멘스 7세 (Clement VII)와 바오로 3세( Paul III ) 아래에서 교황의 초상이 들어간 메달과 동전 및 각종 보석 작업을 맡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세공 실력은 당시 유럽 최고였습니다.
첼리니는 일생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샤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강점했을 때 (1527)그는 교황 클레멘테 7세가 피난해 있던 산 안젤로 성곽에서 임시 차용당한 대포의 사격수로 생명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교황 클레멘테는 첼리니를 불러 그 성곽에서 교회의 삼중관의 보석들을 떼어내어 감추고 금들을 녹이게 할 만큼 그를 신뢰했습니다. 1534년 발생한 그의 경쟁자인 폼페이오 데 카프티네이의 살인사건과 로마 강점시대에 교황 클레멘테의 보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538년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당시의 취조 문서가 발견되어 증명되었습니다.
첼리니는 아이러니칼하게 이 사건과 모략 때문에 자기가 교황청을 방어한 바로 그 산 안젤로 성곽의 동굴에 교황 바오로 3세에 의 해 감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높은 성곽에서 다리를 부수면서까지 대담하게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다시 체포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더럽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동굴 감옥에서 겪었던 고통 속에서 신앙적으로 그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다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세공사 일에 전념합니다. 이 시기의 걸작은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입니다. 네메아의 사자는 그리스 신화 속 네메아 골짜기에 살고 있는 불사신으로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폴론 신에게 받은 12가지 과업 중 첫 번째 임무를 담은 작품입니다.
또 다른 한 점은 천구를 지고 있는 아틀라스입니다. 아틀라스는 티탄(Titan)신족의 하나로, 크로노스의 형제 중 한 명인 이아페토스(lapetos , 힘의 신)의 아들입니다. 제우스와는 사촌 지간이죠.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을 위시한 새로운 올림포스의 신족들과, 원래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티탄 신족들 간의 싸움인 티타노마키아에서 티탄 신족은 패배합니다. 그 이후 제우스에 대항했던 티탄 신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봉인 (주로는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었죠)되거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티탄 신족들은 일찌감치 제우스 편을 들어 무사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틀라스는 대부분의 티탄 신족들과 마찬가지로 제우스와 맞서 싸웠기에 패배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고, 그가 받은 형벌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조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아틀라스의 왼쪽 무릎에 피라미드 지지대를 놓은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1529년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동생 체치노(Cecchino)가 교황 경비대원을 죽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역시 병사의 총에 맞아 상처가 심하게 났고 결국 체치노 역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벤베누토 첼리니는 이 소식을 듣고 쫓아 내려가서 동생에게 총을 쏜 병사를 찾아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체치노에게 총을 쏜 병사는 자기 방어로 발사를 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쫓기게 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교황청 관할구역 밖인 나폴리 공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는 중에도 작은 사고를 많이 쳤는데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사면이 됐습니다. 이 정도라면 조용히 살아야 할 텐데 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번에 라이벌 세공사 폼페오 (Pompeo)를 살해한 것입니다.
1540년 새 교황 바오로 3세의 호의로 사면을 받게 됩니다. 석방된 첼리니는 프랑스와 1세(Francis I)의 초청으로 파리와 퐁텐블로 에서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얻습니다. 당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받았던 것과 같은 높은 보수와 성을 거처로 받았고요. 그는 왕이 자주 찾아와 작품들을 보려고 할 정도로 높은 신망을 얻는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은 크기의 세공 작품이지만 조각도 틈틈이 했습니다. 건축 작업으로는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 성 (Chateau de fontainebleau)이 걸작으로 남아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rwVLiVjhNg
https://www.youtube.com/watch?v=BhxD0JTXoKY
벤베누토 첼리니의 또 한 점 걸작은 퐁테블로 요정 청동 부조입니다. 요염한 자세로 누워있는 요정은 마치 침대에 누워있는 티치아노와 다른 거장들의 비너스와 비슷한 포즈로 배경 아치 중앙 상단의 뿔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왕실로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퐁텐블로 궁전' 정문에 올릴 거대한 청동 '팀파늄 Tympan' 주조상이었죠.
