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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cm 정도의 키에 바짝 마른 몸, 게다가 88세 (1999) 할머니 예술가입니다. 그녀는  <마망 Maman>이란 이름의 커다란 거미 조각의 창작자입니다. 놀라움과 찬사 그리고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쭈글쭈글한 그녀의 얼굴만큼 예술가로서 버텨온 그녀의 자부심에 엄지척 해드립니다. 98세(2010. 5. 31/뉴욕)로 돌아가시기 까지 인생의 후반전이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 '라는 말이 있지요. 끝이 뾰족한 다리를 길게 뻗고 위태롭게 서 있는 거미.  뜻밖에도 프랑스어로'엄마(Maman)'라는 의미를 지닌 그녀의 후기 대표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라는 프랑스계 미국인 여류 작가입니다. 60세까지 철저히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이 '마망'시리즈로 70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서 98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작가입니다. 

 

 

 

 

<엄마 Maman>,1999,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Stainless steel,bronze,marble/wikipedia

 

 

 

 

 

거미는 나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거미처럼 실을 짰고 거미처럼 매우 영리했습니다.
거미는 모기를 잡아먹는 친근한 존재다.
우리는 거미가 질병을 퍼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거미들은 우리 엄마들처럼 도움이 되고 보호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96년 부르주아는 1947년 잉크 &목탄 드로잉으로 그렸던 거미에서 착안해 첫 강철 거미 조각 'Spider'를 제작합니다. 거미는 부르주아의 엄마에게 헌사하는 작품으로 '베틀을 돌리고, 짜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1999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을 위해 '마망(MaMan)을 제작합니다. '마망'은 테이트 모던을 비롯, 삼성 리움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뮤지엄, 캐나다 국립갤러리(오타와), 도쿄 모리미술관  , 크리스탈브리지 미술관(아칸사주 벤튼빌), 도하 카타르 국립컨벤션센터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France /123RF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입니다. 태피스트리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아버지 루이 부르주아 (Louis Bourgeois)와 어머니 조세핀 부르주아(Josephine Bourgeois)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테피스트리 사업은 직물 공장 같은 것으로, 당시에 상당히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가정교사까지 둬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걱정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이후의 평생을 결정짓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유년 시절 수년을 믿고 따르며 친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불륜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녀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이때부터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그녀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했고, 가정교사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증오하게 되었던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정을 깨지 않으며 이를 방관했던 무력한 어머니였습니다. 부정을 저질렀던 아버지와 가정교사 보다도 이러한 부당한 상황을 이어가고자 했던 바보 같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Louise Bourgeois/ Twosome

 

 

 

그 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허무함과 고민 때문이었다고요. 그런 루이즈 부르주아는 성장하면서 애착을 요구하는 관계에서 힘겨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모순적(양가적 ) 감정으로 어려웠다고 호소합니다. 

 

 

 

<엄마 Maman> 작품 속  거미는  칼처럼 뾰족뾰족한  날카로운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거미의 몸통 부분이 실제보다 많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미는 긴 다리로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몸통을 가능한 낮게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거미는 몸통이 굉장히 위쪽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얇은 다리들이 억지로 들어 올린 몸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옆으로 쓰러질 듯한 아주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Sac Containing marble eggs, at Zurichsee-Schifffahrtsgesellschaft,Zurich,2011

 

 

 

 

나는 수선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거미는 수선공이다.
만약 당신이 거미줄을 뭉갠다고 해도, 그녀는 화내지 않는다.
그녀는 거미줄을 다시 짜고 수선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이렇게 보통의  거미답지 않은 자세로 몸통을 잔뜩 치켜올린 모습을 아래쪽에서 보면, 다른 부분이 한 가지 눈에 띕니다. 망으로 둘러쳐진 그물 안에 대리색으로 만들어진 하얀 대리석 구슬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거미의 '알'들입니다.

 

 

거미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항하듯 하늘로 몸을 잔뜩 추켜올리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그 이유는, 바로 이 배 아래쪽의 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거미의 이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해 냈던 것입니다.