하지만, '프랑수와 1세'의 아들 '앙리 2세 Henri II가 왕위에 오르자, 엉뚱하게도 왕의 정부이던 '디안느 드 뿌와띠에 Diane de Poitier'의 소유지 '아네 성 (Chateau d'Anet)'에 세워집니다. 왕궁에 있던 물건이 왕의 정부가 거주하던 성의 장식으로 쓰이게 된거죠. 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되던, 1797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오게 되고 현재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를 보고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이폴리토 데스테( Ippolito d'Este )추기경의 의뢰로 만든 은 조각상 12개의 신과 여신은 또 하나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에 서 있는 벤베누토 첼리니의 모습입니다.
이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가 의 코시모 1세를 위해 일합니다. 청동상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1545-1554)를 제작하고요.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페르세우스는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뱀 머리를 가진 괴물 메두사를 퇴치한 영웅입니다. 회랑 안에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상'이 보입니다. 단연 압도적인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애제자 답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1j-gPKAcDA
1545년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와 코시모 메디치( Cosimo de'Medici) 아래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이 모여 있는 로자 데이 란치( the Loggia dei Lanzi)에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상과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는 그의 조각 실력 역시 거장 급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직접 용광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첼리니가 고향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로마에서 일하던 미켈란젤로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그의 노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에 칠레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회화계를 대표하는 바사리와 조각계를 대표하는 첼리니가 장례식의 절차와 장소로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첼리니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를 추념하기를 원했으나 바사리가 자신의 주장대로 관철했기 때문이죠.
독수리를 탄 트로이의 미 소년 , 가니메데스(Ganymede)입니다. 브론즈로 만들어진 높이 62m 작품으로 피렌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니메데스(Ganymedes)는 트로이의 왕 트로스(Tros)와 칼리로에(Calirrhoe)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일로스(llus)와 아사라코스(Assaracus)가 그의 나머지 형제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 (Homeros)에 따르면 가니메데스는 필멸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일리아스(llias)와 대결하게 된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읊어 내려간 조상들 가운데 가니메데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신들이 가니메데스를 제일 잘 생겼다는 이유로 데려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 신들에게는 그들의 먹는 음식 암브로시아 (Ambrosia)와 음료 넥타르(Nectar)를 시중 들어줄 이가 필요했습니다. 신들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이 중요한 임무는 이전까지 젊음의 신 헤베(Hebe)가 맡고 있었죠. 그런데 헤베는 마침 불사의 몸이 되어 천상으로 올라온 헤라클레스(Heracles)와 전격 결혼을 하면서 (혹은 발목을 다치게 되면서 )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공석이 생긴 것이죠.
이에 신들은 이 임무를 맡길만한 이를 물색하던 차에 제우스의 강력 추천으로 가니메데스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는 트로이 출신의 아름다운 왕자 가니메데스에게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었거든요. 신화 기록가들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데려온 과정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신의 본모습으로 직접 내려가서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또는 신조인 독수리를 보내서, 혹은 독수리로 변해서 이다 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가니메데스를 낚아채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니메데스는 천상에 올라와 헤베로부터 술잔을 넘겨받음으로써 신들의 , 그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의 음식 식사 시중을 드는 이가 되었습니다.
초기의 신화가 대체로 헤베를 대신해 신들의 식사와 음료를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된 가니메데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가니메데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들이 동성애적 코드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작가 루키아노스 (Lukiano)는 <대화편(Dialogi)>에서 제우스의 가니메데스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헤라의 입장을 실감 나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 헤라가 그리스 군의 편을 들어 가니메데스의 조국인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라의 거센 반대와 지탄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자신이 데려온 소년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불멸의 암말 두 필, 또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니메데스는 제우스 옆에서 남은 일생 동안 그의 시중 역할을 다 하다가 밤하늘을 수놓는 '물병자리'성좌가 되어 '독수리자리'옆에 놓였습니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여신 또는 여인들이 대부분 고된 탄압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와는 분명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조각상이 아니라 살과 영혼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젊어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을 보고 반한 그가 실제로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를 만났는데, 오다가다 스쳐지나 만난 것 같습니다. 이후로 미켈란젤로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 역시 미켈란젤로만큼 성공한 예술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였기 때문에 그 역시 조각에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걸작으로 실물 크기의 십자가형은 실제 사람의 크기로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걸작입니다. 단지 예수의 성기까지 노출을 시켰다는 것과 근육질 몸매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팔 근육의 모양과 힘 빠진 얼굴 표정은 몇 년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스케치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온건해진 첼리니는 1558년 수도 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는 감옥에서 체험했던 환영에 기초해 대형 <십자가 고난상>(1562)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죄 흰 눈과 같이 깨끗하게 하소서. '그는 하얀 상아와 대리석 마불로 십자가의 처형을 조각하면서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서전을 집필합니다.