 

 

거미가 매일 실을 뽑아내듯 직물을 뽑아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엄마, 남편의 부정을 미련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거미처럼 흉측한 엄마, 하지만 거미가 알을 지키려 하는 것처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엄마. 부들부들 떨리는 얇은 다리로 자식들을 배 아래 숨기고 자신이 모든 고통을 감내했던, 우둔한, 너무나 미운, 하지만 생각할 수록 눈물이 나는, 바보 같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알게 된 겁니다. 

 

 

 

 이렇게 자신 안의 모순된 감정을 해결해 가는 처절한 삶의 과정이 바로 '마망'으로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에게 닥쳤던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을 극보해 내기 위해 괴로움을 고백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을 '고백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다시 거미를 보니 이 거미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와 모성애가 조금 다르게 와닿지 않나요. 

 

 

작품은 거대한 사이즈의 거미를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조각입니다. 가까이 보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알을 품고 있고요. 특히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 2000년 첫 문을 열 때 이곳의 거대한 전시장인 '터빈홀'을 처음으로 채웠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 호암미술관에서도 전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 작품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딛고 있는 다리는 가냘프게 보일지언정 단단한 강철로 되어 있으며,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 위협적인 겉모습 속에 자식들을 부드럽게  품고 있는 모양. 때로는 연약해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하지만 아이를 세상에 낳아 기른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 엄마를 표현했다는 걸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sFuZ80OyY

 

 

 

 

그런데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에는 흔히 당대 주목을 받는 흐름이나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많은 작가들은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며 생존에 필사적이지요.  부르주아(Bourgeois)가 활동할 무렵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이 대세였습니다. 

 

 

 

<Blue Poles>, 1952,Jackson Pollock,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wikipedia

 

 

Mark Rothko/ The New York Times

 

 

 

 

 

추상표현주의는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추상화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들 작품에서는 작가 개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니멀리즘 예술은 아예 제목을 '무제'로 하는 등, 작가를 더욱 숨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The Welcoming Hands>,1996/EUtouring.com

 

 

 

 

<The Welcoming Hands, 1996>. 브론즈로 제작되었으며 은질산염 파티나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손과 팔을 표현한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손들은 서로를 잡거나 맞잡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따뜻한 애정, 안전, 그리고 신체적 접촉의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작품의 손들은 실제 사람들의 손을 모델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자신과 친구 제리 고로보이의 손과 팔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원래 뉴욕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이후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도 설치되었습니다. 부르주아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보편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합니다.  작품은 부르주아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접촉과 연결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던 부루주아는 수학의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곧 수학적 관념이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이론적 구조일 뿐임을 깨닫고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기로 결심합니다. 파리 소르본 대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명문대학입니다. 최상위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고요. 졸업하면 일자리가 보장된 꽃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사망과 예술가를 기생충 취급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 하고 자력으로 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루주아(Bourgeois)는 에꼴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 Arts)와 에꼴 드 루부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몽마르트 및 몽파르나스에 있는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시절에 그녀를 가르쳤던 여러 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1881-1955)는 부루주아(Bourgeois)에게 삼차원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어 훗날 조각가가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화가에서 기하학적인 작품을 뽑아내는 조각가로 돌아선 그녀의 선택은, 그리고 페르낭 레제의 안목은 탁월했습니다.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기계 시대의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입체파와 구상을 독특하게 융합한 작품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피카소, 브라크와 함께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인 입체파를 이끈 화가 중 한명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Louise Bourgeois& Robert Goldwater/NYCulture Beat

 

 

 

 

 

1938년 미국의 미술 사학자이자 아프리카 예술 학자인 로버트 골드 워터(Robert  Goldwater, 1907-1973)를 만나 결혼하여 ,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 석사를 거쳐서 뉴욕대에서 '현대미술 속의 원시주의 (Primitivism in Modern Art)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결혼 후 퀸즈 칼리지와 뉴욕대 교수로 강의하다가 1957년 미드타운 54 스트릿의 원시미술관(Museum of Primitive Art) 초대 관장을 지냈습니다. 골드워터는 뉴욕 뮤지엄 최초로 아프리카 미술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넬슨 록펠러가 창립한 원시미술관은 1976년 폐관하고, 컬렉션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들어가고요.  골드워터는 1973년 사망합니다. 

 

 

 

 

<New Orleans>,1946/MutualArt

 

 

 

 

 

 

<New Orleans, 1946> 작품은 유화를 사용하여 판지 위에 그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가 뉴욕에 도착한 1938년부터 1940년대 후반, 조각으로 전향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제작된 회화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예술적 목소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중요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지요. 부르주아의 다른 초기 회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모더니즘 건축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초기 회화 작품으로, 그녀의 예술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930-40년대  그녀는 주로 드로잉이나 판화 작업들을 했습니다. 70대 이후로 다시 판화 작업을 시작하지요. 판화는 그녀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과거에 대한 치유이며, 회상이며, 불만이며, 억제이며, 시간의 통로이며, 손의 움직임 등 복합적이죠. 그녀는  판을 부식시키는 에칭 작업보다 판에 직접 드로잉의 흔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나 드라이포인트를 선호합니다.

 

 

 

 

Fallen Woman(Femme Maison), 1946-47/ The Art Wolf

 

 

그녀의 초창기 작품들은 특히나 공격적이고 파격적이며,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감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표현이 아버지로 인해 받은 상처와, 불신의 감정, 그리고 남성성을 이긴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냅니다.

 

 

 

 

Self-Portrait as Bird, 1945/MoMA

 

 

 

1940년 대 말부터 기하학의 영향이 엿보이는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그녀는 1949년 뉴욕의 페리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됩니다.  물론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조각은 재료가 다양해지고 주제가 과감해진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는 급속도로 부상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인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열린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작업했던 1500여 점 작품들을 199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기도 합니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이후로 미국과 유럽, 남미와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회고전을 가졌으며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YvqxHejY

 

 

 

 

Louise Bourgeois , I Love You Do You. Love Me?,1987/ MoMA

 

 

 

 

 

The family,2007, Digital print on fabric/MoMA

 

 

 

<The Family, 2007>는 작가의 오랜 경력 동안 탐구해 온 주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1점의 선명한 붉은색 종이 작품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성적 친밀감의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Bourgeois는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 갈등, 정체성 문제, 의존성 등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작품의 붉은색은 신체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며, 습식 기법으로 그려져 우연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성의 형태는 여러 개의 늘어진 가슴이 목에 달린 추상화된 다산의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부르주아는 가족의 불안정한 본질을 viscerally 조명하며, 신체를 추상적으로 변형시켜 부부간, 그리고 모자간의 미묘한 상황들을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개인적 경험,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와 모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분리와 결합 등 삶의 순환을 다루며,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식도 담겨 있습니다. 

 

 

 

당시 치명적인 유행이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엄마를 8살 때부터 간호하면서, 태피스트리 도안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21살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때부터 평생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에 걸쳐 '외로움이나 질투, 분노와 두려움' 등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다양한 재료와 모티브를 탐구하며 창작에서 손을 놓지 않았고요.

 

 

자신을  직시하는 것과 함께 부루주아(Bourgeois)는 또 사람들이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죠.

 

 

1951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부터 부르주아는 불안과 분노, 죄의식, 버림받은 느낌에 시달리며 광장 공포증, 강박, 불안, 자살 충동을 겪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공격한다. 

나는 우울을 옮겨낼 에너지를 찾을 수 없다. ...나는 하루를 마주 대할 수 가 없다.

온 세계는 회색이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세상은 텅 비었다. ...

 

나는 나 자신, 증오스러운 나 자신을 주시하기를 견딜 수 없다. ...