첼리니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557년, 5년 전에 저지른 사건에 대한 고소로 그는 금 50 스쿠디의 벌금과 4년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군주 코시모 1세의 개입으로 실형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고요. 어떤 작품이나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에서 그는 승려가 되려고 수도사 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 서약을 파기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썼으나 시간 낭비가 심해 이웃에 있는 학생을 시켜서 자기의 회고록을 받아쓰게 했습니다. 이 자서전은 4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성됩니다. 1567년, 원고를 축소하여 자비로 피렌체에서 출판합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자서전을 참고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걸러내고 작품의 연도와 큰 사건의 시기 등 기록이 없는 자료를 찾는 데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자서전을 통해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그의 마음과 그의 종교관도 볼 수 있고요. 그리고 16세기 당시 로마,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및 프랑스에서 미술계는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의 이름과 활동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어떻게 살리에라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는지 확실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기는 이 자서전은 비록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록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진 조르주 바사리 (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 평전과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와 피렌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에 틈틈이 금세공 작업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세공업과 조각에 대한 논문도 썼습니다. 1571년 2월 13일 , 70세의 나이로 벤베누토 첼리니는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71년 사망한 첼리니는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곳에 매장됩니다. 그의 작품과 인생을 기념하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군중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치곤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한 사람은 대문호 괴테입니다.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피렌체에 와서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발견하죠. 대문호 괴테의 손에 의해 가장 먼저 독일어로 출판됩니다. 또한 초현실 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첼리니 자서전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아트북 벤베누토 첼리니의 일러스트북을 출판하기도 했고요. 이밖에도 이 자서전을 통해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19세기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 극작가 폴 뫼리스 (Paul Meurice, 1818-1905), 루이 갈레(Louis Gallet),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현대의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빅토르 위고, 나다니엘 호손 등 이 그들입니다.
<특별영상>
Hector Berlioz(1803-1869): Benvenuto Cellini, OP. 23/ Valeru Gergiev- Salzburg 2007
https://www.youtube.com/watch?v=a82dmk0p5Rc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Salzburg Festival ) 때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rk) 지휘한 오페라 무대입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시간 여유있게 잡으시고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 오페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가 아름다운 여인 테레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엮은 오페라입니다.
줄거리: 피렌체 출신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교황 재무관인 발두치의 딸 테레사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가 이미 있었죠. 테레사는 약혼자인 피에라모스카의 여자가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습니다. 금세공사 첼리니와 교황 재무관의 딸 테레사는 그녀의 아버지 발두치의 눈을 피해 피렌체로 도망갈 계획을 세웁니다. 카니발 기간을 틈타 도망가려던 그들의 계획은 테레사의 약혼자 피에라모스카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첼리니가 살인혐으로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피에라모스카의 모략으로 살인범이 된 벤베누토 첼리니는 신에 대적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갑니다. 첼리니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한 페르세우스 동상을 완성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고, 갖은 고초 끝에 동상을 완성하여 명성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등장인물:
벤베누토 첼리니(조각가 겸 금 세공사)
지아코모 발두치 (교황청 회계책임자)
피에라모스카(교황청의 조각가)
교황 클레멘트 7세
폼페오(피에라모스카의 친구)
테레자(발두티의 딸)
아스카니오(첼리니의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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