나는 나 자신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내게로 불러올 수는 있다. 나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정신 분석 치료 당시 루이스 부르주아가 작성한 글-

 

 

 

 

 

이렇게 해서 그녀는 정신분석가 헨리 로웬펠드에게 30년에 걸친 치료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 정신 분석 치료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EYE BENCHES II/ Hauser&Wirth

 

 

 

 

 

 

<Eye Benches II>는 1996-1997년에 제작된 조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관찰하는 눈 모양을 한 두 개의 기능적인 벤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검은 짐바브웨 화강암으로 조각된 이 작품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오가며, 부르주아의 수십 년에 걸친 예술 실천을 상징합니다. 매끄러운 표면의 눈꺼풀과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눈동자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시선을 만들어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상징, 여성의 성적 해부학에 대한 암시, 유혹과 관음증의 표현, 그리고 명상과 휴식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부르주아의 기억, 관계, 심리상태에 대한 탐구를 반영하며,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 모성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야외에 설치되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빛의 변화를 반영하고 흡수합니다. 

 

 

 

 

 

 

 

Louise Bourgeois, Crochet I-V(MoMA 590-594), ,1998/MutualArt

 

 

 

 

이런 가운데 부르주아(Bourgeois)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30년 간 단 8번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아마도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에 익숙해져 있는 미술계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품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녀를 미술사가 피터 바이어마이어(Peter Weiermair)는 "20세기 조각계의 '외로운 늑대(Lone Wolf)' "였다고도 표현했습니다. 

 

 

<IN AND OUT>,1995/Haus der Kunst

 

 

 

<IN AND OUT>. 작가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녀가 자주 탐구했던 주제인 물질성, 성규범, 그리고 자신의 심리적 깊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자서전적 성격을 띠며,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트라우마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작가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긴장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추상 적으면서도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는 부르주아(Bourgeois)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됩니다. <IN AND OUT>이라는 제목은 내부와 외부, 은밀함과 노출, 혹은 심리적 내면과 외적 표현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주아(Bourgeois)가 자주 다루었던 정체성, 성별, 섹슈얼리티의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그녀의 작품은 고백 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 IN AND OUT>도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Cells 연작은 총 28개의 동일한 주제로 진행된 설치 연작입니다. 제목인 Cells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교도소를 의미하는 prison cell, 수도사의 방을 의미하는 monk's cell, 생물학적인 세포를 의미하는 cell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밀폐된 유리 혹은 철망, 오래된 문으로 구성된 셀의 공간은 폐쇄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는 그녀가 앓았던 광장 공포증과 연관되어, 세상에서 홀로 남겨져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당시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 안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이 배치되어 긴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배치된 몰체 중 하나는 침대에 누워 허리를 아치형으로 들어 올린 여성의 나체 조각입니다. 이 동작은 히스테리 질환을 겪는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자세라고 합니다. 원인이 없는 근육 경직과 불안감을 나타내고요. 작품을 해석하는 이들은 정신 분석학적 이론을 주목하여, 권력에 의해 억압받은 상징적 히스테리 환자들의 표출이며, 여성의 욕망과 분노를 동시에 대변한다고 설명합니다. 

 

 

 

 

 

 

내가 찾는 것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내가 재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그것은 원하면서 주고 싶기도 하고,
파괴하고 싶기도 한 감정이에요.
그러한 힘에 대한 확인 (Identification)입니다.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1974,붉은 조명솨 함께 공포스러운 /Pinterest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아버지의 파괴),1974/출처 BBC

 

"I got peace of mind, only through the study of rules nobody could change."

- Louise Bourgeois-

 

 

 

아버지에게 느꼈던 폭력과 분노는 방 크기의 재현작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n of Father , 1974>로 드러납니다. 부르주아(Bourgeois)에게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1974년 <아버지의 파괴 Deconstructio  of Father >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방을 설치한 후 라텍스와 석고 등을 이용하여 설치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가슴을 직접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도살장에 방문하여 직접 캐스팅하고, 토막 난 동물들의 몸체의 부분들을 식탁이자 침대이기도 한 테이블 위의 여기저기에 흩어놓습니다. 아버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부르주아( Bourgeois)와 아이들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찢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는 연출입니다. 일종의 상상의 폭력이죠. 

 

 

 

항상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억압적인 식사 분위기를 만드는 아버지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어린 소녀는 매번 좌절합니다.  부르주아의 아버지는 스타일리시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겐 늘 연인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부르주아의 엄마가 병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남프랑스로 이주한 후 일어납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집에 함께 살게 된 영어 가정교사가 아버지의 새 연인이 되었죠.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폴 가드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집으로  온 가정교사 세이디(Sadie)가 알고 보니 아버지의 애인이었어요. 세이디는 우리 집에 살았고, 아버지가 차를 운전하면 그녀가 조수석에 앉았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고,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싫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라도 아빠를 지켜봐야 그가 밖으로 돌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Bourgeois)가 단순히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만 했을까요? 감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엄마의 수용,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엄마 아빠의 사랑하는 마음, 그 가운데서 수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회고합니다. 

 

 

여기에  나를 위해 집으로 온 영어  선생님이 왜 내가 아닌 아버지에게 집중하는지 , 그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도 느꼈고요. 그러면서 때때로 세이디나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도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들더라도, 부모에 대해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태도로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잊어버리려 하죠. 그런데 부르주아9Bourgeois)는 이러한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파괴하고 그를 다시 자신 속의 새로운 아버지로 재탄생시키는 엑소시즘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된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이고, 탈출의 모험은 트라우마에 대한 하나의 치료학인 셈이죠.  

 

 

 

 

 

매일매일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당신이 힘든 과거와 타협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Louise Bourgeois/ Museo Picasso Malaga

 

 

내 모든 작품은 내 삶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I Do, I Undo, I Redo>,1999/Pinterest

 

 

 

 

 

 

<I Do, I Undo, I Redo>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유니레버 시리즈 설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Bourgeois의 예술 철학과 창작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I Do , I Undo, I Redo>는 세 가지 단계를 나타냅니다. 

 

I Do: 창작의 단계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I Undo: 반성과 파괴의 단계로, 이전 사업을 해체하고 재고하는 과정입니다. 

I Redo: 재구성과 해결의 단계로,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작품을 재창조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면서도 추상적이며, 배신, 걱정, 외로움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녀는 꽤 늦은 나이에 예술계에 입문했습니다. 40대, 그리고 여성이란 것은 예술계에선 흔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의 수였죠.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이 독식하고 있던 예술계에 40대의 나이로 당당하게 입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부터 무거운 돌덩어리나 무쇠 같은 재료에서 석고나 라텍스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한 조각으로 바뀝니다. 1966년이 전환점이 되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qy7xJhImnLw

 

 

 

Assistant for 30 Years: Life with Louise Bourgeois/ vulture.com

 

 

 

1980년 부르주아는 조지아 오키프와 후안 해밀턴의 관계처럼 여생의 우정을 지속할 젊은 조수 제리 고로보이( Jerry Gorovoy)를 만납니다. 당시 큐레이터였던 고로보이와의 만남에 대해 부르주아(Bourgeois)는 말합니다. 

 

"당신이 우물의 바닥에 있을 때 주변을 살펴본다. 누가 나를 밖으로 이끌어낼까? 이 경우 제리가 다가와 밧줄을 던져주고, 나를 끼워서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라고 밝혔다. 고로보이는 현재 루이스 부르주아 재단의 대표입니다. 

 

 

 

 

 

<Do Not Abandon Me>,1999/ artnet Magazine

 

 

 

 

< Do Not Abandon Me>는 정체성, 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불안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Bourgeois는 이 작품을 통해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표현하며, 가족생활 속에서도 느꼈던 고립감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빨강, 파랑, 검정 구아슈 물감으로 그려진 남성과 여성의 토르소 실루엣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녀의 심리적 상태와 신체적 욕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GjzV7Nk48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작품이 Tracey Emin과의 협업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Emin은 Bourgeois의 초기 그림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작은 인물들을 그려 넣었고, 때로는 손글씨로 내러티브를 추가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예술세계의 핵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려는 그녀의 예술적 투쟁을 잘 보여줍니다. 

 

 

 

 

주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부르주아(Bourgeois)의 예술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예술은 그녀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트라우마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 예술작품으로 표출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트라우마와 화해하기 위해 분투했던 결과물이었습니다.

 

 

 

출산 이후 부적절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이즈 부르주아(Bourgeois)는 가족에 대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탯줄이 잘리지 않은 채 몸 밖으로 나와 있는 아기와 여성을 표현한 작품, 집을 가면처럼 눌러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CELL XIV>, 2000/ Dazed

 

 

 

 

 

 

 

 

 

예술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카타르시스(정화)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Eight in Bed, 2000/Mutual Art

 

 

 

 

 

 

 

 

 

 

 거미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거울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바늘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엮어내는 관용의 역할을 한다.
뭔가 잊어버리기 위해 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Seven in bed 2001, Fabric, Stainless Steel, Glass and Wood/ WordPress.com

 

 

 

 

 

파격적이던 그녀의 작품은 점점 모성애와 사람과의 관계의 이해로 변해갑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는 여성이란 존재의 나약함. 아니 이 나약함은 힘이 없는 나약함이라기보다 섬세한 여성의 마음과 몸, 그 가녀리고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여성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여자이고...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고...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 찼던 소녀는 엄마가 되고 작가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터프한 용사에서 , 세상 모든 어머니를 이해하고 딸들을 어루만지는 가족을 생각하는 더 큰 존재가 되었습니다. 

 

 

 

 

<The Couple>plate 5of7, from the portfolio, La Reparation, 2001/MoMA

 

 

 

여성을 그릴 땐 대부분 빨간 하이힐에 진주목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 두 가지는 섹시함을 대표한다. 

 

 

 

 

 

Louise Bourgeois , Untitled 2002/Art Blart

 

 

 

 

 

 

 

 

 

 

 

 

 

<Heart>,2004/Artnet

 

 

 

 

루이스 부르주아가 천을 덧대고 실로 꿰매어 만들어냈던 너덜너덜한 형상의 작품들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의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마음을 꿰매고 또 꿰매어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꿰매어 주고 온기로 끌어안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실로 그림을 그리는 태피스트리 일을 하게 된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 종종 수선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실과 관련된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서로 연결하고, 짓고, 고치는 실의 이미지는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꿰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ouise Bourgeois, Drawing intimacy, 1939-2010 show/Galleries now

 

 

 

 

 

<The Ladders>,2006/HARLAN&WEAVER

 

 

 

 

 

 

 

 

 

 

 

<Turning inward set>(I see you!),2007, 국제갤러리/ 리아뜰 매거진

 

 

 

 

부르주아(Bourgeois)는 아버지와의 관계 말고도 자신이 삶에서 겪은 많은 감정들을 작품에 풀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드로잉들도 일상에서 기록한 것들로 그녀는 이것을 '생각 깃털(thought feather)'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이미지 가운데 발전되는 것은 더 큰 규모의 설치나 작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솔직함이 어떻게 그녀를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준 것일까요?

 

 

 

바로 감정을 파고들면서 내면 깊숙이 들어간 그녀가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고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지만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을 끄집어내 주었고, 그 결과 관객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거미 엄마를 보고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쉽게 작가와 감정적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부르주아(Bourgeois)는 "내 작품 세계에는 외로움과 잔인함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그런 삶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치유의 방법이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녀는 결국 예술을 통해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고,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묵묵히 작품으로 노래했으며 마침내 그 솔직한 이야기는 공감을 무기로 관객에게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마케팅에서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예술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부르주아가 말년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에 대해 대답한 이야기입니다.

 

 

"성공? 그게 뭔지 난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 모두는 나이 들수록 더 멋진 사람이 되죠. 마치 프랑스 와인처럼요. 요즘 나는 아주 부유한 여인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성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2,2006/MoMA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유칼립투스의 향기 The Smell of Eucalyptus>(2021, 국제 갤러리) 전에는 작가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작업한 판화 작품과 조형물이 전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머무르며 병든 어머니를 보살폈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Bourgeois)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억으로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튜디오를 환기시키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던 작가의 습관을 떠올리면 작가에게 유칼립투스는 실질적인 면에서 혹은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억을 자극하여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내는 매개체이자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은유'로 작동합니다.

 

 

 

 

 

 

 

The Smell of Eucalyptus /KuKje Gallery

 

 

 

 

 

다양한 질감의 종이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동판화 (에칭)로 찍어낸 그림은 나뭇잎이나 씨앗, 꽃이나 식물 줄기를  연상시킵니다. 때로 여성의 가슴이나 음부를 떠올릴 수 있고요. 여러 겹 섬세하게 덧대어 그어진 선은 대상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유연합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아흔이 넘어 작업한 판화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폭력이 아닌 은유적인 시정과 치유의 기운이 넘실거렸습니다. 

 

 

 

외부와의 역학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노년에 접어들어 변해갑니다. 주요 모티브로 반복되는 씨앗과 낙엽, 꽃줄기 같은 자연의 일부, 똬리를 틀고 있는 혈관과 내부 장기처럼 자연과 유기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 유동적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도하고 시도하고... 그러다 갑자기 거기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자신의 작품 세계)이 그런 식으로 될지 몰랐어요.
그것은 미스터리랍니다. 
-루이스 부르주아-

 

 

 

 

The Maternal Man ,2008/Parkett Art

 

 

 

 

흔히들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내 작품을 어떤 '이즘'으로 묶는 것에 반대한다. 다만, 아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 '들을 위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

 

그는 그동안 드로잉에서부터 천 조각에 석판화를 찍는 작업, 수건으로 만든 조각 작품, 손바느질한 천 조각 등 장르와 재료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지만, 일관된 주제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릴 적 상처다. 

 

-신동아 매거지 ㄴ2010.08.01 통권 611호 (p512-523)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중-

 

 

비록 그녀는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죽는 순간까지 그를 용서하진 못했지만,.. 그 아픈 상처와 증오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결혼이 올바르고, 영원히 행복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 행복이... 자신에게도,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존재하길 꿈꿨다. 관계... 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란 관계가 완벽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길 바란, 그런 여자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어찌 보면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가족의... 아름답고 완벽한 가족에 대한 동경을 항상 마음에 품은 체 말이다.

 

 

 

Everyone should have the right to marry.

To make a commitment to love someone forever is a beautiful thing...

-Louise Bourgeois-

 

 

 

 

 

https://www.youtube.com/watch?v=noaDoY6fbJQ

 

 

 

 

 

 

<Insomnia Drawings>/a 1000mistakes-WordPress.com

 

 

 

여러 학교에서 판화, 조각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병행한 작가입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살롱문화를 만들어 예술가와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 부르주아(Bourgeois)로부터  무자비한 비평을 듣는 <피의 일요일>이란 살롱문화도 만들었습니다.

 

 

 

 

70세가 되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개최) 미술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그녀는 9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새로운 기법과 시도로 누구보다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녀에게 예술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처하며 깨끗한 정신을 지켜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으며 7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시도하길 멈추지 않은 작가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상처와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마침내 부드럽고 고요한 '치유'의 세상을 빚어낸 사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했고 그로써 자신과 화해하는 평온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유칼립투스의 온화한 선을 그리기까지, 자신의 기억과 내면을 온전히 바라보기까지 그녀가 거쳤을 불면의 얼마나 길고 깊었을까 거기 침몰되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작업에 몰두했을 그녀를 상상하면 우리 모두의  현실적 고통과 불안이  옅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을 것 같고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자신만의 작품으로 진실되게 관객과 소통해 온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1911-2010). 그녀의 손이 유난히 위대해 보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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